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하나님께 경배하고 섬기며 사명 감당 합시다 (마 4:10)

첨부 1


하나님께 경배하고 섬기며 사명 감당 합시다 (마 4:10)


(마 4:10)이에 예수께서 말씀하시되 사탄아 물러가라 기록되었으되 주 너의 하나님께 경배하고 다만 그를 섬기라 하였느니라

노년에 기독교인이 된 어떤 유복한 여인이 손녀와 함께 도심의 거리를 걷고 있었습니다. 그 때 한 거지가 그들에게 다가와 엄살을 떨며 도움을 청하였습니다. 그러자 그녀는 아무 말 없이 지갑에서 1 프랑을 꺼내어 거지의 손에 쥐어 주었습니다. 그 다음 구획에서는 구세군의 모금원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이번에도 그녀는 지나치지 않고 10 프랑짜리 지폐를 꺼내어 모금함에 넣었습니다. 

할머니의 행동을 유심히 지켜보던 손녀가 말했습니다. "할머니, 할머니가 기독교인이 되신 후 잃어버린 게 꽤 될 거예요. 그렇죠?" 그러자 할머니는 손녀를 바라보고 빙그레 웃으며 말했습니다. "암 꽤 많은 것을 잃어 버렸지 조급한 성격이라든가 남을 헐뜯는 버릇 아무 의미도 없는 오락이라든가 사회활동에 시간을 허비하는 생활태도 등이 내게서 없어졌으니까. 그것뿐인 줄 아니? 탐욕스럽고 이기적인 마음까지도 내게서 사라져 버렸으니 참 많이 잃어버린 셈이지." 
  
기독교인이 된다는 것은 이처럼 많은 것들이 사라지고, 또 잃어버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들어서면서 기존의 것들을 밀어내기 때문입니다. 제거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자연스럽게 새로운 신앙의 질서가 자리 잡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새로운 질서가 잡히는 데 있어서 어쩌면 가장 유의할 것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한 마디로 하나님과 세상을 동시에 섬기는 바로 혼합주의( syncretism )입니다.

이것은 기독교인으로 하여금 자신이 누구이며, 어떻게 하나님을 섬기고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정체성의 혼란을 빚게 만드는 요소입니다.
북 이스라엘 왕국을 다스렸던 오므리는 사마리아 성으로의 천도와 더불어 북 이스라엘 왕국을 탄탄한 기초 위에 올려놓은 유능한 왕으로 일반적 평가되는 사람입니다. 그는 왕권의 강화와 왕국의 존속을 위해 활발한 외교적 교류를 가졌고, 문화적인 개방을 통해 주변 국가들의 여러 종교들과 쉽게 접촉할 수 있는 기회를 얻었습니다. 더 나아가 이스라엘 왕실과 주변 국가 왕실들과의 정략 결혼을 통해 하나님을 섬기는 여호와 신앙에 새로운 혼합주의적 요소를 가미하였습니다. 

오므리 왕조는 배타적인 여호와 신앙을 고집하는 것이 왕국의 이익에 부합하지 않으며, 자신들이 선택한 국제교류의 흐름에 뒤떨어진 방법이라고 판단하였습니다. 물론 오므리 왕조가 강제적으로 여호와 신앙과 바알 종교의 완전한 결합을 추구하지는 않았지만, 그들에 의해 다신교적인 병렬현상인 혼합주의가 사회 전반에 만연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이러한 진행과정에서 심각한 저항운동이 일어났는데, 대표적인 경우가 선지자 엘리야였습니다. 그는 왕실 주도의 외교를 통한 종교 혼합주의에 맞서 싸웠으며, 하나님께서는 이들의 혼합주의적 신앙에 대해 ‘3년 반 동안의 가뭄’이라는 자연 재앙을 통해 회개하고 돌아오기를 바라셨습니다. 이렇게 형성되어 굳어진 혼합주의적 작태를  증거하고 있습니다. 

(왕하 17:33)이와 같이 그들이 여호와도 경외하고 또한 어디서부터 옮겨왔든지 그 민족의 풍속대로 자기의 신들도 섬겼더라

하나님께서는 사랑하는 피조세계에 3년 6개월이라는 긴 시간 동안 비와 이슬까지도 끊으시면서 까지 세상과 적당히 타협하고 부패한 편안함에 길들여진 혼합주의와 속물주의적 믿음을 청산하기를 원하셨습니다. 

혼합주의는 나와 너가 구분되지 않는 모호한 실체이기 때문입니다. 외부의 적이 아니라, 내부에서 자라고, 키워가는 적입니다. 
   
우리의 신앙 생활에도 때로는 십자가 없는 영광인 혼합주의의 유혹을 받을 수 있습니다. 또한 우리에게 목적만 성취하면 되지 수단이 중요하지 않다고 유혹합니다. 목적이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것이라면 그것을 이루는 수단도 하나님의 방법이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어떻게 해서든지 성공만 하면 된다는 의식이 팽배합니다. 그래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성공 하려고 합니다. 이러한 사회적 의식에 만연합니다. 
예수님의 길, 그 십자가의 진리가 크리스천의 삶의 핵심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너무나도 무미해 보이고, 멋없어 보이는 그 십자가의 진리에 자꾸 나름대로의 덧칠을 합니다. 인공적인 맛을 가미합니다. 그래서 우리의 신앙은 점점 변질되어 가고, 급기야 타락해 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신앙의 순수를 위협하는 심각한 혼합주의입니다. 예수님은 이 혼합주의를 향해 단호하게 거절하십니다. 예수님은 아무리 좋은 것을 주고 아무리 편하게 해 줄지라도, 혼합 주의와 타협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마귀의 방법이 아니라 하나님의 방법으로 하나님의 뜻을 이루시고자 하셨습니다.

종교개혁자 마르틴 루터 평소에 기도를 많이 했다고 합니다. 그 가운데 특히 아침에 일찍 일어나서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소서"라고 기도하며 하루를 시작했다고 합니다. 그것은 아무리 위대한 성자라도, 위대한 종교 개혁자라도, 반드시 시험에 들 수 있기 때문입니다.

태초부터 마귀는 인류의 조상 아담과 하와를 시험했습니다. 그 시험에 아담과 하와는 실패하여 모든 인간에게 죽음과 저주가 들어왔습니다.
그런데 그 마귀는 다시 예수님께 찾아와서 시험했습니다. 사단은 예수님을 시험하는데 이 혼합 주의를 내세웠습니다.

(마 4:3)시험하는 자가 예수께 나아와서 이르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명하여 이 돌들로 떡덩이가 되게 하라

사람은 먹어야 삽니다. 그러므로 먹는 것은 가장 절박한 본능입니다. 우리의 육신이 살기 위해서 떡을 먹습니다. 그러나 결국 떡이라고 하는 것은 땅에서 나온 것입니다. 땅에서 나온 떡을 먹어서 소화를 시키므로 우리는 살고 있습니다. 그런데 마귀는 배가 고프신 주님에게 돌돌로 떡 덩이가 되게 하라고 시험합니다. 

이러한 마귀의 시험을 에수님은 이렇게 극복합니다.  

(마 4:4)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기록되었으되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 하였느니라 하시니

인간은 창조될 때 물론 흙으로 빚어서 만들었지만 하나님의 생기를 받으므로 인간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우리 인간은 땅과 하늘이 겸비되어 살도록 창조된 존재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땅에서 나온 양식을 먹어야 할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또한 먹어야 합니다. 그러기에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라고 합니다. 

이 말씀은 떡에 영적인 생명이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살기 위해서 떡을 먹지만 떡 속에 영적인 생명이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사람이 살려고 떡을 먹으나 떡이 영을 살리는 것은 아닙니다. 떡을 먹고 사람들은 영적으로 다 죽었습니다. 사람이 살기 위해서 떡을 먹지만 그 떡을 먹고 영원히 산 사람은 없습니다. 모두 떡을 먹고 죽었습니다. 오래 살기 위해서 보약을 먹지만 보약 먹고 다 죽었습니다. 결국은 사는 것이 입으로 들어간 떡에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김진홍 목사님이 청계천 골목에서 빈민선교 할 때 일이었습니다. 폐결핵으로 죽어가는 남자를 불쌍히 여겨 약을 구해주고 날마다 먹을 것을 갖다 주어 겨우 살려 놓았습니다. 그런데 성탄절 예배를 드리는데 한 여인이 밖에서 떠들기에 나가 보았더니 김진홍 목사 나오라고 소리치더랍니다. 그러면서 "당신이 우리 남편 죽였소. 내 남편이 어젯밤 당신 때문에 얼어 죽었다"고 하면서 엉엉 울더랍니다.

왜 그러느냐고 했더니 남편이 병들어 있을 때는 집안에 누워라도 있었는데 병 낫고 건강해지니까 날마다 술 마시고 돌아다니다가 얼어 죽었다는 것입니다. 그때 김목사님은 사람부터 살려내보자고 말씀은 전하지 않고 음식과 약만 가져다 준 결과를 후회했습니다. 

성경 중에서 떡으로만 살려고 했던 대표적인 사람이 에서입니다. 에서는 사냥하고 돌아와 몹시 시장하여 견딜 수 없었습니다. "야곱에게 이르되 내가 시장하니 그 붉은 죽을 먹게 하라 내가 죽게 되었으니 장자의 명분이 내게 무엇이 유익하리요"(창 26:32) 에서는 시장한 것을 죽게 되었다고 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 말씀으로 살지 아니하고 떡으로만 살려고 하는 자의 인생관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아담에게 "동산 각종나무의 실과는 네가 임으로 먹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창 2:16-17)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아담에게 먹고 살 수 있는 양식을 충분히 주셨습니다. 그런데 떡으로만 살려고 했습니다. 아담과 하와가 에덴 동산의 모든 과일을 다 임의로 먹고 넉넉히 살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어기면서까지 선악과를 따 먹은 것은 인간의 탐욕 때문이었습니다. 결국은 하나님 말씀대로 그 영혼이 사망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으로 살아야 합니다. 말씀에 생명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친히 자신을 말씀이요, 떡이라고 했습니다.

(요 6:48-51)내가 곧 생명의 떡이니라 너희 조상들은 광야에서 만나를 먹었어도 죽었거니와 이는 하늘에서 내려오는 떡이니 사람으로 하여금 먹고 죽지 아니하게 하는 것이니라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떡이니 사람이 이 떡을 먹으면 영생하리라 내가 줄 떡은 곧 세상의 생명을 위한 내 살이니라 하시니라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사는 하나님의 자녀들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일용할 양식은 떡이 아니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일차 실패한 마귀는 더 간교한 방법으로 예수님을 한 단계 높은 시험을 합니다.

(마 4:5-6)이에 마귀가 예수를 거룩한 성으로 데려다가 성전 꼭대기에 세우고 이르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뛰어내리라 기록되었으되 그가 너를 위하여 그의 사자들을 명하시리니 그들이 손으로 너를 받들어 발이 돌에 부딪치지 않게 하리로다 하였느니라

이러한 마귀의 시험을 예수님은 단호히 말씀으로 물리치셨습니다.

(마 4:7)예수께서 이르시되 또 기록되었으되 주 너의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라 하였느니라 하시니

이 말씀은  너희가 맛사에서 시험한 것 같이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를 시험하지 말고(신 6:16)하신 말씀을 인용한 것으로 이해 합니다.

유명한 선교사 허버트라는 분이 있습니다. 6·25동란 때 북한 인민군에게 끌려가서 감옥에 갇혔습니다. 그때 하루는 그를 괴롭히는 인민군 간수가 한 손에는 성경을 들고 한 손에는 권총을 들고 감방으로 뛰어 들어와서 "뒤로 돌아" 하고 외쳤습니다. 그때 선교사는 뒤로 돌아섰습니다. "네가 예수를 믿는단 말이지 그래, 네가 진짜 예수를 믿는다면 내 말에 대답하라 내가 지금 손에 권총과 성경을 들었는데 어떤 손에 성경을 들었는지 기도해서 맞추어 봐 그러면 네가 진실로 하나님의 사람인 것을 내가 믿어주마" 그때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하나님께 두 가지를 기도했소. 첫째로 내 마음이 분노로 흔들리지 않게 해 주십시오. 둘째는 당당히 죽을 수 있는 힘을 주십시오. 이렇게 기도했소." 할 때 그 간수가 허버트 선교사를 발로 차고 나가버렸다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의심하는 것이 시험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 헛되게 사용하는 것이 시험입니다. 정상적인 방법을 떠나서 하나님의 말씀을 활용하는 것이 시험입니다. 말씀 믿고 말씀대로 경배 하며 섬겨야 합니다.

사단은 두 번이나 실패했습니다. 그래서 이제는 예수님께 협상할 것을 제의합니다.

(마 4:8-9)마귀가 또 그를 데리고 지극히 높은 산으로 가서 천하 만국과 그 영광을 보여 이르되 만일 내게 엎드려 경배하면 이 모든 것을 네게 주리라
  
한 번 절만 하면 천하만국의 권세를 네게 주겠으니 그것으로 영광을 누릴 수 있지 않겠느냐는 제안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어찌했습니까? "사단아 물러가라"(10)합니다.
그런데 교회 안에도 두 종류의 사단이 있다합니다. 하나는 가룟 유다적 사단이요, 또 하나는 베드로적 사단이라 합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의 수제자입니다. 믿음이 좋았습니다. 예수님 사랑도 받았습니다. 그런데 잠깐 실수로 사단이라는 책망을 들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실 일을 말씀하셨을 때에 베드로가 한 마디 "주여 그리 마옵소서"했다가 책망을 들었습니다.

(마 16:23)예수께서 돌이키시며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사탄아 내 뒤로 물러 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 하시고

우리 모두가 여기에서 배워야합니다. 사단의 정체가 무엇이냐는 것입니다. 물론 사단은 영물입니다. 그래서 경우에 따라서는 이마에 뿔을 붙일 수 있고 이빨은 드라큘라처럼 날카로울 수 있고 손톱이 길 수 있습니다.

(벧전 5:8)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 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 합니다.

그러나 사단은 꾀가 많고 영리합니다. 사단은 지성인보다 더 지성인입니다. 사단이 항상 이러한 흉측한 모습으로 우리 앞에 나타난다면 우리는 시험 당할 이유가 없습니다. 무서워서 도망할 것 아닙니까. 이것을 안 사단인지라 이 모양으로 나타나지를 아니합니다.

그러면 어떠한 모습으로 우리에게 접근합니까?

(고후 11:14) 이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니라 사탄도 자기를 광명의 천사로 가장하나니 

그래서 베드로처럼 접근한다는 말입니다.
베드로는 늠름하고 잘생기고 남성적입니다. 그리고 그의 말씨는 부드럽습니다. "주여 그리 마옵소서" 얼마나 점잖은 말로 예수님께 나아갔습니까.
그런데 예수님은 "사단아 물러가라" 베드로를 물리친 것입니다.
가룟 유다의 경우도 겟세마네 동산에 예수님을 잡으러 왔을 때에 여러 사람 앞에서 정말로 예수님을 사랑한 것처럼 "랍비여 안녕하세요" 그리고는 입을 맞추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분별할 수 있는 능력이 있어야합니다. 때문에 기도해야 합니다. 말씀공부를 열심히 해야 합니다.
또 사단의 주제가 무엇인가요? 사단이 항상 생각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일입니까? 사람의 일을 생각합니까?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지 아니하고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 

어떻게 베드로가 사단이 되었습니까? 사람의 일을 생각하다가 사단이 되었습니다.
우리 모두는 자칫 잘못하면 이리될 수 있겠구나 이것을 배워야합니다.
예수님의 수제자 베드로가 사단이 되었다면 베드로 믿음만큼 못한 나도 사단이 될 수도 있겠구나를 배워야합니다.

왜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셨습니까?  십자가 지실려고 오셨습니다.
왜 십자가를 져야만 했습니까?  죄의 삯은 사망인 죄인들을 구원하시기 위해서입니다. 그런데 베드로가 어찌했습니까. 그 십자가 지는 일을 포기하라고 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다가 책망을 들은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수제자 베드로를 사단이라고 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그렇습니다.
사단의 목적은 예수님을 넘어지게 하는 일입니다. 만일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지 아니하셨더라면 어찌되었겠습니까? 우리의 죄는 어찌되며 우리의 구원은 어디에서 받아야 합니까.

또 예수님이 넘어지면 기독교는 무너질 것 아닙니까. 그리고 십자가 없이 어찌 부활이 있다는 말입니까.
우리의 찬송이 무엇입니까? 십자가 십자가 무한 영광일세.. 그런데 그 일을 하지 마소서. 이렇게 말함으로 예수님을 넘어지게 했다는 말입니다.
왜 사단이 예수님을 시험했을까요?  예수님을 넘어뜨리기 위해서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넘어뜨려야 천만인 성도가 넘어지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교회에서 사단의 일을 막아야합니다. 그리고 행여라도 내 자신이 사단 노릇을 하지 말아야합니다.
사단의 일이 무엇입니까? 예수님을 넘어뜨리는 모든 일입니다. 예수님을 넘어뜨리는 모든 일이 사단의 일입니다.
왜 사단이 예수님을 시험하려했습니까? 예수님은 오직 하나님 중심 이었습니다. 그런데 사단은 "하나님 중심하지 말고 잠깐만 사람 중심 하라고 하면서 돌이 떡이 되게 하고 뛰어내리고  절만 한번 하면  소원하는 모든 것을 주겠다고 시험을 한 것입니다. 우리 모두는 이러한 류의 시험을 이겨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모두는 교회에서 전적으로 "오직 예수" 중심해야 합니다. 사람 중심하지 말고 하나님 중심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일을 생각지 아니하고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 모든 일이 사단의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암송하는 것으로 끝날 수 없습니다. 의인된 우리 모두가 "사단아 물러가라" 외쳐야 합니다. 

왜 사단아 물러가라고 해야 합니까? 사단이 가져다주는 모든 것은 일시적이고 속임수이기 때문입니다. 사단이 하는 일은 항상 모조품이요 그림자, 불의, 거짓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권세를 싫어할 사람 없습니다. 권세가 있으면 사람들이 굽실 굽실하기 때문이요 또 돈과 향락이 생기기 때문입니다. 누가 천하를 호령할 수 있는 권세를 싫어하며 누가 부귀영화를 팽개칠 사람이 있습니까. 그러나 하나님의 백성이 어찌 마귀에게 무릎을 꿇을 수가 있겠습니까?.
하나님께서 보고 계시는데 어찌 불의와 타협하고 우상에게 절할 수 있다는 말입니까? 그러므로 우리 모두 주님과 함께 "사단아 물러가라" 외쳐야 합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주 너희 하나님께 경배하고 다만 그를 섬기라"합니다. 우리가 경배해야 될 대상은 하나님 뿐입니다. 하나님이 인간을 입으시고 오신 분이 주 예수 그리스도십니다. 그러므로 주님만 경배해야 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오직 예수 외에 천하인간에게 구원을 얻을만한 이름을 주신 일이 없기 때문입니다.

(행 4:12)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받을 수 없나니 천하 사람 중에 구원을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라 하였더라
  
예수 믿는 사람들은 재물만 따라가서는 망합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은 예수님만 따라가야 합니다.
예수님만 따라가면 예수님이 내게 있어야 될 것 아시고 채워주십니다. 그리고 예수 믿는 사람들은 예수님만 따라가야 할 이유는 사나 죽으나 주의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예수님만 따라가야 할 이유는 땅의 기록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하늘의 기록이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경배하고 섬겨야 합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에게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입니까?  
십계명의 첫 번째 계명이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너는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두지 말라”(출 20:3)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는 것이 있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십계명의 두 번째는…우상을 만들지 말고…그것들에게 절하지 말며 그것들을 섬기지 말라 …(출 20:4-5)입니다.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는 것을 만들지 말고, 그것들에게 절하지 말라, 그런 것들 앞에 무릎 꿇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들을 섬기지 말라”고 했습니다.
‘섬기지 말라’는 말은 예배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우상 앞에 예배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하나님께만 예배하는 것이 신앙생활에서 가장 중요한 것입니다.
 
다니엘 3장에 나오는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가 풀무 불에 던져진 이유가 무엇입니까? 느브갓네살 왕이 금으로 신상을 만들어 사람들이 그 신상에게 절하게 했습니다. 그러나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는 하나님만 섬기며 살기로 결심한 사람들이기 때문에 금 신상에 절하지 않았습니다. 

왜, 그렇게 많은 기독교인들이 박해를 받으며 지하 굴속에서 살다가 죽어갔습니까?  왜, 붙잡혀 목이 잘려 죽어갔습니까? 왜, 짐승의 밥이 되었습니까? 하나님께만 예배하기 위해서 … 그들은 예배가 그처럼 중요하기 때문에 목숨을 걸고 신앙생활 했던 것입니다. 

예배는 하나님이 명하신 기본 의무입니다. 우리는 생명 걸고 예배에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가인은 하나님 마음에 합당치 못한 예배로, 아벨은 하나님 마음에 드는 예배로 인생이 달라졌습니다. 두 사람의 운명 뿐 아니라 그 후손들의 운명도 달라졌습니다.

(창 4:3-5)... 가인은 땅의 소산으로 제물을 삼아 여호와께 드렸고 아벨은 자기도 양과 그 기름으로 드렸더니 여호와께서 아벨과 그의 제물은 받으셨으나 가인과 그의 제물은 받지 아니하신지라 가인이 몹시 분하여 안색이 변하니

하나님은 예배하는 자를 찾으십니다.

(요 4:23-24) 아버지께 참되게 예배하는 자들은 영과 진리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아버지께서는 자기에게 이렇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영과 진리로 예배할지니라

예배를 위해 모이는데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날마다 마음을 같이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 (행 2:46-47)

‘날마다’ 마음을 같이하여 모이는 그 때는 예배하는 자를 박해하던 때입니다. 그런데도 모이기에 힘썼습니다.

우리는 고넬료 가정처럼 온 식구가 한 마음으로 신앙생활 하기 위해 기도하고 노력해야 합니다.
"예배"는 인격적으로 하나님과의 만남을 갖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올 수 있는 환경에 있다면 모두 예배의 자리에 모여 함께 예배 드려야 합니다. 

누가복음 4장 16절에 보면 예수님 당시에 하나님 말씀을 읽고 듣는 회당에 예수님도 참석하셨습니다. “… 안식일에 늘 하시던 대로 회당에 들어가사 성경을 읽으려고 서시매 … ”(눅 4:16 )

그렇다면 오늘 이 시대에 사는 우리가 예배의 자리에 참석하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드리는 예배를 방해하고 막는 것이 누구입니까? 예배드릴 수 없게 하는 것이 누구입니까? 사탄입니다. 사탄은 지금도 우리가 예배드릴 수 없게 방해합니다. 하나님께 꿇을 무릎을 세상/권세/명예/돈/즐거움 … 에 꿇게 합니다.

사탄은 세상 권세, 경제적인 부유함, 건강, 명성, 호화로움, 화려함, 세상적인 재미, 세상적인 영광 … 등을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게 합니다. 그래서 결국 세상에 무릎 꿇게 하고 세상을 예배하게 합니다.

사단이 우리를 시험합니다. 방법이 많습니다. 그러나 어떠한 시험이라도 믿음으로 기도로 말씀으로 이기며 사단아 물러가라 외치며 하나님만 경배하며 섬기며 사명 감당하는 모두가 되어야 할 줄 믿습니다.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