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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죽는(순교하는) 믿음 (행 7:54-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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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는(순교하는) 믿음 (행 7:54-60)
  

우리는 거듭난 자가 되어 크리스챤으로 살아갈 때 믿음이 성장해 가야 한다. 성경에서는 아이의 믿음, 청년의 믿음, 아비의 믿음을 말하고 있는데 성장하지 않는다면 죽은 믿음이다. 산 믿음은 성장한다. 그 동안 보는 믿음, 듣는 믿음, 고백하는 믿음, 행동하는 믿음을 설교하였다. 믿음의 최고봉은 무엇일까? 그것은 예수님을 위해 살고 예수님을 위해 죽는 순교의 믿음이다. 

「신앙의 단계」라는 책을 쓴 J. Fowler(제임스 파울러)는 신앙의 단계를 6단계로 구분하고 1단계인 직진적-투시적 신앙에서 마지막 단계의 신앙을 보편화된 신앙이라 하였다. 보편화된 신앙은 다른 말로 모든 사람들과 기꺼이 관계를 맺으려고 하며 아무런 가식이 없이 어떤 개인보다, 집단보다 신에게 권위의 근거를 둔다. 그래서 실재적으로 존재하는 신을 위해 죽을 수 있는 신앙, 사랑을 위해 모든 것을 포용하고 순교하는 신앙을 뜻한다. 이와 같이 성경에서도 순교는 최고의 믿음이며 최고의 사랑이며 최고의 희생이다.   

오늘 믿음의 최고봉을 보여주는 사람이 스데반 집사이다. 교회가 시작된 이래 최초의 순교자로 기억되는 스데반은 순교하므로써 죽은 것이 아니고 잠자는 자가 되었다. 순교하는 믿음은 죽는 것이나 죽은 것이 아니고 잠자는 것이다. 그것은 저주가 아니고 축복이다. 구체적으로 왜 축복인가?

① 죽는 것이 많은 열매를 맺기 때문이다.

요12:24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② 죽는 것이 최고의 사랑이기 때문이다.

아8:6 “사랑은 죽음 같이 강하고...”라고 하였다. 아8:7 “많은 물도 이 사랑을 끄지 못하겠고 홍수라도 삼키지 못하나니 사람이 그의 온 가산을 다 주고 사랑과 바꾸려 할지라도 오히려 멸시를 받으리라.”

③ 죽는 것은 아무나 죽을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예수 위해 죽는 것은 특별한 특권이다. 아니 최소한 죽는 믿음에 이르는 자는 이렇게 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행7:55)
  

1. 성령 충만해야 된다. (행7:55上)

예수를 위해 죽는 것과 사는 것도 내 맘대로 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허락이 있어야 하며 성령의 도움으로 순교가 이루어지게 된다. 

행7:55上을 보라. 스데반의 설교를 듣고 이를 갈고 있는 사람들 앞에서 스데반이 성령 충만하여 하늘을 우러러 주목하였다고 하였다. 스데반의 순교의 시작은 성령 충만으로 되어진 것이다. 성령 충만은 무엇인가? 성령의 지배를 받는 것이다. 성령의 간섭과 도우시는 힘을 받은 것이다. 그래서 성령 충만은 모든 것을 잊어버리고 사랑으로 충만하게 되는 상태다. 믿음과 소망으로 충만하게 되는 상태다. 믿음이 충만하고 소명과 사랑이 충만하면 부족함이 없다. 두려움이 없다. 땅엣 것 때문에 미련을 둘 필요가 없다. 굳센 믿음, 굳센 소망, 굳센 사랑은 모든 것을 견딘다. 모든 것을 이긴다. 모든 것을 관용한다. 모든 것으로부터 매일 것이 없다. 성령 충만의 상태가 되면 순교의 믿음에 서게 된다.  

2. 하나님의 영광을 보아야 한다. (행7:55中)

행7:55中 “하늘을 우러러 주목하여” 무엇을 보는가? 하나님의 영광을 본 것이다. 하나님의 영광은 그 분의 현존과 임재를 뜻하는 것이다. 본래 인간은 하나님의 영광을 나누도록 창조되었다. 하지만 인간이 죄로 인해 그 영광의 광채를 빼앗겼다. 그런데 스데반은 그 영광을 보고 있다. 그의 눈이 열린 것이다. 보지 못하는 하나님의 영광을 똑똑하게 보는 것이다. 장차 미래에 받게 될 영광을 보니 얼마나 찬란하고 멋질 것인가? 

롬8:18을 보라. “생각하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비교할 수 없도다.” 우리가 받은 영광이 얼마나 큰 것인지 고난은 문제가 될 수 없다는 것이다. 손해를 보고 돌에 맞고 옷을 빼앗기고 예수를 위해 살다가 배반을 당하고 매장을 당하고 우겨쌈을 당해도 장래 영광과 비교하면 아무 것도 아니라는 것이다. 그런데 스데반이 지금 그 핍박의 자리에서 영광을 보고 있다. 장래 보게 될 영광의 광채를 지금 보고 있다. 그러므로 견딘다. 사람들이 소리를 지르고 달려들어도 견딘다. 성 밖으로 들어다 내던져도 견딘다. 아니 견디는 것이 아니라 영광에 둘러싸여 있을 뿐이다. 돌로 치는 그 순간도 견디고 옷을 벗겨 내던지고 수치스러운 알몸이 되었어도 견딘다. 하나님의 영광을 보고 있기 때문이다.

3. 예수님이 서 계심을 보아야 한다. (행7:55下)

행7:55下 “예수께서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고” 스데반은 보았다.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가 부활하여 승천하시고 하나님 우편에 서 계신 것을 보았다. 

주님을 본다는 것! 나를 위해, 나를 사랑하사 자기 몸을 버리신 예수를 본다는 것! 스데반은 너무도 똑똑히 보았기에 입을 열어 외쳤다. 행7:56 “보라 하늘이 열리고 인자가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노라.” 영광 가운데 서 계신 예수,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 서 계신 예수, 예수가 하늘 보좌에 계신다. 내가 예수님을 본다. 전도의 현장에서 본다. 돌에 맞는 현장에서 본다. 얼마나 또렷하고 분명한 목격담인가? 누구나 예수님을 보는 자는 예수의 사람이 되고 만다.

나는 목회를 하면서 예수를 보지 못했다. 하늘이 열리고 거기 서 계신 예수를 본 적이 없다. 다만 지하실에서 기도하다가 빈 의자에 누군가 앉아 있는 것 같은 체험! 그래서 그 분에게 나를 기울이며 속삭이다가 정신 차림 체험! 희고 환한 형광빛 옷자락을 본 체험! 천사인지, 환상인지 아니면 이상한 현상인지 분간이 안되는 그 체험으로 인해 주님의 함께 하심, 임재하심을 의식하게 되었다. 그런데 예수님이 서 계심을 보게 된다면 무엇에 사로잡힐까? 달려드는 사람에게 사로잡히지 않는다. 주님을 본다면 두려워하지 않게 될 것이다. 주님을 본다면 살고 죽는 것을 초월할 수 있지 않겠는가? 그러므로 예수를 위해 죽는다는 것은 축복이다. 신령하고 거룩하고 하늘로부터 내리는 은혜다.   

순교하는 믿음을 지닌다는 것은 그 만큼 신령한 세계를 본 것이 있다는 뜻이다. 남이 모르는 섭리와 비밀을 가진 축복이다. 죽는다는 것, 예수님을 위해 죽는다는 것은 최고의 신앙이기에 복이다. 스데반의 죽는 모습을 보라. 최고의 신앙이다. 부러운 신앙이다.  

첫째, 기도하며 순교한다.
행7:59 “돌로 스데반을 치니 스데반이 부르짖어 이르되 주 예수여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 죽는 자리에서 기도가 터져 나왔다.  

둘째, 평온 속에서 순교한다.
“내 영혼을 받으소서!” 안식에 대한 위임이다. 마치 주님이 눅23:46에서 “큰 소리로 불러 이르시되 아버지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라고 한 것처럼 맡겨드린다. 놀라운 평온이다.  

셋째, 용서하며 순교한다.
행7:60 “주여 이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바다 같이 넓은 용서다. 때리고 욕하고 능욕하는 자들에 대한 용서다.   

결국 순교하는 스데반의 믿음은 예수님을 닮았다. 예수님의 가상 칠언(架上 七言)의 기도 중 두 마디의 기도를 똑같이 토설하였다. 스데반은 작은 예수가 되었다. 예수의 심장으로 생을 마쳤다. 죽음이 어떻게 이렇게 잠자리에 가는 것 같은가? 믿음 충만, 소망 충만이다. 그리고 사랑 충만이다. 자신을 죽음에 내던지는 폭도들에게 그 사람을 원망하거나 그 사람을 적대시 하지 않고 다 품고 용서하는 사랑의 원자탄이다. 완전한 사랑, 넘치는 사랑, 사랑의 화신이다.

오늘 이 아침, 우리는 이 최고의 믿음, 예수를 위해 살다가 죽을 수 있는 믿음을 갖게 해달라고, 이 복을 받게 해달라고 할 때 무작정 죽이는 나라로 가야 된다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삶과 죽음은 하나님의 손에 맡겨야 한다. 우리는 다만 생활 속에서 순교해야 한다. 순간 순간, 때마다 일마다 순교하는 믿음이 요구된다.

고후4:10 “우리가 항상 예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우리는 죽음을 짊어진 삶이다. 

갈2:20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오직 주님만이 내 안에서 산다. 

고후4:11 “우리 살아 있는 자가 항상 예수를 위하여 죽음에 넘겨짐은” 매순간, 매일 매일 우리는 자기를 제물로 넘기는 것이다. 내 안에 내가 살지 않고 예수가 산다.   

이제부터 우리는 공산당에게, 일제 시대에, 북한 땅에서 총과 함께 순교하는 것만이 순교라 생각하지 말자. 내게 주어진 삶 속에서 언제나 죽음을 짊어지고 살면 된다. 고전15:31 “나의 자랑을 두고 단언하노니 나는 날마다 죽노라.” 는 바울의 외침처럼 날마다 자신을 쳐 복종하여 죽는 자가 된다면 그것이 순교하는 믿음이 아니겠는가? 

오늘도 내일도 내 욕심대로, 내 혈기대로 하고 싶은 모든 것, 인간적인 모든 욕망으로부터 죽은 자가 되자. 우리 육체에 예수의 생명이 나타나게 하려면 죽어야 한다. 믿음의 최고봉인 순교하는 믿음에 나아간 스데반이 우리의 영웅이 된 것처럼 교회 안에 진정한 영웅은 집사도, 목사도 아니고 장로도 아니다. 스데반이 죽는 것을 보고 있는 구경꾼들도 아니고 바울이 된 사울도 아니다. 이 시대 크리스챤의 진정한 영웅은 자아를 못 박아 버리고 나는 죽고 예수를 나타내는 자이다. 

날마다 때마다 일마다 순간마다 죽는 자가 되면 예수가 나타난다. 스데반의 죽음이 바울을 움직였다. 예루살렘 교회가 아닌 스데반의 죽음에 넘겨지는 삶이 바울을 탄생시켰다. 순교하는 믿음, 예수를 위해 죽는 믿음이 잠자는 것 같은 평안으로 부활의 예수, 산 예수를 나타내 보여야 한다. 

금주도 당신은 예수를 보여주려 죽는 자가 될 수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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