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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네 소원대로 되리라 (마 15:2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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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소원대로 되리라 (마 15:21-28)
 

사람들은 남녀 노소 할 것 없이, 모두 다 크고 작은 소원이 있기 마련입니다. 백발이 성성한 할머니에게도 소원은 있어서, 손자 녀석이 공부를 잘 해주었으면 하고 바라기도 하고, 어떤 할머니는 기독교식의 경건한 장례식을 보고, 나도 죽었을 때 저렇게 해주었으면 하고 소원하기도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사람들은 누구나 죽는 순간까지 저마다 크고 작은 소원을 갖고 살아갑니다.

옛날 이야기로 ‘독장사의 구구’ 라는 것이 있습니다. 어떤 독장사가 큰 독을 지고 먼 시장을 향하여 가다가 해가 지고, 여관에 들어가서 잘만한 형편도 못되고, 그래서 밤이면 독안에 들어가 잠을 자곤 하였습니다. 독안에서 장래에 돈을 벌어 가지고 잘 살 방침을, 이리 저리 생각해 보았습니다. 이 독을 지고 옹기점이 먼 곳에 가서 팔면 적어도 두 세냥은 남을 꺼야. 그 두 세냥을 가지고 암탉을 네 다섯 마리 사다가 한 배 두 배 새끼를 치면, 닭으로도 팔고, 알도 팔아 수십냥 만들 수 있을 꺼야. 그것을 가지고 또 돼지를 산단 말이야. 소를 먹이면서부터는 논농사를 해. 다음에는 밭을 사고, 집도 잘 지어야지. 

그 다음에는 장가를 가서 색시를 얻어, 아들 딸도 낳아야지. 아들은 공부를 잘 시켜가지고 서울로 과거를 보러 보내. 과거에 급제를 해서 홍패를 타 가지고 금의환향을 한다. 광대를 불러오고, 잔치를 하며, 삼현육각을 잡히고, 닐니리 얼씨구나 좋구나 하면서 춤을 들썩들썩 추었습니다. 그 춤바람에 독이 자빠져 뒹굴면서 꽝하고 깨어져 버렸습니다. 그래서 슬픔이여 안녕, 고생이여 안녕이 되지 못하고, 그만 꿈이여 안녕이 되고 말았습니다. 이것이 유명한 독장사의 구구 라는 이야기입니다.

이렇듯 비록 독장사의 꿈같은 것일지라도, 사람들은 누구나 저마다의 소원을 갖고 살아갑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일생을 통하여, 소원이 이루어지고 성취되기보다는, 실패와 절망과 좌절 속에서 살 때가 훨씬 더 많습니다. 세상 사람들의 소망이라는 것은, 마치 독장사의 공상처럼 허망한 것이 많으며, 설혹 무엇을 얻고 성취했다고 할지라도, 그것이 물거품처럼 스러지고, 수치스럽고 비참하게 끝나버리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나 시 119:116절을 보면, 다음과 같은 아름다운 기도가 있습니다. ‘주의 말씀대로 나를 붙들어 살게 하시고, 내 소망이 부끄럽지 말게 하소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저는 이 시간 여러분이 일생을 하나님께 붙잡히고, 하나님의 말씀에 붙잡혀, 살게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여러분이 픔고 있는 크고 작은 소원들이, 부끄럽게 되지 않기를 바랍니다. 

오늘 본문 28절 중에는 ‘네 소원대로 되리라’는 놀라운 말씀이 있는데, 이 시간 말씀을 통해서 성도 여러분들의 소원이 이루어지는 비결을 배울 수 있기를 바라고, 그래서 장차 여러분의 간절한 소원들이, 성취되는 복을 꼭 받게 되시기 바랍니다.

예수님께서 하루는 팔레스틴 지역을 벗어나, 두로와 시돈이라는 지방에 들어가시게 되었습니다. 이 지방은 아합왕때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바알 우상을 섬기도록 미혹했던, 악한 왕비 이세벨의 고향입니다. 이런 이방의 땅에 예수님께서 들어가셨을 때, 한 여인이 예수님 앞으로 나오게 되었습니다. 그녀는 비록 이방 여인이었지만, 팔레스틴과 이웃한 지역에서 살았기 때문에, 예수님에 대한 소문을 벌써 잘 듣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이 여인은 예수님의 모습을 발견하고, 큰 소리로 ‘주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내 딸이 흉악히 귀신들렸나이다’ 하면서, 딸의 병을 고쳐주시라는 간청을 드렸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큰 소리로 부르짖었는데도, 예수님은 그 소리를 듣지 못하시기나 한 것처럼, 아무런 대답 없이 침묵해 버리셨습니다. 이 여인은 그래도 몇 차례 계속해서 부르짖은 모양입니다. 그렇지만 예수님은 여전히 못들은체 하십니다. 그 때에 난처해진 제자들이 ‘선생님, 저 여자의 말을 들어주소서. 그래서 어서 돌아오게 하소서’ 하고 부탁을 드렸습니다. 제자들은 그 여자에 대한 동정심에서라기보다, 큰 소리로 부르짖으며 따라오니까, 귀찮은 생각에서 어서 빨리 돌려보내 버렸으면 하는 마음이었던 것입니다. 

이같은 제자들의 요청에, 예수님께서 비로소 입을 여시었습니다. 그리고 하시는 말씀이 ‘나는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외에는, 다른 데로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노라’고 하셨습니다. 한 마디로 예수님은 냉정하게 거절의 뜻을 표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이스라엘 민족 중에 있는 하나님의 택한 백성을 찾으러 오셨고, 다른 민족과는 관계가 없는 듯이 말씀하셨습니다. 참으로 냉정하게 들리는 말씀이었습니다.

그런데 이같은 냉대를 당하고서도, 이 여인은 물러설 줄을 모릅니다. 이번에는 예수님 앞으로 더 가까이 나와서 절을 하며 ‘주여, 저를 도우소서’ 하고 애원을 했습니다. 참으로 뿌리치기 어려운 간청이었습니다. 그쯤 하면 예수님으로부터 따뜻한 응답이 있을 법하였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대답은 어떠하였습니까?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치 아니하니라’ 침묵도, 냉대도, 무던히 참기 어려웠는데, 이제는 지독한 멸시와 모독까지 하였습니다. 사랑하는 자식이 먹고 있는 떡을 빼앗아서, 개에게 던져주는 부모가 어디 있겠느냐?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의 자녀라면, 너는 개와 같은 이방 여인이다. 그러니 너 따위에게는 아무런 은혜도 베풀어 줄 수가 없다는 말씀입니다. ‘개 같은 여자’ 라는 모욕이 어디 작은 모욕입니까? 이쯤 되었으면 이 여인의 인내도 한계에 달해서, 그만 분노가 폭발하고 말았을 법도 합니다. ‘아니 하나님의 아들이고, 뭐 인자한 분하고 어쩌고저쩌고 한다더니, 다 빈말이었구먼, 이렇게 인정머리 없는 사람이 뭐 하나님의 아들, 무슨 병을 고쳐? 못 고치겠으면 좋게 못 고치겠다고 할 일이지, 무엇 때문에 욕까지 하는 거야?’ 이렇게 퍼부었을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 여인은 물러설 줄을 모릅니다. 말상대도 안해 주고, 냉대를 하고, 모욕을 하고, 심지어 개라고 욕을 해도, 얼굴 빛 하나 변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하는 말이 ‘주여 옳소이다마는, 개들도 제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나이다’고 했습니다. 실로 믿음과 겸손과 인내와 기지의 미덕들이 조화된 대답이었습니다. 이 말씀을 들은 예수님은 즉석에서 ‘여자야 네 믿음이 크도다. 네 소원대로 되리라’ 하시니, 그 시로부터 귀신들린 그 여인의 딸이 깨끗이 낫게 되었습니다. 오늘 우리는 귀신들린 딸을 둔 이 가나안 여인, 길거리에서 소리를 지르는 이 보잘 것 없는 이방 여인, 수로보니게 여인의 태도에서, 많은 것을 배워야 합니다. 배울 것이 많습니다. 이 여인은

1. 사랑의 사람이었습니다.

이 가나안 여자는 자기 딸을 과연 사랑한 여인이었습니다. 어느 부모가 자기 자식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 있으리요만, 벵겔이라는 주석가의 말을 빌리면 ‘이 여인은 자기 딸의 고통을 자기 것으로 여겼다’고 했습니다. 이것이 참 사람이요, 진정한 사랑입니다. 왜 주님의 사랑이 참사랑입니까? 우리의 고통을 자신의 것으로, 우리의 질병을 자신의 아픔으로, 우리의 죄악을 자신의 것으로 여기시고, 우리 대신 십자가를 지셨기 때문에, 주님의 사랑이 참사랑인 것입니다.

남편의 고통을, 자기의 것으로 여기는 아내가 되시기 바랍니다. 아내의 아픔을, 자기의 것으로 여기는 남편이 되시기 바랍니다. 부모의 고독을, 자기의 것으로 여기는 자식이 되시기 바랍니다. 자식들의 고민을, 자기의 것으로 여기는 부모가 되시기 바랍니다. 이 여인이 예수님께 간구할 때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한 것을 보면, 딸의 불행을 바로 자신의 불행과 동일시하고 있었던 것을 알 수있습니다. 이 가나안 여자가 멸시와 천대와 모욕을 당하면서도, 끈질기게 주님을 불렀던 것은, 자기의 딸에 대한 사랑의 힘때문이었습니다. 그 사랑의 힘 때문에 용기가 생겼고, 그 사랑의 힘 때문에 담력이 생겼습니다. 이 여자의 마음을 온통 지배하고 있는 것은, 딸에 대한 사랑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렇게 자식을 사랑하는 부모가 있는 가 하면, 무정하고, 비정한 부모들도 얼마든지 있습니다. 자식의 고통을 자기의 고통으로 알아 밤을 새우면서, 울면 서 흐느끼면서, 혹은 금식하면서, 한 번도 기도해보지 않는 부모들도 있습니다. 어찌 자녀가 질병에 걸렸을 때뿐이겠습니까? 성도들은 믿지 않는 자녀들이 교만하고 더러우며, 흉악한 악령에 사로잡혀, 괴로움 당하고 있다는 사실을 직시할 줄 알아야 할 것입니다. 잘 먹이고, 잘 입히고, 가르치고 하는 것만으로 만족하지 말고, 믿지 않는 자녀들을 위해서, 이 여인처럼 간구하고, 이 여인처럼 예수 그리스도 앞으로 데리고 나와야 합니다. 이 여인처럼 믿지 않는 남편을, 믿지 않는 부모를 주님 앞으로 인도해야 할 것입니다. 

2. 겸손한 여인이었습니다.

본문을 읽어보게 되면, 이 여인은 참으로, 참으로 겸손한 사람인 것이 잘 나타나 있습니다. 제자들의 불친절과, 예수님의 냉대와 멸시에도 불구하고, 한 마디의 불평이나 원망이 없습니다. 심지어는 예수님이 개라고 모욕하시는데도 ‘주여 옳소이다’ 하면서, 그 말씀에 긍정을 했습니다. 성경에서 ‘개’ 라는 말은 언제나 불결, 비천, 비양심, 탐욕스런 것을 의미했습니다. 호오머는 수치를 모르는 남녀를 개라고 했습니다. 우리 나라에도 이러한 의미의 욕이 있는 것입니다. 

이 여인은 그러한 주님의 말씀에 얼마든지 불평할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 가나안 여인은 오히려 개로서 자족했습니다. 당연한 권리로서 예수님께 요구한 것이 아니라, ‘주여 옳소이다마는, 개들도 제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나이다’ 하면서, 부스러기라도 주어 먹으려는 겸손과, 부스러기라도 넉넉하다는 마음을 가졌습니다.

겸손은 신앙의 기본 정신입니다. 이것은 자기에게 의가 없다는 것보다, 한층 더 들어가서, 자기에게는 불의만이 가득하다는 주님의 판단에, 승복하는 태도입니다. 우리가 입술로는 말로는 부족하다, 죄인이다 하기가 쉽습니다. 그러나 남들에게서 정작 그러한 판단을 받을 때, 가만히 있을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런데 가나안 여자는 개와 같다는 판단에도 옳소이다 하고 승복했으니, 진정으로 겸손한 사람이었던 것입니다.

개똥벌레라도 밤에는 별처럼 반짝거리고 빛을 냅니다. 그러나 한 낮의 밝은 햇살 아래서 보면, 개똥벌레는 보잘것없는 벌레에 불과합니다. 우리도 이와 마찬가집입니다. 하늘에서 나오는 빛이 우리 마음을 꿰뚫기 전까지, 우리는 자신을 제법 선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하늘의 빛이 우리에게 와 닿을 때, 우리는 자신들의 타락과 추함과 더러움을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 시간 주님께서 여러분에게, 너는 개다 하신다면, 주여 옳소이다, 나는 개나 다름없습니다 할 수있겠습니까? 어는 참으로 어리석구나 하신다면, 주여, 저는 무지몽매한 죄인입니다 할 수있겠습니까? 너는 짐승과 같구나 하신다면. 주여, 옳습니다, 때로는 짐승만도 못할 때가 있는 죄인입니다 할 수있겠습니까? 너는 죄인 중의 괴수요, 지극히 작은 성도보다 더 못한 자로구나 하신다면, 과연 주여 옳소이다 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여러분! 우리가 이와 같은 겸손한 마음의 자세를 갖도록 하십니다. 우리가 무슨 건덕지로 하나님 앞에 원망하고 불평하겠습니까? 베니스의 첫 번째 군주인 로런스 저스티니언은 임종시에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주여, 저는 감히 성삼위 일체를 뵈올 수 있는, 복된 영혼들 속에 머물게 해달라고 요구하지는 않으렵니다. 이 미천한 종은 오로지 주의 거룩한 식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그 부스러기만으로도 저에게는 충분하고 남음이 있습니다. 오 주여, 정말이지 그것으로 족하고도 족합니다. 만약 주님께서 이 가엾은 종을 위하여 자리를 마련해 주시려거든, 택함 받은 영혼이 차지할 자리 중에, 맨 끝자리를 허락해 주옵소서’ 

우리를 억만 가지 죄악 중에서 건져주시고, 천국을 주시고, 영생을 주신 것만도 평생토록 감사하고, 아니 영원토록 감사드리기에 충분한 것입니다. 그 외에는 부스러기 같은 은혜라도 주시면, 그저 감사하게 받을 뿐, 원망하고 불평하면 아니 될 것입니다.

3. 불굴의 인내를 가졌습니다.

이 여인은 쉽사리 낙심하고 절망하지 않았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기도하지 않으면, 손해일지 모른다는 기분으로 기도합니다. 그러므로 기도에 힘을 다 하지 않습니다. 기도하면 어떤 일이 일어날지 모른다. 만일 그렇다면 기도해 두는 것이 낫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 여인이 예수님께 나온 것은, 예수님에게 만일의 도움을 기대한 것이 아니고, 예수님만이 유일의 소망이었습니다. 그래서 이 여인은 열렬한 소망과, 절대적인 필요 의식과, 실망을 모르는 끈기와 인내력을 가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 여인에게 있어서는 기도가 의식적인 형식이 아니라, 뜨거운 소망을 가지고 그녀의 영혼을 쏟아 붓는 것이었습니다. 무엇보다도 그녀의 기도는 응답 받을 수 있는 최상의 조건, 곧 진실한 기도였습니다.

물론 예수님께 이렇게 간절하고 진실한 마음으로 간구할 때, 얼마 동안 침묵으로 대하신 것이 사실이나, 그러나 우리가 기억할 것은, 침묵하고 계시던 그 순간에도, 주님은 그녀의 말을 다 듣고 계셨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다만 얼마 동안 응답하시지 않은 것은, 그녀의 믿음과 인내를 시험해 보시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또한 그녀의 끈기 있고 강한 믿음을, 훌륭한 믿음의 본보기로 삼게 하기 위해서 그리한 것입니다. 

그런데 과연 이 여인은 불굴의 인내를 가지고, 기도의 응답을 받을 때까지, 소원이 성취될 때까지 기도했습니다. 때때로 믿음이 강한 성도라 할지라도, 하나님께 열심히 구하다가, 그만 실의에 빠지기도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우리의 기도에 응답하지 않으시는 것이 아니라, 단지 늦게 응답하시는 것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는 종종 열심히 한 우리의 기도, 그 자체만을 지나치게 높이 평가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신앙심이 깊은 자들은, 언제나 인내를 가지고 끈기 있게 기도하였습니다. 롯을 구원하기 위한 아브라함의 기도가 그러했고, 얍복강가에서 기도하던 야곱의 기도가 그러했습니다. 한 주간, 혹 두 주간 기도 해보고, 한 달 두 달 기도 해보고, 일 년 이 년 기도 해보고, 낙심해버리는 성도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항상 기도하고 낙망치 말아야 될 것을, 눅 18장의 불의한 재판관의 비유에서 밝히 말씀하셨습니다.

오늘 가나안 여인을 대하시는 예수님의 태도에서도, 우리에게 인내와 끈기를 가지고 끝까지 기도할 것을 가르쳐 주시기 위한, 주님의 숨은 뜻을 발견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가나안 여인에게서, 우리의 간구가 얼마나 미흡하고, 인내와 끈기가 없었던 것을 깨닫고, 이 여인과 같이 주님께서 우리가 구하는 것을 이루어주실 때까지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4. 무엇보다 이 여인은 믿음의 사람이었습니다.

가나안 여인의 믿음은, 예수님을 만남으로써 자라났습니다. 이 여자는 처음에 자기가 위대하고 권세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한, 그 분의 은혜를 받고자하여 왔습니다. 그것은 마술사를 대하는 것과 같은, 일종의 미신이었습니다. 그러나 마침내 이 여인은 예수님을 ‘주’ 라고 불렀습니다. 이 여인은 예수님을 만났을 때, 이 세상의 말로는 도저히 표현할 수 없는 신성을 느끼게 된 것입니다. 그 다음 순간 이 여인은, 이제껏 단순한 애원과는 달리, 예수님 앞에 영혼을 쏟아 붓는 간곡한 기도로 바꾸어졌습니다. 

그리하여 물러설 줄을 모르고, 낙심할 줄도 몰랐습니다. 생명을 건 결사적이고 뜨겁고 간절한 기도를 한 것입니다. 그렇게 붙잡고 늘어진 것은, 예수님이 자기의 소원을 성취시켜 주시리라는 확신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사실 그때까지 예수님이 침묵으로 대하고, 냉대하고, 모욕까지 하면서 그녀에게 대한 것은, 그 여인의 믿음을 시험해보시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녀는 이 시험에 합격을 한 것입니다. 제자들은 믿음이 적은 자들아 책망을 받고, 유대인들은 그들의 불신 때문에 심판을 받았지만, 이방 여인 그녀는 ‘여자야 네 믿음이 크도다’ 하는 격찬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네 소원대로 되리라’ 하시니 그 시로 흉악한 귀신 들린 딸의 병이 낫게 되었습니다. 그 시로부터 그녀의 딸은 더 이상 흉악한 귀신 때문에, 고통을 받지 아니하였습니다. 어머니의 믿음은 딸을 치료하였던 것입니다.

이제 말씀을 마치려고 합니다. 오늘은 이방 여인이었던 수로보니게 여인, 가나안 여인, 이 여인의 소망과, 사랑과, 겸손과, 간구와 인내와 확신에 가득찬 믿음에 대해서 살펴보았습니다. 믿음이란, 어떤 의미에서 마치 씨를 뿌리는 이치와 같습니다. 씨를 많이 뿌리면 많이 거두고, 적게 뿌리면 적게 거두고, 안 뿌리면 하나도 거두지 못합니다. 그래서 큰 믿음은 큰 축복을 받고, 작은 믿음은 작게 받고, 안 믿으면 아무것도 받지 못하게 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의 소원이, 기도 제목들이 있습니까? 가나안 여인 같은 확신을 갖고 구하시기 바랍니다. 이 여인에게 만일 예수님께서 딸의 질병을 고쳐주실 것이라는 확신이 없었다면, 무엇 때문에 그토록 간절히 매달렸겠습니까? 가나안 여인의 끈기 있는 기도를 들어주신 주님께서, 여러분의 기도를 어찌 들어주시지 않겠습니까? 지금 예수님께서 모르시는 듯, 잠잠하고 계시면서도, 여러분의 기도를 빠짐없이 듣고 계심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다만 끈기 있게 인내하면서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가나안 여인의 소원보다 더 큰 소원이라도 이루어지는 복을 받게 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궁극적으로 주님께 영광을 돌리고, 주님을 더 뜨겁게 사랑하고, 죽도록 충성하면서 살아가게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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