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베드로에게 오신 예수님 (눅 5:1-11)

첨부 1


베드로에게 오신 예수님 (눅 5:1-11)


그 날 갈릴리 가버나움의 어부 시몬은 최고로 기분이 좋아야 마땅했습니다. 왜냐하면 어부로 살아온 이래 가장 많은 고기를 잡았기 때문입니다. 그의 배는 엄청난 고기로 가득 채워져 있었습니다. 이제 돌아가면 사람들은 <역시 시몬이야!>라고 하면서 부러워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에게는 그 많은 고기들이 눈에 들어오지 않았습니다. 그의 눈길을 사로잡은 것은 뱃머리에 서 계시는 예수라는 이름의 선생님이었습니다. 그 분의 이름은 이미 널리 알려져 있었습니다. 나사렛 출신이고, 요셉이란 목수의 아들인데, 나이 삼십에 집을 떠나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친다고 했습니다. 그의 가르침은 특별한 진리를 담고 있고, 그의 능력은 정말 대단해서 병든 자를 고치고, 귀신을 쫓아낸다고 했습니다. 

그가 예수님을 처음 알게 된 것은 동생 안드레를 통해서였습니다. 그의 동생 안드레는 형과는 달리 뭔가를 추구하는 성격이었습니다. 그는 남쪽 유대로 내려가 요한이란 사람의 제자가 되었습니다. 

안드레는 자신이 만난 요한에 대해 입에 침이 마르도록 칭찬하면서 말했습니다. 그 분이 유대 광야에서 말씀을 전하고 요단강에서 세례를 베푸는데, 예루살렘의 지체 높은 사람들도 오고, 포악한 군인들과 돈 밖에 모르는 세리들까지 와서 자신들의 죄를 고백하면서 세례를 받는다고 했습니다. 요한은 먹고 입는 것도 남과 달라서 메뚜기와 벌꿀을 먹고 약대 털옷을 입는다고 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계시에 의하여 태어난 특별한 분이라고 했습니다. 안드레는 자신이 요한의 제자가 된 것은 최고의 축복이라고 말하곤 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안드레가 이상한 소리를 했습니다. 더 이상 요한을 따르지 않고, 그 대신 그는 예수라는 선생님을 따르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요한을 그렇게 추앙하더니 갑자기 예수를 따른다니, 예수는 또 누군가, 그것은 일종의 배신이 아닌가>, 모두 의아하게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이 요한을 떠난 것은 결코 배신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오히려 요한이 자신에게 예수님을 따르라고 말했다고 했습니다. 요한 자신도 예수님을 하늘 같이 생각하고 있고, 자신은 예수님을 위해 세상에 온 길잡이 같은 사람이며, 자신은 예수님의 신발 끈을 묶고 풀 자격도 없다고 말했다는 것입니다. 안드레가 예수님을 따르게 된 데 대해 요한복음 1장 40절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요한의 말을 듣고 예수를 따르는 두 사람 중의 하나는 시몬 베드로의 형제 안드레라>  시몬은 동생이 예수님에 대해 강조할수록 동생이 뭔가에 홀린 것처럼 지나치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는 우리를 시몬이 안드레를 생각하듯이 바라봅니다. 그 분들은 우리가 새벽부터 교회에 와서 기도하고, 열심히 벌어 십일조를 드리고, 교회를 위해 여러 가지 봉사를 하는 것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지나친 광신자들이라고 비난합니다.  세상의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렇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안드레가 형님 시몬을 찾아와서는 흥분한 어조로 <그 예수 선생님이 지금 이 동네에 오셨으니 빨리 가 보자>는 것이었습니다. 그 분이야말로 메시아라고 했습니다. 시몬은 얼떨결에 따라 나섰습니다. 이 장면을 요한복음 1장 41절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그가 먼저 자기의 형제 시몬을 찾아 말하되 우리가 메시야를 만났다 하고> 

드디어 시몬이 처음으로 예수님을 뵙게 되었습니다. 안드레가 그렇게까지 숭앙하는 분, 메시아로 믿는다는 그 분이 어떤 분인지 궁금했습니다. 그런데 그 분은 만나자마자 시몬의 이름이 바뀔 것이라고 말씀했습니다. 요한복음 1장 42절을 보면 <데리고 예수께로 오니 예수께서 보시고 이르시되 네가 요한의 아들 시몬이니 장차 게바라 하리라 하시니라 (게바는 번역하면 베드로라)>고 되어 있습니다. 게바, 베드로는 반석이란 뜻이지요. 예수님은 그가 반석이 될 것이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이름을 신성하게 여겼습니다. 이름을 지을 때 심사숙고했습니다. 이름은 단지 호칭이 아니라, 그 사람의 존재와 인격 전체를 의미했습니다. 이름이 바뀐다는 것은 존재가 통째로 바뀌는 것을 의미했습니다. 구약에서도 <아브람>이 <아브라함>이 되고, <야곱>이 <이스라엘>이 되었는데, 이는 전적으로 새로운 존재가 된 것을 의미했습니다. 

시몬은 의아했습니다. 자신이 어떻게 반석이 된다는 것인지, 또 자신이 그렇게 되길 원치 않는데, 어떻게 자신을 베드로로 만들겠다는 것인지 알 수 없었습니다. 어쨌든 동생 안드레가 소개한 예수라는 선생님은 특별한 분인 것은 틀림없었습니다. 

그러나 시몬이 안드레처럼 예수님을 따른 것은 아닙니다. 그는 특별한 선생님을 한 번 만나본 것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존경하지만 따라나설 수는 없었습니다. 아직은 그 이유가 충분하지 못했습니다. <안드레, 너나 열심히 배워. 난 먼발치에서 그 분의 소식을 듣는 것으로 충분하다. 난 내 일을 하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오늘날도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의 소문을 듣습니다. 가족을 통해서, 이웃 친지를 통해서 다양한 경로로 예수님에 대해 듣습니다. 그리고 한 번씩 교회에 와서 예배에 참석하여 말씀을 들어보기도 합니다. 성경책을 읽기도 합니다.  워낙 유명한 책이라고 하니, 교양을 쌓기 위해서라도 읽어볼 만 하다고 여깁니다. 그러나 거기까지입니다. 예수님이 대단히 훌륭한 인류의 스승이라는 것은 인정합니다. 기왕이면 그 분이 시키는 대로 살면 좋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자신은 오지 않습니다. 

제가 아는 분 중에 우리나라 대표적인 언론사에 근무하던 분이 계십니다. 그 분은 교회에서 발행하는 잡지에 <전도>를 주제로 글을 쓰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자신은 예수님을 믿지 않았습니다. 가족들을 교회 마당에까지 태워주었습니다. 그러나 자신은 예배에 참석하지 않았습니다. 다른 사람에게 <예수님을 믿으면 좋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그 분은 예수님을 믿지 않았습니다. 이런 분이 세상에 많습니다. 시몬과 같은 입장에 있는 것입니다. 

그 후에 시몬은 어떻게 되었을까요? 시몬이 모르는 게 한 가지 있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은 한 번 마음에 둔 사람을 결코 포기하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집요하게 그에게 다가오셨습니다. 
어느 날 그가 밤새도록 그물질을 했으나, 한 마리도 잡지 못해 지쳐 있을 때, 그물을 정리하고 집에 들어가 쉬고자 할 때, 그 분이 다가오셨습니다. 그 분은 배를 빌려 달라고 말씀했습니다. 그 분의 뒤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서 있었는데, 그 중에는 시몬이 잘 아는 사람들도 많이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배를 빌려 달라>, 드디어 시몬의 인생에 그 분이 처음으로 뚫고 들어오시려는 순간이었습니다. 지난번에는 그저 한 번 만나 보고 스쳐 지나갔습니다. 그런데 이제 그 분이 자신을 피곤하게 만들려 하고 있었습니다. 피곤해서 쉬어야 하는데, 배를 빌려 드리면 언제 집에 가게 될지 알 수 없었습니다. 예수 선생님에 의해 자기 인생이 영향을 받으려는 순간이었습니다. 이건 그냥 <안녕하셨습니까?> 이렇게 인사하고 끝낼 수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뭔가 결정을 해야 할 상황이었습니다. 배를 빌려 드리든지, 아니면 거절해야 했습니다. 그 분이 자신의 인생 안으로 밀고 들어오심을 느꼈습니다. 

그 날 시몬은 그 분을 거절하지 못했습니다. 그 분께 배를 빌려 드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는 예수님을 태우고 육지에서 배를 조금 떼어놓았습니다. 사람들에게 말씀하기 좋게 해 드렸습니다. 이미 그의 영혼은 예수님께 조금씩 열리기 시작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 날 이후 그는 예수님을 위해 노 젖는 사람이 되었고, 섬기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주님을 향해 영혼이 열리는 사람들은 복된 사람들입니다. 여러분, 주님께서 다가오실 때 거절하지 마십시오. 그 분을 향해 문을 여시기 바랍니다. 그 분께 기꺼이 배를 내어 드리시길 바랍니다. 

그러나 아직 시몬은 여전히 예수님께 거리감을 느꼈습니다. 나중에 배에서 내린 다음, 마을 사람들이 와서 <아까 그 분께 배를 빌려드리더군. 자네 그 분을 아는가?>라고 물으면, 예수님을 안다고 할 수도 없고, 모른다고 할 수도 없었습니다. 물론 안드레를 통해 만난 적이 있으니 모른다고 할 수는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 분을 알아야 얼마나 압니까? 동생을 통해 전해들은 게 전부인데, 아직 그 분과 자신 사이에는 아무런 관계도 없는데, 어떻게 안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여전히 그 분은 대하기 어려운 분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날 예수님과 시몬 사이에 있던 거리감은 완전히 사라졌습니다. 예수님은 더 이상 자신의 인생에서 멀리 떨어진 분이 아니었습니다. 그 날 이후 예수님 없는 인생은 생각할 수도 없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그의 전부가 되었습니다. 그 날 이후 그는 동생 안드레의 입을 통해서 예수님을 아는 게 아니라 자신이 직접 체험하여 예수님을 알게 되었습니다. 더 이상 간접적으로 예수님을 만나는 게 아니라. 직접 예수님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가 어떻게 예수님을 더 깊이 알게 되었을까요? 어떻게 예수님의 사람이 되는 체험을 했을까요? 

우선 말씀을 통해 변화되었습니다. 

시몬의 배에 타신 예수님은 사람들에게 말씀을 가르치셨습니다. 3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한 배에 오르시니 그 배는 시몬의 배라 육지에서 조금 띄기를 청하시고 앉으사 배에서 무리를 가르치시더니>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바닷가에 서 있는 무리를 가르치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정말 가르치기 원하는 대상은 시몬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얼굴은 바닷가의 무리를 향하고 있었지만, 예수님의 마음은 바로 옆에 노를 잡고 앉아 있는 시몬을 향하고 있었습니다. 무리를 향해서 하시는 말씀은 시몬의 귓속으로 파고들었습니다. 그는 노를 잡고 말씀에 무관심한 듯 보였으나, 어쩔 수 없이 예수님의 말씀은 그의 영혼을 사로잡았습니다. 

이것이 말씀의 능력입니다. 말씀은 닫혀 있는 영혼을 여는 힘이 있습니다. 말씀을 듣고 또 들으면, 읽고 또 읽으면 마치 낙숫물에 바위가 패이듯이 영혼이 파이기 시작하고, 후에는 영혼에 구멍이 뚫립니다. 그 구멍으로 은혜가 흘러 들어갑니다.  

우리 모두 주님의 말씀을 가까이 하길 원합니다. 아무리 완고한 사람들도 말씀을 들으면 변화되기 시작합니다. 주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합니다. 그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는 능력이 있습니다. 

시몬이 예수님의 말씀에 의해 영혼이 열리고 있었다는 증거가 있습니다. 후에 예수님께서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으라>고 하셨을 때, 그는 <말씀에 의지하여 내가 그물을 내리리이다>라고 고백했습니다. 우리도 말씀을 통하여 새롭게 되길 기원합니다. 


둘째로, 그는 예수님의 능력을 통해 예수님의 사람이 되었습니다. 

누구나 주님을 알면 자신도 알게 됩니다. 시몬도 그 분을 알게 되자, 자신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주님을 아는 것과 우리 자신을 아는 것은 그 내용에 있어서 반대입니다. 주님의 능력을 알면 알수록 자신의 무능력을 알게 됩니다. 시몬이 그러하였습니다. 

사실 그는 자신이 제법 능력 있는 남자라고 자부했습니다. 그는 치열한 경쟁을 뚫고 가버나움에서 어업권을 따냈습니다. 당시에 갈릴리 바다의 고기는 아무나 마음대로 잡을 수 없었습니다. 잡은 고기를 집중적으로 모으는 곳은 <막달라>에 있었고, 거기서 소금에 절여 사방으로 운송되었습니다. 그래서 막달라는 일명 <소금에 절인 생선 마을>이라고 불리기도 했습니다. 고기를 잡는 것, 모으는 것, 소금에 절여 운송하는 모든 과정을 로마 군인들이 직접 관리했습니다. 그리고 고깃배가 가장 많이 출항하는 곳이 가버나움이었습니다. 시몬은 거기서 유명한 어부였습니다. 그는 어려서부터 고기 잡는 데 잔뼈가 굵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고기잡이라면 자신이 있었습니다. 그는 잡을 권리도 있었고, 기술도 있다고 자부했습니다. 

그러나 세상을 살다보면 사람들은 어느 순간 갑자기 자신에 대해 자부심을 가지게 만들었던 그 모든 것이 무기력하게 되는 것을 경험하게 됩니다. 가진 권리가 쓸모 없게 되는 순간이 옵니다. 갑자기 부상을 당한 선수는 어렵게 예선을 통과해서 힘들게 따낸 올림픽 경기에 출전할 수 없습니다. 가르칠 권리는 있지만, 갑자기 계산 능력을 잃은 선생님은 더 이상 수학을 가르칠 수 없습니다. 여러 이유로 갑자기 목사가 말을 못하게 되면 더 이상 설교할 수 없게 되기도 합니다. 

그 날 시몬이 그러했습니다. 그는 고기를 잡을 권리도 있었고, 나름대로 밤새도록 최선을 다했지만, 그의 그물은 빈 그물이었습니다. 그 날 그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었습니다. 그 날 집에 돌아갔을 때 아내가 기뻐하면서 말했을 것입니다. 

<여보.....정말 많이 잡으셨네요...역시 당신이에요....> 그가 뭐라고 말했을까요? 
<아니야, 내가 아니야....이렇게 많이 잡은 것은 내가 아니야.> 
<그렇다면 도대체 누구란 말입니까?> 

그 때 시몬은 자신이 밤새 헛수고를 한 것과, 예수님께 배를 빌려드리게 된 일, 그리고 예수님의 말씀대로 깊은 데 그물을 내렸을 때 엄청나게 고기가 잡힌 것을 말해 주었을 것입니다. 그 분의 능력과 자신의 무능함이 교차되는 바로 그 지점에서 그의 교만과 뻣뻣한 영혼이 무너져 내렸습니다. 

그 날 그는 자신의 무능함과 예수님의 능력만 깨달은 게 아닙니다. 그는 자신의 부정함과 예수님의 거룩함도 깨닫게 되었습니다. 고기를 간신히 끌어올린 그 순간 그는 그 분 앞에 엎드러졌습니다. 그 분은 단순히 존경할 만한 선생님 정도가 아니었습니다. 그 분은 그 이상의 존재, 즉 <주님>이라고 불러야 할 분이었습니다. 반면에 자신은 죄인이었습니다. 자신은 그 분과 함께 할 수 없는 존재인 것을 깨달았습니다. 아까 그 분이 배를 빌려달라고 하실 때 귀찮게 여기는 마음이 있었는데, 알고 보니 그 분이 자신에게 다가오신 것이야말로 일생 일대의 축복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감히 함께 할 수 없는 분이 함께 계시는 은총을 맛본 것입니다. 그는 그 분을 더 이상 선생님이라고 부르지 못했습니다. 8절을 다같이 읽어봅시다. <시몬 베드로가 이를 보고 예수의 무릎 아래 엎드려 가로되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니>
 
예수님을 주님으로 깨닫고 발견하는 은혜가 우리에게도 있길 기원합니다.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신 이유는 우리 인생의 배에 함께 하시기 위함입니다. 우리의 무능함을 깨닫고 그 분의 능력을 의지하도록 만들기 위함입니다. 그 분이 얼마나 위대한 분인지 알게 하기 위함입니다. 그리고 죄인인 것을 깨닫고 그 분 앞에 엎드리게 하기 위함입니다. 더 이상 예수님 없는 삶을 살지 않고, 그 분 없이는 못 사는 사람이 되게 하기 위함입니다. 그 분은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입니다>라고 할수록 떠나시기는커녕 더욱 우리에게 가까이 오셔서 안아주시는 분입니다. 

여러분, 여기서 한 사람 시몬이 어떻게 바뀌는지 보십시오. 본문을 자세히 보면 놀라운 흐름이 보입니다. 예수님께서 그의 배를 빌리고, 그 배에서 말씀하시고, 깊은 데 그물을 내리는 동안, 즉 3절, 4절, 5절에서는 그의 이름이 <시몬>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그가 예수님 앞에 엎드려 <주여 나를 떠나소서>라고 고백하는 순간, 8절에서는 <시몬 베드로>라고 되어 있습니다. 드디어 예수님 없이 살던 시몬이 예수님의 사람 베드로가 되는 순간이었습니다. 안드레를 통해 처음 만나던 날 <네 이름을 게바, 베드로라 하리라>고 하셨는데, 드디어 그 일이 이루어져서 시몬이 반석이 되어가고 있었습니다. 

그 날 후로 예수님은 시몬의 삶을 살던 그를 베드로의 삶으로 초대하셨습니다. 10절 중간부터 보세요. <예수께서 시몬에게 일러 가라사대 무서워 말라 이제 후로는 네가 사람을 취하리라 하시니>라고 했습니다. 

그 날 그는 집에 들어가 아내에게 결심을 말했을 것입니다. 동생 안드레와 함께 예수님을 따르겠다고 했겠지요. <걱정 마, 내가 당신 살 대책은 세워 놨어. 배는 친구에게 일단 맡기기로 했어. 난 지금 그 분을 따라 나서야 해. 나중에 당신도 그 분을 알게 될 때가 올 거야.  그 분의 제자가 되는 일은 한 번 해 볼만한 가치가 있어.> 

베드로의 아내가 예수님이 어떤 분인지 알 수 있는 날은 뜻밖에 일찍 찾아왔습니다. 그녀의 친정 어머니, 베드로의 장모가 열병으로 죽어갈 때 예수님께서 그녀를 치유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후에 베드로가 전도여행을 다닐 때 그의 아내도 그와 동행하였습니다. 그녀도 예수님 안에서 변화되었습니다. 

여러분, 이것이 한 사람 시몬의 인생이 베드로로 전환된 이야기입니다. 그 한 사람의 전환이 가져올 엄청난 결과는 아무도 몰랐습니다. 베드로 자신도 몰랐습니다. 그는 그저 자신의 인생에 큰 일이 일어난 것 정도만 알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를 통해 로마 제국을 뒤집기로 작정하셨습니다. 몇 십 년 후 그는 로마가 내려다보이는 언덕 위에 있게 될 것이었습니다. 거기서 온 세상을 위해 순교의 제물이 될 것이었습니다. 그의 이름은 세상에서 가장 유명한 이름들 가운데 하나가 될 것이며, 그의 이름으로 불리는 대성당이 지어질 것이며, 수많은 후배들이 그의 인생에 일어난 일이 자신의 인생에도 일어나길 기다리게 될 것입니다. 

주님은 오늘도 우리를 그렇게 부르십니다. 우리 인생을 전환시키십니다. 누구나 예수님 안에 있으면 새로운 인생이 열립니다. 예수님은 작은 사람 한 사람을 통해, 세상을 변화시키십니다. 지금도 예수님은 우리에게 오셔서 <배를 빌리자>고 말씀합니다. 기꺼이 배를 내 드리십시오. 그리고 마지막에는 인생 전부를 내 드리십시오. 처음엔 그것이 부담이 되겠지만, 나중에 가장 큰 복임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베드로에게 오신 예수님, 오늘 우리 모두에게도 오고 계십니다. 우리 주 예수님과 함께 그 분의 제자로서 새로운 인생을 살게 되시길 기원합니다.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