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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나는 내 길을 가야 하겠다 (눅 13:31-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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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내 길을 가야 하겠다 (눅 13:31-35)


[바로 그 때에 몇몇 바리새파 사람이 다가와서 예수께 말하였다. “여기에서 떠나가십시오. 헤롯이 당신을 죽이려고 합니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가서 그 여우에게 이 말을 전하여라. ‘보아라, 오늘과 내일은 내가 귀신을 내쫓고 병을 고칠 것이요, 사흘째 되는 날에는 내 일을 끝낸다. 그러나 오늘도 내일도 그 다음날도, 나는 내 길을 가야 하겠다. 예언자가 예루살렘이 아닌 다른 곳에서는 죽을 수 없기 때문이다.’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예언자들을 죽이고, 네게 파송된 사람들을 돌로 치는구나! 암탉이 제 새끼를 날개 아래에 품듯이, 내가 몇 번이나 네 자녀를 모아 품으려 하였더냐? 그러나 너희는 그것을 원하지 않았다. 보아라, 너희의 집은 버림을 받을 것이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말하기를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분은 복되시다’ 하고 말할 그 때가 오기까지, 너희는 나를 다시는 못 볼 것이다.”]

• 사람 되기 참 어렵다

사순절 순례 여정에 오른 우리 모두에게 주님의 빛이 함께 하시기를 빕니다. 그리고 지진과 해일로 말미암아 충격과 공포에 휩싸인 일본 국민들에게도 주님의 위로와 돌보심이 함께 하시기를 빕니다. 이런 참담한 일을 겪을 때마다 우리는 인간의 유한함을 절감합니다. 해마다 재의 수요일이면 우리는 ‘인간이 흙에서 왔으니 흙에서 돌아가리라’ 하신 주님의 말씀을 떠올립니다. 파스칼은 사람 하나를 죽이기 위해 온 우주가 무장할 필요는 없다면서 인간은 하나의 갈대에 지나지 않는다고 말했습니다. 하지만 인간이 갈대와 다른 것은 ‘생각하는 갈대’이기 때문입니다. 

재난과 슬픔을 겪으면서도 그 슬픔에 매몰되지 않고 더 아름다운 삶을 꿈꾸는 것이 인간의 위대함입니다. 우리는 재난 앞에서 침착하게 처신하는 일본인들을 보고 놀랍니다. 이재민들에게 필요한 물건을 평소보다 싼 값에 판매하는 상인들의 이야기에 접하며 또 한 번 놀랍니다. 영혼의 위대함이란 다른 이의 고통에 공감하고 그를 위해 나 자신을 희생할 수 있는 것 아닐까요? 누군가의 아픔을 함께 아파하고, 그의 어려움을 덜어주기 위해 애쓰는 것, 그것이야말로 인간다움의 징표입니다. 일본에서 벌어진 대지진은 우리가 참으로 인간인지를 묻고 있습니다. 

연민의 마음, 애린의 마음은 저절로 생기지 않습니다. 거듭날 때만 얻어집니다. 예수님은 한밤중에 당신을 찾아온 니고네모에게 “누구든지 다시 나지 않으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다”(요3:3b)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문득 지금까지 이 말씀 속에 담긴 속뜻을 이해하지 못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주님은 하나님 나라를 보는 것이 곧 사람이 되는 것이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하나님 나라는 하나님의 다스리심입니다. 이 세상을 움직이는 게 사람인 것처럼 보여도 결국 역사의 주인은 하나님이심을 아는 것이야말로 우리가 참 사람이 되는 길입니다.

철들지 않은 인간은 자신이 우주의 주인인 줄로 압니다. 그 교만함이 세상을 이 지경으로 만들었습니다. 우리는 잠시 이 땅에 머물다 가는 거류민에 지나지 않습니다. 다시 말하지만 사람은 거듭나야 사람입니다. 바울 사도는 거듭나기 이전과 이후의 삶을 ‘옛 사람’과 ‘새 사람’이라는 은유를 통해 표현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옛사람이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달려 죽은 것은, 죄의 몸을 멸하여서, 우리가 다시는 죄의 노예가 되지 않게 하려는 것임을 우리는 압니다.”(롬6:6)
“여러분은 지난날의 생활 방식대로 허망한 욕정을 따라 살다가 썩어 없어질 그 옛 사람을 벗어버리고, 마음의 영을 새롭게 하여,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참 의로움과 참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십시오.”(엡4:22-24)

사람이 된다는 것은 죄의 종살이에서 벗어나는 것이고, 허망한 욕정을 따라 사는 삶에서 벗어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의로움과 거룩함으로 옷 입은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사람이 되는 것은 마음먹는다고 되지는 않습니다. 슬프지만 사람은 시련과 고난의 시간을 통과하지 않고는 옛 사람의 옷을 벗어버리지 못합니다. 낫 하나를 만드는 과정을 생각해 보십시오. 쇠를 풀무불에 넣어 달구고, 모루 위에 올려놓고 망치질하고, 담금질하고…이런 과정을 여러 차례 반복해야만 낫 한 자루가 탄생합니다. 사람도 그렇습니다. 시련과 고통을 좋아하는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하지만 어쩔 수 없이 겪어야 할 시련이라면 그것을 통해 더 나은 사람이 되는 기회로 삼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십자가와 부활은 바로 이런 진실을 우리에게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 헤롯의 길

어느 날 바리새파 사람들 몇이 주님께 다가와 헤롯이 당신을 죽이려고 하니 어서 여기에서 떠나라고 말합니다. 그들의 충고가 호의에 따른 것인지 아니면 어떤 음모를 꾸미기 위한 것인지는 알 수 없습니다. 다만 헤롯이 예수를 죽이려 한다는 것은 예수가 정치적으로 위험인물로 분류되었음을 암시합니다. 지배자들이 피지배자들에게 주입하려는 생각이 무엇이겠습니까? 지금 그들의 삶을 숙명으로 여기도록 하는 것입니다. 억압과 착취를 당하면서도 그걸 숙명으로 받아들일 때 지배자는 웃고 백성들은 울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님은 숙명론에 빠진 사람들을 일깨워 그들이 존엄한 존재임을 드러내셨습니다. 체제의 입장에서 예수는 제거되어야 할 위험인물이었습니다. 게다가 세례자 요한을 죽였던 헤롯은 예수가 요한의 환생이 아닌가 하여 더욱 두려웠던 것입니다. 

갈릴리와 베뢰아의 분봉왕(quarter ruler)이었던 헤롯 안티파스는 정치적인 야망이 큰 사람이었습니다. 아버지 헤롯 대왕처럼 그도 팔레스타인 전역을 다스리는 왕이 되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는 로마 황제의 호감을 사기 위해 진력했습니다. 갈릴리 호숫가에 새로운 도시를 건설하고 당시 로마 황제였던 티베리우스의 이름을 따 티베리아스라고 불렀습니다. 대규모의 건축사업에 필요한 자금은 물론 백성들에게서 나왔습니다. 먹고 살기조차 어려운 형편에 과중한 세금까지 내야 했으니 민중들의 삶이 얼마나 고통스러웠을지는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습니다. 

태산에 들렀다가 제나라로 가고 있던 공자 일행이 잠시 산기슭에서 쉬고 있는데, 어디선가 여인의 호곡소리가 들렸습니다. 울음소리를 따라가 보니 숲 속에 무덤 셋이 있는 데 한 여인이 그 앞에 엎드려 울고 있었습니다. 제자인 자로가 여인에게 다가가 왜 그리 슬피 우냐고 묻자, 여인은 가까스로 울음을 수습하고는 자초지종을 들려주었습니다. 그곳은 호랑이가 자주 출몰해 사람을 해치곤 하는 곳인데, 작년과 재작년에 시아버지와 남편을 연이어 잃었는데 이번에는 아들마저도 잃어버리고 말았다며 탄식했습니다. 

“그런데도 부인께서는 왜 이곳을 떠나지 않습니까” 하고 묻자 여인이 대답했습니다. “이곳은 비록 호환이 무서운 곳이기는 하지만 세금을 혹독하게 물리거나, 못난 벼슬아치들이 백성들에게 함부로 노역을 시키거나 재물을 빼앗는 일이 없답니다. 그래서 이곳을 떠나지 못하지요.” 그 말을 들은 공자가 말했습니다. “잘 명심해 두어라. 가혹한 정치는 호랑이보다 무섭다는 것을.”(苛政猛於虎)

기가 막힌 이야기입니다. 헤롯의 길도 여느 권력자들의 길과 다르지 않습니다. 그것은 높아짐의 길입니다. 남을 억압하고 죽임으로 자기 힘이 커진다고 믿는 길입니다. 그는 힘을 기르고, 살아남기 위해 온갖 권모술수를 다 동원합니다. 헤롯은 2000년 전 갈릴리에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지금도 헤롯의 길을 걷는 이들은 많고 또 많습니다. 우리는 요즘 2년 전 스스로 목숨을 버린 장자연 씨의 피맺힌 절규를 다시 듣고 있습니다. 

무고하게 죽임당한 아벨의 피가 땅에서 외치듯, 그는 죽음 이후에도 우리에게 신원을 호소하고 있습니다. 한 순간의 쾌락과 즐거움을 위해 한 인간을 그렇게 피폐하게 만들고, 급기야 죽음에 이르게 만든 이들이 사회의 지도층이 되어 세상을 활보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사회의 주변적 존재들에게 가해지는 이런 일상적 폭력을 모른 체 하고 살아왔습니다. 우리가 이런 현실에 대해 침묵하는 한 이런 일들은 언제든 반복될 수밖에 없습니다.

헤롯은 자신의 악행과 폭정을 지적한 세례자 요한을 죽였습니다. 이제는 요한의 환생처럼 보이는 예수까지 죽이려 합니다. 하지만 예수는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죽음을 각오한 사람을 죽음으로 위협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입니다. 예수님은 헤롯을 ‘그 여우’라고 부릅니다. 여우가 들으면 속상할지 모르겠습니다.

• 예수의 길

헤롯의 길이 다른 이를 희생시켜 자기 욕망을 충족시키는 길이라면 예수의 길은 자기를 희생함으로 남을 살리는 길입니다. ‘보아라, 오늘과 내일은 내가 귀신을 내쫓고 병을 고칠 것이요, 사흘째 되는 날에는 내 일을 끝낸다.’ 예수의 존재가 헤롯에게 위협이 된 것처럼, 헤롯의 존재는 예수에게 위협이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병을 고치고, 귀신을 내쫓는 일, 곧 생명을 온전케 하는 일을 중단하실 수 없었습니다. 당신이 바로 그 일을 위해 세상에 보내심을 받았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신앙은 결단입니다. 하나를 붙들고 다른 것을 따라가지 않는 것(主一無適)입니다. 상황에 따라 이리저리 부평초처럼 흔들리지 않는 것입니다. 생명을 살리고 온전케 하기 위해 주님은 자신을 다 내주셨습니다. 

“오늘도 내일도 그 다음날도, 나는 내 길을 가야 하겠다.”

주님이 가시겠다고 다짐하는 그 길은 상처 입은 사람들/멸시당하는 사람들/삶의 희망을 잃어버린 사람들 사이로 난 길입니다. 그런데 그 길은 우리를 하나님께로 인도하는 길입니다. 주님은 형편에 따라 그 길을 걷는 분이 아닙니다. 그 길은 비록 고난의 가시밭길이라 해도 기어코 가야만 하는 길입니다. 

우리는 얼마 전 아프리카의 오지에서 희망을 파종하다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이태석 신부의 다큐멘터리를 보았습니다. 많은 이들이 감동했습니다. 혼신의 힘을 다해 나환자들을 돌보고, 다른 환자들을 치료하고, 아이들에게 악기를 가르치고, 사람들 사이에 따뜻한 온기를 불어넣던 그를 통해 우리는 ‘성스러움’이 무엇인지를 배울 수 있었습니다. 많은 이들이 감동의 눈물을 흘린 것은 인간이 얼마나 아름다울 수 있는지를 그가 보여주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자기를 희생해 남을 살린 그리스도의 참다운 제자였습니다. 희생을 뜻하는 영어 단어 sacrifice는 sacrum facere라는 말에서 유래한 것인데, 그 뜻은 ‘~을 신성하게 만들다’라는 뜻입니다. 희생이 전제되지 않은 거룩함은 없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거룩한 사람인 체 하는 데 도무지 자기를 내려놓을 줄 모르는 사람, 손해 볼 생각이 없는 사람은 사실은 거룩함과는 거리가 먼 사람들입니다. 

이태석 신부만이 아닙니다. 세상의 아픔의 자리를 향해 내려가는 사람들이 참 많습니다. 그들이야말로 세상의 빛이고 소금입니다. 하지만 꼭 아프리카나 가난한 나라에 가야만 거룩한 삶을 살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거룩함이 가장 절실하게 필요한 것은 우리의 일상 자체입니다. 돈과 풍요의 환상에 사로잡힌 채, 인간다움의 길을 잃어버린 채 방황하고 있는 이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행복을 위해서라고 말하면서 헤롯의 길을 걷고 있는 이들을 보면 딱합니다. 헤롯의 길은 행복의 길이 아니라 파멸의 길입니다. 우리 각자가 예수의 마음을 품고 살 때 세상은 조금씩 밝아질 것입니다. 

•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예수님의 길은 예루살렘에서 끝납니다. 아이러니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그렇게도 사랑하는 도시 예루살렘이 예수님의 여정의 종착역이라는 사실이 말입니다. 예루살렘을 생각하면 예수님의 마음이 쓰려집니다. 평화의 도성에 평화가 없고, 가장 거룩해야 할 그곳이 가장 속된 곳으로 변하고 말았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으로 하나님의 뜻을 부인하는 성전체제에 대해 예수님은 깊이 절망하셨습니다. 그곳은 종교 권력자들의 탐욕과 오만이 지배하는 곳이었습니다. 그들의 잘못을 지적했던 예언자들은 하나같이 죽임을 당했습니다. ‘예언자가 예루살렘이 아닌 다른 곳에서는 죽을 수 없다’는 주님의 말씀은 얼마나 비장합니까? 세상에서 가장 추한 것이 타락한 종교입니다. 신앙의 내용은 사라지고 형식만 남을 때, 종교는 사람들을 생명으로 이끌지 못합니다.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예언자들을 죽이고, 네게 파송된 사람들을 돌로 치는구나! 암탉이 제 새끼를 날개 아래에 품듯이, 내가 몇 번이나 네 자녀를 모아 품으려 하였더냐! 그러나 너희는 그것을 원하지 않았다.”(34)

사순절 첫 번째 주일을 맞으면서 제게 천둥처럼 들려온 소리가 바로 이것입니다. 본질을 잃어버린 종교는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 폭력과 손을 잡게 마련입니다. 생명을 살리기 위해 힘써야 할 종교 지도자들이 작당하여 예수를 없애려 한 것을 보십시오. 자기 땅에 살면서도 마치 유배자처럼 살 수밖에 없었던 이들의 시린 마음을 어루만져주던 예수님의 여정은 예루살렘에서 끝날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죽음은 최종적인 패배가 아닙니다. 그것은 또 다른 삶의 시작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삶과 죽으심을 보았던 사람들, 고치 속에 웅크린 애벌레처럼 무시당하고 천대받는 것을 숙명처럼 받아들였던 이들이 일어서기 시작했으니 말입니다. 주님의 부활은 그러한 일어섬의 시작이었습니다.

지금 우리 앞에는 두 가지 길이 있습니다. 하나는 헤롯의 길이고 다른 하나는 예수의 길입니다. 어느 길을 택하시렵니까? 겨울을 견뎌낸 나무에서 새싹이 돋아나듯, 우리 영혼에도 예수 정신이 파릇파릇하게 돋아나기를 바랍니다. 우리는 보이지 않는 보폭으로 담장을 기어오르는 담쟁이넝쿨처럼 이 세상을 사랑으로 채우는 주님의 사역에 부름 받은 사람들입니다. 그 일이 비록 힘들다고는 하나, 오늘도 내일도 그리고 그 다음 날도 그 길에서 벗어나지 않는 우리가 되기를 기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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