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길을 바꾼 어리석음 (렘 2:35-37, 요 14:4-6)

첨부 1


길을 바꾼 어리석음 (렘 2:35-37, 요 14:4-6)


어려서부터 산에서 자라서 그 지역 산에 대해 아주 잘 아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하루는 산에 올라갔다가 길을 잃어 버렸습니다. 그는 미국의 산이 매우 광활하여 산에서 길을 잃으면 목숨을 잃기 쉽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이런 사실을 잘 아는 그 사람도 막상 길을 잃자 당황하게 되었습니다. 있는 힘을 다해 길을 찾던 중 다행히 산 속 오두막집에 혼자 살고 있는 노인을 만나 도움을 청했습니다. 그 노인은 젊은이에게 다음과 같은 충고를 하였습니다. “젊은이, 산에서 길을 잃으면 보통 사람들은 얼른 내려가서 동네나 길을 찾아야겠다고 산 밑으로 내려가지만 바로 그것이 죽는 길일세. 산 중에서 길을 잃으면 반대로 위로 올라가야 하오. 왜냐하면 어떤 쪽에 마을이 있는지 확인하고 방향을 정해 내려가야만 살 수 있기 때문이오.” 
  
올라가는 길을 가야 할 때 내려가는 길을 택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입니다. 많은 사람이 길을 잃는 것은 올라가야 할 때 내려가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사는 길은 위를 향해 있습니다. 아래로 향하는 길을 가면 고생하고, 방황하고, 죽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잃은 양의 비유가 있습니다. 양이 왜 길을 잃었습니까? 양이 길을 잃었다는 것은 잃은 양의 책임도 큽니다. 그러나 선한 목자는 길을 잃은 양의 어리석음을 탓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양이 길을 잃은 것은 양이 제 갈 길을 가지 않고 길을 바꾼 까닭입니다. 우리가 길을 잃는 것은 하나님의 길이 아닌 내 길을 가기 때문입니다. 
  
이사야 53:6에는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고 합니다. 제 길이 무엇입니까? 길을 바꾸었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이 정하신 길을 가야하는데 그 길을 바꾸어 자기의 길을 가므로 길을 잃었고 이것이 하나님께는 죄입니다. 그래서 길이신 예수님께 우리의 죄를 담당시키셨습니다. 
  
“나는 무죄하니 그 진노가 참으로 내게서 떠났다”고 유다인이 말합니다. 유다 백성의 죄질의 심각성을 말합니다. 이들은 영적으로 무감각해졌습니다. 그로 인한 뻔뻔스러움이 하나님을 노하게 만들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내가 너를 심판하리라”고 합니다. 그들이 왜 이렇게 무감각해졌습니까? 왜 이렇게 뻔뻔해졌습니까? 왜 심판을 당합니까? 그들이 길을 바꾸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들은 아무 생각 없이 여기저기 기웃거립니다. 아무데서나 추파를 던집니다. 길을 바꾼 자는 개념이 없이 살아갑니다. 
  
부산에 가면 영도 최남단에 태종대라는 관광지가 있습니다. 그 곳에는 자살바위가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자살을 하자 자살을 방지하기 위하여 가족상을 세우고 표지에 ‘다시 생각해 보시오’라고 썼다고 합니다. 어떤 청년이 죽으려고 물을 한참 바라보다 마음이 변해 자살하지 않기로 하고 돌아오는 길에 “다시 생각해 보시오”라는 표지를 보고 다시 가서 뛰어내렸답니다. 그 말의 뜻을 알아듣지 못하는 어리석은 일입니다. 갈 길을 바꾼 것입니다. 
  
요한복음 14:6에는 예수님께서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고 하십니다. 예수님은 유일한 길입니다. 하나님께로 가는 길은 오직 한길밖에 없습니다. 다른 길은 없습니다. 길을 바꿀 생각조차 하지 마세요. 하나님께로 가는 유일한 길을 잘 지키는 그리스도인이 되기를 바랍니다. 

  
첫째, 길을 바꾸는 자는 수치를 당할 것입니다. 

36절 하반절에는 “네가 앗수르로 말미암아 수치를 당함같이 또한 애굽으로 말미암아 수치를 당할 것이라”고 합니다. 옳은 길을 가지 않고 그릇된 길을 간 결과가 무엇입니가? 그 대가가 무엇입니까? 이웃나라로부터 수치를 당하게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이웃사촌입니까? 이웃웬수입니다. 
  
앗수르와 애굽은 유다 변방의 큰 나라들입니다. 어리석은 유다 백성들은 정치적으로 앗수르와 애굽을 의지하려고 하나 세상나라는 의지할 만하지 못합니다. 이 나라들은 아무리 믿는다고 하지만 유다에 수치와 굴욕과 절망만 안겨다 줄 것입니다. 앗수르는 이미 북왕국 이스라엘에 수치를 안겨다 주었습니다. 길을 바꾸는 것은 그 자체가 수치스런 일입니다. 
  
누가 길입니까? 누가 길을 인도합니까? 지금까지 그들에게 길은 하나님이십니다. 길을 인도하신 분도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길이시기에 길을 확실히 아십니다. 하나님의 사람들이 하나님의 길을 벗어나 길을 바꾸면 그 결과는 수치와, 부끄럼과, 창피밖에 없습니다. 
  
출애굽기 13:21에는 “여호와께서 그들 앞에서 가시며 낮에는 구름 기둥으로 그들의 길을 인도하시고 밤에는 불 기둥을 그들에게 비추사 낮이나 밤이나 진행하게 하시니”라고 합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자상한 인도를 받고도 길을 바꾸는 것은 어리석은 일입니다. 길을 바꾸지 않는 사람은 바른 길을 갑니다. 길을 바꾸는 사람은 바른 길을 가지 못합니다. 
  
길을 인도하시는 하나님은 모든 것의 길을 정하신 분입니다. 우뢰의 길을 내시고, 모든 생물과 별들의 길을 내신 분이십니다. 해 
와 달과 별과 바람과 모든 생물의 길을 만드신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길이신 하나님이 모든 것의 길을 내신 것입니다. 그런데 그 길을 바꾸면 되겠습니까? 그 길을 바꾸고 평안이 있겠습니까? 
  
성경에는 시편의 기자가 “주께 피하오니 수치를 당치 않게 하소서”라고 합니다. “주의 율례를 따르오니 수치를 당치 않게 하소서”라고 합니다. 수치를 당하지 않는 것은 우리 모두의 소망입니다. 그런데 수치를 당할 일을 해놓고 수치를 당치 않게 해 달라고 하면 되겠습니까? 길을 바꾸지 않으면 수치를 당하지 않습니다. 
  
길을 바꾸는 자는 수치를 당합니다. 다른 길을 가던 사람들의 종말을 보세요. 마태복음 7:22에는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 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치 아니하였나이까”라고 불법을 행하던 사람들이 말합니다. 그 때 주님은 “내가 너를 도무지 알지 못한다”고 하십니다. 마태복음 25장의 열처녀의 비유에는 신랑을 기다리다 기름이 모자란 다섯 처녀가 “주여 주여 열어주소서”라고 하지만 “내가 너희를 알지 못한다”고 합니다. 얼마나 수치스런 일입니까? 아마 신랑은 “너 들러리 맞아?”라고 할 것입니다. 요즘 애들 말로 ‘부끄부끄^^’ 할 것입니다. 
  
예수님이 재림하시는 종말이 되면 별이 떨어지고, 해가 빛을 잃고, 하늘이 종이처럼 말리게 될 것입니다. 그 때 구원받지 못한 자들은 “바위야 나를 가리워라”, “산아 나를 가리워라”라고 하게 된다고 합니다. 또 성경은 마지막 심판 날에 양은 오른 편에, 염소는 왼 편에 나누신다고 합니다. 오른 쪽인 줄 알고 하나님 앞에 섰는데 “너 왼쪽으로 가”라고 하면 얼마나 수치스럽겠습니까? 세상을 살 때 길을 바꾸면 하나님 앞에 가서 왼쪽 길로 가야합니다. 
  
대통령이 초청하는 모임에 갔습니다. 의례 내 이름이 초청자의 명단에 있다고 해서 갔는데 입구에서 이름이 없습니다. ‘이름이 없습니다. 저리 가세요’라고 한다면 돌아서는 게 어려운 것이 아니라 부끄럽기 짝이 없을 것입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나라에는 ‘생명책에 기록된 자만 들어가리라’고 합니다. 이름이 없는 자는 불 못에 들어간다고 합니다. 이 세상을 살면서 길을 바꾼 사람들이 마지막에 얼마나 큰 수치를 당할 것인가를 말합니다. 
  
2008년 미국 LA에서 최악의 열차 사고가 났습니다. 그 사고는 철로차단기를 잘못 내려 난 사고였습니다. 차단기의 잘못으로 기차가 다른 길로 갔습니다. 길을 바꾼 기차가 충돌 사고를 일으킨 것입니다. 작년에도 미국에서 비슷한 기차 사고가 났는데 길을 바꾼 기차가 사도를 낸 것입니다. 길을 바꾼 어리석음입니다. 인간의 과학과 지혜가 하나님의 어리석음보다 못합니다. 아무리 길을 잘 일러줘도, 기계가 잘 인도한다고 하더라도, 컴퓨터가 지시해도, 내비게이션이 안내를 해도, 인간의 기술, 지식, 정보는 하나님의 길과는 상대가 안 될 것입니다.  
  
시편 25:3에는 “주를 바라는 자들은 수치를 당하지 아니하려니와 까닭 없이 속이는 자들은 수치를 당하리이다”라고 합니다. 이 말을 조금 바꾸면 “주의 길을 가는 자들은 수치를 당하지 아니하려니와, 까닭 없이 길을 바꾸는 자들은 수치를 당하리이다”입니다. 천국 가는 기차를 탄 여러분, 절대 갈아타지 마세요. 하나님의 나라에 가는 데는 환승역이 없습니다.  중간 기착지도 없습니다. 단지 종착역만 있습니다. 한 번 정한 길을 바꾸지 않는 지혜가 있기를 바랍니다. 

  
둘째, 길을 바꾸는 자는 형통하지 못합니다. 

37절 하반절에는 “네가 의지하는 자들을 나 여호와가 버렸으므로 네가 그들로 말미암아 형통하지 못할 것임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역사의 수레바퀴는 하나님이 돌리십니다. 바 퀴는 헛 돌지 않습니다. 뒤로 돌지 않습니다. 항상 바로 돌아갑니다. 그런데 길을 바꾸면 바퀴가 헛돕니다. 뒤로 돕니다. 돌지 않습니다. 그래서 형통하지 못한 것입니다. 
  
형통이란 말은 국어사전에는 “모든 일이 뜻과 같이 잘 되어 감”이라고 합니다. 세상에 모든 일이 자기 뜻대로 되는 사람은 없습니다. 자기 뜻대로 되는 사람이 없기 때문에 세상의 논리로는 형통할 수가 없습니다. 
  
성경은 하나님과 함께 하는 삶을 사는 것을 형통이라고 합니다. 비록 내 뜻대로 안 돼도 하나님의 뜻대로 되면 형통입니다. 요셉은 억울하게 종살이하고 옥살이했지만 그것이 형통이라고 성경은 말합니다. 예수님은 고통스럽지만 십자가의 길을 가는 것이 형통입니다. 베드로는 거꾸로 십자가에 못박히는 것이 형통입니다. 바울은 수 없이 매를 맞고 목 베임을 당하는 것이 형통입니다. 
  
디모데후서 3:12에는 “무릇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핍박을 받으리라”고 합니다. 그리스도가 주신 바른 길을 가는 자는 핍박을 받을 것입니다. 핍박을 받지만 이 길이 참 길이며 이렇게 사는 것이 형통입니다. 예수님께서도 팔복에서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는 자가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의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핍박을 받아도 천국을 얻으니 당연히 형통이지요.  
  
양을 많이 키우는 곳에 가면 산과 언덕에 옆으로 줄이 그어져 있습니다. 이 줄은 양들이 항상 같은 길을 따라다녀 생긴 양의 길입니다. 양은 가보지 않은 생소한 길을 가는 것을 두려워합니다. 그래서 늘 다니던 길만 가다보니 산에 줄을 친 듯 길이 나 있습니다. 모험을 싫어하고, 길을 바꾸지 않으므로 큰 어려움이 없이 살아갑니다. 그러나 그 길이 빗나가거나 길을 바꾸면 길을 잃게 됩니다. 
  
시인 윌러스 스티븐스는 ‘세상 안의 길이 세상 밖의 길보다 찾기가 더 어렵다’고 하였습니다. 세상 안은 복잡합니다. 길이 얽히고 꼬여 찾기가 힘이 듭니다. 그래서 우리는 길을 찾는 내비게이션이 필요합니다. 우리의 길을 바르게 인도할 내비게이션은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께서는 길을 바르게 인도하십니다. 
  
오래 전 섬기던 교회의 대학생들이 농촌봉사활동을 하는 동안 학생들을 돌아보기 위하여 차를 운전하고 떠났습니다. 전라북도 어디엔가 한 팀이 가 있었는데 지도를 보고 그 곳을 운전하며 찾아갔습니다. 짧은 길이 지도에 있어서 그 길을 따라 갔습니다. 

요즘은 포장도로나 비포장도로가 구분도 되어 있고 내비게이션 아줌마가 길을 잘 가르쳐주는데 옛날 지도에는 그런 것이 자세하지 않았습니다. 짧은 길을 따라가는데 그 길이 알고 보니 섬진강 댐을 한 바퀴 도는 길이었습니다. 포장이 되어 있지 않은 길인데 굵은 돌도 있고 승용차가 가기엔 적절하지 않는 길이었습니다. 중간쯤 가다가 지쳐서 쉬려고 보니 구멍가게가 하나 있었습니다. 주인아주머니에게 물어보니 중간쯤 왔다는데 어쩌다 저같은 사람이 한 둘씩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 길을 가면서 많은 교훈을 얻었습니다. 길이 다 길이 아닙니다. 바른 길이 있고 형통한 길이 있습니다. 길을 잘 못 선택하거나 길을 바꾸면 세상살이가 고달픈 것입니다. 길이 아니면 얼른 돌아나와야 합니다. 
  
창세기 24:48에는 아브라함의 늙은 종 엘리에셀이 이렇게 말합니다. “나의 주인 아브라함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나를 바른 길로 인도하사 나의 주인의 동생의 딸을 그 아들을 위하여 택하게 하셨으므로 내가 머리를 숙여 그에게 경배하고 찬송하였나이다”. 바른 길을 인도하시고 길을 형통하게 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바른 길을 찾는 법은 여호와께 의존하면 됩니다. 길을 바꾸지 않으면 언제나 형통합니다.  
  
잠언 10:9에는 “바른길로 행하는 자는 걸음이 평안하려니와 굽은 길로 행하는 자는 드러나리라”고 합니다. 이사야 57:2에는 “그는 평안에 들어갔나니 무릇 정로로 행하는 자는 자기들의 침상에서 편히 쉬느니라”고 합니다. 바른 길을 가는 사람들은 이 세상에서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에서도 평안합니다. 
  
아버지와 아들이 사막 길을 가고 있었습니다. 날씨가 뜨거웠고 길이 지루하였습니다. 아들은 “아버지, 저는 힘이 다 빠진데다가 목이 타서 죽겠어요”라고 하였습니다. 아버지는 “아들아, 용기를 내라. 선조들도 이 고통의 길을 다 걸어갔단다. 이제 곧 마을이 나타날거야.” 아버지와 아들은 계속 걸었습니다. 아들이 가다가 공동묘지를 보고 다시 말합니다. “아버지, 저것 보세요. 우리 선조들도 여기서 모두 죽어갔지 않았습니까? 도저히 더 이상 못가겠어요”. 그 때 아버지가 말합니다. “아들아! 공동묘지가 있다는 것은 이 근방에 동네가 있다는 표시란다.” 길을 바꾸면 오히려 더 위험합니다. 길을 바꾸면 죽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아버지는 지혜가 있어 길을 바꾸지 않고 꾸준히 갔습니다. 이것이 사는 길입니다. 바른 길을 가는 사람은 죽음을 봐도 죽지 않고 마침내 목적지에 무사히 도착합니다. 
  
이 찬송은 언제 불러도 힘이 납니다. “나의 갈 길 다가도록 예수 인도하시니 내 주 안에 있는 긍휼 어찌 의심하리요 믿음으로 사는 자는 하늘 위로 받겠네. 무슨 일을 만나든지 만사형통하리라. 무슨 일을 만나든지 만사형통하리라”. 무슨 일을 만나든지 만사형통합니까? 무슨 일이든 하나님과 함께 합니까? 무슨 일을 만나든지 하나님이 함께 하시면 이것이 만사형통의 비결입니다. 

  
결론 

탈무드에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한 나그네가 길을 가는 데 마차를 만났습니다. 나그네는 너무 다리가 아파서 태워 달라고 요청하였습니다. 마부는 기꺼이 타라고 허락하였습니다. 나그네가 마부에게 물었습니다. “나는 예루살렘까지 가는 데 예루살렘까지는 여기에서 얼마나 되나요?” 마부는 “이 정도 속도라면 30분 정도 걸리지요”라고 했습니다. 나그네는 고맙다고 인사를 하고 조금 자고 일어나 보니 30분 정도 지났습니다. “예루살렘에 다 왔지요?” 마부는 “여기서는 한 시간 거리요”라고 합니다. “아니, 30분 걸린다는 데 30분 오셨지 않아요?” 그 때 마부가 말합니다. “이 마차는 반대로 가는 마차예요”. 마차를 타는 것은 좋지만 바른 방향으로 가는 것이 중요합니다. 방향은 속도보다 중요합니다. 많은 사람들은 방향은 생각하지도 않고 아무 길로나 갑니다. 빨리 가는 것만 생각하고, 편히 가는 것만 생각하고 길을 떠납니다. 길을 바꾼 결과는 이전보다 더 못하고 더 어려워진다는 것입니다. 
  
성자 아우구스티누스는 ‘비틀거리며 절며 바른 길을 가는 것이 꼿꼿이 서서 그릇된 길로 가는 것보다 낫다’고 했습니다. 때때로 우리의 길이 어려울 수도 있습니다. 비틀거릴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바른 길을 가는 것이 생명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걷는 자세를 보지만 하나님의 사람들은 가는 방향을 봅니다. 
  
예수님은 유일한 길이십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은 바른길을 가야 합니다. 빨리 가려고 애쓰지 말고 바른 방향으로 가려고 애쓰세요. 한 번 믿음으로 정한 길을 바꾸지 말고 바르게 하늘나라를 향하여 가는 우리가 되기를 바랍니다. (이성희 목사)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