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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냉정과 열정 사이 (눅 10:30-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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냉정과 열정 사이 (눅 10:30-37) 
 
 
❚너무 흔해서

오늘 ‘뜨거운 교회’ 시리즈 설교의 세 번째 마지막 시간으로 예수님의 그 유명한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살펴보려 합니다. 이 비유에서 냉정과 열정의 차이가 무엇인지 함께 느껴보면 좋겠습니다. ‘냉정’(冷情)과 ‘열정’(熱情), 기껏해야 한 글자 차이인데 그 의미가 180도 정반대입니다. 그래서 ‘냉정’과 ‘열정’ 사이는 거리가 어마어마하게 멉니다. 오늘 설교 제목을 <냉정과 열정 사이>라고 정한 것도 이 둘 사이가 얼마나 다른지 느껴보자는 것입니다.

사실, 이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는 ‘흔한’ 비유입니다. 워낙 유명한 비유여서 교회 좀 다녀본 사람이라면 내용을 다 알고 있습니다. 저도 그동안 이 비유를 가지고 적어도 네다섯 번 정도 설교한 것 같습니다. 하지만 과연 자주 들었다고 해서 잘 안다고 할 수 있을까요? 너무 흔한 비유라서 뻔하다? 아닐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오늘 이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는 너무 유명한 만큼 그 속에 들어있는 의미도 너무나 깊고 깊습니다. 그래서 파들어 가면 갈수록 더 깊고 귀한 진리가 나옵니다. 오늘은 이 ‘흔한’ 비유를 가지고 두 종류의 사람에 집중해서 살펴보고자 합니다. 아마 조금은 색다른 내용이 나올 지도 모릅니다. 그동안 보던 시각과 조금 다른 각도에서 보면 또 다른 맛이 나올 것입니다. 그래서 이 비유가 정말 귀한 비유인 것입니다.

오늘은 이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에서 두 종류의 사람을 살펴보려 합니다. 바로 ‘냉정한 사람’과 ‘열정의 사람’입니다. 지난 두 주간 살펴본 것처럼 냉정한 사람은 하나님이 참 싫어하십니다. 제아무리 똑똑하고 잘나고 좋은 조건을 갖추어도 하나님은 차가운 사람, 냉정한 사람은 사용하지 않습니다. 거들떠보지도 않으십니다. 반대로 ‘열정을 가진 사람, 뜨거운 사람’은 좀 모자라도, 문제가 있어도 하나님이 쓰십니다. 고쳐서라도 쓰시고, 필요한 것을 다 채워서라도 쓰십니다. 그런데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에는 어떤 ‘냉정한 사람’과 ‘열정의 사람’이 등장할까요? 또 이 두 종류의 사람 사이에는 어떤 어마어마한 차이가 있을까요?

❚냉정한 사람들

제일 먼저 주목할 등장인물은 30절에 등장하는 ‘강도’들입니다. 이 강도들은 어떤 사람들일까요? 30절에 보면 이런 말로 비유가 시작됩니다.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다가...” 아마 예수님께 비유를 듣던 사람들은 이 말을 들은 순간 등골이 오싹해졌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는 길’은 당시 강도들이 우글거리던 우범지역이었기 때문입니다. 오래 전 미국 시카고에 갔다가 밤중에 심심해서 몇 사람과 같이 숙소를 나와 ‘할렘’이라는 지역으로 밤나들이를 간 적이 있었습니다. 거리를 걷는데 길거리 사람들이 전부 흑인들이라 좀 이상하긴 했습니다. 

그런데 그 다음날 그 지역에 사는 분이 깜짝 놀라며 “제 정신으로 그런 행동을 했냐?, 심지어 “총 안 맞은 것이 다행”이라고 말합니다. 그 지역은 흑인들이 주로 사는 엄청난 우범지역인데 그런 동네를 밤중에 겁 없이 싸돌아다니다 총 안 맞은 것이 다행이라는 뜻인데 그 말을 듣는 순간 정말 등골이 오싹해 졌습니다. 예수님 당시 해발 600~800미터의 고지대인 예루살렘에서 해발 -250미터에 위치한 여리고까지 내려가는 길은 구불구불하고 험하며 동굴이 많아서 여행객들을 털려는 강도들이 늘 우글거렸습니다. 그런데 그런 길을 겁도 없이 이 사람은 혼자 여행한 것입니다. 지금도 이 지역은 우범지역이어서 가이드가 반드시 혼자 가지 말고 그룹을 지어 가도록 안내합니다. 저도 시카고에서 혼자 할렘에 갔다면 어떻게 되었을지 모르는데 다행히 여러 명이 떼를 지어 가서 무사했던 것입니다.

아무튼 이 여행객은, 아마도 유대인이었을 텐데 무슨 이유에서였는지 겁도 없이 이 우범지역을 혼자 간 것입니다. 그러니 강도들에게는 “나 좀 털어가시오” 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였지요. 강도들은 옳다구나 하고 이 사람을 습격했습니다. 그리고 있는 것을 다 빼앗고 옷까지 벗기고 흠씬 두들겨 패서 거의 죽을 지경에 이른 사람을 내버려 두고 갑니다. 어떻게 했다고요? ‘버리고 갔다’고 했습니다. 물건 다 빼앗고 단물 다 뽑아 먹었으니 이 사람이야 죽든 말든 상관없이 독수리 밥이 되라고 버리고 간 것입니다. 이것이 전형적인 냉정한 사람의 특징입니다. 

반드시 나에게 이익이 되어야만 행동합니다. 나아가 내 이익을 위해서는 폭력도 서슴지 않습니다. 그리고 이익이 다 빠졌다 싶으면 외면하고 버리고 갑니다. 세상에는 의외로 이 강도들처럼 사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아니, 어쩌면 우리도 이 강도들처럼 사는지 모릅니다. 우리가 다른 사람을 대할 때 내게 이익이 되는지 안 되는지를 기준으로 대한다면, 그리고 이익이 없고 영양가가 없다고 생각되면 언제든지 버릴 수도 외면할 수도 있다고 한다면 우리는 강도처럼 사는 사람들인 것입니다. 나아가 내 이익을 위해서라면 어떤 수단방법도 안 가린다, 다른 사람이야 피해를 입든 어찌 되든 상관없다 한다면 그 사람은 진짜 강도 같은 사람입니다.

그 다음으로 등장하는 전형적인 냉정한 사람은 35절에 등장하는 ‘주막 주인’입니다. 주막 주인은 사마리아 사람이 환자를 데리고 오자 돈을 받고 돌보아 줍니다. 사마리아 사람이 나중에 와서 비용이 더 들었다면 반드시 갚겠다고 약속하자 강도 만난 사람을 돌보아 줍니다. 뭐 잘못 된 것 있나요? 죄 지었나요? 아니죠. 정당하게 돈 받고 한 일인데요. 하지만 이 ‘주막 주인’은 말 그대로 계산대로만 행동하는 사람입니다. 내게 주는 만큼만 상대방에게 해줍니다. 절대 손해 볼 일은 안 합니다. 냉철한 계산에 의해 딱 준만큼 갚아주기 때문에 저 사람이 나에게 돈이나 친절이나 시간을 준만큼만 그대로 돌려주고, 반대로 나에게 악이나 해를 가하면 딱 그만큼 그대로 돌려줍니다. 물론 죄는 아닙니다. 하지만 전형적인 냉정한 사람, 계산적인 사람입니다. 세상에는 이런 사람들이 정말 많습니다. 혹 우리도 그 가운데 속하지는 않는지요?

❚의외의 사람들

이렇게 세상에는 냉정한 사람들, 즉 강도같이 내 이익을 위해서라면 수단방법 안 가리고 남도 짓밟는 사람들, 그리고 계산대로만 사는 주막 주인 같은 사람들이 많은데 이 비유에는 참으로 의외의 사람들이 등장합니다. 바로 제사장과 레위인입니다.

제사장이라면 레위인 중에서도 오직 아론의 자손만 해당됩니다. 당시 종교지도자 중에 최고위층에 속하며, 예루살렘 성전에서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는 거룩한 직분을 맡은 사람들입니다. 레위인 역시 제사장은 아닐지라도 성전에서 거룩한 일을 맡은 구별된 사람들입니다. 이들은 당시 유대교를 이끌어가던 대표적인 종교지도자이기에 굳이 오늘날 말로 바꾼다면 교회의 목사님과 장로님 쯤 될까요? 그런데 누구보다 본이 되어야 할 이 제사장과 레위인이 강도 만나 죽어가는 사람을 보고도 어떻게 했습니까? 31절과 32절에 보면 제사장과 레위인은 글자 하나 안 틀리고 똑같이 행동합니다. “그를 보고 피하여 지나갔다.” 있을 수 없는 일이지요. 

말도 안 되지요. 목사님이, 장로님이 눈앞에 사람이 죽어 가는데도 모른 척 피해갔다? 9시 뉴스에 날 일이지요. 이런 뉴스 한 번 나면 또 벌떼처럼 일어나 공격하겠지요. 그런데 여러분, 놀라지 마십시오. 당시 예수님의 비유를 듣던 유대인 중에는 제사장의 행동을 이상하게 생각한 사람이 단 한 사람도 없었다는 것입니다. 왜 그럴까요? 바로 구약의 ‘정결법’(淨潔法) 때문입니다. 주로 구약 레위기에 등장하는 이 정결법은 유대인들이, 그중에서도 제사장이나 레위인 같은 종교지도자들은 목숨보다 소중히 여기고 반드시 철저하게 지킨 법입니다.

그런데 이 정결법 가운데 레위기 21장 1절에 보면 “제사장은 그의 백성 중에서 죽은 자를 만짐으로 말미암아 스스로를 더럽히지 말라”고 규정하고 있습니다. 시체를 만져 부정을 탄 제사장은 7일 동안 부정하게 되어 그 기간에 성전에서 제사를 드릴 수 없게 됩니다. 심지어 제사장 중에 뽑힌 대제사장은 부모가 돌아가셔도 그 시신을 만지면 안 됩니다(레 21:11). 그 정도로 거룩한 일을 하는 제사장은 여느 백성들보다 철저하게 정결법에 따라 자신을 깨끗하게 지켜야 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아마 이 제사장은 그 강도 만난 자가 이미 죽었다고 판단했는지 모릅니다. 

성경에도 흠씬 두들겨 맞아 거의 죽게 되었다고 하니 이 벌거벗은 피투성이 몸을 보고 죽었다고 생각할 만도 합니다. 구약에 보면 제사장은 24개 반으로 나누어져 1년에 고작 두 주밖에 성전에서 봉사하지 않는데 왜 이 제사장이 그 소중한 기회를 그깟 이미 죽었을지 모르는 시체를 만져서 날려버리겠습니까? 그러니 제사장이 강도 만난 자를 보았을 때 시체를 만져 부정해질까봐 ‘피해’ 간 것은 당연한 일이라 하겠습니다.

그런데 레위인의 경우는 좀 다릅니다. 레위인은 굳이 이 정결법 규정에 구애받지 않기 때문에 제사장과는 사정이 다릅니다. 그러면 레위인은 왜 강도 만난 자를 보고도 피해 간 것일까요? 어떤 이들은 이렇게 봅니다. 아마 앞서 가던 제사장이 강도 만난 자를 보고도 그냥 내버려 두고 가는 것을 보았을 것이다. 그러니 “제사장도 피하는데 내가 굳이...” 하고 그냥 갔다는 것입니다. 물론 이 이유도 그럴 듯 하지만 아마 또 다른 이유를 찾는다면 이런 것이 아닐까 싶네요. 레위인은 이런 생각을 한 것 같습니다. “언제 나도 강도를 만날지 알 수 없지 않은가?” 혹시 압니까? 강도들이 주변에 숨어 이 사람을 미끼로 삼아 도와주러 오는 사람을 또 털려고 들는지 말입니다. 당시 이런 일은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었기에 레위인이 두려워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제사장도 마찬가지겠지요.

자, 제사장과 레위인을 손가락질하기 전에 우리가 만약 그들과 같은 입장이었다면 어떻게 행동했을지 생각해 봅시다. 우리는 아마 피해가는 정도가 아니라 걸음아 나 살려라 하고 줄행랑을 쳤을지 모릅니다. 그만큼 제사장이나 레위인이 강도 만난 자를 보고도 피해 갈 이유가 충분했던 것입니다. 남의 사정도 모르면서 함부로 손가락질 하지 맙시다. 제사장과 레위인도 무척 억울해 했을 것입니다. 직분 상, 혹은 내 안전 상 충분히 그럴 수 있고, 그러기에 강도 만난 자를 피해갔다고 해서 법을 어기거나 죄 지은 것은 아니라는 말입니다.

하지만 말입니다. 그 어떤 이유로도, 그 어떤 핑계로도 죽어가는 사람을 보고 그냥 지나친 것은 정당화 될 수 없습니다. 당연히 먼저 생명을 살렸어야 합니다. 만약 제가 교회 예배시간에 늦어 허겁지겁 오는데 교통사고로 죽어가는 사람을 목격했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여러분이 좀 알려주세요. 당연히 그를 살리는 일부터 먼저 해야지요? 혹 제가 그의 생명을 살리는 일 때문에 예배에 늦거나 심지어 못 왔다고 해서 하나님이 저를 ‘게으르고 악한 종’이라고 책망하시겠습니까? 아니면 여러분이 “어떻게 목사가 예배 안 오고 사람을 살리나?” 비난하겠습니까? 그렇습니다. 

다른 어떤 일보다 생명이 먼저입니다. 하나님도 그것을 원하십니다. 이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았을 제사장과 레위인이 이렇게 행동한 것은 그 어떤 핑계로도 정당화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사장과 레위인 역시 규정을 핑계로, 혹은 자기 안전을 핑계로 마땅히 베풀어야 할 선행을 피해 간 냉정한 사람 부류에 들어갈 수밖에 없습니다. 앞서 등장한 강도나 주막 주인과 크게 다를 바 없는 부류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기억하십시오. 하지 말라는 것을 하는 것만 죄인가? 아닙니다. 마땅히 해야 할 일을 안 하는 것도 죄입니다. 그렇다면 제사장이나 레위인은 이런 죄를, 마땅히 베풀어야 할 자비를 외면한 냉정의 죄를 저지른 자들인 것입니다.

❚작은 차이, 큰 차이

그런데 이 제사장과 레위인이 강도 만난 자를 보고 행동한 것과 사마리아 사람이 똑같이 강도 만난 자를 보고 행동한 것을 비교해보면 아주 재미난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같은 동사(動詞)와 다른 동사가 나타나는 것입니다. 다시 봅시다. 제사장과 레위인은 강도 만난 자를 어떻게 했습니까? “보고 피하여 지나” 갔지요?(31절과 32절) 그런데 사마리아인은 어떻게 합니까?(33절) “보고 불쌍히 여겨” 그 다음에 한 일이 참 많습니다. 동사만 봐도 34절에 ‘붓고’ ‘싸매고’ ‘태워’ ‘데리고 가서’ ‘돌보아 주니라’가 나오고, 또 36절에 ‘내어 주며’ 비용이 더 들면 ‘갚으리라’가 나옵니다. 보세요. 제사장과 레위인, 그리고 사마리아 사람은 똑같은 동사 ‘보고’가 나오고 그 다음에 다른 동사가 나오지요? ‘피하여 지나가고’와 ‘불쌍히 여겨’의 차이일 뿐인데 이게 글씨로는 별로 차이가 안 나지만 실로 엄청난 차이입니다. 바로 냉정과 열정의 차이입니다.

제사장과 레위인은 똑같이 강도 만난 자를 ‘보고’도 ‘피하여 지나’갑니다. 이들은 전형적인 냉정한 사람들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냉정’은 ‘머리가 차갑고 가슴도 차가운 것’을 뜻합니다. 머리가 얼마나 냉철합니까? 그 사람을 본 순간 그 짧은 순간에도 머리가 팍팍 돌아갑니다. “지금 이 사람 만지면 시체 만지는 것이니까 큰일 나지.” “지금 괜한 동정심에 도우려 하다가는 나도 강도 만나 이 꼴이 될지도 몰라.” 얼마나 냉철한 이성으로 정확한 판단력으로 생각하는지 모릅니다. 우리에게도 이런 판단력과 이성은 필요합니다. 하지만 문제는 이들이 머리만 차가운 것이 아니라 가슴도 차가웠다는 사실입니다.

똑같이 사마리아 사람도 강도 만난 자를 봅니다. 그리고는 ‘불쌍히’ 여깁니다. 그래서 모든 가능한 방법을 총동원해 그를 돕습니다. 여기서 ‘불쌍히 여긴다’는 말은 ‘동정심을 느끼는 것’입니다. 마음이 뜨거워지면서 불쌍한 마음이 들어 앞뒤 안 가리고 돕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사마리아 사람은, 유대인들이 혼혈아라고 그토록 천시하고 개만도 못하다고 깔보던 사마리아 사람은 정말 가슴이 뜨거운 사람입니다. 불쌍한 마음이 든 다음에 제일 먼저 기름과 포도주를 상처에 붓고 싸맨 것은 응급처치를 한 것이고 주막에 데려가 돌보아 준 다음 자기는 떠나면서(당시 천대 받던 사마리아 사람들이 가질 수 있는 직업은 얼마 없었습니다. 

짐승, 아마도 나귀를 타고 다니며 시간에 쫓기는 것을 보면 아마 이 사마리아인은 장사를 하던 사람인 것 같습니다. 그러니 시간에 쫓겨 강도 만난 사람을 마냥 간호할 수는 없었을 것입니다) 돌아와 추가 비용이 들면 더 주겠다고 하는 것을 보세요. 아주 치밀하고 계산적인 사람입니다. 앞뒤가 딱딱 맞게 이성적으로 판단하고 행동합니다. 그러니 머리는 차갑고 냉철한 것이 틀림없습니다. 그런데 제사장이나 레위인처럼 머리는 차갑지만 한 가지 분명히 다른 것은 가슴이 뜨거웠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전혀 다르게 행동하지요. 그는 가슴 속에 열정과 뜨거움을 가진 사람이었던 것입니다.

머리는 차갑고 가슴은 뜨거워야지 머리도 뜨거우면 큰일입니다. 간혹 머리도 뜨겁고 가슴도 뜨거운 사람이 있습니다. 교회 안에서도 열정과 열심만은 누구 못지않은데 문제는 마음이 너무 급해서, 주변 상황 안 살피고, 다른 사람 안 보고 열심만 가지고 달려가다가다가 생깁니다. 좌충우돌 부딪히고 말썽이 생깁니다. 그래도 이런 사람이 머리와 가슴이 다 차가운 사람보다는 훨씬 낫습니다. 그래도 머리는 차갑고 가슴은 뜨거운 성도가 가장 바람직합니다.

말씀을 맺읍시다. 오늘 우리는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라는 잘 알려진 비유를 통해 제사장과 레위인, 그리고 사마리아 사람의 차이가 무엇일까 생각해 보았습니다. 그렇습니다. 강도나 주막 주인은 말할 것도 없고, 당시 최고 종교지도자라고 하는 제사장과 레위인이 하나님의 마음, 열정, 한 생명을 향한 불타는 사랑을 읽지 못하고 그깟 법조문에 얽매고, 자신의 안전에 얽매어 행동한 전형적인 냉정한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법만 지키면, 죄만 안 지으면 된다는 생각 말입니다. 

“나는 모범시민, 모범성도”라는 생각 말입니다. “이 정도면 나는 잘 믿는 성도”라는 생각 말입니다. 그러나 아니라는 것입니다. 뜨거운 가슴, 뜨거운 사랑, 생명 살리는 마음 없으면 진정한 성도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나아가 사마리아 사람처럼 원수라도, 나를 미워하는 자, 반대하는 자라도, 또 거꾸로 나를 함부로 대하고 무시하는 사람이라도 그 생명을 소중히 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결론은 36절과 37절에 나옵니다.

36 네 생각에는 이 세 사람 중에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겠느냐 37 이르되 자비를 베푼 자니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 하시니라

여기 우리가 할 일이, 우리 교회가 할 일이 나옵니다. 그것은 “너도 가서 이와 같이 하라!”는 것입니다. 누구처럼 하라는 것입니까? 사마리아 사람이지요. 또한 하나님의 뜨거운 마음, 그 끓어오르는 가슴을 닮아 그렇게 실천하라는 뜻입니다. 어떤 규정보다(우리가 너무 쉽게 얽매는), 어떤 법이나 전통보다, 그리고 어떤 이유나 핑계보다 먼저, 하나님의 본디 의도를 따르는 일이 먼저라는 것입니다. 한 영혼을 뜨겁게 사랑하고 그를 위해 다 내어주는 것입니다. 그래야 우리 교회에, 그리고 성도 여러분의 주변에 생명의 역사가 일어나고 변화가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세 차례에 걸쳐 살펴본 “뜨거운 교회, 뜨거운 성도”라는 말씀을 맺으며 우리 효자교회가, 우리 교회 성도들이 다른 어떤 것보다 뜨거운 가슴을 가지고, 하나님의 뜨거운 마음을 닮아 서로 뜨겁게 사랑하며, 한 영혼을 향해 뜨겁게 불타오르는 성도가 되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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