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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주님만을 증거하는 교회 (마 9:35-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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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만을 증거하는 교회 (마 9:35-38)

 
남을 위해서 자신의 것을 내어놓을 때 우리는 기쁨을 누릴 수 있습니다

한 통의 편지를 소개해드리려고 합니다. 이번 겨울 방학에 우리 교회의 중고등부 학생들이 캄보디아로 단기선교를 다녀왔습니다. 이 단기선교 마지막 날 밤에 자신들이 겪었던 여러 가지 느낌과 생각들을 글로 써서 하나님에게 보내는 편지를 썼습니다. 그 중에 한두 편의 편지를 여러분에게 소개하고자 합니다. 여고 1학년생의 글입니다. 

“오늘은 어린이 집에서 아이들에게 사랑을 나누어 주었습니다. 처음엔 낯설어 하는 것 같았지만, 제가 먼저 사랑을 주니깐 아이들도 저에게 사랑과 기쁨으로 응답해주었습니다. 그 순간은 제가 마치 아이들의 엄마가 되어 아이들에게 국을 떠주듯 제 마음을 퍼주었습니다. 그때 하나님의 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사람에게 사랑과 기쁨과 하나님을 전하는 마음은 세상에서 가장 값 비싼 일이면서 쉽게 나누어줄 수 있는 것이라는 사실도 또한 깨달았습니다. 저에게는 오늘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날이었습니다.” 

그동안 누군가에게 사랑만 받던 나도 사랑할 수 있다는 것, 나도 남에게 줄 것이 있다는 것, 내가 가진 것을 남에게 베풀 수가 있다는 사실을 보면서 뿌듯한 기쁨과 영적인 용기를 얻으면서 마음속에 감사의 고백을 하나님께 드린 내용입니다. 

이번에는 남고 3학년생의 편지입니다. 

“이곳 캄보디아에서 목표와 꿈, 희망이 없이 사는 사람들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그런 희망과 꿈이 있다고 해도 그것을 이룰 수 있는 여건과 형편이 안 돼 공부하지 못하는 아이들을 보면서 저는 너무 부끄러웠습니다. 그리고 생각했습니다. 나는 너무 행복한 사람이구나. 나는 정말 가진 것이 많았구나. 저는 주님의 사랑과 가족의 사랑을 받는 것이 얼마나 귀하고 소중한 것인지를 느꼈습니다. 이제는 주님께서 하시는 일에 제가 쓰임 받고 싶습니다.”

우리 자녀들의 마음속에 남을 긍휼히 여기는 마음이 생겼습니다.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생겼습니다. 하나님께서 내 인생에 중요한 소명과 사명을 주신다는 사실을 경험했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감사하는 마음을 가졌습니다. 내 어머니와 아버지가 얼마나 소중한 분인지, 그리고 내 조국 대한민국이 얼마나 자랑스러운 나라인지, 그리고 내가 먼저 예수님을 믿었다는 것이 얼마나 감사한지를 고백하고 있습니다. 

나 자신을 위해서 살 때에는 참된 기쁨이 없습니다. 남이 나보다도 많이 가진 것만 보입니다. 남이 나보다도 높은 자리에 있는 것만 보입니다. 남이 나보다도 건강한 것만 보입니다. 그런데 병든 사람, 연약한 사람, 없는 사람, 외로운 사람, 힘든 사람을 만나보거나 그들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내게 있는 것을 나누어주다 보면 내가 가진 것이 감사하고 내 어머니와 아버지가 감사하고 내게 주신 이 축복이 감사하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종종 그런 말씀을 드리지 않습니까? 우리 성도님들이 1년에 한두 번은 다른 일 젖혀놓고 봉사도 나가보시고, 남이 전도 나갈 때 함께 참여해보시고, 남이 선교 나갈 때 잠시 모든 것 내려놓고 참여해보면 마음속에 그 어떤 보람과 기쁨보다 더 큰 기쁨을 누릴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이 사람을 그렇게 만드셨습니다. 자기의 것만 계속 채우면 기쁨을 누리지 못합니다. 그러나 남을 위해서 내가 가진 것을 내어놓을 때 우리는 마음속에 기쁨을 얻을 수 있고, 감사할 수 있고, 내가 가진 것만으로도 하나님을 찬양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우리는 복음의 열정을 지닌 하나님의 사람들에게 빚진 사람들입니다

다른 편지 하나를 소개하려고 합니다. 130년이 지난 편지로 이수정이라고 하는 사람의 편지입니다. 이 땅에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들어오기 전의 사건이었습니다. 이수정이라는 사람은 일본에서 개화된 문명을 공부하고 싶어서 일본으로 유학을 갔습니다. 그리고 거기서 처음으로 한문으로 된 성경책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는 성경을 읽다가 놀라운 깨달음을 얻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됩니다. 그리고 일본 땅에서 세례를 받았는데 그가 바로 한국인으로서는 첫 번째로 세례를 받은 인물입니다. 

이수정은 어떻게 해서든 이 성경을 조선백성들에게 전하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한문으로 된 성경을 우리말로 번역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첫 번째로 만든 번역이 마가복음 한글번역입니다. 이수정에게는 열망이 생겼습니다. 한편으로는 조선백성에 대한 긍휼한 마음이 생겼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알지 못하는 이 백성들에게 어떻게 하면 기독교의 복음을 받아들이게 할까?’ 

그는 기도하면서 마음속에 열망하다가 간절한 마음으로 미국 선교부에 편지를 쓰게 됩니다. 이 편지가 1884년에 쓴 편지입니다. 그의 글은 복음에 대한 사랑, 민족에 대한 긍휼한 마음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종 된 나 이수정은 미국에 있는 형제, 자매님들에게 문안합니다. 아직도 수천만 우리민족은 하나님의 참된 도를 모른 채 이방인처럼 살고 있습니다. 아직도 그들은 주님의 구속하시는 은총을 받지 못하고 있습니다. 복음이 퍼져나가는 오늘 같은 시대에 우리나라는 불행하게도 지구 한쪽 구석에 박혀 있어 기독교가 주는 축복을 누리지 못하고 있습니다. 저는 비록 영향력 없는 사람이지만 여러분이 선교사들을 파송만 해준다면 제가 최선을 다해서 그들을 돕겠습니다. 제가 드린 말씀을 진지하게 검토해주시기를 간절히 빌고 원합니다. 그렇게만 된다면 저의 기쁨은 한이 없겠습니다. 그리스도의 종 이수정 드림.” 

이 편지 덕분에 이수정은 교회사에서 조선의 마케도니아 인이라는 별명을 얻습니다. 사도행전 16장을 보면 사도 바울이 아시아에 복음을 증거하는데 마음이 편치 않습니다. 하루는 잠에 들었는데 꿈속에 마케도니아 사람 한 명이 등장하더니 자기를 향해서 에게 바다를 건너와 우리 마케도니아 사람을 도우라고 하는 꿈을 꾸게 됩니다. 그때 사도 바울은 이것을 하나님의 계시로 받아들입니다. 그래서 그는 마케도니아 반도로 들어갑니다. 그곳이 바로 그리스였습니다. 그래서 미국에 선교사를 요청한 이수정은 조선 반도의 마케도니아인이라는 별명을 얻게 된 것입니다. 

이후 미국 선교부는 장로교 목사인 언더우드와 감리교 목사인 아펜젤러를 한국의 선교사로 파송하였습니다. 그리고 파송된 두 사람은 일본에 도착해서 이수정이라는 사람을 만나게 됩니다. 그들은 이수정에게 짧은 시간동안 한국말을 배웠습니다. 그리고 1885년 부활절에 이 두 선교사는 인천제물포 항에 도착하였습니다. 이 땅에 복음의 역사를 이룩했던 새로운 역사가 시작된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에 빚지고 있습니다. 누군가 복음의 열정을 가진 사람, 누군가 민족을 불쌍히 여기는 사람들을 통해서 이 땅에 생명의 역사가 심겨졌고 하나님을 아는 풍성한 교회의 축복과 믿음의 축복이 이 땅에 허락되어진 것입니다. 

예수님은 백성을 보시고 불쌍히 여기셨습니다

참으로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우리에게 두 가지가 생깁니다. 하나는 예수님이 너무 좋은 것입니다. 복음이 너무 귀한 것입니다. 복음이 생명인 것을 깨달을 때 가슴이 벅차오릅니다. 그리고 내 가슴이 벅찬 동시에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 참으로 안타까워집니다. 이것은 불쌍히 여기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알지 못 하는 생명이 저 어둠속에 있는 것을 안타깝게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이 땅에 하나님의 복음을 증거했던 사람들의 심정이었습니다. 이것은 본래 누구의 마음이었을까요? 바로 하나님의 마음이고 예수님의 마음이었습니다. 

본문을 보면 예수님의 심정이 잘 표현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 오셔서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증거하며 백성들을 만나셨습니다. 그런데 백성들을 보면서 울컥하셨습니다. 가슴이 아팠습니다. 안타까웠습니다. 긍휼한 마음이 들었습니다. 그런 예수님의 모습을 성경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무리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시니 이는 그들이 목자 없는 양과 같이 고생하며 기진함이라.” (마태복음 9:36) 

예수님은 당시에 기진하고 고생하고 방황하는 민중들이 마치 목자 없는 양처럼 비춰졌습니다. 목자 없는 양이 얼마나 무기력합니까? 양이란 많은 동물 중에서도 시력이 참 나쁜 동물입니다. 그리고 움직임이 아주 굼뜬 짐승입니다. 그리고 양은 한번 꽈당 하고 넘어지면 자기 힘으로 일어나기가 아주 어렵습니다. 그만큼 생존력이 약한 동물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생각은 아주 이기적입니다. 제멋대로입니다. 

또 다른 동물들은 누군가 위해를 가하면 으르렁대면서 대항을 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양은 자기가 위협을 당하고 죽음에 이르러도 가만히 있는 특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털 깎는 자 앞에서 조용히 침묵하는 양이라는 말을 성경을 통해서도 읽을 수 있습니다. 

이처럼 양은 목자가 없으면 무능력한 존재입니다. 들짐승에게 그냥 놓여 있는 동물이기도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자기 백성들을 보면서 이렇게 탄식하셨습니다. ‘버려진 백성이구나. 아무도 돌보지 않는구나. 백성을 위해서 자기를 내어놓는 사람이 하나도 없구나.’ 그러면서 예수님의 가슴이 비통해졌습니다. 

여기서 예수님은 무리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셨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불쌍히 여기는 마음은 본래 헬라어 원어를 보면 창자가 끊어지는 아픔을 뜻합니다. 우리말에도 단장의 아픔이라는 것이 않습니까? 이 창자를 잘라버리는 아픔, 끊어지는 아픔이 그런 것입니다. 주님은 자기 백성들을 보면서 애간장이 끊어지는 비통함과 연민을 느끼셨습니다. 하나님의 형상 따라 지음 받은 이 백성들이 죄악 속에서 노예가 되고 질병의 억압 속에서 고통당하는 것을 보면서 예수님의 마음은 참으로 비통해졌습니다. 

불쌍히 여기는 마음에서부터 생명이 시작됩니다

지도자가 되는 방법이 여러 가지가 있지만 욕심 때문에 지도자가 되면 그 공동체는 흔들리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긍휼한 마음을 가진 자가 지도자가 되면 그 공동체는 복을 받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백성들을 보며 민망히 여기셨습니다. 긍휼히 여기셨습니다. 불쌍히 여기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마음을 품을 때마다 하나님의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특별히 복음서를 찾아보면 예수님께서 불쌍히 여기시고 긍휼히 여기시는 마음이 품을 때마다 기적의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귀신이 쫓겨납니다. 과부의 아들이 살아나고 죽은 나사로가 다시 살아납니다. 문든 병자를 불쌍히 여겨 만지시니 그가 고침 받습니다. 한번은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려는 사람들이 들에 가득 찼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을 보시고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드셨습니다. 그러자 한 소년이 가지고 있던 떡 다섯 덩어리와 물고기 두 마리로 5천명을 먹이시는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예수님께서 무리들을 불쌍히 여기셨다! 이것이 생명의 사건을 만드는 것입니다. 이것이 인간을 치유하고 회복시키는 것입니다. 

우리의 자녀들은 어떻게 자라날까요? 어머니가 자녀들을 불쌍히 여기지 않으면 자녀들이 생존할 수 있을까요? 아무리 사자 새끼고 호랑이 새끼라 할지라도 어미가 먼저 죽으면 새끼들이 생존할 확률은 없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다른 어떤 동물도 그 새끼들을 불쌍히 여기지 않기 때문입니다. 누구만 불쌍히 여깁니까? 어미만 불쌍히 여깁니다. 

불쌍히 여기는 것에서부터 생명의 삶이 일어납니다. 불쌍히 여기는 것에서부터 치유의 역사가 일어납니다. 우리가 이런 축복을 받은 것도 이 땅을 불쌍히 여겼던 사람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열정을 지녔던 사람들이 있었기에 우리들이 이런 축복을 받게 된 것입니다. 

남에게 전도하는 비결이 어디 있습니까? 우리가 선교하러 나가는 이유가 어디에 있습니까? 그것은 바로 예수님의 불쌍히 여기심 때문입니다. 선교하러 가기 전에 그 나라를 축복하는 것입니다. 그 나라의 백성들의 아픔을 보면서 하나님께 아뢰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우리에게 주어진 믿음이 불쌍히 여기는 마음의 자리까지 나아가지 아니하면 우리의 믿음은 아직까지 이기적인 믿음에 멈춰서있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불쌍히 여기는 마음으로 짧은 3년의 공생애를 감당하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나라를 열심히 외치셨습니다. 밤낮으로 쉬지 않고 일하셨습니다. 때로는 먹을 틈도 없어서 굶기도 하셨다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팔레스타인 지역을 이곳저곳 가리지 않고 다니셨습니다. 

예수님은 모든 곳을 다니시며 가르치시고, 전파하시고, 고치셨습니다

“예수께서 모든 도시와 마을에 두루 다니사” (마태복음 9:35上)

성경은 이렇게 예수님의 활동하는 모습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어디든지 가실 수 있는 곳은 다 가셨습니다. 무엇보다 예수님은 사람들이 있는 곳을 가셨습니다. 장소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사람이 중요했습니다. 그러면서 예수님이 하신 모습을 35절 후반부에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들의 회당에서 가르치시며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며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시니라.” (마태복음 9:35下)

여기에서 특별히 세 가지 동사가 나옵니다. “가르치시며, 전파하시며, 고치시니라.” 이것이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시는 예수님의 모든 활동의 내용이었습니다. 예수님은 무지(無地)를 싫어하셨습니다. 맹목을 싫어하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지혜를 가르치셨습니다.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인간이 얼마만큼 소중한 존재인지를 가르쳐주셨습니다. 그래서 기독교는 배움의 종교입니다. 그래서 기독교는 가르침의 종교이기도 합니다. 

또 예수님이 싫어하시는 것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죄의 노예로 있는 모습을 싫어하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하나님나라를 선포하셨습니다. 사탄이 인간의 주인이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죄의 억압 아래서 살아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죄가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의 주인이시고 하나님이 우리의 왕이시기에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에 들어와야 한다는 것입니다. 죄의 억압 속에서 허우적거리지 말고 은혜의 바다 속에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삶을 마음껏 누리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하나님나라를 선포하셨습니다. 

또 예수님께서 질병을 거절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질병 들린 사람과 함께 아파하셨고 그들을 친히 만지시고 고치셨습니다. 여러분, 예수님이 왜 십자가에 못 박히셨을까요? 우리들의 아픔과 질병, 고통을 예수님이 다 받겠다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당할 죄의 어려움을 예수님이 대신 당하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자유하라는 것입니다. 무지에서 자유하고, 죄와 사탄의 억압에서부터 자유하고, 죄의 질병에서부터 해방되는 축복을 누리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에게 보여주신 예수님의 모습입니다. 

그래서 복음이 증거되는 곳마다 가르침의 역사가 일어나 학교가 생겼습니다. 병원이 생겼습니다. 교회가 생겼습니다. 이 땅에 복음이 들어올 때도 그러했습니다. 연세, 배제, 이화, 정신학당이 생긴 이유가 무엇입니까? 기독교 기관을 통해서 이땅에 얼마나 많은 인재들이 배출되었습니까? 세브란스 병원과 예수 병원으로 알려진 모든 병원들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의 고통을 치유해주었습니까? 그리고 100여년의 역사 속에서 한국교회가 이렇게 성장한 것의 근본에는 누가 있습니까? 거기에는 바로 복음에 대한 열정을 가졌던 사람들, 이 민족 가운데 하나님이 없음을 불쌍히 여겼던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아직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이들에게 복음을 전하십시오

여러분, 어떤 지도자가 참된 지도자입니까? 직업이 무엇이든 상관없습니다. 복음 안에서 예수님이 참 주인이시고 진리이시고 생명이신 것을 가슴으로 고백하는 사람들, 그러면서 이 땅에 하나님이 없는 것을 불쌍히 여기고 사람을 불쌍히 여기는 사람들이 하나님의 사람들이고 민족의 지도자들인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이 일들을 하시면서 이렇게 탄식하셨습니다. 

“이에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추수할 것은 많되 일꾼이 적으니 그러므로 추수하는 주인에게 청하여 추수할 일꾼들을 보내 주소서 하라 하시니라.” (마태복음 9:37~38) 

예수님께서는 시대의 위기를 보셨습니다. 이 마지막 시대에 아직도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하나님의 은혜 속에 들어오지 못한 백성들의 모습을 보면서 “누가 내 일을 함께 할꼬. 추수할 것은 많되 추수할 일꾼은 없구나.” 라고 하시며 제자들을 부르신 것입니다. 

마태복음 9장을 지나 10장을 보면 12제자들을 세우는 장면이 등장합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을 때 내가 가진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만 신앙을 가지면 참된 기쁨이 없습니다. 내가 받은 것이 적다하더라도 누군가에게 복음을 증거하고 누군가를 사랑하고 섬기게 될 때에 하나님은 우리에게 기쁨을 주십니다. 

우리 영혼에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서 참된 기쁨이 없습니까? 그렇다면 예수 그리스도를 알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내가 믿고 사랑하는 예수 그리스도를 전해보십시오. 그러면 나도 이웃을 위해서 무언가 줄 수 있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습니다. 때로 우리 삶의 현장을 떠나라는 것도 그런 것입니다. 이곳에만 있으면 나보다 잘난 사람만 보입니다. 나보다 많이 가진 사람만 보입니다. 그러면 우리 속에 불평과 불만이 생길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맨 처음 읽어드렸던 우리 자녀들의 모습처럼 누군가를 돕고 누군가에게 사랑을 전할 때 우리의 가슴은 뜨거워지는 것입니다. 가슴이 뜨거운 열정으로 가득한 사람이 바로 믿음의 사람들입니다. 이것은 복음을 나누고 주님의 사랑을 나눌 때 생기는 축복입니다. 이 놀라운 축복을 주님의 이름으로 세상을 향해 나누는 하나님의 귀한 성도님들 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김지철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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