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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사랑이 소망입니다 (고전 13: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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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이 소망입니다 (고전 13:4-7)  

  
오늘 본문말씀 <고린도전서 13장>은 성경전체가 그러하기도 하지만 특별히 제게 많은 기억이 있는 말씀입니다. 

첫 번째로는 유년주일학교 때에 교회에서 성경암송대회를 해서 그 때 이야기성경책을 상으로 받았는데 그 성경책 가운데 요셉의 이야기를 읽고 그 요셉을 제 신앙의 모델로 삼아서 사는 가운데 목사도 되고 또 이 자리에도 서 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둘째는 대학부에 생활을 할 때의 이야기인데요, 한번은 이 말씀을 제 개인적으로 뼈아프게 깨달은 적이 있었습니다. 

대학생 때 학생부를 섬기는 임원을 하면서 한 해를 마감하는 마지막 일이 회원들의 글들을 모아서 회지를 내는 일이었습니다. 그 책 머리글에 ‘1년 동안 어느 해보다 또 다른 대학부보다 성실히 우리들이 일했고 이제는 하나님의 평가를 기다릴 뿐이라’ 다소 오만한 글을 낸 적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한가해져서 여러 가지를 생각하는 가운데 갑자기 후회되는 일이 떠오르기 시작했습니다. 일을 한다고 기억나는 일은 잘한 일이 아니고 이사람 저 사람과 부딪혀서 싸운 일들만 기억이 되었습니다. 장로님들에게 대들었고, 목사님께 불공하게도 대했고, 전도사님 마음 아프게 해드렸고, 같이 일한 임원들 가슴을 찢어놓은 일들이 기억났습니다. 대충 일곱 여덟 가지가 생각나고 괴로움가운데 그들에게 용서를 구해야 되겠다고 생각해서 일일이 찾아본 일이 있었습니다. 

저는 그 일후에 교회라는 곳은 일하는 곳이 아니라 사랑하고 용납하는 곳이라는 깊은 깨달음을 갖고 살게 되었습니다. 아마도 부족한 제가 이 자리에 서서 말씀을 증거한 이유가 있다면 그 때 하나님께서 제게 깨닫게 하신 사랑의 교훈 때문이라고 고백할 수 있습니다. 오늘 그 은혜를 여러분들과 함께 나누고자 하며 또 여러분 모두에게 하나님께서 이 사랑의 메시지가운데 주시는 은혜가 넘치시기를 축원합니다. 

<고린도전서 13장>은 13절로 되어있습니다. 

1절~3절은 천사의 말을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울리는 꽹과리요 아무것도 아니라 내 몸을 심지어 불사르게 내어줄지라도 아무 유익이 없다라는 서론으로 시작합니다. 그리고 4절~7절의 네 절 말씀에 사랑은 이러한 것이다라고 하나씩 꼽아가면서 열네 가지를 이야기 합니다. 그리고 8절~13절은 사랑이 왜 그렇게 중요한가를 이야기합니다. 

사랑은 믿음과 소망과 달리 영원할 것이라고 했습니다. 
우리 믿고 천국 갑니다. 믿고 세상에서 소망을 가지고 삽니다. 그러나 믿음과 소망은 천국에서 빛이 바랄 것입니다. 사랑은 영원할 것입니다. 사랑은 모두에게 주신 은사입니다. 

본문을 바울이 이야기하면서 아주 특징 있게 합니다. 노래를 하는 것입니다. 
이 <고린도전서 13장>은 하나의 시요, 노래입니다. 그런데 고린도전서는 전체 분위기로 볼 때 노래할 분위기가 아닙니다. 사도바울이 열세편의 편지들을 썼지만 이 편지가 만약 빌립보서와 같이 기쁨에 넘치는 서신에서 나왔으면 이해할 수 있지만 고린도교회에 보낸 편지같이 가장 아프고 가장 힘들었던 교회에 보내는 편지가운데 노래를, 시를 쓰고 있다는 것이 잘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고린도교회는 참으로 바울에게 중요한 교회였습니다. 그리스 제일 남단에 위치해서 거기를 거쳐서 로마에 갈 생각을 했던 곳이고요, 많은 은사가 넘치는 활력 있는 교회였습니다. 그러나 그 활력과 그 능력 때문에 때론 부딪히고 싸우고 여러 가지 어려움이 있어서 그 교회를 개척했고 그 교회를 오래 섬겼던 바울에게 많은 어려움을 주었던 교회입니다. 

멀리 떠나서 이 안타까운 현실을 보면서 그들에게 긴 편지를 쓰는 가운데 특별히 은사를 가지고 다투는 이런 교회에 보낸 편지가운데 이 사랑의 노래를 갑자기 하고 있는 것입니다. 꾸지람을 해도 모자랄 판에 갑자기 노래를 하니 이상하게 여겨질 수 있습니다. 

사도바울은 다윗처럼 시편을 쓰는 사람이 아닙니다. 로마서와 같이 체계적으로 복음의 진리를 차근차근 이야기할 때 더 어울리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갑자기 사도바울이 어조를 바꾸어서 노래를 하는 까닭은 대개 두 가지라고 추정을 합니다. 

하나는 히브리인들이 아이들을 가르칠 때 격언을 시로 만들어서 부르는 방법을 따르고 있다고 보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잠언 8장>같은 곳에 지혜가 전각을 짓고 잔치를 베풀고 너희들을 부르고 있다라는 노래가 있습니다. 그래서 와서 이 지혜에 참여하여 너희들이 베풀고 그리고 지혜롭도록 하라는 노래가 있습니다. 

또 하나는 어린아이에게 차근차근 중요한 내용을 가르치기 위해서 노래로 부르듯이 하고 있다는 추정입니다. 
아마 여러분들도 뮤지컬을 한두 번 텔레비전에서라도 보셨을 거예요. 뮤지컬은 대개 대화로 그냥 연극같이 가지만 아주 결정적인 부분에 가면 노래가 나옵니다. 
오늘 이 본문에 그런 극적인 내용이 노래로 나오는 것 같은 느낌을 받게 됩니다. 

제 친구가운데 영화를 전공하는 친구가 있어요. 가르치는 친구입니다. 
그 친구가 제게 한 번 물었어요. 저도 영화에 관심이 많으니까 문화공부를 하는 사람이니까 영화를 돈 내고 극장에 가서 다섯 번, 비디오나 텔레비전을 본 게 아니고 내 돈을 내고 극장에 다섯 번 이상 본 영화가 혹시 있냐고 묻더라고요. 생각해보니까 하나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자기는 일곱 번을 돈을 내고 본 영화가 있대요. 

혹시 짐작이 가십니까? 
‘사운드 오브 뮤직’이었습니다. 
그 사운드 오브 뮤직에 보면 아이가 일곱인 가정인데요, 엄마가 일찍 세상을 떠나서 그 아버지의 밑에서 자랐는데 그 아버지가 해군-엄격한 군인-이에요. 
그래서 아이들을 부를 때 이름을 부르지를 않고 호루라기를 꺼내서 불어요. 
그러면 아이들이 무엇을 하든지 벼락같이 줄을 맞추어서 착착착착 행진해서 점오하듯이 일렬로 서야 합니다. 
그게 가정은 아니죠. 그것은 훈련소입니다. 감옥입니다. 
그런 가정에 마리아라는 수녀가 가정교사 겸 보모로 들어가서 이 가정을 사랑으로 아름답게 만드는 이야기입니다. 

이 아름다운 영화 속에 나오는 아주 유명한 ‘도레미송’이라는 노래가 있어요. 
제가 지금 부를 참입니다. 
“Doe A deer, a female deer, Ray A drop of golden sun, Me, a name I call myself, Far a long, long way to run..." 

마리아가 그 가정에 도착해서 이 가정에 음악이 필요하다 생각해서 아이들을 모아놓고 음악교육을-악보를 적고 발성연습을 시키고 했다고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아마 그 아이들이 늘 하는 식으로 일주일을 못 버티고 집에서 쫓겨났을 거예요. 그러나 이 쉬운 노래를 도레미파솔라시 일곱 명 그리고 자기까지 끼어서 아름답게 노래를 만들어서 그 딱딱하던 아버지까지 나중에 노래를 부르게 만드는 그런 이야기예요. 

오늘 본문에서 우리는 사도바울의 그러한 모습을 보게 됩니다. 
이 사도가 할 수 있는 말이라는 것이 내용도 중요하지만 어떻게 말하느냐가 중요한데 사도바울의 그 뜨거운 마음을 노래로 담아서 부르고 있다고 우리들이 느끼면 됩니다. 

4절~7절의 14가지의 사랑의 내용을 압축적으로 이야기해요. 그런데 이게 우리 성경의 이만큼 적혀있다면 헬라어나 영어성경에 가면 반도 안 됩니다. 왜 그러냐하면 우리는 접속사도 있고 뭔가 거기 조사도 있고 그런데 헬라어나 영어에는 아무것도 없어요. 그냥 단어만 툭툭툭툭 있어요. 그래서 반도 안돼요. 그래서 굉장히 짧아요. 어떻게 하면 요만큼 밖에 안 되는 데에 우리 기독교 신앙의 가장 근본 진리인 사랑에 대해서 이렇게 아름답고도 강력하게 이야기 할 수 있을까? 감탄을 하게 됩니다. 

그래서 그것을 오늘 저희들이 나눌 참인데 아마 긴장들 하실 거예요. 14가지나 되니까 언제 끝날까. 걱정 안하셔도 됩니다. 제가 보니까 사람의 마음을 여는 101가지 이야기도 있어서 그거 사서 보시잖아요. 베스트셀러가 되었는데 14가지쯤은 참아주시리라고 믿습니다. 제가 그렇게 무식한 사람 아니거든요. 그래서 시간 안에 마치기는 하겠습니다마는 정말 이 14개의 덕목이야말로 기독교의 본질이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바울은 열네 가지로 사랑의 내용을 설명하지만 사랑을 강의하려고 했던 것은 아닙니다. 노래로 부르고 있고요 거기다가 설명을 덧붙이거나 거기다 길게 뭔가를 늘어놓으려고 하지 않습니다. 사실 그래야 할 필요도 없어요. 

사랑은 오래 참는 것이다 그거 이해 못할 사람 없습니다. 사랑은 온유한 것이다. 사랑은 시기하지 않는다. 분내지 않는다. 참아준다. 믿고 기다린다. 견뎌준다. 불의를 기뻐하지 않고 진리를 기뻐한다. 모를 사람이 없습니다. 저도 여기서 설명할 필요가 없어요. 내용을 보면 두 가지로 나누어집니다. 일곱 가지 사랑이 있어야 할 것, 일곱 가지 진정한 사랑이라면 없어야 할 것을 이야기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일곱이라는 것은 상당히 인위적이에요. 더 많이 붙일 수 있지만 히브리인들은 일곱이면 충분하고 완전하다고 생각해서 거기에 시적인 고려를 기해서 그렇게 일곱 가지씩 이야기 하는 것입니다. 

사랑에는 반드시 없어야 하는 것들이 있습니다. 사랑한다고 하면서 조금만 잘되면 시기 질투하고 입만 열면 자기자랑하기 바쁘고 남은 생각하지 않고 자기 입에 들어가기 바쁜 이기적이고 교만하고 무례하고 이기적이고 화내고 악의를 품고 거짓까지 일삼으면 그것을 어떻게 사랑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반면에 사랑에 있어야 할 것이 없으면 온전하지 않습니다. 허탈합니다. 능력이 있을 수 없습니다. 사랑한다고 하면서 참아줘야 할 때 참아주지 못하거나 온유하지 못하거나 믿지 않고 받아주지 않고 견뎌주지 않는 것은 위선입니다. 

열네 가지를 이야기 하지만 짧게 이야기 할 수 있고요, 사랑은 이렇다, 사랑은 이렇지 않다 요약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거기에는 참아주는 것 같은 소극적인 면도 있어요. 상황이 나쁠 때는 무얼 하기보다 견뎌주는 그것이 사랑입니다. 그러나 모든 것을 참고 믿고 바라고 견뎌주는 적극적인 면도 있습니다. 오래참고 온유한 것은 어떤 면에서 소극적이고 그냥 수동적으로 보여요. 그러나 불의를 기뻐하지 않고 진리와 함께 기뻐하는 적극적인 면들이 있어요. 사랑이 때로는 어떤 면에 강하게 나서서 무엇인가를 해주어야 할 때도 있지만 그저 잠잠히 내가 그의 짐을 짊어줘야 할 때가 있습니다. 적극적인 인내와 사랑이 다 그 속에 포함되어 있다는 것을 우리들에게 깨닫게 해주는 것입니다. 사실 사랑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화가 날 때 그것을 참는 것일 수 있습니다. 

백번 잘해도 한번 굉장히 화를 내고 나오면 그것만 기억될 때가 많습니다. 
제 친구 중에 상당히 같은 교회에서 자라면서 어렸을 때부터 언제 적인지 기억도 안 나지만 존경했고 사실 그 친구가 있기에 제가 목사가 다시 된 그런 친구가 있어요. 그런데 이 친구가 어렸을 때 교회 안에서 말썽부리는 후배 뺨을 한 대 때리는 것을 봤어요. 

그런데 엊그저께 존경하는 목사님을 모시고 식사를 하는 자리에서 옛날 얘기하면서 제가 그 이야기를 하니까 이 친구가 어쩔 줄을 몰라 하더라고요. 인생에 아마 단 한번 그런 일이 있었던 것 같아요. 저는 그 장면이 또렷하게 기억나요. 워낙 친한 친구니까 목사님 앞에서 얘가 이런 면이 있습니다하고 일러바친 게 좀 그랬나 봐요. 아무리 잘해도 한 번 잘못하면 그것만 기억되는 거예요. 특별히 목사인 저 같은 사람이 화를 내고 제 성격을 못 참아서 불같은 모습을 드러내면 그것이 교회에 덕이 되겠습니까?오늘 본문은 이렇게 있어야 할 것 있어야 하고 없어야 할 것을 이야기 하는 가운데 마지막 <7절>에 그런 절정에 올라갑니다.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 

여러분 사랑은 이것입니다. 
모든 것을 참고요, 모든 것을 바라고요, 모든 것을 믿어주고 그리고 할 수 없을 때는 모든 것을 견뎌주는 것이 사랑입니다. 이런 사랑 속에는 사실 믿음이 들어있습니다. 믿지 않고 어떻게 바라고 견디겠습니까. 소망도 들어있습니다. 언젠가는 주님께서 간섭하셔서 이 모든 것을 그의 방식으로 그의 때에 모든 것을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리라는 믿음이 없으면 어떻게 참고 견디겠습니까. 

그러니 사랑이 믿음과 소망하고요, 우리 기독교인들에게 있어야 하는 덕이지만 그 중에 제일은 사랑이라 말씀을 하시는 것입니다. 
집에 돈이 없어서 요즘같이 집값이 비쌀 때에 전세를 못 얻어서 애를 타면 집 때문에 고생하시고 정말 돈이 없으면 매일 끼니를 걱정했을 수도 있고 아이들 학비를 걱정했을 수도 있고 옷 사 입을 돈이 없을 수도 있는데 결국 문제는 돈이 없는 것입니다. 

교회도 여러 가지 문제나 어려움이 있을 수 있지만 사실은 이런 일 저런 일이 문제가 아니라 우리들 마음속에 사랑이 없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오늘 이 말씀 가운데서 사도바울은 우리에게 믿음이 있으면 사랑이 있어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천국을 바라는 소망이 있으면 마땅히 우리들 속에 사랑이 있어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들에게 믿음도 있고 소망도 있을 뿐만 아니라 이와 같은 사랑이 넘치는 모두가 될 수 있기를 축원 드립니다. 

이제 두 번째로 넘어갈 텐데 이게 끝입니다. 

열네 가지까지 안 갈 테니까 염려마시고요, 이제 사도바울이 사랑이 이러한 것이다 하고 이야기 한 가운데는 거기서 끝나는 것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사랑은 이론이 아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우리가 오늘 이 말씀을 함께 들으면 큰 일 작은 일-우리 개인의 일에 있어서, 우리 가정의 일에 있어서, 교회 일에 있어서 우리가 사랑으로 행해야 할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바울도 노래하고 그치지 않습니다. 
사랑은 이렇다 사랑은 이렇지 않다 하고 설명하고 그치지 않습니다. 그 속에는 사랑이 이러하니까 우리가 이래야 한다 라고 아버지 같은 사도의 권위로 하나님의 음성을 그들에게 들려서 아멘이 되기를 강하게 권고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아침 우리도 이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고린도교회는 문제가 많은 교회였어요. 
또 비록 그 문제가운데 무질서도 있고요 상처도 생기고 실망도 있고 가슴 아픈 현실을 놓고 사도가 이 말씀을 하고 있는 것이니 이 노래는 세상에서 유행가로 부르는 낭만적인 사랑타령이 아닌 것이 분명합니다. 세상의 노래가운데 누가 사랑을 아름답다 하는가 그런 노래가 있어요. 제가 아는 게 꽤 많습니다. 여기서 부를 상황은 아니고요. 누가 사랑을 아름답다고 합니까? 

여러분, 정말 진정 뜨겁게 사랑하면 아픈 시기도 있는 법입니다. 우리가 교회를 사랑합니다. 저도 사랑합니다. 여러분들도 사랑하세요. 그리고 우리도 좋은 때가 많았습니다. 사랑하기 때문에 보기만 해도 기쁘고 정말 그 사람이 있기 때문에 내가 복되다고 느꼈고 우리가 정말 행복했어요. 사랑은 우리를 행복하게 합니다. 그러나 때로는 그 사랑에 아픔이 올 때가 있어요. 여러분 자녀를 키우면서도 세상에 누구보다 사랑하는 것이 자녀인데 사랑 때문에 아픈 적이 없으십니까? 

사랑에는 늘 낭만적인 장미꽃과 같은 것만 있지는 않습니다. 그리스도의 사랑가운데도 그것이 있습니다. 사랑은 모든 것을 덮는 길이기에 사도바울이 행복할 때나 그리고 이와 같이 아플 때 사랑만이 길이라고 성도들에게 호소하고 주님의 권위로, 주님의 이름으로 이들을 구원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랑은 우리에게 모두 주신 것입니다. 

이 맥락은 그 앞에 은사들에 대한 얘기가 가요. 왜냐하면 고린도교회가 어떤 사람은 방언하는 은사가 최고라, 나는 잘 섬기는 은사가 있으니 이게 최고라, 어떤 사람은 잘 가르쳐서 저같이 이렇게 하니 내가 최고라, 그래서 갈등과 분쟁이 있었어요. 

사도바울이 그 끝에 뭐라고 그랬냐면 내가 그거 다 좋은 것이다 하나님께서 교회를 섬기게 하기 위해서 주신 것인데 내가 제일 좋은 길을 보이리라 천사의 말을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아무것도 아니라 
사랑이 최고의 은사라는 거예요. 왜 그렇습니까?사랑은 우리 모두에게 주신 은사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들이 남들처럼 많은 봉사를 하실 수 없습니다. 노래 잘해서 성가대에 서실 수 없을 수 있습니다. 
여러분들이 방언 못하실 수 있어요. 그러나 여러분들은 그리스도의 사랑을 가진 분들이십니다. 그러니까 나는 사랑이 없어서 뭘 못한다고 우리는 변명할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이 사랑이 없으면 다른 것은 아무것도 아닙니다. 

생각을 해 보십시다. 
저 분은 믿음도 좋고 헌신과 봉사도 너무 열심히 하는데 사랑이 없어. 
이게 어떻게 진정한 믿음이겠습니다. 
아까도 말씀드렸듯이 그 사랑에는 믿음도 포함되고 소망도 포함되는 법입니다. 

저희 학교가 이번 주일에 개강을 했습니다. 이 개강을 한 주간이 저한테는 개인적으로 제일 힘들어요. 왜냐하면 수업은 수업대로 해야 되지만 저희는 개강하는 주일에 여덟 번의 심령수련회를 해요. 오전 오후로. 그래서 앉아서도 듣고 은혜를 받아야 되는데 목사가 할 얘기는 아니지만 힘들어요. 거기다가 대부분 강사님들이 길게 하세요. 어떤 때는 두 시간을 넘게 설교를 하세요. 

그러니까 저도 힘듭니다. 솔직히. 그런데 강사 접대하는 곳에 이렇게 있다가 보면 교목님이나 이런 분들이 안 해도 좋을 이야기를 해요. 뭐냐 하면 
“목사님 마음껏 하세요.” 
때려주고 싶어요. 그 사람. 
“우주에 시간이 있다는 것을 좀 알고 하세요.” 이러면 좋겠는데. 
저도 요번에 견디느라고 아주 힘들었어요. 그런데 그중에 한 시간은 제가 정말 큰 은혜를 받았습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은 아니었었는데 19년 목회생활가운데 정말 그 분의 경험이 묻은 얘기를 하나 해주셨습니다. 
저 강북에 있는 교회인데 우연치 않게 우리 교회랑 거의 비슷한 때에 개척해서 지금 오고 있는 교회예요. 그런 교회가 잘 가니까 잘만 가는 게 아니라 안으로는 문제가 많았다는 거예요. 
어떤 때는 제직회 때 정말 고함도 지르고 다툼도 있고 당회 때도 그런 일이 있고 그러면 끝나고 나면 목사님이 심방을 하든지 그래서 서로를 위로도 하고 격려도 하고 하면서 끝에는 그렇게 묻는답니다. 
“집사님, 권사님, 또는 장로님, 그 때 왜 그렇게 하셨습니까?” 백이면 백 다 이렇게 얘기한대요. 
“잘 해보려고 그랬던 거예요.” 
“목사님 아시잖아요. 잘 해보려고 그랬던 거예요.” 
이 분이 그런대요. 
“그렇습니까? 잘하지 말고 그냥 보통하세요.”“보통만 합시다. 잘 하려고 하지 맙시다. 그냥 하세요.” 
“보통만 합시다.” 

제가요 그 얘길 듣는 순간 옛날 생각났고요 사실 저도 부족하나마 교회를 섬기면서 저 나름대로 깨달았던 거예요. 말도 여러 번 했습니다. 사랑으로 할 것 아니면 하지말자 
우리가 구제 해봐요. 
‘우리 헌금 다 들여서 어디 가서 구제하자.’ 
그거가지고 교회가 싸우거나 교회를 짓느라고 어디 가서 교회를 지을 것인가, 교회가 갈라지는 것, 그게 뭡니까? 아무것도 아닙니다. 

사도바울은 심지어 자기 몸을 불사르는 그런 순교를 당해도 사랑가운데 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아니라고 이야기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도 우리가 세상이 떠들썩하도록 큰 교회를 만들고 큰일을 행해서 국내 신문뿐만 아니라 인터넷뿐만 아니라 전 세계에 우리교회는 이런 교회라고 할 때 세상 사람들이 너희가 내 제자라는 것을 알리라 하지 않으셨습니다. 너희가 서로 사랑할 때 세상 사람이 너희들이 나의 제자라고 알리라 하셨습니다. 그것이 없으면 제일 먼저 알아보는 사람들이 세상 사람들이에요. 
저 사람들은 사랑이 그리스도의 정신인데 그것이 없으니 저것은 헛거다 라고 이야기 하지 않겠습니까?사랑이 없으면 모든 것이 헛될 뿐만 아니라 우리들의 정체성을 거스르는 것이니까 위선으로 그치는 것이고 다른 모든 것을 잘해도 의미가 없는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3장>에 14가지의 사랑에 대한 얘기가 줄줄이 있는데요, 제가 이것을 생각하면서 그런 속된 생각이 좀 들었어요. 

제가 오늘 속된 얘기를 많이 할 참인데요, 저도 가끔은 다 못 봐서 안타까워서 그렇지 연속극 재미있으면 계속 봅니다. 그 중에 최근에 한 반은 보고 반은 못 봤습니다마는 ‘시크릿 가든’이라는 것이 있어요. 제가 멜로를 좋아해요. 그런데 그 안에 주인공이 이상한 유니폼-뭐라고 그러나요? 추리닝을 입고 나와서 싸구려라고 생각하니까 아니라고 얘기하기 위해서 상표를 이렇게 보여주면서 

“이게 댁들이 생각하는 그런 게 아닙니다. 이걸로 말하자면 어느 장인이 한 땀 한 땀 ...” 이렇게 말하는 것이 있어요. 

여러분 이 <고린도전서 13장>에 14가지의 특징을 가진 이 사랑, 보통사랑 아닙니다. 에로스도 아니고 휠로스도 아니고 아가페인데 이 사랑은, 이 사랑을 우리들에게 주시기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그 아들을 십자가에 못 박으셨어요. 그래서 오래참고 온유하고 시기하지 않고 불의를 기뻐하지 않고 모든 것을 참고 믿고 견디는 것은 다 그 한 구절 한 구절에 그리스도의 피가 배어있는 교훈입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의 사랑이에요. 하나님의 사랑이세요. 우리가 그리스도의 피 공로를 알고 내가 구원받았다고 하는 확신이 있는 사람이라면 어떻게 이것이 답이 없겠습니까? 이것은 우리들이 그냥 생각하는 사랑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십자가를 통해서 우리들에게 입증하신 사랑입니다. 그러니 이 아가페의 사랑은 구호가 아닙니다. 우리들이 할 수 있으면 하고 할 수 없으면 안 할 수 있는 선택사항이 아닙니다. 제 선생님 한분은 사랑이라는 것은 이를 악물고 하는 것이다 그랬습니다. 이를 악물고 해야 해요. 

세상에 사랑이 쉬우면 사랑 못할 사람 없습니다. 이를 악물고 하는 것이고요 하나님께서 아마도 인간적인 표현으로 말하자면 이를 악물고 당신의 아들을 십자가에 못 박으셨을 것입니다. 누가 이런 사랑을 아름답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아프리칸스라는 언어가 있어요. 이게 남아공의 언어입니다. 
재작년인가 월드컵이 열렸던 나라인데요, 이 나라 비극적인 역사를 가진 나라예요. 초기에 네덜란드에 이민자들이 가서 개척을 해서 살만한 곳이 되었는데 우연치 않게 다이아몬드가 발견이 돼요. 그것도 상당량이 발견됩니다. 또 이어서 금광이 발견돼요. 그러니까 그 당시에 가장 강한 나라였던 영국이 뒤늦게 쫓아 들어와서 그것을 차지하기위해서 초기이민자들과 전투를 벌여요. 그래서 결국엔 소수이기 때문에 네덜란드가 상대가 안 되죠. 이 사람들이 쫓겨서 내리고 도망을 가요. 여기서 피를 많이 흘립니다. 그렇게 쫓겨 간 역사가운데 이 아프리카어-아프리칸스라는 이 언어에 우리들도 아는 단어가 두 개 나와요. 
하나는 ‘코만도’라는 말인데요, 쫓겨 가면서 게릴라전을 해서 극도의 저항을 한 그 용맹성 있는 부대를 가리켜서 ‘코만도’라고 부릅니다. 특공대라는 뜻입니다. 

또 하나가 ‘아파르트헤이트’라는 말이에요. 이 ‘아파르트’라는 것은 떼어놓는다는 뜻이고 뒤에는 독일어나 화란어에 붙는 명사형입니다. 떼어놓음이라는 뜻인데 세상에 존재했던 가장 악질적인 인종차별주의였습니다. 왜냐하면 그렇게 피맺히게 도망갔던 사람들이 나중에 다시 돌아와서 이 남아공을 차지하거든요. 그리고 이제는 다시는 우리가 그 일을 겪지 않겠다고 결단하고 우선 흑인들을 압제하는, 그리고 영국 사람들을 억압하는 정책을 펴는 것이 ‘아파르트헤이트’예요. 이것을 수십 년 동안 행하면서 무수한 사람이 여기에 희생됩니다. 심지어는 신학자들조차 이웃을 사랑하라는 말을 어떻게 하냐면 우리에게서 이웃은 이 아픔을 당했던 우리 화란계 사람들뿐이다. 그렇게 신학적으로 정당화하는 일까지 있었어요. 

물론 나중에 다 회개했습니다. 이 억압적인 제도가 1994년에 마침내 막을 내려요. 
그리고 26년 동안이나 감옥에 있었던 ‘넬슨 만델라’라는 사람이 나와서 대통령이 됩니다. 
그리고 한 사람, 아주 지혜로운-이것은 세계역사에 남을 일입니다. 안 그랬으면 남아공은 영국계 흑인 그리고 화랑계하고 싸워서 내전이 나서 지금 아프리카에서 보는 일들을 겪었을 거예요. 우간다, 콩고, 그런 비극을 겪었을 터인데 26년 동안의 박해를 몸으로 겪은 사람이 나와서 한 일은 딱 하나였습니다. 이때까지 악을 행했던 비밀경찰, 압제자, 억압자들을 법정에 세우는 대신 ‘진실 화해 위원회’라는 것을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그 일을 가장 존경받는 목회자인 ‘데스문 투투(D.M. 투투)’라는 사람에게 맡겼어요. 이분은 어린애 같아요. 세계적으로 존경받고 인권운동을 해서 1984년에 그 공로로 노벨상까지 받은 분인데 만나보면 어린애 같습니다. 천진난만하게 보여요. 이분이 한 일이 딱 하나에요. 
‘법정에 가는 대신 사람들 앞에 자기 잘못을 있는 그대로 고백한다. 그러면 모든 것을 사한다.’ 이 원칙이었습니다. 그 일을 통해서 이 남아공은 그 아픈 역사를 씻고 다시 설 수 있었습니다. 이 분이 쓴 책이 있어요. 
‘용서 없이는 미래도 없다.’하는 책이에요. 제가 오늘 설교를 준비하면서 여러 번 꺼내서 밑줄친부분만 다시 보고 다시 보고 그랬습니다. 

우리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오늘 저녁에 저희들은 제직회를 하면서 아마 불편하고 아픈 진실을 만날지도 몰라요. 
정말 그동안 재정 감사를 하면서 최선을 다해서 그 결과를 아마 여러분에게 발표할 것입니다. 제 개인적인 소망은 이제는 그것을 우리가 직면하고 용서하고 회개하고 그리고 앞으로 나아갈 수 있기를 바라마지 않습니다. 

진실은 밝혀져야 합니다. 그러나 지난 주일에 우리 김 목사님 말씀하셨듯이 진실을 말하되 사랑 속에서 말할 수 있기를 바라고요, 사랑 속에서 듣기를 바랍니다. 
그래야 우리들이 이 아픈 현실을 넘어서 미래로 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사우스 아프리카가 그런 모든 것을 넘어서 세계축제라는 월드컵을 열었듯이 아마 우리교회도 하나님의 은혜가운데 이 아픈 현실을 넘어서 주님의 이름을 더욱 높일 날이 오리라고 믿고 소망합니다. 
사랑가운데 우리들의 길이 있습니다. 
사랑가운데 소망이 있고요 믿음이 있으면 이 소망도 있고 사랑도 있습니다. 우리들에게 이와 같은 사랑이 넘치시기를 원하오며 주님께서 그와 같은 복으로 오늘 하루를 온전히 축복해주실 것을 간절히 바라는 마음으로 여러분을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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