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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심령의 공상(空想)과 주권자의 폐단(弊端)" (전 6:7-9, 10: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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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령의 공상(空想)과 주권자의 폐단(弊端)" (전 6:7-9, 10:5-7)


몇 년 전에 우리나라의 어느 유명한 경제 전문가가 '대한민국은 앞으로 10년 동안 계속 진보 진영이 득세할 것이다.'라는 말을 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는 "지금 한국 사회는 두 가지의 개혁을 선택할 수 있다. 하나는 좌파 진보적 개혁이고, 다른 하나는 자유주의적 개혁이다. 그런데 20세기의 100년간 우리가 배운 것은 바로 두 번째의 개혁을 통해서만 번영을 구가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 사회는 거꾸로 가고 있다."라고, 지금 좌파적 사회주의가 점점 더 강해지고 있는 우리나라의 정치적 현상은 결국 경제를 더 악화시킬 것이라고 했던 것이었습니다.
  
사실 사람이라면 누구나 다 '더 잘 살고 싶다'는 욕망은 똑같이 가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을 성취하기 위한 바른길이 과연 '자유시장경제'에 있는가 아니면 '분배우선'에 달려 있는가 하는 문제를 두고 민주주의와 사회주의가 나누어져 있는데, 역사와 현실은 너무나도 뚜렷하게 전자가 정답임을 보여 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처럼 전 세계의 공산국가들에서조차 몰락해 가고 있는 사회주의가 오히려 우리나라에서만 고개를 쳐들고 오히려 득세를 하고 있으니 참 어처구니없으면서도 섬뜩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런데 한술 더 떠서 기독교 신앙이 이런 좌파적 사상을 옹호하는 듯이 오도하는 사람들까지 있습니다.
'예루살렘교회가 최초의 공산주의 사회였다.'라느니 '예수는 서민 노동자들을 옹호하는 민중혁명가였다.'라는 따위의 주장을 하는 자유주의 신학자들과 천주교 사제들입니다.
정말 기가 막히는 '개똥신학'입니다. 
공산주의는 어디까지나 '무신론자'들이 만들어 낸 것이며, 예수님은 부자가 저지르기 쉬운 죄를 책망하셨을 뿐이지 부자와 빈자 사이의 무슨 '계급투쟁' 따위를 말씀하신 적은 결코 없는 것입니다. 

오히려 성경 말씀은 그런 사회주의적 사고방식을 가리켜 '심령의 공상(空想)'이라고, 그런 투쟁적 행동을 가리켜 '주권자의 폐단(弊端)'이라고 신랄하게 비판하고 있습니다.
이 시간 저와 여러분은 '부(富)'와 '지위(地位)' 그 자체는 결코 비난받을 대상이 아니라 진정한 기독신자라면 당연히 성취하기 위하여 노력을 경주해야 할 명백한 축복이라고 성령께서 전도서를 통해 가르쳐 주시는 말씀을 상고해 보고자 합니다.

1. '부(富)'는 '지혜를 행동으로 발휘하는 사람'이 얻게 되는 축복입니다.

6장 7절부터 9절의 말씀에 "7사람의 수고는 다 그 입을 위함이나 그 식욕은 차지 아니하느니라 8지혜자가 우매자보다 나은 것이 무엇이뇨 인생 앞에서 행할 줄을 아는 가난한 자는 무엇이 유익한고 9눈으로 보는 것이 심령의 공상보다 나으나 이것도 헛되어 바람을 잡으려는 것이로다"라고 기록했습니다.

부(富)는 세상의 모든 종교들이 도덕적, 윤리적으로 다루고 있는 대표적인 대상인데, 그 대답은 거의 똑같습니다.
'부를 이루었다고 해서 인생의 행복이 보장되는 것은 아니며 오히려 사람을 교만하게 만든다.'라는 것에서부터 시작해서, '아무리 부를 축적해도 사람의 한도 끝도 없는 욕심을 채울 수는 없다.'는 식으로 전개되기 마련인 것입니다.
사실 석가모니가 깨달았다는 진리라는 것도 그런 수준이 아니겠습니까?
  
이런 수준의 종교에서는 빈(貧)에 대해서도 역시 천편일률적입니다.
'가난하더라도 마음은 행복하게 살아야 한다.'라든지, 아니면 '부는 악이고 가난이 오히려 미덕'이라는 식으로 가르치는 것입니다.
즉 기독교를 제외한 대부분의 종교에서는 '부(富)에 대해서는 나쁘게만 말하고 가난에 대해서는 좋게만 말해 주는' 편견이 들어있기 마련입니다.

하지만 성경 말씀은 부(富)에 대해서 일단 '하나님께서 내려 주시는 축복의 한 방편'이라는 사실을 분명히 밝히면서 또한 '일만 악의 뿌리'가 될 수 있다고 그 위험성도 엄중히 경고합니다.
즉 부 자체가 옳거나 그른 것이 아니라, 부를 사용하는 사람의 자세에 따라 그 부가 선이 될 수도 있고 악으로 나타날 수도 있는 것이라고 정확하게 가르쳐 주는 것입니다.
부에 대하여 이처럼 공평하고도 균형 잡힌 진리를 가르쳐 주는 말씀은 오직 성경밖에 없습니다.

그렇다면 그 성경이 빈(貧)에 대하여 가르치는 것은 어떠하겠습니까?
다른 종교에서는 소위 '청빈(淸貧)'이 가장 수준 높고 이상적인 것인 양 추켜세우면서 가난한 사람을 그저 쓰다듬어 주려고만 하지만 과연 성경은 가난에 대하여 어떻게 말씀하고 있습니까?
물론 성경에서 '물질적 가난'에 대하여 격려해 주는 말씀도 분명히 있습니다.
하지만 세상 종교의 소위 경전들에서는 찾을 수 없는 말, 가난한 사람의 기분을 상하게 하지 않으려고 쉬쉬하는 말이 성경에는 아주 뚜렷하게 기록되고 있는데, 그것이 바로 이 전도서의 본문입니다.

우선 7절에 보면 "사람의 수고는 다 그 입을 위함이나 그 식욕은 차지 아니하느니라"고 했습니다.
즉 사람마다 먹고 살려고 돈을 벌기 위하여 열심히 수고를 하고 있기는 하지만 그 욕망을 다 채울 수는 없다는 뜻입니다.
이것은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다른 종교에서도 비슷하게 가르치는 사실을 우선 확인해 주는 말씀입니다.

하지만 이어지는 8절에서는 세상의 다른 종교에서는 결코 들을 수 없는 말이 나오는데 바로 "지혜자가 우매자보다 나은 것이 무엇이뇨 인생 앞에서 행할 줄을 아는 가난한 자는 무엇이 유익한고"라는 말씀입니다.
이 부분의 우리나라 말 번역이 좀 애매하게 되어 있는데 더 쉽게 풀어서 해석하자면 '스스로 유식한 사람이라고 해도 가난하게 산다면 무식한 사람보다 실제적으로 나은 것이 무엇이 있겠느냐?', '인생을 어떻게 행하며 살아야 하는지 이론적으로는 잘 아는 사람이라 해도 자기 앞가림조차 못하는 가난뱅이라면 그 지식이라는 것이 도대체 무슨 유익이 있겠느냐?'라는 말입니다.

이어지는 9절은 한걸음 더 나아가서 "눈으로 보는 것이 심령의 공상보다 나으나"라고 이 점을 더욱 강조해 주는데, 우선 여기서 '나으나'라고 되어 있는 번역은 '나으니'라고 해야 문맥에 맞습니다.
'눈으로 보는 것'은 자기 손에 소유할 수 있는 '구체적인 부'를 가리키는 말씀이며 '심령의 공상'이란 그와는 대조적으로 그저 마음으로만 만족한 척, 괜찮은 척하고 사는 것을 가리킵니다.
다시 말해서 '나는 돈 따위는 멸시하면서 살고 있는 청빈한 선비입네.'하면서 어깨에 힘주고 산다 해도 실제적인 생활의 능력이 없다면 조금도 자랑할 일이 못 된다는 뜻입니다.

9절 하반절의 "이것도 헛되어 바람을 잡으려는 것이로다"라는 말씀에서 '이것'은 앞의 문장 전체를 뜻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 '심령의 공상'을 가리킵니다. 
즉 부를 추구하는 것을 가리켜 사람의 욕심을 채우기 위한 수단일 뿐이라고 평가절하하는 소위 '지혜자', 사람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하여 머릿속에 노하우만 가득할 뿐 실제적으로 잘 사는 가시적(可視的)인 결과는 전혀 보여 주지 못하는 '공상가', 그래서 가난하게 살 수밖에 없으면서도 그저 부자를 멸시하는 것으로써 자기가 더 잘난 사람인 체 하는 것이야말로 문자 그대로 '바람 잡는 헛된 일'인 것입니다. 

성경 말씀은 참으로 적나라하게 정곡을 찌르고 있지 않습니까?
우리나라의 유교적 전통은 소위 '사농공상(士農工商)'이라 하여 '가난한 선비'를 칭찬하고 '열심히 일하여 돈을 많이 버는 상인'을 가장 멸시했습니다.
지금도 좌파 사상은 '가난한 서민'의 요구와 주장은 항상 옳고, 반면에 '성공한 재벌'은 뭔가 부정축재를 한 것임에 틀림없다고 매도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성경은 정반대로 말씀하고 있습니다.
정말로 '지혜로운 사람'이라면 그 지식이 구체적인 부를 생산해 낼 수 있어야 하며, 아무리 '행동하는 양심'을 외쳐도 자기가 일을 해서 돈을 벌 줄 모르는 사람이야말로 사실상 우매자에 불과하다고 예리하게 지적하면서 우리를 깨우쳐 주는 것입니다.

지혜를 행동으로 발휘해서 '부'를 창출해 내는 생산, 이것을 두고 서로 공평하게 경쟁하는 것이 바로 '자유시장경제'입니다.
또한 그렇게 해서 개인이 획득한 사유재산을 국가가 확실히 보장해 주는 것이 바로 '자본주의'의 기초 중의 기초라는 것은 민주주의 국가에 살고 있는 사람에게는 상식에 불과하지 않습니까?
그런데도 지금 우리나라에서는 '생산'보다 '분배'를 먼저 내세우는 사회주의가 팽배해 가고 있는 것입니다.

요즘 일부 정치인들이 목소리를 높이고 있는 소위 '무상 급식'이라는 것이 그 대표적인 예입니다.
'모든 학생들에게 다 똑같은 밥을 공짜로 먹이자.'라는 것이 실제적으로는 가난한 집안의 학생들에게만 돌아가야 할 지원과 혜택을 줄여 버리게 된다는 것은 조금만 상식적으로 계산해 보아도 명약관화한 일에 불과합니다.
그런데도 이런 '사탕발림'이요 '당근'에 불과한 선동이 우리나라에서는 통하고 있으니 정말 기가 막힐 뿐입니다.
  
만약 '무상 급식'이 정말 모든 학생들에게 이로운 것이 틀림없다면, 왜 급식만 무상으로 합니까?
기왕이면 '무상 교복 지급', '등하교 교통비 전액 지원'부터 시작해서 이참에 아예 모든 대학교 학생들에게 '등록금 완전 면제'까지 밀고 나가는 게 좋지 않겠습니까?
하지만 그것이 바로 '사회주의'가 공약하고 있는 유토피아, 그러나 지금까지 어느 나라도 이루지는 못한 '심령의 공상'인 것입니다.

또한 최근에는 소위 '동반성장'을 위한 '초과이익공유제'라는 것이 재계에서 '뜨거운 감자'가 되고 있습니다. 
저는 경제 분야에 대한 전문가는 아니지만 그저 제가 '반공 교육'을 받았던 것만 가지고 생각해 보아도, 그 '초과이익'이라는 말은 '잉여가치'라는 말과 단어만 다르지 내용은 너무나 비슷하게 들립니다.
'자본가나 경영주들이 노동자가 창출해 낸 잉여가치를 독점하고 있으니 그것을 똑같이 분배하자.'는 것이 바로 공산주의의 논리 아닙니까? 
그런데 그 말이나 '대기업이 중소기업들에게 하청을 주면서 초과이익을 남기고 있으니 그것을 공정하게 공유하자.'라는 말이나 제 귀에는 아무 차이가 없는 것입니다.

그리도 도대체 그 '초과'라는 것의 기준이 무엇입니까?
사업이란 자체가 들어간 자금보다 '초과되는 이익'을 남기려는 것이고, '많이 남기면 남길수록' 장사를 더 잘하는 것 아닙니까?
지금 대기업만을 두고 '좀 나누어 갖자.'라고 하니까 정당한 요구처럼만 들릴지 모르지만, 그 말을 여러분 각자가 경영하고 있는 작은 업체에 한번 적용해 보시기 바랍니다.
남보다 배나 노력해서 동종의 다른 가게보다 훨씬 더 많은 이윤을 남겼는데, 그것을 두고 정부에서 '당신은 초과이익을 내었으니까 종업원들에게 더 많이 나누어 주시오.'라고 강요한다면 여러분은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저는 물론 대기업이 '부정한 방법'으로 축재하는 것을 두고 옹호할 마음은 눈곱만큼도 없습니다.
하지만 제가 배운 '자유시장경제'의 원칙에 따르면, 민주국가에서 정부가 경제 분야에 대하여 행하는 역할은 '심판'과 같은 것이라고 알고 있습니다.
즉 돈을 벌려고 하는 사람들이 '공정하게 경쟁'을 할 수 있도록 '공정한 법'을 세워 놓고 그 법을 어기는 사람, 즉 반칙하는 사람을 잡아냄으로써 법에 따라 플레이를 하는 경제인들이 자신의 능력을 마음껏 발휘할 수 있도록 해 주는 것이 정부가 해야 할 일인 것입니다.
  
그런데 정부가 그런 '자유 경쟁'에 대한 '심판의 역할'은 하지 않고, 그 대신에 어떤 한 사람이 다른 사람보다 훨씬 더 많은 돈을 벌어 놓고 나면 그 사람이 뭔가 부정을 저질렀을 것이 틀림없다고 단정하면서 그 돈을 강제로 나누어 주어야 공정하다고 주장한다면 그것이 바로 공산주의자의 논리가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마치 심판이 경기 도중에는 반칙하는 선수를 잡아내지 않고 있다가 한쪽 팀이 너무 많은 점수를 올리면서 이기고 나면 그 '초과 득점'을 진 팀 쪽에 나누어 주어야 공정하다고 주장하는 것과 마찬가지인 것입니다.

상대방보다 경기를 잘하는 선수가 더 많은 '점수'를 올리는 것처럼 '부(富)'도 다른 사람보다 '더 많이 머리를 쓰고 더 열심히 노력한' 사람이 얻게 되는 축복입니다.
칼빈 선생은 바로 이런 성경의 가르침을 통하여 '자유경쟁에 의한 사유재산 축적'은 로마 천주교에서 주장했던 것처럼 죄가 결코 아니라 기독신자들이 추구해야 할 축복이라고 천명함으로써 오늘날의 자본주의 사상의 기초를 닦았던 것이었습니다.
자기도 부자가 되고 싶으면서도 먼저 부자가 된 사람을 정죄하거나 남이 노력해서 성취해 놓은 것을 억지로 나누어 먹으려고만 하는 '공상적인 이론가'가 아니라, 자신의 '지혜를 총동원하고 열심히 일을 함'으로써 구체적인 물질의 축복을 쟁취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2. '지위(地位)'는 '능력의 경쟁에서 이기는 사람'이 누리게 되는 축복입니다.

10장 5절부터 7절에 기록하기를 "5내가 해 아래서 한가지 폐단 곧 주권자에게서 나는 허물인 듯한 것을 보았노니 6우매자가 크게 높은 지위를 얻고 부자가 낮은 지위에 앉는도다 7또 보았노니 종들은 말을 타고 방백들은 종처럼 땅에 걸어 다니는도다"라고 했습니다. 

세상의 권력자들, 특히 한 국가의 최고 통수권자가 잘못 판단하고 실정할 때 그 후유증은 더욱 심각할 수밖에 없습니다.
본문 5절에서 전도자는 바로 그처럼 "한가지 폐단 곧 주권자에게서 나는 허물"을 목도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가 여기서 말하는 주권자의 잘못은 좀 특이한 것이었습니다.
흔히 생각할 수 있는 '독재자의 억압'이나 '부정부패'가 아닌 좀 유별난, 그러나 새겨들어 보면 정말 의미심장한 어떤 실정(失政)에 대하여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6절을 보면 그런 실정으로 인하여 "우매자가 크게 높은 지위를 얻고 부자가 낮은 지위에 앉는도다"라는 폐단이 나타나게 되었다고 밝히고 있습니다. 
'일자무식한 사람이 출세를 하고, 반면에 재벌이라고 떵떵거리던 사람이 밑바닥으로 내려앉게 되었다.'는 사실을 두고 '주권자의 허물이요 폐단'이라고 하니 아마 크게 기분나빠할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지 않아도 얄미운 부자들인데 그런 자들이 낮은 자리로 밀려나고, 별로 배운 것 없는 사람이라도 높은 자리를 차지할 수 있는 사회야말로 오히려 더 '평등한 사회'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런 생각이야말로 실상은 사회의 질서를, 특히 이 민주주의 사회의 질서와 체계를 그 기초부터 송두리째 뒤집어 엎어버리려 하는 사고방식인 것을 알아야 합니다.

'부자'와 '방백'들은 다 망하고 그 대신에 '우매자'와 '종'들이 벼락출세한 때가 언제였습니까?
바로 6.25 한국전쟁 당시 북한 공산군이 점령하게 되었던 동네와 도시들마다 일어났던 일이었습니다.
그야말로 '우매한 사람'들이 공산당의 꼭두각시가 되어 무슨 '위원장' 따위의 자리를 차고앉아서 인민재판이라는 것을 주도하면서 무고한 사람들을 얼마나 많이 죽였습니까?
실로 '우매자가 높은 지위를 얻고 부자는 밑바닥으로 떨어졌던' 것이었습니다.

중국의 모택동 역시 소위 '문화혁명'이라는 것을 하면서 그와 똑같은 '폐단'을 저질렀던 주권자였습니다.
'중국에는 지금 너무 많은 교육이 이루어지고 있어서 위험하다.'라고 하면서, 학생들로 하여금 '부르조아의 독'인 책들을 불태우고 하고 그 대신에 '모택동 어록'만 졸졸 외우게 했습니다.
그 결과 저 유명한 '홍위병'이 탄생하면서 어린 학생들이 자기네 선생들을 체포하여 머리를 깎고 매질을 했으며 작가와 예술가들을 소 우리에 가두어 놓고 자살하게 만들었고 중국 경제를 회복시킨 공로자가 된 까닭에 모택동의 미움을 받게 된 유소기를 끝내 옥사시켰던 것이었습니다.
  
그뿐 아니라 '지식인들이 삽을 잡아 보아야 한다.'라는 모택동의 지시에 따라 고위직 관리들이 농촌에 가서 거름을 날라야 했고 대학교수들은 탄광에 가서 석탄을 캐야 했으며 어느 암 전문 의사는 변기 청소부로 전락하게 되었습니다.
문자 그대로 '종들은 말을 타고 방백들이 종처럼 땅에 걸어 다니게' 만든 것이 바로 모택동이 '중국 사회의 건강성을 회복하게 만들었다.'고 자랑했던 문화혁명의 현실이었던 것이었습니다. 

부자란 사실 이 자유민주주의 사회에서 가장 성공한 사람 중에 하나입니다.
남보다 돈을 더 많이 벌기 위하여 '지식과 실력'을 겨루는 자유경쟁에서 이긴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미국이나 일본 같은 나라에서는 재벌들이 사회적으로도 존경을 받고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공산주의 사회에서 부자란 '가장 나쁜 인간'이며 '인민의 최고의 적'일 뿐입니다.
그리고 우리나라 안에 있는 좌파 역시 그런 사고방식을 고스란히 전수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재벌은 마치 '서민의 적'이나 되는 것처럼 몰아붙이면서 부자보다는 당연히 숫자가 훨씬 더 많은 서민들의 표를 끌어 모으려 하는 것입니다.
그런 좌파 정치가가 정권을 잡게 되면 자연히 재벌들이 마치 이 사회에서 가장 부정한 사람이며 서민들을 가난하게 만드는 원흉인 양 비판하면서 '재벌을 견제하는 법과 정책'을 세우기에만 혈안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정말 국민 전체를 잘 살게 만들기 위해서는 우리나라에 '재벌들이 훨씬 더 많이 생길 수 있는 경제적 환경'을 조성하는 것이 주권자가 진짜 전력투구해야 할 일이 아니겠습니까? 

다시 한 번 말씀드리지만, 저는 '부정한 재벌'을 비호하는 것이 결코 아니라 '근본적인 원칙'을 두고 하는 말입니다.
우리가 자본주의가 공산주의보다 훨씬 나은 줄 믿는다면, 좀 자본주의답게 자본주의를 해야 할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나라에서는 '내가 대통령이 되면 우리나라를 노동자 천국으로 만들겠다.'라는 따위의 영락없는 공산주의식 선동 구호가 여전히 먹혀 들어가고 있습니다. 
그러니 이러다가는 우리 대한민국이 더 이상 헌법에서 규정하고 있는 '민주공화국'이 아니라 그저 '민주적인 체 하는 공산국'이 되고 말 것이 아닌지 심히 우려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노동자 중심의 경제 정책은 반드시 실패하게 되어 있다.'는 것은, 제가 이름을 기억하지 못해서 유감이지만, 미국의 어느 경제학자의 말인데, 우리나라에서 이런 소리를 했다가는 아마 '욕을 바가지로 먹을' 것이 틀림없습니다.
하지만 간단히 예를 들어서, 여러분이 작은 식당 하나를 운영한다고 할 때에, 주인의 계획대로가 아니라 무조건 종업원들이 원하는 대로 월급은 계속 인상해 주고 근무시간은 더 줄여 주기만 하면서 장사를 한다면, 그 식당이 몇 달을 가겠습니까?
저는 우리나라의 정치인들과 위정자들이 정말 이런 민주주의 사회와 자본주의 경제의 기초라도 제대로 알고 나라를 다스리고 있는지 걱정스럽기 한이 없습니다.

'지위(地位)'란 그것이 정치적 고위직이든지 재계의 거물이든지 학계(學界)의 권위자이든지 간에 그 방면에서 남보다 더 우수한 실력과 더 큰 능력을 발휘한 사람이 얻게 되는 또 하나의 축복입니다.
그처럼 '공정한 경쟁'을 통하여 높은 지위를 얻으려 하지 않고 그저 '세상이 한번 뒤집혀야 내가 출세를 할 텐데.'라고 기회를 노리는 것은 오로지 공산주의 독재자와 그 졸개들의 야심일 뿐인 것을 알아야 합니다.
  
이 대한민국에 '우매자'들이 높은 지위를 얻어 민주주의 사회의 질서를 근본적으로 파괴해 버리는 비극이 결코 생기지 않도록 조국의 주권자를 위하여 더욱 간절히 기도하는 가운데, '출신성분'이 전 생애를 주도하는 공산국가와는 달리 누구든지 성공할 수 있는 이 '기회균등'의 민주국가에서 남보다 배나 더 노력함으로써 '성실한 부자'와 '능력 있는 방백'의 축복을 꼭 누리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성도 여러분, 서론에서 제가 언급했던 그 경제전문가는 우리나라에서 불거지고 있는 좌파 성향을 두고 "요즘은 '남의 탓' 시대정신이 풍미한다. 모든 원인을 외부로 돌린다. 가진 자들, 많이 배운 자들, 기업가들, '강남들'…. 하지만 세계적으로 바깥에서 원인을 찾는 국가가 잘산 적은 한 번도 없다. 반대로 자립 자존의 시대 정신, 개인의 운명을 스스로 개척할 수 있다는 시대정신이 풍미하는 국가가 번영을 구가했다."라고 말했습니다.
  
그 '남의 탓'이라는 정신은 다른 말로 하자면 '피해의식'입니다.
'내가 가난하게 된 것은 부자 때문이고, 나는 약자인 까닭에 높은 사람들에게 당하고만 살고 있다.'는 사고방식입니다.
그래서 '가난한 약자'는 '부자와 권력자'에 대해서 무언가 '보상을 받아야 할 권리'가 당연히 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대한민국 국민들은, 특히 우리 기독신자들은 '약자의 피해의식'을 자극하는 좌파의 사회주의적 선동에 절대로 넘어가지 말아야 합니다.
'가난함'과 '낮음' 그 자체에 무슨 권리가 있다고 착각하지 말아야 하는 것입니다.
'부'와 '빈' 중에서 어느 것이 축복이겠습니까?
'직위'와 '무직' 중에서 어느 쪽이 성공이겠습니까?
절의 중들이 '무소유'라는 것을 무슨 고귀한 미덕처럼 미화(美化)하고 있지만, 우리 원로목사님의 말씀대로 "무소유는 곧 거지"가 아니겠습니까?

실제로는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다 부자가 되려고 애를 쓰고 자기 자식이 직장에서 한 자리라도 승진하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그러면서도 그런 복을 나보다 먼저 이룬 사람은 무조건 '나쁜 놈'이며 내가 '빼앗고 끌어내려야 할 대상'이라고 생각하고 있으니, 이 얼마나 얼토당토않은 모순입니까?
'부(富)의 축복'은 '자기가 노력해서 획득하는 것'이지 '남이 모아 놓은 것을 억지로 나누어 가지는 것'이 아닙니다.
  
'지위(地位)의 축복' 역시 '정당한 경쟁에서 이겨서 누리게 되는 것'이지 '나보다 먼저 올라가 있는 사람을 강제로 끌어내려서 빈자리를 만들고 거기에 대신 앉는 것'이 결코 아닌 것입니다.
진정 '영혼이 잘 됨 같이 범사에 형통한 복'을 받기 위해서 절대로 '심령의 공상'에 사로잡히거나 '주권자의 폐단'에 휩쓸리지 말고 각자에게 주어진 지식과 능력의 달란트를 100퍼센트 활용하고 노력함으로써 '부와 지위'의 축복 역시 꼭 누리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아멘. (석기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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