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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재앙을 멎게 하시는 하나님 (욘 3: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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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앙을 멎게 하시는 하나님 (욘 3:1-10)


북왕국 이스라엘 왕 여로보암 2세 때 사람인 요나에게(왕하14:23-25) 하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너는 일어나 저 큰 성읍 니느웨로 가서 그것을 향하여 외치라. 그 악독이 내 앞에 상달되었음이니라.”(욘1:2) 니느웨는 오늘날에는 이라크 북부 티그리스 강가에서 그 폐허를 찾아볼 수 있는 옛 앗수르 제국의 마지막 수도입니다. 그러니까 북왕국 이스라엘의 수도 사마리아로부터는 북동쪽으로 한참 가야하는 먼 거리에 있었습니다. 그런데 요나는 하나님의 얼굴을 피하겠다고 일어나 반대편인 북서쪽에 있는 다시스로 도망하려고 욥바로 내려가 배를 탔습니다(욘1:3). 

하나님께서 그런 요나를 가만 두실 리가 없었습니다. 큰 바람을 바다 위에 일으키셨습니다. 바다 가운데에 큰 폭풍이 일어나 배가 거의 깨지게 되었습니다(욘1:4). 사공들은 두려워하여 각각 자기의 신을 부르고 또 배를 가볍게 하려고 배에 있던 물건들을 바다에 던졌습니다. 그러나 요나는 배 밑층에 내려가서 누워 깊이 잠이 들었습니다(욘1:5). 선장이 그에게 와서 물었습니다: “그대는 어찌하여 잠을 자고 있느냐? 일어나서 네 하나님께 구하라. 혹시 하나님이 우리를 생각해서 망하지 않게 하시리라.”(욘1:6) 사공들은 서로 말하기를 “자 우리가 제비를 뽑아 이 재앙이 누구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임하였나 알아 보자.” 하고 제비를 뽑았더니 요나에게 뽑혔습니다(욘1:7). 

무리가 요나에게 물었습니다: “네 생업이 무엇이며 네가 어디서 왔으며 네 나라가 어디며 어느 민족에 속하였느냐?”(욘1:8) 요나는 대답하기를 “나는 히브리 사람이요 바다와 육지를 지으신 하늘의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로라.”(욘1:9) 하고 자기가 하나님의 얼굴을 피함인 줄을 그들에게 말하자 그 무리가 알고 심히 두려워하여 말하기를 “네가 어찌하여 그렇게 행하였느냐?” 할 뿐이었지만(욘1:10) 바다가 점점 더 거칠어지자 그들이 요나에게 다시 물었습니다: “우리가 너를 어떻게 하여야 바다가 우리를 위하여 잔잔하겠느냐?”(욘1:11) 그러자 요나가 대답했습니다: 

“나를 들어 바다에 던지라. 그리하면 바다가 너희를 위하여 잔잔하리라. 너희가 이 큰 폭풍을 만난 것이 나 때문인 줄을 내가 아노라.”(욘1:12) 그래도 그 사람들은 차마 요나를 바다에 던지지 못하고 힘써 노를 저어 배를 육지로 돌리고자 했으나 바다가 그들을 향하여 점점 더 거칠어지므로(욘1:13) 할 수 없이 하나님께 부르짖기를 “여호와여, 구하고 구하오니 이 사람의 생명 때문에 우리를 멸망시키지 마옵소서. 무죄한 피를 우리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주 여호와께서는 주의 뜻대로 행하심이니이다.”(욘1:14) 하고는 요나를 들어 바다에 던졌습니다. 그러자 바다는 곧 잔잔해졌습니다(욘1:15). 하나님께서는 이미 큰 물고기를 바다에 예비하셨다가 요나를 삼키게 하시고는 어린아이부터 어른까지 우리가 너무나 잘 아는 요나의 물고기 뱃속에서의 삼일간의 놀라운 경험이 이루어지게 하셨습니다. 

아마도 많은 사람들이 요나 하면 고래 또는 큰 물고기부터 머리에 떠올리곤 합니다. 사실 요나서 전체에서 이 물고기에 관한 언급은 1장 17절과 2장 1절과 10절 단 세 절 밖에 없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요나서에 관해서는 흔히 어떻게 사람이 고래 뱃속에 들어가서 살 수 있느냐 하는 데에로 관심과 논쟁의 초점이 모입니다. 그리고 결론은 하나님이 하시고자 하면 못하실 것이 무엇이냐 하는 경건한 신앙고백적 결론으로 이 요나서의 의미를 마무리 짓고 말기 쉽습니다. 

그런데 그것은 이 요나서가 지닌 여러 층의 메시지 중의 하나일 뿐입니다. 그것도 어린아이들에게 가르치기에 좋은 가장 단순한 메시지입니다. 아직도 그것을 요나서의 메시지로 알고 계신 분들은 오늘 새로운 하나의 메시지, 보다 중요한 중심 메시지를 들으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 중심 메시지를 담고 있는 말씀이 바로 오늘 본문인 3장 말씀입니다. 본문 첫 절 바로 앞에 있는 2:10을 먼저 봅니다: “여호와께서 그 물고기에게 말씀하시매 요나를 육지에 토하니라.”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물고기가 삼일 만에 요나를 산채로 육지에 토해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다시 요나에게 “일어나 저 큰 성읍 니느웨로 가서 내가 네게 명한 바를 그들에게 선포하라.” 명령하십니다.(본문 1-2절) 한 번 혼이 난 요나는 이번에는 순종해서 니느웨로 갑니다(본문 3절). 그는 니느웨에 들어가서 하루 종일 다니며 외칩니다: “사십 일이 지나면 니느웨가 무너지리라.”(본문 4절) 그러자 니느웨 사람들이 하나님을 믿고 금식을 선포하고 높고 낮은 자를 막론하고 굵은 베 옷을 입었습니다(본문 5절). 그 일이 니느웨 왕에게 들리자 왕도 보좌에서 일어나 왕복을 벗고 굵은 베 옷을 입고 재 위에 앉았습니다(본문 6절). 

왕과 그의 대신들이 조서를 내려 니느웨에 선포하기를 “사람이나 짐승이나 소 떼나 양 떼나 아무것도 입에 대지 말지니 곧 먹지도 말 것이요 물도 마시지 말 것이며 사람이든지 짐승이든지 다 굵은 베 옷을 입을 것이요 힘써 하나님께 부르짖을 것이며 각기 악한 길과 손으로 행한 강포에서 떠날 것이라. 하나님이 뜻을 돌이키시고 그 진노를 그치사 우리가 멸망하지 않게 하시리라. 그렇지 않을 줄을 누가 알겠느냐.” 했습니다(본문 7-9절). 그러자 하나님께서 그들이 행한 것 곧 니느웨에서 왕과 그의 모든 대신과 백성이 악한 길에서 돌이켜 떠난 것을 보시고 하나님께서 뜻을 돌이키셔서 그들에게 내리리라고 말씀하신 재앙을 내리지 아니하셨습니다(본문 10절). 

이야기는 여기서 그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니느웨에 베푸신 이 용서 앞에서 요나의 반란이 일어난 것입니다. 오늘 본문 바로 다음에 보면 요나가 매우 싫어하고 성내며 하나님께 기도하기를 “여호와여 내가 고국에 있을 때에 이러하겠다고 말씀하지 아니하였나이까? 그러므로 내가 빨리 다시스로 도망하였사오니 주께서는 은혜로우시며 자비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하시며 인애가 크시사 뜻을 돌이켜 재앙을 내리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이신 줄을 내가 알았음이니이다. 여호와여 원하건대 이제 내 생명을 거두어 가소서. 사는 것보다 죽는 것이 내게 나음이니이다.”(욘4:1-3) 한 것입니다. 

요나의 이 말은 하나님을 빈정대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이 성읍 니느웨가 이렇게 악독한데도 재앙도 내리지 않으시니 정말 은혜로우시며 자비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하시며 인애가 크십니다. 그러실 거면서 왜 안 오겠다는 걸 오게는 하신 겁니까? 이젠 할 일도 없어졌으니 차라리 죽여 주시죠. 이런 꼴 보느니 사는 것보다 죽는 게 낫겠습니다.” 하는 투정이었던 것입니다. 이에 하나님께서는 답하시기를 “네가 성내는 것이 옳으냐?”(욘4:4) 하셨습니다. 

요나는 성읍에서 나가서 그 성읍 동쪽에 앉아 거기서 자기를 위하여 초막을 짓고 그 성읍에 무슨 일이 일어나는가를 보려고 그 그늘 아래에 앉았습니다(욘4:5). 하나님께서는 박넝쿨을 예비하시고 요나의 머리에 그늘이 지게 하셔서 그의 괴로움을 면하게 하시자 요나는 박넝쿨로 인해 크게 기뻐했습니다(욘4:6).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또 벌레를 예비하시고 이튿날 새벽에 그 박넝쿨을 갉아먹게 하셔서 시들게 하셨습니다(욘4:7). 요나로 하여금 깨닫게 하시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해가 뜰 때에 하나님이 뜨거운 동풍을 예비하셨고 해가 요나의 머리에 쪼이자 요나가 혼미하여 스스로 죽기를 구하며 말하기를 “사는 것보다 죽는 것이 내게 나으니이다.” 하자(욘4:8) 하나님께서 요나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네가 이 박넝쿨로 말미암아 성내는 것이 어찌 옳으냐?” 그러자 그가 대답했습니다: “내가 성내어 죽기까지 할지라도 옳으니이다.”(욘4:9) 그때 하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네가 수고도 아니하였고 재배도 아니하였고 하룻밤에 났다가 하룻밤에 말라 버린 이 박넝쿨을 아꼈거든 하물며 이 큰 성읍 니느웨에는 좌우를 분변하지 못하는 자가 십이만여 명이요 가축도 많이 있나니 내가 어찌 아끼지 아니하겠느냐?” 

요나서는 다른 예언서들과 다른 점이 있습니다. 첫째는 요나서에서는 예언자가 전한 하나님의 말씀보다는 예언자 자신에게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는 것입니다. 둘째는 요나서에서는 예언자가 하나님의 말씀을 성실히 전하려 했다기보다는 그 반대라는 것입니다. 왜 요나는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기를 싫어했고 피했으며 마지못해 했고 하나님께서 행하신 일 때문에 화내고 그 때문에 죽기를 자청하는 시늉까지 하며 몽니를 부렸습니까? 그 이유를 추적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요나는 이스라엘 왕 여로보암 2세 때 활동한 예언자였습니다. 여로보암 2세는 사십년 이상 이스라엘을 다스렸는데 그 기간은 주전 793년부터 753년으로 보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기간은 앗수르 제국에서는 아다드-니라리(Adad-Nirari) 3세, 살만에셀(Shalmaneser) 4세, 아슈르-단(Ashur-dan) 3세가 연이어 다스린 시기와 일치합니다. 여로보암 2세가 이스라엘 왕으로 등극하기 한 세기 전부터 앗수르는 걸출한 왕 아수르나시르팔(Ashurnasirpal) 2세와 그를 이은 살만에셀 3세의 영도 하에 성장과 번영을 거듭하며 메소포타미아의 황금기 중 한 시대를 구가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살만에셀 3세의 말년에서부터 그의 사후 아들들의 시대를 거치며 내분과 반란이 일어나고 침체기로 들어섰습니다. 한때 주도적인 강국으로 다시 일어서는 때도 있었지만 이스라엘의 여로보암 2세 때는 다시 침체기에 들어서 있었습니다. 여로보암 2세 때의 앗수르 왕들은 특히 무능했습니다. 그들 때는 외국과 전쟁하는 횟수도 눈에 띄게 줄어들었습니다. 왕이 해외원정에 참여하지 않고 국내에 머문 해가 여러 해 되기도 했습니다. 

내부 반란도 일어나곤 했습니다. 연속적인 기근과 개기일식 같은 자연현상이 있었습니다. 그 당시 사람들에게는 다 불길하게 여겨지는 일들이었습니다. 사람들에게 두려움을 주기에 충분한 일들이었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니느웨에 요나를 보내신 것은 바로 그런 때였습니다. 오늘 본문 3장에서 보듯이 니느웨에서 왕을 위시하여 대신과 온 백성이 모두 금식하며 하나님을 믿는 일이 벌어지기에 딱 좋은 분위기가 이미 조성되어 있었던 때였다는 것입니다. 

앗수르 제국의 큰 성읍 니느웨는 세계도시였습니다. 그리고 악의 도시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요나에게 말씀하시기를 “그 악독이 내 앞에 상달되었음이니라.”(요나서 1:2) 하신 것으로 보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악독한 도시라고 하셨으면 하나님의 택하신 백성 이스라엘이 좋아해야 할 이유가 없는 도시이고 백성이고 나라입니다. 게다가 그 도시, 백성, 나라가 좋아지고 부강해지면 질수록 이스라엘에게는 더 큰 위협이 될 것이 뻔한 노릇입니다. 

실제로 머지않은 훗날 앗수르는 북왕국 이스라엘을 멸망시킬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여로보암 2세 때 즉 요나의 활동 시기에는 마침 그 나라가 예전에 비해 침체기에 들어간 때입니다. 왕들도 줄줄이 무능하고 내분과 반란이 일어나며 기근도 자주 일어나고 민심도 흉흉해지니 가만 놔두면 저절로 약해져 이스라엘을 위협할 만한 세력이 되지 않을 수 있는 일이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경고대로 니느웨가 무너지면 이스라엘에게는 그보다 더 좋을 일은 없는 것이었습니다. 

이스라엘로 봐서는 손해 볼 것 하나 없는 것입니다. 따라서 요나의 생각에는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 니느웨 사람들에게 하나님을 믿으라고 권할 필요가 없었던 것입니다. 이스라엘에게 위협이 되고 화가 될 가능성이 있는 일을 서둘러 할 이유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도망가려 했고 할 수 있는 대로 피하거나 미루려고 했던 것이며 그것이 뜻대로 되지 않자 화를 낸 것입니다. 그는 애국적 동기에서 그랬던 것입니다. 문제는 그의 애국적 동기가 하나님의 생각과는 달랐다는 데 있습니다. 아니 사람의 생각을 넘어서는 하나님의 은혜에 그의 애국심이 미치지 못했던 것입니다. 

예언자 요나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깨우쳐 주시는 진리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우리의 국경과 인종과 민족을 초월한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민족은 하나님의 택하신 민족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민족 중에도 구원받지 못할 사람이 있습니다. 반면에 하나님께서는 이방인 중에서도 얼마든지 원하시는 이들을 구원하십니다. 하나님께서 니느웨 백성이 회개하고 하나님을 믿자 뜻을 돌이키시고 그들에게 내리고자 하셨던 재앙을 내리지 않으신 것은 구원이 이스라엘 민족만의 독점적인 소유물이 아님을 분명히 보여준 일입니다. 

또 영원한 구원과는 상관없이 그때그때 필요하신 대로 그 누구에게든지 사랑과 긍휼과 자비와 용서를 베푸시기도 하십니다. 그 이유와 그것을 통해 하나님께서 이루고자 하시는 계획과 목적을 우리가 일일이 다 알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애국심 때문에 우리의 적대국 사람이라고, 우리와 과거의 악연 때문에 우리의 신앙에 어긋나는 행동을 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께서 사랑하시고 용서하시며 구원하고자 하시는 사람들을 우리가 증오하고 용서하지 않으며 외면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요나는 애국자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의 예언자로서 하나님의 명령에 충실하지 않았습니다. 신앙인으로서 성숙하지 못했습니다. 

지금 일본이 사상 네 번째로 강한 진도 9.0의 대지진과 그로 인한 최고 높이 23미터의 쓰나미, 원전 사고와 방사능 유출, 추위와 식량과 의약품과 전력의 부족으로 수만 명에 이를 것으로 추정되는 사상자와 수십만 명의 이재민을 낳는 대재앙 아래 놓였습니다. 이때 가장 가까운 이웃나라의 국민인 우리는 일본이 우리에게 씻을 수 없고 잊을 수 없는 치욕과 고통을 준 과거의 역사를 넘어서서 오늘 그 땅과 그 땅의 백성에게 은혜를 베푸시고 긍휼을 베푸시며 용서하실 하나님의 뜻을 받들어 무조건 그들을 위해 기도하고 그들을 힘껏 도와야 할 것입니다. 

우리의 소아적 애국심이 하나님의 넓은 사랑을 제한하려 하지 않게 해야 할 것입니다. 한국을 너무나 사랑하신 하나님께서 이번에 일본을 향하여 베푸시는 은혜의 도구로 우리가 가장 크게 사용되기를 바랍니다. 니느웨로 보내심을 받고 다시스로 도망가는 요나같이 되는 한국이, 한국교회가, 우리 새문안교회가 되지 않기를 바랍니다. 일본이 회복되는 것을 바라보며 요나처럼 하나님을 향해 성내며 몽니부리는 우리가 되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요나서 마지막 두 절 말씀은 우리가 곰곰이 되새겨 볼 말씀입니다: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네가 수고도 아니하였고 재배도 아니하였고 하룻밤에 났다가 하룻밤에 말라 버린 이 박넝쿨을 아꼈거든 하물며 이 큰 성읍 니느웨에는 좌우를 분변하지 못하는 자가 십이만여 명이요 가축도 많이 있나니 내가 어찌 아끼지 아니하겠느냐?`” 행여라도 우리 국민 가운데 이번 기회에 경쟁국인 일본의 경제가 좀 나빠지기를 은근히 바라는 생각을 조금이라도 갖지 않기를 바랍니다. 

더더군다나 그리스도인들 가운데 예수도 믿지 않는 일본이니 이번에 혼 좀 나봐야 한다는 생각을 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비록 좌우를 분변하지 못하는 백성이 수십만, 수백만, 수천만이 된다 할지라도 그것은 하나님께 맡길 일입니다. 세계 제2, 제3의 경제력을 아끼실 주권을 하나님께 맡기는 성숙한 우리가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는 그저 일본의 최대한 빠른 경제회복을 위해 하나님께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모든 재앙을 멎게 하실 이는 오직 하나님뿐이시기 때문입니다. 지금 일본의 재앙을 멎게 하실 이도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께 기도하며 우리의 있는 힘을 모아 일본을 도웁시다.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재난을 당한 일본 사람들을 살립시다. (이수영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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