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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진정한 믿음(Ⅱ) (약 2:20-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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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정한 믿음(Ⅱ) (약 2:20-26) 
 
 
오늘은 진정한 믿음의 열매로 나타나는 ‘행함’과 관련해서 말씀을 나누겠습니다.
야고보는 “아아 허탄한 사람아 행함이 없는 믿음이 헛것인 줄 알고자 하느냐”(20)라고 탄식하면서 진정한 믿음에는 언제나 행함이 수반되었음을 보여주는 두 사례를 듭니다.

창세기 15장을 보면, 하나님께서는 자식이 없어 힘들어 하는 아브람에게 하늘의 뭇별을 보게 하시며 “네 자손이 이와 같으리라”고 약속하셨습니다. 이에 아브람은 여호와를 믿었고 여호와께서는 이것을 “그의 의로” 여기셨습니다(창 15:5-6). 오직 믿음으로 칭의를 받았지요. 그런데 바로 이어지는 16장에서 아브람은 사라의 몸종 하갈을 통해 이스마엘을 낳습니다. 20장에서는 그랄 왕 아비멜렉이 두려워 아내를 누이라 속였다가 곤욕을 치릅니다. 믿음의 조상 같지 않는 모습이지요.

그런데 22장에서, 여호와께서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 번제로 드리라”는 말씀으로 아브라함을 시험하셨습니다(창 22:2). 도무지 머리(지성)로 이해할 수 없고, 마음(감성)으로도 용납될 수 없는 말씀입니다. 하지만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뜻대로 준행(의지)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순종을 보시고서 “내가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아노라”(창 22:12)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이 참으로 믿었음을 확정해주신 것이지요. 그런데 야고보는 이 사건을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21) 첫 사례로 소개합니다.

야고보는 “네가 하나님 경외하는 줄을 아노라”라는 말씀을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으로 해석했습니다. 이미 믿음으로 의롭게 된 사람의 그 믿음이 참되다는 사실을 확정 받았다는 의미로 ‘의롭다 하심’을 사용한 것이지요. 반면 사도 바울은 하나님을 믿지 않던 죄인이 오직 믿음을 통해 하나님께 의인으로 간주될 때 ‘의롭다 하심’을 받았다고 표현했습니다(롬 3:28). 동일한 단어가 문맥에 따라 다른 의미를 사용된 것이지요. 바울이 믿음으로만 구원 받는다는 사실에 초점을 두고 말했다면, 야고보는 구원 받게 하는 그 믿음은 진정한 믿음이어야 한다는 사실에 초점을 두고 말하고 있습니다.

야고보는 이 사건을 “믿음이 그의 행함과 함께 일하고 행함으로 믿음이 온전케”(22)되는 증거로 제시합니다. ‘함께 일한다’(쉬네르게이)는 동사는 헬라어로 미완료 시상인데 믿음이 가끔 행함과 함께 일하기도 하는 것이 아니라 믿는 순간부터 계속해서 행함과 함께 일한다는 의미입니다. 믿음은 행함과 결코 분리될 수 없는 성질을 가졌음이 함의되어 있지요. 행함 없는 믿음은 진정한 믿음으로 확정할 수 없고, 믿음 없는 행함은 성경이 죄라고 규정합니다(롬 14:23). 그러므로 “온전케 되었느니라”는 구절도 믿음만으로는 불완전했는데 행함이 보충되자 온전해졌다는 의미일 수가 없지요. 진정한 믿음의 특성상 믿음만 따로 일하다가 나중에 행함이 보충될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진정한 믿음은 행함과 함께 일한다는 사실이 23절에서도 다시 확인됩니다. “경에 이른 바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니 이것을 의로 여기셨다는 말씀”은 창세기 15장 6절에 있습니다. 그런데 야고보는 이 말씀이 창세기 22장에서 아브라함의 순종을 통해 “응하였”다고 해석합니다. 응했다는 말은 ‘성취되었다’(에플레로데)는 뜻인데요, 하나님께 의롭다고 선언하신 말씀은 단지 듣기 좋은 말에 불과하지 않고 실제로 성취되었습니다. 의롭다고 칭함 받은 아브람도 때때로, 그리고 때로는 상당 기간 동안 그의 믿음과 어울리지 않는 모습으로 살았습니다. 하지만 결국은 믿음에 합당한 모습이 드러났습니다. 

진정한 믿음이 입증된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벗”(23b)이라 칭함 받았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제자들을 “친구”라 하셨는데(요 15:15), 그만큼 관계가 친밀해졌다는 의미입니다. 야고보서 4장에 나오는 “세상과 벗”(4:4)된 “하나님과 원수”와 반대되는 개념이지요. 이처럼 하나님께서 의롭다 하신 사람은 실제로도 의롭게 되어갑니다. 세상과 벗된 사람들과는 구별된 모습이 드러나고 세상과 구별된 행함이 나타나게 됩니다.

아브라함의 증거로 인해 야고보가 확신 있게 선포하는 진리가 무엇입니까? “이로 보건대 사람이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고 믿음으로만 아니니라”(24). 문맥을 무시하고 이 구절만 따로 떼어내면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롬 3:20)라는 말씀과 모순됩니다. 하지만 로마서에서는 진정한 믿음이 없는 사람의 스스로 의로워지려는 행위를 말하고 있는 반면, 본문의 문맥에서는 진정한 믿음의 열매로 드러나는 행함을 말하므로 서로 조화되지요. 야고보는 지금까지 주장해왔던 ‘진정한 믿음은 행함으로 드러난다’는 진리를 다시 한 번 요약해서 선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진정한 믿음의 열매로 드러난 “행함”은 어떤 특징을 가졌습니까? 자식을 칼로 잡으려했던 했던 아브라함의 행위는 일반 윤리로 볼 때 전혀 선행이 아니며 긍휼의 자세도 아닙니다. 오히려 사교 집단에 빠진 광신자의 행위요, 자식에 대해 피도 눈물도 없는 비정한 행위로 해석되겠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경은 바로 이 행함이 “의롭다 하심”을 받았다는 사실을 당당하게 선언합니다. 이로써 야고보가 강조하고 있는 ‘행함’은 단순히 일반 윤리의 관점에서의 선하게 살아가는 행위를 뜻하지 않음이 분명해지지요.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의 참된 경외심을 인정하실 때, “네 아들 네 독자라도 내게 아끼지 아니하였으니”라는 내용을 두 번 반복하셨습니다(창 22:12, 16). ‘아무리 하나님의 뜻이라도 이것만큼은 안됩니다’하며 아끼지 않고 지체 없이 드렸다는 것이지요. 아브라함의 순종은 ‘하나님께서는 어떤 상황에서도 반드시 약속을 이루신다’는 사실을 믿는 믿음에서 나왔습니다. 이성으로 이해되는 만큼만, 감성적으로 수용할 수 있는 만큼만 믿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이기에 전적으로 신뢰했습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의 온전한 순종 행위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그의 온전한 믿음을 보여주는 증거였습니다.

진정한 믿음은, 비록 하나님의 뜻을 다 헤아리지 못할지라도, 비록 현재적으로 그분의 사랑이 느껴지지 않는다 할지라도, 약속의 말씀을 믿고 하나님께 순종하는 특징이 있습니다. 물론 ‘하나님의 뜻’을 빙자해서 자기 뜻을 광신적으로 행하는 어리석음이 되지 않아야겠지요. 어설프게 하나님의 뜻을 짐작하지 않고 베뢰아 사람들처럼 “간절한 마음으로 말씀을 받고 이것이 그러한가 하여 날마다 성경을 상고”(행 17:11)하는 신중함이 필요할 것입니다. 여하튼 진정한 믿음이 있다면, 모호한 뜻에 대해서는 ‘하나님의 뜻을 좀 더 잘 알아나가려는 태도’로, 이미 알게 된 그분의 뜻에 대해서는 ‘좀 더 잘 순종하려는 태도’로 나타날 것입니다. 이것은 한 순간의 행위가 아니라 진정한 믿음을 가진 성도가 평생 동안 나타내는 행함의 특징입니다.

두 번째 사례로 등장하는 라합은 여리고성의 창기였습니다. 유대인들의 입장에서 보면 그녀는 의로움과는 가장 거리가 먼 사람이었습니다. 이방인이고 여인이며 창기였기 때문이지요. 그런 여인이 이스라엘 정탐꾼들을 영접하고 숨겨주었습니다. 그녀의 이러한 행함이 오직 믿음에서 비롯되었음은 여호수아 2장 “여호와께서 이 땅을 너희에게 주신 줄을 내가 아노라”로 시작해서 “여호와는 상천하지의 하나님”이라 고백하는 그녀의 말속에 잘 드러나 있습니다(수 2:9-13).

야고보는 “기생 라합이 사자를 접대하여 다른 길로 나가게”한 이 사건도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25) 또 다른 사례로 소개합니다. 여리고 성의 다른 많은 사람들이 상천하지의 하나님으로 인해 떨었지만 하나님의 뜻에 대적했습니다. 말하자면 그들은 귀신의 믿음과 같은 종류의 믿음을 소유하고 있었습니다. 오직 라합만이 진정한 믿음을 가지고 있었는데, 그 증거는 정탐꾼을 접대하고 다른 길로 가게 한 그녀의 행함을 통해 확인됩니다. 그녀의 행위는 그녀가 하나님의 살아 계심과 가나안을 이스라엘에게 주셨다는 사실을 참으로 믿었음을 증명하기 때문이지요.

일반 윤리로 보면 라합의 행함 역시 지탄받을만합니다. 동족을 배반한 매국 행위였으니까요. 여기서 야고보는 라합의 행함을 인류애나 동포애의 관점이 아니라 철저히 하나님의 백성의 관점에서 강조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녀의 행함이 하나님의 구속사에 순종하는지 대적하는지를 기준으로 평가합니다. 라합의 행함은 이미 하나님의 백성의 행함이었습니다. 이방인이 정탐꾼을 도왔다기보다는 하나님의 백성인 자매가 하나님의 백성인 형제를 도운 셈이었지요.

정탐꾼을 도왔다는 사실이 발각되면 라합과 그녀의 가족은 몰살당할 것입니다. 그럼에도 라합은 목숨을 걸고 믿었습니다. 그녀의 믿음은 결코 값싼 믿음이 아니었지요. 그녀는 지식으로만 혹은 감정까지만 하나님과 그분의 약속을 믿은 것이 아니라 전 존재로 믿었습니다. 불신 가족의 입장에서 보면 그녀의 행위는 집구석 망하게 할 수도 있는 몹쓸 짓이었습니다. 하지만 구속사의 관점에서 보면 그녀는 가족에게 인간이 베풀 수 있는 최고의 긍휼을 베풀었습니다. 라합은 멸망할 수밖에 없는 그녀의 가족들을 말로만 사랑하지 않았던 것이지요. 목숨 걸고 사랑했습니다.

마지막으로 야고보는 “영혼 없는 몸이 죽은 것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니라”(26)고 다시 강조하며 결론 맺습니다. 이 말씀은 한 주간 동안 우리가 어떻게 행했느냐에 따라서 믿음이 죽기도 하고 살기도 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야고보가 시종일관 강조하는 것은 진정한 믿음에서는 행함이 나온다는 진리입니다. 아브라함처럼 상당한 기간 동안 하나님 백성답지 못한 모습으로 살지라도 진정한 믿음이 있는가 하면, 바리새인처럼 윤리적으로 반듯하게 행할지라도 가짜 믿음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행함이 있는 사람은 그 행함이 진정한 믿음에서 나온 것인지를 확인해야 하고, 행함이 없는 사람은 진정한 믿음이 있는지 확인해야 합니다.

스스로 믿는다고 착각하지만 진정한 믿음을 가지지 않은 신자들은 어느 시대나 있어왔습니다. 우리의 믿음 또한 시련을 겪으면서 진정한 믿음인지 증명되어야 할 것입니다. 늘 부족하지만 언제나 하나님의 뜻을 좀 더 잘 알고자 하고, 언제나 하나님의 뜻대로 좀 더 잘 행하고자 하는 것이 평생에 걸친 우리네 삶의 태도가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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