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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터가 흔들리면 (시 1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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터가 흔들리면 (시 11:1-7)


지난 3월 10일 일본 동북부 해안을 따라 전 지역에 시속 700km로 15m의 높은 강도 9.0의 지진과 쓰나미 파도가 순식간에 일본 열도를 삼켜 버렸습니다. 제가 tv를 보면서 충격을 받은 것은 늘 보던 파란 파도가 아니라 아이들이 뛰놀던 여름바다의 눈부신 모래밭이 아니라 산처럼 무너지는 시컿먼 파도였습니다. 순식간에 수많은 사람들을 삼키고 인간이 자랑하는 모든 것을 초라하게 만들어 버렸습니다. 그렇게 철저한 준비와 과학적 지식을 자랑하는 일본이 손 한번 제대로 쓰지도 못한 채 저렇게 무력하게 무너져 버렸습니다. 

이 여파로 인한 후유증은 만만치 않을 것입니다. 특히 후쿠시마(福島)에 있던 원전 7개 역시 만약 핵연료를 냉각 시키지 못하면 상상도 못할 대 재앙이 일어날 것입니다. 지금 원전 기술자 181명이 몸을 던져 냉각수를 식히는 작업을 하고 있습니다. 현재 사상자가 2만 명이 넘어서고 있고 앞으로 얼마나 늘어나게 될지 정확히 예측이 안되는 상황이라고 합니다. 

우리가 삶을 살아가다 보면 여러 가지 사고들을 만날 수 있지 않습니까? 차를 타고 가다가 갑자기 땅이 꺼지면서 그 속으로 함몰될 때도 있습니다. 또 공사를 하다가 옆에 있던 집들이 기울어서 무너지는 일들이 생기기도 하지 않습니까? 또 어떤 때는 갑자기 지하철이 멈추기도 하고 전기가 끊어져서 정전 때문에 피해를 입기도 합니다. 이런 일들이 우리를 놀라게 하기도 하고 충격을 주기도하고 그렇지만, 우리의 삶 전체를 송두리째 흔들거나 무너뜨리거나 하지는 않습니다. 불편함이 있지만 대체할 수 있고 다른 것을 통해 견뎌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이번 지진은 차원이 다른 것입니다. 모든 것이 한꺼번에 다 무너져버렸고 남아있는 것이 없이 무너져 버렸습니다. 그렇게 무너져 버린 것과 함께 자기의 사랑하는 가족이 무너진 땅 속에 다 빨려 들어간 것입니다. 또 순식간에 미래마져도 완전히 무너져버리는 상황을 당하게 된 것입니다. 여러분 왜 이렇게 모든 것이 다 한꺼번에 사라져버리게 되겠습니까? 그것은 땅이 무너졌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땅이 흔들렸기 때문에 그런 것이죠. 터가 무너지면 그것으로 끝입니다. 터가 무너지면 절망밖에 남지 않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 모든 것이 흔들린다고 하더라도 터는 흔들리면 안 됩니다. 터가 흔들리면 손쓸 방법이 없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3절 말씀에 ‘터가 무너지면 의인이 무엇을 할꼬’ 그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터’라고 하는 이 단어가 ‘샷트’라고 하는 히브리어를 쓰는데 이 단어의 원래 뜻이 규율, 기강 이런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터가 무너진다고 말하는 것은 사회를 유지할 수 있는 가장 기본적인 법과 질서가 무너지는 것을 말하는 것이죠. 

여러분 이 시편 11편을 쓸 때 그 시인이 경험했던 그 시대상황이 터조차 무너지는, 기본적인 질서조차 무너지는 그래서 부패가 만연하고 정의가 상실되어서 어떤 희망도 바랄 수 없는 그런 상황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오늘 아침 시편 11편의 말씀을 묵상하면서 말세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주시는 교훈을 찾아보려고 합니다. 지금 다윗은 죄수가 아닌 죄수가 되어 사울 왕의 집요한 추격을 받았습니다. 사울 왕의 추격이 어찌나 집요했던지 나라 안 어디에도 피할 곳이 없었습니다. 심지어 사울은 다윗을 숨겨주거나 도와주면 제사장일지라도 죽였습니다. 

한 번은 다윗이 사울 왕의 추격을 피하여 놉 땅으로 도망하였습니다. 놉에는 아히멜렉이라는 신실한 제사장이 있었습니다. 아히멜렉은 다윗에게 진설병과 블레셋과의 전쟁의 전리품인 골리앗이 썼던 칼을 주었습니다. 그런데 도엑이 그 사실을 사울 왕에게 밀고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사울은 아히멜렉을 비롯하여 높 땅에 있는 여든다섯 명의 제사장을 죽였고, 놉에 사는 남녀와 아이들과 소와 나귀와 양까지 다 몰살시켰습니다. 

사람들은 사울의 보복이 두려워 아무도 다윗을 도와주지 않았습니다. 뿐만 아니라 다윗을 밀고하였습니다. 이제 나라 안 어디에도 다윗이 숨을 곳이 없었습니다. 한 때는 사울에게 인정을 받고 백성들로부터 존경을 한 몸에 받았던 다윗입니다. 전쟁에 승리한 공으로 사울의 딸 미갈과 결혼하여 사위가 되기도 했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정말 어처구니가 없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그리스도인이라고 해서 세상을 살며 환란을 당하지 않는 것은 아닙니다. 육체적으로 경제적으로 가정적으로 얼마든지 환난을 당할 수 있습니다. 생을 살다보면 어려운 일을 많이 당하게 됩니다. 파산을 당할 때도 있고, 사업이 실패할 때도 있고, 행복한 삶을 위해 결혼을 했지만 결국 갈라서야 하는 아픔도 있고, 사랑하는 이가 먼저 세상을 떠날 때도 있고, 아침에 멀쩡했던 아이가 불행을 당할 때도 있습니다. 정말 우리는 한치 앞도 예측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가 이런 비극을 당하여 몸부림칠 때 하나님께서 무관심한 것처럼 느껴질 때가 많이 있습니다. 

아무리 부르짖어도 하나님은 어려운 상황을 바꾸어 주시기는커녕 오히려 어두운 절망의 골짜기로 빠져 들어가도록 내버려두시는 것같이 보일 때가 더 많습니다. 이처럼 우리의 생을 가랑잎처럼 흔들어 놓는 인생풍랑 가운데서 어찌할 바를 모를 때가 한 두 번이 아닙니다. 

여기 보세요. 지금 다윗도 이 엄청난 고난 앞에 마음속에 갈등이 일어납니다.󰡒너희가 내 영혼더러 새 같이 네 산으로 도망치라 함은 어찜이뇨󰡓산으로 도망치라는 소리가 들리기도 합니다. 미국으로 도망치라는 소리가 들리기도 합니다.󰡒그까짓 하나님을 믿어서 무얼 해? 그까짓 교회를 나가면 무얼 해? 세상으로 도망쳐 버려” 라는 소리가 들리기도 합니다.󰡒그까짓 기도를 해서 무얼 해? 의사를 찾아가 보든지, 점쟁이를 찾아가 보든지, 은행을 찾아가 보든지 해”라는 소리가 들리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지금 다윗은 고백하는 것입니다. 3절에 “터가 무너지면 의인이 무엇을 할꼬?” 무슨 말입니까? 자신은 세상 앞에 흔들림이 없이 믿음으로 살아 왔습니다. 그러나 만약에 지금 자신이 무너진다면, 이 현실 앞에 비참하게 쓰러진다면, 이것이 다윗 한 사람만의 문제이겠습니까? 다윗은 터가 무너졌을 때 하나님의 품을 바라보았고 그리고 하나님이 계시는 성전을 바라보았습니다. 다윗은 지금 자기의 마음과 영혼이 하나님께 피하였다고 고백했습니다. 

1절입니다. “내가 여호와께 피하였거늘 너희가 내 영혼더러 새같이 네 산으로 도망하라 함은 어찜인고” 여기 “내가 여호와께 피하였거늘”이 세상은 혼자서는 살아갈 수 없습니다. 아무리 유능하고 똑똑하고 재산이 많다 해도 남의 도움없이는 한순간도 살 수 없는 것이 인간입니다. 한자로 사람을 나타내는 人자를 자세히 살펴보면 두 획이 서로 의지하고 있어 어느 하나가 없으면 다른 하나는 저절로 넘어지게 되어 있습니다. 사람은 이처럼 서로 도와주고 도움을 받으면서 살아가야 하는 존재입니다. 

아이는 부모의 도움을 받아야 합니다. 학생은 선생님의 도움을 받아야 합니다. 아플 때는 의사의 도움을 받아야 합니다. 배가 고프면 요리사의 도움을 받아야 합니다. 차를 타려면 운전기사의 도움을 받아야 합니다. 김치 한 조각을 먹으려 해도 농부의 도움을 받지 않으면 안됩니다. 그러나 인간의 도움은 한계가 있습니다. 아무리 우정이 깊고 사랑하는 사이라 해도 끝까지 우리를 책임져 줄 수는 없습니다. 능력의 한계가 있기 때문입니다. 더구나 우리가 당하는 고난이 크면 클수록 더 인간의 도움은 한계에 부딪히게 됩니다. 우리는 터가 흔들리는 고난에 처하게 되면 아무도 나를 도와줄 수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 인생의 근본인 터가 흔들릴 때 우리를 도와줄 수 있는 전능자가 필요하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전능자가 나를 붙잡아 주고 도와주면 우리는 흔들리는 삶 가운데서도 든든하고 안정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우리 하나님은 우리의 일거수일투족을 다 헤아리시며 우리가 손을 내밀 땐 언제든지 거절하지 않으시고 손을 잡아주시는 분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아픔을 아십니다. 그래서 우리 곁에서 우리를 지켜주시고 안아 주시고 일으켜 세워주십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영혼과 내 육체를 일으켜 주시면 우리는 높은 산에 우뚝 설 수도 있고, 폭풍의 바다도 건널 수 있으며, 나보다 더 큰 내가 될 수 있습니다. 

다윗은 그런 하나님을 믿었기에 터전이 흔들렸을 때 하나님께 피했습니다. 사람들은 그런 다윗을 보고 차라리 새처럼 산으로 피하지 왜 하나님께 피했느냐고 조롱합니다. 하나님이 보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눈에 보이지 않기 때문에 눈에 보이는 사람을 의지하고픈 유혹에 이끌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사람들의 조롱을 들으면서도, 죽이려고 활을 당기는 것을 보면서도, 어두운 곳에 숨어 시위에 화살을 먹이는 것을 보면서도 요동하지 않았습니다. 

오직 하나님께 피하였습니다. 그리고 그는 터가 흔들릴 때 성전을 사모했습니다. 4절 말씀을 봉독합니다. “여호와께서는 그의 성전에 계시고 여호와의 보좌는 하늘에 있음이여 그의 눈이 인생을 통촉하시고 그의 안목이 그들을 감찰하시도다” 아멘. 하나님은 어디에나 계십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우리를 만나 주시기 위하여 특별한 장소를 구별하셨습니다. 그곳이 바로 성전입니다. 

어느 목사님이 교회에 흥미를 잃어 자주 예배에 빠지는 성도를 심방했습니다. 목사님이 성도에게 예배에 결석하는 이유를 물었습니다. 그러자 성도가 “목사님, 하나님이 어디에나 계신다고 말씀하시지 않았습니까? 그러니 집에서 예배드려도 교회에서 예배드리는 거나 마찬가지잖아요?”하고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그 말을 들은 목사님은 갑자기 일어나 벽난로로 가더니 벌겋게 타고 있는 석탄 한 개를 꺼내 난로 밖에 내어놓았습니다. 그리고는 목사님은 아무 말 없이 그것을 주시하였습니다. 그런데 얼마가지 않아 난로 밖으로 꺼내진 석탄은 화기를 잃고 스러지더니 마침내 불씨를 잃고 식어버렸습니다. 말없이 꺼져가는 석탄을 보고 있던 성도는 비로소 목사님이 석탄을 난로 밖으로 꺼내놓은 이유를 깨달았습니다. 그리고 목사님께 다음 주일에는 교회에 나가겠다고 말했습니다. 

우리가 교회에서 예배와 성도의 교제에 적극 참여하지 아니하면, 우리의 영혼의 불씨가 꺼지게 됩니다. 그러면 우리는 냉담하게 되고, 영적 생명력을 잃어버리게 됩니다. 양심은 화인 맞아서 부정부패에 익숙하게 됩니다. 이런 상태가 느껴지면 더 이상 주저하지 말고 바로 행동을 취해야 합니다. 예배에 더 열심히 참석하고, 찬송가를 더 힘 있게 부르고, 새벽에 나와 기도하고, 설교를 더 귀담아 들어야 합니다. 성도는 교회 중심의 신앙생활을 해야 합니다. 시편 95:6-7절은 “오라 우리가 굽혀 경배하며 우리를 지으신 여호와 앞에 무릎을 꿇자 그는 우리의 하나님이시요 우리는 그가 기르시는 백성이며 그의 손이 돌보시는 양이기 때문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굽혀 경배하고, 무릎을 꿇어야 하는 이유는 우리가 하나님의 백성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이 돌보시는 양이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날 우리가 사는 시대는 우리가 상상도 할 수 없었던 재앙이 전 세계적으로 쓰나미처럼 몰아치고 있습니다. 전쟁의 먹구름이 아랍권을 뒤 흔들고 금융의 쓰나미로 얼마나 많은 나라가 휘청거렸습니까? 또 이상 기온 현상으로 세계가 동 시간 때에 한쪽에서는 홍수와 폭설로 그리고 또 한쪽에서는 기근과 폭염으로 지구가 몸살을 앓고 있습니다. 어찌 그뿐입니까? 요즘 광우병, 구제역, AI 조류 독감으로 세계가 질병의 공포로 떨고 있습니다. 그동안 안전지대로 여겨진 모든 것이 터가 흔들리거나 무너져 내리고 있습니다. 

제가 며칠 전에 재미있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여러분도 아시지만, 우리나라는 지진의 안전지대로 여겨졌었습니다. 그러나 우리나라도 이제 지진이 심심치 않게 일어나고 있습니다. 북한은 핵무기로 민족의 생존권을 위협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나라에도 핵 대피시설까지 갖춘 빌라가 생겼습니다. 서울 서초동에 있는 모 빌라에는 핵 대피시설을 갖춘 지하벙커가 있습니다. 벙커 입구 문짝은 1톤이 넘고, 벽두께는 일반 건물 벽의 4배나 된다고 합니다. 지하 4층에 위치한 이 벙커는 40여평 정도에 50여명 정도의 인원이 들어가고 한 달 가량 살 수 있도록, 모든 시설이 다 구비되어 있다고 합니다. 그러나 과연 그곳이라고 안전할까요. 지구상 그 어디에도 안전지대는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만이 우리의 피난처입니다. 안식처입니다. 인간은 하나님께 피할 때 안전합니다. 다윗은 나라 안 어디도 안전하지 않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계신 성전을 찾았습니다. 하나님은 그렇게 하나님의 품을 파고드는 다윗을 안전하게 지켜 주셨습니다. 교회는 우리의 유일한 피난처입니다. 바울은 엡 5:25-27절에서 교회가 얼마나 소중한 곳인가 하는 것을 자세히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고 위하여 자신을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교회를 위해서 자신의 모든 것을 내어줄 만큼 교회를 사랑하셨습니다. 그리고 물로 씻어 말씀으로 깨끗하게 하사 거룩하게 하셨습니다. 우리가 교회중심의 신앙생활을 해야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교회가 주님의 몸이기 때문입니다. 주님이 교회를 위하여 자신의 몸을 내어주시기까지 하셨기 때문입니다. 터가 흔들릴 때 우리는 하나님께 피해야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왜 때로는 우리가 원치 않는 이런 고난이 우리에게 옵니까? 그런데 우리가 한 가지 기억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의미 없는 고통을 결코 허용하시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C. S. Lewis 교수는 옥스퍼드 대학의 예배당에서 설교를 하고 나올 때, 한 학생으로부터 이런 질문을 받았습니다. “당신이 증거 한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면 어째서 이런 설명할 수도 없고 이해할 수도 없는 고통을 허용하시는 겁니까?󰡓그 때 루이스 교수는 이런 유명한 대답을 했다고 합니다. “고통이 있어도 교만한 인생인데, 만약 인생의 길에 고통마저 없다면 사람들은 얼마나 더 교만하겠습니까?” 

그리고 덧붙여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고통이란 귀먹은 세상 사람들을 깨우기 위한 하나님의 메가폰(확성기)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평온할 때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자녀들이 말썽 부리지 않고 잘 커갈 때, 남편이 다른 사람들보다 승승장구하며 승진을 잘 할 때, 손대는 일마다 잘 되고, 일이 잘 풀릴 때, 우리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인생 가운데 폭풍이 불고, 풍랑이 밀려올 때, 하나님의 음성을 듣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C. S. Lewis는 우리에게 다가온 고통은 귀먹은 사람들을 흔들어 깨우는 하나님의 메가폰이라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지금 일본에 이 엄청난 재앙은 일본을 향하신 하나님의 확성기입니다. 단지 몇 년 만에 오는 ‘지진 싸이클이다’라는 식으로 애써 현재의 문제를 덮어서는 안될 것입니다. 도쿄 시장의 고백처럼 “우리는 천벌을 받은 것이다”라는 겸허한 자세를 가지고 다시 일어서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그동안 얼마나 주변 나라들에게 고통을 안겼습니까? 이 기회에 자신들의 오만함과 남에게 상처를 준 것에 대해 겸손하게 그 사실을 인정을 해야 합니다. 

저는 이번에 독도 분규로 등을 돌렸던 한국인들도, 센카쿠열도로 총구를 맞댔던 중국인들도 지진으로 쑥대밭이 된 일본인의 고통에 동참하는 모습을 보고 눈시울이 뜨거워졌습니다. 누가 자신들을 괴롭히는 상대에게 선뜻 나서서 사랑의 손길을 펴겠습니까? 정말 놀라운 것은 일본보다 가난한 나라들도, 일본을 미워하고 시기하던 나라들도, 멀리 떨어져 무관하게 바라보던 나라들도 일본인을 돕고 위로하기 위해서 가슴을 열었다는 사실입니다. 

지금은 일본이 이 재난을 극복하기 위해 정신이 없겠지만, 그러나 그들이 결코 잊지 말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이 재앙 앞에 배워야 할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진노 중에서라도 베푸시는 긍휼을 갈망을 해야 합니다. 그리고 더 이상 이웃에게 아픔을 주는 일이 없어야 할 것입니다. 독도 문제, 위안부 문제를 더 이상 억지를 부려서는 안 될 것입니다. 자신들의 이익 앞에서는 남의 주권도 인정 안하는 그릇된 교만을 버려야 합니다. 나는 이들이 겸손하게 하나님 앞에 나아와 무릎을 꿇는 계기가 되었으면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런던의 한 길 모퉁이에서 구두를 닦는 소년이 있었습니다. 아버지가 빚 때문에 감옥에 갇혔기 때문에 집안 살림을 꾸려 나가기 위해 구두를 닦아야 했습니다. 새벽부터 나와서 밤늦게까지 길거리를 지나가는 사람들의 구두를 닦으면서도 그 소년은 얼굴에 밝은 웃음을 잃지 않았습니다. 늘 노래를 부르는데 밝은 노래만 불렀습니다. 사람들은 그에게 물었습니다. "구두 닦는 일이 뭐가 그리 좋니?" 그때마다 소년은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즐겁지요. 저는 지금 구두를 닦고 있는 게 아니라 희망을 닦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소년이 바로 『올리버 트위스트』를 쓴 세계적인 작가 찰스 디킨스입니다. 

아무리 먹구름이 짙어도 그 먹구름 뒤에는 빛나는 태양이 있습니다. 우리는 시련과 환경이 어렵고 힘들어도 그 모든 것을 합해서 선을 만들어 가시는 하나님의 살아 계심을 믿습니다. 어린 찰스 디킨스가 손님들의 반짝거리는 구두 코 위에서 희망의 별빛을 보았던 것처럼, 어렵고 힘든 환경 속에서도 우리의 희망이신 그리스도를 온전히 바라보면서 결코 믿음의 터가 무너지지 않도록 피난처이신 하나님께 피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얼굴을 찾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자기의 사랑하는 자녀들이 세상을 살면서 온갖 고생을 하다가 만신창이가 되어서 생을 끝마치는 것을 원치 않으십니다. 긍휼이 많으신 주님은 나와 나의 필요에 대해 어느 누구보다도 잘 아시기 때문에, 정확한 때에 도와주시기 위해 늘 은혜를 준비하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문제를 만날 때 우리의 피난처 되신 주의 품에 바짝 다가가 안겨야 합니다. 주님께 간구하면, 때를 따라서 채우시며 위로해 주시는 손길이 항상 우리 곁에 있음을 알게 될 것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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