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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인물을 키우는 교회 (출 2:1-10) - 장학주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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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을 키우는 교회 (출 2:1-10)


중국속담에 이런말이 있습니다. 일년을 위해서라면 밀을 심어라, 일년후면 거둘수 있으니까. 십년을 위해서라면 한그루의 나무를 심어라 그 나무가 그늘을 주고 재목을 제공해 줄 것이기 때문에. 그러나 백년의 꿈과 비젼을 위해서라면 사람을 키우라라는 말이 있습니다. 사람에게 투자하는 것, 사람을 키우고 인재를 키우는 것이 귀한 일입니다. 그런의미에서 교회는 특별히 인물을 키우는 곳입니다. 인물을 키우되 모세와 같은 인물을 키워야 될 줄 믿습니다. 

예수님의 생애에서도 예수님이 하셨던 가장 중요한 일은 12명의 제자를 키운 일입니다. 양육하신 것입니다. 3년동안 그들과 공생애 동안 동고동락하면서 숙식을 같이 하면서 그들에게 인격을 가르치고 믿음을 가르치고 말씀을 가르치셨습니다. 또 기도를 가르치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고나서 부활하시고 승천하셨지만 그 열두 제자가 예수님의 뒤를 이어서 복음을 땅끝까지 증거하는일에 그들의 삶을 헌신하게 되는 것입니다. 

한사람의 위대한 인물은 역사에 엄청난 역사에 영향을 끼칠수 있습니다. 모세 한사람이 끼친 영향 어마어마 한 것입니다. 한민족을 다른곳에서 전혀 새로운곳으로 이끌어낸 출애굽의 지도자로 쓰임받을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모세의 이름을 물에서 건져낸자다라 부릅니다.  

10절입니다. 그 아기가 자라매 바로의 딸에게로 데려가니 그가 그의 아들이 되니라 그가 그의 이름을 모세라 하여 이르되 이는 내가 그를 물에서 건져내었음이라 하였더라. 알다시피 모세의 부모가 더 이상 모세를 키울수가 없어서 갈대상자에 담아서 나일강에 버렸더니 마침 그때 애굽의 바로의 딸이 목욕하러 왔다가 갈대상자를 보고 이상하게 여겨서 뚜껑을 열어봤더니 예쁜 아기가 웃고 있는 것입니다. 그 웃고 있는 아기를 보고 어떻게 생각했을까. '히브리 아이네 갖다 버려' 이럴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 아이를 자기아이로 양자로 삼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모세라는 이름은 물에서 건져내었다해서 모세라고 지었다 했습니다. 이것을 애굽식 발음으로 하면 모우세스입니다. 모는 물, 우세스는 건져내다. 물에서 건져내다 그것이 모우세스입니다. 애굽식 발음인데 이것을 히브리식 발음으로 바꾸면 모세가 되는 것입니다. 모세라는 말은 히브리식으로 건져내는자. 어찌보면 모세의 이름에 의미가 있습니다. 

모세는 나일강에서 건짐을 받은자인데 그의 사명은 다시 이스라엘 백성을 건져낼자가 되었다. 구원자가 되었다 그런 이야기입니다. 의미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모세는 그 일생을 한 민족을 애굽의 속박의 땅에서 가나안의 자유의 땅으로 인도하는 엄청난 사명을 감당했던 인물이 모세라는 것입니다. 

모세가 태어나던 시대는 어려운 시대였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땅 고센에 들어가게 된것은 배경이 있습니다. 요셉이 형들의 미움을 받아서 노예로 팔려와서 애굽에 정착하게 되었고 그가 지혜로와서 바로의 꿈을 해석해 주었기 때문에 그는 국무총리가됩니다. 

그런데 소문을 들으니 자기 형제 부모가 기근 때문에 어려움을 당한다는 소식을 듣고 수레를 보내서 자기 일가족을 다 데리고 옵니다. 숫자가 얼마 안됩니다. 60여명 됩니다. 그러나 그 일가족이 그 애굽땅에 와서 400년을 살았는데 사백년후에 보니까 인구가 2백만의 인구였습니다. 물론 요셉도 죽었습니다. 

그런데 요셉을 알지 못하는 바로가 집권을 하고 나서 그는 히브리민족을 두려움의 대상으로 여기게 되었습니다. 이스라엘사람은 아기도 잘낳고 건강하고 낳으면 잘 큽니다. 그리고 이스라엘민족이 다산의 의식이 있어서 아이들을 많이 낳습니다. 하나님의 축복입니다. 이 백성이 사백년만에 2백만으로 늘어나니까 두려움을 갖는 것입니다. 만약 우리가 다른나라하고 전쟁할 때 우리 적군을 도우면 우리가 어떻게 되겠느냐. 그래서 히브리민족 말살정책을 펴는 것입니다. 마치 일본이 우리들을 말살하던 것처럼 말입니다. 

그래서 비돔성과 같은 노역장 공사장에 인부들로 히브리인들을 다 차출해서 쓰는 것입니다. 임금도 먹을것도 재료도 안주고 성을 쌓게 하고 못쌓으면 채찍으로 때리고 고통을 주는 것입니다. 거기다가 그냥 두면 안되겠습니다. 여자 딸을 낳으면 살려두지만 아들을 낳으면 다 어디갔다 버리라고 했습니까. 나일강에 갖다 버리라고 했습니다. 그러니 나일강에 유아들의 시체가 둥둥 떠다녔을 것입니다. 나일강은 죽음의 강입니다. 그런시대입니다. 

그런데 레위인 한 가정 그 아버지의 이름은 출애굽기 6장에 보면 아므람입니다. 고압자손의 후손 아므람이고 어머니는 아주 경건한 신앙의 여인 요게벳입니다. 그 사이에 한 아이가 태어났는데 아이를 보니까 그렇게 잘생기고 총기가 있고 하나님이 우리 가정에 특별히 주신 선물입니다. 이 아이를 차마 나일강에 버릴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이 아이를 숨겨서 석달을 키웠습니다. 키우다보니까 키울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곤란에 부딪치게 되었습니다. 

1절 2절입니다. 레위 가족 중 한 사람이 가서 레위 여자에게 장가 들어 그 여자가 임신하여 아들을 낳으니 그가 잘 생긴 것을 보고 석 달 동안 그를 숨겼으나. 이것은 외모만 탤런트처럼 잘생겨서 이렇게 잘생긴 아이를 죽이면 어떻하나 그런 의미는 아닐 것입니다. 

사도행전 7장 20절입니다. 이것은 스데반 집사가 모세를 설명한 것입니다. 그 때에 모세가 났는데 하나님 보시기에 아름다운지라 그의 아버지의 집에서 석달동안 길리더니 하나님 보시기에 아름다웠다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인간의 눈으로 보기에 외모만 잘생긴 그런 아이가 아니라 하나님 보시기에 모세의 부모가 보기에도 이 아이는 특별한 아이야 이 아이는 하나님의 섭리가 있는 아이야 그런 믿음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더더욱 그 당시에는 남자아이를 살려두면 온 일가족이 몰살입니다. 그런데 그 아이를 살려서 숨겨서라도 키우고자 하는 것은 굉장한 믿음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11장 3절입니다. 믿음으로 모세가 났을 때에 그 부모가 아름다운 아이임을 보고 석 달동안 숨겨 왕의 명령을 무서워하지 아니하였으며. 이 말씀은 바꿔말하며 모세가 태어났을 때 믿음으로 그 부모가 그 아이를 숨겼다는 것입니다. 모세가 태어났을 때 모세의 부모가 어떻게 모세를 숨겼느냐. 믿음으로. 믿음이 없으면 못 숨깁니다. 당장 죽을 판인데. 그러나 믿음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 아이를 지키실 것이라는 믿음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바로를 무서워하지 아니하고 바로를 무서워하지 아니하고 세상권세의 명령, 잘못된 명령, 더구나 아이를 죽이라는 살인의 명령을 두려워하지 않았다는 것, 이것이 중요합니다. 

그리스도인은 세상집권자들에게도 순종해야 합니다. 성경이 그렇게 가르치고 있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런 죽음의 명령에 대해서는 거부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자만이 할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면 세상권력이 두렵지 않은 것입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사람은 사람들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세상 권력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우습게 여기는 사람은 세상권력에 빌붙어서 뭐 좀 해보려고 돈있으면 거기가서 붙고 권력이 있으면 거기가서 붙고, 줏대없는 짓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사람은 세상권력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부모에게는 이 믿음이 있었던 것입니다. 믿음으로 모세를 숨겼습니다. 왕의 명령을 거부하고 중요한 것입니다. 그러나 아이가 3개월이 되니까 남자아이가 백일이 되면 목소리가 큽니다. 숨길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할 수 없이 이 아이를 갈대상자에 넣어서 나일강에 흘려 보내는 것입니다. 

3절입니다. 더 숨길 수 없게 되매 그를 위하여 갈대 상자를 가져다가 역청과 나무 진을 칠하고 아기를 거기 담아 나일강 가 갈대 사이에 두고, 갈대라는 말은 원어로 고메라는 말인데 파피루스를 의미합니다. 파피루스는 종이나 배를 만드는 재료로 사용되는 것입니다. 갈대로 만든 상자다. 갈대상자. 

옛날성경은 갈상자라고 했는데 새번역은 갈대상자로 나옵니다. 갈대로 상자를 만드는데 얼기설기 만들면 물이 새서 아이가 죽습니다. 그래서 갈대상자에 역청과 나무진을 바릅니다. 역청은 석유를 뽑아내는 재료라 할까요. 방수용으로 쓰는 것, 마치 요즘 아스팔트하는 그런 것, 역청입니다. 그것을 바르고 나무진을 바르면 방수효과가 있어서 물이 들어오지 않는 것입니다. 거기에 아이를 누입니다. 

어떤분은 말하기를 역청과 나무진은 예수그리스도의 필와같다. 그래서 나무진을 바르니까 물이 들어오지 않는 것처럼 마치 출애굽기 12장에 보면 유월절에 현관문과 문설주에 어린양의 피를 바르니까 죽음의 사자가 뛰어넘지 못하는 것처럼 우리를 보호하는 예수그리스도의 보혈, 피를 의미하는 것이다. 그렇게 알레고리적으로 은유적으로 해석하는 학자들도 있습니다. 의미가 있다고 봅니다. 

상자라는 말, 갈대상자라는 말은 원어로 테마라고 하는데 이 말은 노아의 방주를 가르킬 때 유일하게 쓰인말입니다. 노아의 방주를 가르켜서 테마라고 불렀습니다. 그런데 노아의 방주는 무엇을 의미하는 것입니까? 오늘날의 교회를 가르키는 것입니다. 홍수가 나서 수많은 사람이 요즘으로 말하면 일본에 지진과 해일같은 그런것이 몰려오니까 다 죽을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전 지구에 사는 사람이. 그런데 노아의 가족만은 방주에 탐으로서 그 일가족과 그들이 선택한 짐승들은 건짐받은 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이 죄악의 홍수가 지금도 지나가고 있는데 교회라고 하는 방주속에 들어가는 사람만이 구원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거기는 물이 들어오지 못합니다. 역시 거기도 역청과 나무진으로 노아가 발랐을 것입니다. 오늘 교회는 예수의 보혈로 다 칠해놨기 때문에 세상의 죽음의 권세가 들어올수 없는 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이 갈대상자와 노아의 방주는 교회를 상징하는 것입니다. 틀립없습니다. 교회가 그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교회에 들어오면 그곳이 보호처가 되고 피난처가 되고 은혜의 처소가 되는 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갈대상자는 오늘날 교회를 상징합니다. 

그래서 우리교회가 오늘 청년주일, 장학주일을 맞이합니다만 우리교회가 모세와 같은 인물을 키우려면 어떤 인물을 키워야할까. 먼저 우리교회는 갈대상자를 준비해야 합니다. 갈대상자를 준비해서 나일강에 띄었기 때문에 마침 그때 하나님도 대단한 분이십니다. 어떻게 바로 그 시간에 바로의 딸이 목욕하러 왔습니다. 시녀들을 거느리고, 그 갈대상자를 보고 그 아이가 너무 예뻐서 그 아이를 자기 양자로 삼은 것입니다. 이 갈대상자를 준비하는 것 매우 중요합니다. 갈대상자가 없었더라면 모세는 나일강에 던져지는 즉시 죽었을 것입니다. 마찬가지입니다. 교회는 갈대상자를 준비해야합니다. 

그러면 어떤 갈대상자를 준비해야 하는냐. 생명의 갈대상자, 살림의 갈대상자를 준비해야합니다. 모세는 죽음의 문화가운데 탄생되었습니다. 

출애굽기 1장 22절입니다. 그러므로 바로가 그의 모든 백성에게 명령하여 이르되 아들이 태어나거든 너희는 그를 나일 강에 던지고 딸이거든 살려두라 하였더라. 

아들이 태어나면 다 죽이라는 것입니다. 죽음의 문화입니다. 딸은 살려두고 반대입니다. 우리는 한때 낙태를 심하게 할 때 어땠습니까. 남아선호사상이 있어서 얼마나 많은 딸들이 희생당했습니까. 딸이면 낙태시키고 아들이면 낳고, 우리민족이 회개할것이 너무나 많습니다. 수많은 생명들을 난도질해서 죽인것입니다. 참 우리가 회개 많이 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어느때인가 이 죄값을 물으실지도 모릅니다. 민족적으로 이런 낙태를 너무나 많이 행했습니다. 일년에 20만에서 30만의 어린 생명들이 이유없이 죽어가고 있습니다. 너무나 두려운 일입니다. 우리 모두가 자신을 돌아보며 회개해야 합니다. 남자아이는 다 죽어가는 죽음의 문화속에서 모세는 건짐을 받은 것입니다. 

오늘날 교회 밖을 나가보면 이 세상의 문화가 다 죽음의 문화이고 자살의 문화입니다. 탤런트도 툭하면 자살하고 유서쓰고 죽고, 10대아이들 툭하면 사람죽입니다. 겁탈하고 몰매를 때립니다. 너무 심각합니다. 죽음의 문화고 퇴폐의 문화입니다. 거기다 어른들은 음란의 문화에 빠져있습니다. 음란의 문화에 빠지면 가정이 죽는 것입니다. 술문화, 마약의 문화 모든 것에 중독되어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게 다 죽음의 문화입니다. 

그 시대에 바로라는 것은 원수마귀 사탄을 대표하는 것입니다. 사탄은 오늘도 어린생명들을 죽이려고 하는 것입니다. 죄로 죽여서 알콜 중독자가 되게 만들고 마약중독자 되게 만들고 범죄인이 되게 만들고 감옥에 가게 만들고 미래가 없게 만들고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교회는 그 죽어가는 생명들을 살리는 곳임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세상은 죽임의 문화가 가득차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태어났을 때도 헤롯이 그 수천의 아이들을 다 죽였습니다. 혹시 그 아이중에 메시야가 있을 까봐. 자기자리 빼앗길까봐 다 죽였습니다. 헤롯의 배후에는 바로 악한 마귀가 있는 것입니다. 죽음의 문화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사람을 살리고 영혼을 살리려 이 땅에 오신 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죽은 나사로를 살리시고 과부의 아들을 살리시고 영혼을 살리기 위해서 예수님이 오신 것입니다. 

바로 교회는 살림의 문화가 지배해야 합니다. 살리는 곳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전도하는 것도 너무나 중요한 것입니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죽어가는 영혼들 전도해서 예수그리스도의 생명을 심어주고 복음을 증거할 때 그들에게 새로운 인생 새로운 축복을 선물할 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교회는 살리는 곳, 살리는 갈대상자입니다. 우리는 젊은이들을 살려내야 합니다. 

요즘 아이들이 입시로 인해 죽어갑니다. 공부잘하던 아이가 늘 1등하던 아이가 한번 2등했는데 그 2등한것 때문에 자살하는 아이도 있습니다. 1등이면 어떻게 60등이면 어떻습니까 튼튼하게만 자라면 되지. 여러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1등이면 어떻고 2등이면 어떻고 10등이면 어떻고 60등이면 어떻습니까. 그것이 죽을 일입니까. 우리 부모들도 그런 것에 너무나 많이 빠져있습니다. 공부 못하는 자녀를 향해서 성적표를 받아보고 이것도 성적이라고 받아왔냐 나가 뒤져라 그러고. 제가 어렸을 때 들었던 소리들입니다. 죽지않고 살아있는 게 대단한 겁니다. 그때는 툭하면 욕이 나가 뒤져라 입니다. 그래도 우리는 죽지않고 다 살아났습니다. 

그런데 요즘아이들은 나가 뒤져라 하면 정말 나가 죽습니다. 청개구리처럼 그런건 시키는대로 합니다. 무서운 죽음의 문화가 있습니다. 자기생명을 존귀하게 여기지않고 툭하면 연탄불 켜놓고 죽고, 탤런트들이 그런것을 자꾸보여주니까 젊은 애들이 죽음 클럽을 만들어 모여서 죽고, 집단적으로, 이게 뭡니까. 좋은게 아닙니다. 마귀가 지배하는 세상속에 볼수 있는 현상입니다. 교회는 젊은이들을 살리고 생명을 살리는 곳임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젊은이들이 교회에 들어오면 생기를 얻고 그들이 생명을 회복하고 살아나야 합니다. 세상은 그렇습니다. 잘 못생기면 너도 인생 피긴 틀렸다. 여자는 잘생겨야지. 남자도 공부못해도 잘생겨야 돼. 어디가 써먹어도 써먹어. 자꾸 외모를 강조합니다. 또 성적을 강조하고 돈있는 사람은 우대받고 좋은 차 탄사람우대받고 세상에 기죽어 살수가 없습니다. 세상의 문화는 사람을 기죽이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젊은이들이, 청소년들이 교회올 때 살아날 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교회는 격려하는 곳입니다. 하나님은 너를 향한 계획이 있어. 너는 모세와 같은 인물이 될거야, 너는 훌륭한 인물이 될거야. 너는 하나님의 손에 붙들리면 너는 위대한 사람이 될 수 있어. 아이들을 격려하는 곳이 되어야 합니다. 성적이 나쁘다고 집이 가난하다고 너 인생 파이다야 이런 것은 세상의 문화입니다. 교회는 그런게 아닙니다. 예수그리스도안에 차별이 어디있습니까. 누구든지 우리는 그리스도안에 소망이 있는 것입니다. 

또한 교회는 사랑의 갈대상자가 되어야 할 줄 믿습니다. 교회에 들어오면 누구나 사랑을 경험해야 합니다. 교회는 사랑이 있는 곳입니다. 그래서 교회는 가정같은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또 하나의 영적 가정이 교회입니다. 가정에서 자녀들은 사랑을 느끼는 것처럼 교회에 오면 그런 사랑을 경험해야 합니다. 가정에서는 조금 못해도 서로 격려하고 세워줍니다. 교회가 그런곳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어른들도 아이들보면 너무 외면하고 다그치지 마십시오. 남의 집아이 나는 모른다 손주도 아닌데. 이렇게 생각하지 마십시오. 다 귀한 내 영적 손주들입니다. 우리교회 다 한가족이면 다 한 가정의 자녀들입니다. 어른들도 할 말이 있습니다. 

요즘 애들이 인사를 합니까. 우리가 어릴때는 동네어른들을 아는분이든 모르는 분이든 만나는 분이면 안녕하세요하고 인사를 했습니다. 그런데 요즘은 아이들이 그걸 쑥스럽게 여깁니다. 그렇게 배워도 잘 하기가 어렵습니다. 우리가 먼저 사랑을 나눠주는 것밖에 없습니다. 젊은 애들도 마찬가지고 청소년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린 어쨌든 그들을 사랑으로 감동시킬 때 그들의 영혼이 살아나고 그들이 희망의 일꾼으로 살아갈 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오늘 교회는 이 사랑이 필요합니다. 아이들이 사랑을 경험해야 합니다. 그래야 그 아이들이 커도 교회 공동체를 떠나지 않습니다. 고등학교 졸업하면 절반은 떠나갑니다. 대학교 졸업하면 또 절반은 떠나갑니다. 그래서 초등학교 때는 30명정도 교회다녀도 대학 졸업하면 남는 아이가 별로 없습니다. 한 3-4명 남을까 다 도망가 버렸습니다. 왜? 세상의 유혹이 교회의 사랑보다 강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그들을 사랑을 경험하게 만들고 사랑으로 품어줄 때 교회에 나와서 교회가 세상을 변화시키는 주역이 될 줄 믿습니다. 

꽤 오래전에 블라인드 싸이드라는 영화를 본 기억이 있습니다. 마이클오어라는 아이가 있었는데 이 아이의 아버지는 누군지 모릅니다. 엄마가 있는데 엄마는 마약 중독자입니다. 엄마가 항상 마약중독에 있으니 아이가 보살핌을 받을 수가 없습니다. 미국에선 이런 부모가 있으면 그 부모를 떼어 놓습니다. 그리고 그 아이를 다른 가정에 맡깁니다. 위탁부모, 위탁모에게 맡깁니다. 그래서 위탁된 가정에서 자라는데 거기도 쉽지가 않습니다. 자기 아들이 아니니까 그렇게 잘 키우지 않습니다. 이 애가 이집 저집 전전하다가 결국 여기저기 적응못하고 공중세탁소에서 자고 체육관에서 자고 이런 아이로 전락해 버렸습니다. 

그런데 키는 크고 몸집이 남달리 좋습니다. 운동에 재능도 있습니다. 그런데 그를 키워주는 사람이 없습니다. 운동선수가 되려면 학교규정에 성적이 좋아야 합니다. 이 아이는 공부를 안하니 성적이 밑바닥입니다. 마이클 오어가 그런 아이입니다. 

어느 추수감사절 쌀쌀한 날씨에 이 아이가 반팔 셔츠를 하고 체육관에 가서 자려고 걸어가고 있는데 그 때 지나가던 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학부모 리엘이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보고 자기 아이들도 고등학생인데 그 아이를 보고 보니까 분명 학교 학생같은데 반팔로 이 추위에 어디를 가는 겁니다. 차를 세우고 그 아이를 태웠습니다. 자기집에 데리고 가서 밥을 먹이고 옷도 긴팔로 주고 갈데없으면 여기에 같이 자거라 했습니다. 자기 아들들하고 잘 아는 아이였습니다. 그 아이가 그 가정에서 너무나 따뜻한 사랑을 받으며 좋아합니다. 그걸 보고 이 리엘 어머니가 그 아이를 자기집에 머물게 합니다. 그리고 법적인 보호자로 등록을 합니다. 그 아이를 돌봐주고 꿈을 심어줍니다. 좋은 체육선수가 될 수 있도록 밀어주는 것입니다. 

그 아이는 새로운 부모님의 격려에 힘입어서 열심히 공부하고 미식축구팀에서 열심히 운동을 합니다. 마이클 오어가 성적이 올라가서 선수가 되는데 하는 경기마다 승리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미식추구팀이 있는 대학의 장학생으로 스카웃되어서 가게 돼서 많은 사람에게 인기있는 선수가 된다는 그런 이야기입니다. 

우린 거기에서 버림받은 한 아이에 대한 그 사랑의 힘, 가족의 힘을 느낄 수 있습니다. 교회도 아무리 교회가 커도 우리는 한 가족이라는 것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우린 사랑으로 뭉친 사랑을나누는 교회가 될 때에 우리의 청소년들, 젊은이들이 교회에서 사랑을 공급받고 그들이 커서도 교회를 떠나지않고 이 교회의 주역이 될 줄 믿습니다. 

세 번째로 마지막 교회는 희망의 갈대상자가 되어야 합니다. 교회는 젊은이 들에게 꿈을 심어주는 곳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 젊은이들이 캄보디아 선교가는 것도 단지 그들이 준비하고 교회가 후원해서 가지만 그것은 그냥 여행시키는 것이 아닙니다. 넓은 세상을 보면서 그들이 남을 돕는 법을 배우고 세상에 눈을 뜨게 되는 것입니다. 그들이 더 넓은 세상을 바라보면서 꿈을 키우고 비젼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그럴 때 하나님은 그들의 비젼을 사용하셔서 그들을 모세처럼 쓸수 있는 것입니다. 아이들에게 꿈과 비젼을 주는 교회가 되어야 할줄 믿습니다. 꿈이 있을 때 그 사람이 세상을 변화시키는 것입니다. 모세라는 한 사람이 변화되니까 그가 한 민족을 이끌어내서 새로운 낙원으로 그 민족을 인도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윌리엄윌버퍼스라는 한영국의 유명한 국회의원이 있습니다. 물론 그는 처음에 젊은이였습니다. 예수믿는 젊은이였습니다. 그런데 영국이라는 고상한 나라에 노예 매매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아프리카 노예들을 사다가 짐승처럼 팔고 사는 것입니다. 짐승처럼 취급하고 매를 때리고 하는 것을 보고 이건 있을 수 없다. 1800년대인데. 그래서 윌버퍼스가 내가 이 제도를 고쳐야겠다 그런 꿈을 갖습니다. 

기독교인이면서. 내가 세상을 바꾸려면 어떻게 하면 되느냐. 내가 법안을 바꿀수 있는 국회의원이 되어야 겠다. 그래서 그는 국회의원이 됩니다. 젊은 나이에, 그리고 그 운동을 벌입니다. 노예제도를 폐지하는 법안을 발의해서 그것을 하는데 번번이 거절됩니다. 그래서 그는 동료 국회의원들을 설득하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오랜 세월이 흐르지만 오랜 세월동안 그 일에 매진하고 결국 윌버퍼스가 죽기 직전에 영국 국회에서 그 노예제도가 폐지가 됩니다. 그는 그 일을 이루고 나서야 눈을 감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한사람의 생애가 얼마나 많은 일을 할 수 있습니까. 수많은 노예들을 생명으로 인도할 수 있는 것입니다. 한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은 대단한 것입니다. 우리 젊은이들 한사람 한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은 대단한 것입니다. 그 한 사람이 매우 소중한 것입니다. 

전에 새벽기도때 드린기억이 납니다. 어느 동네에 우편배달부가 가끔 편지를 전달하러 갑니다. 그런데 그 동네는 잘되는 농사가 없습니다. 땅은 황폐하고 돌무더기고 사람도 별로 안살고 그런 곳입니다. 우체부아저씨는 갈때마다 그냥가지않고 주머니에 꽃씨를 가져갔습니다. 그래서 갈때마다 꽃씨를 뿌렸습니다. 가는 길에 꽃씨를 뿌리고 오는 길에 꽃씨를 뿌리고, 20년이 지났습니다. 우체부아저씨가 열심히 뿌린 꽃씨가 온 동네에 만발해서 꽃동산이 되어 버렸습니다. 거기는 이제 사람이 살지않는 곳이 아니라 수많은 관광객이 찾아오고 사람들이 모여사는 파라다이스가 된 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한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은 대단한 것입니다. 나같은게 뭘 할 수 있겠어. 아닙니다. 한 사람이 주님의 손에 붙들리면 하나님의 생각 하나님의 가치관을 가지게 되면 위대한 일에 쓰임받을 수 있음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우리는 젊은이들에게 꿈을 심어주고 비젼을 심어줘야 합니다. 그럴때 그들의 미래가 달라지고 그들이 한국민족을 위해 큰 일을 감당하는 교회의 일꾼이 되고 이 사회의 지도자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그 젊은이들을 위해 무엇을 해야 합니까. 기도해야 합니다. 그들이 믿음으로 세상을 살아가고 그들이 믿음으로 결단할 수 있는 젊은이가 되도록 세상의 도도히 흐르는 죄악의 물결에 그들이 오염되지 않도록 그들을 위해서 기도해야 합니다. 

프란시스쉐이퍼라는 유명한 영성학자가 있는데 그는 25년전 책을 쓰며 이런 말을 했습니다. 21세기가 되면 사람들은 목적없이 돈을 벌것이다. 그리고 진리가 없는 교육을 하고 의미가 없는 사랑을 나누며 죄책감 없이 사람을 죽이는 시대가 올 것이다. 이 모든 것은 하나님을 믿지 않기 때문이다. 하나님을 믿지 않는 문화속에서는 의미없는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의미없는 사랑을 나누고 양심의 가책없이 사람을 죽이고 진리없는 교육을 하는 것입니다. 교육이라는 것은 대학입학을 위한 공부기계로 전락하는 것입니다. 여기에 진리가 없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믿음이 없기 때문입니다. 

우린 오늘날 하나님의 젊은이들에게 믿음을 주시도록 기도해야 할 줄 믿습니다. 그리고 젊은이들을 위해 기도하고 동시에 그들을 위해 후원했으면 좋겠습니다. 오늘 특별히 청년주일, 장학주일로 지내는데 여러분들이 장학헌금에도 함께 동참했으면 좋겠습니다. 

5년전에 베스트셀러로 나온책 중에 갈대상자라는 책이 있었습니다. 이 책은 기독교의 명문인 한동대학을 초창기에 만들어낸 김영길 총장의 부인이 쓴 책입니다. 김영애 권사라고 그분이 쓴 책인데 그 한동대학이 참 어려운 길을 걸어왔습니다. 초창기부터 오해도 많이 받고 그래서 총장이 감옥에 가기도하고 수난을 당하기도 하고 지금은 한국에서도 세계서도 유명한 대학으로 우뚝 섰습니다. 그래서 그 학교는 얼마나 믿음생활 철저히 하는 지 모릅니다. 전학생이 다 채플에 참여하고 1학년때부터 다 영어로 교육을 하고 그럴 정도로 기독교의 명문중의 명문으로 발돋움을 했습니다. 

그런데 그 대학을 만들기까지 어려움이 많았습니다. 김영애 권사님이 남편의 총장의 모습을 뒤에서 보면서 기록한 책입니다. 보면 이런 내용이 나옵니다. 학교가 재정적으로 너무나 어려울 때 갈대상자운동을 일으켰습니다. 그게 뭐냐면 교회에 다니며 간증을 할 때마다 여러분들 갈대상자를 만드는데 협조해 주십시오. 갈대상자의 한올을 이어서 갈대상자가 완성이 되듯이 갈대에 모세를 담아서 인물을 만들듯이 한동대학을 위해 천원씩 후원회비를 내주시면 그것이 갈대상자의 한올 한올을 잇는 그런 정성스런 도움이 될 수 있습니다. 그렇게 해서 다니는 곳마다 간증을 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수많은 교회에서 참여를 해서 천육백교회, 약 5만명의 회원을 갖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한동대학교가 그들의 후원을 통해서 그 위기를 넘기고 오늘의 명문으로 우뚝설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보면서 참 의미있는 후원이였구나 어찌보면 우리가 출애굽기 2장의 말씀을 나누었지만 오늘 우리가 청년들 젊은이들을 키우는 것은 마치 그들을 이 세상의 죄악의 도도한 물결속에서 갈대상자에 태우는 것과 똑같습니다. 한올 한올을 잇는 우리의 기도와 정성을 잇는 장학헌금이 그들의 인생에 꿈을 주리라 믿습니다. 

젊은이들중에는 가난하기 때문에 물질 때문에 대학을 다니지 못하는 이들도 있을 겁니다. 또 열심히 공부하는 이들에게 더 격려할 수 있다면 그들에게 큰 도우이 될 수 있다록 믿습니다. 우리 교회분들이 모든 헌금이 중요하지만 장학헌금에 마음을 가지고 동참했으면 좋겠습니다. 

1637년 영국에서 미국으로 건너온 존 하버드라는 목사님이 계셨습니다. 이분은 숨을 거두시기전에 자신의 전재산인 1524불을 지금에서 보면 아무것도 아니지만 그 당시에는 대단한 것입니다. 1524불과 도서 320권을 1636년 1년전에 설립된 대학에 기부했습니다. 그 대학은 재정난을 겪고 있었는데 이를 기반으로 그 대학이 불같이 일어납니다. 그 대학이 아주 유수한 대학이 됩니다. 그 대학이 이름이 무엇이냐. 그 목사님의 이름을 따서 하버드대학이라고 했습니다. 하버드대학을 통해 수많은 석학들이 배출되고 노벨수상자들이 배출되고 있습니다. 우리 작은 정성어린 헌금, 장학헌금이 젊은이들에게 꿈을 주고 그들의 미래를 밝게 할 수 있다고 믿습니다. 

우리 교회가 인물을 키우는 교회, 모세를 키우는 교회가 되면 좋겠습니다. 여러분들도 이 아름다운일에 동참해서 많은 인물들을 배출하고 그들을 통해서 한국민족이 변화되어지고 역사를 새롭게 하는 축복이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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