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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나다나엘에게 오신 예수님 (요 1:43-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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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다나엘에게 오신 예수님 (요 1:43-51)


지난 주일 우리는 <베드로에게 오신 예수님>이란 말씀을 생각했습니다. 베드로에게 오신 예수님은 나다나엘에게도 오셨습니다. 

그 때 나다나엘은 굶주리고 목말라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굶주렸으나 음식이 없어 주린 것은 아니었습니다. 사람이란 존재는 짐승과 달라서 먹을 것에만 굶주리는 게 아닙니다. 사람은 사랑에 굶주리기도 하고, 진리에 굶주리기도 합니다. 배가 불러도 불행한 사람들이 많은 이유가 바로 여기 있습니다. 

아모스서 8장 11절 이하에서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보라 날이 이를지라 내가 기근을 땅에 보내리니 양식이 없어 주림이 아니며 물이 없어 갈함이 아니요 여호와의 말씀을 듣지 못한 기갈이라 사람이 이 바다에서 저 바다까지, 북쪽에서 동쪽까지 비틀거리며 여호와의 말씀을 구하려고 돌아다녀도 얻지 못하리니 그 날에 아름다운 처녀와 젊은 남자가 다 갈하여 쓰러지리라>고 하신 말씀처럼,  나다나엘은 말씀, 진리에 굶주리고 있었습니다. 그는 영혼의 굶주림, 영혼의 갈증으로 괴로워하고 있었습니다. 

나다나엘은 이 굶주림과 갈증을 극복하기 위해 나름대로 애를 쓰고 있었습니다. 그는 무화과나무 아래 앉기를 좋아했습니다. 무화과나무는 잎이 무성하고 그늘이 짙어서 옛날부터 사람들은 무화과나무 아래서 율법을 가르치고 배우거나, 기도와 묵상을 하곤 했습니다. <무화과나무 아래 앉는 것>은 경건한 사람들의 상징이었습니다. 나다나엘도 나무 아래 앉아 율법을 묵상하고, 하나님으로부터 들려오는 음성을 기다렸습니다. 

그가 이렇게 하게 된 이유는 현실이 너무도 숨이 막히게 했기 때문입니다. 로마제국은 막강한 권력을 바탕으로 관능적이고도 퇴폐적인 쾌락만을 추구했습니다. 로마는 발전한 나라였으나, 혼란도 컸습니다. 폭력적이고 무자비했습니다.  

또 유대도 점점 희망을 잃어가고 있었습니다. 유대인들은 다른 민족들로부터 광신자 취급을 받을 정도로 여호와 하나님께 몰두했고, 대단히 종교적이었습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유대인들은 종교적이기는 했지만, 경건하지는 않았습니다. 종교의식은 많았지만, 감동은 없었습니다. 겉은 화려했지만, 속은 초라했습니다. 

나다나엘은 자신의 이름을 생각했습니다. 그 이름은 <하나님이 주셨다>는 뜻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의 아버지가 그를 낳은 후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생명이라고 생각하려 <하나님이 주셨다>고 지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보내신 생명인데, 그 생명을 둘러싼 현실은 왜 이처럼 원망스러운 것인지 알 수 없었습니다. 

이 와중에서 나다나엘은 오직 하나님의 세계로부터 들려오는 음성을 찾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세계로부터 오는 구원의 소식, 메시아의 소식을 기다렸습니다. 이미 하나님께서 구약성경에서 약속하신 메시아가 오시면 눈앞의 비극적이고 실망스러운 모든 것은 해결될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그는 메시아에 대한 갈증, 굶주림을 느끼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그의 절친한 친구인 벳새다 사람 빌립이 놀라운 말을 했습니다. 그가 <모세가 율법에 기록하였고, 여러 선지자가 기록한 그 분을 만났다>는 것이었습니다. 본문 요한복음 1장 45절을 보세요. <빌립이 나다나엘을 찾아 이르되 모세가 율법에 기록하였고 여러 선지자가 기록한 그이를 우리가 만났으니>라고 했습니다. 이 말이 사실이라면 이건 정말 대단한 일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모세의 글과 선지자들의 글, 즉 구약성경에 기록된 분은 다름 아닌 <메시아>였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모세는 신명기 18장 15절에서 다음과 같이 기록했습니다.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 가운데 네 형제 중에서 너를 위하여 나와 같은 선지자 하나를 일으키시리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을지니라> <나와 같은 선지자>란 표현이 메시아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또 이사야 선지자는 메시아의 사명에 대해 61장 1절 이하에서 다음과 같이 적고 있습니다. <주 여호와의 영이 내게 내리셨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내게 기름을 부으사 가난한 자에게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게 하려 하심이라 나를 보내사 마음이 상한 자를 고치며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갇힌 자에게 놓임을 선포하며 여호와의 은혜의 해와 우리 하나님의 보복의 날을 선포하여 모든 슬픈 자를 위로하되 무릇 시온에서 슬퍼하는 자에게 화관을 주어 그 재를 대신하며 기쁨의 기름으로 그 슬픔을 대신하며 찬송의 옷으로 그 근심을 대신하시고 그들이 의의 나무 곧 여호와께서 심으신 그 영광을 나타낼 자라 일컬음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 <빌립이 메시아를 만나다니! 모세와 선지자들이 기록한 그 분을 만나다니...> 

이건 정말 놀라운 일이었습니다. 빌립이 하는 말이라면 뭔가 있기는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결코 빌립은 가벼운 사람이 아니가 때문입니다. 

그러나 나다나엘의 흥분은 잠시 뿐이었습니다. 본래 그는 무척 신중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쉽게 움직이는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그가 빌립의 말을 듣고 흥분했으나, 금새 그 흥분이 가라앉은 이유가 있었습니다. 

우선 빌립이 말하는 그 분의 출신이 문제였습니다. 메시아는 구약 성경 전체의 주제였습니다. 평소에 메시아를 갈망하던 그는 메시아에 대한 말씀들에 정통했습니다. 메시아의 출신에 대해서 미가서 5장 2절은 베들레헴 출신이라고 분명히 말씀하고 있었습니다. 

<베들레헴 에브라다야 너는 유다 족속 중에 작을지라도 이스라엘을 다스릴 자가 네게서 내게로 나올 것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빌립이 그 분이 나사렛 출신이라고 말했을 때, 나다나엘의 흥분은 찬물을 끼얹은 듯이 식었습니다. <빌립이 나다나엘을 찾아 이르되 모세가 율법에 기록하였고 여러 선지자가 기록한 그이를 우리가 만났으니 요셉의 아들 나사렛 예수니라>  아니, 메시아가 나사렛 출신이라니, 이건 말도 되지 않았습니다. 그는 빌립에게 비웃듯 자조적으로 말했습니다.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나겠느냐?> 

우리도 나다나엘이 이렇게 말한 것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나사렛에서는 그 때까지 위대한 인물이 배출된 적이 없었습니다. 그 곳은 한 면이 낭떠러지처럼 가파른 산비탈에 세워진 볼품 없는 농촌일 뿐이었습니다. 가버나움처럼 갈릴리 바다를 끼고 있는 것도 아니고, 풍광이 좋은 곳도 아니었습니다. 그런 곳에서 메시아가 나온다는 것은 말도 되지 않는 일이었습니다. 

또 나다나엘이 쉽게 움직이지 않은 이유는 메시아는 다윗처럼 나타나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다윗은 블레셋의 영웅 골리앗을 쓰러뜨리고 억압당하던 이스라엘을 구했습니다. 그리고 다윗 역시 베들레헴 출신이었습니다. 그는 위대한 왕중의 왕이었습니다. 로마에 의해 지배당하면서 고통받는 이 때, 메시아가 온다면 다윗 같은 영웅이어야 했습니다. 그런데 나사렛 출신이라니, 또 다윗 같은 전사도 아니고 목수출신이라니,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빌립이 잘못 짚은 게 틀림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나다나엘이 움직이지 않으려 한 이유는 그의 성격 때문이었다고 생각됩니다. 그는 조그마한 소식에 민감하게 반응하면서 철부지 아이들처럼 밀려다니는 것은 죄인들이나 하는 짓이라고 여겼습니다. 죄인들은 자신들이 저지른 일 때문에 늘 마음에 부담을 가지는 사람들이고, 자신들의 부끄러움을 조금이라도 면하기 위해 특별한 분만 나타나면 따라다니면서 자기 행위에 대한 면죄부를 받으려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기 볼 때 그것은 천박한 열심이었습니다. 

나다나엘은 그들을 경멸했습니다. <죄악이 부끄럽다면 악한 행위를 청산해야지, 그리고 거룩하고 경건하게 살아야지, 나처럼 무화과나무 아래 앉아서 말씀을 묵상해야지, 저렇게 혹해서 따라다닌다고 구원을 얻을 수 있나?>라고 생각했습니다. 

나다나엘은 과거에도 가짜 메시아가 많았음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 동안에도 사람들에게 돋보이는 인물들이 있었고, 그 때마다 사람들은 그가 메시아인가 해서 따라다녔었습니다. 그 선생들은 제법 특별해 보였지만, 조금만 지나면 그들의 부끄러운 밑바닥이 드러났고, 그 때마다 사람들은 흩어지곤 했습니다. 그 메시아들은 모두 가짜였습니다. 그들은 세속적 욕심에는 관심이 없는 척했지만, 사람들을 이용해 부귀영화를 추구하는 교활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오히려 드러내놓고 부귀영화를 추구하는 사람들보다 더 가증했습니다. 사람들은 처음에는 그런 사람들을 쫓아다녔지만, 금방 실망하곤 했습니다. 그러니 빌립이 만났다는 그도 틀림없이 가짜일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는 단정적으로 말했습니다.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나겠느냐> 

여러분, 오늘날도 나다나엘처럼 껄끄러운 사람들이 많습니다. 예수님께 나오기 쉬운 사람들은 죄인들입니다. 죄가 많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두 가지 반응 중 하나를 보입니다. 첫째로 어떤 사람은 <전 죄가 많아서 예수님을 믿을 자격이 없습니다.>라고 합니다. 그러나 이들은 예수님이 바로 자신 같은 죄인을 위해 오셨다는 것을 알고 나면 오히려 주님께로 더 가까이 나올 수 있습니다. 둘째는 자신이 죄가 많다고 여기기 때문에 오히려 간절히 메시아를 사모하여 나오는 것입니다. 결국 이렇든 저렇든, 죄인들은 주님께로 나올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자신을 경건하다고 여기는 사람들입니다. 대단히 도덕적이고, 남에게 친절하고, 매우 규모 있는 삶을 살고, 어려운 사람들을 돕고, 하나님을 깊이 묵상한다고 자부하는 사람들이야말로 주님께 오기가 어려운 사람들입니다. 

이들은 자신이 훌륭하다고 여기기 때문에, 웬만한 말에는 귀를 기울이지 않습니다. 이들은 이미 자기 선과 자기 의에 만족한 사람들입니다. 이들도 때로 굶주림을 느낄 때가 있지만, 이들은 자신들의 음식이 되려면 적어도 어느 정도는 돼야 한다는 식의 기준을 미리 정해놓고 그 기준에 미달하면 결코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마치 <아무리 배가 고파도, 설령 굶어죽을지라도 난 라면은 안 먹어>라고 말하는 사람과 같았습니다. 이런 사람들에게 라면을 먹으라고 말하면 자존심이 상했다고 여길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이 가까이 하기 힘든 사람들입니다. 이들은 아무에게나 마음을 열지 않습니다. 친구도 골라가면서 사귑니다. <나와 사귀려면 적어도 이 정도는 돼야 한다>는 식으로 생각합니다. 
이런 사람들이 누군가의 앞에 무릎을 꿇는다는 것은 정말 기대하기 힘든 일입니다. 그들을 굴복시킬 메시아는 과연 어떤 존재이어야 할까요? 다윗이 다시 살아온다면 모를까, 이런 사람들은 주님을 받아들이기가 너무도 힘들었습니다. 오늘날도 무화과나무 아래 앉아 고상하게 산다고 자부하는 나다나엘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그러나 빌립은 결코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나겠느냐>고 말하는 나다나엘에게 강력하게 말했습니다. <와 보라>고 말했습니다. <믿지 못하겠거든, 나사렛 사람이라 의심이 된다면, 손해 볼 것 없으니, 한 번 와서 보라>고 말했습니다. 

<자네처럼 열심히 하나님의 구원을 기다리는 사람이라면 기회만 되면 메시아를 찾아 나서는 게 마땅하지 않는가, 자네는 메시아는 이러저러해야 한다고 기준을 미리 정해놓고 있는데, 자네의 기준 때문에 진짜 메시아를 놓치면 어떻게 하는가, 메시아가 자네가 만든 기준대로라면, 자네의 판단과 생각 안에 있다면, 우리 손바닥 안에 있는 존재라면 어떻게 우리를 구원하는 메시아일 수 있겠는가? 적어도 구원자는 우리 상식과 판단을 초월하는 분이 아니겠는가? 그러니 한 번 와서 보기나 하게!>라고 권면했습니다. 

여러분, 예수님은 많은 경우에 다른 사람들을 통해서 우리에게 다가오십니다. 지금 예수님은 빌립을 통해서 나다나엘을 부르고 계셨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 사실을 알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성도 여러분, 하나님의 손길이 사람을 통해서 올 때가 많음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오늘, 어떤 사람을 통해서 은혜를 주실까>, 날마다 이런 기대로 살아가야 합니다.그런 사람들에게 하나님은 사람을 통해 받는 은혜가 크게 하실 줄 믿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우리 생각으로 제한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 분의 은혜의 색깔을 미리 정해 놓지 마십시오. 예수님은 어떤 색깔, 어떤 맛의 은혜와 축복으로 다가 오실지 아무도 모릅니다. 예수님은 오늘날도 우리를 감동시키시고, 깜짝 놀라게 하시고, 생각지 못한 곳에 계시다가 우리 앞에 나타나시는 분입니다. 우리 생각으로 끼워 맞춘 예수님이라면 우리의 구원자가 아니라, 장난감에 불과할 것입니다. 

나다나엘은 빌립의 말이 옳다고 여겼습니다. <그래 일단 가보는 거야. 밑져야 본전이지. 그리고 정말 메시아가 내 기대와 판단을 무너뜨리고 임하실지 누가 알겠는가?>하고 생각했습니다. 그는 무화과나무 아래서 때가 오기를 기다리는 대신에 직접 찾아 나서기로 마음먹었습니다. 

저는 우리도 하나님의 부르심에 민감하길 원합니다. 어떤 누군가를 통해서 우리를 부르시는 하나님을 기억하고, 그 부르심에 응답하시길 기원합니다. 가만히 있지 말고 찾아 나서야 합니다. 천국은 침노하는 사람들의 것입니다.  저는 우리가 가서 보기 위해  자리를 털고 일어서기 원합니다. 또 갔을 때 예수님을 만나게 되길 기원합니다. 비록 자신이 경건하게 살려고 애썼다고 하더라도, 도덕적이었다고 하더라도 예수님께 나와야 합니다. 자기 교만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예수님께 나가 그 분을 가까이서 뵈면, 그 은혜와 사랑을 직접 체험하면 멀리서 바라볼 때 가졌던 선입견은 완전히 무너질 것입니다. 

드디어 그가 예수님을 처음 뵙는 순간이 왔습니다. 예수님은  처음부터 그의 생각을 무너뜨리셨습니다. 우선 그 분의 말씀부터가 파격이었습니다. 사람들은 처음 만나면 <반갑습니다>라든지 <처음 뵙겠습니다>라고 인사부터 합니다. 혹은 <풍채가 좋다든지, 보기 좋다든지, 이렇게 멋진 분인지 몰랐다>는 말을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만나자마자 그의 외모에 대해 아무 말씀도 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다짜고짜 그의 겉모습이 아닌, 그의 영혼 내부를 들여다보시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는 참 이스라엘 사람이로다. 그 속에 간사한 것이 없도다>라고 하셨습니다. <참 이스라엘 사람이라니. 당연히 내가 이스라엘 사람이지....>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겉모습이 아니라, 내면을 보고  하시는 말씀이었습니다. 겉모습은 이스라엘 사람이지만, 가짜도 많다는 말씀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속을 보고 계셨습니다. <그 속에 간사한 것이 없도다.> 그 분의 관심은 <됨됨이, 그 존재, 그 인격>에 있었습니다. 

그 분의 말씀은 평소에 나다나엘이 괴로워하던 바로 그 문제의 정곡을 찌르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늘 종교는 있지만, 하나님과 통하는 내적인 감동은 없는 것, 경건하고 거룩해 보이지만 전혀 기쁘지 않은 것에 대해 괴로워했습니다. 그러나 지금껏 사람의 내면에 관심을 기울인 지도자는 없었습니다. 나다나엘이 만난 제사장들도, 레위인들도, 랍비들도, 백성의 장로들도, 그 누구나 겉에 걸친 옷, 신분, 재산, 외모에만 관심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머리색, 눈동자색, 외모 등으로 <아브라함의 피를 받은 이스라엘 백성 여부>를 판단했습니다.  

그런데 이 분은 다짜고짜 됨됨이, 그 존재를 언급하셨습니다. 그 분은 내면적 유대인이 진정한 유대인이라는 것을 알고 계셨습니다. 로마서 2장 28-29절을 보면 진정한 하나님의 사람에 대해 이렇게 말씀합니다. <무릇 표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 아니요 표면적 육신의 할례가 할례가 아니니라  오직 이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며 할례는 마음에 할지니 영에 있고 율법 조문에 있지 아니한 것이라 그 칭찬이 사람에게서가 아니요 다만 하나님에게서니라> 몸에 할례 받은 것, 겉으로 볼 때 외모가 유대인인 것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 내면, 그 영혼이 문제였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바로 그것을 말씀하고 계셨습니다. 

<아, 이 분은 어쩌면 이렇게 내가 생각하던 바로 그 말씀을 하시는가!> 그는 놀라서 물었습니다. 48절을 보면 <나다나엘이 이르되 어떻게 나를 아시나이까>라고 물었습니다. 그 때 예수님의 대답이 무엇입니까?  <빌립이 너를 부르기 전에 네가 무화과나무 아래에 있을 때에 보았노라> 할렐루야! 

<난 너를 오래 전부터 알고 있다. 빌립이 연결시켜 주었기 때문에 아는 게 아니다. 빌립이 너를 부르기 전부터 네가 무화과나무 아래서 얼마나 영적으로 굶주리고 갈증을 느끼고 있는지, 그 나무 아래서 얼마나 간절히 하나님의 음성 듣기를 원하는지 잘 알고 있다. 난 네 영혼의 곤궁함을 알고, 너를 채우려고 왔다>는 말씀이었습니다. 

나다나엘은 감동을 받았습니다. <모두가 외모만 보고 판단하는 세상인데...이 분은 어떻게 내 내면을 아시는가? 속을 보는 눈을 가진 분이라면, 그 빈  속을 채울 능력도 가지셨을 것이다.  그 분은 나의 간절함, 목마름, 굶주림을 알고 계시다. 이런 분은 처음이다.>  

그는 예수님 앞에 무릎을 꿇었습니다. 49절을 다같이 읽읍시다. <나다나엘이 대답하되 랍비여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시요 당신은 이스라엘의 임금이로소이다> 아멘. 그는 성경에 기록된 가장 멋진 신앙고백 중 하나를 고백하였습니다. 예수님은 나다나엘, 그렇게 경건하고 자기 의에 자신만만하던 그에게 다가오셨습니다. 예수님은 그의 영혼을 들여다보셨고, 위로하셨고, 채우셨습니다. 

성도 여러분, 예수님은 우리의 마음속을 보십니다. 그리고 그 빈속을 채우러 오십니다. 그 분은 가짜 이스라엘 백성들 중에서 영혼이 아름다운 참 이스라엘 사람을 찾으십니다. 우리 마음을 알아주실 분은 그 분뿐입니다. 그 분은 겉모습을 보고 판단하는 분이 아닙니다. 그 분 앞에서는 외모가 볼품 없어도, 가진 돈이 없어도, 신분이 높지 못해도, 단 하나, 그 내면에 은혜를 사모하는 간절함만 있으면, 영혼의 갈증을 느끼는 사람이라면 언제나 찾아오시는 분입니다. 

예수님은 누가 봐도 당장 구원이 필요한 가난하고, 병들고, 소외된 사람, 날마다 죄악을 밥먹듯 짓는 사람들에게만 오시는 게 아닙니다. 그 분은 겉으로는 가장 고상하고 모든 것을 갖춘 것 같지만, 사실은 그 속이 썩어 문드러진 사람들, 그 내면이 무너진 사람들, 세상의 그 무엇으로도, 그 어떤 도덕적 삶으로도 채워지지 않는 사람들, 너무도 고결해 보여 사람들이 접근하기도 꺼려지고, 구원이 필요 없어 보일 정도로 완벽해 보이거나 이미 구원을 받은 것 같아 보이는 사람들, 그러나 영혼이 갈증과 배고픔으로 죽어 가는 사람들에게 다가오십니다. 경제와 사회 보장제도가 발전된 첨단 국가에 살면서 순간마다 자살을 생각하는 그런 사람들에게 다가오십니다. 예수님은 이런 사람들의 이중적인 내면 세계, 무너진 내면을 꿰뚫어보시고, 치료하시고, 채우시는 분입니다. 

예수님 앞에서 경건한 척 하지 맙시다. 허울의 옷을 벗읍시다. 의롭다고 자부하던 교만의 탈을 벗어 던집시다. 체면 따위는 버려야 합니다. 억지로 울음을 참지 마십시오. 소리 높여 우십시오. 모두 그럴 듯 하게 차려입고 행세하는 이 세상속에서 그 거짓 위장으로 우리를 속이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그 뻣뻣함 때문에 깊은 은혜를 받지 못했다면 모두 던져 버리고 예수님의 발 앞에 무릎을 꿇어야 합니다. 속을 보시는 주님의 빛이 우리 영혼 내부를 비추시길 기원합니다. 

어느 봄날 스페인 화가 엘 그레꼬의 친구가 그의 집을 방문했습니다. 그는 커텐으로 창문을 가리고 어두운 방에 홀로 앉아 있었습니다. 친구가 말했습니다. <커텐을 걷고 햇빛으로 나오게.> 그러자 엘 그레꼬가 말했습니다. <지금은 안 되네. 나의 내면에서 비취고 있는 빛을 방해받고 싶지 않네.> 

예수님께서 우리  내면을 비추시는 빛이 되시길 기원합니다. 예수님이 영혼 속에서 등불이 되신다면 이 어두운 세상을 거침없이 걸을 수 있을 것입니다. 경건한 나다나엘에게 오셔서 그의 경건이 아무런 쓸모가 없어 고민하던 그를 건져주신 예수님께서 오늘 자칭 의인들인 우리 모두에게 와 주시길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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