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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표적 중의 표적 (마 16: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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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적 중의 표적 (마 16:1-4) 
 
  
1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이 와서 예수를 시험하여 하늘로부터 오는 표적 보이기를 청하니 
2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가 저녁에 하늘이 붉으면 날이 좋겠다 하고 
3 아침에 하늘이 붉고 흐리면 오늘은 날이 궂겠다 하나니 너희가 날씨는 분별할 줄 알면서 시대의 표적은 분별할 수 없느냐 
4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표적을 구하나 요나의 표적 밖에는 보여 줄 표적이 없느니라 하시고 그들을 떠나 가시니라 
 
우리는 지난 한 주간 내내 일본에 들이닥친 지진과 쓰나미, 그리고 원전 폭파 위험 뉴스를 들으며 살았습니다. 지난 2월 22일에는 뉴질랜드의 크라이스트처치에서 규모 6.3의 대지진이 발생하여 많은 피해가 발생하기도 했습니다. 저는 이 두 지진 사건을 예사롭게만 생각하지 않습니다. 기독교 신앙 세계에서는 일체의 우연을 믿지 않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지구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들은, 하나님의 통치와 그 섭리를 보여 주는 시대의 표적임을 믿습니다. 오늘 본문은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이 예수님과 주고받은 표적에 관한 말씀입니다. 

1절에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이 와서 예수를 시험하여 하늘로서 오는 표적 보이기를 청하니”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에 보면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이 예수님을 시험하여, 하늘로서 오는 표적 보이기를 청하였다고 했습니다. 바리새인에 해당하는 ‘파리사이오스’는 ‘구분하다’ ‘나누다’는 뜻이 있는 히브리어 ‘파라쉬’에서 유래하여 ‘분리된 자들’이란 뜻을 지닙니다. 

그리고 사두개인에 해당하는 ‘삿두카이오스’는 다윗과 솔로몬 시대 대제사장을 지낸 ‘의로움’이란 이름 뜻을 가진 ‘사독’에서 유래하여, 당시 성전을 중심으로 한 종교 지도자 계층을 형성하였던 대제사장과 예루살렘의 유력자들이 속한 귀족 계급이었습니다. 바리새인은 극단적인 보수파로서, 율법은 물론 조상들의 유전과 천사와 부활과 영혼불멸과 내세를 믿고, 메시아를 기다리는 자들이었습니다. 반면에 사두개인은 진보적인 현실주의자들로서, 내세와 천사와 부활을 다 부정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이렇게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은 교리적으로, 그리고 정치적으로 적대적인 관계에 있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대적하여 시험하는 악한 일에 있어서는 함께 서로 연합하였습니다. 이처럼 악한 자들은 선을 대적함에 있어서 항상 한 편이 됩니다. 비록 그들이 자기들끼리는 서로 구별이 있고 나뉘어질지라도, 선 앞에서는 언제나 함께 공동보조를 취하는 것입니다. 

오늘날 인터넷을 보면, 기독교에 대해서 얼마나 많은 악평들이 판을 치는지 모릅니다. 그야말로 불신자들이 일심동체가 되어 온갖 말로 기독교를 공격하고 비방하는 일을 서슴지 않습니다. 그런데 거기에 비해 우리 기독교인들은 어떠합니까? 그리스도인들이 한 마음으로 기독교를 변호하고 변증을 하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세상 사람들과 함께 교회를 비난하고 비방하기를 주저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못난 어머니도 어머니이고 못난 아버지도 아버지인 것만은 틀림없듯이, 오늘날 비록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에게 많은 허물이 있을지라도, 하나님을 아버지로 교회를 어머니처럼 섬겨야 할 그리스도인들이, 세상 사람들과 함께 교회를 비방하는 일을 함부로 해서는 절대로 안 되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교회를 아끼고 성도를 존중히 여기는 자가 진정한 그리스도인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이 함께 와서 예수님께 하늘로서 오는 표적 보이기를 요청한 것은, 실로 어처구니없는 일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공생애를 시작하신 것이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라, 이미 일 년 이상 지난 후의 일이었으며, 그 기간 동안 예수님께서는 자신이 메시아 되심을 분명하게 나타내는 표적들을 수없이 보여 주셨기 때문입니다. 

마태복음 16장 이전에 행하셨던 이적들만 잠시 살펴보아도, 나병 환자를 깨끗하게 해주시고, 백부장 하인의 병을 말씀 한 마디로 고쳐 주셨고, 바람과 파도를 꾸짖어 잔잔하게 하셨으며, 각종 귀신들린 자들에게서 귀신을 쫓아주셨고, 중풍 병자를 고쳐주셨으며, 맹인의 눈을 뜨게 하셨고, 열 두 해를 혈루증으로 앓던 여인을 고쳐주셨으며, 회당장 야이로의 죽은 딸을 살려주셨고, 말 못하는 사람의 입을 열어주셨으며, 오병이어로 오천 명을 먹이신 기적을 행하셨고, 물 위를 걸어가시기도 하였습니다. 여러분, 과연 이만 하면 예수님께서 하늘로부터 오신 표적이, 메시아로서의 자격이 충분하지 않습니까? 무엇을 더 바란다는 것입니까? 그런데도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은 예수님께 나와서 하늘로부터 온 또 다른 표적을 요청하였다고 했습니다.

이처럼 표적은 믿지 못하는 자들에게 결코 믿음을 갖게 하지 못합니다. 오히려 믿음이 표적을 표적으로 보게 하는 것입니다. 즉 믿음이 없는 자들은 아무리 분명하고 확실한 표적을 보아도, 그것을 표적으로 여기지 못하고 의심하지만, 믿음이 있는 자들은 다른 사람들이 표적으로조차 여기지 않는 사실 속에서도 하나님의 섭리와 뜻을 깨닫고, 그것으로 인해 더욱 큰 확신을 가지게 된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거지 나사로의 비유에서 “모세와 선지자들에게 듣지 아니하면 비록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는 자가 있을지라도 권함을 받지 아니하리라”고 말씀하셨으며, 또 히브리서 기자는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라고 하였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표적이 믿음을 갖게 하는 것이 아니라, 믿음이 표적을 보게 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표적을 보지 못하기 때문에 믿지 못한다는 말은 성립될 수 없습니다. 그것은 한낱 변명에 지나지 않습니다. 오히려 믿음이 없기 때문에 오늘날도 시대의 표적을 보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도 여러분! 우리는 표적만을 구하는 신앙을 가져서는 안 됩니다. 그것은 우리의 믿음 없음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우리는 믿음의 눈으로 시대의 표적을 볼 줄 알아야 합니다. 그럴 때 우리의 신앙은 더욱 견고하고 온전하게 될 줄로 믿습니다. 

또한 표적을 구하는 것과, 하나님을 시험하는 것에는 차이가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이 예수님께 표적 보이기를 청한 것은, 반드시 잘못된 일이라고만 볼 수는 없습니다. 표적을 구하는 것은 확고한 믿음이 없음을 나타내는 것이지만, 그렇다고 해도 그것이 꼭 나쁜 것이라고만 할 수 없는 이유는, 성경에 등장하는 많은 신앙의 사람들이 하나님께 표적을 구하였기 때문입니다. 기드온을 보십시오. 

그는 하나님께서 보내신 천사에게 ‘주 되시는 표징’을 보여 달라고 요구했으며, 또 미디안 연합군과 싸우기 위하여 출전하려 할 때에는 하나님께 자신을 통하여 이스라엘을 구원하실 것을 나타내는 표적으로 양털에만 이슬이 내리고 온 땅이 마를 것과, 이와 반대로 온 땅에 이슬이 내리고 양털에는 내리지 않도록 해주실 것을 구하였습니다. 히스기야는 하나님께서 자신의 기도를 들으셔서 질병을 고쳐 주시고 또 십 오년 동안 생명을 연장해 주시겠다는 징표로 아하스의 일영표에 나아갔던 해 그림자를 뒤로 십도 물러가게 해주시라고 요청하였습니다. 도마는 예수님의 부활하심을 믿기 위한 표적으로 못 자국 난 주님의 손과 창에 찔린 옆구리를 만져 보게 해주시라고 요구하였습니다. 이러한 사실이 보여 주듯이, 표적을 구하는 행위가 반드시 잘못된 것은 아닌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의 행위가 크게 잘못되었다고 말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그들의 행위가 자신들의 믿음을 견고하게 하기 위해 예수님께 표적을 구한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시험’하는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표적을 구하는 것과, 하나님을 시험하는 것은 겉으로 보기에 잘 구별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 두 가지 행위는 분명히 엄격한 차이가 있습니다. 그 차이는 바로 동기와 목적의 차이입니다. 

즉 하나님께서도 인정하시고 허락하시는 표적을 구하는 행위는, 그 동기가 확고한 믿음을 갖고자 하는 것이며, 그 목적이 하나님을 보다 잘 섬기는 데 있지만, 하나님께서 미워하시고 결코 허락하지 않으시는 ‘하나님을 시험하는 행위’는, 그 동기가 자신의 불신앙을 정당화하기 위한 것이며, 그 목적이 하나님의 존재와 능력을 부정하는 데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자신의 믿음을 확고히 하고, 하나님의 약속에 대해 확신을 갖기 위해 표적을 구할지언정, 그 의심을 정당화하기 위하여 하나님께 표적을 보여 달라는 사악하고 어리석은 자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오직 하나님을 향한 순전한 믿음과 사랑의 동기로 최선을 다해 주님을 섬기는 가운데, 날마다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하며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늘로부터 오는 표적을 보여 달라는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에게 “너희가 저녁에 하늘이 붉으면 날이 좋겠다 하고, 아침에 하늘이 붉고 흐리면 오늘은 날이 궂겠다 하나니, 너희가 날씨는 분별할 줄 알면서 시대의 표적은 분별할 줄 모르느냐?”고 책망을 하셨습니다. 마가복음에 보면 하늘로부터 오는 표적을 보여 달라는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을 향하여, 예수님께서 마음속으로 깊이 탄식하셨다고 하였습니다. 

즉 예수님께서는 마음을 열어 주님을 받아들이지 않고, 모함거리만 찾는 그들에 대하여 통분하신 것입니다. 다른 번역 성경에는 주님께서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을 향하여 외식하는 자들이라고 하시며, 당시 표적을 구했던 그들을 몹시 질책한 것이 더욱 선명하게 드러납니다.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은 주님께 하늘로부터 오는 표적을 구하고, 그 표적을 보기만 하면 믿을 것처럼 위장을 하였지만, 이는 외식에 불과하였고 그들은 처음부터 예수님을 모함하기 위하여 나왔기 때문에, 주님께서는 저들의 위선을 꿰뚫어 보시고 ‘배우’ ‘연기자’란 의미의 ‘외식하는 자들’이란 말로 날카롭게 질책하셨던 것입니다. 

이처럼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이 예수님께 하늘로부터 오는 표적을 구한 것은, 그들이 예수님의 메시아 되심을 확인하기 위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다만 자신들에게 경쟁과 위협이 되고 있는 예수님을 음해하는 데 필요한 단서를 확보하기 위해, 하늘로서 오는 표적을 구했던 것입니다. 이에 그들의 의도를 간파하신 예수께서는, 그들의 악한 의도와 시대의 표적으로 오신 자신을 알아보지 못하는 그들에게 “너희가 저녁에 하늘이 붉으면 날이 좋겠다 하고, 아침에 하늘이 붉고 흐리면 오늘은 날이 궂겠다 하나니, 너희가 날씨는 분별할 줄 알면서 시대의 표적은 분별할 줄 모르느냐?” 라고 책망을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시대의 표적’을 분별하는 것이, 날씨를 분별하는 것보다 쉽다는 말씀이 아닙니다. 어떻게 시대의 표적을 분별하는 것이, 하늘을 보고 일기를 예측하는 것보다 쉬울 수가 있겠습니까? 그럴 수 없습니다. 따라서 이 말씀은 시대의 표적을 분별하는 것이 날씨를 분별하는 것보다 쉽다는 말씀이 아니라, 시대의 표적을 분별하는 일이 훨씬 중요하다는 말씀입니다. 즉 일상사에 영향을 줄 수 있는 하찮은 이치들은 분별할 줄 알면서, 어째서 인간의 역사 전체를 좌우할 수 있는 시대의 표적은 분별할 줄 모르느냐는 말씀인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이 반드시 분별할 줄 알아야 했던 것은, 하찮은 날씨 정도가 아니었습니다. 날씨를 분별하지 못 한다고 해서 그들이 당할 수 있는 일이란 고작 비를 맞는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시대의 표적을 분별하지 못한 것은, 하나님 뜻에 무관한 삶을 살거나 혹은 하나님의 뜻에 역행하는 삶을 살다가, 마침내 준엄한 하나님의 심판과 형벌을 받게 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것은 오늘날 우리에게 있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즉 오늘날 우리들 역시 일상사와 관련된 하찮은 이치나 표적은 분별할 알면서, 그 시대를 향한 하나님의 뜻을 나타내는 시대의 표적을 분별할 줄 모른다면, 결국 하나님의 준엄한 심판과 형벌을 면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대부분의 사람들은 ‘일기 예보’ ‘주가 동향’ ‘정치 상황’ 같은 일상사와 관련된 하찮은 징조와 표적을 분별하기에만 급급할 뿐, 우리 시대를 향한 하나님의 뜻을 나타내는 시대의 표적을 알기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따라서 그들은 언제나 하나님의 뜻과는 무관한, 아니 하나님의 뜻에 역행하는 삶을 살아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도 혹 이와 같은 많은 사람들에 속해 있지는 않습니까? 우리들의 관심이 오직 이 땅에서 먹고 사는 것과 관련된 표적을 분별하는 것에 집중되어져 있는 것은 아닙니까? 만약 그렇다면 우리는 속히 우리의 관심을 이 시대를 향한 하나님의 뜻을 나타내는 시대의 표적으로 돌려야만 합니다. 그래서 시대의 표적을 분별할 줄 알아야 합니다. 특별히 이 시대는 세상의 마지막이 가까운 때입니다. 마지막 때의 징조가 곳곳에서 나타나고 있습니다. 우리가 이러한 시대의 표적을 분별할 줄 모른다면, 우리 또한 다수의 사람들과 함께 멸망을 피하지 못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늘로부터 오는 표적 보이기를 청하는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에게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표적을 구하나 요나의 표적 밖에는 보여 줄 표적이 없느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서 ‘요나의 표적’이란 요나가 물고기 뱃속에 삼 일간 들어갔다 나와서 이방 땅 니느웨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증거 했던 것을 가리키는 것으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다가 무덤에 장사된 지 삼일 만에 부활하시므로, 마침내는 이방인들에게까지 복음이 증거되게 될 것을 가리키는 말씀입니다. 즉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십자가와 부활이 하늘로부터 오는 가장 큰 표적이 될 것이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메시아 되심을 나타내는 가장 분명한 표적은 바로 십자가와 부활입니다. 역사는 너무나도 분명하게 예수 그리스도께서 성경이 말씀하고 있는 바로 그 메시아이심을 보여줍니다.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 그리고 그 이후 이방인들에게 복음이 전해지는 가운데 진행되어져 온 인류역사를 자세히 살펴본다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인간의 참 구원자 되시며, 또한 인간의 역사는 바로 그리스도께서 인간을 구속하시는 과정, 곧 인류 구속의 역사라는 사실을 부인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래서 영어를 쓰는 사람들은 역사를 History 즉 ‘그분의 이야기’라고 표현하고 있으며, 오늘날 우리들도 역사의 연호를 예수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B. C(Before Christ)와 A. D(Anno Domini) 구분하는 것입니다. 물론 그 단어나 연도 표기법을 쓰는 사람들이 다 그 뜻을 알고 쓰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역사 속에서 모든 사람들이 그와 같은 단어와 연도 표기법을 쓰도록 섭리하심으로써, 예수께서 모든 인류의 구원자요 또한 역사의 주인이신 메시아라는 사실을 분명하게 나타내셨던 것입니다.

이처럼 역사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구세주 곧 ‘메시아’이심을 분명하게 보여줍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이와 같은 명백한 표적을 외면한 채, 마치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처럼 예수 그리스도께서 인간의 구원자 되심을 증명할 수 있는 하늘로부터의 표적을 보이라고 요구하고 있습니다. 이 얼마나 어리석은 일입니까? 만약 그들이 역사가 보여 주는 명백한 표적을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메시아 되심을 믿지 못한다면, 예수께서 그들에게 그 어떠한 표적을 보여 주신다고 해도 그들은 예수님을 메시아로 믿을 수 없을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는 역사를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의 메시아 되심을 분명히 확신할 수 있어야 합니다. 역사에 나타난 명백한 표적을 보고도 다른 표적을 구한다면, 그것처럼 우매한 일도 없을 것입니다. 정녕 우리는 역사를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의 메시아 되심을 확신함으로 믿음을 견고히 세워 나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이제 말씀을 마치려고 합니다.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은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로 또는 메시아로 행하신 그 많은 표적을 보고도, 또 다른 하늘로부터 오는 표적을 보여 달라고 요청을 하였습니다. 저들은 표적을 보고 예수님을 메시아로 믿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 반대로 예수님이 메시아가 아님을 입증하고 모함하기 위해서 표적을 구했습니다. 오늘 우리 교회 성도들은 여러분의 믿음을 더욱 확고하고 견고하기 위해서 표적을 구하고, 그러한 성도들에게 하나님께서 기도에 응답해 주심으로 말미암아, 확신에 가득 찬 체험신앙의 소유자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주님께서는 표적을 요구하는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에게 “너희가 저녁에 하늘이 붉으면 날이 좋겠다 하고, 아침에 하늘이 붉고 흐리면 오늘은 날이 궂겠다 하나니, 너희가 날씨는 분별할 줄 알면서 시대의 표적은 분별할 줄 모르느냐?”고 책망하셨습니다. 오늘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이 시대의 표적을 분별할 줄 알아야 합니다. 

자연계에 나타난 징조로서 구제역과 조류독감, 그리고 갈수록 빈발하는 지진과 기근과 전쟁, 많은 사람이 빨리 왕래하고 지식이 더하리라는 다니엘서의 예언처럼 빨라진 교통과 정보의 홍수 시대, 사회적 징조로서 성도덕의 타락, 종교계의 징조로서 거짓 선지자들의 출현과 종교계의 타락 등 이 시대의 표적을 보면서, 참으로 이 시대는 예수님의 재림이 가까워진 말세지말인 것을 깨닫고, 깨어 근신하며, 주님 맞을 준비를 잘 하고 살 수 있기를 바랍니다.

주님께서는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표적을 구하나 요나의 표적밖에는 보여 줄 표적이 없느니라.”고 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표적 중의 표적은 ‘요나의 표적’ 곧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으심과 부활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은 표적 중의 표적인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을 확신함으로 말미암아, 영원한 생명과 하늘나라의 상속자가 되는 복을 다 받게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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