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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기다리는 시간에 준비하십시오

  • 이한규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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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다림은 헛되지 않습니다 (요한계시록 22장 16-21절)


<기다리는 시간에 준비하십시오>


 빌리 그래함은 플로리다 성경대학 2학년인 19세 때 결혼까지 생각했던 에밀리와 헤어지면서 그때 사람이 아닌 하나님을 삶의 제일 우선순위에 두고 복음 설교자로 헌신하기로 결심했습니다. 그렇게 결심하면 설교 기회가 물밀 듯이 밀려올 줄 알았지만 전혀 설교 기회가 오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실망하지 않고 보스트윅(Bostwick)에서의 첫 설교 때처럼 준비 안 된 설교로 수치를 당하지 않도록 설교 준비를 열심히 했습니다.

 때로는 강가의 나무 밑동 위에 올라서 설교를 연습했고 때로는 학교 옆 골프 코스를 걸으면서도 설교를 읊조렸습니다. 가끔 강 건너편 섬으로 카누를 타고 가서 설교를 연습할 때는 낚시꾼들은 그의 설교로 고기가 달아날까봐 싫어했습니다. 나무와 새와 곤충들 앞에서 설교할 때는 친구들이 보고 놀렸습니다. “빌리! 뭔가 회개시킨 것 있어?” 그렇게 언어 구사, 억양, 설교자세 등도 연습했기에 가식적인 설교라는 오해도 불러일으켰지만 그는 설교 내용만큼 설교 전달도 중시했습니다.

 복음 설교자로 헌신한 후 첫 번째 교회 설교 초청을 받은 곳은 22살의 피컨 주니어(Pickern Jr.)가 담임하던 캐피톨라 침례교회(Capitola Baptist Church)였습니다. 그 작은 집회를 위해 몇 백 장의 전단지까지 붙이며 홍보했지만 피컨에게 갑자기 일이 생겨 그 집회가 취소되었습니다. 그는 설교 기회가 막히는 문제로 기도하다가 어느 날, 그는 자신의 잘못된 영적인 욕심을 깨닫고 겸손하게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저는 위대한 설교자가 되를 원하지 않습니다. 다만 위대한 전도자가 되길 원합니다.” 그때부터 설교기회가 찾아오기 시작했습니다.

 점차 그를 초청하는 곳이 늘면서 그는 젊은 복음 전도자로 유명해졌습니다. 지역 신문에도 ‘역동적인 젊은 복음전도자’라고 소개되면서 집회 참가자들도 늘었고 결신자도 늘었습니다. 점차 그의 전도 집회가 플로리다의 남 침례교회를 중심으로 소문과 영향력이 확산되었지만 동시에 2가지 면에서 반대자들이 생겨났습니다. 하나는 그가 너무 젊다는 것과 또 하나는 그가 침례교 사역자가 아니라는 것이었습니다.

 그 지역은 침례교인들이 많았기에 그들이 가끔 물었습니다. “어느 침례교회 출신인가요?” 그때마다 빌리가 대답했습니다. “저는 장로교에서 자랐지만 지금은 기독교 선교연맹(C&MA) 교회 소속 사역자입니다.” 그러나 계속 교단 문제가 불거지면서 세실 언더우드 목사가 그에게 침례교회에서 침례를 받고 침례교 사역자가 되라고 했습니다. 그는 이미 기독교 선교연맹 목사인 존 마인더로부터 침례를 받았기에 다시 침례를 받는 문제로 깊이 고민했지만 결국 믿음의 확신 문제가 아닌 사역 편의상 침례를 받자고 결정했습니다.

 침례교에서는 타 교단의 세례를 인정하지만 집사(타교단 장로)와 사역자에 한해서는 새로 침례를 받을 것을 권고하는 편입니다. 결국 빌리는 브니엘 침례교회(Peniel Baptist Church)에서 침례를 받고 목사 안수를 받았습니다. 비록 그가 미국 남침례교에서 목사 안수를 받았지만 사역 초창기(1938-1943년)에 대부분의 삶, 사상, 그리고 사역기회는 기독교 선교연맹을 통해 얻었습니다. 또한 그의 멘토였던 마인더는 변함없이 빌리를 협력목사로 사역하게 하면서 수많은 회의, 캠프, 그리고 교회에서 설교하도록 배려해주었습니다.

 기독교 선교연맹은 1974년까지는 ‘교단’보다는 ‘연맹’의 성격이 강했기에 빌리가 남침례교단에서 목사 안수를 받았어도 기독교 선교 연맹 교회에서의 사역을 넉넉한 마음으로 용납했습니다. 그런 기다림과 준비과정이 있었기에 빌리 그래함은 20세기의 가장 위대한 전도자가 될 수 있었습니다. 예수 믿고 인물 되는 찬란한 비전은 쉽게 이뤄지지 않습니다. 상당한 준비과정과 기다림이 필요합니다. 기다리는 시간은 준비하는 시간입니다. 그때 믿음으로 준비하면 언젠가 반드시 좋은 날을 보게 될 것입니다.

< 주님이 오실 길을 닦는 자세 >

 성도의 최고 목표 중의 하나는 예수님의 재림을 예비하는 것입니다. 사실 예수님이 오실 길을 잘 닦는 것은 성도의 성숙과 성공과 발전과 축복의 선행지표와 같습니다. 왜 중국이 오랜 역사와 과거의 찬란한 문명에 비해 발전이 늦은 편입니까? 가장 큰 이유 중의 하나가 그들의 축성 문화 때문입니다. 과거에 중국은 힘이 생기면 성을 쌓고 성 안에서 안주하며 스스로를 제한시켰기에 발전이 늦어진 것입니다. 힘이 생기면 성을 많이 쌓기보다 길을 많이 닦아야 발전과 성장 가능성이 커집니다.

 처음에 경부 고속도로가 건설될 때 비용문제 등으로 반대가 많았지만 결국 경부 고속도로는 경제발전의 중요한 원동력이 되었습니다. 물론 길을 낸다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길을 내려면 원래의 집도 허무는 등 많은 비용과 희생과 진통이 따르지만 그 진통과 희생은 내일의 발전을 위해 꼭 필요한 것입니다. 신앙생활에서도 진통과 희생을 감수하며 예수님이 오실 길을 잘 닦아야 합니다. 예수님이 오실 길을 잘 닦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1. 교회를 사랑하십시오

 본문 16절에서 예수님이 스스로 ‘다윗의 뿌리요 자손’이라고 하고 ‘광명한 새벽별’이라고 하신 것은 예수님이 이스라엘 사람들이 오랫동안 기다리던 메시야임을 다시 한 번 강조한 것이고 또한 “교회들을 위해서 내 사자들을 보냈다.”고 하신 말씀은 예수님이 교회를 얼마나 사랑하는지를 잘 말해줍니다. 본문 17절에서 ‘신부’는 교회를 뜻합니다. 결국 이 구절은 요한계시록의 초점이 ‘교회에 구원과 위로와 소망을 전하는 것’에 맞춰져 있음을 말해줍니다. 교회가 존재하는 가장 중요한 목적도 죽을 영혼을 살리고 힘든 영혼에게 위로와 소망을 주는 것에 있습니다.

 교회는 구제기관이 아닙니다. 사람들이 교회를 비난하는 제일 큰 이유는 구제에 초점을 맞추기 때문입니다. 물론 구제도 잘해야 하지만 교회의 본질은 구제에 있지 않고 구원에 있습니다. 또한 교회는 친교기관도 아닙니다. 어떤 사람은 교회를 친교기관으로 알고 자신을 알아주길 원합니다. 그러나 알아달라고 하면 대개 더 알아주지 않는 것이 일반적인 현실입니다. 교회에는 사람을 만나러 나오지 말고 예수님을 만나러 나와야 합니다. 교회는 예수님을 만나는 최적의 장소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교회 중심적인 삶은 어떤 삶보다 중요한 삶입니다.

 이 세상에서 제일 복된 삶 중의 하나가 교회를 사랑하는 삶입니다. 때로 시험에 들거나 하나님의 인도를 따라 교회를 옮기게 되어 자신이 교회를 위해 헌신했던 시간과 정성과 물질을 날려버린 것 같아도 너무 속상해하거나 아쉬워하지 마십시오. 자신이 헌신했던 것은 헌신한 것으로 끝내고 기억하지 말아야 그 헌신이 공로로 변하지 않는 참된 헌신으로 영원히 남습니다. 하나님은 그 헌신을 다 기억해주십니다. 자신이 헌신을 기억할수록 하나님은 더 기억하지 않고 자신이 헌신을 기억하지 않을수록 하나님은 더 기억해주십니다.

2. 말씀을 가까이 하십시오

 본문 18-19절은 말씀의 중요성을 강조하면서 특히 요한계시록 말씀을 더하지도 말고 빼지도 말라고 강력하게 경고합니다. 누가 말씀을 더합니까? 이단들이 “계시를 받았다!”라고 하면서 말씀을 더합니다. 누가 말씀을 뺍니까? 자유주의 신학자들이 “다 상징이다!”라고 하면서 말씀을 뺍니다. 그렇게 말씀을 더하지도 말고 빼지도 말고 온전한 하나님 말씀으로 들어야 합니다. 말씀을 잘 듣는 것이 얼마나 복된 자세인지 모릅니다.

 하나님이 축복하시기 직전에 꼭 주는 것이 있습니다. 바로 ‘듣는 귀’입니다. 말씀이 그대로 가감 없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들려지는 ‘듣는 귀’가 있으면 반드시 복도 따라옵니다. 그러나 ‘듣는 귀’가 없으면 교만해지고 결국 패망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삶에서 ‘말씀이 끊어지는 것’이 얼마나 큰 불행인지 모릅니다.

 축복을 원하면 말씀을 사모하십시오. 언제 하나님의 축복을 받을지 잘 몰라도 하나님의 축복을 받기 전에는 항상 있는 현상이 있습니다. 그것은 말씀이 꿀처럼 달게 느껴지는 현상입니다. 즉 말씀이 꿀처럼 달게 느껴질 때는 큰 축복이 이르기 직전입니다. 결국 복된 삶을 원하면 가장 중요한 기도 중의 하나가 바로 이런 기도입니다. “하나님! 제 마음이 말씀에 열린 마음이 되게 하시고 제 귀가 듣는 귀가 되게 하소서!” 성경 말씀과 설교 말씀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들릴 때 신비한 하나님의 축복의 역사도 시작될 것입니다.

3. 믿음으로 기다리십시오

 본문 20절 말씀에서 예수님이 “내가 진실로 속히 오리라.”고 말씀하자 사도 요한이 화답합니다.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 이 구절에서 ‘속히’란 말은 ‘곧(soon)’이란 의미도 있지만 ‘진짜로(indeed)’라는 의미도 있습니다. 성도의 기다림은 결코 헛되지 않다는 뜻입니다. 왜 춘향전이 감동을 줍니까? 그 소설의 주제가 “기다림은 결코 헛되지 않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요한계시록이 말씀하는 핵심 내용도 “기다림은 결코 헛되지 않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다시 만날 날을 기다리며 늘 넘치는 천국 소망을 가지고 사십시오. 천국은 ‘실체가 없는 허상’이 아니라 ‘구체적인 장소’입니다. 천국에서는 음악을 듣고 그림을 그리는 것과 같은 취미생활이 있을까요? 대부분의 성경학자들은 그런 삶이 있다고 여깁니다. 천국에 들어갈 때 육신적인 나쁜 것은 다 없어지지만 양심, 지력, 좋은 추억, 좋은 취미 등은 없어지지 않을 것입니다. 또한 천국에는 먹고 마시는 일도 있습니다.

 누가복음 24장을 보면 부활하신 예수님이 먹을 것을 찾으시고 제자들이 구운 생선 한 토막을 드리자 제자들 앞에서 잡수시는 장면이 나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이 고기를 잡숫는 모습은 몇 가지 중요한 신학적인 사실을 말해줍니다. 첫째, 예수님의 부활이 확실한 것이란 사실입니다. 둘째, 예수님의 부활은 ‘영의 부활’이 아닌 ‘몸의 부활’이란 사실입니다. 셋째, 천국에서는 예수님처럼 영광체가 되어 먹는 것도 있을 것이란 사실입니다.

 누가복음 2장을 보면 예수님이 나실 때 시므온이란 노인이 성전에서 아기 예수님을 만나고 아이를 품에 안고 감격하면서 말합니다. “하나님! 말씀하신 대로 구세주를 보여주셨군요. 이제 죽어도 여한이 없습니다.” 그처럼 우리의 기다림도 헛되지 않고 조만간 시므온의 고백이 우리의 고백이 될 것입니다. 그때까지 주님의 신부로서 믿음의 정절을 지킴으로 주님 만나 뵐 때 기쁨으로 만나 뵈면 얼마나 복된 일입니까?

< 기다림은 헛되지 않습니다 >

 어느 날, 달 신을 숭배하던 갈대아 우르 사람 데라가 큰 꿈과 비전을 품고 가나안 땅 이주를 결심했습니다. 그리고 가족들을 데리고 가나안 땅을 향했지만 무슨 일이 있었는지 하란 땅에 머물게 되었습니다. 점차 가나안의 비전이 희미해질 때 하나님께서 데라의 장자인 아브라함에게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약속의 땅으로 가면 큰 민족을 이루게 하시겠다고 약속했습니다. 그 약속을 따라 아브라함은 75세에 하란을 떠났습니다.

 75세의 늦은 나이에 145세인 아버지 데라를 하란에 놔두고 가나안 이주를 결심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결단했습니다. 찬란한 꿈과 비전을 이루려고 순례자의 길을 택한 것입니다. 그 꿈과 비전은 쉽게 이뤄지지 않았습니다. 그의 후손들을 통해 이스라엘이 애굽을 탈출해 민족국가를 이루기까지 400년 이상의 엄청난 세월이 걸렸습니다. 그러나 결국 하나님의 언약은 멋지게 이뤄졌고 현재 전 세계 인류의 절반 이상이 아브라함을 믿음의 조상으로 여기고 있습니다.

 기다림은 헛되지 않습니다. 믿음은 기다림을 내포합니다. 일이 뜻대로 되지 않았다고 너무 속상해하지 마십시오. 속병이 진짜 병이 됩니다. 일이 안 되는 것도 기다림의 한 과정입니다. 사람 때문에 너무 서운해 하거나 분노하지 마십시오. 그런 감정을 거룩한 열정으로 승화시키십시오. 겸손함도 잃지 마십시오. 성령의 은혜로 겸손해지면 속상함과 상처와 서운함과 분노가 잠깐 생겨도 곧 사라집니다. 자기가 부족하다고 느끼고 자기가 작다고 느끼면 감정조절이 의외로 쉬워집니다.

 겸손한 믿음으로 자기감정을 잘 극복하면 하나님은 늘 새로운 비전과 사명과 기회를 주십니다. 확신도 더해주십니다. 확신이 생기면 불평과 원망도 사라지고 자기를 내려놓기 쉽게 됩니다. 그처럼 불평과 원망이 없어지고 자기를 잘 내려놓으면 내적으로는 치유의 능력이 나타나고 외적으로는 하나님의 은혜가 임합니다. 또한 그때부터 좋은 사람이 붙기 시작합니다. 인생에서 신실한 동역자나 후원자 한 사람이 얼마나 중요한지 모릅니다.

 성도에게는 하늘 고향이 있습니다. 성도의 소속국가는 천국입니다. 성도는 천국 시민권자로서 이 땅에서 잠시 뜻 있는 여행을 하는 존재입니다. 이 땅의 것에 연연하지 마십시오. 그래야 이해관계에 얽히지 않는 객관적이고 공정한 시각이 생깁니다. 그때 불의와 위선에서 자유롭게 되고 공동체에 선한 방향을 제시할 수 있습니다. 예언자란 무속적인 예언을 남발하는 사람이 아니라 순례자 의식을 가지고 공동체에 선한 방향을 제시하는 사람입니다.

 차별도 없고 지배도 없는 천국 고향을 향하는 성도는 천국에 갈 때까지 이 땅을 준 천국으로 만들려고 해야 합니다. 그것이 하나님께서 우리를 이 땅에 두신 이유입니다. 세상을 욕심의 눈으로 바라보지 말고 긍휼의 눈으로 바라보고 사랑과 선교와 나눔의 가치관으로 세상에 선한 기운을 불어넣으십시오. 또한 말로 드리는 예배가 아닌 삶으로 드리는 예배에 익숙해지고 입만 살아있는 성도가 아닌 손이 살아있는 성도가 되십시오.

 입으로는 “오직 예수밖에 없어!”라고 말하면서 자기밖에 없는 것처럼 사는 교인이 의외로 많습니다. 어떤 교인은 “예수 이름으로 명한다!”라고 외치지만 그 외침이 믿음의 외침이 아닌 불안을 커버하기 위한 외마디일 때도 많습니다. 예수님의 이름을 사칭해 자기의 잘못된 행동과 불안을 커버하려고 하고 심지어는 예수님의 이름을 욕심을 채우는 도구로 활용한다면 예수님의 심정이 어떨까요? 사람이 나쁜 사람이 자기 이름을 사칭해도 기분이 나쁜데 하물며 하나님은 그런 사칭을 얼마나 싫어하시겠습니까?

 하나님의 이름을 부끄럽게 하지 않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십시오. 완벽하게 살라는 말이 아니라 하나님의 자녀 의식을 가지고 겸손하게 살라는 말입니다. 성령의 은사가 대단하지 않아도 성령의 열매가 넘치는 삶을 살려고 힘쓰십시오. 또한 위로는 드리고 옆으로는 나누고 아래로는 베푸는 드나베의 삶에 앞장서십시오. 그러면 빈털터리가 될 것 같지만 그런 사람이 결국 이 땅에서도 많은 것을 얻고 천국에서는 더욱 많은 것을 얻을 것입니다. 늘 천국 소망을 가지고 성도답게 살아감으로 기다림을 아름다운 결말로 만드는 복된 심령들이 되십시오.

ⓒ 이한규목사  http://www.john316.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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