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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사랑의 줄로 이끄시는 하나님 (호 11: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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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줄로 이끄시는 하나님 (호 11:1-11)서론 

  
호세아 4-14장까지는 9편의 설교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호세아 11장과 12장은 7번째 설교에 해당되는데 주제는 배역한 이스라엘 백성을 향한 아버지의 사랑입니다. “내가 나의 맹렬한 진노를 발하지 아니하며 내가 다시는 에브라임을 멸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내가 사람이 아니요 하나님임이라 나는 네 가운데 거하는 거룩한 자니 진노함으로 네게 임하지 아니하리라” (호 11:9) 

사람이라면 많은 사랑을 베풀었음에도 배역을 한다면 다시는 상대도 안 할 것입니다. 우리가 누군가에게 엄청난 사랑을 줬는데도 계속 배반한다면 그 사람을 상대하겠습니까? 그 사람은 사랑을 줘도 소용없다고 생각하여 상대도 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계속해서 이스라엘을 상대하시고 사랑하십니다.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가능한 것입니다.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이스라엘 백성의 견딜 수 없는 배역에도 계속해서 사랑을 베풀어주시는 것입니다. 

호세아 1장부터 3장까지는 정절을 지키지 않은 아내를 끝까지 사랑하는 남편의 사랑을 표현한 것이라면 호세아 11장은 배역한 아들을 끝까지 사랑하는 아버지의 사랑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호세아 11장에서 우리는 아버지의 사랑에 대한 세 가지 질문을 던져보고 그에 대한 대답을 들어보고자 합니다. 

I. 하나님의 사랑의 대상은 누구인가? 

  
아버지 하나님은 도대체 누구를 사랑하시는가? 호세아 11장에서는 하나님이 부성적인 사랑을 보이신 대상을 두 단어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첫째, 1절에 “내 아들”(my son)과 둘째, 7절에 "내 백성"(my people)입니다. “이스라엘의 어렸을 때에 내가 사랑하여 내 아들을 애굽에서 불러내었거늘” (호 11:1) 내 아들이라는 표현은 애굽에서 노예생활을 할 때 구원해내신 이스라엘 백성을 집합적으로 표현한 것입니다. 그런데 내 아들이라는 말은 그 의미가 이스라엘 백성을 가리키는데 국한되지 않습니다. “헤롯이 죽기까지 거기 있었으니 이는 주께서 선지자로 말씀하신 바 애굽에서 내 아들을 불렀다 함을 이루려 하심이니라” (마 2:15) 

동방박사들이 와서 유대인의 왕으로 오신 이가 어디 계시냐고 묻자 헤롯 대왕은 그것을 듣고 그 아이를 죽여야겠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베들레헴 근처에 사는 어린아이들을 다 죽였습니다. 그런데 그때 주의 사자가 요셉에게 현몽하여 애굽으로 피신하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요셉은 아기 예수님을 데리고 헤롯 왕이 죽기까지 애굽에 있었습니다. 그러다 헤롯 대왕이 죽고 그 아들 헤롯 아켈라오가 왕이 되었는데 이 사람도 대단히 잔인한 사람이었기 때문에 예수님께서는 태어나신 베들레헴으로 가지 않고 헤롯 아켈라오의 통치가 미치지 않는 나사렛으로 가셨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호세아 11장 1절의 말씀을 마태는 예수님께 적용한 것입니다. 내 아들이란 표현은 이스라엘 백성에게도 적용되고 예수님께도 적용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거기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교회 시대에 사자같이 부르시는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구원받는 모든 하나님의 자녀들에게도 적용됩니다. “저희가 사자처럼 소리를 발하시는 여호와를 좇을 것이라 여호와께서 소리를 발하시면 자손들이 서편에서부터 떨며 오되 저희가 애굽에서부터 새 같이 앗수르에서부터 비둘기 같이 떨며 오리니 내가 저희로 각 집에 머물게 하리라 나 여호와의 말이니라” (호 11:10-11) 

여러분 하나님께서 사자처럼 부르짖으면 하나님의 자녀들이 바다에서도 오고 남쪽 애굽에서도 오고 동쪽 앗수르에서도 온다는 것입니다. 이 예언을 문자 그대로 볼 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이스라엘 백성이 앗수르의 포로 되어서 문자 그대로 돌아왔다는 역사적인 기록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 말씀은 유다 지파의 사자이신 예수님께서 사자처럼 자기 백성을 부르셨을 때 사방에서 부르심을 받고 예수님을 믿어 구원받은 하나님의 백성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신약시대에 영적인 새 이스라엘 즉 교회를 가리키는 말씀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내 아들이라는 표현은 삼중의 의미가 있습니다. 예표적으로는 구약 이스라엘 백성 그리고 신약시대의 실현으로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 그리고 나아가서 예수 그리스도의 부르심을 받고 구원받은 신약의 교회를 모두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세 종류의 존재가 공통적으로 소유하고 있는 특징은 “하나님께서 택하신 존재”라는 것입니다. 호세아 선지자는 하나님께서 당신이 택하신 백성을 주권적인 은혜로 사랑하신다는 것을 선포한 것입니다. 
  
여러분 호세아 선지자는 하나님께서 온 세상 사람들을 모두 다 예외 없이 사랑의 대상으로 삼으신다는 말을 하고 있지 않습니다. 내 아들을 애굽과 완전히 구별하셨습니다. 애굽을 사랑하셨다면 애굽의 장자들을 그처럼 무참히 죽이셨겠습니까? “내 백성이 결심하고 내게서 물러가나니 비록 저희를 불러 위에 계신 자에게로 돌아오라 할지라도 일어나는 자가 하나도 없도다 에브라임이여 내가 어찌 너를 놓겠느냐 이스라엘이여 내가 어찌 너를 버리겠느냐 내가 어찌 아드마 같이 놓겠느냐 어찌 너를 스보임 같이 두겠느냐 내 마음이 내 속에서 돌아서 나의 긍휼이 온전히 불붙듯 하도다” (호 11:7-8) 

여러분 하나님의 긍휼이 불붙듯 하는 사람이 누구냐면 에브라임 즉 이스라엘입니다. 본문에서 아드마와 스보임이라는 생소한 이름이 나옵니다. 신명기 29장 23절에 보면 아드마와 스보임은 소돔과 고모라가 유황불로 심판받을 때 그 옆에 있던 동네입니다. 소돔과 고모라에 괜히 붙어 있다 같이 망한 동네인 것입니다. 

그러니까 여호와께서는 아드마와 스보임을 진노와 분함으로 멸하신 소돔과 고모라와 동일하게 보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내 아들을 애굽과 동일하게 사랑하셨다구요? 그렇지 않습니다. 애굽은 심판해도 내 아들은 건져내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내 백성을 소돔과 고모라하고 동일하게 사랑하셨다구요? 그렇지 않습니다. 소돔과 고모라는 유황으로 멸망을 시켜도 내 백성은 건져내시는 것입니다. 내 백성을 특별하게 사랑하셨고 또한 강력하게 사랑하셨던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택한 백성이라고 해서 사랑받을 어떤 이유나 조건이 그 백성에게 있지 않습니다. “내 백성이 결심하고 내게서 물러가나니” (호 11:7) 이 본문을 킹제임스 성경으로 보면 “And my people are bent to backsliding from me”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bent라는 단어는 bend(구부리다)의 과거분사입니다. 그래서 해석을 해보면 그쪽으로 항상 구부러지는 기질을 가지고 있다는 의미입니다. 내 백성은 하나님을 배역하는 쪽으로 항상 구부러지는 내적인 경향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죠. 하나님의 택한 백성이라도 죄와 배역의 내적인 기질 즉 원초적인 죄성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하나님의 택한 백성이 됐다고 해서 하나님이 좋아서 하나님께로 나왔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 속에는 하나님을 배반하려고 하는 끊임없는 기질이 있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택하시고 사랑하셨으니 이것은 무조건적인 사랑인 것입니다. 우리에게 무슨 사랑받을 조건이 있어서 사랑을 주신 것이 아닙니다. 

신명기 7장 7-8절에 이 진리를 명백히 선포하고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너희를 기뻐하시고 너희를 택하심은 너희가 다른 민족보다 수효가 많은 연고가 아니라 너희는 모든 민족 중에 가장 적으니라 여호와께서 다만 너희를 사랑하심을 인하여 또는 너희 열조에게 하신 맹세를 지키려 하심을 인하여 자기의 권능의 손으로 너희를 인도하여 내시되 너희를 그 종 되었던 집에서 애굽 왕 바로의 손에서 속량하셨나니” (신 7:7-8) 

여러분 하나님께서 우리를 왜 사랑하셨습니까? 모릅니다. 이유가 없습니다. 다만 사랑하신 것입니다. 얼마나 감사한지 모릅니다. 우리가 평생 감사하고 또 감사해야 될 이유는 죄성을 가지고 있는 우리를 아무런 조건이나 이유 없이 하나님께서 택하시고 특별하고 강력한 사랑을 부어주셨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이 진리를 믿으시고 하나님께 평생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Ⅱ. 하나님은 어떤 방법으로 우리를 사랑하셨는가? 

“내가 사람의 줄 곧 사랑의 줄로 저희를 이끌었고” (호 11:4) 이 간단한 말씀에서 우리는 세 가지를 주목해야 됩니다. 
  
첫째, 하나님께서 당신의 택한 백성을 하나님께로 이끌어 주시는 것입니다(draw). 하나님께서 당신의 택한 백성을 끌어오시는 것입니다. 왜 하나님께서 이끌어 주시는 것이 필요하냐면 택한 백성이라 해도 그 본질상 하나님께로 오려하지 아니하고 멀어지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이끌지 아니하면 아무라도 내게 올 수 없으니 오는 그를 내가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리라 선지자의 글에 저희가 다 하나님의 가르치심을 받으리라 기록되었은즉 아버지께 듣고 배운 사람마다 내게로 오느니라” (요 6:44-45) 

여러분 어떤 사람이라도 자기의 자유 의지와 능력과 판단으로는 예수님께로 올 수 없습니다. 그런데 아버지께서 이끌어 주시면 예수님께로 나올 수 있는 것입니다. 아버지 하나님께서 택한 백성을 내적으로 가르치시고 부르셔서 예수님께로 오게 하는 것이 바로 이끌어 주시는 사랑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을 이끌어 주실 때 무엇을 사용하시느냐? 
  
둘째, “사람의 줄”(cords of man)을 사용하십니다. 사람들을 도구로 사용해서 이끌어 주신다는 말입니다. 선지자나 설교자나 전도자들을 통해 이끌어 주시는 것입니다. 스펄젼 목사님은 하나님께서 택한 백성을 이끌어 주시는 7가지 인간적인 도구를 말씀했습니다. 첫째, 불신자들은 참된 성도들의 행복한 삶(happiness)을 보고 예수님께 나온다는 것입니다. 성도들이 행복하게 사는 것을 보고 저 사람이 예수님을 믿으니까 행복하구나 해서 나도 행복해지려면 예수님을 믿어야겠다고 생각하고 믿는다는 것입니다. 둘째, 하나님의 백성이 누리는 안정된 삶(security)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우리는 언제 죽어도 천국에 간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두려움도 없고 영혼이 안정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불신자들은 영혼에 닻이 없고 요동하는 물결 같이 불안한 것입니다.

셋째, 성도들의 거룩한 삶(holiness)을 보고 예수님께 나옵니다. 불신자들이 서로 비교해보는 겁니다. 예수님을 믿는 집에 가면 빛이 있는데 예수님을 믿지 않는 집에 가면 늘 어둡고 부부싸움만 하는 것을 보고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입니다. 넷째, 성도들이 베풀어준 자비(mercy)에 감사해서 이끌림을 받습니다. 

다섯째, 기독교가 지니는 합리성(reasonableness)에 이끌립니다. 기독교는 합리적인 종교입니다. 여러분 생각해보십시오.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신 것이 합리적입니까? 천지가 우연히 생겼다는 것이 합리적입니까? 사람을 하나님께서 지으셨다는 것이 합리적입니까? 원숭이가 꼬리가 떨어지고 갑자기 사람이 되었다는 것이 합리적입니까? 제가 다른 종교를 비판하는 것이 아닙니다. 과연 무엇이 합리적인가를 말하는 것입니다. 저는 아무리 생각을 해봐도 진화론은 도무지 합리적이지 않습니다. 원숭이는 지금 봐도 원숭이고 몇 천 년이 지나가도 여전히 원숭이일 것입니다. 저는 성경을 읽고 연구할수록 성경만큼 합리적인 책은 없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리고 

여섯째,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사 내 죗값을 갚으셨다는 큰 사랑(love)과 일곱째, 성도들이 받는 축복과 특권(privileges)에 이끌리는 것입니다. 저 사람은 예수님을 믿더니 죽을병에 걸렸다 살아났다는 이야기나 그렇게 악하게 살던 사람이 예수님을 믿더니 착하게 산다는 이야기를 듣고 이끌리는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택한 백성을 사람의 줄로 이끌어 주십니다. 하나님께서 쓰시는 사람의 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일곱째, “사랑의 줄”(band of love)을 사용하십니다.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강압적인 방법으로 예수님을 믿게 하지 않습니다. 여러분 가운데 누가 때린다고 예수님을 믿은 분이 계십니까? 혹은 교회 안 나오면 누가 칼로 찌른다고 해서 교회 나오는 분이 계십니까? 기독교는 그런 방식으로 사람의 영혼을 구원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이슬람교는 다릅니다. 이슬람교는 처음부터 무함마드가 한 손에는 칼을 쥐고 한 손에는 코란을 들고 믿지 않으면 칼을 받으라고 해서 전파된 것입니다. 

여러분 성령께서는 그렇게 칼로 예수님을 믿으라고 하지 않습니다. 택한 백성의 영혼 안에 무엇이 잘못되었고 무엇이 옳은가를 성경을 통해서 깨우쳐 주시는 방식으로 이끌어 주시는 것입니다. “나는 선한 목자라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거니와” (요 10:11) 그러니까 예수님께서는 목자로서 목숨을 버리고 희생하시며 우리를 건지시는 방식으로 이끌어 주시는 것입니다. 

여러분 “강압의 방법이 이기느냐? 사랑의 방법이 이기느냐?” 하는 문제는 이솝의 우화에도 나오지 않습니까? 바람과 태양이 지나가는 나그네의 옷을 벗기는 시합을 합니다. 그런데 바람이 세게 부니까 나그네가 옷을 더 껴입고 태양이 비치니까 나그네가 옷을 벗더라는 예화입니다. 태양의 방법이 이기는 것입니다. 

B.C. 480년경 근동지방을 제패한 나라는 페르시아입니다. 페르시아의 다리우스 왕은 근동을 모두 제패했는데 우리가 헬라라고 부르는 그리스만 정복하지 못했습니다. 다리우스 왕 때 한번 침략을 했다가 그리스에게 패했었습니다. 그때 군인 한 명이 42.195Km를 달려가 헬라의 승리 소식을 전한 것이 마라톤의 기원이 된 것입니다. 

그런데 B.C. 480년에 페르시아 왕 크세르크세스는 우리말 성경에는 아하수에로라고 되어 있는데 이 사람이 재차 침공을 했습니다. 어마어마한 해군을 이끌고 헬라를 점령하기 위해 침공했습니다. 숫자적으로 헬라의 해군이 열세였으나 헬라 사람들은 페르시아의 배들을 살라미스 해협이라는 좁은 해협으로 끌어들였습니다. 거기서 페르시아의 배들이 다 박살나고 헬라의 해군이 승리를 거두게 됩니다. 이것이 그 유명한 살라미스 해전입니다. 

그런데 살라미스 해전을 연구한 사람들은 살라미스 해전 승패의 원인을 두 나라 군인들의 정신상태를 분석하여 찾아냈습니다. 페르시아의 군인들은 돈 주고 외국에서 산 용병들이었습니다. 대부분이 용병이니까 월급을 받기 위해 할 수 없이 싸운 것입니다. 하지만 헬라의 군인들은 나라를 사랑하는 마음 하나로 전투에 임했습니다. 그래서 결국 헬라가 승리한 것입니다. 사랑의 방법이 무력의 방법을 이기는 것입니다. 


Ⅲ. 하나님의 사랑의 결과는 무엇인가? 

호세아서 11장에서 하나님 사랑의 세 가지 결과를 찾을 수 있습니다. “내가 사람의 줄 곧 사랑의 줄로 저희를 이끌었고 저희에게 대하여 그 목에서 멍에를 벗기는 자 같이 되었으며 저희 앞에서 먹을 것을 두었었노라” (호 11:4) 
  
첫째, 그 목에서 멍에를 벗겨주십니다. 사람들은 태어나면 멍에를 지고 있습니다. 죗값으로 말미암아 지옥에 갈 수밖에 없는 지옥의 끈이 매어있는 것입니다. 누구나 죽음을 두려워하는 두려움의 멍에가 있고 죽음 이후의 세계에 대한 무지의 멍에를 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죄를 지었기 때문에 이 죄를 빌미로 해서 악령들이 우리 영혼 안에 자리 잡고 있습니다. 그래서 술 먹으라고 시키면 술 먹고 바람 피우라고 시키면 바람 피우고 도적질하라고 시키면 도적질하는 것입니다. 이 멍에들을 스스로의 힘으로 벗을 수 있느냐? 그럴 수 없습니다. 스스로의 힘으로 벗을 수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사랑만이 이 멍에를 벗겨주실 수 있는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둘째, 저희 앞에 먹을 것을 두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사람들에게 먹을 복음의 양식, 진리의 양식을 주셔서 마음껏 먹게 하시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기록되었으되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 하였느니라 하시니” (마 4:4) 우리 몸은 떡을 먹어야 삽니다. 

그러나 영혼은 하나님 말씀을 먹고 사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으면서도 왠지 쓸쓸하고 힘이 없고 좌절이 되며 용기가 없는 사람은 영혼이 배고파서 그런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먹을 것을 주셨는데도 게을러서 안 먹으니까 영혼이 배고프고 힘이 없는 것입니다. 공연히 쓸쓸하다고 바닷가를 찾아가거나 한강에 간다고 해서 영혼에 힘이 생기는 것이 아닙니다. 영혼의 힘은 골방에 들어가서 성경을 읽다 보면 하나님께서 힘과 능력을 주시는 것입니다. 
  
셋째, 저희로 각 집에 머물게 하십니다. 여러분 사람이 먹기만 하면 됩니까? 날이 저물면 집에 가야 됩니다. 집이 없는 사람은 날이 추우면 얼마나 괴롭겠습니까? 하나님께서는 택한 백성을 불러 지상에서는 교회에 머물게 하시고 천상에서는 천국에 머물게 하십니다. 두 어린아이가 마당에서 놀고 있다고 생각해보십시오. 딱지치기도 하고 구슬치기도 하면서 놀고 있는데 날이 저물고 추워집니다. 그런데 한 아이는 엄마가 저녁밥 해놨다면서 부르는데 한 아이는 부르는 사람이 없습니다. 그러면 딱지를 잔뜩 땄다고 해도 돌아갈 집이 없으면 얼어 죽지 않겠습니까? 여러분 우리 인생은 마당에서 노는 아이들과 같습니다. 딱지를 잔뜩 땄다고 좋아할 필요가 없습니다. 날이 저물면 아버지께 “내 사랑하는 아들아, 내가 너를 위해 집을 마련했으니까 오거라.” 이런 말을 들어야 행복한 것입니다.  


결론 

링컨 대통령이 1863년에 노예해방을 선언했습니다. 노예해방을 하기 전 링컨 대통령이 노예시장에 나가보니 사람들이 노예들을 짐승취급하며 팔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중 흑인 여자 한 명을 보고 링컨 대통령이 샀습니다. 그리고 그 여인에게 너는 이제 자유인이니 네가 가고 싶은 대로 마음대로 가라고 했습니다. 

그러자 그 여인이 링컨에게 물어보는 것입니다. “이제부터는 내가 하고 싶은 말을 마음대로 해도 됩니까?” 그러니까 링컨이 “그렇다.”라고 대답했습니다. “이제부터는 내가 보고 싶은 것을 마음대로 보아도 됩니까?” 링컨이 또 “그렇다.”라고 대답했습니다. “이제부터는 내가 먹고 싶은 것을 먹어도 됩니까?” 링컨은 여인의 질문에 계속해서 그렇다고 대답했습니다. 

그러자 그 여인이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대통령님 그렇다면 이제부터는 내가 당신을 섬기고 내 평생 당신을 수종하며 살겠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왜 하나님을 사랑하고 섬기며 살아야 합니까? 두려움 때문에 그렇습니까? 아니면 누가 협박했기 때문입니까? 아니면 목사가 감언이설로 속였기 때문입니까? 아닙니다. 하나님의 측량할 수 없는 사랑 때문입니다. 반역하는 기질을 가진 나를 사람의 줄과 사랑의 줄로 이끌어서 나의 멍에를 벗기시고 내게 먹을 것을 주시고 내가 돌아갈 천국을 예비하신 그 하나님의 사랑을 받았기 때문에 하나님을 사랑해야 되겠다는 마음이 드는 것이 우리 성도의 마땅한 마음인 줄로 믿습니다. 

고린도후서 5장 14절에 바울이 그리스도를 섬기는 동기를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시는도다.” 여러분 마음속에 이런 사랑의 강권이 있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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