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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다른 눈으로 보다 (마 5:17-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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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눈으로 보다 (마 5:17-20)


[내가 율법이나 예언자들의 말을 폐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아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라 완성하러 왔다. 내가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은 일점 일획도 없어지지 않고 다 이루어질 것이다. 누구든지 이 계명 가운데 가장 작은 것 하나라도 폐지하고 사람들을 그렇게 가르치는 사람은, 하늘 나라에서 가장 작은 사람이라고 일컬음을 받을 것이요, 또 누구든지 이 계명을 지키며 가르치는 사람은, 하늘 나라에서 큰 사람이라고 일컬음을 받을 것이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의 의로운 행실이 율법학자들과 바리새파 사람들의 의로운 행실보다 낫지 않으면, 너희는 하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

• 북돋는 식사

사순절 둘째 주일이 되었습니다. ‘그 길’을 따라 잘 걷고 계십니까? 사람 사는 땅에 무슨 일이 일어나든 때 되면 무심히 돋아나는 새싹들을 보면서 생명의 신비에 대해 생각하지 않을 수 없는 나날입니다. 일본의 지진과 해일, 그리고 연이은 방사능의 공포로 우리 눈길은 일본 열도에 쏠려 있습니다. 그런데 참 놀랍습니다. 인간이 겪는 압도적인 고통은 사람들을 가르는 여러 가지 장벽을 일시에 무너뜨리기도 합니다. 나라와 인종, 피부색과 종교는 이미 문제가 아닙니다. 

그들이 오늘 겪는 고통은 내일 우리가 겪을 고통일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고통은 인류의 마음을 깊은 곳에서 움직이고 결속시키는 힘이 되기도 합니다. 일본인들이 겪는 참상을 보며 전 세계 사람들이 마음 아파하면서 도울 길을 모색하고 있습니다. 그런 참상의 원인을 헤아릴 수 없지만, 그 참상을 허비해서는 안 됩니다. 그 참상 앞에서 인류는 조금 더 겸손해져야 하고, 인류애를 향해 발돋움하는 계기로 삼아야 합니다. 

살다 보면 우리도 불행을 겪을 때가 있습니다. 감정적으로 상처 입을 때도 있고, 사랑하는 사람을 잃는 슬픔을 맛보거나, 믿었던 사람에게 배신당하거나, 거절을 당해 내적인 쓸쓸함에 압도될 때도 있습니다. 어떤 말로도 그들을 위로할 길이 없습니다. 어느 랍비의 이야기가 생각납니다. 그는 오랫동안 바라고 꿈꾸던 일이 어그러지자 큰 상실감이 밀려왔습니다. 그런 상황을 직감적으로 알아차린 한 친구가 그들 부부를 좋은 식당으로 안내했습니다. 그 일에 대해서는 서로 언급을 자제했습니다. 

하지만 친구의 따뜻한 마음 하나만으로도 마음은 이미 평화로워졌습니다. 친구가 대접한 음식은 애정 어린 돌봄의 상징이었고, 성찬이었습니다. 유대교에는 ‘북돋는 식사’(meal of replenishment)라는 아름다운 전통이 있습니다. 장례식을 마치고 집에 돌아올 유족들을 위해 친구들이 식탁을 차리는 것입니다. 그들이 대접하는 것은 베이글과 커피만이 아닙니다. 누군가 내 곁에 있다는 사실을 일깨워줌으로 살아갈 새로운 용기를 주는 것입니다. 

몇 해 전 재독한인교회협의회에 초청받아 갔을 때, 저는 헤센에서 열린 집회를 마치고는 루터의 종교 개혁지를 둘러보고 아주 늦은 시간 뒤셀도르프에 도착했습니다. 다음 날 함께 모임에 참석했던 어느 교민을 만났는데 그는 전날 밤 집에 도착했을 때 느꼈던 감동을 전해주었습니다. 늦은 시각 집에 도착하자, 식탁에는 정성스런 식사가 준비되어 있더랍니다. 옆집에 사는 독일인 부부의 호의였습니다. 두 집은 집을 비울 때마다 열쇠를 맡기고는 화분에 물도 주고, 우편물도 챙겨주고 하며 잘 지내는 사이였습니다. 모처럼의 긴 여행에서 돌아올 한국인 친구를 위해 그들 부부가 정성껏 식탁을 차려놓았던 것입니다. 저는 그 두 가정을 두르고 있는 사랑의 끈, 우정의 끈을 볼 수 있었습니다. 

• 새로운 눈으로 보라

제가 이런 이야기를 늘어놓는 까닭은 지금 이 시대에 주님께서 우리를 통해 하시고자 하는 일이 무엇일까를 말하기 위해서입니다. ‘이런 불행이 왜 내게 혹은 왜 그들에게’라는 질문에는 뚜렷한 답이 없습니다. 그 까닭은 알 수 없지만 불행을 겪는 이들 곁에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분명합니다. 그들을 위해 식탁을 차리는 것입니다. 그 식탁 차림이 모금일 수도 있고, 자원봉사일 수도 있고, 응원의 메시지를 보내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그것은 당신들이 혼자가 아니라는 사실을 일깨워주는 일입니다. 홀로는 넘어질 수밖에 없지만 함께라면 일어설 수 있습니다. 믿는다는 것은 주님이 하시고자 하는 일을 위해 우리 자신을 봉헌하는 것입니다. 

사순절 순례 여행을 하면서 저는 예수님의 마음을 거울로 삼아 저 자신의 마음을 비춰보고 있습니다. 저는 예수님의 눈으로 세상을 보고, 예수님의 손으로 세상을 어루만지고, 예수님의 심정으로 이웃을 대하는 것이 믿음이라고 믿습니다. 예수님은 “나더러 ‘주님, 주님’ 하는 사람이라고 해서, 다 하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행하는 사람이라야 들어간다”(마7:21)고 말씀하셨습니다. 믿는다는 것은 예수의 몸이 되는 것입니다. 

너무나 많은 이들이 예수님을 믿음의 대상으로 객관화시켜 놓고 있습니다. 주님은 지금 우리와 더불어 아름다운 세상을 이루실 꿈을 꾸고 계신 데, 우리는 주님을 ‘저 곳’에 모셔놓고 자꾸 경배만 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프리드리히 니체가 예수야말로 역사상 유일한 기독교인이었다고 말한 것도 비슷한 뜻일 겁니다. 저는 이 모든 착종은 성경을 제대로 읽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토라의 백성, 곧 하나님의 말씀을 받은 백성이라는 사실을 무척 자랑스럽게 생각했습니다. 기독교인들은 율법의 가치를 폄하하는 경향이 있지만 율법은 본래 좋은 것입니다. 율법은 사람을 살리고, 자유롭게 하고, 더불어 살게 하기 위해 주신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하지만 예수님 당시의 율법은 오히려 사람을 죽이고, 얽어매고, 갈라놓는 도구로 전락했습니다. 

율법 전문가들은 율법 조문을 금과옥조로 여기면서 그 율법 조문을 근거로 사람을 의인과 죄인으로 나누고, 거룩한 것과 속된 것을 나눴습니다. 주님은 하나님께서 율법을 주신 본래의 의도를 누구보다 깊이 통찰하고 계셨습니다. 그래서 만나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뜻을 자유롭게 풀어 설명하셨습니다. 그 자유로움이 율법 전문가들에게는 매우 불경하게 보였습니다. 예수는 율법을 도외시하는 사람처럼 보였던 것입니다. 

조선 시대의 선비들이 가슴에 명심하고 살던 말이 하나 있습니다. ‘술이부작述而不作’이라는 말입니다. 그것은 성인의 말을 풀어 설명하는 일은 할 수 있지만, 스스로 지어내지는 않는다는 뜻입니다. 사서삼경을 비롯한 경전을 인용하는 것이 선비들이 해야 할 일이었습니다. 뭔가 이야기를 지어내는 사람들은 선비답지 못한 사람으로 여겨졌습니다. 조선 최대의 문장가라고 할 수 있는 연암 박지원(1737-1805)은 1792년에 정조에게 소환됩니다. 당시의 사대부들이 청나라에서 유입된 패관잡서에 관심을 기울이면서 그들의 글쓰기가 述而不作의 원리를 어기는 것은 전적으로 연암 박지원의 영향 때문이라는 정조의 판단 때문이었습니다. 정조는 연암에게 반성문을 쓰게 하고, 타락한 문풍을 바로잡고 고문을 부흥시킨다는 명분으로 문체반정文體反正을 도모합니다. 조선판 율법주의가 자유로운 영혼을 질식시킨 것입니다.

바울 사도는 “문자는 사람을 죽이고 영은 사람을 살립니다”(고후3:6c)라고 말했습니다. 문자에 얽매이는 이들은 문자의 이면을 살피지 못합니다. 예수님은 율법을 폐하러 오신 분이 아닙니다. 주님은 율법 속에 담겨 있는 속뜻을 사람들에게 깨우쳐 주기를 원하셨습니다. 오늘 본문으로 택하여 읽지는 않았지만 마태복음5장 21-48절 사이에는 여섯 개의 율법 조문에 대한 예수님의 해석이 소개되고 있습니다. 그 여섯 가지의 가르침은 모두 “‘~~’ 한 것을 너희가 들었다.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라는 형식 속에 담겨 있습니다. 몇 가지만 살펴보겠습니다. 

• 생명을 북돋우라

먼저 예수님은 살인하지 말라는 계명을 새롭게 해석하십니다. 사람을 죽이지 않은 것으로는 이 계명을 옳게 지켰다고 볼 수 없다는 것입니다. 자기 형제자매에게 성내는 사람, 그들을 보고 얼간이 혹은 바보라고 말하는 사람은 모두 잠재적인 살인자들이라는 것입니다. 세상에 절대적인 악인은 없습니다. 저는 제 아무리 못된 범죄자라 해도 속에는 여리고 착한 것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다만 그 여리고 착한 성품이 사람들에 의해 호명되지 못했거나, 그들의 삶의 상황이 그들 속에 있는 나쁜 성향을 이끌어낸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렇게 본다면 그들은 참 불쌍한 사람들입니다.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았다는 고백은 감격스럽지만, 도무지 사람같지 않은 사람들을 볼 때면 그 표현이 무색해지곤 합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하여 그들에게는 하나님의 형상이 없다고 말할 수도 없습니다.

사실 우리도 어떤 사람을 보고 화를 내고, 무시하고, 모욕할 때가 있습니다. 그 사람이 그런 대접을 받는 것은 당연하다고 합리화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주님의 생각은 좀 다른 것 같습니다. 주님은 ‘살인하지 말라’는 계명을 제대로 지키기 위해서는 우리 속에 자비심을 길러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의 자비하심으로 치유되지 않으면 우리는 다른 사람을 너그럽게 대할 수가 없습니다. 

어떤 사람에 대해 이런저런 판단을 잘 내리고, 남의 허물을 잘 들추는 사람은 유난히 도덕적이거나 신령한 사람이 아닙니다. 오히려 자기 속에 있는 더 짙은 그림자를 숨기지 위해 그럴 때가 많습니다. ‘~뀐 놈이 성낸다’는 말도 있지 않습니까? 평범한 말처럼 들리지만 인간의 심리를 꿰뚫는 말입니다. 주님은 살인하지 말라는 계명 속에서 사람들이 온전한 생명을 누리며 살도록 도우라는 속뜻을 헤아리고 계십니다. 

예수님은 간음하지 말라는 계명도 새롭게 해석하십니다. 간음하지 말라는 말은 욕망이 인도하는 대로 살다가 결혼관계를 파탄에 이르게 하는 일이 없도록 하라는 말입니다. 예수님은 이 말씀을 매우 급진적으로 해석하여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는 사람은 이미 마음으로 그 여자를 범하였다’(28)고 말씀하십니다. 아름다운 여성 혹은 멋진 남성을 보고 ‘아, 참 좋다’ 하는 것도 음욕이라면 우리는 거리를 돌아다녀도 안 되고, T.V나 영화를 보아도 안 됩니다. 

주님이 금하신 것은 자기 욕망 충족을 위해 다른 사람을 도구로 삼는 태도입니다. 상대를 수단으로 삼는 것은 하나님의 형상을 모독하는 일입니다. 이스라엘의 지혜자는 “가난한 사람을 억압하는 것은 그를 지으신 분을 모욕하는 것”(잠14:31, 17:5)이라고 가르칩니다. 익히 아는 말씀이지만 이 말씀을 명심하고 사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요? 우리가 이 말씀을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품고 산다면 우리도 세상도 변할 겁니다. 

• 평화를 추구하라

예수님은 거짓 맹세하지 말라는 계명도 아주 급진적으로 재해석하셨습니다. 도무지 맹세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맹세하는 이들은 자기 말의 진정성을 입증하기 위해 뭔가 큰 것을 동원합니다. 예수님은 하늘, 땅, 예루살렘, 자기 머리를 예로 드셨습니다. 주님은 말은 단순해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예’ 할 때에는 ‘예’라는 말만 하고, ‘아니오’ 할 때에는 ‘아니오’라는 말만 하여라. 이보다 지나치는 것은 악에서 나오는 것이다.”(37) 자기의 진정성을 입증하기 위해 많은 말을 하는 사람들은 믿음직스럽지 않습니다. 거짓된 말일수록 장황합니다. 

우리는 이전에 청문회 때마다 증인으로 나온 기독교인들이 하나님께 맹세한다고 말하는 것을 듣곤 했습니다. 어떤 분은 죄가 입증되어 감옥에 들어가서도 성경을 읽으며 억울함을 달랜다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우리가 자꾸 맹세하거나 말을 덧붙일 때는 언제일까요? 표리부동하다고 의심받을 때입니다. 없는 것을 있는 척 하려 할 때입니다. 겉꾸민 모습으로 살아갈 때입니다. 남을 설득해 자기 뜻을 관철시키려 할 때입니다. 말이 살아야 나라가 삽니다. 누가 무슨 말을 해도 곧이들리지 않는 사회는 위험한 사회입니다. 

예수님은 원수를 미워하는 것을 당연시하는 사람들에게 “너희 원수를 사랑하고, 너희를 박해하는 사람을 위하여 기도하여라”(44)라고 말씀하십니다. 납득하기도 어렵고 받아들이기도 어려운 말씀입니다. 그렇다고 하여 괄호를 칠 수도 없고, 지워버릴 수도 없습니다. 이것은 애당초에 불가능한 요구이니 받아들일 수 없다고 말할 수도 없습니다. 그런데 이런 요구가 전례없는 것은 아닙니다. 예레미야는 바벨론에 포로가 잡혀간 동족들에게 편지를 보내, 그곳에서 금방 풀려나리라는 헛된 기대를 갖지 말라고 말하면서, 눈물과 탄식과 원망 속에서 살지 말고 그 땅에서 할 수 있는 일을 하라고 권합니다. 

“너희는 그곳에 집을 짓고 정착하여라. 과수원도 만들고 그 열매도 따 먹어라. 너희는 장가를 들어서 아들딸을 낳고, 너희 아들들도 장가를 보내고 너희 딸들도 시집을 보내어, 그들도 아들딸을 낳도록 하여라. 너희가 그 곳에서 번성하여, 줄어들지 않게 하여라.”(렘29:5-6)

아무리 눈물겹더라도 삶은 계속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원치 않는 땅이라 해도 그곳에서 살아남는 것이 무엇보다도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첫 사람에게 주신 생육하고 번성하라는 명령이 여기서도 반복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다음이 문제입니다. 

“또 너희는, 내가 사로잡혀 가게 한 그 성읍이 평안을 누리도록 노력하고, 그 성읍이 번영하도록 나 주에게 기도하여라. 그 성읍이 평안해야, 너희도 평안할 것이기 때문이다.”(렘29:7)

이건 정말 포로민들로서는 받아들이기 어려운 권고였을 겁니다. 원수들을 위해 기도하라니요. 그 성읍이 평안을 누리도록 노력하라니요. 민족주의적 감정을 건드리는 말이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예레미야는 그 상황에서 이스라엘이 살 길은 그것뿐임을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너를 살리는 것이 내가 사는 길입니다. 그것은 생태계의 신비가 보여주는 진실이기도 합니다. 다른 이들을 잠재적 적으로 여기는 한 평화는 없습니다. 우리는 우리에게 반감을 지닌 사람, 우리를 괴롭히는 사람과 함께 사는 법을 익혀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그들 속에 있는 선의 씨앗에 눈길을 주어야 합니다. 예수님으로부터 시작되어 간디와 마틴 루터 킹 목사를 통해 꽃을 피운 비폭력 정신의 뿌리가 바로 이것입니다.

예수님은 세상을 이원론적으로 가르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에게는 남이 없습니다. 인류는 하나님 안에서 한 가족입니다. 주님은 “유대 사람과 이방 사람 사이를 가르는 담을 자기 몸으로 허무셔서, 원수 된 것을 없애시고…이 둘을 자기 안에서 하나의 새 사람으로 만들어서 평화를 이루시고, 원수 된 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시고 이 둘을 한 몸으로 만드셔서, 하나님과 화해시키셨습니다.”(엡2:14-16) 우리 속에 예수님의 마음이 들어올 때라야 우리는 서로에 대한 의구심을 버리고 하나가 되는 기쁨을 맛볼 수 있습니다. 곤경에 처한 사람 곁에 머물고, 그들을 위해 상을 차리는 마음, 바로 이것이 사순절 순례 길에서 우리가 되찾아야 할 보물입니다. 이제 세상에 나가 생명과 평화의 일꾼으로 살아가십시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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