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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작은 여우를 잡아라(4) (아 2;1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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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여우를 잡아라(4) (아 2;10-17)


일본에 강도 9.0의 대지진과 쓰나미로 인해 일본 동부권이 거의 초토화 되다 시피 했습니다. 놀라운 것은 그런 참혹한 현실 앞에서도 크게 동요하지 않고 질서를 지키며 대처하는 일본 사람들의 자제력과 인내심입니다. 잦은 지진으로 인해 훈련이 되었다고는 하지만 가족과 삶의 터전을 송두리째 잃어버린 가운데서도 그런 평정함을 유지할 수 있다는 것은 놀라운 힘입니다. 영국의 어느 일간지는 ‘인간 정신의 진화’라고 표현했습니다. 

그런 일본 사람들이 조금씩 동요하기 시작한 것은 원자력 발전소가 연쇄적으로 폭발하면서부터입니다. 원자력 발전소의 폭발로 인해 방사능이 유출되어 방사능 피폭의 위험이 있다는 소식을 접하면서부터 평정함이 흔들렸습니다. 사재기가 일어나고, 부분적이지만 생계형 범죄와 창고를 강탈하는 모습도 보였습니다. 

대지진과 쓰나미로 무너진 참혹한 현실도 두렵지만 그렇게 눈에 보이는 것에 의한 두려움은 그래도 극복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냄새도 없고, 눈에 보이지도 않는 방사능에 대한 두려움은 극복하지 못하고 공황상태를 맞게 되었습니다. 눈에 보이는 두려움보다 눈에 보이지 않는 막연한 두려움은 사람들을 더욱 불안한 공황상태로 만들었습니다. 

최초의 인간인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따 먹지 말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고 선악과를 따먹었습니다. 선악과를 따 먹은 후에 인간이 느낀 최초의 감정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두려움이었습니다. 창세기 3장 10절에 보면 하나님께서 선악과를 떠먹고 숨어 버린 아담을 향해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고 물으십니다. 그때 아담이 ‘내가 동산에서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내가 벗었으므로 두려워하여 숨었나이다’라고 대답합니다. 죄를 지은 인간이 처음으로 느낀 감정은 ‘두려움’이었습니다. 

두려움은 사람들의 평안과 행복, 감사와 희망을 깨는 가장 무서운 감정적 요소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일종의 두려움이 있습니다. 새로운 사업을 시작하는 순간은 희망과 기대감에 부풀어 있기도 하지만 한편으로 실패하면 어떻게 하나 하는 두려움이 있습니다. 젊은 남녀들이 결혼을 하게 될 때에 사랑과 희망에 부풀어 있기도 하지만 또한 결혼에 실패하면 어떻게 하나 하는 두려움도 있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미래에 대한 두려움, 실패에 대한 두려움, 비난에 대한 두려움, 외로움에 대한 두려움, 죽음에 대한 두려움 등에 직면하며 살고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러한 두려움에 우리들이 어떻게 반응하느냐에 따라 인생이 달라집니다. 

이런 우화가 있습니다. 어느 날 알렉산드리아로 향하는 마차 위에 할머니 한 분이 올라탔습니다. 마부가 물었습니다. ‘이 마차는 알렉산드리아로 가는데 누구십니까?’ ‘나는 콜레라요’ ‘그렇다면 마차에서 내리십시오. 나는 당신을 태워 갈 수 없습니다’ ‘여보 젊은이 내가 알렉산드리아로 가서 꼭 세 사람만 죽게 할테니 제발 나를 태워다 주시오’ ‘세 사람 이상 죽게 되면 어떻게 하겠소?’ ‘그 때는 이 칼로 나를 죽이시오’ 마부는 할머니가 주는 칼을 받았습니다. 

할머니는 마차가 성에 도착하자마자 마차에서 뛰어 내렸습니다. 얼마 후 알렉산드리아 시에 콜레라가 유행하여 수많은 사람이 죽어갔습니다. 단 세 사람만 죽게 하겠다는 약속을 한 할머니가 많은 사람을 죽이자 마부는 화가 나서 칼을 들고 할머니를 찾아 나섰습니다. 얼마 후 마부가 성문에서 할머니를 만나 죽이려 하자 할머니는 ‘왜 나를 죽이려 하오?’ 라고 물었습니다. 마부는 화가 나서 버럭 소리쳤습니다. ‘당신은 내게 세 사람만 죽이겠다고 하지 않았소? 그런데 지금 저렇게 무수한 사람이 죽었으니 약속대로 당신을 죽이겠소‘’그러자 할머니는 대답했습니다. ‘여보시오. 내가 죽인 사람은 단지 세 사람에 지나지 않았소. 나머지는 콜레라란 말을 듣고 놀라서 두려워하다가 죽은 거요’ 

두려움이라는 것은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사람을 무기력하게 만들고 절망하게 만들며 결국은 폐인으로, 죽음으로 내몰고 가는 사단의 간교하고 무서운 도구입니다. 아담이 선악과를 따먹었을 때 사단이 최초로 뿌려 놓은 감정이 두려움이었습니다. 그것의 결국은 죽음입니다. 

성경을 읽어보면 ‘두려워 말라’는 말이 수 없이 반복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끌고 광야를 지나면서 어려움을 당할 때마다 ‘두려워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스라엘의 지도자 모세가 죽은 후에 모세의 뒤를 이어 지도자가 된 여호수아를 향해 ‘내가 네게 명령한 것이 아니냐 강하고 담대하라 두려워하지 말며 놀라지 말라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너와 함께 하느리라’ 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예수님께서 탄생하실 때 천사를 통해 마리아와 요셉에게 임하여 아기 예수님에 대한 잉태를 알리면서 두려워하는 마리아와 요셉에게 두려워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서 죽으신 후에 제자들이 두려워 떨고 있을 때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나타나셔서 두려워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백성에서 수없이 많이 두려워하지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과거 공산권이 무너지기 전 동구에 집중적으로 복음을 전하던 분 중에 리챠드 범브랜드라는 목사님이 계셨습니다. 그가 성경을 반입하다가 체포되어 감옥에 수감된 일이 있었습니다. 그는 온갖 고문을 당하며 고통과 두려움 속에 있었습니다. 그는 어느 날 성경을 읽고 있었는데 ‘두려워 말라’는 말씀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습니다. 

범브란드 목사님은 성경을 읽으면서 ‘두려워 마라’는 말씀에 동그라미를 치며 숫자를 세기 시작했습니다. 성경을 읽으면 ‘두려워 말라’는 말씀에 동그라미를 치고 숫자를 세어보니 365번이 나오더라는 것입니다. 그 분은 365일 하루에 한 번씩 하나님은 자신에게 ‘두려워 말라’고 말씀하시는구나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는 공산치하에서 온갖 고문과 협박을 당하는 가운데서도 ‘두려워 말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찾아 읽으며 희망과 용기를 갖게 되고 결국 감옥에서 살아 남아 온 세계를 다니며 복음을 증거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우리들이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 크고 작은 일들을 수 없이 겪으면서 삽니다. 그 때마다 사단이 우리들에게 주는 마음은 두려워하는 마음과 염려하는 마음입니다. 여러 차례 말씀을 드렸습니다만 ‘두려움과 염려’라는 단어는 ‘마음이 여러 갈래로 나눠지다. 마음이 분산되다. 갈라지다’는 뜻입니다. 두려움이란 마음이 하나로 집중되지 못하고 여러 갈래로 나뉘어져 힘을 잃게 하여 무기력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이것은 사단이 원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하나님은 하나님의 백성들을 향해 두려워하지 말고, 염려하지 말고 믿음을 가지고 담대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성경에 다윗이라는 왕이 나옵니다. 그는 이스라엘 왕 중에 가장 위대한 왕이었습니다. 그 다윗 왕의 삶은 결코 평탄한 삶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이스라엘의 위대한 왕이었지만 누구보다도 험난한 삶을 살았습니다. 사울 왕이 다윗을 시기하여 죽이려고 했습니다. 그는 다윗을 죽이고자 온갖 수단과 방법을 동원했습니다. 다윗은 사울의 칼을 피해 십여 년 동안 광야에서 헤매며 도망자의 삶을 살았습니다. 다윗의 삶은 비참한 삶 그 자체였습니다. 그러나 다윗이 그 고난과 역경의 과정을 이기고 승리할 수 있었던 것은 자신의 앞에 놓여 있는 어려운 상황에서 절망하며 두려워하는 마음이 아니라 하나님을 향한 담대하고 강한 믿음의 마음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다윗의 믿음을 읽을 수 있는 곳이 시편에 많이 나옵니다. 그 가운데 시편 27편의 말씀을 한 번 찾아서 읽어보겠습니다. 시편 27편 1-7절의 말씀을 한 번 찾아서 읽어보겠습니다. 구약 820면입니다. ‘여호와는 나의 빛이요 나의 구원이시니 내가 누구를 두려워하리요 여호와는 내 생명의 능력이시니 내가 누구를 무서워하리요 악인들이 내 살을 먹으려고 내게로 왔으나 나의 대적들, 나의 원수들인 그들은 실족하여 넘어졌도다 군대가 나를 대적하여 진 칠찌라도 내 마음이 두렵지 아니하며 전쟁이 일어나 나를 치려 할지라도 나는 여전히 태연하리로다 내가 여호와께 바라는 한 가지 일 그것을 구하리니 곧 내가 내 평생에 여호와의 집에 살면서 여호와의 아름다움을 바라보며 그의 성전에서 사모하는 그것이라 여호와께서 환난 날에 나를 그의 초막 속에 비밀히 지키시고 그의 장막 은밀한 곳에 나를 숨기시며 높은 바위 위에 두시리로다 이제 내 머리가 나를 둘러싼 내 원수 위에 들리리니 내가 그의 장막에서 즐거운 제사를 드리겠고 노래하며 여호와를 찬송하리로다’

다윗은 자신이 놓여 있는 고통을 ‘악인들이 내 살을 먹으려고 내게로 왔다’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런 위급한 상황에서도 다윗은 두려워 안절부절 못하는 모습이 아니라 도리어 ‘하나님께서 나의 빛이요 나의 구원이시니 내가 누구를 두려워하리요 여호와는 내 생명의 능력이시니 내가 누구를 무서워하리요. 군대가 나를 대적하여 진 칠지라도 내 마음이 두렵지 아니하며 전쟁이 일어나 나를 치려 할지라도 나는 여전히 태연하리로다’고 노래합니다. ‘여호와께서 환난 날에 나를 그의 초막 속에 비밀히 지키시고 그의 장막 은밀한 곳에 나를 숨기시며 높은 바위 위에 두시리로다’라고 하나님의 도우심과 보호하심을 믿고 노래합니다. 이 고백은 보통 사람으로서는 감히 할 수 없는 고백입니다. 참으로 하나님만 바라보고 신앙하는 믿음의 사람만이 할 수 있는 고백입니다. 

이 세상을 사는 동안 어려움과 위급한 일을 당하지 않고 사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미래에 대한 두려움과 염려함이 없이 사는 사람은 없습니다. 건강에 대한 두려움, 경제적인 두려움, 자녀들의 미래에 대한 두려움, 직장과 사업장에 대한 두려움 등 수 많은 두려움이 우리를 엄습해 옵니다. 문제는 우리들이 그 ‘두려움’이라는 것에 사로잡히기 시작하면 삶의 모든 것이 흔들리고 무너지기 시작한다는 것입니다. 두려움은 두려움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두려움이라는 감정은 다른 사람을 공격하게 만듭니다. 아담이 자신이 가장 사랑했던 하와를 공격했던 것처럼 말입니다. 두려움에 사로잡히면 다른 사람을 탓하게 되고 원망하게 됩니다. 그것은 사랑의 관계를 깨뜨리고 상처와 아픔을 만들어 냅니다. 두려움은 불안을 만들어 내고, 분노를 만들어 냅니다. 두려움은 삶의 모든 평화와 에너지를 흔들어 놓고 파괴시킵니다. 

솔로몬은 오늘 본문에서 꽃이 활짝 핀 포도원의 평화와 사랑을 무너뜨릴 수 있는 작은 여우를 잡으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 주제를 가지고 오늘 네 번째 설교를 하고 있는데 우리 삶의 행복과 평화를 깨뜨릴 수 있는 작은 여우는 바로 ‘두려움’입니다. 두려움은 우리의 행복한 삶의 터전을 송두리째 파헤쳐 놓은 작은 여우입니다. 우리의 행복한 삶의 터전을 불행한 영역으로 만들기를 원하는 ‘두려움’이라는 작은 여우를 하나님을 믿는 확고한 믿음 안에서 잡아냅시다. 우리 삶의 자리에 은밀히 뿌리 내려 불안과 절망감을 심어 놓기를 원하는 ‘두려움’이라는 작은 여우를 믿음 안에서 잡아내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약속하신 복된 삶을 만들어 가는 은혜가 있기를 소원합니다. 

일본의 3·11 대지진 직후 쓰나미가 몰려오는 상황에서 당시 바다에서 조업을 하던 어부들 중에 살아남은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미역 양식을 하던 가시와지키 고토부키씨와 그의 아들, 그리고 자신의 아버지와 조업을 하던 미치시타 다카히토씨입니다. 그들은 조업을 하던 가운데 지진이 느껴지고 배가 크게 흔들리자 순간적으로 쓰나미가 온다는 것을 느끼는 순간 ‘수심이 깊은 바다로 나가면 쓰나미는 높아지지 않는다’는 옛 어른들의 이야기가 떠올라 해변가로 배를 몬 것이 아니라 더 깊은 바다로 배를 몰았습니다. 15분 후에 배가 큰 파도에 의해 높이 솟구쳤다가 아래로 급속히 내려왔지만 그러나 배는 이상이 없었습니다. 10미터나 되는 높은 파도는 해안을 휩쓸고 지나가며 온 마을을 초토화시켰습니다. 쓰나미가 오면 물이 얕은 해안가로 가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더 깊은 바다로 나아갈 때 그 높은 쓰나미로부터 살아남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얕은 믿음의 바다에서는 조그만 두려움의 파도에도 크게 흔들립니다. 모든 것이 힘없이 두려움의 파도에 휩쓸려 내려갑니다. 그러나 깊은 믿음의 바다에서는 10미터가 넘는 커다란 두려움의 파도가 몰려와도 크게 요동치지 않습니다. 깊은 믿음의 바다에서는 아무리 큰 두려움의 파도라 하더라고 위력이 그리 크게 느껴지지 않습니다. 두려움의 파도가 위력을 떨치며 모든 것을 파괴하는 곳은 얕은 믿음의 바다입니다. 

우리 생활을 위협하는 두려움이라는 쓰나미가 몰려 올 때 하나님을 향한 믿음의 닻을 높이 올리고 더 깊은 믿음의 바다로 나아가 두려움의 쓰나미를 극복하고 삶의 자리를 복되게 만드는 큰 믿음의 성도들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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