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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거룩하라 (벧전 1:13-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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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룩하라 (벧전 1:13-25)


로키 산맥 해발 3,000미터 높이에 수목 한계선이 있습니다. 이 지대의 나무들은 매서운 바람으로 인해 곧게 자라지 못합니다. 그래서 "무릎을 꿇고 있는 모습"을 한 채 있어야 합니다. 이 나무는 열악한 조건이지만 생존을 위해 무서운 인내를 하며 지냅니다. 그런데 세계적으로 가장 공명이 잘되는 명품 바이올린은 바로 이 "무릎 꿇고 있는 나무"로 만든다고 합니다. 마찬가지로 아름다운 영혼의 빛을 발하며 인생의 절묘한 선율을 내는 사람은 아무런 고난이 없이 좋은 조건에서 살아온 사람이 아니라 온갖 역경과 아픔을 겪으면서 그 어려움을 이겨낸 사람입니다.

기원후 64년 7월에 네로황제는 신도시를 개발하려는 계획을 세웠는데 시민들이 반대해서 뜻을 이루지 못합니다. 그러던 중에 로마에 큰 불이 나서 시가지 대부분을 태우자 시민들 사이에 “우리가 신도시 개발을 반대해서 네로황제가 불을 일부러 놓았다“라는 소문이 돌기 시작합니다. 그러자 네로황제는 사실은 자기가 불을 놓는 것이 아니라 기독교인들이 그런 것이라고 해서 모든 책임을 기독교인들에게 돌립니다. 

그리고는 기독교인들을 핍박하기 시작하는데 이때 로마 감옥에 갇혀 있던 사도 바울이 순교하게 되고 베드로 역시 십자가에 거꾸로 못 박혀 처형을 당하게 됩니다. 이때 베드로 사도가 체포되기 직전에 많은 환난과 핍박 가운데 고난당하는 성도들을 위로하며 격려하기 위해서 베드로 전 후서를 썼던 것입니다. 그러기에 그는 박해의 어려움 속에서도 장차 믿음의 승리자들이 받게 될 영광스러운 상급을 기억하고 하늘의 소망을 잃지 않기를 권면하고 있는 것입니다. 

먼저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에 우리에게 가져다주실 은혜를 온전히 바라야 됩니다.
어쩌면 코앞에 닥친 어려움들 속에서도 성도들은 하나님 나라를 바라고 있습니다. 그들이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은 먼저 그들이 하나님의 은혜로 믿음으로 말미암아 거듭나고 구원함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당연히 지금 당장 죽는다고 하더라도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것이니 조금도 염려하거나 두려워할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더욱 예수님께서는 친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면 이보다 더 큰 사랑이 없다고 하셨는데 하물며 주를 위해서 목숨을 버리면 하늘의 상급과 면류관을 우리가 얻게 될 것이니 이 얼마나 큰 영광이 되겠느냐는 것입니다. 그러니 담대하라는 것입니다. 오히려 주를 위해 당하는 핍박을 기뻐하며 감사하라는 것입니다. 

우리 성도들은 그때나 지금이나 하나님의 은혜로 거듭나고 구원함을 받아 영광된 하늘나라를 목표로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이런 엄청난 복을 받은 사람들이기 때문에 우리는 이 세상에서 다소간의 어려움이 있다 할지라도 하나님의 은혜에 합당한 생활을 해야 합니다. 그렇지만 하늘의 소망을 가지고 살아간다는 말은 오늘의 삶이 중요하지 않다는 뜻은 결코 아닙니다. 

어떤 사람들은 십자가의 은혜로 구원을 받고 영원한 천국을 바라보게 되었다고 해서 현실의 문제는 등한시하고 저 하늘나라만을 생각하면서 살아갑니다. 그러나 그것은 올바른 믿음의 자세가 아닙니다. 그렇게 되면 우리의 믿음이 현실도피적인 믿음이 되고 맙니다. 오히려 성경이 제시하는 참다운 믿음의 사람들은 천국을 바라보고 하늘나라의 상급을 기대하면서 살아가기에 더욱더 하나님의 뜻을 이 땅에 펼치고자 애쓰며 하나님의 은혜에 합당한 모습으로 사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베드로 사도는 우리들에게 마음의 허리를 동이고 근신하라고 권면하는 것입니다. 마음의 허리를 동이라는 말씀은 아래로 늘어뜨려진 옷자락을 끌어올려 재빨리 행동할 수 있도록 마음의 준비를 하라는 것입니다. 허리를 동이는 것은 군인들이 전쟁에 투입될 때 취하는 행동입니다. 또한 허리를 동이는 것은 종들이 주인의 명령에 신속하게 따르기 위해 몸가짐을 갖추는 것이기도 합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구세주요 주님으로 고백할 수 있게 된 것이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그래서 하나님 나라의 거룩한 백성이요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조금도 흠이 없는 사람은 아닙니다. 여전히 연약합니다. 그것을 누구보다도 잘 아는 악한 마귀입니다. 그래서 우리를 자꾸 흔들어 놓습니다. 우리들의 크고 작은 실수와 허물에도 마귀는 네가 그러고도 하나님의 자녀라고 할 수 있느냐고 합니다. 아니 오히려 적극적으로 우리를 죄 가운데로 이끌어 들이려고 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받았다고 해서 죄악의 유혹과는 아무런 상관도 없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분명히 기억할 것은 우리가 이미 구원을 받았지만 이미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지만 아직은 이 세상에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아직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간 것이 아닙니다. 그러기 때문에 잘못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요한 1서에서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라고 깨우쳐주시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이미 목욕한 자는 발만 씻으면 된다고 하십니다. 

따라서 우리는 조금도 게으르지 말고 언제나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하여 주님과 교제하는 가운데 주님의 말씀의 능력과 성령의 권능으로 각종 유혹을 물리쳐야 합니다. 
주님의 군대로서 우리가 싸워야 할 사탄의 유혹과 죄의 세력이 많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영적인 싸움을 위해 우리 자신을 철저히 무장해야 됩니다. 조금도 소홀함이 없이 단단한 준비를 해야만 합니다. 전쟁에 나가는 사람이 마음을 놓고 있어서야 되겠습니까? 우리는 믿음의 선한 싸움을 위해 부르심을 받은 그리스도의 군사들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게으르지 말고 열심히 말씀과 기도로 하나님과 교제하며 항상 영적인 무장이 되어 있어야 합니다. 이를 위해 우리는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 하지 말고 주일 낮 예배뿐 아니라 모든 공적인 예배에 빠지지 않고 동참하여 은혜생활을 해야 합니다. 열심을 가지고 주님을 섬겨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가 승리하는 신앙생활을 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근신해야 합니다. 근신한다는 말은 술 취하고 방탕하는 생활을 멀리하고 항상 절제하며 감정에 매이지 않고 항상 분별력 있게 행동하는 것을 뜻합니다. 하나님의 사람들은 어떤 상황에서라도 침착하고 의연하게 대처할 수 있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어찌 보면 이러한 말을 베드로가 하고 있는 것이 참으로 신기합니다. 그도 그럴 것이 사실 그는 인간적으로 보면 이런 이야기를 할 만한 입장에 있는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예수님이 가야바 법정에서 재판을 받고 있을 때 주님을 세 번이나 부인하였고, 부활하신 주님을 기다리지 못하고 배를 빌려 고기를 잡으러 갔던 사람입니다. 

그러나 그가 다른 성도들에게 이렇게 권면할 수 있었던 것은 오히려 그 자신이 실패를 경험한 사람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모든 사람이 다 주를 버릴지라도 나만은 주님을 언제든지 버리지 않겠다고 큰소리를 쳤지만 그는 하루도 못되어 주님을 저주까지 하면서 부인하고 말았습니다. 그러니까 성령께서 능력으로 나를 사로잡아 주시지 않는다면 그 누구도 베드로처럼 되지 않는다 자신할 사람이 과연 누가 있겠습니까? 

베드로 역시 오순절 마가의 다락방에서 성령을 체험하고 난 다음 이제 새로운 사람이 되었습니다. 성령의 사람이 된 그는 자기의 뼈저린 실패를 되돌아보며 믿음의 승리를 위해 “마음의 허리를 동이고 근신하라”고 간곡하게 부탁하는 것입니다. 자기 자신을 믿지 말고 하나님과 철저히 교제하면서 하나님의 도우심을 언제든지 의지하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모두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에 가져다주실 은혜로 충만하게 되시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계속해서 모든 행실에 거룩한 자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 모두는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택하심을 입고 하나님을 아빠 아버지라 고백했습니다. 이 모든 것이 믿음 안에서 이루어졌습니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습니다. 그래서 이제 우리 모두는 하나님의 자녀요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 곧 성도라고 불리게 되었습니다. 따라서 성도라는 뜻 자체가 거룩한 무리인 만큼 당연히 성도들은 거룩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렇다면 성경에서 말하는 ‘거룩’이란 무엇입니까?

같은 단어라도 보통 사람들이 쓰는 일반적인 개념과 성경의 개념과 다른 것들이 많습니다. 그 중에 하나가 거룩이란 단어입니다. 흔히 세상에서 거룩이라고 하면 보통 사람과는 다른 높은 윤리적인 삶을 사는 것을 말합니다. 마치 성자들처럼 뭔가 차원이 다른 고상하고 도덕적인 삶을 살아가는 것을 거룩이라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성경에서 말하는 거룩이란 전혀 다른 의미로 쓰이고 있습니다. 그것은 곧 구별이란 뜻입니다.

출애굽기 19:5~6에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택하시며 말씀하십니다. 
“세계가 다 내게 속하였나니 너희가 내 말을 잘 듣고 내 언약을 지키면 너희는 열국 중에서 내 소유가 되겠고 너희가 내게 대하여 제사장 나라가 되며 거룩한 백성이 되리라.” 
그러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이 아무 흠도 없는 도덕적인 삶을 살았기 때문에 거룩한 백성이 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모든 민족 가운데 택하여 언약을 맺었기 때문에 거룩한 백성이 된 것 뿐입니다. 따라서 거룩한 백성으로서의 이스라엘 백성들이 해야 될 일은 하나님의 말씀을 잘 듣고 언약을 지키는 것입니다. 
이것은 오늘 우리들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오늘도 동일하게 우리를 향해서 말씀하십니다.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 지어다”

이를 위해서 “너희가 순종하는 자식처럼 전에 알지 못할 때에 따르던 너희 사욕을 본받지 말고 오직 너희를 부르신 거룩한 이처럼 너희도 모든 행실에 거룩한 자가 되라”고 하십니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던 때는 당연히 내 마음대로 행했습니다. 남이야 어찌 되든 말든 상관할 바가 없었습니다. 나중에야 지옥에 갈지라도 지금은 그냥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하면 됐습니다. 아니 애써서 지옥에 간다는 것도 부인했습니다. 그 두려움마저도 어깨 너머로 던져버렸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다릅니다. 너희가 순종하는 자식처럼 살라고 하십니다. 무엇에 순종해야 합니까?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우리가 모든 행실에 거룩하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우리 모든 삶에 이제는 내 생각이 아닌 내 욕심이 아닌 하나님의 말씀이 기준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게 바로 세상 사람들과 구별되는 것입니다. 이제는 살아도 주를 위해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해 죽는 것입니다. 삶의 의미도 달라졌습니다. 당연히 내가 하고 싶다고 해서 다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소속이 달라졌습니다. 전에는 세상 백성이었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성도입니다. 하늘나라 백성입니다. 전에는 불순종의 자녀요 따라서 세상의 법을 따랐지만 이제는 하나님 나라의 법을 따릅니다. 기준이 내 생각이 아닌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죄가 무엇입니까? 불순종입니다. 하지만 이제는 날마다 우리에게 베풀어 주시는 은혜 안에서 순종합니다. 그러니 우리는 세상의 법을 따르는 사람이 아닙니다. 세상의 법은 어디까지나 자기 위주입니다. 

그저 다른 사람에게 해를 끼치지 않으면 잘 한다고 합니다. 아니 조금 도움을 줬다 싶으면 사방 천지에 나발을 붑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네 오른 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 아니 어떻게 한 몸인데 내 오른 손이 한 일을 왼 손이 모를 수 있단 말입니까? 그만큼 전혀 내색도 말고 자랑도 말라는 것입니다. 그만큼 자기가 해놓고도 전혀 기억도 하지 못할 정도도 그렇게 은밀하게 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늘의 아버지께서 갚아주실 것이라고 합니다. 당연히 우리는 죄로부터 자유함을 누려야 합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 나라 백성으로서 죄에 매이는 자가 아니라 죄를 짓지 아니할 자유를 누려야 합니다. 그런데 사실 내게는 죄를 짓지 아니할 힘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나로 하여금 죄를 짓도록 유혹하는 악한 마귀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죄로부터의 자유함은 오직 성령이 나를 능력으로 붙잡아 주실 때만 가능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날마다 깨어 기도하라고 하는 것입니다. 항상 기뻐하고 범사에 감사할 수 있는 것도 쉬지 않고 기도할 때 가능합니다. 그러니까 순간순간 성령 하나님께서 나를 깨우쳐 주시고 이끌어주시고 능력을 베풀어주실 때 우리는 모든 행실에 거룩한 삶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은혜 위에 은혜인 것이요 내가 자랑할 것은 하나님과 하나님의 은혜밖에 없는 것입니다. 

보십시오! 하나님은 우리의 행위대로 심판하시는 분이라고 했는데 우리의 행위를 가지고 심판하시기로 작정하시면 거기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그런데 하나님이 그런 우리를 오래 참아 주셨습니다. 그리고 오히려 그런 죄와 어둠 속에서 헤매는 우리들 위해 흠 없고 점 없는 어린 양 같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대속하여 주셨습니다. 그러니까 죄 값은 예수님이 치르셨습니다. 죄는 내가 저질렀는데 죽어야 될 사람은 나인데 지금도 여전히 죄 가운데 살고 있는 우리인데 예수님의 보배로운 피를 우리 가운데 뿌려주셔서 우리의 모든 죄와 허물을 깨끗하게 씻어 주십니다. 그래서 은혜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예수를 믿어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도 하나님의 은혜인 것이요 날마다 하나님의 사랑 가운데서 살아갈 수 있는 것도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전에는 하나님이 우리가 마음대로 살도록 버려두셨습니다. 죄 가운데 있어도 상관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아닙니다. 간섭하십니다. 간섭하시되 자신이 먼저 희생하십니다. 십자가에 못 박히셨던 그 손으로 우리를 잡아주십니다. 우리 마음을 두드리십니다. 이것을 성령의 감동하심이라고 합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는 순간 내 안에 오신 성령께서 내 마음을 두드리십니다. 그리고 내가 어디로 가야 할지 알려 주십니다. 그래서 쉬지 말고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나도 모르게 내 생각을 내세우게 됩니다. 보다 정확하게는 내 귀에 속삭이는 악한 마귀의 생각을 내세우게 됩니다. 그런데 그게 악한 마귀의 뜻이라는 것은 꿈에도 모르고 있을 뿐이죠. 

그래서 악한 마귀가 아닌 성령이 내 마음을 사로잡도록 해야 합니다. 그러니까 쉬지 않고 기도한다는 것은 항상 내 안의 성령과 대화를 나누는 것입니다. 주님 이럴 때 내가 어떻게 해야 되나요? 조용히 물으면 성령께서 알게 하실 것입니다. 처음에는 아주 희미한 음성으로 들리기도 할 것입니다. 그 작은 마음의 감동을 놓치지 마십시오. 그래서 날마다 말씀을 따라 순종하는 삶을 살되 모든 영광을 하나님께 돌리심으로 하나님께서 날마다 은혜를 더하시는 귀한 성도들 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마지막으로 이제 우리 모두는 마음으로 뜨겁게 서로 사랑해야 합니다.
“너희가 거듭난 것은 썩어질 씨로 된 것이 아니요 썩지 아니할 씨로 된 것이니 살아 있고 항상 있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되었느니라.”

그렇습니다. 우리는 살아 있고 항상 있는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믿음으로 말미암아 거듭난 백성이 되었습니다. 그 살아 있고 항상 있는 하나님의 말씀이 누구십니까? 태초에 말씀이 계셨고 그 말씀으로 말미암아 온 세상이 지어졌으며 그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오신 그분, 그리고 이 말세에 우리를 위하여 나타내신바 된 그분,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에 죽으셨던 그 예수님을 하나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셨습니다. 그리고 그분을 만왕의 왕 만주의 주로 세우셨습니다. 

그 하나님을 우리가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아빠 아버지로 믿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믿음과 소망이 하나님께 있는 것입니다. 그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베풀어 주신 은혜 안에서 이제 우리가 진리를 순종함으로 우리 영혼을 깨끗하게 하였더니 자연스럽게 형제를 사랑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을 아빠 아버지로 사랑하게 되니까 자연스럽게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순종하게 됩니다. 형제들도 사랑하게 되었습니다. 전에는 원수였던 자들까지도 사랑스럽게 여겨집니다. 미워하려야 미워할 수가 없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의 사랑이 내 안에 가득해서 그 사랑의 눈으로 보니까 모두가 다 사랑스럽습니다. 당연히 미워해야 되는데 그게 세상의 원린데 밉기보다는 불쌍하게 여겨집니다. 죄 가운데 살아가는 사람들이 그렇게 불쌍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니 어찌 그냥 모른 척 할 수 있겠습니까? 

그럼 어떻게 하는 것이 뜨겁게 사랑하는 것입니까? 먼저 그들에게 우리의 삶의 모든 것이 되시는 예수님을 소개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복음을 전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이유를 말해주는 것입니다. 그리고 함께 예수를 믿도록 함께 하늘나라 백성으로 살아갈 수 있도록 예수를 전해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로 하여금 참 사랑과 참 기쁨의 삶을 함께 누리도록 이끌어주는 것입니다. 그것이야말로 정말 마음으로 뜨겁게 사랑하는 첫걸음입니다. 죽어가는 사람을 보고 사랑한다 일어나라 한다고 됩니까? 진짜 사랑한다면 일으켜 주어야죠. 이게 결코 쉬운 작업은 아닙니다. 

어떤 때는 마치 밑 빠진 독에 물 붓기처럼 느껴질 때도 있습니다. 그래서 나 혼자 힘으로 안 됩니다. 주님께서 은혜로 나를 붙들어주셔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 마음이 그리스도의 마음으로 가득 채워지기를 간구해야 하고 주님의 마음을 품어 형제자매를 뜨겁게 사랑해야 합니다. 언제까지 그렇게 해야 합니까? 주님께서 그만 하실 때까지입니다. 누구는 말합니다. 사람 같아야 하지? 그건 나도 전에 그랬습니다. 

나도 다른 사람이 볼 때는 사람 같지 않았습니다. 그것이 당연한 것이 우리가 예수님을 알기 전에는 죄 가운데 죽었던 자들입니다. 마치 사형수와 마찬가지였습니다. 죽은 목숨, 살아있다고 하나 마치 죽은 자와 같았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하늘의 소망이 있습니다. 이 세상에서 살아가지만 이제는 전혀 죽음이 두렵지 않습니다. 죽음은 곧 하늘나라로 옮겨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왜 우리가 뜨겁게 서로 사랑해야 하느냐 하면 그것이 바로 하나님 나라 백성의 삶의 모습이기 때문입니다. 

왜 그러느냐 하면 하나님이 사랑이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사랑이 나를 강권하시기 때문에 우리가 예수님을 믿어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이 된 순간부터 하나님의 사랑이 내 안에 가득 채워지기 때문에 사랑하지 않고는 견딜 수가 없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은혜 가운데 주님이 주시는 능력과 사랑을 힘입어 오늘 뜨겁게 피차 사랑하는 하나님의 사람들 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이웃 일본이 장난이 아닙니다. 지진 해일과 그로 인한 원전 사고로 인해 많은 재일 동포들이 한국으로 돌아오고 있습니다. 왜 그들이 한국으로 돌아옵니까? 그들이 그곳에서 오래 살아왔다고 해도 그들은 나그네일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그건 오늘 우리들도 마찬가지입니다. 

“너희가 나그네로 있을 때를 두려움으로 지내라”고 했습니다. 나그네라는 말은 이 땅이 정착지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언젠가는 떠나야 될 곳입니다. 그러니까 이 세상에 미련을 두지 마십시오. 세상에 있는 것들에 마음을 빼앗기지 마십시오. 잠시 있다가 사라질 것들 때문에 울고 웃지 마십시오. 그런데도 어리석게도 돌아갈 고향 하나님 나라를 잊어버리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혹 있습니다. 하지만 보십시오. 
“그러므로 모든 육체는 풀과 같고 그 모든 영광은 풀의 꽃과 같으니 풀은 마르고 꽃은 떨어지되 오직 주의 말씀은 세세토록 있도다 하였으니 너희에게 전한 복음이 곧 이 말씀이니라.”

그래서 복음에 합당하게 생활하라는 것입니다. 모든 행실에 거룩한 자가 되라는 것입니다. 세세토록 변함없는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항상 기뻐하며 번사에 감사하는 귀한 삶을 통해 그리스도를 아는 냄새가 아주 향기롭게 퍼져나가는 귀한 성도들 다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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