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사순절] 기도 없는 십자가 없고, 십자가 없는 면류관 없다. (마 26:..

첨부 1


기도 없는 십자가 없고, 십자가 없는 면류관 없다.(no prayer, no cross, no crown)
▶성경본문: 마26:36-46 

미국의 어느 목사님이 농부의 집에 하숙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 농부는 예수를 믿지 않고 있었고 그 부인은 늘 남편을 위해 기도하고 있었습니다. 
그 목사님은 남편에게 어떻게 하면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의미를 설명할 수 있을까 기도하는 마음으로 기회를 찾고 있었습니다.  

어느날 아침에 그 농부가 목사님을 급히 부르더니 닭장엘 같이 가보자고 했습니다. 가보니 그 닭장 둥우리에 암탉이 앉아 있는데 그 날개 밑에서 막 병아리들이 삐약 삐약 소리를 내면서 한 마리씩 기어 나오고 있었습니다. 그 농부가 그 암탉을 건드려 보라고 해서 툭 건드렸더니 암탉이 움직이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그 암탉은 죽어 있었습니다. 농부가 말하기를 "저 머리에 상처를 보십시오. 족제비란 놈이 그 몸에서 피를 다 빨아 먹었는데도 그 놈이 새끼들을 잡아 먹을까봐 꼼짝도 하지 않고 그대로 죽은 것입니다." 

그때 목사님은 말했습니다. "오! 저것이 바로 그리스도와 같습니다. 그는 십자가에서 모든 고통을 참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움직일 수도 있고 십자가에서 내려와 자기 생명을 구원할 수도 있었으나 그렇게 되면 당신과 나는 멸망 받기 때문에 십자가에서 피 한 방울 남김없이 다 흘려주신 것입니다." 그 농부는 그 목사님의 말씀을 듣고 즉시 그리스도를 자신의 구주로 모셔들이게 되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번 한 주간은 고난주간입니다. 이번 한 주간 여러분은 어떤 마음으로 한 주를 보내고 계신가요? 
나를 위해 온 몸에 피 한 방울 남김없이 다 흘려주신 주님의 사랑에 대한 감격이 여러분에게 있으십니까? 

여러분, 십자가에 못 박힌다고 하는 것은 네 번의 죽음을 당하는 것입니다. 
십자가에 달리기 전 이미 죽을 만큼 얻어터져 온 몸이 만신창이가 되는 죽음과 같은 고통을 당하는 것이요, 십자가에 뼈를 뚫고 살을 에어파고 들어가는 대못에 박히는 죽음과 같은 고통을 경험하는 것이요, 옷을 벗기고 비아냥거리는 사람들의 웃음과 비웃음속에서 인격적 죽음을 경험하는 것이요, 온 몸에 물과 피를 다 쏟을 만큼 참을 수 없는 죽음과 같은 고통을 경험하는 것입니다. 
죽을 만큼 매 맞고 죽을 만큼 못에 박히고 죽을 만큼 욕 먹고 비웃음당하고 죽기까지 피 흘리는 것이 십자가의 고통입니다. 

이 처절한 십자가의 고통을 예수님께서는 바로 저와 여러분을 위해 감당하셨습니다. 참으셨습니다. 이것이 우리 주님의 사랑이며 십자가의 은혜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이 아침 네 번의 죽음과 같은 고통을 겪으면서까지 우리를 살리신 예수님에 대한 사랑과 십자가의 은혜에 대한 감격이 여러분의 심장에서 요동치십니까? 여러분의 눈에 내가 매달려야 할 십자가에 대신 매달려 잔혹한 죽음을 당하신 예수님의 은혜에 대한 감격의 눈물이 흐르십니까? 

아니면 늘 1년에 한번 돌아오는 행사로서 고난주간을 보내고 계시지는 않으십니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고난주간은 연중 행사가 아닙니다. 
1년중 한 주일 예수님의 고난에 대하여 아이고 우리 예수님이 나를 위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네 하고 안타까워하며 감사하는 마음을 갖는 정도에 머물러야 할 종교의식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나를 위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그 예수님을 생각할 때 우리의 눈에서 눈물이 멈추어지고 우리의 가슴이 뜨거워지지 않는다면 우리는 우리 자신의 모습을 깊이 다시 생각해보지 않으면 안 될 것입니다. 
혹시 우리의 마음이 돌맹이처럼 딱딱하게 굳어져버린 것은 아닌지, 우리의 영혼이 나도 알지 못하는 순간 날개 잃은 새처럼 주저 앉아 버린 것은 아닌지, 주님을 향한 우리의 가슴이 점점 멈추어져가고 있는 것은 아닌지 말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십자가로 대변되는 그리스도의 죽음의 사랑을 처음 경험하게 된 그 날의 벅찬 감동과 감격이 오늘 이 아침 여러분에게 회복될 수 있길 주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눈물히 콧물이 범벅이 되어 울면서 가슴을 치면서 나는 죄인이라고 나 때문에 그리스도께서 죽으셨다고 다 내 죄 때문이라고 통회하며 회개하던 그 날의 눈물이 오늘 이 아침 여러분에게 회복될 수 있길 주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회복되어야 합니다. 그 날의 구원의 벅찬 감격과 그 날의 뜨거운 회개의 눈물과 그 날의 간절한 열망과 사모함이 회복되어야 합니다. 
그것이 십자가를 머리로 아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를 가슴으로 만난 사람의 모습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이 아침 저와 여러분 모두에게 이 십자가의 은혜가 회복되어질 수 있길 주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그렇다면 오늘 이 아침 우리는 어떻게 하면 이 십자가의 은혜를 회복하게 될 수 있을까요? 오늘 본문을 통해 함께 은혜를 나누기 원합니다.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의 사역을 감당하시기전 매우 중요한 사역을 하시게 됨을 볼 수 있습니다. 그것은 무엇이었습니까? 
36절입니다. 제자들과 함께 겟세마네라는 하는 곳에 가신 일이었습니다. 
36절의 첫 부분 이에 라는 단어가 중요합니다. 
이에 무엇입니까 그 앞 부분과 연결되는 것이죠. 바로 35절입니다.  베드로와 제자들이 주와 함께 죽을 지언정 주를 부인하지 않겠나이다 라는 그의 고백에 이어 예수님께서는 제자들과 함께 겟세마네에 이르게 되신 것입니다. 

왜 성경은 제자들이 부인하지 않겠다고 하던 그 고백에 이어 예수님이 겟세마네 동산으로 그 제자들과 함께 가셨음을 기록하고 있는 것일까요? 
2000년전 예수님의 제자들처럼 오늘날 우리 역시 절대 주를 부인하지 않겠다고 다른 사람은 몰라도 나만은 주를 부인하고 않고 살고 있다고 확신하지만 실제로 그 제자들처럼 늘 주님을 배반하고 부인하는 연약한 모습을 보이는 우리들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어느 순간 십자가 앞에서 울며 불며 눈물 콧물 뒤범벅이 되어 가슴을 치며 회개하지만 또 어느 순간 주님을 부인하고 주님을 배반한 제자들의 모습으로 서 있지는 않습니까? 

예수님은 그런 제자들과 함께 겟세마네로 가셨던 것처럼 오늘 우리들과 함께 겟세마네에 가기를 원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36절의 함께 라는 단어에 동그라미 쳐 보시죠? 겟세마네는 예수님 혼자 가서 기도하시는 동산이 아니라 예수님과 우리가 함께 가서 기도해야 할 곳이라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왜 우리의 삶에 십자가의 감격과 은혜가 살아있는 신앙의 갈보리를 잃어버리게 되는 것일까요? 신앙의 겟세마네를 잃어버렸기 때문입니다. 
겟세마네를 잃어버렸기 때문에 갈보리의 자리에 설 수 없는 것입니다. 
왜 예수님께서는 십자가를 지시기 전 매우 중요한 순간 겟세마네에 올라 기도하는 일을 선택하신 것일까요? 예수님은 겟세마네에 오르지 않으면 갈보리에 오를 수 없음을 알고 계셨습니다. 즉 겟세마네의 간절한 기도와 자기 부인, 자기 포기의 기도가 없이는 십자가를 질 수 없음을 알고 계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당신 혼자가 아니라 제자들과 함께 오르길 원하셨고 37절에 보면 아끼던 제자 3명을 더욱 가까이 데리고 가셨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갈보리 십자가의 감격과 은혜가 사라지지 않는 그 신앙의 갈보리에 서기 원하십니까? 그렇다면 주님과 함께 겟세마네에 먼저 오르는 저와 여러분이 될 수 있길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어지는 37절과 38절에 보니 겟세마네에 오르시는 예수님의 심정은 어떠셨습니까? 매우 기쁘고 감격에 겨우셨나요? 사모하고 간절히 기대하는 마음으로 벅차오르셨습니까? 아닙니다. 오늘 본문37절에 보니 분명 예수님 역시 고민하고 슬퍼하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38절에 보니 심히 고민하여 죽게 되었다고 고백할 만큼 예수님 역시 심한 번민과 고통속에 계십니다. 
그렇다면 왜 하나님이신 예수님이 이런 고통과 번민의 짐을 지셔야만 했을까요? 
이어지는 39절 이후의 말씀을 살펴보면 예수님의 이 고통과 번민과 고민은 십자가를 지라고 하시는 아버지의 뜻을 이루어야만 하는 것 때문에 겪어야 하는 고통과 번민이었습니다. 다시 말해 예수님의 고통과 번민은 바로 죄인인 저와 여러분을 살려내기 위한 아버지의 그 뜻을 순종해내기 위하여 처참한 십자가를 져야만 하는 것에 대한 고통과 번민이었다는 것입니다. 
이 말씀을 더 쉽게 말씀드리면 지금 마26장에서 예수님은 바로 영원한 어둠속에서 죽음과 고통속에 살아야 할 저와 여러분을 살려내기 위해 그토록 몸부림치며 번민하며 고민하여 죽을 것 같은 고민 속에 있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혹시 여러분 들 중에 삶이 힘들다고 무겁다고 그래서 고민이 되어 죽겠다고 고백하고 싶은 성도들이 계십니까? 오늘 예수님은 그런 우리들을 위해 이미 죽을 것 같은 고민과 번민 가운데 계십니다. 우리의 모든 번민과 고통을 대신 담당하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내가 져야 할 모든 번민과 고통과 고민과 아픔을 친히 대신 먼저 담당하여 주고 계시는 것입니다. 

우리 히4:15절을 찾아보겠습니다. 예수님은 우리 연약함을 체휼하지 아니하는 자가 아니요 우리와 한결같이 시험을 받은자로되 죄는 없으시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죄 없으신 예수님이 왜 죄인만이 져야 하는 십자가를 져야 하는 것 때문에 고민하고 번민하여 죽을 지경에 이르르셨겠습니까? 우리의 연약함을, 우리의 고민을 우리의 번민을 우리의 염려를 우리의 죄악을 직접 몸으로 다 대신 담당하시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마11:28절에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 가운데 마음이 심히 슬프고 고민이 되어 죽고 싶을 만큼 고통스러운 성도들이 계십니까? 

여러분, 예수님은 여러분 혼자 그 죽음 같은 고통과 번민속에 내버려두지 않으십니다. 예수님은 우리와 함께 그 죽음 같은 고통 때문에 눈물 흘리고 계십니다. 가슴 치면서 답답해 하고 울면서 기도하고 계신다는 것을 기억하는 성도들이 될 수 있길 주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그러나 다음 말씀에서 우리는 중요한 교훈을 얻게 됩니다. 
39절입니다. 죽을 것 같이 심한 고통과 번민 가운데 있는 예수님은 그 자리에 그냥 주저 앉아 계시지 않았습니다. 
예수님께서 어떻게 그 죽음 같은 번민과 고뇌를 극복하고 승리하고 계십니까? 

39절을 보십시오. 조금 나아가사 얼굴을 땅에 대시고 엎드려 기도하여 가라사대...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님은 죽을 것 같은 고통과 번민속에 그냥 주저 앉아 계시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그 번민과 고통속에서 하나님께 기도하기 위하여 나아가고 계십니다. 그리고 얼굴을 땅에 댄 채 간절히 하나님 아버지를 향하여 기도하고 계십니다. 누가복음 말씀에 보니 땅방울이 핏방울이 되기까지 간절히 부르짖어 기도하고 계십니다.  

우리에게도 죽음 같은 심한 고통과 번민의 삶이 다가오고 그것 때문에 정말 아무것도 못하고 주저 앉아 목 놓아 울고 싶고 손가락 하나도 까딱 못할 것 같은 심한 좌절과 절망속에 빠져 버리는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그처럼 힘들고 낙담이 되고 고통스러운 그때야말로 하나님 앞에 나아가야 하는 그때라는 사실입니다. 그때야 말로 하나님께 간절히 간구하며 기도해야 할 때라는 사실이라는 것입니다. 

왜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이끌고 이 자리에 오셨는 지 그리고 오늘 이 시간 우리도 예수님과 함께 그 자리에 있기 원하시는 지 아시겠습니까? 
죽음과 같은 고통과 번민속에 주저 않아 있지 말고 조금 나아가 얼굴을 땅에 대고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38절에서 우리에게 그것을 명확히 가르쳐주고 계십니다. 
나와 함께 깨어 있으라. 여러분 여기서 깨어 있으라는 것은 단순히 눈을 뜨고 멍하니 있으라는 말씀이 아닙니다. 깨어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예수님과 함께 예수님처럼 기도하라는 것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죽을 것 같은 고통과 번민의 순간 우리가 있어야 할 자리가어디입니까? 겟세마네 동산입니다. 우리는 그 곳에서 무엇을 해야 합니까? 땀방울이 핏방울이 되도록 간절히 기도하며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해야 합니다. 인도하심을 구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뜻을 구해야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인간의 끝이 바로 하나님의 시작입니다.
따라해 봅시다. 인간의 끝이 하나님의 시작이다. 
이미 끝났다고, 아무 소망도 없다고 생각되는 그때 비로소 하나님만이 다시 시작하실 수 있는 분이라는 것을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 분앞에 기도해야 합니다. 그 분의 얼굴을 구해야 합니다. 그 분의 뜻을 그 분의 도우심을 구해야 하는 것입니다. 

어떤 성도님들은 그렇게 말씀하십니다. 목사님, 기도도 되야 하죠? 기도가 안되는 데 어떻게 기도할 수 있나요? 그러나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도저히 아무것도 할 수 없어 기도조차 할 수 없다고 생각되는 그때가 바로 반드시 기도해야 하는 때임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기도가 되지 않습니다. 기도조차 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 도와주세요 라고 말하는 것이 바로 기도인 것입니다. 

한번 따라해 봅시다. 기도할 수 없을 것 같은 그때야말로 반드시 기도해야 할 때이다. 예수님이 오늘 말씀을 통해 우리에게 그것을 가르쳐주고 계시는 것입니다.  

여러분, 놀람 교향곡을 누가 지었나요?  네 바로 하이든입니다.
이 하이든은 독실한 신앙인으로 많은 사람들에게 모범을 보이며 살았던 사람이었습니다. 한번은 저명한 예술인들이 모인 자리에서 '고민'과 '고통'의 문제가 화제로 떠올랐습니다. 경제적 고통이나 좋은 작품이 나오지 않을 때의 고민을 어떻게 극복하느냐 하는 것이 화제의 촛점이였습니다. 저마다 한 마디씩들 하는 가운데 하이든의 차례가 되었습니다. 그때 하이든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작은 골방을 기도실로 정했습니다. 일에 지쳤을때나 고민이 시작되면 나는 그 방으로 들어갑니다. 그리고 그 방에서 나올때는 항상 희망의 빛을 발견하고 나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이 힘들고 지칠 때 가장 먼저 머리에 떠오르는 것이 무엇입니까? 어떤 환경에서도 우리를 바라보시는 하나님의 얼굴이 떠오르십니까?
힘들고 지칠 때 여러분은 어디로 가십니까? 여러분은 하나님과 개인적으로 만나는 골방이 있으십니까? 여러분의 겟세마네 동산은 어디십니까? 

오늘 이 아침 사랑하는 우리 모든 성도들은 고민의 순간, 고통의 순간, 아픔의 순간 염려의 순간 예수님처럼 겟세마네로 나아가 기도하는 성도들이 될 수 있길 주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기도는 죽을 것 같은 고민을 반드시 살 수 있다는 희망으로 바꾸는 능력을 갖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토록 간절히 기도하신 예수님의 기도의 내용은 무엇이었습니까? 
자신의 뜻이 아니라 아버지의 뜻대로 되기를 원한다는 것이었습니다. 
39절에 보시면 자신의 뜻을 따라 십자가의 잔을 피하였으면 좋겠다고 말씀하시지만 이내 예수님은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하고 기도하고 계십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기도할 때 늘 우리의 뜻대로 되길 원하는 마음이 있습니다. 
그것이 잘못된 기도는 아닙니다. 그러나 그것은 성숙한 기도가 아닙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향하여 소원을 말할 수 있고 간구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어린아이와 같은 기도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어린아이같은 기도에 응답하시지만 우리가 거기에 머물러 있기 원하시지 않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기도가 한 단계 더 성숙한 기도가 되길 원하십니다. 

오늘 예수님의 기도를 보십시오.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이것은 예순님의 뜻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기도는 여기서 멈추지 않습니다. 그러나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다음 단계 바로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성숙한 기도는 나의 뜻대로 이루어지길 간절히 원하지만 그러나 아버지의 뜻대로 되길 원합니다라고 고백하는 오늘 예수님의 기도와 같은 기도인 것입니다.  

여러분, 한 어린아이가 태어나서 아무것도 알지 못하는 어린 시절에는 그저 울어 댑니다. 말도 하지 못하고 울어댑니다. 그러면 부모님은 그의 필요를 채워주십니다. 조금 더 지나면 그 아이가 직접 필요를 말합니다. 엄마 배고파 밥 주세요.. 엄마 쉬와 마려워...그리고 조금 더 지나면 길거리 가다가도 좋은 것 갖고 싶은 것 있으면 떼를 쓰며 사달라고 합니다. 그리고 좀 더 성장하면 아버지 어머니 눈치도 살필 줄 알고 아부도 떨면서 사달라고 합니다. 심부름도 하고 말도 잘 듣는 척 합니다. 
그러나 나중에 철이 나고 장가도 가면 어떻습니까? 성장할 만큼 성장해서 장가도 갔는데 그 자식이 부모님의 속만 썩이고 어렸을 때처럼 뭐나 맨날 달라고 한다면 그 아들을 누가 성숙한 아들이라고 하겠습니까? 

자식이 철도 들고 장가도 가게 되면 부모님을 공경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엄밀한 의미에서 자식이라고 말하기에 힘이 든 것입니다. 
육적인 것 뿐만 아니라 영적으로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어린 아이같은 믿음에서 영적으로 점점 성장해갈 수록 우리의 기도도 내 중심에서 아버지 중심으로 바뀌어 가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결국 내 뜻대로 이루어지지 않고 아버지의 뜻대로 이루어지는 것이 나에게 가장 행복하고 선한 길이라는 것을 또한 알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서 내가 나의 길을 가장 잘 알고 있고 내가 나를 가장 사랑한다고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나보다 나를 더 정확히 알고 계시고 내 앞길을 나보다 더 정확하게 인도해주시고 나를 나보다 더 사랑하시는 분은 내가 아니라 바로 하나님 아버지라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러하기에 결국 나를 위한 가장 좋은 기도는 나의 뜻대로 이루어지길 위하여 기도하는 기도가 아니라 아버지의 뜻대로 이루어지길 위해서 하는 기도라는 것을 우리는 반드시 깨달아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예수님의 뜻을 아는 지 모르는지 제자들은 어떻게 하고 있습니까? 
38절에서 예수님은 분명 나와 함께 깨어 있으라 말씀하셨는데 제자들은 40절에 보니 나와 함께 한 시간도 깨어 있을 수 없더냐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있어 기도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기도하지 않으면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알 수 없을 뿐만 아니라 나도 모르게 시험에 들어 그 하나님의 뜻을 이루지 못하게 됨을 우리에게 말씀해주고 계시는 것입니다. 

42절에 예수님은 두 번째 기도하시고 43절에 다시 와서 보니 또 자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44절에 또 세 번째 같은 말씀으로 기도하신 후 제자들에게 오셔서 말씀하십니다. 이제는 자고 쉬라..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정작 이 겟세마네에서 기도해야 할 사람은 누구였습니까? 
예수님이 아니라 제자들이었습니다. 왜 예수님께서 홀로 겟세마네에 오르지 않으시고 제자들과 함께 특별히 사랑하는 세 명의 제자들은 더욱 가까이 데리고 가신 것입니까? 기도의 본을 보여주시기 위함입니다 겟세마네에서 승리해야 갈보리에서 승리할 수 있음을 가르쳐주시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겟세마네에서 승리하지 못함으로 결국 갈보리에서 패배합니다. 

결국 예수님의 갈보리 승리는 겟세마네의 땀방울이 핏방울로 변할 만큼의 간절한 기도의 승리였음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오늘 36절의 함께 38절의 함께 40절의 함께 46절의 함께 이 4번에 함께를 통해 그것이 우리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되는 진리임을 말씀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갈보리의 승리가 부활의 영광을 가져왔음을 믿으십니까?
그리고 오늘 말씀을 통해 그 갈보리의 승리는 결국 겟세마네의 승리 즉 기도의 승리, 무릎의 승리였음을 믿으십니까? 

no cross, no crown 십자가 없이는 면류관도 없다. 이라는 유명한 말이 있습니다. 그러나 저는 여기에 한 가지를 덧붙이고 싶습니다. no prayer, no cross, no crown 기도 없는 십자가는 없으며 십자가 없는 면류관은 없다. 

말씀을 맺으려고 합니다. 

오늘 우리는 본문을 통해 예수님도 심한 번민과 고민가운데 죽을 지경에 이르고 계시는 모습을 봅니다. 그러나 그 번민과 고민은 바로 다른 사람이 아닌 나를 살려내기 위해 십자가를 지셔야 했던 번민이요 고민임을 살펴보았습니다. 그 예수님은 오늘도 나의 눈물과 한숨을 외면하지 않으시고 나와 함께 하시며 함께 고민하고 눈물 흘리며 가슴을 치며 기도하고 계시는 주님이심을 말씀드렸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그 주님은 홀로 겟세마네에 오르지 않으시고 제자들과 함께 오르십니다. 오늘 예수님은 우리도 겟세마네에 함께 올라 예수님처럼 간절히 기도하며 나아가길 원하십니다. 

고난주간을 맞아 특별새벽기도회로 하나님께 나아가고 있습니다. 남아 있는 목요일과 금요일 주님처럼 주님과 함께 겟세마네에 오르는 여러분들 될 수 있길 간절히 바랍니다.   
겟세마네에서 예수님의 기도는 자신의 뜻을 이루기 위한 기도가 아니라 아버지의 뜻을 이루기 위한 기도였습니다. 자신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가 아니라 아버지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 드리는 기도는 성숙한 기도이며 이 기도가 사실은 가장 나를 위한 기도임을 말씀드렸습니다. 
오늘 이 시간 우리도 예수님처럼 나의 뜻을 이루어달라고 하는 어린아이와 같은 기도를 넘어서서 내게 주신 십자가를 버겁고 힘들지만 감당할 수 있게 해달라고 아버지의 뜻을 이룰 수 있게 해달라고 간절히 기도합시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진정한 하나님의 사람은 진정 주님과 함께 하는 사람은 나의 뜻을 따라 십자가를 벗어 버리게 해 달라고 기도하는 사람이 아니라 아버지의 뜻이기에 죽을 만큼 고통스럽지만 감당할 수 있게 해달라고 기도하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순종입니다. 죽기까지 순종한 예수님과 함께 우리도 진정한 순종을 이룰 수 있기를 원합니다. 그리고 이 순종이야 말로 바로 부활의 영광이 있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고 향기 나는 순종임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사랑하는 우리 모든 안디옥 교회 성도 여러분, 오늘 여러분들의 가슴속에 진정한 구원의 감격과 은혜가 회복되길 간절히 바랍니다. 여러분 모두 갈보리 언덕에 설 수 있게 되길 바랍니다. 

우리가 갈보리 언덕에 서기 위해 필요한 것이 무엇입니까? 그리스도와 함께 겟세마네 동산에 엎드려야 합니다. 땀방울이 핏방울이 되도록 간절히 기도하여 우리의 뜻을 내려놓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 십자가를 져야 합니다. 그럴 때 그 무거운 십자가가 바로 우리에게는 말할 수 없이 큰 영광의 면류관이 되는 것입니다. 
한번 따라해봅시다. no prayer, no cross, no crown 기도 없는 십자가는 없으며 십자가 없는 면류관은 없다. 

여러분, 모두 고난주간을 맞아 예수님과 함께 겟세마네에 엎드리심으로 예수님과 함께 일어나 갈보리 언덕으로 나아갈 수 있게 되길 그리고 그 갈보리 언덕에서 부활의 영광을 누릴 수 있게 되길 주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