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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신앙의 최후의 보루 (고전 13: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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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의 최후의 보루 (고전 13:1-13)


영국의 일간지 파이낸셜 타임즈가 이번 일본 대지진 참사에서 일본인들이 보여준 침착함과 시민정신에 대해서 높이 평가하며 인간 정신의 진화를 보여주었다고 말했습니다. 이것은 한 국민에게 줄 수 있는 최고의 찬사입니다. 인간 정신의 진화. 그런데 우리로 하여금 생각하게 만듭니다. 인간정신은 정말로 진화하는 것인가? 어디에서 어디까지 진화하는 것인가? 짐승에서 인간으로? 짐승에서 천사로? 생리적으로 인간이 진화하는 것처럼 정신적으로도 진화하는 것인가? 그것은 아니라고 봅니다. 하나님을 배제한 인간만의 진화는 없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을 배제하게 되면 진화하는 것이 아니고 퇴보합니다. 탕자가 아버지 집을 떠나갔더니 결국 돼지가 먹는 쥐엄열매로 자기 배를 채우려고 한 것과도 같습니다. 하나님이 없는 인류는 나아지는 것이 아니고 오히려 나빠집니다. 인간 정신 진화에 있어서 절대적인 역할을 하는 분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특별히 예수 그리스도의 정신,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입니다. 

예수님은 오셔서 말로만 가르치신 것이 아니고 행동으로 그것을 실천하셨습니다. 철저하게 실천하셨습니다. 그것이 바로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입니다. 이 세상에 예수님과 같은 분이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굳이 그리스도인이 아니더라도 그것만큼은 동의합니다. 

간디 같은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는 않았지만 존경했습니다. 그가 늘 하는 말이 있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이 하는 짓은 본받지 말되 그리스도인들이 하는 말은 본받아라.’ 이것은 이십세기 그리스도인들에 대한 최고의 비판의 말입니다. 기독교에 대한 비판이 아니지만 기독교인에 대한 비판입니다. 특별히 서구 기독교문명에 대한 비판이었습니다. 입만 살아있었다는 얘기입니다. 입은 바른 말을 했지만 행동이 따라주지 못했다는 지적입니다. 

이 비판을 오늘날 대한민국 사회에 그대로 옮겨올 수도 있습니다. 대한민국의 그리스도인들도 말하는 것만 들으면 천사 같은데 행동하는 것은 거기에 따르지 못하고 그리고 요즘에는 말하는 것조차도 시원치 않습니다. 오히려 그리스도인의 말이 사회갈등을 유발시키고 그리고 지탄을 받는 결과를 보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함께 생각해야 되는 것은 왜 우리가 나름대로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려고 하는데 열심히 신앙대로 살려고 하는 것이 갈등을 빚고 지탄의 대상이 되고 결과가 좋지 않을 때가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신앙자체에 어떤 문제가 있기 때문이냐. 아니면 우리가 신앙을 적용하는 과정에 문제가 있어서 그런 것이냐. 

지하철역이나 명동에서 열심히 노방전도 하는 분들을 보면 그건 상당한 열정이 있지 않고는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웬만한 정성이 없이는 그렇게 길거리에서 전도할 수 없습니다. 그렇지만 그것에 대한 평가는 어떠합니까. 좋지 않습니다. 사람들이 눈살을 찌푸립니다. 이건 비그리스도인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인들도 마찬가지입니다. 불편하게 생각하고 오히려 부정적인 결과를 낳는 것 같음을 느낍니다. 이것은 정확한 느낌입니다. 우리가 정확하게 분별하는 것입니다. 

제가 고등학생이었을 때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신앙이 뜨거워졌습니다. 그때부터 하나님의 종이 되겠다고 다짐을 했었습니다. 하루는 저의 부모님과 교포가 운영하는 어느 잡화상에 들어갔습니다. 무슨 일로 갔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는데 아무튼 부모님과 함께 들어갈 일이 있었어요. 그런데 잡화점 내의 벽에 인도 마하라지 구루의 집회 전단지가 붙어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마하라지 구루는 그 당시의 북미 젊은이들에게 선풍적인 인기를 끌고 있었던 힌두교 교주였습니다. 비틀즈도 한때 심취한 적이 있는 종교입니다. 

저는 그 전단지를 보는 순간에 흥분했습니다. 뭔지 모르지만 속에서 분노가 솟아올랐어요. 그래서 순간 저는 그 포스터를 벽에서 찢어내서 땅바닥에 던지고 발로 밟았습니다. 그 가게 주인이 놀라서 뛰어왔습니다. 그리고 그걸 지켜보신 부모님의 당황함을 상상하실 수가 있으실 것입니다. 순간적으로 일어난 일입니다. 저는 그 순간 뭔가 제가 큰 실수를 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것도 부모님 앞에서. 당연히 부모님은 그 가게 주인에게 사과하셨고 저는 저의 행동을 설명해야 했습니다. ‘나는 그리스도인인데 이 힌두교 교주는 사이비이다. 이런 포스터가 여기 붙어 있어서 사람들에게 그 모임을 선전하는 것을 나는 참을 수가 없어서 이렇게 했다. 죄송하다.’ 

그런데 알고 보니까 그 가게 주인도 교회를 다니는 사람이었어요. 그런데 그냥 아는 손님이 붙여달라고 해서 별생각 없이 붙여놓은 것이었습니다. 그렇지만 저의 돌발적인 행동은 당연히 무례한 일이고 도리에 어긋나는 일이고 특별히 남의 영업장에서 그렇게 하는 것은 전혀 명분이 없는 일이었지요. 

세월이 지나고 목사가 된 지금, 저는 과거에 그런 실수를 저지른 경험이 있었다는 것이 저에게 좋은 교훈이 됐다고 생각합니다. 그때만 제가 실수를 저지를 것은 아닙니다. 그 이후에도 종류는 다르지만 다른 실수를 많이 저질렀어요. 한번은 사람을 고쳐주겠다고 휠체어에 있는 사람을 잡아 일으킨 적도 있습니다. 그 사람이 나았다면 놀라운 일이겠지만 낫지 않은 상황에서, 그것도 사람들이 지켜보는 상황에서 얼마나 민망한지. 제 자신도 민망하고 본인에게도 민망하고. 해보지 않으면 말을 하지 마세요. 

또 한 번은 대학교 룸메이트를 전도하겠다고 하다가 그 속에 마귀가 있다고 말하는 바람에 그 이후에 얼굴을 안보고 산 적도 있습니다. 제가 창피함을 무릅쓰고 이런 말을 여러분에게 말씀드리는 이유는 저는 나름대로 열심히 믿는다고 한 일인데 왜 이상하게도 엉뚱한 결과를 낳았느냐 하는 것을 말씀드리기 위한 것입니다. 그 대답은 어렵지 않습니다. 오늘 본문에 그 대답이 나와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최고의 덕목이 무엇이냐. 뭐니 뭐니 해도 사랑입니다, 사랑. 사랑이 기준입니다. 우리가 어떤 일을 하던 산을 움직이든 예언을 하던 비밀을 알든 구제를 하든 어떤 일을 하던 간에 그것이 옳은 것이냐 그른 것이냐를 판단하게 만드는 궁극적인 기준은 사랑으로 했느냐 하는 것입니다. 사랑에서 비롯되었고 사랑으로 실천했느냐 하는 것인데 만약 아무리 믿음이든 기적이든 은사든 선행이라 할지라도 그것이 사랑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고 사랑을 실천하지 않고 사랑을 전달해주는데 실패했다면 그것은 무익한, 아무 도움이 되지 않는, 적어도 하나님 보시기에 당사자에게 나에게 어느 누구에게도 그것이 별로 도움이 되지 않는 그런 종교의 행위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사도바울이 경고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도바울이 말하는 것이 ‘내가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그 말은 내 말이 아무리 옳더라도, 내가 옳은 말을 하더라도 사랑이 없이 하는 말이라면 그것은 꽹과리처럼 시끄럽다는 것입니다. 소음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옳은 말을 하더라도 사랑으로 하는 말이 아니라면 그 말은 울리는 꽹과리처럼 시끄럽다는 것입니다. ‘또 내가 예언하는 능이 있어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알고 산을 옮길만한 모든 믿음이 있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것도 아니요’ 그러니까 산을 움직일만한 믿음이 있더라도 사랑을 결여할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사랑이 없는 믿음, 사랑이 없는 은사, 사랑이 없는 능력, 사랑이 없는 신앙, 사랑이 없는 경건, 이것을 사도바울이 지적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틀리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에. 

사도바울이 이와 같은 글을 쓸 수 있었던 이유는 본인이 아마도 그것을 경험했기 때문이라고 봅니다. 본인이 그것을 가지고 씨름했어요. 왜냐하면 본인은 산을 움직이는 믿음도 가졌고 모든 비밀을 아는 지식도 있었고 그의 삶을 헌신한 적도 있어요. 그런데 뭔가 부족하다는 것을 깨달았어요. 그 부족한 것이 무엇이냐. 그것이 바로 사랑이었다는 것을 깨달은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바울은 구체적인 예를 들고 있는 것입니다. 사랑이 없는 은사, 사랑 없는 예언, 사랑 없는 믿음, 사랑 없는 능력, 심지어 사랑 없는 구제, 사랑 없는 선행. 선행은 선행이지 무슨 사랑 없는 선행이 있을 수 있느냐. 사랑 없이도 선행할 수 있습니다. 굳이 남에게 보이기 위한 것이 아니더라도 나의 만족을 위해서 나의 허영을 위해서 나의 의무감 때문에 안할 수가 없어서 뺏기는 마음으로 내 자신의 마음의 평강을 얻기 위하여. 사람은 여러 가지 동기로 선행을 합니다마는 그러나 하나님이 귀하게 보시는 것은 사랑으로 하는 선행입니다. 사랑하기 때문에, 나를 위한 것이 아닌 상대방을 사랑하기 때문에 베푸는 것, 이웃을 사랑하고 형제를 사랑하는 것을 귀중하게 여기시는 것입니다. 

그러면 사랑이 도대체 무엇이냐. 그것을 바울이 설명하고 있지 않습니까. ''사랑은 오래 참고 온유하고 투기하는 자가 되지 않고 자랑하지 않고 교만하지 않고 무례히 행치 않고 자기 유익을 구치 않고 성내지 않고 악한 것을 생각지 않고 모든 것을 참고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 사랑은 언제까지든지 떨어지지 아니하나'' 그 말은 사랑은 실패하지 않는다는 얘기입니다. 다른 것은 실패할 수 있어요. 지식도 예언도 폐하나 사랑은 실패하지 않습니다. 정말로 인간 정신의 진화라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어떻게 이루어질 것이냐. 지식을 많이 축적해서 되는 게 아니고 문명을 이루어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고 사랑하는 법을 배울 수 있다면 그것이 바로 인간 영혼의 발전이요 인간 영혼의 성숙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한 가지 질문을 할 수 있는데 내가 사랑만 제대로 배웠다면 굳이 예수님을 안 믿어도 되느냐. 내가 사랑을 실천하면서 산다면 굳이 그리스도인이 되지 않아도 되느냐. 아주 중요한 문제에요.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세상에 보내신 목적이 우리로 하여금 사랑을 배우게 하기 위한 것이었느냐. 그래서 사랑을 제대로 배우기만 했다면 그리스도인이든 그리스도인이 아니든 하나님의 목적을 이룬 것이냐. 이건 한번쯤은 물어보아야 될 질문인데 대답은 그렇지 않습니다. 

사랑이 없는 믿음은 무익하다고 말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사랑이 믿음을 대신한다고 얘기하지 않았어요. 믿음이 없더라도 사랑만 있으면 된다고 말한 게 아니에요. 사랑이 믿음을 대체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렇기 때문에 바울이 말하기를 ‘그런즉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사랑만 있으면 다른 것 없어도 된다고 말하지 않았어요. 

여기에서 믿음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말하는 것이고 소망은 천국에 대한 소망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 말은 인류가 사랑하는 법만 배우면 천국에 대해서 더 이상 믿을 필요가 없다든가, 천국이라는 것은 인간이 서로 사랑하게 하기 위하여 하나님이 던져준 당근에 불과하다, 그런 게 아니고 이 모두가 진리라는 얘기입니다. 믿음 ․ 소망 ․ 사랑은 항상 필요한 것입니다. ‘그런즉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중의 제일은 사랑이니라’ 

이건 믿는 사람들만의 얘기지만 사랑은 신앙의 최후의 보루입니다. 625전쟁 때 국군이 인민군에게 밀리고 밀려 어디까지 내려갔습니까. 낙동강 전선까지 내려갔어요. 낙동강 전선이 최후의 보루였습니다. 만일 낙동강이 밀리면 국군은 이제 해운대 바다에 코를 박고 죽어야 됩니다. 최후의 보루. 사랑도 낙동강 전선과 같습니다. 최후의 보루입니다. 때에 따라서, 상황에 따라서 그럴 리는 없겠지만 기독교 신앙이 밀려갈 때가 있습니다. 

기독교 신앙을 사람들이 의심하고 비판하고 신앙을 떠나고 그래서 기독교 신앙이 밀려가고 밀려갈 때가 있는데 우리 자신도 마찬가지에요. 신앙에 회의가 들 때가 있어요. 의심이 갈 때가 있어요. 그래서 밀려가요. 그러나 결코 더 이상 밀릴 수 없는 최후의 보루가 있는데 그게 바로 사랑의 진리입니다. 거기서는 더 이상 밀리지 않습니다. 거기서는 오히려 이보다 더 큰 진리가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고 거기에서 오히려 기독교 신앙의 귀중함을 깨달을 수가 있습니다. 

우리 인생도 그렇습니다. 우리 인생도 밀릴 때가 있습니다. 돈을 잃고 사업을 잃고 아픔을 겪고 그래서 인생의 낙동강 전선까지 밀려 내려올 때가 있는데 그렇지만 다른 것은 잃었을지라도 내가 사랑하는 법을 배웠다면, 내가 사랑을 조금이라도 실천할 수 있었다면 내 인생은 적자가 아닙니다. 손해 본 것이 아닙니다. 귀중한 것을 얻었습니다. 

또 그리스도인으로서 내가 설사 큰일을 하지 못했어요. 죽은 자를 일으키지 못했고 산을 움직이지 못했고 큰 은사를 가지지 못했고 또 큰 봉사도 하지 못했을지라도 내가 그리스도인으로서 사랑하는 법을 터득하고 하나님의 사랑을 알게 되고 내가 조금이라도 사랑을 실천하였다면 나의 신앙생활은 결코 허비된 것이 아닙니다. 나의 신앙생활에는 반드시 보람이 있었고 좋은 열매가 있었어요. 사랑이 궁극적인 기준이에요. 이것이 최후의 보루에요. 사도바울이 그것을 우리에게 말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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