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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처처에 지진과 기근과 전쟁이 있으리라 (막 13: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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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처에 지진과 기근과 전쟁이 있으리라 (막 13:1-8)

1 예수께서 성전에서 나가실 때에 제자 중 하나가 가로되 선생님이여 보소서 이 돌들이 어떠하며 이 건물들이 어떠하니이까 2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가 이 큰 건물들을 보느냐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고 다 무너뜨려지리라 하시니라 3 예수께서 감람 산에서 성전을 마주 대하여 앉으셨을 때에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과 안드레가 종용히 묻자오되 4 우리에게 이르소서 어느 때에 이런 일이 있겠사오며 이 모든 일이 이루려 할 때에 무슨 징조가 있사오리이까 5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가 사람의 미혹을 받지 않도록 주의하라 6 많은 사람이 내 이름으로 와서 이르되 내가 그로라 하여 많은 사람을 미혹케 하리라 7 난리와 난리 소문을 들을 때에 두려워 말라 이런 일이 있어야 하되 끝은 아직 아니니라 8 민족이 민족을, 나라가 나라를 대적하여 일어나겠고 처처에 지진이 있으며 기근이 있으리니 이는 재난의 시작이니라 


어느 때에 이런 일이 있겠사오며 

요 근래 일어나고 있는 자연재해가 심상치 않습니다. 일본 열도에는 강도 9.0에 해당하는 강력한 지진이 발생했습니다. 이로 말미암아 쓰나미가 발생했는데 그 높이가 10m를 넘어 심한 곳은 15m에 이르렀다고 합니다. 사망 실종자가 수만 명에 이를 것이라고 예상을 합니다. 더욱 우려스러운 것은 후쿠시마 원전 폭발 위험입니다. 지금도 방사능을 쏟아내고 있고 이번 주말이 고비가 될 전망입니다. 이미 외국인들의 탈출행렬이 시작되었고 우리나라도 그 여파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습니다. 가장 가까운 나라인 일본에서 일어난 재난이고, 또 미디어의 발달로 그 현장이 생생히 보도되면서 그 위기감은 터 큽니다. 

최근 들어 자연재해는 그 위력이 세어지고 횟수도 잦아지고 있습니다. 몇 년 전에는 인도네시아의 강진과 쓰나미로 근 20만 명이 사망했습니다. 중국의 쓰촨 성 지진도 있었고 (9만명 사망), 작년에는 아이티 지진(25만명 사망 추정)과 칠레 지진, 뉴질랜드 지진이 있었습니다. 백두산도 곧 화산폭발을 할 우려가 있고 그 규모도 엄청날 것이라고 예상을 합니다. 비나 폭풍의 강도나 그로 인한 피해도 갈수록 커져가는 양상입니다. 또한 9.11 테러 이후로 중동에는 전쟁이 끊일 날이 없습니다. 이번에는 민주화 시위로 말미암아 중동이 혼란스럽습니다. 세계화의 과정에서 민족 간의 경계가 완화될 거라 생각했는데 동아시아 지역에서는 그 갈등이 더 첨예화되고 있습니다. 

이런 소식이 들릴 때마다 우리는 종말에 관한 예수님의 말씀을 떠올리게 됩니다. 8절입니다. “민족이 민족을, 나라가 나라를 대적하여 일어나겠고 처처에 지진이 있으며 기근이 있으리니 이는 재난의 시작이니라” 혹시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그 종말이 가까워온 것은 아닌가 하는 두려움이 들기도 합니다. 실제 주님의 재림은 가까워 온 것일까요? 

그렇지만 인류 역사를 한번 뒤돌아보면 인간들의 삶에서 종말적 위기상황은 끊임없이 있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1-2절에서 예수님이 말씀하시던 대로 AD 70년에 예루살렘과 그 성전이 돌 위에 돌 하나도 남기지 않고 파괴되었습니다. 로마에 대항한 유대 독립전쟁에서 패배했던 예루살렘에서는 학살의 피로 타오르던 불길마저 꺼질 정도로 잔인한 보복이 이루어졌습니다. 그 때 11만 명이 죽고 9만여 명이 포로로 끌려갔습니다. 이 모습을 보며 신앙인들은 이때가 종말인 줄 알았습니다. 교회사가 유세비우스는 그 위기의 때에 예루살렘에 있던 초대교회는 절벽 위에 세운 도시인 펠라로 달아났다고 합니다. 14절의 “유대에 있는 자들은 산으로 도망할지어다”는 예수님의 말씀을 좇아서였습니다. 그러나 그때가 종말은 아니었습니다. 그 이후로 이미 2천 년이 지났습니다. 

베수비오 산이 폭발하여 폼페이라는 한 도시가 순식간에 사라졌을 때 그때가 사람들은 종말이라 생각하지 않았겠습니까? 14세기 유럽에 페스트가 번져 유럽 인구의 3분의 1인 3천만 명이 페스트로 죽어갔습니다. 마을마다 시체 썩는 냄새가 진동하고 균을 박멸하기 위한 불길이 솟았을 때 사람들은 그때가 종말이라 생각하지 않았겠습니까? 20세기에 들어서 제 1, 2차 세계 대전으로 각각 1천 6백만 명과 5천만 명 이상 사람들이 죽어갈 때 그 때가 종말은 아니었을까요?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핵폭탄이 떨어져 순식간에 20만여 명이 죽어갈 때 그때가 종말은 아니었을까요? 

인류역사에서 종말이라고 생각했던 순간들이 많았지만 종말은 오지 않았습니다. 1999년에서 2000년으로 넘어가는 역사적 변환기에 세대주의 종말론자들은 인간의 시간인 6천 년의 역사가 끝날 것이라고 예상했지만 지금은 2000년을 훌쩍 넘기고 2011년입니다. 인류 역사에 앞으로도 많은 위기들이 있을 것이지만 종말은 쉬 오지 않을 것 같습니다. 예수님도 종말에 대해 말씀하시면서 그 날이 당장은 아님을 여러 곳에 덧붙여 놓았습니다. 7절입니다. “이런 일이 있어야 하되 끝은 아직 아니니라” 8절입니다. “이는 재난의 시작이라” 10절입니다. “또 복음이 먼저 만국에 전파되어야 한다.” 32절입니다. “그러나 그 날과 그 때는 아무도 모르나니 하늘에 있는 천사들도 아들도 모르고 아버지만 아시느니라” 

마가복음과 성경에서 주님께서 말씀하신 종말에 대한 교훈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 종말은 있다. 둘째, 종말의 징조도 있다. 셋째, 그러나 그때는 아무도 모른다. 넷째, 하나님의 어떤 계획에 의해서 종말은 연기되고 있다. 다섯째, 그 종말이 언제일지 모르니 항상 깨어 있어라. 

그러니 무엇보다 당장 종말이 임한다는 사람들을 조심하십시오. 그때와 그 시간은 아무도 모릅니다. 이것으로 사람들의 위기의식을 조장하려는 궤계에 빠져서는 안 됩니다. 이단들이 주로 이런 종말론을 유포합니다. 사람들의 공포를 조장하여 자기 단체로 끌어들이고, 우리 가진 것을 빼앗아가려는 수작입니다. 

다 무너뜨려지리라 

그러나 동시에 세상의 종말이 없을 것 같이 무감각하게 살아서도 안 됩니다. 주님은 우리가 주님께서 곧 오신다는 종말의식 가운데 살기를 원합니다. 여러 이유를 들 수 있지만 이런 종말의식 가운데 살아야 우리가 나태하거나 어리석은 일에 힘을 쏟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당장 내일 종말이 임한다면 오늘 우리는 인생에서 가장 소중하다고 생각하는 것에 힘을 쓰지 않겠습니까? 이것이 단순히 의식만이 아닌 까닭은 우리에게 우주적 종말은 멀지라도 개인적 종말, 곧 죽음은 언제든 곧 닥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지난 2007년도에 개봉되었던 영화 중에 《버킷 리스트》가 있습니다. 버킷 리스트는 사람이 죽기 전에 꼭 하고 싶은 소원을 적은 리스트를 말합니다. 여러분은 어떤 리스트를 작성하시겠습니까? 이 영화는 뇌종양으로 시한부 인생을 사는 두 사람이 병원에서 우연히 만나면서 시작합니다. 한 사람은 종합병원을 소유했지만 외로운 한 부자였고, 다른 하나는 평범하지만 행복한 가족을 가진 보통 사람이었습니다. 이 두 사람이 죽기 전에 꼭 하고 싶은 일들의 리스트를 만들고 그 리스트대로 하나하나 실행해 나가는 이야기입니다. 그들이 작성한 리스트에는 “장엄한 광경 보기, 낯선 사람 도와주기, 눈물 날 때까지 웃기, 최고의 미녀와 키스하기, 오토바이로 만리장성 질주하기, 세렝게티에서 사자 사냥” 등이 있습니다. 이 소원이 이루어질 때마다 그들은 그 리스트에 줄을 그어갔습니다. 영화의 마지막은 두 사람이 죽고 화장시킨 재를 깡통에 담아 히말라야 전경이 보이는 높은 산에 두며 ‘장엄한 광경 보기’라는 마지막 소원에 줄을 긋는 것으로 끝을 맺습니다. 이 과정에서 영화는 관객들에게 가족의 사랑, 늘 기분 좋게 기쁘게 살기, 남을 기쁘게 하는 것 등이 가장 소중한 가치임을 일깨워줍니다. 종말을 앞에 두고서야 인간은 자신의 인생에서 가장 소중한 것이 무엇인가를 깨닫습니다. 

우리에게 종말은 쓰나미처럼 닥칠 것입니다. 미처 준비할 틈이 없습니다. 지진과 쓰나미에 철저하게 대비했던 일본도 처참하게 당하는 모습에서 자연 재해 앞에 인간은 너무나 무기력함을 깨닫습니다. 우리 인생에서 죽음이나 종말도 예상할 수 없는 방식으로 임할 것이고 그것을 피하지 못할 것입니다. 그 쓰나미 앞에 우리가 지은 것들은 모래 위에 쌓은 것 마냥 무너질 허망한 것들입니까? 아니면 반석 위에 선 집처럼 무너지지 않을 영원한 것들입니까? 물질도 무너질 것입니다. 권력이나 명예도 무너질 것입니다. 화려하게 쌓은 성전도 무너질 것입니다. 주님은 사랑만이 영원하다 말씀하십니다. 말씀 순종만이 든든한 반석이라 말씀합니다. 선행과 자비만이 좀이나 동록이 해하지 못하고 훔쳐가지 못하는 하늘나라의 보물이라 말씀합니다. 예수님을 알고 그 은혜의 품에 거하는 자만이 마지막 심판의 쓰나미를 견딜 수 있다고 말씀합니다. 

최근 일련의 재난들을 보면서 위기는 정말 우리 가까이 있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동안 우리는 상대적으로 평온한 삶을 살았습니다. 이런 평화가 계속 지속될 것 같은 착각을 하며 살았습니다. 경제적 위기가 있다고는 하지만 그런데도 견딜만 했습니다. 그런데 작년 연평도 포격을 보면서 아 우리나라에서도 전쟁이 일어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처음으로 강하게 들었습니다. 왜 전쟁이 일어납니까? 도널드 케이건은 인간이 전쟁을 하게 되는 가장 중요한 세 가지 동기를 듭니다. 경쟁자에 대한 두려움, 경제적 이익, 명예라고 들고 있습니다. 남북한이 꼭 그런 꼴입니다. 작년 말과 금년 초를 휩쓸고 간 구제역 사태는 전염병의 무서움과 함께 지옥의 참상을 떠오르게 하였습니다. 이번 일본의 지진 재난은 가까운 나라여서 그런지 몰라도 남의 일 같지가 않습니다. 우리에게도 어떤 재난이 순식간에 덮칠 수도 있겠구나 하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습니다. 

문제는 이런 위기감을 느끼면서도 편안함과 과거의 습성에 취해 생각과 삶의 태도를 바꾸려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톨스토이가『참회록』에서 묘사한 인간의 모습과 같다 할 것입니다. 초원에서 맹수의 습격을 받은 한 나그네가 맹수를 피해 물속으로 들어갔습니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그 물속에는 커다란 용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할 수 없이 나그네는 땅과 호수의 경사지 틈바귀에 나 있다는 야생관목 가지에 매달려 간신히 몸을 지탱하였습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검은 쥐와 흰 쥐 두 마리가 나타나서 자신이 매달려 있는 관목 줄기를 갉아먹기 시작하였습니다. 이제 나그네는 죽음을 피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그런데 마침 관목 잎에 꿀이 묻어 있었습니다. 나그네는 그런 위급한 상황에 처해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꿀을 혓바닥으로 핥기 시작합니다. 순간 나그네는 자기가 어떤 처지인지 잊고 말았습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위기가 바로 눈앞에 있다 말씀하십니다. 그 위기 앞에서 깨어 있을 것을 요구하십니다. 삶의 태도를 바꿀 것을 요구하십니다. 


하나님은 심판자이신가? 

그렇지만 이런 재난이나 심판 앞에 서면 우리는 하나님을 원망할 수밖에 없습니다. 모든 것을 주관하시는 분이 당신일진대 이번 지진이나 인류가 당한 모든 재난에 대해서 하나님은 전혀 잘못이 없느냐, 너무 가혹하지 않느냐는 생각입니다. 저는 재난에 대해서 하나님의 책임과 인간의 책임에 대해서 나누어서 생각해 보았으면 합니다. 

인류에 많은 재난이 있었지만 인간을 더욱더 종말적 상황으로 몰아가는 것은 다름 아니라 인간들입니다. 따지고 보면 재난으로 죽은 사람보다 전쟁으로 죽어간 사람들이 더 많을 것입니다. 14세기에 창궐했던 페스트란 것도 칭기스칸의 군대가 유럽을 휩쓸면서 몰고 간 쥐들을 통해 전파되었다는 설이 유력합니다. 아메리카 대륙의 원주민들을 죽음으로 몰고 갔던 것도 유럽인들이 가지고 온 홍역이나 콜레라였습니다. 제 1, 2차 세계 대전은 말할 것도 없습니다. 어떤 재난보다 전쟁은 수많은 사람들의 생명을 앗아갔습니다. 

이번 일본의 대지진도 마찬가지입니다. 그 엄청난 참상에 애도하던 사람들의 분위기는 후쿠시마 원전 폭발에 대한 두려움으로 일시에 바뀌어버렸습니다. 자연에는 늘상 재해가 있지만 그 재해를 더 키우는 것은 인간입니다. 인간은 자연 앞에서 겸손해야 합니다. 아무리 안전하다고 하지만 원전은 너무도 위험합니다. 진도 7.0에 견딜 수 있도록 만들어졌다고는 하지만 이번에 보듯이 전력선이 끊어지는 예상치 못한 사고로 커다란 위기에 빠지고 말았습니다. 불완전한 인간에게 원자력과 같은 것은 너무 위험합니다. 다른 것이야 실수하면 고치면 되지만 지난 체르노빌 원전 사고와 같이 원전은 돌이킬 수 없는 엄청난 재앙을 몰고 옵니다. 전세계적으로 400여 기의 원전과 1만여 기의 핵폭탄을 가지고 있는 인류는 그야말로 휘발류를 끼얹은 장작더미 위에 앉아 불장난 하고 있는 것과 같은 형국이라 할 것입니다. 

지난 1986년에 챌린저 호 우주선 폭발 사건이 있었습니다. 그 장면을 기억하시는 분이 있을 것입니다. 승무원 7명을 싣고 나사본부에서 발사된 우주선이 73초만에 공중에서 폭발했고 그 장면이 TV로 생생하게 방영되었습니다. 이후에 기술자들이 사고 원인을 분석해 보니 로켓 부스터의 틈새를 막는 고무링이 문제였습니다. 그날 날씨가 추워서 고무링이 제 역할을 못했고 그 사이로 뜨거운 분사 개스가 새어나와 대형사고로 이어졌습니다. 정말 극히 사소한 부품 하나가 엄청난 비용의 우주선과 소중한 생명을 잃게 만들었던 것입니다. 나사 당국은 전혀 이 문제를 몰랐을까요? 아닙니다. 문제는 인식했지만 이 정도는 수용 가능한 위험 부류로 분류했습니다. 수용가능하다는 것은 기술적으로 문제는 될 수 있지만 희박하다는 평가였습니다. 그러나 결국 이 때문에 챌린저 호가 폭발하고 말았습니다. 안일했다기보다는 기술적 예상을 벗어난 사태에 당한 것입니다. 

제가 이 사례를 드는 이유는 인간의 기술력이 완전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실제 모든 기계들은 처음부터 완벽하게 구성하기 어렵고 시행착오를 거쳐 완벽해집니다. 원전도 그래서 안전하다는 말을 사용하지 않고 안전을 추구한다는 말을 사용합니다. 그러나 원전이란 것은 시행착오를 운운하기에 그 대가가 너무 큽니다. 인간은 겸손해야 합니다. 자기가 위험을 컨트롤할 수 있다고 믿는 것이 교만입니다. 

오늘날 대부분의 전기가 원전에서 나오는데 그러면 전기가 부족하면 어떻게 할 것이냐는 반론도 있을 수 있습니다. 만약 전기가 부족하면 그 부족함을 견뎌야 합니다. 아무 생각 없이 자연이라는 재산을 흥청망청 쓰고 탕진해서는 안 됩니다. 이제는 좀 불편하게 살고, 좀 없이 사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그래야 인간이 지구상에 붙어 살 수 있습니다. 인류는 하나님이 심판을 결정하기도 전에 스스로 심판을 자초하는 매우 위험한 도박을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심판 부분에 대해서도 언급이 더 필요합니다. 지진과 쓰나미나 질병이나 모든 심판의 배후에는 하나님의 손이 있습니까? 심판의 원흉이 하나님입니까? 이번 일본의 지진 사태에 대해서 한국교회 몇 목사님이 일본의 천황과 우상숭배에 대한 하나님의 경고 또는 그 죄에 대한 심판으로 해석하여 많은 지탄을 받고 있습니다. 단지 이 분들 뿐만 아니라 많은 신앙인들이 이런 해석을 하곤 합니다. 인도의 지진에 대해서 선교사 피살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라거나, 인도네시아 지진에 대해서는 향락과 무슬림에 대한 심판이라거나, 미국 뉴올리언즈의 카트리나 재난에 대해서 동성애에 대한 심판이라거나, 아이티 지진에 대해서는 부두교를 믿는 이단에 대한 심판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렇다면 예수 잘 믿는 뉴질랜드 크라이스트처치에 지진이 임해 수백 명이 죽고 교회 성당이 무너진 것은 또 어떻게 해석해야 합니까? 

실제 구약에서 노아 홍수나 소돔과 고모라를 하나님이 홍수와 불로 심판했다는 것을 우리는 압니다. 또한 구약 선지자들의 심판과 경고의 메시지를 통해 우리는 하나님의 심판에 대해서 익히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무비판적으로 현대에 일어나는 사건들 또한 이런 구약의 눈을 통해서 해석하려는 경향이 신앙인들에게는 강합니다. 그러나 그런 심판자 하나님의 모습은 구약의 눈을 통해 발견된 하나님일 뿐입니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계시된 하나님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계시된 하나님은 심판자가 아니라 인류를 사랑하여 자신의 목숨을 내어놓고 십자가에 달리신 하나님입니다. 

저는 그리스도를 통해서 발견된 하나님의 모습을 이렇게 표현하고 싶습니다. 매우 엄격한 아버지가 있었습니다. 무서워 그 앞에 가기도 두려웠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그 아버지가 우리 목숨을 구하고 대신 돌아가셨습니다. 그 놀라운 사랑을 체험한 후 아버지를 다시 보기 시작했습니다. 그 눈으로 과거의 사건들을 들추어가다 보니 아버지의 엄한 행동 배후에는 깊은 사랑이 담겨 있음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매처럼 보였는데 그것은 사랑이었음을 알게 된 것입니다. 이것이 십자가의 하나님이십니다. 십자가를 통해서 우리에게 계시된 하나님의 모습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이 무자비한 심판의 하나님이 아니라 사랑의 하나님임을 깨닫기를 원하십니다. 악에 대해서 싸우고 인간이 당하는 고난에 대해서 함께 슬퍼하고 투쟁하는 하나님으로 기억되시길 원하십니다. 

물론 우리는 하나님이 모든 우주와 역사를 다스리고 섭리하신다는 사실을 믿습니다. 그래서 모든 사건과 재난 배후에는 하나님이 있음을 믿습니다. 그러기에 심판주 하나님과 사랑의 하나님을 어떻게 조화시켜야 할지 어렵습니다. 이 문제에 있어서 인간은 자신의 어리석음을 고백할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이 만드신 수천 수조개의 별들 중 하나인 태양도 맨눈으로 바라보지 못하는 인간이 어떻게 좁은 지혜로 하나님을 이해할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에 대해서 스스로 안다 하고 또 하나님의 심판에 대해서 함부로 규정하는 자들에게는 전도서 말씀이 제격이라 할 것입니다. “너는 하나님 앞에서 함부로 입을 열지 말며 급한 마음으로 말을 내지 말라 하나님은 하늘에 계시고 너는 땅에 있음이니라 그런즉 마땅히 말을 적게 할 것이라”(전5:2) 

어떤 한 사건 한 사건에 담긴 하나님의 뜻과 섭리를 우리는 다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자신이 어떤 분이시고 어떻게 이해되시기를 원하시는지 예수님을 통해서 계시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십자가를 통해서 자신을 계시하셨고 십자가에 달리신 하나님으로서 이해되시길 원하십니다. 아무도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지만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의 본모습과 진심이 드러났습니다. 이제 우리가 붙잡아야 할 하나님은 십자가의 하나님입니다. 저는 이를 비유로 설명하고 싶습니다. 어떤 아버지가 있는데 이 아버지는 판사입니다. 그런데 아들이 죄를 지어서 법정에 끌려왔습니다. 판사로서의 아버지는 엄격한 심판을 물어야 합니다. 그러나 한 아이의 아버지로서의 판사는 최선을 다하여 어떻게든 아들이 위기를 빠져나갈 수 있도록 도와야 합니다. 우리가 그 아들이라면 누구를 붙잡아야 합니까? ‘판사’로서의 아버지입니까? 아니면 ‘아버지’로서의 판사입니까? 

구약의 모든 말씀들은 십자가의 빛에서 다시 조명되어야 합니다. 십자가를 벗어나서 구약 그대로 심판의 메시지로만 이해하는 것은 유대교의 해석을 될 수 있을지언정 기독교의 해석은 될 수 없습니다. 저는 일본에 임한 재난이나 역사에서 일어나는 일련의 재난들을 심판으로 해석하는 사람들의 모습에서 유대교의 사제들을 봅니다. 그들은 그리스도교의 제자들이 아닙니다. 지금 그리스도는 어디에 계십니까? 재난으로, 지진으로 고통 받는 자들과 함께 하고 계십니다. 그리스도는 인류 역사와 지구라는 땅덩어리에서 벌어지는 살육과 재난에 대해서 비통해 하고 계십니다. 그리스도의 제자들은 예수님처럼 고통당하는 자들의 아픔과 함께 하며 그들의 고난을 대신 짊어지려 하는 자들입니다. 


깨어 있으라 

주님은 종말에 대한 교훈을 말씀하시며 우리에게 깨어 있을 것을 요구하십니다. 33절입니다. “주의하라 깨어 있으라 그 때가 언제인지 알지 못함이니라” 깨어 있는 것은 기도에 열심하는 것을 말합니다. “항상 기도하며 깨어 있으라”(눅21:36). 기도하는 자는 세속에 물들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분별할 수 있습니다. 깨어 있는 것은 충성됨으로 자기가 맡은 일에 최선을 다하는 것입니다. “주의하라 깨어 있으라 그 때가 언제인지 알지 못함이니라 가령 사람이 집을 떠나 타국으로 갈 때에 그 종들에게 권한을 주어 각각 사무를 맡기며 문지기에게 깨어 있으라 명함과 같으니”(막13:33-34) 세상을 떠나 기도원으로 들어가라는 말씀이 아닙니다. 세상에서 맡겨진 일을 열심히 감당하고 있는 자 그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게 될 것입니다. 

주님은 도적같이 오신다고 하였지만 깨어 있는 자에게는 밤은 없습니다. 사도 바울은 말씀합니다. “형제들아 너희는 어두움에 있지 아니하매 그 날이 도적같이 너희에게 임하지 못하리니”(살전5:4) 미리 준비하고 있는 자가 깨어 있는 자입니다. 신랑이 오실 때 자다가도 일어나 준비된 기름에 불만 붙이면 됩니다. 사도 바울은 깨어 있는 자들에 대해서 이렇게 설명합니다. “우리는 낮에 속하였으니 근신하여 믿음과 사랑의 흉배를 붙이고 구원의 소망의 투구를 쓰자”(살전5:8) 믿음에 굳건히 서 있는 자가 깨어 있는 자입니다. 사랑을 행하는 자가 깨어 있는 자입니다. 미래에 임할 구원을 사모하며 기다리는 자가 깨어 있는 자입니다. 우리 모두 깨어서 종말의 때를 준비하며 영광스런 하늘 잔치에 참여할 수 있는 저와 여러분 되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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