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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가서 내 말로 그들에게 고하라 (겔 3:4-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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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서 내 말로 그들에게 고하라 (겔 3:4-21)


수술을 집도하는 의사 곁에는 그를 돕는 간호사들이 반드시 있기 마련입니다.
그런데 그 간호사들이 하는 일들을 보면 사실상 별로 어려운 것 같지는 않습니다.
의사가 "메스"라고 말하면서 손을 펴 내밀면 그 위에 메스를 올려 주면 되고, 의사가 어떤 수술 부위를 붙잡고 있으라고 하면 그대로 하면 되고, 또 간간히 환자의 혈압이나 맥박의 수치가 얼마나 되는지 물으면 그냥 모니터에 나오는 숫자를 읽어 주면 되는 것입니다.
  
어떻게 보면 수술실의 의사를 보조하는 것은 꼭 전문적인 간호사가 아니라 보통 사람이라도 얼마든지 할 수 있는 일처럼 보이는 것입니다.
하지만 물론 그렇지는 않습니다.
일 자체는 간단하고 쉬워 보이지만 그것은 사람의 생명을 다루는 아주 중요한 일이기 때문에 절대로 아무나 할 수 없고 반드시 자격을 갖춘 간호사만이 수술실에 들어가서 집도 의사를 도울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전 인류 역사를 통하여 줄기차게 진행하고 계시는 구속사에서도 그런 일이 있습니다.
아주 간단하고 쉬우면서도 또한 사람의 생명이 걸려 있는 까닭에 아무에게나 맡길 수는 없는 아주 중요한 사명이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전도'입니다.
에스겔 선지자는 청년 시절에 바벨론의 포로로 잡혀가서 살던 중 나이 30세가 되던 해에 하나님께로부터 소명을 받고 선지자로서의 사역을 시작하게 됩니다.
이 시간 저와 여러분은 그 에스겔에게 하나님께서 주셨던 격려의 말씀을 통하여 오늘날의 전도자 된 우리들 역시 꼭 기억하고 또한 실천해야만 할 전도의 사명을 다시 한 번 결단해 보고자 합니다.

1. 전도는 신자라면 누구나 다 할 수 있는 '쉽고도 기본적인 사명'입니다.

4절과 5절의 본문에 "4그가 또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이스라엘 족속에게 가서 내 말로 그들에게 고하라 5너를 방언이 다르거나 말이 어려운 백성에게 보내는 것이 아니요 이스라엘 족속에게 보내는 것이라"고 기록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에스겔 선지자가 전도할 때에 조금도 어려울 것이 없는 첫 번째 이유를 두고 "인자야 이스라엘 족속에게로 가서 내 말로 그들에게 고하라"고 일러주셨습니다.
에스겔이 선포해야 할 말씀은 에스겔 자신의 머리나 마음이나 지식이나 경험에서 나온 말이 아니라, 오직 "내 말" 즉 하나님께서 전하시는 대로 하나님 당신의 말씀만을 전하면 되는 것이었습니다.
즉 에스겔은 '내가 무슨 말을 전해야 할까?'라고 머리를 짜내면서 고민할 필요는 전혀 없이 그저 하나님께서 들려주신 말씀을 그대로만 전하면 되니, 사실상 아주 간단한 일이었던 것입니다.

에스겔의 전도가 어려울 것이 없는 두 번째 이유는 하나님께서 에스겔 선지자를 "방언이 다르거나 말이 어려운 백성에게 보내는 것이 아니요 이스라엘 족속에게 보내는 것"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비록 에스겔 선지자가 살고 있는 곳은 바벨론 땅 그발 강가였지만, 그는 바벨론 사람에게가 아니라 함께 포로가 되어 살고 있는, 자기와 똑같은 언어를 쓰는 자기 동족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하게 되어 있었습니다.
오늘날로 치자면 한국 목사가 미국에 가서 목회를 하게 될 때에, 미국 사람들을 대상으로 영어 설교를 하는 것이 아니라 이민 교회에서 재미교포들을 대상으로 우리나라 말로 설교하는 것이 훨씬 더 쉬운 것과 꼭 마찬가지였던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에스겔 선지자가 말씀 선포 사명을 수행하면서 조금도 부담스러워 할 필요가 없는 더 큰 이유가 또 하나 있었습니다.
  
바로 6절부터 11절까지에 기록하기를 "6너를 방언이 다르거나 말이 어려워 네가 알아듣지 못할 열국에 보내는 것이 아니니라 내가 너를 그들에게 보내었더면 그들은 정녕 네 말을 들었으리라 7그러나 이스라엘 족속은 이마가 굳고 마음이 강퍅하여 네 말을 듣고자 아니하리니 이는 내 말을 듣고자 아니함이니라 8내가 그들의 얼굴을 대하도록 네 얼굴을 굳게 하였고 그들의 이마를 대하도록 네 이마를 굳게 하였으되 9네 이마로 화석보다 굳은 금강석 같이 하였으니 그들이 비록 패역한 족속이라도 두려워 말며 그 얼굴을 무서워 말라 하시고 10또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내가 네게 이를 모든 말을 너는 마음으로 받으며 귀로 듣고 11사로잡힌 네 민족에게로 가서 그들이 듣든지 아니 듣든지 그들에게 고하여 이르기를 주 여호와의 말씀이 이러하시다 하라 하시더라"고 했습니다.

여기 6절 상반절에서 하나님께서는 아까 5절에서 일러 주셨던 말씀을 똑같이 반복하신 후에, 6절 하반절에서는 "내가 너를 그들에게 보내었더면 그들은 정녕 네 말을 들었으리라"고 하셨습니다.
여기서 "그들"이란 이스라엘 백성이 아니라 바로 "방언이 다르거나 말이 어려워 네가 알아듣지 못할 열국" 즉 이방 민족을 가리킵니다.
그처럼 에스겔 선지자와 말도 잘 통하지 않는 이방 민족이 '정녕 에스겔 너의 말을 들었을 것이다.'라고 하시는 말씀은, 바꾸어 말하자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에스겔 선지자를 통하여 자기네 모국어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해 듣게 될 것임에도 불구하고 그 말씀을 청종치 아니할 것이라는 뜻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어지는 7절에서 그 이유까지 밝혀 주시기를 "이스라엘 족속은 이마가 굳고 마음이 강퍅하여"라고 하셨는데, 이것은 곧 '죄를 회개하지 아니하는 완악함'을 표현하신 것입니다.
그런 까닭에 이스라엘 백성은 아예 '듣고자 아니할' 것이라고 했습니다.
즉 그들은 에스겔의 말을 일단 듣기는 들어 보고 나서 가부간에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아예 듣기조차 거부할 정도로 완악한 심령의 소유자들이었던 것입니다.

이처럼 에스겔이 대하게 될 이스라엘 백성은 근본적으로 하나님 앞에서 '패역한' 즉 반역적이었을 뿐 아니라 본성 자체가 말씀에 '불순종하며 거부하는' 자들이었습니다.
이것은 언뜻 생각하면 에스겔 선지자의 사기를 미리 떨어뜨리는 말씀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그로 하여금 앞으로 당하게 될 백성들의 거부반응에 대하여 미리 준비시켜 주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즉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잘 받아들이지 않는 것은 순전히 그들의 마음이 굳고 교만하고 강퍅해서 그런 것이지 결코 에스겔 선지자 쪽의 잘못이 아니라는 사실을 미리 일러 주심으로써, 그로 하여금 아무 부담도 갖지 않게 해 주셨던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바로 그런 까닭에 에스겔 선지자 역시 전도자로서의 결단을 더욱 굳게 다져야만 했습니다.
그것이 바로 8절에서 하나님께서 에스겔을 향하여 "내가 그들의 얼굴을 대하도록 네 얼굴을 굳게 하였고 그들의 이마를 대하도록 네 이마를 굳게 하였으되"라고 말씀하신 의미입니다.
자기가 전도해야 할 이스라엘 백성들이 "패역한 족속"이라 해서 에스겔 쪽에서 지레 겁을 집어 먹고 "두려워"하거나 "무서워"하면 이미 지고 들어가는 일이나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그런 이스라엘 백성들의 '굳은 마음'에 대항할 수 있도록 에스겔 선지자에게는 아예 "화석보다 굳은 금강석" 같은 '강력한 의지'와 '단단한 각오'를 불어 넣어 주셨던 것이었습니다.

그러기 위해서 에스겔 선지자는 자기가 먼저 "마음으로 받고 귀로 들은" 말씀 즉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먼저 감동시켜 주신 말씀이 자신의 인격 속에서 더욱 뜨겁게 타오르게 해야 했습니다.
그리고 자기의 전도 대상이 바로 "사로잡힌 네 민족"이라는 사실, 즉 비록 패역한 백성이기는 하지만 그들이 당하고 있는 큰 고통에 대하여 더욱 불쌍히 여기는 마음을 일깨워야 했습니다.
그렇게 하면 비록 "그들이 듣든지 아니 듣든지 그들에게 고하여 이르라"고 하나님께서 명하신 사명을 넉넉히 수행할 수 있었던 것이었습니다.

전도란 이처럼 아주 쉬운 것입니다.
'내가 얼마나 말을 잘해야 저 사람이 나의 전도를 받아들일까?'라는 걱정에 사로잡히게 되면 그 전도는 첫 출발부터 꼬일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그처럼 '자기가 깨달은 진리'나 '스스로 터득한 도'를 전하려는 것이 아니라 그저 '하나님께서 성경을 통하여 선포하시는 복음' 그대로만 전하면 전도는 아주 간단한 것입니다.

또한 전도는 문자 그대로 '내 집 근처 다니면서' 하면 되는 일입니다.
외국으로 파송을 받은 선교사들은 본격적인 사역을 시작하기 전에 우선 몇 년에 걸쳐서 그 나라의 언어부터 배워야 하고 음식과 기후와 문화 등에도 적응을 해야만 하는 난관이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그저 우리나라 말로 내 불신가족들과 친구들과 이웃들에게 입을 열어서 '예수님을 믿고 구원받으세요.'라고 말하면 되니 선교사들에 비해서 이 얼마나 쉬운 일이겠습니까?

더구나 우리는 전도의 결과에 대하여 책임을 지거나 조금이라도 염려할 필요조차 없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우리의 전도를 받아들이지 않겠지만 그것은 우리가 전도를 하면서 무언가 잘못했기 때문이 아니라 듣는 사람들의 상태가 원래부터 '타락한 본성'으로 인하여 '이마가 굳고 마음이 강퍅하기' 때문일 뿐입니다.
그러므로 전도란 좀 해 보다가 되면 계속하고 안 되면 포기해도 되는 것이 결코 아니라, '듣든지 아니 듣든지' 즉 사람의 반응에 상관없이 무조건 계속해야만 하는 것입니다. 

'태신자 갖기 운동'에 참여하는 것은 얼마나 간단합니까?
그냥 자기 주변에서 아직 예수님을 믿지 않는 가족이나 친구나 이웃의 이름을 카드에 적어내기만 하면 되는 일입니다.
'우리 경향교회에 한번 나오세요.'라고 한마디 하는 것도 얼마나 쉬운 일입니까?
  
신학교에 가서 조직신학을 배워야 할 수 있는 어려운 말도 아니며, 그 말 한마디 한다고 해서 이 자유민주주의 사회에서 누가 뺨 한 대 때릴 사람도 없는 것입니다.
'죄와 지옥의 저주에 사로잡힌 내 혈육과 친지'를 정말 불쌍히 여기는 마음과 전도를 받지 않으려 하는 불신자의 고집보다 더 강한 '금강석 같은 의지'만 있으면 지극히 간단하고도 쉬운 이 전도의 사명을 '내 집 근처 다니면서' 꼭 수행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2. 전도는 신자가 자기 생명을 걸고 완수해 내어야 할 '중요하고도 필수적인 의무'입니다.

12절 이하 15절에 "12때에 주의 신이 나를 들어 올리시는데 내 뒤에 크게 울리는 소리가 들려 이르기를 여호와의 처소에서 나는 영광을 찬송할지어다 하니 13이는 생물들의 날개가 서로 부딪히는 소리와 생물 곁에 바퀴 소리라 크게 울리는 소리더라 14주의 신이 나를 들어 올려 데리고 가시는데 내가 근심하고 분한 마음으로 행하니 여호와의 권능이 힘 있게 나를 감동하시더라 15이에 내가 델아빕에 이르러 그 사로잡힌 백성 곧 그발강 가에 거하는 자들에게 나아가 그 중에서 민답히 칠일을 지내니라"고 기록했습니다.

그처럼 말씀 선포의 사명을 부여 받고 격려의 말씀까지 들은 에스겔 선지자는 이어서 "주의 신이 나를 들어 올리시는" 신비한 체험을 하게 됩니다.
이것은 성령께서 에스겔 선지자를 '공중 부양'시켜서 다른 장소로 옮겨 간 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1장 1절에서 에스겔 선지자가 이 소명의 환상을 받기 시작한 장소나 본문 15절에서 에스겔이 성령의 이끌림을 받아 '이르게' 된 곳이나 둘 다 같은 "그발강 가"이기 때문입니다.
즉 이것은 지상에서의 위치이동이라기보다는 성령께서 에스겔 선지자를 어떤 '특별한 영감을 받는 특별한 공간'으로 들어 올리신 것이라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이것은 다른 말로 하자면 성령께서 에스겔 선지자를 '영적으로 크게 업(up)'시켜 주신 것이었습니다.
바로 곧 이어지는 12절 하반절에 보면 그처럼 '들어 올려진' 에스겔 선지자의 뒤에서 "여호와의 처소에서 나는 영광을 찬송할지어다"라는 큰 소리가 들린 것도 바로 그 때문이었습니다.
"내 뒤에 크게 울리는 소리"란 바로 '하나님의 보좌를 모시고 있는 생물'들이 전도자를 뒤에서 격려하고 사기를 진작시켜 주는 응원과 같은 것이었습니다.
즉 지금 에스겔 선지자가 나아가서 수행하려는 전도야말로 '하나님께 영광을 크게 돌리는' 대표적인 사명이라고 일깨워주었던 것이었습니다.

그런 중에 에스겔 선지자는 "주의 신이 나를 들어 올려 데리고 가시는데 내가 근심하고 분한 마음으로 행하니 여호와의 권능이 힘 있게 나를 감동하시더라"는 체험을 하게 되었습니다.
여기서 에스겔 선지자가 '근심하고 분한 마음'으로 행했다는 것은 이스라엘 백성의 죄에 대한 근심함과 동시에 그들의 거부반응에 대해 분노함을 가리킵니다.
즉 지금 선지자 에스겔은 당신의 백성을 향하신 하나님의 '염려와 의분'을 똑같이 공감하게 되었던 것이며, 그것이 바로 성령께서 그를 '들어 올리셔서' '힘 있게 감동하신' 결과였던 것이었습니다.

그런 후에 에스겔 선지자가 나아간 "델아빕"의 정확한 위치는 알려지지 않고 있지만, 하여튼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 왔던 "사로잡힌 백성"들이 살고 있던 "그발강 가"의 어느 지역이었음은 분명합니다.
거기서 에스겔 선지자는 "민답히 칠일을 지냈다"고 했는데, 이 '민답히'라는 말은 '마비되어, 정신을 잃고, 극히 놀라서' 등의 뜻입니다.
즉 에스겔 선지자는 자신이 받은 신비한 계시와 강력한 성령 충동으로 인하여 본격적인 전도 사역을 시작하기에 앞서 일주일 동안이나 완전히 흥분 상태에 빠져 있었던 것이었습니다.

왜 하나님께서는 에스겔 선지자에게 이런 신비하고도 강력한 은혜 체험을 하게 하셨습니까?
그것은 그가 지금부터 수행해야 할 전도의 사명이 지극히 중대했기 때문이었습니다.
다시 말해서 전도란 당신의 구속사 완성에 있어서 너무나도 중요한 일이었던 까닭에 하나님께서는 에스겔 선지자를 통하여 그처럼 친히 개입하시고 주도적으로 역사하셨던 것이었습니다.

그런 후에 하나님께서는 이제 결정적인 독려의 명령을 에스겔 선지자에게 내리셨습니다.
바로 16절부터 21절까지 "16칠일 후에 여호와의 말씀이 내게 임하여 가라사대 17인자야 내가 너를 이스라엘 족속의 파수꾼으로 세웠으니 너는 내 입의 말을 듣고 나를 대신하여 그들을 깨우치라 18가령 내가 악인에게 말하기를 너는 꼭 죽으리라 할 때에 네가 깨우치지 아니하거나 말로 악인에게 일러서 그 악한 길을 떠나 생명을 구원케 하지 아니하면 그 악인은 그 죄악 중에서 죽으려니와 내가 그 피 값을 네 손에서 찾을 것이고 

19네가 악인을 깨우치되 그가 그 악한 마음과 악한 행위에서 돌이키지 아니하면 그는 그 죄악 중에서 죽으려니와 너는 네 생명을 보존하리라 20또 의인이 그 의에서 돌이켜 악을 행할 때에는 이미 행한 그 의는 기억할 바 아니라 내가 그 앞에 거치는 것을 두면 그가 죽을지니 이는 네가 그를 깨우치지 않음이라 그가 그 죄 중에서 죽으려니와 그 피 값은 내가 네 손에서 찾으리라 21그러나 네가 그 의인을 깨우쳐 범죄치 않게 하므로 그가 범죄치 아니하면 정녕 살리니 이는 깨우침을 받음이며 너도 네 영혼을 보존하리라"고 기록된 말씀이었습니다.

"칠일 후" 에스겔 선지자가 본격적으로 전도를 시작해야 할 때가 오자 이제 하나님께서는 그가 받은 사명의 심각성을 일깨워 주시면서 "내가 너를 이스라엘 족속의 파수꾼으로 세웠으니 너는 내 입의 말을 듣고 나를 대신하여 그들을 깨우치라"고 하셨습니다.
전도자는 '하나님을 대신하여' 사람들에게 나아가는 '신적 임명'(divine appointment)을 받은 자입니다.
  
그리고 그 임무는 곧 이스라엘 족속의 '파수꾼'(watchman)이 되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마치 적군의 침입을 미리 발견하고 아군에게 경고해 주는 경계병처럼, 전도자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심판을 사전에 경고함으로써 그들이 저주의 멸망을 당하게 될 것을 막아야 할 중차대한 사명이 있는 것입니다. 
그런 까닭에 하나님께서는 이어지는 일련의 구절에서 전도란 곧 파수꾼이 '자신의 목숨을 걸고' 완수해야 할 절대적인 사명임을 강조하셨는데, 거기에는 네 가지 경우들이 있었습니다.

첫째는 18절에 나오는 대로, 하나님께서 "악인에게 말하기를 너는 꼭 죽으리라"고 하셨는데도 전도자가 그 사실을 악인에게 '깨우쳐 주지 아니하는' 경우입니다.
그럴 때에는 그 악인은 당연히 "그 죄악 중에서 죽을" 수밖에 없지만, 그에게 전도하지 아니한 사람의 죄 역시 그냥 넘기지는 않을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물론 여기서 "그 피 값을 네 손에서 찾을 것이요"라는 말씀은 '과장법적인 비유'로 해석해야 할 것입니다.
즉 파수꾼의 직무태만으로 인하여 악인이 회개할 기회조차 가지지 못하게 만든 것이 얼마나 심각한 죄인지를 강조하신 것입니다.
두 번째는 19절에 나오는데, 간단히 요약하자면 전도자가 "악인을 깨우치되 그가 돌이키지 아니한" 경우입니다. 

그러면 그 악인은 물론 "죽으려니와" 전도자는 아무 책임을 지지 않고 자신의 "생명을 보존하게" 된다고 하셨습니다. 

세 번째와 네 번째는 "의인이 그 의에서 돌이켜 악을 행할 때" 즉 일단 신자가 된 후에 배교하는 경우입니다. 
'외적 부르심'을 받아서 '의인'처럼 보이는 교인들 중에도 사실상 '내적 부르심'은 받지 못한 사람이 있기 마련입니다.
  
그러면 "이미 행한 그 의는 기억할 바 아니며" 즉 사람이 자기 자신의 의로 구원받는 것은 결코 아니기 때문에 그 사람은 "그 앞에 거치는 것" 즉 '죄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을 통하여 "죽을" 수밖에 없습니다.
바로 그런 경우에도 전도자의 책임은 앞의 '악인'의 경우와 똑같다고 하셨습니다.
즉 20절처럼 "그를 깨우치지 않으면" 하나님께서 그 죄를 아까 악인을 전도하지 않았던 것과 똑같이 취급하셔서 "그 피 값을 네 손에서 찾으리라"고 하셨고, 21절에 나오는 것처럼 "그 의인을 깨우쳐 범죄치 않게" 하면 둘 다 "영혼을 보존하게" 될 것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절대다수의 사람들이 듣지 않을 것을 아시면서도 우리로 하여금 전도하게 하시는 이유는 끝까지 회개하지 않고 지옥에 가게 될 불신자들로 하여금 나중에 아무 변명할 것이 없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그런 까닭에 불신자들이 아예 전도 자체를 받을 기회도 없이 죽게 되면 그 책임을 '그 불신자에게 전도할 기회가 있었으면서도 전도하지 아니한 사람'에게 반드시, 엄중히 묻겠다고 하신 것입니다.

병사가 '각개전투'를 잘못하는 경우에는 자기 혼자 죽으면 그만이지만, '경계근무' 도중에 졸다가 적군의 기습을 받게 되면 자기 부대원 전체가 몰살당하게 됩니다.
'스팔타커스'라는 영화에 보면 바로 그런 장면이 나오지 않습니까?
노예들로 구성된 반란군을 진압하라는 명령을 받고 출정했던 로마군 사령관이 압도적인 전력의 우세에도 불구하고 스팔타커스 군대의 야습을 받아 모든 부하들을 다 잃고 맙니다.
원로원은 그 사령관이 노예들을 깔보고 경계병도 배치하지 않은 상태에서 야영을 했다는 사실을 알고는 당장 사형에 처하려 하다가 목숨만 살려 주고 해임을 시킵니다.
즉 경계근무를 소홀히 하는 것은 군대에서 가장 엄히 다스리는 중죄에 해당되는 것입니다. 

전도자란 바로 그처럼 '남의 생명을 자기 목숨을 걸고 지키는' 파수꾼과 같습니다.
내가 전도하지 않으면 내 불신배우자가, 내 불신자녀가, 내 불신부모가 영락없이 죽습니다.
내가 '깨우쳐 주지' 않으면 우리 교구의 장결자와 내가 맡은 구역의 장결자는 과거에 잠시 교회생활을 했다는 '의는 전혀 기억될 바가 아니며' 오로지 '그 앞에 거치는 것'에 걸려 죽을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처럼 전도는 우리가 단 한 명의 대상도 빠뜨려서는 안 되는, 단 한 번의 경우라도 방심하여 간과해서는 결코 안 될 절체절명의 사명이라는 사실을 꼭 기억하면서, 그처럼 중차대한 사명인 까닭에 하나님께서 친히 성령을 통하여 '감동시키시고 충동시켜 주시는 힘'에 의지하는 가운데 '악인'과 또한 '의인이었다가 그 의에서 돌이켜 악을 행하는 자'들을 '하나님을 대신하여 그 말씀으로써 꼭 깨우쳐 주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성도 여러분, '이스라엘 족속에게 가서 내 말로 그들에게 고하라'는 하나님의 명령은 일단 신자가 된 자에게 '사명 제1호'입니다.
즉 가장 '기본적이고도 쉬운' 사명인 동시에 '자신의 목숨을 걸고 수행해야 할 중대한' 사명인 것입니다.
바꾸어 말하자면, 우리가 예수님을 영접하여 구원의 확신을 얻은 후에도 즉시 천당으로 올라가지 않고 여전히 이 세상에 살고 있는 '존재 이유와 목적'이 바로 '아직도 내 주위에 남아 있는 14만4천인의 수를 그렇다면 신자라 하면서도 전도하지 않는 사람은 사실상 살아 있을 필요도 가치도 없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므로 '성공한 전도'와 '실패한 전도'로 나누는 것은 잘못입니다.
'가서 말씀을 전한 전도'와 '전도하러 가지 아니한 것'으로만 나누어질 뿐입니다.
다시 말해서 '가서 전파한 전도'는 그 복음을 들은 사람이 '믿든지 안 믿든지' 간에 다 성공적인 전도인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전도를 통하여 하나님의 사랑과 공의는 이미 완벽하게 실현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전도의 결과에 성공해야 하는 사람'이 아니라 '전도 사명에 충실해야 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전자는 오직 성령께서 친히 하시는 일이며 사람의 능력으로 되는 일이 결코 아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영혼을 구원해야 하는 사람'이 아니라 '복음을 선포해야 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전자는 예수 그리스도께서만 하실 수 있는 일인 반면에, 후자는 그 주님께서 다른 사람 아닌 바로 우리 각자에게 유언처럼 당부하시면서 맡겨 주신 사명이기 때문입니다.
멀리 가지 않고 그저 내 집안과 이웃에서 누구나 다 할 수 있는 쉬운 이 전도를 통하여 '나와 내 집이 구원을 얻고', 그러면서도 자신의 목숨을 걸고 남의 생명을 구원해 내는 이 막중한 파수꾼의 사명을 완수함으로써 '내가 전도한 사람과 전도 사명을 수행한 나 자신이 함께 영혼을 보존하는' 성도, 곧 '듣든지 아니 듣든지 가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전도자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아멘. (석기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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