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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강권하시는 사랑 (고후 5:13-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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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권하시는 사랑 (고후 5:13-21) 


이번에 세상을 떠난 세계적인 미녀 스타였던 엘리자베스 테일러가 한때 이런 말을 했습니다. “나는 한 여인으로서 누릴 수 있는 모든 것을 다 가졌습니다. 나는 평생 화려한 보석에 둘러싸여 살아왔어요. 하지만 내가 정말로 필요로 했던 건 그런 게 아니었어요. 누군가의 진실한 마음과 사랑 그것뿐이었다.”고 이야기를 합니다. 엘리자베스 테일러는 7명의 남자를 거치며 8번의 결혼과 이혼을 하는 등 화려한 남성편력과 사생활로 유명세를 탔습니다. 재산도 6000억원을 남겨두고 떠났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아름다우면 행복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돈이 많으면, 그리고 많은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인기가 있으면 행복할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을 가지고도 엘리자베스 테일러는 고백합니다. “누군가에게 사랑을 받고 싶다” - 얼마나 갈증이 일어났으면 이런 이야기를 했겠습니까? 

그런데 이 모든 것을 다 가지고 있으면서도 불행하다고 외쳤던 엘리자베스 테일러와는 달리, 가지고 있던 모든 것들을 다 버리고도 오히려 행복하게 살았던 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의 이름은 바울이었습니다. 로마의 옥중에서 쓴 편지인 빌립보서에서 그는 이렇게 고백합니다.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뿐더러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함을 인함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라”(빌 3:6-7). 

사도 바울은 또 며칠 후면 사형을 당할지도 모르는 그 절박한 순간에도 계속해서 이렇게 썼습니다.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빌4:4). 그리고 죽음을 코앞에 두고 디모데에게 보낸 마지막 편지에서 이렇게 적었습니다. “내가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딤후 4:7,8). 

사도 바울은 예수님을 위해 자기가 가진 모든 것들을 다 버렸습니다. 그러면서도 마치 미친 사람처럼 한평생을 그 예수를 위해 뛰고 달렸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감옥에 갇혀 억울하게 죽게 될 상황이 되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죽은 후에 받게 될 의의 면류관을 기다리며 설레는 마음으로 죽음을 맞이하고 있었습니다. 모든 것을 다 갖추고 살면서도 불행했던 엘리자베스 테일러와는 달리, 사도 바울은 그 모든 것을 다 버리고도 행복해 했고, 감옥 속에서도, 죽음 앞에서도 장차 받을 상급을 그리면서 기대에 찬 삶을 마감하고 있었습니다. 어떻게 이럴 수 있었을까요? 

오늘 본문 14절에서 우리는 그 해답을 찾을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시는도다." 여기 ‘강권’이란 말은 둘 사이에 꼭 끼여서 꼼짝할 수 없는 것으로, 헬라어로는 힘 있게 꽉 잡힌다는 뜻입니다. 무슨 말입니까? 사랑하는 주님께서 나를 아주 꽉 잡아 주셨습니다. 도저히 빠져 나갈 수 없을 만큼 단단하게 나를 붙드셨습니다. 어떤 때는 그것이 구속이라고 느껴질 때도 있지만, 사실 그렇게까지 나를 붙드시고, 보호하시고, 지켜주시는 것은 주님이 나를 엄청나게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이것은 행복한 고민인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시는도다.” 

주님의 사랑이 꽉 잡으셔서, 이제 바울은 자신의 뜻대로 살 수 없게 되었습니다. 사랑으로 나를 꽉 잡으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끄시는대로 끌려 다닐 뿐입니다. 그분이 가자하시면 가고, 머물자 하시면 머무는 것 뿐, 나의 의지는 이제 다 그분께 맡겨 드렸습니다. 사랑의 포로가 되어 행복한 고민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바울이 왜 행복했습니까? 사랑하는 그분께 꽉 잡혀 있었기 때문입니다. 뿐만 아니라 자신도 또한 그분을 너무도 사랑했기 때문입니다. 

저는 오늘 이 하나님의 사랑을 그 누구보다 깊이 체험했던 한 사람을 소개하고 싶습니다. 이 사람은 고베 시장의 첩의 아들로 태어나 본처의 자식들로부터 천대와 멸시를 받으며 자랐습니다. 그는 자신의 생을 저주하였습니다. ‘왜 나 같은 것을 낳았느냐’고 부모를 원망하면서 성장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자기 생을 비관하고 있을 때 북을 치며, 나팔을 불고 지나가는 구세군 전도대를 만났는데, 그들의 외침이 가슴에 와 닿았습니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을 사랑하십니다!” 그는 전도대에게 물었습니다. 

“기생의 아들도 사랑하나요?” “아무렴요, 어떠한 죄인이라도 사랑하십니다.” 그는 그 말을 듣고 메이지대학을 졸업하고 고베 신학교에 들어갔습니다만 당시 폐병에 걸려 학교에서 조차 그를 휴학시킬 정도입니다. 이때 그는 또 한번 신앙의 회의가 들고 더 이상 살고자 하는 의욕을 잃어버렸습니다. 자살을 결심할 때 한 친구로부터 나가노라는 목사를 만나고 나서 결정을 하라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당시 나가노 목사는 아무도 복음이 증거되지 않은 지역에 가족을 데리고 교회를 개척했습니다. 무려 5년 동안이나 사모와 자녀 앞에서 설교했을 뿐 단 한 사람도 전도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다가 교회를 개척한 후 5년 만에 한 청년이 찾아왔는데, 얼마나 기뻤겠습니까? 예배를 마치고 함께 식탁에 앉아 식사를 하는데 이 청년이 갑자기 윽 하더니 피를 토하는 것입니다. 

나가노 목사는 한 동안 이 청년을 받아들여야 하나 받지 말아야 하나 고민을 했습니다. 그러다가 성령의 인도하심 가운데 그를 받아들이기로 결정하고, 가슴에 품고 기도하며 그를 돌보아 주었습니다. 그 청년이 핏덩어리를 토하면 걸레를 가져와서 닦아주고, 같이 밥도 먹으며 사랑을 전하자, 결국에는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영접하고 폐병까지 완전히 치료되었습니다. 그 청년이 일본 기독교 역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가가와 도요히코’(1888-1960)입니다. 

그는 고베 신학교를 졸업하고 프린스톤 신학교를 졸업하여 목사가 되었습니다. 귀국한 그는 고베의 빈민굴에 들어가 70세가 넘도록 빈민들과 함께 살며 가난한 사람들과 노동자들을 위해서 자신의 몸을 내 놓았습니다. 어느 빈민이 변비로 고생하자 장갑을 끼고 손가락으로 후벼내다가 나오지 않자 항문에 자신의 입으로 침을 넣고 빨아냈습니다. 참 힘든 일이 아닙니까? 일본의 어느 신문사가 와서 어찌 이런 일을 할 수가 있습니까? 묻자 “나는 배운데로 할 뿐입니다” 자기 스승 나가노 목사의 그 사랑을 그대로 자신도 실천할 따름이라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본문 13절에서 바울은 외칩니다. “우리가 만일 미쳤어도 하나님을 위한 것이요 만일 정신이 온전하여도 너희를 위한 것이니.” 성경을 보면, 사도 바울이 사람들로부터 미쳤다는 말을 여러 번 들은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가이사랴의 베스도 총독은 바울의 변론을 듣다가 너무 박식한 것에 놀라서 말했습니다. 행 26:24절에도 “…네가 미쳤도다 네 많은 학문이 너를 미치게 한다”. 

오늘 보문에도 보면 고린도교회 성도들 중에서 바울을 대적하던 몇몇 사람들이, 바울이 미쳤다고 소문을 냈습니다. 그런 소식을 들은 사도 바울은 그들을 향해서 적습니다. “그렇습니다. 당신들의 말처럼 나는 미쳤습니다. 그러나 당신들이 하는 말처럼 잘못 미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향해서 똑바로 미쳤습니다.” 어떤 신학자는 이렇게 적었습니다. “당신은 나쁜 의미에서 우리가 미쳤다고 하지만, 나는 참된 의미에서 우리는 미쳤다고 말합니다.” 

사실, 예수님께서도 세상에 계실 때 수많은 사람들로부터 미쳤다고 모함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그 예수님의 말씀대로 살려고 하는 수많은 성도들도 지난 2,000년 역사 속에서 수많은 사람들에게 미쳤다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그러나 돌이켜 생각해 보십시오. 도대체 누가 미친 것입니까? 영원한 생명을 발견하여 그 영생을 위해 한 번밖에 없는 인생을 투자한 사람이 미친 것입니까? 

아니면, 잠깐 후면 사라져 버릴 명성을 위해 죽을지 살지도 모르면서 살아가는 사람들, 잠깐 후면 시들어 버릴 젊음을 붙잡으려고 온갖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는 사람들, 채 20년도 가지 못하는 권력의 바람에 자신의 목숨을 다 걸어놓고 사는 사람들, 자신의 목숨을 깍아 먹고 있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술과 담배를 끊지 못하는 사람들, 그런 사람들이 미친 것입니까? 하나님이 없다 하는 곳에서는 하나님을 찾은 사람이 미친 사람입니다. 여기 자기보고 미쳤다고 모략하는 사람들을 향해서 담담하게 그리고 분명하게 대답하고 있는 사도 바울의 모습을 상상해 보십시오. 

사랑하는 여러분, 예수 믿는다고 누가 미쳤다고 하거든 놀라지 마십시오. 예수님도 그런 말을 들었습니다. 사도 바울도 들었습니다. 전무 거꾸로 살아가는 세상 한복판에서 똑바로 살아가려는 사람은 미쳤다는 소리를 듣는 것이 당연합니다. 그러니 담대하십시오. 용기를 잃지 마십시오. 오직 바로만 미치도록 정신을 똑바로 차리십시오. 정말로 사도 바울은 하나님을 향해 미친 사람처럼 살았습니다. 최고 학부를 졸업한 가말리엘의 문하생이 거지처럼 세상을 누비고 다닌다는 것 자체가 미친 짓이 아니었겠습니까? 매도 수없이 맞았습니다. 동족들에게 돌에 맞아 쫓겨나기도 수없이 했습니다. 죄수도 아닌데, 착고에 매여 감옥에 갇힌 것도 한두 번이 아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울은 그 미친 일에 감격합니다. 기뻐합니다. 왜? 자기 속에서 예수님의 사랑이 솟아오르기 때문입니다. 

저 역시 예수님께 미치고 싶습니다. 완전히 미치고 싶습니다. 그리하여 예수님처럼 온전한 사랑으로 모든 죽어가는 사람들을 사랑하고 싶습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은 그야말로 예수님의 사랑에 미쳐야 하는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의 영이신 성령에 취해야 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러지 않고는 하나님의 말씀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느껴지지 않습니다. 신앙은 단순한 지성이 아닙니다. 단순한 이해가 아닙니다. 지성과 감성과 의지, 이 세 가지가 잘 조화를 이루어야 합니다. 오늘날 현대의 그리스도인들은 참된 신앙의 감성이 계발되지 않았습니다. 

아름다운 한 여성이 친구로부터 책을 한 권 선물 받았습니다. 그녀는 조금 읽어 보다가 무미건조하고 재미가 없어서 구석에다가 처박아 두었습니다. 며칠 후에 어떤 사교모임에서 그녀는 우드라는 잘 생기고 매력적인 청년을 소개받았습니다. 그와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던 중에 그녀가 말을 꺼냈습니다. “제가 얼마 전에 책을 한 권 읽기 시작했는데, 그 책의 저자 이름이 우드예요. 당신 이름과 똑같지요. 우연치고는 정말 큰 우연인 것 같아요.” 그러자 그 청년이 말했습니다. “우연이 아닙니다. 바로 제가 그 책의 저자입니다.” 

그날 저녁 집으로 돌아온 그 아가씨는 우드의 책을 읽기 시작했습니다. 얼마나 재미가 있던지, 밤을 새워 다 읽고야 말았습니다. 그런 후에 그 아가씨는 그 책의 저자와 결혼해서 이름이 H. W.우드 부인이 되었습니다. 어떻게 그렇게도 재미없던 책이 하루아침에 재미있는 책으로 변할 수 있었을까? 책을 지은 사람과 사랑에 빠졌기 때문입니다. 성경을 읽기만 해도 자꾸 잠만 온다는 분들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아직도 자신이 세상을 더 사랑하고 있지는 않은지 점검해 보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당신 가슴에 벅차게 밀며 들어와 보십시오. 어떻게 성경이 졸릴 수 있겠습니까? 성경의 저자이신 하나님과 사랑에 빠져 보십시오. 밤을 새면서 읽어도 더 읽고 싶어질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지금 바울은 이 강권하시는 하나님의 사랑 앞에 자신이 화목케 하는 직책을 가진 사명자라는 그것 때문에 한 생을 희생하며 살아갑니다. 많은 사람들은 자신의 행복을 위해 남을 희생합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남의 행복을 희생하고는 자신도 결코 행복할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참된 행복, 진정한 행복은 남을 행복하게 만들 때에 비로소 찾아온다는 것입니다. 본문에서 사도 바울은 인생의 목적을 아주 분명하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14, 15절입니다. 

“…우리가 생각건대 한 사람이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었은즉 모든 사람이 죽은 것이라 저가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심은 산 자들로 하여금 다시는 저희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오직 저희를 대신하여 죽었다가 다시 사신 자를 위하여 살게 하려 함이니라.” 예수님은 당신의 행복을 위해 이 세상에 오시지 않았습니다. 다만,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의 행복을 위해서 죽으러 오셨습니다. 바로 이 이유 때문에 예수님이야말로 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분이셨습니다. 바로 여기에 예수님을 믿고 그 뒤를 따르는 모든 성도들의 삶의 비결이 있습니다. 자신을 위해 살지 않고 자신을 대신해서 죽었다가 다시 사신 그분을 위해서 사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지금 바울은 하나님의 강권적인 사랑 앞에 자신을 아무 조건 없이 받아주신 주님을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몽땅 다 쏟으며 주님께 모든 것을 맡기는 삶을 살아갑니다. 여러분도 아시지 않습니까? 바울이 예수를 만나기 전에 하나님을 위한다는 열심을 가지고 예수 믿는 사람들을 핍박하고 죽이는데 앞장섰습니다. 그러나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고 난 후에는 그게 얼마나 잘못된 일이었는지를 알게 됩니다. 

그래서 그는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전에는 내가 훼방자요 핍박자요 포행자이었으나 도리어 긍휼을 입은 것은 내가 믿지 아니할 때에 알지 못하고 행하였음이라."(딤전 1:13) 그 때는 정말 어리석게도 잘못 알고 악을 저질러 왔다는 것입니다.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고 고백할 정도로 잘못된 삶을 살아왔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자신에 대해서 긍휼하심으로 참아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을 긍휼하심으로 참아주셨기 때문에 예수님을 만나게 되었고, 잘못 살던 인생을 바꾸어 그리스도를 위한 삶을 살아가게 되었습니다. 그런 자기를 구원의 자녀로 삼아 주셨고 또한 사도의 직책을 감당케 하는 이 황홀한 은혜를 입게 된 것입니다. 그러니 자기의 있는 그 모습, 그대로를 받아 주신 하나님 앞에 적당히 살 수가 있습니까? 

사랑하는 여러분! 이 화목하게 하는 직책을 감당해야 할 사람들이 누구입니까? 오늘 예배자로 모인 여러분과 저입니다. 화목은 반드시 자기희생이 들어갑니다. 자기는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않으면서 어떻게 감동을 주는 삶을 살아갈 수가 있습니까? 인도의 간디를 잘 아실 것입니다. 인도 사람들에게 그는 가히 신적인 존재나 다름없는 인물입니다. 그의 일대기를 서술한 자서전이 400권이 넘습니다. 그의 어록만도 80권이 넘습니다. 1948년 1월, 그가 어떤 미치광이에 의해 피살당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인도 전역에서 그를 따라서 자살한 사람이 몇 명인지 아십니까? 학자들의 계산에 의하면 많이 잡으면 100만 내지 200만 명이고, 적게 잡으면 20만 내지 60만 명이라고 합니다. 

간디의 죽음을 애도하며 그 많은 사람들이 자기의 생명을 바친 것입니다. 진정 내 마음을 드리는 대상이면, 정말 내가 사랑하는 대상이면 세상의 그 어떤 것도, 심지어 자기 생명까지도 아끼지 않는 것입니다. 간디 같은 사람을 위해서도 생명을 바치는 사람이 수십만 명이었다고 한다면 하늘의 모든 영광을 버리고 이 세상에 오셔서 우리 대신 죄인이 되셔서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한 몸으로 받고 있다고 고백하는 우리는 어떠해야 하겠습니까? 

오늘 우리는 태신자를 세우는 아주 중요한 자리에 있습니다. 이 태신자를 세우는 것은 어떻게 보면 사막에 씨를 뿌리는 것과 같습니다. 세상에서 불모지를 생명이 흐르는 땅으로 바꾸는 가장 일반적인 방법은 나무를 심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결코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닙니다. 거친 돌과 메마른 흙 밖에 보이지 않는 곳에 씨를 뿌리고 나무를 심는다는 것은 믿음이 없으면 불가능합니다. 

지금은 모래먼지 밖에 보이지 않는 황무한 곳이지만, 이미 심는 자의 마음속으로는 꽃을 보아야 하고, 새가 깃든 우거진 나무를 보아야만 가능한 일입니다. 영혼의 황무지를 개척하고 생명을 낳기 위해서는 믿음의 눈으로 끈기있게 복음을 심는 수고가 필요합니다. 정말 눈물과 정성, 그리고 상상도 못하는 희생이 있지 않습니까? 그러지 않고서야 어떻게 물이 바다를 덮음같이 여호와를 아는 지식을 가진 젊은이들을 통해 세상을 복음으로 역사하는 성령의 계절을 가져오리라고 생각하십니까?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예수 때문에 가슴이 뜨거워야 합니다. 불쌍한 영혼들 때문에 가슴이 뜨거워야 합니다. 주님께서 맡기신 일 때문에 가슴이 뜨거워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세상 사람들이 볼 때 비정상적인 사람처럼 보이기를 원하십니다. 제대로 미친 사람이 되기를 바라십니다. 이게 안되면 신앙생활은 주님이 주신 기쁨도 감격도 사라진 채 정말 비참하게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전쟁 직후 한 나환자촌을 방문한 미국 관광단이 있었습니다. 한 관광객이 거기 선교사로 파송된 한 간호사가 나병환자의 상처를 싸매어 주는 광경을 카메라에 담으면서 혼자 중얼거렸습니다. “나는 백만불을 준다 해도 저 일은 할 수 없어.” 그러자 이 이야기를 들은 간호사가 이렇게 대답을 했다고 합니다. “사실 나도 할 수 없습니다. 단지 그리스도의 사랑이 나를 강권하시기에 이 일을 할 뿐입니다.”여러분, 강권하시는 그리스도의 사랑에 맡겨진 삶을 살고 싶지 않으십니까? 그리스도의 사랑이 강권하시면 고난이나 죽음 앞에서도 두렵지 않습니다. 빌립보 감옥에서도 찬양하고 기도했던 사도 바울처럼 우리도 때로 억울한 일을 당한다 하더라도 기쁨의 찬송을 부를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이 강권하시면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모든 것을 할 수 있다”고 고백한 사도 바울처럼, 우리도 어떤 환경 속에서도 주님의 이름으로 모든 것을 가능케 만드는 기적의 삶을 살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이 강권하시면 약한 몸으로 세계 선교의 사역을 감당했던 사도 바울처럼, 우리도 우리 힘으로 감당할 수 없는 하늘의 위대한 사역을 능히 감당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시는도다.” 이 사도바울의 고백이 우리의 고백이기를 소망합니다. 이 사랑으로 정말 힘들고 지친 우리의 이웃들에게 소망을 주는 삶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기도하십시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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