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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악한 포도원 농부 (막 12: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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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한 포도원 농부 (막 12:1-12)


히말라야의 눈으로 뒤덮힌 설산에는 할단새라는 조류의 새가 살고 있다고 합니다. 이 새는 특징이 밤만되면 눈보라속에서 떨면서 내일은 둥지를 만들어야지 내일은 둥지를 만들어야지하고 울부짖는다고 합니다. 그러나 다음날 햇살이 쏟아지는 아침이 되면 그 따스함 때문에 간밤의 결심을 잊어버린채 창공을 날아다니곤 한다고 합니다. 그리고는 밤이되면 또 추위에 떨면서 내일은 꼭 둥지를 만들어야지 하며 후회한다는 글을 읽었습니다. 이 할단새는 잘 잊어버리는 우리 인간의 특성을 그대로 담고 있습니다. 

우리는 종종 잊어버리는 것들이 있습니다. 주가 우리의 주인인가 하는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이 누구의 소유인가 그리고 진짜 심판은 있는가하는 질문을 우리는 갖게 됩니다. 오늘 이 세가지 질문에 답을 주는 한가지 비유가 바로 오늘 성경의 본문에 바로 이야기입니다. 오늘 우리는 이 성경을 악한 포도원 농부의 비유라고 흔히 부릅니다. 예수님께서는 유대종교 지도자들 앞에서 바로 이 비유를 말씀하고 계십니다. 

1절입니다. 예수께서 비유로 그들에게 말씀하시되 한 사람이 포도원을 만들어 산울타리로 두르고 즙 짜는 틀을 만들어 망대를 지어서 농부들에게 세로 주고 타국에 갔더니. 물론 비유라는 것은 당장 눈앞에 사실은 아니지만 있을법한 이야기를 가지고 예수님은 좀더 영적인 교훈을 우리에게 주고 계십니다. 

예수님이 예로든 오늘 한 사람의 이야기 어떤 사람이 포도원을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포도원 산 울타리를 두르고 그리고 즙짜는 틀을 만들었습니다. 그래서 쉬기도하고 사람들을 감시할수있는 망대도 세웠습니다. 그는 그 포도원에 필요한 모든 조건들을 다 갖춰놨습니다. 그리고 그 포도원을 믿을만한 농부들에게 위임하고 맡겼습니다. 세를 주었다. 당신들이 여기서 일을하고 수확기가 되면 소출의 얼마를 내게 돌려주시오. 그런 계약이 형성되었을 것입니다. 

특별히 예수님시대에는 부재지주가 꽤 많았다고 합니다. 땅은 사놨는데 나는 거기에 거주하지 않기 때문에 어차피 소작농들에게 그 포도원이나 농사일을 맡기곤 했다는 것입니다. 주인은 이 농부들을 전적으로 믿고 신뢰하고 그들에게 맡기고 먼길을 떠났다고 합니다. 그리고 때가 이르러서 그 소출의 얼마를 받으려고 종들을 보내는 이야기로 오늘 비유가 시작됩니다. 

2절입니다. 때가 이르매 농부들에게 포도원 소출 얼마를 받으려고 한 종을 보내니. 아마 수확기가 지나서 주인은 소출의 얼마를 받기를 원했습니다. 그것은 관례대로 약속한대로 너희에게 세를 받겠다는 의미일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성경을 보니까 포도원 소출의 얼마를 받으려고 말의 뉘앙스를 봐서는 주인은 결코 무리한 요구를 하고 있지는 않다 아마 최소한의 주인으로서의 소출을 요구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소출을 받지 않는다면 우리가 알다시피 남의 땅을 20년 동안 그냥 경작한다면 요즘의 현행법으로는 그 경작한 사람에게 그 땅의 소유가 돌려진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종종 주인들은 자기의 땅이라는 것을 확인하기 위해서 아주 작은 액수지만 세를 받고는 합니다. 그것이 나중에 법적인 증거자료가 되기 때문입니다. 포도원의 주인을 잊지않을 정도의 소출을 요구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포도원 농부들 보십시오. 그들은 이상한 행태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3절부터 5절입니다. 그들이 종을 잡아 심히 때리고 거저 보내었거늘 다시 다른 종을 보내니 그의 머리에 상처를 내고 능욕하였거늘 또 다른 종을 보내니 그들이 그를 죽이고 또 그 외 많은 종들도 더러는 때리고 더러는 죽인지라. 이 농부들의 모습은 이해할 수 없는 모습으로 바꿔졌습니다. 그들은 주인에게 늘 고마움을 가지고 감사한 마음을 가지고 소출을 겸손히 드려야 하는데 오히려 그들은 거칠고 폭력적이 되어서 소출을 받기 위해 주인이 보낸 종들을 때리고 빈손으로 돌려보냅니다. 

그러나 주인은 대꾸하지 않고 두 번째 종을 또 보냅니다. 그랬더니 이 농부들은 두 번째 종들은 머리를 때리고 능욕해서 보냈다는 것입니다. 조롱해서 보냈다는 의미입니다. 주인은 인내심을 가지고 세 번째로 종들을 보냈습니다. 그랬더니 이번에는 농부들이 작당을 해서 그 종들중의 일부를 때리고 죽이기까지 했습니다. 정말 이것은 배은망덕한 일이였습니다. 그들은 당연한 의무를 거부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농부들에 비하면 이 주인은 얼마나 관대한 사람인지 모릅니다. 

그는 또 기다리고 또 기다리며 인내합니다. 이 배은망덕한 농부들을 당장이라도 진멸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주인은 아직도 참고 기다리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저들이 혹 돌아서고 마음을 뉘우치고 회개하고 이제 주인에게 다시 용서를 빌것을 기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마치 주인의 모습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기다리고 계신것과 같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잘못한다고 그때그때마다 징계하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하나님도 우리가 뉘우치기를 무던히 기다리고 계십니다. 

이제 우리는 이 본문의 이야기속에서 몇가지 눈치를 챌 수 있습니다. 포도원은 이스라엘을 이야기하는구나. 이 포도원의 농부들은 이스라엘 백성들 혹은 종교지도자들을 의미하는구나. 또한 이 농부들은 오늘 우리들을 가르키고 있습니다. 그리고 포도원주인은 바로 인내하시고 전능하신 하나님이십니다. 그리고 주인의 뜻을 가지고 포도원을 방문했던 종들은 바로 구약의 선지자들을 의미합니다. 사실 구약의 선지자들도 하나님의 뜻을 대언하면서 많은 핍박과, 조롱과 멸시를 받고는 했습니다. 또 많은 선지자들이 순교당하기까지 했습니다. 그러나 주인은 다시 인내를 가지고 이제 그들에게 마지막 긍휼을 베풉니다. 그것은 자신의 하나밖에 없는 아들을 직접보내는 것입니다. 

6절입니다. 이제 한 사람이 남았으니 곧 그가 사랑하는 아들이라 최후로 이를 보내며 이르되 내 아들은 존대하리라 하였더니. 주인은 그래도 농부들을 믿고  싶었습니다. 신뢰하고 싶었습니다. 만에 하나라도 그들이 회개하고 돌아선다면 주인은 아마 그들의 과거를 묻지않고 과오를 따지지않고 용서해주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 농부들은 끝까지 그 마음을 강퍅케하고 회개하지를 않았습니다. 결국 주인의 신뢰를 여지없이 깨뜨려 버렸습니다. 적어도 그들이 내 사랑하는 아들만은 존대하리라 존중하리라 주인은 기대했지만 그 기대는 여지없이 허물어 졌습니다. 우린 그것을 바로 믿던 도끼에 발등찍힌꼴이라 설명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주인은 와서 그들을 심판하게 됩니다. 어떻게 할까요.

7절 8절입니다. 그 농부들이 서로 말하되 이는 상속자니 자 죽이자 그러면 그 유산이 우리 것이 되리라 하고 이에 잡아 죽여 포도원 밖에 내던졌느니라. 오늘 농부들은 회개하기는커녕 그들의 탐욕스러움을 여지없이 드러내고 말았습니다. 그들은 이제 하나밖에 없는 아들을 향해서 이는 상속자니 이 아들을 죽이면 이 포도원이 우리의 것이 될 것이다. 그들은 음흉한 모략을 드러내었습니다. 그리고 그 아들을 사랑하는 그 아들을 죽여서 포도원 밖으로 내어 던졌습니다. 

오늘 포도원 밖으로 내어던져진 아들은 누구입니까. 바로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 오셔서 하나님의 뜻을 전하고자 했지만 인간들은 그를 거부했습니다. 특히 유대 종교지도자들은 예수님을 잡아 죽일 방도만을 구했습니다. 결국 그를 십자가에 못박아 죽였고 결국 예수님은 예루살렘 성문밖 골고다 언덕 십자가에서 참혹한 죽음을 당하셔야만 했습니다. 참으로 안타까운 결말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제 포도원주인은 어떻게 했겠습니까. 당연한 결과입니다. 

9절입니다. 포도원 주인이 어떻게 하겠느냐 와서 그 농부들을 진멸하고 포도원을 다른 사람들에게 주리라. 분명한 주인의 판단일 것입니다. 주인의 인내는 한계에 이르렀고 주인은 와서 그 농부들을 여지없이 진멸했습니다. 진멸이라는 것은 아예 그 생명을 거두는 것을 의미합니다. 아주 단호하고 엄격한 심판이 강조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포도원을 다른 사람들에게 줄 것이라고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심판이 있음을 믿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하나님의 인내를 결코 시험해서는 안됩니다. 실제 역사속에서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종종 심판하시곤 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을 하나님이 애굽에서 이끌어 내셨습니다. 그리고 광야를 건너게 하시고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땅으로 그들을 인도하셨습니다. 그들은 그 땅에서 하나님을 예배하며 찬양해야함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하나님을 등지고 오히려 우상을 숭배하며 범죄하기에 열심히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안타깝게 여기시고 수많은 예언자들을 보내셨지만 예언자들은 종종 핍박과 죽임을 당하고는 했습니다. 

BC.722년 북이스라엘의 수도 사마리아 도성이 앗수르에 의해 여지없이 함락당합니다. 그리고 일부는 포로로 끌려갔습니다. BC.586년 남왕국 유다의 성읍인 예루살렘성은 바벨론에 의해 여지없이 파괴되어 버렸습니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포로로 끌려갔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정확한 심판이였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이 말씀을 하신후에 그리고 얼마지나지 않아 AD.70년 예루살렘성은 로마의 디도장군에 의해서 여지없이 파괴되어 버렸습니다.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은 이제 그 땅에 살지못하고 열방에 흩어져 살아가는 나그네의 서러운 삶을 이어가게 되었습니다. 

오늘 이 비극적인 결말의 배후에는 누가있습니까? 사악한 농부들이 있었습니다. 회개하기를 거부하는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막고있는 어리석은 농부들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 농부가 누구입니까? 바로 우리들인 것입니다. 이들은 순종보다 불순종을 선택했습니다. 순종이란 얼마나 귀중한지 모르는 것입니다. 

저는 신명기 28장 말씀을 늘 설교할때마다 그 말씀을 드렸습니다. 너희가 여호와의 말씀을 순종하면 너로 큰 민족이 되게 하겠다. 세상 모든 민족위에 뛰어나게 하실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계획이고 축복인 것입니다. 우리가 순종하지 않기에 하나님은 우리를 들어서 높이 사용하실 수가 없습니다. 

저는 이번 일본의 지진과 쓰나미를 보면서 순종이라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또 한번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쓰나미가 밀려올 때 고기잡이 하던 어부들이 이제 당연히 육지로 피해야 할 것 같지만 그들은 재난 방송을 듣고 반대로 항로를 바꿨습니다. 그들은 오히려 깊은 바다속으로 들어갔습니다. 그렇기에 그들은 쓰나미에서 보호를 받을 수 있었습니다. 왜 그러하냐면 간단합니다. 이 쓰나미라는 것은 깊은 바다에서는 아무런 힘도 발휘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얕은 바다에서는 엄청난 힘으로 몰려오기 때문에 집이고 빌딩이고 배고 다 쓸어버릴 수 밖에 없습니다. 

누가복음 5장에 보면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뭐라고 말씀하십니까. 깊은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으라. 베드로는 이해가 되지 않지만 그대로 순종했더니 오히려 그물이 찢어질 정도로 많은 고기가 잡힌 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깊은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으라. 어찌보면 그 말씀은 수많은 사람의 생명을 살리는 교훈이 될 수 있었습니다. 

이번 일본 지진에 많은 무명의 용사들이 있습니다. 한달 월급이 일본돈으로 270만원이 넘지못하는 말단 잡부들, 그 사람들이 공로자였다고 합니다. 그들은 방수능 누출을 두려워 하지 아니하고 그들은 원전가까이에서 궂은 일을 감당했습니다. 그리고 최후의 50인 결사대가 죽기를 각오하고 거기에 뛰어들었습니다. 그들은 위대한 영웅들이였습니다. 

그런가하면 후쿠시마라는 바닷가에 쓰나미가 몰려올 때 대피하도록 방송을 했던 동사무소 직원이 있었습니다. 그 동사무소직원은 마지막 대피하지 못하고 숨을 거뒀습니다. 그런데 동사무소직원이 뭐라고 광고를 했는지 아십니까. 여러분 높은 데로 올라가십시오. 높은 산으로 올라가십시오. 계속해서 그렇게 광고를 반복했습니다. 

그 말은 마태복음 24장에 소개되는 말씀입니다. 너희가 환난을 당할 때 낮은 곳으로 가지 말고 산으로 도피하라. 참으로 그러게 적합한 말씀인지 모릅니다. 그때 쓰나미를 당해 산으로 도피했던 사람들은 다 생명을 보존했습니다. 그러나 그저 쓰나미가 올때 집에 가재도구를 가지러 들어갔던 사람들은 결국 다 죽고 말았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얼마나 적절한 말씀인지 모릅니다. 

그런데 오늘 농부들은 그 말씀에 순종하기 보다 그들은 불순종을 선택했습니다. 그들은 은혜에 감사하고 보답하기 보다는 배은망덕한 모습을 취하였습니다. 그리고 심지어 주인의 종과 아들을 죽이기 까지 했습니다. 이것은 참으로 무서운 죄악이였습니다. 결국 여기에 하나님의  심판이 임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우리앞에도 언젠가는  심판의 때가 도래함을 의심해서는 안됩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하나님앞에 나가서 늘 고백하고 주님의 보혈로 우리죄가 씻음받아야 할 줄 믿습니다. 우리가 고백하지 않은 죄, 예수님의 보혈로 씻음받지 않은 죄는 우리에게 그대로 남아있습니다. 그래서 마지막 심판대 앞에서 우리는 그것을 일일이 주님앞에 고백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오늘 이 비유의 말씀은 반드시 심판의 때가 다가올 것임을 우리에게 말씀해주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본인이 미래에 경험할 일들을 미리 예고하고 계십니다. 10절 11절입니다. 너희가 성경에 건축자들이 버린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나니 이것은 주로 말미암아 된 것이요 우리 눈에 놀랍도다 함을 읽어 보지도 못하였느냐 하시니라. 

예수님은 시편 118편 22절을 우리에게 인용해서 말씀하십니다. 건축자들의 버린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다 이말씀은 여러분이 익히 알고 있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의 유래는 솔로몬의 건축당시에 있었던 전설에 의존한다고 합니다. 솔로몬이 성전을 건축할 때 석수장이들이 모여서 돌을 다듬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한 석수장이가 성전문의 기초석에 쓸것을 구하게 되었습니다. 좋은 돌들을 다 보았지만 마땅치 않았습니다. 그는 거기에 선택된 한 돌을 보다가 이것은 쓸모가 없다고 채석장에 던져버렸습니다. 그리고 다른 돌을 다 찾아봤지만 마땅치가 않았습니다. 다시 돌아와서 그 채석장에 버려진 돌을 보니까 그게 딱이였습니다. 이렇게 딱 맞는 것을 왜 내가 버렸지 하며 가져다 다듬어서 성전문의 기초석으로 삼았다는 것입니다. 

이제 그 이야기가 시편 118편에 인용된것을 예수님이 또 말씀하고 계십니다. 오늘 여기서 건축자들에게 버림받은 돌은 누구입니까? 바로 예수그리스도이십니다. 여기서 건축자들이란 누구입니까? 바로 유대 종교 지도자들입니다. 대 제사장, 서기관, 바리새인들, 그들에 의해서 예수님은 철저하게 버림받으셨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님을 거부하고 예수님을 죽이기까지 하려고 모의했습니다. 결국 예수님은 버림받고 고소당하고 십자가에 못박혀 죽임을 당하셨습니다. 그러나 죽은지 사흘만에 그를 고난가운데 죽임가운데 다시 일으키셔서 우리의 부활의 주가 되게 하시고 구주가 되게 하신줄로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버림받은 돌이였지만 예수님은 모퉁이의 머릿돌로 귀하게 쓰임받은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모퉁이라는 것은 집을 지을 때 꺽여지는 부분입니다. ㄱ 자로 꺽여지는 끝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집을 짓는 출발입니다. 우리는 그것을 모릿돌이라고 말합니다. 모퉁이의 머릿돌로, 아주 귀한 돌로 예수님이 쓰임받았음을 이 예언은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이런 예는 성경에서 많이 소개됩니다. 창세기 39장에 보면 요셉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요셉은 아버지 야곱으로부터 사랑받는 아들이였지만 그는 배다른 다른 형제들로부터 늘 비난을 받고 시기와 질투의 대상이 됩니다. 그는 자기의 꿈 이야기를 철없이 한 결과로 인해서 형들에 의해 웅둥이에 던져지고 그리고 노예로 팔려갑니다. 그 사랑받던 아들이 버림을 당한 것입니다. 아무도 요셉을 주목하지 않습니다. 그는 애굽의 시위대장 보디발의 집에서 무참한 종으로 일하게 됩니다.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그는 일로 정신이 없습니다. 잠깐 쉬려고 하면 무서운 채찍질이 그에게 닥쳐옵니다. 

그는 그 굶주림과 고통가운데에서 그는 하루하루를 살아갑니다. 그가 인정을 좀 받고 그 가정에 총무가 되었나했더니 시위대장 부인의 고발로인해서 그는 모암을 쓰고 감옥에 갇힙니다. 거기서 그는 떡맡은 관원장과 좋은 관계를 맺지만 그가 자유의 몸이 되어서는 요셉을 기억조차 하지 않았습니다. 요셉은 철저하게 버림받은 돌이였습니다. 이사람, 저사람에게 잊혀져가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한분만은 요셉을 잊지 않으셨습니다. 그리고 때가 되어서 하나님은 요셉을 들어서 애굽의 국무총리 존귀에 자리에 세우신 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이것이 바로 모퉁이 돌로 쓰임받은 요셉의 생애인 것입니다. 

그것만이 아닙니다. 다윗또한 그러했습니다. 다윗의 형제는 8형제였습니다. 그러나 아버지는 다윗을 별로 주목하지 않았습니다. 사무엘이 와서 너의 아들들을 보자고 했을 때 그는 다윗을 내어 보이지도 않았습니다. 재차 요구할 때 목동으로 일하는 다윗을 불러와서 이제 사무엘에게 얼굴을 보였습니다. 사무엘은 하나님이 정한사람이 그라는 것을 선포하면서 그에게 기름을 부었습니다. 그러나 그때부터 다윗은 생애는 고난이 계속되었습니다. 그는 사울왕에게 쫓겨서 일생동안 많은 고난가운데 살아갑니다. 그를 환영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습니다. 그는 가는 곳마다 배척을 당했습니다. 그는 버려진 돌이였습니다. 그러나 때가 되니 하나님은 다윗을 들어서 이스라엘의 위대한 왕으로 쓰신 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어찌보면 성경의 역사는 하나의 일치되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사람들의 눈에는 불가능했지만 하나님은 그를 들어서 위대하게 사용하신다는 사실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앞에 온전히 서있다면 정직하게 선다면 그리고 회개하는 영혼이라면 하나님은 결코 그를 버리지 않으십니다. 예수님의 생애가 바로 그와 같은 것입니다. 건축자들이 버린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셨습니다. 

유대인들은 철저히 예수님을 거부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과 함께 온 복음은 이제 유대인에게 흘러가지 못하고 이방인들에게로 방향을 틀어 흐를수밖에 없습니다. 

예수님은 건축자들인 유대종교지도자들에게 결국 거부당하고 버림당하였습니다. 하나님은 그를 들어서 사용하십니다. 예수님이 오늘 이 말씀을 하심을 여기 듣고 있는 종교지도자들은 잘 알고 있습니다. 포도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그리고 포도원주인은 누구를 의미하는지 종들은 누구를 가르키는지, 그리고 그 아들은 누구를 말하는지, 알고 있었습니다. 이 말씀을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거기에 순종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결국 그들에게 엄청난 심판이 임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오늘 비유는 누가 주인인가를 질문하고 있습니다. 이 모든 것은 누구의 소유인가를 되묻고 있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종종 우리에게 헌금을 강조할 때가 있습니다. 왜 헌금을 강조할까요. 우리가 십일조를 드린다면 그 모든 열가운데 하나를 성별해서 우리는 이런 생각을 할 때가 많이 있습니다. 이 아홉은 내것이고 하나는 주님의 것이니까 이것을 주님께 드리면 나는 괜찮은 그리스도인이지 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착각입니다. 열은 다 하나님의 소유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아홉은 내것이라고 착각하며 살아갑니다. 우리는 일주일에 오전 한시간을 예배드리면 괜찮은 그리스도인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우리의 모든 일생이 하나님의 시간임을 잊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 삶의 주인이 누구십니까. 바로 예수그리스도이심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우리는 내가 나의 주인인 것처럼 살아갑니다. 이 모든 것이 나의 소유인것처럼 착각하며 살아갑니다. 읻것은 반역하는 인간의 모습을 우리에게 고발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이 말씀을 하셨을 때 유대인의 지도자들은 어떤 모습을 보였을까. 

12절말씀입니다. 그들이 예수의 이 비유가 자기들을 가리켜 말씀하심인 줄 알고 잡고자 하되 무리를 두려워하여 예수를 두고 가니라. 이 말씀은 분명 그들을 향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당연히 이 말씀을 듣고 가슴을 치며 회개하고 그 앞에 무릎을 꿇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마음이 더 강퍅해졌습니다. 예수님을 잡고자 했지만 백성의 무리가 두려워서 그냥두고 떠나갔다고 성경은 증언합니다. 

오늘 이것이 말씀을 듣는 우리의 태도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나를 가르킨다고하면 이것은 은혜고 축복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 말씀이 다른 사람을 가르킨다고 생각할 때가 많습니다. 그래서 어떤 할머니는 앞자리에 앉아서 설교를 듣다가 자꾸 뒤를 돌아보는 것입니다. 예배가 끝나고 그 할머니에게 왜 자꾸 뒤를 돌아보셨느냐고 물으니까 오늘 저 말씀은 우리 며느리가 들어야 하는 말씀인데 며느리가 왔는지 돌아봤다고 이야기 하십니다. 

오늘 하나님의 말씀은 나 자신을 향하고 있습니다. 어떤 분들은 그 말씀이 나를 향한다고 하면 불편하게 여깁니다. 유대 지도자들도 매우 불편하게 여겼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예수를 죽이고자 또다른 방도를 간구하게 되었을 것입니다. 오늘 이 농부들은 누구입니까? 바로 포도원주인으로부터 위임받은 청지기들입니다. 바로 우리들이 하나님의 청지기인줄 믿습니다. 하나님은 주인이시고 그분은 내 생명과 가정과 직장과 물질과 시간과 건강을 내게 맡기셨습니다. 이것은 결코 내것이 아닙니다. 그러기에 이 모든 것은 바로 주님을 위해서 사용되어져야 하는 것입니다. 이 모든 소유는 바로 주님의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사야 43장에 보면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것이라고 성경은 말씀합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모든 것을 가지고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살아야 합니다. 고린도전서 13장 31절에 보니까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어떤 청지기이십니까. 여러분의 주인은 누구십니까. 여러분의 진정한 주인은 누구십니까. 여러분의 심령에 성령으로 임재해계신 예수그리스도가 여러분의 주인이십니까. 아니면 여러분 자신이 주인노릇하고 계십니까. 농부들은 주인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주인노릇하고 싶었습니다. 그리고 주인이 되고 싶었습니다. 여러분들도 혹 그런 유혹을 받지않으십니까. 내 생애 중요한 결정들을 주님께 묻고 여쭤보고 결정하고 있습니까. 아니면 내 소견의 하고싶은대로 말하며 행동하며  살아가고 계십니까. 아니면 내가 하는 모든일이 하나님의 일이라며 착각하며 살아가고 있지는 않습니까. 

한 어리석은 부자의 이야기가 성경에는 소개됩니다. 이사람이 한 해 농사를 지었더니 그의 농사가 잘되어서 많은 수확을 거뒀습니다. 그는 창고를 더 확장하고 그 양식을 다 가둬놓고 그는 배룰 두드리며 이야기합니다. 이제 내 인생 마음껏 먹고 즐기고 쾌락을 가까이 하지 그렇게 이야기합니다. 그러나 그날밤 하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내가 오늘밤 네 생명을 거둬가면 이 모든 것이 누구의 것이 되겠느냐. 우리의 생명을 거둬가신다면 그 모든 것이 누구의 것이 되겠습니까. 이제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앞에서 내가 겸손한 청지기의 자세로 돌아가야 합니다. 그리고 여호와의 말씀앞에 그분이 내게 맡기신 모든 환경과 여건속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의 삶이 될 수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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