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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주의 날에 해야 할 일 (계 1:9-20) - 말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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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의 날에 해야 할 일 (계 1:9-20)
 

기독교 작가인 엔또 슈샤꾸의 작품에 [침묵]이라는 소설이 있습니다. 일본에 처음으로 천주교가 들어가던 때의 이야기를 엮은 소설입니다. 말 못할 박해를 받으면서도 하나님께 대한 믿음을 끝까지 지켜서 순교해 가는 사람들, 약해서 굴복하고 배교하는 사람들, 이들을 지켜보는 신부의 고뇌와 회의를 밀도 있게 그린 작품입니다. 

예수 믿기로 작정한 사람들이 말로 표현하기조차 끔찍스러운 온갖 박해와 고문을 다 당하면서 예수를 부인하라는 협박을 받습니다. 이를테면 썰물 때에 바닷가에 십자가를 죽 세워 놓고 거기에 사람을 묶어 둡니다. 밀물 때가 되어 바닷물이 밀려들어 오면 잠겨서 죽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를 부인하면 살 수 있는데도 수많은 사람들이 이처럼 순교해 갑니다. 

이 사람들에게 믿음을 심어 주었던 포르투갈 신부님은 너무도 답답해서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합니다. “능력을 나타내 주옵소서, 저들을 구원해 주옵소서”하고 말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능력을 나타내시지 않습니다. 신부님은 피땀을 흘리며 더욱 안타깝게 기도합니다. 하나님, 왜 침묵하고 계시는 것입니까? 그러자 그의 귀에 들려오는 뚜렷한 음성이 있었습니다. “나는 침묵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고통을 함께 나누고 있을 뿐이다.” 그렇습니다. 주님은 주를 위하여 당하는 고난에 함께 하십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멍에를 메고 나아갈 때, 그 멍에는 어떠한 고난일지라도 쉽고 가볍고 기쁜 멍에가 되는 것입니다. 사도요한이 그랬습니다. 요한은 극심한 핍박 속에서도 함께 하시는 주님을 체험했습니다. 그리고 주님이 함께 하시므로 극한 고난을 극복하고 믿음으로 승리했습니다. 
본문은 사도 요한이 도미시안 황제가 기독교인들을 핍박할 때 밧모라는 섬에 유배되어 있으면서 성령의 감동 속에서 주님을 만난 내용의 기록입니다. 

주후 95년을 전후하여 로마의 도미시안 황제는 자신의 제국 통치의 누수현상을 막고 통치력을 강화하기 위하여 자신을 ‘주와 신’으로 숭배하도록 강요했습니다. 황제숭배에 희생된 사람들은 그리스도인들이었습니다. 기독교교리상 황제 숭배는 우상숭배이기 때문에 황제숭배를 거절하는 그리스도인은 체포되어 감옥에 갇히고 사자의 밥이 되기도 하고 화형을 당하기도 하고 십자가형을 당하기도 했습니다. 
이때 당시 소아시아의 대표적인 기독교 지도자였던 사도 요한이 체포되어 밧모섬으로 유배되어 오게 된 것입니다. 

사도요한은 밧모섬에서도 주일을 지켰습니다. 10절에 보면 “주의 날에 내가 성령에 감동되어”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주의 날’은 우리가 요즘 말하는 ‘주일’입니다. 주일은 한 주의 첫째 날이며 안식일 후 첫날로 주님께서 죽음을 이기시고 부활하신 날이었습니다. 

주일 개념은 초대교회 초창기부터 숙지되고 기념되어 왔으나 주후 2세기에 이르러서 비로소 교회 안에서는 안식일을 버리고 주일을 지키게 되었습니다. 사실 일주일의 모든 날이 주님의 것입니다. 주님은 모든 날의 주인이십니다. 그런데 초대교회 때부터 기독교인들은 마치 우리의 십분의 십 전체가 주님의 것이지만 십일조를 구별해서 드리는 것처럼 일주일 중 주님께서 부활하신 하루를 구별하여 주께 드리며 공동체의 예배를 갖기로 한 것입니다. 

본문의 내용은 밧모섬에 유배 된 요한이 주의 날에 성령의 감동을 받고 주님의 음성을 들으며 소아시아 일곱 교회에 보낼 편지를 받았던 내용입니다. 

우리는 이 본문에서 사도요한을 통해서 ‘주의 날에 해야 할 일’을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1. 환경을 극복하는 힘을 얻으십시오. 

9절에서 사도요한은 자신의 형편을 이렇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나 요한은 너희 형제요 예수의 환난과 나라와 참음에 동참하는 자라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를 증언하였음으로 말미암아 밧모라 하는 섬에 있었더니” 요한은 예수님의 환난과 주님의 나라와 참음에 동참하는 중이었습니다. 그는 주님을 증거 하였기에 밧모섬에 유배되어 고통을 당하는 중이었습니다.

사도요한은 그가 당하는 모든 고난을 주님과의 관계에서 얻는 힘으로 이겨나갔습니다. 특히 주의 날에 예배를 드리면서 새 힘을 얻었습니다. 10절에 보니 주의 날에 성령의 감동을 받으며 새 힘을 얻었습니다. 사도 요한은 몇 몇 사람들과 함께 동굴 속에서 예배를 드렸다고 합니다. 그 동굴 교회가 지금도 남아 있다고 합니다. 사도요한은 주의 날에 주님을 만나는 영적 사건을 통해서 새 힘을 얻었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도 주일에 예배를 통해서 하나님이 주시는 힘을 얻으십시오. 성령의 감동으로 새 힘을 얻으십시오. 주님과 만남으로 새 힘이 넘치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그 힘으로 모든 환경을 극복하고 모든 환난을 이겨내기를 바랍니다. 

한국사를 연구하는 민경배 교수는 1907년 평양 대부흥은 그 이후에 있게 될 민족적 시련을 이겨낼 수 있는 힘이었다고 말합니다. 3.1운동이 일어났던 해는 1919년이었습니다. 그런데 사실상 우리나라가 일본에게 주권을 상실한 한일합병이 이루어진 때가 1910년 8월 22일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보다 3년 앞선 1907년에 어떤 일이 있었습니까? 평양 대부흥이 일어났었습니다. 이 부흥을 경험하며 한국 교회는 뜨거워졌고 순결해 졌으며 담대해진 것입니다. 교회사가인 민경배 교수는 그의 저서 [한국 기독 교회사]에서 이때 있었던 부흥운동이 일체하의 민족사에 끼친 영향을 이렇게 서술하고 있습니다. “이 대부흥이 일어났을 때 한국 교회는 민족적 시련의 비극에서 헤어 나올 수 있는 힘을 획득했을 뿐 아니라, 장차 계속해서 계속해서 겪어야 할 숱한 험로를 지나, 절망밖에 안 보이는 국운에 맞서 지긋히 발 딛고 정도에 나가는 힘과 예지와 담력을 소유하게 되었던 것이다” 다시 말하면 이런 교회가 경험한 부흥의 힘 그 거룩한 능력으로 우리는 일제시대의 고난을 견디어 낼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제가 금요일에 말씀드렸던 전도사님 이야기를 또 하고 싶습니다. 김창인 목사님께서 북한에 계실 때 한 젊은 전도사님에게 공산당을 피해 교인들을 데리고 피난가라고 하셨답니다. 

“자네는 나보다 낫네. 그러니 자네가 교인들을 데리고 남한으로 가서 잘 섬기게. 나는 여기에 남아서 노인들을 섬기겠네.” 

그러나 그 젊은 전도사님이 “아닙니다. 목사님께서 피난 가는 교인들을 데리고 가세요. 제가 여기에 남아서 노인들을 잘 섬기겠습니다.”라고 우겨서 목사님께서 교인들을 데리고 피난을 오시게 되었답니다. 그런데 그 젊은 전도사님이 어릴 적부터 믿음 생활을 얼마나 잘했는지 열여덟 살에 세례를 받을 때 김 목사님께서 다른 것은 물을 필요도 없었답니다. 

“이제까지 성경을 몇 번이나 읽었는가?”라는 것만 물었답니다. 그때 그분이 “목사님, 부끄럽게 왜 그런 것을 물으십니까?”라며 대답을 피했지만 목사님께서 강권했더니 사십 번을 읽었다고 하더랍니다. 열여덟 살밖에 되지 않았는데 신구약을 사십 번이나 읽은 것입니다. 그 정도이니 김 목사님께서 그 전도사님에게 ‘나보다 나으니 교인들을 데리고 남한으로 가서 잘 섬기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 후 두 분 사이에 소식이 끊겼답니다. 그런데 김 목사님께서 미국에서 성회를 인도하던 중에 그 전도사님의 소식을 들었답니다. 목사님께서 피난하신 후 공산당원들이 김창인 목사님을 잡으러 왔는데 계시지 않으니 목사님 대신 전도사님을 잡아갔답니다. 그리고는 경찰서 뜰에 큰 항아리를 갖다 놓고 거기에 찬물을 가득 채운 후 전도사님을 발가벗겨서 집어넣었답니다. 콧물도 그대로 얼어붙는 그 추운 겨울에 전도사님을 그 속에서 얼어 죽게 한 것입니다. 

전도사님이 그 항아리에서 순교하는 마지막까지 “하늘가는 밝은 길이 내 앞에 있으니 슬픈 일을 많이 보고~”라는 찬송을 불렀답니다. 다음 날 교인들이 얼어붙은 항아리를 깨고 전도사님의 시신을 수습하여 장례식을 치렀답니다. 그 전도사님이 항아리에 들어가서 얼어 죽는 고난 중에도 믿음을 지킬 수 있는 힘을 성경을 통해서 얻은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신앙인들은 오래지 않아서 큰 환난을 당할 수 있습니다. 믿는 자들은 미래의 축복도 기대해야 하지만 주님의 재림 직적에 있게 될 대환난도 믿음으로 준비해야 합니다. 

역사의 종점에 주님은 구름을 타고 재림하실 것입니다. 재림 후에는 천년 왕국이 도래하고 천년 왕국 후에 백보좌 심판이 있을 것입니다. 우리들은 백보좌 심판 후에 영원천국에 들어가게 될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주님의 재림 전에는 7년 대환난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그리스도인은 대환난을 통과하지 않을 것이라고 하지만 성경은 그렇게 말하고 있지 않습니다. 

마24장은 주님의 재림 직전 환난에 대한 내용입니다. 29-30절에 보면 환난 후에 있을 일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바로 31절에 주님의 재림이 나옵니다. 환난 후에 “그가 큰 나팔소리와 함께 천사들을 보내리니 그들이 그의 택하신 자들을 하늘 이 끝에서 저 끝까지 사방에서 모으리라”고 말씀합니다.

여러분! 환난을 가볍게 생각하면 안 됩니다. 마 24:21,22에 이렇게 말합니다. “이는 그 때에 큰 환난이 있겠음이라 창세로부터 지금까지 이런 환난이 없었고 후에도 없으리라 22 그 날들을 감하지 아니하면 모든 육체가 구원을 얻지 못할 것이나 그러나 택하신 자들을 위하여 그 날들을 감하시리라” 

인류 역사에 없던 환난입니다. 우리가 한 번도 경험해 보지 못했던 환난입니다. 인류 역사에서 지금까지 가장 큰 환난을 당했던 사람들도 당해보지 못했던 환난입니다. 다행스러운 것은 믿는 자들의 구원을 위하여 환난을 감해주시겠다고 합니다. 환난을 감해주지 않으시면 모든 육체가 구원을 얻을 수 없습니다. 그 만큼 견디기 힘든 환난입니다.

여러분! 누가 대환난을 이겨낼 수 있을까요? 평소에 주께 힘을 얻은 사람들입니다. 평소에 주일을 잘 지킨 사람들입니다. 평소에 예배를 통한 하나님의 은혜를 충분히 공급 받은 사람들입니다. 환난 전에 은혜 받지 못한 사람들, 주일을 잘 지키지 못한 사람들, 평소에 주님 주시는 힘을 얻지 못한 사람들 중에는 배교하는 사람들이 많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배교의 결과 영원한 지옥에 떨어지고 말 것입니다. 그러므로 환난을 이길 힘을 얻어야 합니다. 

핸드폰을 사용하려면 밧데리를 충전해 놓아야 합니다. 그렇지 못하면 핸드폰을 써야할 때 사용할 수 없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주일에 하나님 앞에 나와서 예배를 드리면서 성령의 감동을 받으십시오. 주님을 만나는 영적 체험을 하십시오. 그래서 밧데리가 충전 되듯이 영적 충전을 받으시고 승리하기를 축원합니다. 우리는 주일에 환경을 이길 힘을 받아야 합니다.


2. 성령의 감동을 받으십시오.

10절에 보니 사도 요한은 주의 날에 성령에 감동되었습니다. 성령의 감동은 영적인 스위치를 켜는 것입니다. 성령의 감동은 영적인 파워를 공급하는 것입니다. 성령의 감동이 있어야 영적인 일이 가능합니다. 
제 아내가 컴퓨터를 사용하지 않다가 최근에 컴퓨터를 만지기 시작했습니다. 만지지 않던 컴퓨터를 만지니 다른 사람들이 하면 웃기는 실수를 몇 번했습니다. 

몇 주 전에는 제 아내가 컴퓨터를 틀고 동영상을 보려고 하는데 소리가 나지 않는 것입니다. 소리가 나지 않으니 아내가 컴퓨터 본체를 돌려보고 스피커의 잭을 뺏다가 다시 꽂아보고는 그래도 소리가 나지 않으니 답답해했습니다. 제 아내가 좀 성질이 급하거든요. 그래서 제가 아내를 도와주었습니다. 제가 살펴보니 스피커의 스위치가 꺼져 있는 것이었습니다. 스위치가 꺼져있으니 스피커에 전기가 공급이 안 되고 전기 공급이 안 되니 당연히 소리가 나오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스피커의 스위치를 켜주었습니다. 신기하게도 방금 그 스피커 그대로인데 전기가 들어가니 스피커에서 소리가 나기 시작했습니다. 또 한 번 그런 일이 있었는데 그 때는 둘째 아들 하은이가 스피커 스위치를 커준 일이 있습니다. 

영적인 삶도 마찬가지입니다. 성령의 감동은 영적인 스위치를 켜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령의 감동을 받는 사람이 영적인 소리를 낼 수 있고, 영적인 세계를 볼 수 있고, 영적인 일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아무리 좋은 스피커도 전기 공급이 되지 않으면 소리를 낼 수 없는 것처럼 아무리 많이 배우고, 인격적이고, 배경이 좋아도 성령의 감동이 없으면 영적인 소리를 낼 수 없습니다. 영적인 세계를 볼 수 없고, 영적인 일을 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주일에 교회 와서 여러분들이 해야 할 일이 성령의 감동을 받는 일입니다. 그래야 한 주간 믿음으로 살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주일에 교회에 와서 예배를 드릴 때 성령의 감동을 받고 가야 합니다. 찬송을 하다가도 성령의 감동을 받아야 합니다. 기도를 하다가도 성령의 감동을 받아야 합니다. 말씀을 듣다가도 성령의 감동을 받아야 합니다. 그리고 성령께서 내 마음에 감동을 주시면 순종하십시오. 순종할 때 하나님의 일이 되는 것입니다. 

어느 권사님 한 분은 기도하던 중 어떤 분이 막 걱정되기 시작했습니다. 그게 성령의 감동이었습니다. 그래서 그 집으로 달려갔습니다. 아버지와 아들의 신발이 있는데도 문을 열어주지 않아 문을 따고 들어갔더니 아버지와 아들 앞에 약봉지와 물이 있었습니다. 사랑하는 아내가 바람이 나서 가출한 것에 충격을 받은 착하디착한 남편이 아들과 함께 죽으려던 참이었습니다. 권사님이 “○○ 아버지, 이러면 안 돼요.” 하며 약봉지를 빼앗고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래서 그 아버지와 아들을 살렸습니다. 만일 그때 권사님이 성령의 감동을 받고도 그 집에 가지 않았다면 그 아버지와 아들은 죽었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일을 성령의 감동으로 해오셨습니다. 출 35장에 보면 성막건축의 과정이 나옵니다. 성막은 성령의 감동을 받은 사람들의 헌신으로 세워진 것입니다. 출 35:21에 보니 “마음이 감동 된 모든 자와 자원하는 모든 자가 와서 회막을 짓기 위하여”라고 말씀합니다. 25에서는 “마음에 감동을 받아 슬기로운 모든 여인은 염소 털로 실을 뽑았으며”, 34절에서는 “또 그와 단 지파 아히사막의 아들 오홀리압을 감동시키사 가르치게 하시며”라고 말씀합니다. 성막은 성령의 감동을 받은 사람들이 순종하여 헌신하므로 세워진 것입니다.

성경도 성령의 감동을 받은 사람들이 기록한 것입니다. 딤후 3:16입니다.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우리가 이 세상에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고 하나님의 나라를 확장하는 영적 군사로서 승리하는 생활을 하려면 성령의 감동을 받아야 합니다. 주일에 교회 오셔서 성령의 감동을 받고 가시기를 바랍니다. 


3. 나팔 소리 같은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십시오.

10절에 보니 사도요한은 주의 날에 성령에 감동되어 자기 뒤에서 나는 나팔 소리 같은 큰 음성을 들었습니다. 
성경에서 나팔 소리는 크게 두 가지 의미를 내포하고 있습니다. 첫째는 주의 재림을 알리는 신호입니다. 주님은 재림하실 때 큰 나팔소리와 함께 천사들을 보내시어 택하신 자들을 휴거하게 하실 것입니다. 둘째는 나팔소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입니다. 본문에서 사도 요한이 들은 나팔소리 같은 큰 음성은 주님의 음성으로 해석하는 것이 옳다고 봅니다. 

구약에 보면 하나님께서 광야의 이스라엘 백성들을 움직이실 때 나팔소리를 사용하셨습니다. 나팔소리의 길이나 울림 그리고 몇 번 부느냐에 따라서 백성들은 달리 행동했습니다. 나팔소리에 따라서 멈추기도 하고 움직이기도 하고 모이기도 했습니다. 나팔소리는 하나님의 말씀의 역할을 했던 것입니다. 구약시대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나팔 소리를 따라서 움직였던 것처럼 우리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서 움직여야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주일에 교회에 오면 여러분들은 큰 나팔소리 같은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돌아가셔야 합니다. 반드시 하나님의 음성을 들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영혼의 생수입니다. 사람은 생존을 위하여 반드시 물을 마셔야 하는 것처럼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의 영혼에 생수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영혼의 양식입니다. 사람의 육체가 떡으로 사는 것처럼 사람의 영혼은 말씀의 떡으로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영혼의 거울입니다. 우리들은 거울을 통해서 자신을 보게 되고, 자신을 잘못된 외모를 고칩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의 모습을 보게 하고 우리의 잘못된 부분을 고치게 합니다.
하님의 말씀은 불입니다. 인간이 모든 짐승보다 뛰어난 삶을 살 수 있는 것은 불을 이용할 줄 알기 때문입니다. 렘 23:29에 보면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내 말이 불 같지 아니하냐 바위를 쳐서 부스러뜨리는 방망이 같지 아니하냐”라고 말씀합니다. 참으로 인간이 인간답게 살려면 불과 같은 하나님의 말씀을 사용할 줄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반석을 부수는 방망이와 같습니다. 사람의 마음이 단단해 지면 영적인 열매가 풍성한 삶이 불가능합니다. 파종을 할 때 단단한 땅에다 하지 않습니다. 단단한 땅에 파종을 하면 열매가 없기 때문에 먼저 흙을 부드럽게 만들어 놓고 파종을 합니다. 마찬가지로 우리의 마음이 단단하면 영적인 열매가 없습니다. 마음이 부드러워야 영적인 열매가 풍성해집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말씀이 반석처럼 단단해진 우리들의 마음을 두들겨서 가루로 만들고 부드럽게 만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영적인 칼입니다. 우리들은 영적인 군사들입니다. 이번 연평도 사건에서 안보불감증이 얼마나 심각한지를 보게 되었습니다. 아무리 좋은 장비를 가지고 있어도 장비가 작동하지 않으니 적에게 당하기만 했지 제대로 보복을 하지 못했습니다. 요즘은 총이나 대포 비행기 등 무기가 많이 발달 되었지만 성경이 기록될 당시만 해도 칼이나 창을 사용했습니다. 주일에 하나님의 말씀의 칼을 갈아야 합니다. 그래야 한 주간 믿음으로 살고 영적 싸움에 승리하는 것입니다. 

미국의 한 초등학교에 저능아가 있었습니다. 그 아이는 아이들에게 따돌림을 당하는 것은 물론 선생님들에게도 관심 밖의 아이였습니다. 그런데 그 아이가 4학년이 되었을 때, 대학을 갓 졸업하고 담임을 맡은 알렉사라는 여선생님이 그 아이를 긍휼히 여겨 늘 관심을 갖고 그 아이의 손을 잡아주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너는 얼마든지 해낼 수 있어. 너에게는 숨은 능력이 있으니 노력하면 얼마든지 잘할 수 있단다.” 학교에 입학하고 4년 만에 처음으로 희망의 말을 들은 그는 선생님을 실망시켜 드리지 않으려고 열심히 공부했습니다. 놀랍게도 그는 모든 과목에 ‘A’를 받았습니다. 그는 지금 세계 명문 예일대학의 심리학 교수로 지능 분야에서는 세계 최고의 권위자인데 그가 바로 로버트 스턴버그입니다. 

그가 쓴 ‘성공 지능’에 관한 책의 서문에는 이런 글이 있습니다. “내게 희망을 주신 알렉사 선생님께 이 책을 드립니다.” 담임선생님이 던져 준 희망의 말에도 힘이 있어 저능아가 예일대학의 저명한 교수가 되었는데, 하물며 하나님 말씀이겠습니까? 하나님 말씀은 그대로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능력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사람을 변화시키고 인생을 아름답게 만듭니다. 

하나님께서는 주일마다, 수요일마다, 새벽마다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를 사랑한다. 내가 너와 함께 한다. 내가 너를 도와준다. 참으로 굳세게 해주겠다.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이 된다.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아라. 근심하지 말아라. 두려워하지 말아라.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느니라. 내가 너를 축복한다.” 말씀은 위대합니다. 그대로 됩니다. 천지는 없어져도 말씀은 그대로 됩니다. 교회에 오면 반드시 하나님의 음성을 들어야 합니다. 


4. 사명을 확인하십시오.

사도요한은 주님을 만나고 크게 변화된 사람입니다. 그는 두 가지 면에서 눈에 띄는 변화를 보였습니다. 하나는 불같은 성질을 가진 사람이 사랑의 사도가 된 것이고, 또 하나는 자기 욕망을 위하여 주님을 따랐던 사람이 사명을 위하여 사는 자가 된 것입니다. 

그는 본래 불같은 성격의 소유자였습니다. 한번은 주님께서 제자들과 사마리아 마을로 들어가셨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주님이 예루살렘으로 가신다고 길을 막았습니다. 이 때 사도요한이 주님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주여 우리가 불을 명하여 하늘로부터 내려 저들을 멸하라 하기를 원하시나이까” 사람들이 주님이 가시는 길을 막는다고 하늘에서 불을 떨어뜨려서 그들을 태워죽이겠다고 했던 사람입니다. 그런데 그가 변화되어서 사랑의 사도가 되었습니다. 전설에 의하면 사도요한이 노인이 된 후에 힘이 없어서 설교할 수 없을 때에도 성도들은 사도요한의 설교를 듣기를 원했습니다. 늙은 요한이 강단에 올라가서 “우리 서로 사랑합시다.”라고 힘없이 말해도 성도들은 눈물을 흘리며 아멘으로 화답했다고 합니다. 

요한은 주님을 따라다녔지만 주님의 뜻을 위하여 주님을 따랐던 사람이 아닙니다. 자기의 욕심을 채우기 위해서 주님을 따랐던 사람입니다. 한번은 주님께서 자신이 십자가를 지시고 죽으실 것에 대해서 심각한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런데 철없는 요한은 자기 어머니를 대동해서 주님에게 높은 자리를 청했던 적이 있습니다. 마 20:20에 보면 “주의 나라에서 하나는 주의 우편에, 하나는 주의 좌편에 앉게 명하소서”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사명과 상관없이 주님을 따라다녔던 사도요한이 이제는 사명을 위하여 사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본문에서는 그가 사명 때문에 밧모섬에서 유배생활을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11절에 보면 그가 또 다른 사명을 받습니다. 그는 자기가 보고 들은 것을 기록해서 소아시아 일곱 교회에 보내야 하는 사명을 받습니다. 그리고 그 사명을 실천해서 지금 우리가 요한계시록을 보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사명을 위하여 살아야 합니다. 사명을 위하여 공부하고, 사명을 위하여 일하고, 사명을 위하여 돈을 벌어야 합니다. 단지 먹고 살기 위해서, 더 좋은 집에서 살고, 더 좋은 자동차를 타고, 더 큰 명예를 얻기 위해서 산다면 그 사람의 삶은 동물적인 삶인 것입니다. 
사명의 길은 아무리 어려워도 가야 합니다. 왜냐하면 인생은 사명을 위해서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제가 존경하는 설교가 중에 이필재 목사님이란 분이 있습니다. 이분의 설교에 나온 가슴 아픈 이야기입니다. 이 목사님이 LA 한미 노회 책임을 맡고 있을 때, 어느 날 대단히 고생스러워 보이는 모습의 30대 후반의 여자 분이 노회 사무실에 찾아오셨습니다. 

“미국 장로교 PCUSA 교단에서는 저 같은 여자에게도 목사 안수 제도가 열려 있다고 하여서 제가 좀 도움을 받으려고 찾아왔습니다.”, 
“당신은 누구입니까?”, 

“네, 저는 선교사의 부인입니다. 제 남편은 선교 열정이 남보다도 아주 강해서 이 세상에서 가장 불쌍하게 사는 고난의 민족을 찾아 나섰습니다. 그가 이곳저곳을 다 다녀보다가 내가 갈 곳은 이곳이라고 정한 곳이 방글라데시의 정글 속이었습니다. 거기가 내가 갈 곳이라고 생각을 해서 우리 가족들, 어린아이들을 데리고 모두 그곳으로 갔습니다. 저는 남편에게 원망이 많았습니다. 우리 형편이나 사정에 맞는 선교지를 택할 것이지 학교도 없는 여기에 와서는 아이들을 학교에 보내지 못하고, 이 정글 속에 데려다 놓고 이를 어떡하란 말입니까? 아니면 고국에서 그냥 목회를 하고 살아도 되는데 이렇게 열악한 환경 속에다가 가족들을 갖다 버리도록 해놓고 먹을 것도 없는데, 마치 열매 따먹으면서 살라는 식으로 선교를 하고, 이 지역은 열병이 심하고 풍토병이 심해서 병들어 죽기 딱 알맞은 그런 고장에 인데…. 그렇다면 선교를 해도 좀 자기 몸을 생각하며 할 것이지 불철주야 몸을 돌보지 아니하고 뛰어 돌아다니다가 예상대로 죽었습니다. 저는 남편 무덤 앞에서 땅을 치며 원망과 통곡을 했습니다. 당신은 하나님께 충성하기 위해서 죽도록 충성하다가 죽었다고 합시다. 나와 어린아이들은 어떻게 하란 말입니까? 이 암흑과 같은 불모지에 유배 온 듯 살다가 젊어 먼저 죽으면 이 아이들은 다 여기서 죽으란 말입니까? 난 어떡하란 말입니까?” 

그래서 그녀는 남편 무덤을 막 쥐어뜯으면서 하나님도 싫고, 남편도 원망스러워서 막 통곡을 하는데 아무도 없는 그 정글 하늘에서 자기 귀에 선명하게 들려오는 한 음성이 있었다고 합니다. 
“너도 이 땅에서 죽어 네 남편 곁에 묻히어라!”, 

‘이게 무슨 소린가?’ 아무리 둘러봐도 자기 혼자 밖에 없었다는 겁니다. 그 정글 속에 사람이라고는 자기 혼자 밖에 없고, 남편 무덤 밖에 없는데 하나님의 음성이 들린 것입니다. 그 사모님이 하나님의 듯, 하나님이 자신에게 주신 사명을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나도 그 땅에서 죽는 것이 하나님의 뜻인 것을 제가 알았습니다. 남편의 뒤를 잇기 위해서는 제가 목사 안수를 받고 선교사로 가려고 찾아서 여기까지 온 것입니다. 나를 좀 도와주십시오.”라고 하더랍니다. 

성공적인 인생은 많은 돈을 벌고, 명예를 얻고, 큰일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자기의 사명을 발견하고 하루를 살아도 사명대로 사는 것이 성공적인 인생을 사는 것입니다.

저는 큰 틀에서 세 가지 사명을 제시했습니다. 그 세 가지 사명은 겹칠 수도 있습니다. 기도로 섬기는 중보기도의 사명이 있습니다. 물질로 섬기는 바르실래의 사명이 있습니다. 전문성으로 섬기는 전문적인 평신도 사역자의 사명이 있습니다. 물론 그 외에도 다양한 사명이 있겠지만 저는 여러분들에게 이 세 가지를 제시했습니다. 여러분은 자기의 사명을 발견하셔야 합니다. 그리고 그 사명대로 살아야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주의 날에 주의 전에 오실 때 마다 자신의 사명을 발견하십시오. 그리고 한 주간 사명을 위해서 기도하고, 사명을 위해서 공부하고, 사명을 위해서 일하고, 사명을 위해서 사람을 만나기를 바랍니다. 

오늘 우리는 주의 날에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요한의 모범을 통해서 살펴봤습니다. 
1. 환경을 극복하는 힘을 얻으십시오. 
2. 성령의 감동을 받으십시오. 
3. 나팔 소리 같은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십시오. 
4. 사명을 확인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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