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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보게 하시는 예수님 (요 9: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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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게 하시는 예수님 (요 9:1-7) 


(요9장)은 나면서부터 맹인이었던 자를, 예수님이 고쳐주심으로, 인류의 빛이신 예수 그리스도임을 보여준다. (39)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심판하러 세상에 왔으니, 보지 못하는 자들은 보게 하고, 보는 자들은 맹인이 되게 하려 함이라 하시니"라고 하셨다. 

'보지 못하는 자들은' 보게 한다는 말은, 맹인과 같이 주님의 말씀을 받아들여, 자신이 죄인임을 고백하는 사람은, 하나님이 건져주신다는 말이다. '보는 자들은, 맹인이 되게 하려 함이라.'는 눈은 떴으나, 자기 죄를 인정하지 않는 자는, 죄를 용서하러 오신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말이다. 

예수님은 눈뜨고 있는 서기관과 바리새인에게는, 눈뜬 맹인이 되게 하시고, 나면서부터 맹인 된 자는, 만나 자신을 계시하심으로, 예수님을 믿을 수 있도록 하셨다.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자신을 의롭다고 여겨, 예수님을 부인하고 배척했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예수님을 죽이려고 하였다. 

그렇지만 맹인은, 비록 육신의 눈은 어두웠지만, 영혼의 눈은 밝았다. 그는 자신의 육체적 불구를, 거룩하게 승화시켰다. 그래서 영적으로는, 밝은 길을 걸어가고 있었다. 이 시간 우리의 삶을 한 번 되돌아보기 바란다. 우리도 바리새인들처럼, 육신의 눈은 떴지만, 영혼의 눈은 감겨있지 않은가? 

그런데 본문은 이런 맹인이 예수님을 만나, 눈을 뜨게 된다. 빛 되신 예수님이, 우리에게도 찾아와 어둠에서 빛으로, 옮겨 주시기를 바란다. 실패를 성공으로 바꾸어 주시고, 모든 질병을 물리치시고 건강을 주시며, 절망에서 희망으로 옮겨 주시는 은혜가, 넘쳐나기를 바란다. 

하루는 예수님이 제자들과 함께, 길을 걸어가는데, 날 때부터 맹인 된 자가, 길가에 앉아 구걸하고 있었다. 제자들은 그 모습을 보면서, 예수님께 물었다. "랍비여! 이 사람이 맹인으로 난 것은, 누구의 죄로 인함이니이까? 자기이니까? 그의 부모니이까?" 

만일 그때 맹인이, 제자들의 질문을 들었더라면, 기분이 대단히 언짢았을 것이다. 맹인으로 태어난 것만 해도 얼마나 억울한데, 예수님의 제자들이, 자기와 부모님을 죄인 취급하였으니, 결코 기분이 좋을 리가 없다. 그러면 예수님은 무엇이라고 대답하셨나? 

(3) "그 부모의 죄로 인한 것이 아니라, 그에게서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라." 제자들은 맹인의 고난을, 부정적으로 보았지만, 예수님은 그의 고난을, 긍정적으로 소망적으로 봤다. 그리고 난 뒤에 예수님은, 맹인을 불쌍히 여기시고, 그의 눈을 보게 해야겠다고 작정하셨다. 

물론 맹인이 예수님에게, 눈을 뜨게 해달라고 간구 하지 않았다. 예수님이 자발적으로 해주셨다. 이 말씀을 하고 난 뒤, 예수님은 땅에 침을 뱉어, 진흙을 이겨, 그 진흙을 맹인의 눈에 발라주셨다. 그리고 실로암 못에 가서, 씻으라고 말씀을 하셨다. 

앞을 보지 못하는 맹인이, 실로암 못에 가서, 자기 눈을 씻기는,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러나 맹인은 예수님 말씀에 순종했다. 실로암 못에서 눈을 씻었을 때, 놀라운 역사가 일어났다. 그의 눈이 밝아졌다. 눈이 뜨였다. 그래서 그는 (7下) "밝은 눈으로 돌아왔다."고 했다. 

1. 예수님은 잘못된 시각을 보게 하셨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맹인의 고난을, 죄 값 때문이라고 했다. 이러한 시각은 사실, 제자들뿐만 아니라 그 당시 모든 유대인들이, 죄가 많아서 그렇게 되었다고, 다 그렇게 생각했다. 

그런데 유대인들이, 이렇게 생각하게 된 데는, 마땅한 이유가 있다. (출20:5) "그것들에게 절하지 말며, 그것들을 섬기지 말라. 나 네 하나님 여호와는 질투하는 하나님인즉, 나를 미워하는 자의 죄를 갚되, 아버지로부터 아들에게로 삼사 대까지 이르게 하거니와"라고 말씀하셨다. 

그러니까 죄를 짓지 않았다면, 이런 형벌을 받을 리가 없다.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삶의 고난임은, 질병이든 환난이든, 무엇이든지 간에, 아무튼 죄 때문에 생겨난다는 생각이, 아주 깊이 박혀 있었다. 그러나 삼 사대까지 이름은, 후손에게 죄를 물음이 아니라, 그 공동체가 벌을 받는다는 말이다. 

우리도 이런 시각을 가지고 있다. 기도원 같은 곳에 가면, 영적으로 능력이 있다고 하는 사람이 기도를 해 준다고 하면서, 조상들의 죄가 해결되지 않아서, 장애가 있고, 아프다고 말한다. 일본이 왜 그런 일을 당했는가? 물론 죄 때문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 

그러나 예수님은 여기에 대해서, 무엇이라 대답하셨는가? (요9:3) "…이 사람이나 그 부모의 죄로 인한 것이 아니라, 그에게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라." 제자들은 그가 전생에 무슨 죄가 있기에…, 이런 식으로 과거 지향적인 질문을 했다. 

그런데 이런 질문에는, 남의 불행을 기뻐하는 마음이 있었다. 일본의 독도 영유권 주장에 반대하는 문서에 서명한 '도이 류이치' 일본 민주당 중의원이, 10일 일본 국회 윤리심사회 회장직을 사임하였다. 그때 또 일본이, 독도 문제를 자기네 땅이라고 여긴다고, 지진과 쓰나미가 날 수 있으니 회개하라 했다. 

그런데 11일 정말 지진과 쓰나미가 일어났다. 얼마나 제 마음 속에, 미안한 마음이 있었는지 모른다. 그리고 잠을 자는데, 이렇게 말하는 내 마음 속에, 일본이 망했으면 하는 마음이 있지는 않았는지, 나를 다시 보게 되었다. 

우리는 남의 불행을 보고, 나를 잘 살펴보라는, 하나님의 경고의 메시지로 받아야 한다. 일본이 우리나라에 수많은 잘못을 행했다. 그러나 이번 기회에, 한국 교회는 원수를 사랑하라는 예수님의 말씀처럼, 어려움을 당한 일본을 도와주어야 한다. 

예수님은 그에게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 있다고, 미래지향적으로 보셨다. 얼마나 놀라운 시각인가? 한 번 생각해 보라. 나면서부터 맹인 된 자가 눈을 떴다면, 고침 받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영접하고, 또 그들을 통해, 수많은 사람들에게 복음이 전해지게 될 수 있다. 

그러니 하나님이 그 일을 통해서, 얼마나 큰 영광을 받으시겠는가? 따라서 고난이 있다면, 제자들처럼 부정적으로만 보지 말자. 예수님처럼 긍정적인 시각을 가지기를 바란다. "하나님의 선하신 뜻이 있다. 이는 하나님이 하고자 하시는 선하신 일이다." 이처럼 고난을 긍정적으로 생각하시기 바란다. 

우리 인생은 고통으로 끝나지 않는다. 어두운 밤이 지나고 나면, 반드시 밝은 아침이 온다.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통과하는가? 푸른 초장, 쉴만한 물가가 기다리고 있다. 인생에 풍랑이 세차게 불고있다면, 겁먹지 마시기 바란다. 그 배후에 섭리하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바라보라. 

합력 하여 선을 이루는, 하나님의 손길을 바라보라. 예수님처럼 내가 당하는 고난을, 긍정적으로 생각하기 바란다. 그럴 때 하나님의 놀라운 영광이 나타나게 된다. 사도 바울은, 복음을 전하던 중에 로마의 감옥에 갇혔다. 인간의 입장에서 보면, 엄청난 고난이다. 육체적으로 고통을 당하고 있다. 

자유롭게 복음을 전할 수가 없다. 사명에 지장을 초래하는 것 같다. 인간적인 입장에서 보면, 아무 도움이 될 것 같지 않다. 그러나 하나님의 시각으로 생각해 보라. 바울은 로마감옥에 갇혀있는 동안, 4권의 성경을 기록했다. 그리고 그곳에서, 시위대 사람들과 친하게 되었다. 그들에게 복음을 전했다. 

로마 고관들에게, 복음이 전해지게 되었다. 그것이 계기가 되어, 로마가 기독교 국가로 바뀌었다. 바울은 믿음의 눈을 통하여 깨닫고, 로마 감옥에서 기록한, 빌립보서에서 이렇게 말했다. (빌1:12) "형제들아 내가 당한 일이, 도리어 복음 전파에 진전이 된 줄을, 너희가 알기를 원하노라." 

마찬가지다. 병들었다고 생각해 보자. 인간적인 입장에서 보면, 아무런 이익이 없을 것 같다. 몸이 고통스럽다. 병원에 입원하면 돈이 든다. 해야될 일도 할 수 없다. 무엇이든지, 이득이 될 것이 없을 것 같다. 그러나 돌이켜서, 하나님의 시각으로 한 번 생각해 보자. 

사람은 병이 들면, 겸손해 진다. 진실해 진다. 모든 잘못을 회개할 수 있다. 감사를 회복할 수가 있다. 그리고 병들어 보아야, 병든 사람의 처지를 제대로 이해할 수 있고, 병든 사람을 효과적으로 위로할 수 있다. 그리고 그들에게, 복음을 전할 수 있는 능력을 갖게 된다. 

그러니 하나님의 입장에서 보면, 얼마나 이득이 되는 것이 많은가? 따라서 우리도 사도 바울처럼 이렇게 말할 수 있다. "내가 병든 것이, 도리어 복음전파에 진전이 된 줄을, 너희가 알기를 원하노라. 내가 사업에 실패한 것이, 도리어 복음전파에 진보가 된 줄을, 너희가 알기를 원하노라." 

어떤 고난이 있는가? 제자들처럼 부정적으로 보지 마시기 바란다. "전생에 내가 무슨 죄를 지어서 이 고생을 당하고 있나?" 이렇게 과거 지향적으로 생각하지 말라. 이 고난 속에는, 하나님의 하시는 선하신 일과 뜻이 있다. 예수님처럼 미래적으로, 소망적으로 생각하면,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난다. 


2. 예수님은 고통을 사명으로 보게 하셨다. 

제자들이 예수님께 질문했을 때, 거기에 대해 예수님은 "그에게서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라."고 실제적이면서도, 사명적인 답변을 주셨다. 

(7) "이르시되, 실로암 못에 가서 씻으라 하시니, (실로암은 번역하면, 보냄을 받았다는 뜻이라.) 이에 가서 씻고 밝은 눈으로 왔더라." 실로암은 사명을 주어 보냈다는 말이다. 사명자의 못에 가서, 눈을 씻고, 그는 밝은 눈으로 돌아왔다. 

예수님은 (4-5) "때가 아직 낮이매, 나를 보내신 이의 일을, 우리가 하여야 하리라, 밤이 오리니, 그 때는 아무도 일할 수 없느니라. 내가 세상에 있는 동안에는, 세상의 빛이로라." 아직은 낮이다. 밤이 되지 않았다. 낮은 살아서 활동할 때다. 밤은 죽어서 잠들었을 때를 말한다. 고통은 사명이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기 전까지는, 최선을 다해서 하나님 아버지의 일, 하셔야 된다는 말이다. 예수님은 이 땅에서, 자신의 사명에 최선을 다했다. 밤낮 사랑하는 제자들을 가르치셨다. 수많은 사람들에게, 천국복음을 전하셨다. 병든 자를 고쳐주셨다. 예수님은 쉴 겨를도 없으셨다. 

심지어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고통 당하는 순간까지, 구속의 사명을 완수하셨다. 죄인들을 위해서 기도해 주셨다. 십자가 위에서, 회개한 강도를 구원해 주셨다. 지금도 예수님은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 앉아, 끊임없이 우리를 위해, 중보 기도를 하고 계신다. 

우리도 예수님처럼, 사명에 최선을 다해야 된다. 어두운 밤, 쉴 때가 온다. 그 때는 일할 수 없다. 그러나 낮 동안에는, 아버지의 일, 하나님이 허락하신 사명에, 최선을 다하는 사람이 되어야만 한다. 아인슈타인 박사 이후, 세계 최대 물리학자로 불리는, 영국의 스티븐 호킹 박사의 이야기다. 

그는 빅뱅이론, 전 세계 학자들에게 각광을 받고 있다. 그런데 캠브리지 대학교 대학원 1학년 때, 아주 희귀한 병에 걸렸다. 몸의 근육이 자꾸 수축되는 불치의 병이었다. 의사들은 그를 진단하고서, 3년을 넘기지 못할 것이라고 진단을 내렸다. 그러니 얼마나 기가 막혔겠는가? 

천재적인 두뇌를 가지고 있다고, 뭇사람들로부터 칭송을 받았던, 꿈 많은 젊은이였다. 그런데 남은 기간이, 3년밖에 되지 않았다. 그는 깊은 좌절감에 빠져, 우울증에 시달렸다. 그러다 정신을 차리고 나서, 결심을 했다. 

"좋다! 나의 삶이 시한부면 어떠냐? 어차피 모든 인생은, 시한부가 아니냐? 비록 남아있는 기간이, 3년이라 할지라도 최선을 다하자. 남은 기간만큼, 최대한 값있게 활용하자! 어쩌면 남아있는 3년의 기간은, 내게 필요한 시간보다 더 길지도 모른다!" 

그 뒤 연구에만 매진했다. 3년이 지났다. 죽지 않았다. 3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그는 살고 있다. 물론 건강한 것은 아니다. 지금도 계속, 근육이 수축되고 있다. 제대로 움직일 수가 없다. 휠체어에 의지해야 된다. 말도 할 수 없어서, 휠체어에 있는 키보드를 움직여, 자기 의사를 표시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연구하고 또 연구해서, 전 세계 물리학계에 엄청난 업적을 남겼다. 새 천년을 맞이해서, 그는 어느 방송국기자와 인터뷰를 하게 되었다. 기자가 그에게 물었다. "내일의 이 땅에 주인공이 될, 젊은이들에게 남기실 말씀이 없습니까?" 

그때 호킹 박사는 이런 말을 남겼다. "우리는 어떤 상황에서도, 최선을 다해야 할 것이다." 비록 내게 남아있는 기간이 3년이 아니라, 3개월, 아니 3일이 남았다 할지라도, 최선을 다해야 한다. 내가 처한 상황이 아무리 나쁘다고 할지라도, 그것을 탓하지 말고, 최선을 다하는 삶이 되어야 한다. 

하나님이 우리를 어떻게 사랑했는가?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셔서, 우리를 위해 누구를 이 땅에 보내주셨는가? 수많은 천사들 가운데, 하나를 보내셨는가? 아니다. 그러면 천사장을 보내주셨는가? 아니다. 단 하나밖에 없는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주셨다. 

하나님은 나를 대신하여, 예수님을 십자가를 지고, 죽게까지 만드셨다. 하나님은 나를 사랑하시되 대충 사랑하신 것이 아니고, 최선을 다해 사랑하셨다. 그렇다면 우리도 예수님처럼, 최선을 다해서 하나님을 섬기고, 하나님이 나에게 맡기신 사명에, 최선을 다해야 한다. 

반 토막의 헌신으로, 만족하지 말자. 하나님께 예배를 드릴 때도, 최선을 다해서 예배드려야 한다. 내게 주신 건강, 시간, 물질, 심지어 나의 생명까지도, 아낌없이 하나님께 다 바쳐서, 온전한 헌신을 할 수 있는 우리가 되어야 마땅하다. 


3. 예수님은 어떻게 보게 하셨는가? 

(1) 예수님은 땅에 침을 뱉어 눈에 발라주셨다(6). 
"이 말씀을 하시고 땅에 침을 뱉어, 진흙을 이겨 그의 눈에 바르시고" 

침으로 진흙을 이겨, 맹인의 눈에 발라주셨다. 맹인의 눈은, 눈이 아닌가? 눈에 작은 티끌이 들어가도, 얼마나 쓰라리고 아픈가? 그런데 진흙을 이겨, 그의 눈에 발랐다고 했다. 그러니 만약 진흙에, 돌멩이라도 들어있어서, 그것이 눈에 들어가면, 얼마나 고통스럽겠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맹인은 말이 없다. 그 모든 것을 참고 받아들였다. 평생토록 한 맺힌 흑암의 고통에서, 예수님이 자신을 해방시켜 주신다는 데, 그까짓 침을 바른들 어떻고, 진흙을 바른들 어떻겠는가? 그 이상인들 왜 못 바르겠는가? 맹인은 그런 심정으로, 모두 다 받아들였다. 

은혜 받기를 원한다면, 체면, 체통, 자존심을 다 버려야 한다. 그때 하나님이 우리에게, 놀라우신 은혜를 베풀어주신다. 예수님이 침으로이긴 진흙을, 맹인의 눈에 발라주셨다고 해서, 즉시 눈이 뜨임 받은 것은 아니다. 

(2) 예수님은 맹인에게, 실로암 못에 가서 씻으라고 말씀하셨다(7). 
"이르시되 실로암 못에 가서 씻으라 하시니, (실로암은 번역하면, 보냄을 받았다는 뜻이라) 이에 가서 씻고 밝은 눈으로 왔더라." 

실로암은 보냄을 받은 예수님을 상징한다. 예수님은 소경 된 자의 눈을 뜨게 해 주심으로, 자신이 이 땅에 오신 목적을 보여 주신다. 따라서 하나님이 우리를, 이 땅에 보내신 사명을, 분명히 아시기 바란다. 그는 전연 앞을 볼 수 없는 맹인이기에, 실로암 못까지 가기는,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런데 예수님은 실로암 못에 가서, 씻으라고 말씀하셨다. 그 당시 실로암 못에는, 33개의 가파른 계단이다. 따라서 성한 사람들도 내려가기 어려운 계단이다. 33개의 계단을 내려가서, 눈을 씻기는 너무도 힘든 일이었다. 그러나 맹인은 어떻게 했는가? (7下) "이에 가서 씻고, 밝은 눈으로 왔더라." 

예수님이 가라고 말씀하셔서 갔다. 예수님이 씻으라고 말씀하시니 씻었다. 예수님이 말씀하셨는데, 실로암인들 못 가며, 요단강인들 못 가겠는가? 33개 계단이 아니라, 3,300개의 계단이라도 가야한다. 그런 심정으로, 예수님 말씀에 순종했다. 예수님이 가라고 하시니까, 가기 힘들어도 순종하고 갔다. 

예수님이 '씻으라'고 하시니까, 씻기 힘들어도 씻었다. 이것이 순종이다. 순종할 때 놀라운 역사가 일어난다. 어떤 문제들이 생겼는가? 하루종일 쉬지 않고, 동서남북을 다닌다고, 문제가 해결되는가?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할 때, 문제가 해결된다. 

맹인이 실로암 못으로 가다가, 힘들어서 중단했다면, 어떻게 됐을까? 또 실로암 못까지 갔더라도, 가파른 계단을 내려가기 힘들다고, 씻지 않고 자기 손으로 진흙을 떼어버렸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하나님의 하시는 일도, 중단되고 말았을 것이다. 

그러나 맹인이 모든 것을 다 참고, 끝까지 순종했을 때, 놀라운 역사가 일어났다. 이에 가서 씻고, 밝은 눈으로 왔다. 눈이 뜨임을 받았다. 그리고 나서 되돌아왔다. 성경을 아무리 읽어도, 예수님은 맹인에게 이렇게 말씀하지 않았다. "너는 실로암 못에 가서 씻고, 밝은 눈이 되면 되돌아오너라." 

예수님은 되돌아오라고, 말씀하지 않았다. 맹인은 전적으로, 자기 결단으로 돌아왔다. 10명의 나병환자가 나음을 입었다. 그러나 그 가운데 한 사람, 사마리아 사람만이, 예수님에게로 돌아왔다. 왜? 예수님께 감사의 뜻을 표하고, 자신의 사명을 완수하기 위해서다. 

아마 이 맹인도, 자기의 밝은 눈을 예수님께 보여드리면서, 감사의 뜻을 표하기 위해 되돌아왔다. 우리 주변에는 이런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문제가 생기면, 수시로 교회에 들락날락하면서, 울고불고 매달린다. 그러다가 문제가 해결되면, 발걸음이 뜸해진다. 

나중에는 어디로 가버렸는지,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린다. 우리는 시작도 예수님, 끝도 예수님이 되어야 한다. 실패할 때도 예수님, 성공할 때도 예수님이 되어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거하는, 삶이 되자. 물고기가 물을 떠나서는 살 수 없듯이, 우리도 예수 그리스도를 떠나서는 살 수 없다. 

모든 일은 언제나,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맹인은 문제를 스스로 해결하지 못했다. 빛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났기에 볼 수 있었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어둠을 물리쳐주시고, 빛을 비춰주시는 분이다. 우리를 어둠에서 빛으로 옮겨 주시는 분이다. 실패를, 성공으로 바꿔주시는 분이다. 

절망을 희망으로 바꾸어 주시는 분이다. 빛 되신 예수님이 임하여, 마음 속에 있는 어두운 그늘을, 모두 다 물리쳐 주시고, 주님의 빛으로 환하게 비추어 주시기를 바란다. 이런 은혜가, 우리 모두에게 일어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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