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말세에 어떻게 처신해야 합니까? (딤후 4:1-8) - 수쿠크법

첨부 1


말세에 어떻게 처신해야 합니까? (딤후 4:1-8) 


1. 하나님 앞과 살아 있는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실 그리스도 예수 앞에서 그가 나타나실 것과 그의 나라를 두고 엄히 명하노니
2. 너는 말씀을 전파하라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힘쓰라 범사에 오래 참음과 가르침으로 경책하며 경계하며 권하라
3 . 때가 이르리니 사람이 바른 교훈을 받지 아니하며 귀가 가려워서 자기의 사욕을 따를 스승을 많이 두고
4. 또 그 귀를 진리에서 돌이켜 허탄한 이야기를 따르리라
5. 그러나 너는 모든 일에 신중하여 고난을 받으며 전도자의 일을 하며 네 직무를 다하라
6. 전제와 같이 내가 벌써 부어지고 나의 떠날 시각이 가까웠도다
7. 나는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8.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며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도니라  


『가노라. 삼각산(三角山)아! 다시보자 한강수(漢江水)야! 고국(故國) 산천(山川)을 떠나고자 하랴마는 시절이 하 수상(분분, 紛紛)하니 올동말동 하여라. 』 

청나라로 끌려가는 작자가 조국을 떠나면서 그 서글픈 우국(憂國)의 정과 비분강개한 심정을 노래한 청음 김상헌 선생(1570년<선조3>-1652년<효종3>, 본관은 안동, 자는 숙도<叔度>, 호는 청음<淸陰>, 석실산인<石室山人>, 서간노인<西磵老人>, 시호는 문정<文正>)의 시조입니다. 

현대어로 풀이해보면 

‘나는 이제 떠나가노라(언제 올지 모르지만) 삼각산아, 
돌아와서 다시 보자꾸나! 한강물아. 
정든 고국의 산천을 떠나기는 하겠다만 
지금의 시대가 너무 어수선하고 혼란스러워 
다시 돌아올 수 있을지 모르겠구나.’라는 뜻입니다.

정말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절이 시인의 시조처럼 어수선하고 혼란스러운 즉, 하수상한 시절입니다. 세계적으로 일어나는 여러 가지 말세의 상황들이 그러합니다. 

예컨대 세계적으로 이변이라 불리는 기상이변으로 지난 2월 16일 대구서도 30년 만의 혹한이라는, 기록적인 한파가 몰아 닥쳤는데 이처럼 금년에는 몹시 심한 추위인 혹한[酷寒]이 전국을 강타했고, 

세계 곳곳에 홍수와 2009년 7월 우리나라 전남 신안군 자은도의 경우 집중호우로 시간당 108mm의 비가 쏟아진 폭우기록이 있으며, 그리고 지진 등으로 생태계변화가 심각합니다. 

재앙이라 할 수밖에 없는 우리나라는 최악의 구제역과 조류독감 대재앙으로 온 나라가 죽음의 후폭풍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지난 2월 19일 통계에 의하면 구제역으로 전국에서 소 15만 726마리, 돼지 318만 5,116마리, 염소 6,148마리, 사슴 3,053마리가 살처분 생매장을 당했고,

중동지역 국가들의 자유 쟁취를 위한 유혈사태, 이런 환경으로 인해 파생되는 유가와 물가폭등, 집값폭등 등 정말 시절이 하수상합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가 살아가는 말세의 시대는 어떤 시대입니까? 

오늘 본문 3-4절 말씀, “때가 이르리니 사람이 바른 교훈을 받지 아니하며 귀가 가려워서 자기의 사욕을 따를 스승을 많이 두고 / 또 그 귀를 진리에서 돌이켜 허탄한 이야기를 따르리라”

우선은 사람들이 바른 교훈을 받지 않습니다. 오직 예수를 전해서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 그 교훈은 사라지고 여러 가지 교훈들이 교회 안에 넘치고 있습니다.

율법의 교훈을 그리고 세상의 지식적인 교훈을 지키면서, 그런 자기들의 모습이 바른 교훈이라고 착각을 하고 있습니다. 오직 예수, 오직 은혜, 오직 믿음이 사라졌습니다. 율법의 교훈과 세상의 교훈이 교회에 뿌리 깊게 자리하고 있습니다. 

오늘 날도 구원을 이루는 바른 교훈에서 벗어나서 헛된 말에 빠져 있는 성도들이 있습니다. 종교적 열심이 신앙의 전부인 것으로 착각하며 마음으로만 믿는 열매 없는 믿음으로 자신들이 구원받은 줄로 알고 있습니다. 이런 것들은 다 바른 교훈에서 벗어 난 헛된 말입니다. 

본문에서 말하는 바른 교훈은 청결한 마음과 선한 양심과 거짓 없는 믿음에서 나는 사랑이라고 하는데 이는 청결한 마음과 선한 양심이 있어야 십자가의 사랑인 거짓 없는 믿음을 가질 수 있다는 뜻입니다. 청결한 마음과 선한 양심은 거짓 없는 믿음에 있어 필수라는 뜻이기도 합니다. 

따라서 십자가의 사랑으로 사는 거짓 없는 믿음이 우리에게 절대 필요한데 그러기 위해서는 하나님 말씀으로 자신을 다스려 자신의 마음을 청결케 하며 선한 양심을 이루어야 합니다. 청결한 마음과 선한 양심은 주님의 마음 즉 주님의 영인데, 주님의 영을 닮지 않은 육의 몸으로는 십자가의 사랑으로 사는 바른 믿음은 가질 수가 없습니다. 

올바른 가르침에는 귀를 기울이지 않고 조금 빗나간 가르침을 좋아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진정 바른 교훈이 무엇인가를 알아야 합니다. 바로 가르침을 받으려고 하지 않고 왜곡된 가르침에 귀를 기울여 이단과 사이비에 빠지는 경향이 있거나 아니면, 신앙을 가졌다고 하면서도 신앙인의 모습, 즉 예수님의 닮은 모습이 전혀 보이지 않는 성도를 볼 수 있습니다. 

이와 같이 바른 성경의 진리, 좁은 길을 걸어가며, 십자가를 지자는 사명의 교훈을 좋아하지 않으니 자연적으로 좋아하는 것은 귀를 즐겁게 하고 눈을 즐겁게 하고, 육체의 말초신경을 자극하는 허탄한 이야기들뿐입니다. 

그래서 이런 허탄한 이야기는 귀를 긁어주는 이야기입니다. 소위 "재미"를 좇아가는 사람들입니다. 설교도 재미를 좇아가는 경향이 많습니다. 그래서 만담 같은 설교, 유우머가 많은 설교를 좋아합니다. 그러나 진리가 없다면 반드시 우리가 조심해서 멀리해야 합니다. 

또한 허탄한 이야기란? 새로운 정보를 얻으려고 가는 경우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새로운 예화이야기, 새로운 철학과 세상이야기를 유익하게 생각하고 좇아가는 경우를 의미합니다. 

이런 이야기들은 우리 주위에 너무나 많이 흔하게 널려있지만 영혼을 변화시미거나 구원시키지 못합니다. 말씀에는 생명력이 있어야합니다. 사람을 거듭나게 하고, 새롭게 변화시켜주는 힘, 병든 것을 치유하고 소생 불가능한 부분을 도려낼 수 있는 수술실의 칼과 같은 역할을 하는 샘영의 운동력과 때로는 이로 인한 죄를 지적함으로 아픔과 찔림의 말씀이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대부분 허탄한 이야기들 중에는 부드럽고 달콤한 이야기들, 무엇보다 욕심을 부추기는 이야기들을 말하는데 말세의 성도들이 이런 것을 좋아하는 그런 때가 올 것인데 곧 종말 때 이라는 것입니다. 지금이 바로 이런 시대가 아닙니까? 이미 이런 현상들이 만연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혹시 나도 “형통의 복”을 듣기 원하는 속성이 내 안에 있는 것이 아닌가를 자문하고 믿음으로 살기위해 악한 세대를 본받지 않기 위해 믿음과 영적상태를 잘 살펴보아야 합니다.

사업의 성공이나 신화를 이루는데 하나님을 발판으로 활용하고 싶어서, 출세하는데 교회를 발판으로 사용하고 싶어서, 문제해결 하는데 전능하시다는 하나님의 손을 빌리고 싶은 마음으로 설교를 듣고 싶어 하는 것 역시 모두 허탄한 이야기들을 추구하는 삶인 것입니다. 믿으시면 아멘 합시다.

‘결국 이렇게 자라난 욕심을 통하여 죄가 점점 나의 중심에 자리를 잡고 자라나서 결국 사망에 이르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진리의 말씀인 하나님의 음성은 ‘우리의 끝없는 육신의 욕망을 내려놓고 온전한 그리스도인의 영성을 회복시켜 살아가라’고 권합니다.

이것이 때로는 나를 부인하고 정묙을 십자가에 못 받는 십자가의 길이요, 좁        은 길을 걸어가는 것입니다. 주님은 십자가에 못 박히심으로 우리를 위해 자신을 희생해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믿음으로 사는 자는 이때에 ‘우리의 모든 정욕과 탐심을 함께 못 박았다’라고 선포해야 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허탄한 이야기는 결국 자신들의 종을 만들려고 하는 어둠의 유혹, 사단의 함정입니다. 그러므로 악한 영의 유혹과 역사를 물리치고 이기려면 정신을 바짝 차려야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삶의 자리 곳곳에서 유혹의 손길을 펼치고 있음을 깨닫고 근신하고 악한 세력을 이겨야 합니다. 

자세히 자신을 한 번 살펴보십시오. 우리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보다 더 많은 욕망을 채우기 위한 스승을 많이 둔 것을 발견하고 놀랄 것입니다. 

배우는 일에 열심입니다. 그러나 자신의 욕망을 채우기 위함일 때가 많습니다. 이것도 조심해야 합니다. 물론 우리가 세상에 살면서 주님이 주신 달란트와 지식과 지혜로 살아야 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나의 욕망을 채우기 위한 수단이 아니라 그것을 통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많은 사람을 구원하고 살리는 일을 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마태복음 7:21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내 아버지의 뜻이 무엇입니까? 예수님을 구주로 믿는 것이며, 진리를 따라 좁은 길을 걸어가는 것입니다. 오늘 교구(구역)헌신예배를 드리는 성도여러분!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자가 많지 않은 이런 시대에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헌신하라고 주신 말씀, 명령이 무엇입니까? 

1. 말씀을 전파하는데 힘써야 합니다.

본문에 “너는 말씀을 전파하라”고 권합니다. 그 귀한 사명은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힘쓰라”고 했습니다. 교구와 구역은 말씀을 전파하기 위한 작은 소그룹, 아니 작은 교회입니다. 따라서 구역을 통해 구원의 말씀, 생명의 말씀, 영생의 말씀, 소망의 말씀, 진리의 말씀이 확실히 전파되어야 합니다.

특별히 이 구절은 ‘네가 말씀을 전하고 싶든지 그렇지 않든지’라는 의미로 마치 군인이 언제, 어떠한 상황 아래서도 그에게 주어진 임무를 수행하기 위하여 준비를 갖추고 있는 모습인 것처럼 최선을 다하라는 뜻입니다. 

무엇보다 우선순위를 최우선으로 하여 “힘쓰라”는 명령은 ‘끈질기게 권고하라’는 의미라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는 내가 믿는 복음이 이 세상에서 가장 확실한 구원에 이르는 말씀이요, 가장 소중한 것이라면 이처럼 귀한 것을 혈육과 친구와 동료와 이웃에게 나누며 전해야 합니다. 진리의 말씀을 전파하는 일은 하기 싫어도 해야 합니다.  만약 숨을 쉬는 것을 싫다고 안하고 마음에 내키지 않는다고 안하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마찬가지로 복음은 생명의 문제에기 때문에 전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결국 우리에게 알려주신 말씀은 ‘억지로라도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왜 해야 합니까? 그것이 죄에서 구원받고 지옥에 갈 영혼들의 생명을 살리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복음을 전하는 일을 위해서는 어떤 고난을 받더라도 십자가를 진다는 자세로 반드시 감당해야 할 줄 믿습니다. 아멘!

본문 5절 “너는 모든 일에 신중하여 고난을 받으며 전도자의 일을 하며 네 직무를 다하라”고 권하였습니다.

이렇게 디모데에게 편지를 쓴 바울은“고난을 받으며 전도인의 직무를 다하라”고 가르칠 뿐만 아니라 실천하며, 그렇게 살았습니다. 바울은 어떤 고난을 얼마나 받았는지를 고린도 교회에 편지를 쓰면서 밝히고 있습니다. 고린도후서 11:23-27절을 교독하며, 읽어보겠습니다. 

“그들이 그리스도의 일꾼이냐 정신없는 말을 하거니와 나는 더욱 그러하도다. 내가 수고를 넘치도록 하고 옥에 갇히기도 더 많이 하고 매도 수없이 맞고 여러 번 죽을 뻔하였으니 / 유대인들에게 사십에서 하나 감한 매를 다섯 번 맞았으며 / 세 번 태장으로 맞고 한 번 돌로 맞고 세 번 파선하고 일 주야를 깊은 바다에서 지냈으며 / 여러 번 여행하면서 강의 위험과 강도의 위험과 동족의 위험과 이방인의 위험과 시내의 위험과 광야의 위험과 바다의 위험과 거짓 형제 중의 위험을 당하고 / 또 수고하며 애쓰고 여러 번 자지 못하고 주리며 목마르고 여러 번 굶고 춥고 헐벗었노라.”

교구원, 구역원 여러분! 우리는 복음을 위하여, 주님의 제자 된 사명을 위하여, 아니 전도를 위하여 어떤 고난을 겪었습니까? 혹시 너무 편안하게 신앙생활을 하지는 않습니까? 

예수 믿는 것 때문에, 전도하는 것 때문에 조롱을 받고 무시를 당하고 면박을 당한 적은 얼마나 있습니까? 전도하다가 재수가 없다고 소금 뿌림을 당해본 적이 있습니까? 과거에는 ‘재수가 없다’며 실제로 소금을 뿌렸습니다. 혹은 물바가지로 덮어쓰고 옷을 다 적셔본 경험이 있습니까? 복음을 전하다가 욕을 얻어먹은 적이 있습니까? 직장에서 불이익을 당해본 일이 있습니까? 있어야 진짜 말씀 전파를 위한 수고와 주를 위한 수고를 한 것입니다.

바울은 자신이 고백한 것처럼 죽기까지 죽음을 무릎을 쓰고 최선을 다해 전도인의 직무를 위해 헌신하다가 로마에서 순교를 당했습니다. 이렇게 엄청난 고통과 고난을 겪으면서 전해놓은 복음은 어떤 결과를 가져 왔습니까?

다메섹에서 부름을 받아 예루살렘에 와서 핍박을 받은 가운데 수리아 안디옥 교회에서 바나바와 함께 사역을 감당하기 시작했던 바울이 결국 하나님의 선한 뜻을 이루기 위해 성령을 통해서 선교사로 파송을 받아 활동한 기간이 얼마나 되는지를 통해 확인할 수 있습니다.

보통 바울이 회심한 때를 33년으로 추정하며, 순교한 때를 67년으로 본다면 주님을 위해서 일한 기간은 약 33년 정도로 추측됩니다. 

전도 여행을 계산해서 1, 2, 3차 로마에 올라와 순교한 것 까지 합하면 약 12년 정도가 됩니다.

그 다음 62년 정도에 석방되어서 다시 복음을 전한 기간을 5년으로 생각한다면 17년 정도를 직접 선교를 위해 전도여행을 다닌 것입니다. 

이처럼 바울의 선교기간 전도여행 기간 동안 바울이 다닌 길을 세세하게 다 계산할 수는 없지만 적어도 1차 전도여행과 2차, 3차 전도여행, 그리고 마지막 가이사 황제 앞에서 재판받기 위해 로마로 올라간 거리를 합하면 얼마나 되는지를 살피면 자연히 그 해답이 나옵니다. 

1) 먼저 바울의 전도자로서의 행적을 살펴봅시다(바울선교 여행 지도영상을 보겠습니다.)

바울이 선교 활동한 총 거리는 약 2만 킬로미터 전도가 된다고 합니다. 한 마디로 표현하면 험난한 전도의 거리는 대장정의 길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지역은 과거에 길이 험했고, 지금도 일부지역은 차로 가도 힘든 거리요, 지역입니다.

저도 바울의 전도지역을 모두 다 돌아보지는 못했지만, 돌아본 소감을 말하면 전도자의 그 길은 참으로 험난한 길이었습니다. 성지순례를 하는 대부분의 사람들도 차를 다고 다녀도 피곤했고 힘이 들었다고 말합니다. 성지 순례를 한 분들이 이구동성으로 하는 말이 ‘이렇게 먼 거리를 어떻게 걸어 다녔을까?, ’‘어떻게 왜 그런 지역으로 갔을까?’ 라는 말을 하곤 했습니다.

차를 타로 구경삼아 그냥 둘러보는 것도 힘들어 죽을 지경인데 어떻게 복음전파를 위해 선교비도 없이 흔히 말하는 생 개척지대에 생계문제까지 직접 천막을 기워가며 직접 선교사로 가서 복음을 전하는 그런 일을 감당할 수 있었을까? 라는 의문을 갖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 결과

2) 인류의 역사 속에서 바울의 복음전파는 얼마나 많은 사람들에게 전파되었을까요?

그는 비록 로마에서 전도의 대가로 죄 없이 참수되어 떠나갔지만 그 후에 남긴 복음의 역사가 수많은 영혼을 구원했으며, 주후 313년에 로마가 기독교 국교를 선택하는데 기여했고, 지금까지도 복음 전도의 행렬은 바울의 뒤를 이어 끊어지지 않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 그는 예수님의 남은 고난의 시간을 생명 바쳐 채워나갔던 예수님의 참 제자였음을 시인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바울 순교한 참수대 와 기념교회에 수많은 사람들이 찾아오고 있고, 저도 그곳에서 많은 감명을 받았습니다.

이런 고난의 십자가를 지고 묵묵히 걸어간 바울이 있었기에 오늘 나의 신앙, 아니 우리 모두의 신앙이 영향을 받아 오늘에 이른 것입니다. 그 복음의 열정을 통해 지금 대한민국에서 복음의 꽃을 피웠고, 그 선교의 열정이 중국으로 건너가 지금 복음의 꽃이 중국에 만발하고 있습니다. 다른 곳에 들어간 복음은 전도의 열매가 쉽지 않지만 중국은 나름대로 쉽게 전도의 결실로 증거 되고 있습니다.

우리의 구역과 교구의 현장을 통해 성도 여러분 한 분 한 분이 전도인의 직무를 다하여 많은 영혼들을 구역과 교회로 인도하며, 진리의 말씀으로 가르치고 가르침을 받아 복음을 전파하는 신실한 일군으로 쓰임 받을 수 있기를 복 빌어 드립니다.


2. 우리는 전도인의 직무를 다하기 위해 전도해야 합니다. 

우리도 사도 바울을 통해서 디모데에게 주신 음성을 통해 우리 교구원, 구역원들의 사명을 확인하고 감당해야 합니다.  “전도자의 일을 하며 네 직무를 다하라”는 말씀입니다. 

마귀 사단의 유혹에 넘어가 죄로 인해 지옥갈 영혼을 건져내는 전도는 영적 전쟁터이므로 그리스도의 군사도니 신분으로 특별히 사단의 소속인 불신자들을 하나님 소속, 천국 소속으로 만들기 위해 반드시 전도의 사명을 감당해야 합니다. 

무엇보다 전쟁에서는 무조건 이겨야 합니다. 따라합시다. “경기에서 지면 자존심이 꺾기고 말지만 전쟁에서 지면 생명과 함께 모든 것을 잃습니다.” 그래서 영적전투는 반드시 이겨야 하고 승리를 해야 합니다. 교회 성도, 특별히 교구원 여러분은 전도에 게을리 하는 안일한 삶을 살아서는 안 됩니다.

왜냐하면 그렇게 사도 바울이 생명 걸고 복음을 전해 하난의 나라를 확장했던 터키가 오늘에 이르게 된 과정을 생각하면 가슴이 아픕니다. 앞으로 얼마나 더 많은 희생하고 전도해야 흰두교 세력을 물아낼 지 미지수 입니다. 

바울이 1차 때 구브로섬을 거쳐 밤빌리아의 버가를 경유하여 비시디안 안디옥에서 복음을 전하였고 다시 이고니온으로 갔습니다. 그리고 2차 전도여행 때에는 더욱 먼 거리를 왕래하면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이곳이 바로 터키 땅입니다. 

그러나 지금의 터키 땅에는 십자가를 찾아보기가 어렵습니다. 온통 이슬람 사원으로 가득합니다. 왜 이렇게 되었을까요? 그 원인은 정확하게 알지 못하지만 오늘의 터키가 어떻게 세워졌는지 역사를 살펴보면 어느 정도는 우리가 그 이유를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한국 현실을 보면 안타까운 것을 떨쳐 버리지 못하는 것이 있는데 하나는 우리가 전도하지 않으면 오늘의 터키와 같은 현상이 대한민국에도 생길 것이라는 것과, 특히 다음세대, 자녀, 자손들에게 반드시 신앙교육을 잘해야겠다는 것을 뼈저리게 느낍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전도하지 않고 다음세대를 그냥 내버려 두면 우리도 터키와 같은 일을 겪지 않으리란 법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지금 시대가 앞에서 살펴본 대로 사람들이 바른 교훈을 받지 않기 때문입니다. 

1) 진실을 싫어합니다. 

오히려 적당한 거짓을 더 선호합니다. 그리고 좋은 이야기는 싫어하고 허탄한 이야기를 좋아합니다.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 어떻게 하면 부자가 되는지, 어떻게 하면 쾌락적으로 살 수 있는지, 그리고 자신들의 욕망을 채우기 위한 스승을 많이 둡니다. 이 모든 것이 자신의 욕망을 채우기 위함이라는 것입니다.

2) 그리고 더욱 중요한 것은 어떤 기독교를 대항하여 나타나는 종교지도자가 대한민국을 지배하지 못하도록 지켜야 합니다. 

3) 그래서 터키가 왜 이슬람 국가가 되었는지의 역사를 통해 그 이유를 확실히 알 수 있기에 소개합니다. 

터어키의 경우 역사의 근원을 살펴보면 먼저 11세기에 투르크 유목민의 한 집단인 '오구즈족'이 동쪽으로부터 침입해 들어왔습니다. 12세기에는 ‘오구즈족’의 일파인 '카이족'이 아나톨리아의 동부와 중부를 차지하고, 

카이족의 '오스만 1세'가 오스만 왕조를 세웠습니다. 그들이 영토를 확장하는 초기 단계에 '오스만 일족'이 투르크족의 ‘가지스(ghazis:비잔틴 제국에 대항해 싸우는 이슬람교 전사들)’를 지도했습니다. 

13~14세기 '오스만족'은 마침내 서부 아나톨리아와 남동부 유럽의 비잔틴 영토를 차지하고 그리스도교를 신봉하는 발칸 국가들을 속국으로 삼았습니다. 

15세기에는 더 나아가 발칸 속국들을 직접 통치하고, 1453년 콘스탄티노플을 정복하여 유프라테스 강(동쪽)과 헝가리(서쪽)까지 영토를 넓혔습니다. 

16세기말경에는 그 세력이 절정에 달해 발칸 제국과 중부 유럽의 헝가리, 중동, 북아프리카 지역 대부분을 포함하는 대제국을 건설했습니다. 여기서 기독교 신앙이 없어지고 이슬람 종교가 편만하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지금 우리나라도 '이슬람의 종교정책'의 저의가 '포교와 선교'에 있다는 것을 인식하고 그 근본을 잘 대처하고 조심해야 합니다. 이슬람의 선교방법 중 하나가 우리나라를 잠식하기 위해 역사하고 있는데 그것이 바로 이슬람채권에 세제혜택을 주는 '조세특례제한법 개정안', 이른바 ‘수쿠크법’입니다.

이 법안 채택을 둘러싸고 기독교계와 정치권이 술렁이고 있습니다. 정부가 '수쿠크(Sukuk)  채권'을 도입하려고 하자 기독교계에서는 ‘대통령 하야’ 목소리까지 낼 정도로 민감한 반응을 보였고, 국회는 이를 의식한 듯 4일 ‘이슬람채권법 공청회’를 비공개로 개최하기로 의결했습니다. 

심지어 교계의 조용기 목사님이 이명박 정부에 대하여 ‘만약에 수쿠크 이슬람 채권 도입 시 하야운동을 벌여야 한다’고 강한 어조로 의의를 제기하자 정치계와 종교계가 상당하게 긴장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성도들은 목사가 장로에게 왜 그러느냐고 모르는 소리를 하는 분이 계시는데 이유를 분명하게 알아야 합니다. 

'수쿠크는(Sukuk)' 이슬람국가들이 발행하는 채권입니다. 이자를 금지하는 이슬람율법에 따라 개발된 것입니다. 이슬람 율법인 “샤리아(Shariah)”는 돈을 빌려주는 대가로 이자(리바, Riba)를 받는 것을 ‘기생행위’ 또는 ‘부당이득’으로 간주해 금지하고 있습니다.

이런 이유 때문에 이자에 해당하는 부분은 부동산 등의 '실물자산 활용을 통한 배당금' 혹은 '리스료 형태로 지급'합니다. 즉, 이슬람 자본은 율법 규제를 피하기 위해 실물투자 형식을 빌려 대출이나 투자를 합니다. 

이를테면 주택자금을 빌려줄 때 통상적으로는 직접 자금을 대출해주고 거기에서 이자를 받지만 이슬람권에선 해당 주택을 직접 산 뒤 채무자에게 빌려 주고 원리금 대신 사용료를 받습니다. 일종의 자신들이 신봉하는 율법의 편법입니다. 

1) '이자라(Ijara) 수쿠크(이슬람채권)'는 건물 설비 매매, 
2) '무라바하(Murabaha) 수쿠크(이슬람채권)'는 물건 부동산 매매에 투자합니다. 

이 과정에서 양도세, 취득세, 등록세가 많이 발생하면 오히려 손해를 볼 수 있기 때문에 세제 혜택이 '수쿠크' 도입의 관건이 되는 것입니다. 즉 '이슬람 채권(수쿠크)'을 발행해 이슬람권 투자자들에게 팔고 그 돈을 차입해서 수익을 투자자들에게 정기적으로 배분하는 방식입니다. 

정부는 이런 상황을 고려해 이슬람채권 발행의 물꼬를 트기위해 2009년 9월 수쿠크에 면세혜택을 주는 지원 방안, 일명 '수쿠크 법안'을 마련했습니다. '수쿠크 법안'은 지난해 12월 여야 합의로 '국회 기획재정위원회 소위원회'를 통과했지만 일부 의원들의 반대와 기독교 단체의 반대에 부딪쳐 있는 것입니다. 

이 '수쿠크'가 문제가 되는 이유는, 수쿠크 투자수익의 2.5%를 `자카트(Zakat)'라는 명목으로 자선 단체에 지원하는데 그 과정이 불투명해 수익이 테러 단체로 유입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무엇보다 이슬람 근본주의 단체와 연관된 샤리아위원회가 수쿠크 발행과 운용을 맡고 있어 종교적 색채에서도 자유롭지 못하다는 것입니다. 

즉,  수쿠크 발행과 운용을 ‘샤리아 위원회’가 맡고 있기 때문인데 샤리아 위원회는 독실한 이슬람교 신자이면서 법률, 회계 전문 지식을 갖춘 사람들로 구성되었습니다.

이슬람 금융의 경우 꾸란의 요구대로 수익금의 2.5%를 자선금(자카트)이라는 이름으로 떼어 자선단체로 보내도록 의무화 되어있습니다. 이 때 통상 '하왈라'(Hawala)라는 송금방식을 사용한다고 합니다. ‘하왈라’는 “이슬람의 전통적 송금방식으로 송금즉시 근거서류들을 파기하도록 되어있어 송금 처를 확인할 수 없고, 따라서 국제테러조직의 자금세탁과 테러자금 조달 수단으로 이용될 수 있는 것입니다.” 즉, 테러단체로 흘러들어갈 우려가 있습니다. 

두 번째 문제가 되는 이유는 그들의 율법상 복잡한 과정을 거치는 것뿐이자 투자수입 배당이지만 사실상은 이자를 받는 셈입니다. 특정종교에 각종 세제혜택까지 이중으로 준다는 것입니다. 즉, 이슬람 채권에 과도한 면세 혜택을 주고 있습니다. 

이런 문제 보다 더 중요한 것은 우리나라의 부동산과 기업 등이 샤리아 율법 아래의 이슬람 자본에 의해 지배를 받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남미 국가들이나 세계은행 등이 일부로 막대한 대출을 해주고 차입금과 이자를 명목으로 석유 등의 자원과 국부를 흡수해서 지속적으로 빈곤 국가로 만든 것과 같은 방식이고 IMF 당시 한국과 동남아 국가들이 엄청난 고리대로 헐값에 기업과 자산을 넘겨야 했던 것과 같은 맥락입니다. 

최근 우리가 금융위기와 여러 국가부도 사태는 넘치게 유입되었던 해외자본이 한꺼번에 빠져나가면서 생겼던 것에 주목해야 합니다. 그리고 이것은 전형적인 이슬람의 수법이기도 합니다. 모든 국가와 개인도 마찬가지입니다. 

만약 이 이슬람 금융 '스쿠크 법'이 통과되면 이는 결국 이슬람 율법 ‘샤리아’가 들어오는 통로가 될 것입니다. 이미 유럽과 미국은 이것으로 인해 골머리를 앓고 있습니다. 

“율법을 이유로 이슬람채권에 면세를 해주면 다른 나라의 자금에 대한 형평성에서 문제가 있지만 더욱 문제가 되는 것은

이슬람 자본은 투명성이 전혀 없고 테러자금으로까지 쓰이고 있는데, 경제를 장악하면서 정치까지 장악하게 됩니다. 

<이슬람교에서는 다른 종교로 개종하면 죽입니다.> 가족 중의 누군가가 개종했을 경우 가족들이 그 사람들 죽이는 것을 명예살인이라고 합니다. 부모가 자녀를, 형제가 형제를 죽이는 끔찍한 만행을 저질러도 그것이 합법입니다. 

<이혼도 너무 쉽게 이루어집니다.> 남편이 아내에게 구두로 “이혼해, 너는 이제 내 아내가 아니야”이런 말을 세 번 하면 그대로 이혼이 돼버립니다. 

<무엇보다도 여자는 개, 돼지 취급도 하지 않습니다.> 여자를 때려도 되는 것이 샤리아 율법에 있고, 이슬람 국가에서는 법으로 정해져 있습니다. 그리고 아내를 4명까지 둘 수 있습니다.

이집트에서는 나이가 많은 70세 이상의 할아버지가 돈만 있으면 12살 이하의 미성년자 여아와 결혼할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이슬람은 거짓과 폭력과 살인과 테러가 난무합니다.> 

더욱 큰 문제는 <이런 이슬람 긍융이 들어오면 법적으로도 이슬람의 지배하게 들어가게 됩니다.> 현대 사회는 돈의 영향이 크고 지배하는 세상구조이기 때문에 자본이 들어오는 통로를 잘 알아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디모데전서 2:4절에 보면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 데에 이르기를 원하신다.”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원하는 일,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시고 죽으신 목적을 이루어 드려야 하지 않습니까? 

우리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하나님의 기쁨조들입니다. 하나님께서 가장 기뻐하시는 일이 바로 생명을 구원하는 일, 영혼을 죄와 사망에서 건져내는 일입니다. 하나님께서 이 일을 어느 정도로 원하시는가 하면, 독생자까지 보내셔서 죄의 갋ㅅ을 지불하는 제물로 십자가에 내어 주시기까지 하셨는데 이것은 오직 영혼을 구원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이제 우리는 시대를 잘 읽고 분별하여 주님의 명령을 철저하게 순종하여 전도해야 합니다. 악한 마귀 사단의 역사를 대수롭게 생각하지 않고 지내다가 내 영혼뿐만 아니라 나의 모든 혈육과 이 나라, 이민족이 큰 코 닥칩니다. 심판대 앞에 서는 날 눈에 피눈물을 흘리며 후회할 날이 올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 일어나 말씀을 전파하고 전도합시다. 우리 모두가 가장 우선적으로 해야 할 일이 가정 복음화입니다. 다음세대를 복음으로 잇지 못하면 가문이 영적으로 몰락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불신가족들, 앞으로 믿어야 할 가족과 혈육과 친구와 이웃들을 우선적으로 전도하십시오. 

무엇보다 자녀들이 어릴 때부터 신앙훈련을 잘 시켜야 합니다. 때로는 신앙생활 훈련을 위해서라면 강압적으로라도 강권해야 합니다. 그리고 일가친척들과 이웃들에게 복음을 전하되 생명을 걸고 그들을 마귀 사단의 세력, 지옥 불에서 반드시 건져내야 합니다.

우리가 전도의 사명을 다 감당함으로 고난이나 어려움이나 위기를 당할 때 하나님은 그냥 보고만 계시지 않고 오히려 존귀하게 인정해 주시고, 금세에 은총과 내세에 반드시 시들지 않는 영광의 면류관을 주실 것입니다. 

바울은 8절 말씀에,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며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도니라”고 분명히 말씀하고 있습니다.

성도 여러분! 

기왕 믿음의 생활 하는 것 신앙생활, 교회생활, 전도생활을 잘해서 칭찬받고 면류관 받아쓰고 영광의 자리에 들어가고 싶지 않습니까? 아니, 그렇게 되지 않을지라도 내가 가장 사랑하는 가족을, 사랑하는 친구를, 사랑하는 이웃을 지옥에 가도록 내버려두면 되겠습니까?

멸망의 길로 가는 것을 별로 대수롭게 생각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올바른 생각이 아닙니다. 올바른 믿음도 아닙니다. 어디로 갈지를 모르고 달려가는 방황하는 영혼을 구원하는 일에 헌신하고, 투자하는 귀한 삶으로 여러분의 삶의 자리를 복 되게 만드시고 말세에 주신 귀한 사명을 감당하여 하나님 나라를 확장하시기 바랍니다. 다시 한 번 간곡하게 부탁드립니다. 그리스도의 군사로 말씀을 전파하고, 전도하여 귀한 사명을 완수할 수 있기를 소원합니다. 아멘!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