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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아버지의 마음 (눅 15:11-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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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의 마음 (눅 15:11-32)


교회에는 여러 종류의 교인이 있다고 합니다. 인력거교인, 감투교인, 핑계교인 연중행사교인, 훈수교인, 묵상교인, 유람선교인, 잠수교인이 있다고 합니다. 

먼저 인력거 교인인은 요즈음처럼 대심방을 가서 끌어내어야만 겨우 교회에 오는 사람이라고 합니다.

감투 교인은 교회에서 감투를 안주면 교회에 안나오는 교인이라고 합니다. 

핑계 교인은 이런 저런 핑계를 대며 이리 빠지고 저리 빠지는 사람이라고 합니다. 

연중행사 교인은 부활절, 성탄절 등 1년에 1,2번 교회에 나오는 사람이라고 합니다.

훈수 교인은 교회나와서 이럭쿵 저럭쿵 비평하고, 이래하는데 저래야 하는데 평가하는 사람입니다.

묵상 교인이 있습니다. 예배를 시작하면 조는 교인이라고 합니다.

유람선 교인은 이 교회 저 교회를 왔다 갔다 하는 사람입니다. 오늘 유람선교인이 있다면 이제 유람선 그만타시고 한소망교회에 등록하여 새로운 은혜를 경험하시길 바랍니다.

마지막 잠수 교인이 있습니다.  잠수교인은 내가 교회 다니고 있다는 사실을 어느 누구에게도 알리지 않을뿐더러 알려지는 것을 부담스러워 하는 사람이라고 합니다. 이 사람은 교회에 와서 만나야만 교인 이라는 알 수 있는 사람입니다. 이순신장군이 나의 죽음을 병사들에게 알리지 말라고 부탁했던 것처럼 자신이 그리스도인이라는 사실을 어느 누구에게도 알리지 말라고 부탁하며 살아가는 유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천국에 가면 세가지 말이 유행한다고 하는데 하나는 “이렇게 좋은지 몰랐다”는 것과 또 하나는 “어? 누가 안보이네?” 마지막으로는 “저사람이 어떻게 여기에 왔지?” 라는 말이라고 하는데 마지막 말은 잠수교인을 두고 한 말인 것 같습니다.

그러면 이런 부류의 사람이 가지는 공통적인 특징이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 아버지를 인격적으로 만나지 못했거나 만났다고 하더라도 하나님의 사랑의 마음을 정확하게 알지 못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세상에 인간의 생각으로 이해할 수 없는 것이 참 많지만 그중에 자신이 부모가 되어보지 못한 이상 온전히 이해 할 수 없는 것이 자식에 대한 부모의 마음이 아닌가 싶습니다.

그래서 많은 부모님들이 하는 말이 너도 결혼해서 너와 같은 아이 낳아보고 길러봐라! 는 말을 많이 합니다.

한 무명작가의 <아버지의 눈물은 가슴에서 흐릅니다> 라는 시가 있습니다. 제가 한번 읽어드리겠습니다.

♣ 아버지의 눈물은 가슴에서 흐릅니다 ♣

아버지는 멀리 바라봅니다.
멀리 바라보기에 허물을 잘 보지 않습니다.
멀리 바라보면 미운 사람도 사랑스럽게 보입니다.
멀리 바라보기에 그리움만 많습니다.

자식들의 먼 후일을 바라보고
그 힘든 삶의 자리에서도
너털웃음으로 참아냅니다.

자존심이 무너지고 굴욕감을 참아내면서도
미소 지으며 집안을 들어서는 아버지,
아버지는 말 못하는 바보처럼 말이 없습니다.

표현하는 것이 작아서
자식들로부터 오해도 많이 받습니다.
아버지는 눈물도 없고
잔정도 없는 돌 같은 사람이 아닙니다.

말이 없기에 생각이 더 많고,
사랑의 표현이 약하기에 마음의
고통은 더 많은 것이 아버지의 마음입니다.

아버지는 작은 사랑에는 인색하지만
큰 사랑엔 부자입니다.
대범하게 용서하고 혼자서
응어리를 풀어내는 치료자입니다.
멀리 바라보기에 내일을 예견합니다.

자식을 바로잡으려
때론 사자후처럼 집안을 울려도,
자식들이 눈가에 눈물이 흐를 때
아버지의 눈물은 가슴에서 강수처럼 흐릅니다.

아버지의 사랑은
보이지 않고 잡히지 않습니다.
그래서 아버지의 사랑은 아버지가
이 생을 떠나서야 알아갑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아버지로 섬기고 사랑한다고 고백하고 그에게 영광돌리는 삶을 살기를 원한다고 하는데 정작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과 뜨거운 사랑을 이해하지 못하고 내식대로만 하나님 아버지께 다가서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저는 30대 초반 어린나이에 그 지역에서 가장 오래되고 전통있는 교회로 첫 사역을 나가게 되었습니다. 그 도시에서 가장 먼저 생겨난 어머니교회였기에 사역자로서 자부심과 자긍심이 대단했습니다. 교회에서는 부교역자로서 33평짜리 아파트를 사택으로 제공해 주었습니다. 당시 그 도시에서 가장 땅값이 비싼 곳이었고  인근 아파트에 살고 있는 많은 사람들이 시장을 비롯해서 지역 기관장, 교수, 언론사에 종사하는 등 소위 잘나가는 사람이 대부분이었습니다. 그 사람들과 섞여 살면서 내가 뭐라도 되는 같았습니다.

그리고 조금 지나자 한 집사님께서 아들이 대학에 합격한 것을 감사해서 최고급양복을 백화점에서 선물해 주었습니다. 어는 순간 나도 모르게 어깨에 힘이 들어가는 것을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집을 나갈 때마다 아파트 주차장에 세워져 있는 저의 차량이 유독 초라해 보였습니다. 당시 엑셀차를 타고 다니고 있었는데 차는 고장 없이 잘 나가는데 본넷에 칠이 약간 벗겨져서 눈에 거슬렸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옵티마차를 한 대 주십시오. 이제 이 차도 곧 수명이 다되어 갈 것 같습니다.  수시로 기도를 하고 다녔습니다. 마음에 꼭 하나님이 주실 것 같았습니다. 

그러던 이슬비가 약간씩 내리던 어느 날 이었습니다. 심방을 갔다가 교회로 돌아오고 있는데 뒤에서 차량 한 대가 따라오면서 계속 전조등을 켜고 빵빵 거리는 것이었습니다.  내가 무엇을 잘못했나? 나를 아는 사람인가? 그러다가 신호대기에 내 차가 멈추섰는데 내 옆에 와서 멈추어 서더니 창문을 내리라는 손짓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우리 교인인가? 하는 짧은 생각을 하고 있는데 그 운전사가 종이 쪽지를 하나 건네주면서 타이어 있으니까 연락을 하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신호가 바뀌자 출발해서 가버리는 것이었습니다. 이상한 사람이네  하면서 나중에 전화를 걸었습니다. 그랬더니 자기 딸이 엑셀차를 타고 다녔는데 타이어를 바꾼지 며칠이 되지 않아서 사고를 당했는데 차를 폐차하게 되어서 타이어가 너무 아까워서 빼 놓았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시내를 가다가 자신의 딸과 똑같은 엑셀차가 보여서 저 사람주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하나님께 따지듯이 물었습니다.

“하나님! 내가 타이어를 달라고 했습니까? 차를 달라고 했지요” 이것은 차를 더 타고 다니라는 하나님의 응답이었습니다. 그러면서 마음에 잔잔히 울려퍼지는 하나님의 음성이 있었습니다. 나의 마음을 모르고 있구나! 중요한 것은 그것이 아니잖니!! 보이는 것에 가치를 두고 있는 저의 마음을 터치하셨습니다. 

그동안 내가 생각했던 좋은집, 좋은 옷 그런것이 정말 중요하고, 가치 있는 것 아니라는 것을 마음에 새기는 순간이었습니다. 이것은 삶에서 참 중요한 문제입니다. 내가 내 인생의 목적과 가치를 어디에 두고 살아가느냐에 따라 그 인생이 하나님 보시기에 아름답고 하나님께 영광돌리는 삶을 살 수 있고 또 그렇지 못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우리의 인생의 목적과 목표는 어디에 있습니까? 40세가 되기 전 빠르게 원하는 만큼 승진을 해서 자리를 확보해 놓고 차를 바꾸고 50세가 되기전 40평 이상의 아파트로 이사를 가고 정년이 되기 전 몇억의 돈을 모아서 노후를 준비하고 자녀를 출가시키는 것이 인생의 목표이고 비전이 되어버릴 수 있습니다

성경에서는 우리를 창조하신 목적을 그에게 영광을 돌리고 하나님을 찬송하기 위해서 우리를 지으셨다고 하셨는데 나는 나의 영광과 나의 자손의 영광만을 위한 목표로 인생을 살아가고 있는 것은 아닌지 물어보아야 합니다. 만약 이러한 목표만을 위해서 우리가 살아간다면 우리는 그 목표를 이루기 위해 더 중요한 가치를 소홀히 하고 평생토록 만족하지 못한 삶을 살다가 인생을 마감 할 수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취업사이트인 잡코리아에서 작년 11월에 한 설문조사에 따르면 현재 경제적으로 만족할 만한 생활을 하고 있는가’라는 질문에 전체 응답자의 76%가 ‘아니다’라고 답을 했는데 더욱 주목 할 만한 사실은 나이대가 높아갈 수록 더욱더 불만족도 높게 나타났다는 것입니다.

무엇 때문이라고 생각하십니까?

그것은 대한민국의 사람들의 삶의 기준이 너무 높고 설사 자신이 정한 목표에 도달했다고 하더라도 또다시 더 높은 목표를 다시 잡습니다. 그래서 더 많은 돈을 벌고 더 넓은 집을 소유하기 위해서 인생을 살아가다가보면 결국은 자신이 정한 목표한 것에 도달하지 못했기 때문에 나는 행복하지 않다고 생각하면서 인생의 황혼을 맞이하는 경우가 많다는 것입니다.

열린우리당 원내대표를 지냈던 김한길씨가 『눈뜨면 없어라』에 쓴  글의 일부를 읽어 드리겠습니다.

결혼생활 5년동안, 우리가 함께 지낸 시간은 그 절반쯤이었을 것이다. 그 절반의 절반 이상의 밤을 나나 그녀 가운데 하나 혹은 둘 다 밤을 새워 일하거나 공부해야 했다. 우리는 성공을 위해서 참으로 열심히 살았다. 모든 기쁨과 쾌락을 일단 유보해 두고, 그것들은 나중에 더 크게 왕창 한꺼번에 누리기로 하고, 우리는 주말여행이나 영화구경이나 댄스파티나 쇼핑이나 피크닉을 극도로 절제했다. 그 즈음의 그녀가 간혹 내게 말했었다. 

"당신은 마치 행복해질까 봐 겁내는 사람 같아요." 

그 와중에 그녀가 어떤 말을 했냐면....

그녀는 또 이렇게 말하기도 했다. "다섯 살 때였나봐요. 어느 날 동네에서 놀고 있는데 피아노를 실은 트럭이 와서 우리집 앞에 서는 거예요. 난 지금도 그때의 흥분을 잊을 수가 없어요. 우리 아빠가 바로 그 시절을 놓치고 몇 년 뒤에 피아노 백 대를 사줬다고 해도 나한테 내게 그런 감격을 느끼게 만들지는 못했을 거예요" 

애니웨이, 미국생활 5년만에 그녀는 변호사가 되었고 나는 신문사의 지사장이 되었다. 현재의 교포사회에서는 젊은 부부의 성공사례로 일컬어지기도 했다. 방 하나짜리 셋집에서 벗어나, 바다가 내려다보이는 언덕 위에 3층짜리 새 집을 지어 이사한 한 달 뒤에, 

그녀와 나는 결혼생활의 실패를 공식적으로 인정해야만 했다. 

바꾸어 말하자면, 이혼에 성공했다. 그때그때의 작은 기쁨과 값싼 행복을 무시해버린 대가로.... 

소유가 인생의 행복을 가져다 주지 않는다는 것을 너무 늦게 알았고 인생의 순간 순간마다 만족하는 법을 알지 못하고 살아왔던 삶의 결과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부요케 하시는 분이시며 우리에게 복을 주시는 분이기에 우리는 그것을 누릴수 있어야 하지만 돈과 물질이 인생의 최고의 가치가 되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등장한 둘째 아들이 바로 이러한 종류의 사람입니다. 교회 마당만 밟고 있다가 믿음이 갑자기 깊어진 경우나 아니면 처음으로 예수님을 믿기 시작한 사람의 동기를 보면 가진 것을 다 잃고 나서야 주님의 품으로 돌아오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오늘 둘째 아들도 자신이 받을 분깃이 있지만 아직 관리할 능력도 되지 않은 상황에서 반 강제적으로 재산을 물려 받아 아버지의 곁을 멀리 떠났습니다. 

13절에 보면 먼 나라에 갔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아예 아버지의 간섭과 영향을 받기를 원하지 안았던 것입니다. 그러나 인생은 그의 뜻대로 풀려가지 않았습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서 모든 재산을 다 써버리고 엎친데 덮친 겪으로 그 나라에 흉년까지 들어서 먹을 것까지 걱정해야 하는 신세로 전락한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돼지를 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유대전통에서 돼지를 친다는 것은 아주 부정한 사람으로 간주되었으며 게다가  돼지가 먹는 쥐엄열매를 먹는다는 것은 인간이하의 삶으로 추락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돼지 쥐엄열매도 풍족하게 먹을 수 있는 형편은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본문에서는 그가 돼지 먹는 쥐엄 열매로 배를 채우고자 하는데 그것마저 주는 사람이 없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아버지 집에 있는 하인을 떠올리게 됩니다. 그는 자신의 신세를 한탄하면서 17절에 내 아버지에게는 양식이 풍족한 품꾼이 얼마나 많은가 나는 여기서 주려 죽는구나! 라고 배고픔을 호소합니다.

사람이 가장 서러운 것이 배고픔의 서러움이라고 하는데 굶어서 죽게 될 수도 있는 상황에 닥치게 된 것입니다. 특히 이 둘째 아들은 풍족하게 먹을 것을 먹으면서 살아왔던 사람이기에 그 아픔은 더욱 더했을 것입니다.

이스라엘 랍비들은 인간의 완악함을 빗대어서 “이스라엘 사람들이 쥐엄 열매를 먹게 될 때 그들은 회개한다”라고 말하기도 했는데 이렇듯 하나님을 떠난 인간의 비참한 모습이 어떤 것인지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는 부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제 둘째 아들이 선택과 결단을 해야 할 때가 다가왔습니다. 더 이상은 이대로 지낼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아버지께로 가기로 마음을 먹습니다 일어나 아버지께로 가자라고 결단한 것입니다. 18절 "내가 일어나 아버지께 가서 이르기를 아버지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사오니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하지 못하겠나이다 나를 품꿈의 하나로 보소서" 라고 아버지께 고백하겠다고 스스로에게 다짐하고 집으로 돌아가기로 마음먹습니다.

둘째 아들은 철저하게 회개하고 있는 것입니다. 회개는 행동을 돌이키는 것입니다. 회개는 걸어왔던 길을 다시 가지 않는 것입니다. 그는 더 이상 세상으로 가지 않고 아버지의 품으로 가기로 결정한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의 죄악 된 모습을 인정했습니다. 마음 가운데 고백하기를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다고 말하는 것은 그가 믿음을 가진 사람이라는 것을 알 수 있는 부분인데 하나님께 먼저 지난날의 모습에 대해 철저하게 가슴을 치며 통곡하고 있는 것입니다. 

“아버지가 수많은 품꾼을 부릴 정도로 넉넉한 삶을 살았기에 아버지 밑에서 부족함이 없는 삶을 살다가 아버지가 허락할 그 때에 나갔어도 늦지 않았는데 더 많은 것을 소유하고 더많은 것을 누릴려고 하다가 결국은 낭패를 보았구나” 지난시간을 돌아보며 회개의 눈물을 흘리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만족한 법을 배워야 합니다. 소유와 가치의 기준이 뚜렷하고 이정도면 나는 만족한다 라는 목표의 한계점이 있어야 하고 자족하는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사도바울은 모든 것에 자족하기를 배웠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심지어 자신이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 곧 배부름과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한 삶의 모습 속에서도 일체의 비결을 배웠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풍부한 삶을 살면서 만족한 비결을 배운 것이 아니라 비천에 처하면서도 만족하는 비결을 배웠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있는 것을 족한 줄로 알고 모든 것이 복음에 맞추어진 인생의 삶을 살았다는 것입니다.

 빌립보서 3장7,8절에서 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뿐더러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기 위함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복음을 위해서라면 잃어버린 영혼을 위해서라면 나의 것을 잘라서 나도 부족하지만 더 내려놓고 포기하고 헌신하고 드릴 수 있는 결단도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로마서의 바울의 고백처럼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해서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해서 죽는다는 고백이 삶의 진실한 고백이 되어야 합니다.

디모데전서 6장 17절 이하에서는 “네가 이 세대에서 부한 자들을 명하여 마음을 높이지 말고 정함이 없는 재물에 소망을 두지 말고 오직 우리에게 모든 것을 후히 주사 누리게 하시는 하나님께 두며 선을 행하고 선한 사업을 많이 하고 나누어 주기를 좋아하며 너그러운 자가 되게 하라  이것이 장래에 자기를 위하여 좋은 터를 쌓아 참된 생명을 취하는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의 첫째 아들도 둘째 아들과 별반 다를것이 없는 동일한 가치기준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 기준은 바로 자신이 아버지로부터 물려 받게 될 재산에 가치를 두고 살아가는 사람이었습니다.  둘째아들이 돌아오자 첫째 아들은 마음이 몹시 불편해 져 버렸습니다. 자신에게 돌아올 재산이 줄어들 수 있다는 불안감이 있었을 것이고 속으로 생각하기를 ‘아니? 아버지의 재산을 그렇게 많이 가져가서 다 써버리고 이렇게 누더기 옷을 입고 어디에 붙어서 살려고... 또 아버지 재산이 탐내서 들어온 것이야?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그는 아버지가 작은 아들을 단 한마디의 꾸중과 책망이 없이 받아드리고 또 거기다가 잔치를 벌이는 것에 대해 분노가 치밀어 올랐습니다. “아니? 아버지? 나는 여러 해 동안 아버지를 섬기고 아버지의 말을 잘 들었는데 내게는 염소새끼 한 마리도 안주었는데 어찌 이럴수 있습니까? 살진 송아지를 잡고, 그 비싼 가락지를 끼워주고 풍악을 울리고 잔치를 벌이다니 말이나 되는 소리입니까?”

28절에 보면 저가 노하여서 아버지가 벌인 잔치에 들어가기를 즐겨 아니한다고 말하고 있는데 여기서 “노하여”의 원어적인 뜻은 벌컥 화를 내었다라는 의미입니다. 아버지한테 단순히 목소리를 높인 것이 아닙니다. 하인에게 하듯 버럭 화를 낸 것입니다. 참으로 무례한 아들입니다.

만약 오늘 본문의 작은아들 그러니까 동생이 돌아올 때 그렇게 망해서 초췌한 모습으로 돌아오지 않고 큰부자가 되고 권력을 쥐고 수많은 종들을 데리고 나타났다면 과연 형의 태도는 어떠했을까요? 아마 그때는 동생과 아버지를 보고 분노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아버지의 말에 진한 감동이 있습니다. “이 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다시 얻었노라” 둘째 아들은 그동안 아버지께 한마디 연락도 하지 않았습니다. 아버지의 속은 새까맣게 탔을 것이었습니다. 거기다가 많은 재산을 까먹고 돌아왔습니다.  그런데 단지 돌아왔다는 것 하나만으로 이렇게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것이었습니다.  누가복음 15장 7절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와 같이 죄인 한 사람이 회개하면 하늘에서는 회개할 것 없는 의인 아흔아홉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는 것보다 더하리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한영혼이 돌와 왔을때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이 얼마 큰 기쁨으로 가득한지를 표현해주는 부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누가복음 15장에서는 잃었다가 다시 찾은 양과 잃은 드라크마를 찾는 비유가 나오는데 이때 잃은 것을 찾았을 때 벗과 이웃을 초청하여 잔치를 벌이고 즐기는 부분이 나옵니다. 이것은 경제논리로 따지자면 절대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입니다. 상식적으로 잔치를 벌일때 들어가는 비용이 양한마리와 한드라크마의 비용보다 훨씬더 가격이 많이 든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바로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을 표현한 부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한 생명을 구하기 위해서는 그 어떤 댓가도 지불하겠다는 하나님 아버지의 뜨거운 사랑과 잃은 것을 찾았을 때의 기쁨을 배가해서 나타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한 아버지의 마음을 큰아들은 절대 이해할 수도 용납할 수도 없었던 것이었습니다. 사실 본문의 큰아들은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 자신이 될 수 있습니다. 우리는 돌아온 탕자의 비유에서는 작은 아들은 못돼 먹었고 큰아들은 그나마 났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오히려 큰아들은 더욱더 깊은 자기만의 세상을 가지고 사는 바리새인일 수 있다는 것입니다.

큰아들이 오래토록 아버지와 함께 먹고 일하고 같이 있었지만 잘 알지 못하는 사실이 하나 있었습니다.

31절 말씀을 읽어 보도록 하겠습니다. “아버지가 이르되 얘 너는 나와 함께 있으니 내 것이 다 네 것이로되” 그렇습니다. 자신이 큰아들로써 아버지의 유업을 이어 받을 것이기에 아버지의 모든 재산이 다 자신의 것이 된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었던 것이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하늘의 유업을 이어 받을 자들입니다. “갈라디아서 4:7 그러므로 네가 이 후로는 종이 아니요 아들이니 아들이면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유업을 받을 자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나라에서만 받는 것이 아닙니다. 

바울은 에베소서 3:20에서 우리의 하나님은

우리 가운데서 역사하시는 능력대로 우리가 구하거나 생각하는 모든 것에 더 넘치도록 능히 하실 이에게 라고 하나님에 대해 고백하고 있습니다.

빌립보서 4:19절 에서도 “나의 하나님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영광 가운데 그 풍성한 대로 너희 모든 쓸 것을 채우시리라”는 확신을 가지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필요에 민감하신 분이십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자신을 가르켜 우리가 아바 아버지라고 부르게 하셨습니다. 그분의 것이 우리의 것입니다. 우리는 창조주이시고 전능자이신 하나님의 호적에 기재된 것입니다.

큰아들은 아버지의 것이 자신의 것이 된다는 사실을 알지 못하고 누리지 못하고 자유하지 못했습니다. 그러기에 더욱더 돈에 인생의 가치를 두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의 삶에서도 내가 하나님을 아버지로 믿고 있지만 여전히 오늘 본문에 등장한 큰아들과 같이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을 모르고, 아버지의 공급하심을 믿지 못하고 내것만 찾고 챙기려고 하고 자신에게 돌아올 분깃만 생각하는 사람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아버지는 자신의 모든 것을 다 주려고 생각했었습니다.

얼마 전 잠깐 나누었던 이야기입니다. 한소망교회에 부임을 하고 나서 얼마 지나지 않아 집에서 쓰던 전자피아노가 고장이 나 버렸습니다. 세 아이들이 매일 집에 오면 치는데 많이 허전해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전에 알게 된 새가족 성도님께 전화를 걸어서 수리 비용을 물어보았는데 사는 것의 절반이나 나온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럴바에야 차라리 조금 더 주고 구입하는 것이 훨신 낫다는 말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때가 수요일이었는데 하나님께 기도하기를 하나님 다음 월요일까지 주십시오 아니면 구입해 버리겠습니다. 반 협박식으로 기도를 드렸습니다. 살 수 있는 재정이 없었기에 기도의 간절함은 하루 하루가 지날 수록 더해갔습니다. 그런데 목요일 토요일 주일이 되어도 어디서 나올 생각을 하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다가 월요일이 되었습니다. 어떻게 되었을까요? 응답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아내와 함께 서울로 갔습니다. 매장에서 이것 저것을 둘러보고 해머건반이 있는 것으로 해야 된다는 것과 성능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식사때가 되어서 식사를 하고 다시 들어왔는데 매장에 들어서자 마자 그 새가족 성도님께서 첫 마디가 목사님! 제가 하나 드리겠습니다. 라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절대 그렇게는 안한다고 했습니다. 그래도 부부간에 이미 이야기를 했는데 꼭 드리고 싶다는 것이었습니다. 제가 그래서 진지하게 물었습니다. 그럴 이유라도 있습니까? 특별히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마음에 그런 감동이 왔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분들의 마음이 진심임을 확인하고 받기로 하고 기도했던 내용을 이야기 해주니 참 감사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런데 서울에서 일산으로 돌아오는데 마음이 가볍지가 않았습니다.

운전을 하면서 오는 길에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이 가슴속에 느껴져 울림이 되었습니다. “너 그것이 그렇게 갖고 싶어서 너희 자녀에게 주고 싶어서 간절함으로 기도했지? 그래 그래 내가 주께 내가 줄꺼야! 알았다 알았어! 그런데 나는 무엇이 갖고 싶은지 아니? 나의 필요는 무엇인지 아니? 나는 한영혼이 그렇게 필요하단다! 나는 한영혼이 그렇게 간절하단다! 나의 필요를 위해서 그렇게 간절함으로 기도해줄 수는 없겠니?”

눈물이 났습니다. 하나님도 하나님의 필요가 있었던 것이었습니다. 하나님도 구하는 것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한영혼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부모와 자식과의 관계에 있어서 부모는 자식에게 아무것 해주지 않아도 잘 되기만을 바란다고 이야기하곤 합니다. 너희나 잘 살 아라고 합니다. 그런데 부모도 때론 부모님만이 갖고 싶은 것이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 아들이 잘되고 우리 딸이 잘되는 것에 기쁨을 느끼고 행복해 하시지만 부모로서 말 못할 무엇인가의 필요를 갖고 계실수 있다는 것입니다

오늘 큰아들은 오래토록 아버지와 살면서 그 아버지의 마음과 아버지의 필요를 전혀 알지 못했던 것이었습니다. 둘째아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세상의 돈에 가치에 일찍이 눈이 멀었고 끝없이 기다리고 계시는 아버지의 사랑과 용서를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이것은 오늘날 믿음안에서 거하면서도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을 전혀 알지 못하고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인생의 가치를 하나님 아버지의 나라에 두지 않고 세상에만 두고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 대한민국은 세계 12번째 경제대국입니다.

이 나라에 굶어죽는 사람이 있습니까? 이나라에 집이 없어 거리에서 자는 사람이 있습니까? 입을 옷과 신발이 없는 사람이 있습니까? 거의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아직도 세계에서는 4초마다 한명의 아이가 전쟁과 기아로 죽고, 하루에 3만5천여명의 아이들이 굶어죽고 있습니다. 세계인구의 8억명이 기아로 허덕이고 있고 전 인류의 5분의 1인 12억명이 하루 1달러 미만으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런대도 우리는 죽을 때까지 우리의 삶에 만족하지 못하고 끊임없이 더 나은 삶, 더 편한삶, 더 안정된 삶을 위해 달리고 또 달려갑니다.

우리의 비교대상은 우리 옆에 사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우리의 삶의 기준도 이웃이 아닙니다. 우리의 삶의 기준과 가치는 하나님의 나라 천국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의 인생의 목표와 기준이 나보다 더 잘사는 사람도 아니고 그들과 비교해서 더 넓은 집을 마련해놓고 더 좋은 차를 타고 더 편하고 좋은 위치를 확보해 놓고 이 세상을 떠나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의 기준은 복음이어야 합니다. 우리의 삶의 기준은 예수 그리스도여야 합니다. , 천국이어야 합니다. 우리의 삶이 하나님의 나라와 전혀 무관하게 산다면 우리가 이 땅에서 누리고 가졌던 모든 것은 나의 생명이 사라짐과 동시에 모조리 다 사라져 버린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천국에 보화를 쌓아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지금보다 더 부요해져야 하고 더 큰 집이 필요하고 지금보다 더 나은 명예가 필요한 분명한 비전과 목표를 하나님나라의 확장과 한 영혼을 위해서라는 분명한 이유를 찾을 수 있어야 합니다.

세상에 가치를 두고 세상을 선택하며 살아가는 사람이 있고
천국에 가치를 두지만 세상을 선택하며 살아가는 사람이 있고
천국에 가치를 두고 천국을 선택하며 살아가는 사람이 있습니다.

우리는 큰아들이 되어서도 안되고 작은 아들이 되어서도 안됩니다.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을 아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마음은 어디에 있을까요? 하나님의 눈물은 어디에 있을까요?

첫째는 가장 복음이 필요한 그 사람 옆에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 다음은 그 복음을 전해줄수 있는 그 사람에게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디모데후서 4장 5절 “그러나 너는 모든 일에 신중하여 고난을 받으며 전도자의 일을 하며 네 직무를 다하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직무 즉 맡은 일 직업에 최선을 다하되 전도자의 일을 하면서 복음을 전하면서 네 직무를 다하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거기에는 때론 고난과 고통이 있을 수 있는데 그것은 결단코 우리에게 손해를 주는 고난이 아니고 우리를 어둡게 하는 고난이 아닙니다.   

다니엘12:3 “지혜 있는 자는 궁창의 빛과 같이 빛날 것이요 많은 사람을 옳은 데로 돌아오게 한 자는 별과 같이 영원토록 빛나리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히브리서 11장 36-40절에는 복음을 위해서 영광스런 고난을 당했던 사람을 소개하고 있는데

어떤이들은 희롱과 채찍질 뿐아니라 결박과 옥에 갇히는 시험도 받았으며 돌로 치는 것과 톱으로 켜는 것과 시험과 칼에 죽는 것을 당하고 양과 염소의 가죽을 입고 유리하여 궁핍과 환난과 학대를 받았는데...이들의 모습에 대해서 성경에서는 하나님께서 이들을 위해서 더 좋은 것을 예비하셨다고 분명히 말씀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복음을 위해 어떤 헌신과 어떤 희생과 어떤 부끄러움과 어떤 댓가를 지불했다면 그것에는 반드시 하나님의 보상과 상급이 있다는 것을 믿으십시오.

오늘 우리는 사세특밤.... 사순절 세이레 특별한 밤에 오게 될 VIP를 작정하고 기도제목을 쓸 것입니다. 진정으로 우리가 이번 사세특밤에 나의 생애에 영원히 남을 영적인 추억이 만들어지고 가슴 뜨거운 성령의 역사를 매일처럼 경험하는 위대한 밤이 될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잔치가 우리들만의 잔치가 되어서는 안됩니다. 우리 모두가 전도자가 되어 VIP를 초청하여 21일동안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을 시원케 해 드리고 그동안 교회에 나오지 못했던 수많은 사람들이 우리의 헌신적인 섬김과 열정적인 기도와 사랑으로 주님 품으로 돌아와서 변화되는 놀라운 하루하루가 되었으면 합니다. 

일주일후에 우리 삶의 막혔던 짐들이 풀어질 것입니다. 성령의 뜨거운 역사를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반드시 더 위대한일이 이땅에 더 놀라운 일 이도시와 가정과 여러분 개인에게 일어날 줄 믿습니다.


기도문

주님! 주의 약속은 어떤 이들이 더디다고 생각하는 것 같이 더딘 것이 아니라 오직 주께서는 너희를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하지 아니하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신다고 말씀하신 주님! 내가 누군가에게 복음을 들었다면 이제 나 또한 다른 사람에게 그 복음을 전해야 하는 사명이 있음을 깨달아 알게 하시고 하나님께서 찾고 계시는 그 단 한영혼을 위해 우리의 시간과 물질의 댓가를 값없이 지불할 수 있는 마음을 주시옵소서.

주님! 적어도 나를 알고 있는 주위의 사람들은 나를 통해 단1번이라도 복음을 들을수 있도록 우리에게 전할 수 있는 담대한 마음을 주시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 아멘 - (이정우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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