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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주인공 (요 1: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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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인공 (요 1:1-13)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2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3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4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 5빛이 어둠에 비치되 어둠이 깨닫지 못하더라 6하나님께로부터 보내심을 받은 사람이 있으니 그의 이름은 요한이라 7그가 증언하러 왔으니 곧 빛에 대하여 증언하고 모든 사람이 자기로 말미암아 믿게 하려 함이라 8그는 이 빛이 아니요 이 빛에 대하여 증언하러 온 자라 9참 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추는 빛이 있었나니 10그가 세상에 계셨으며 세상은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되 세상이 그를 알지 못하였고 11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하지 아니하였으나 12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13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이니라”(요1;1-13)

신약성경은 27권의 책으로 되어있습니다. 다 하나님의 말씀이지만 특히 예수님의 일생과 예수님의 말씀을 기록한 4복음서는 더욱 관심의 대상입니다. 이 4복음서 중에서 마태, 마가, 누가복음은 같은 관점에서 기록했기 때문에 공관복음(共觀福音)이라고 하는 것 아시죠?  그러나 요한복음은 가장 마지막으로 기록 되었다고 알려져 있고,  또 다른 관점에서 기록했기 때문에 제4복음이라고 부릅니다.  요한복음에서는 예수님의 신성이 아주 강조되어   영적인 하늘의 사건들이 많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래서 요한복음은 주로 ‘영적인 복음’ 으로 취급합니다. 다른 복음서보다 어렵다고 느낍니다. 

참고로, *마태복음은 아브라함부터 시작합니다.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세계라’ (마1:1) 마태복음에서는 예수님을 유대인의 왕이요 유대인들이 간절히 기다리던 메시야로서 묘사하고 있습니다. 
*마가복
음에는 족보가 없습니다. 요한이 세례 주는 것부터 시작됩니다. 왜냐면 마가복음에서는 고난 받는 종으로서의 예수가 주제이기 때문입니다. 

*누가 복음은 ‘인류의 조상 아담’ 으로부터 시작됩니다.  인간이신 예수님, 즉 예수님의 인성(예수님의 사람되심)을 주제로 삼고 있다는 것입니다. 

오늘 *요한복음에서는 ‘태초’ 로부터 시작합니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요1:1) 마치 창세기 1:1절과 같지요? 그러니까  요한복음은 “하나님으로서의 예수” 즉 예수님의 신성(神聖)이 주제입니다.     이 요한복음은 몇 가지 특징이 있는데요, 

첫째, 예수님의 행적(行績)보다는 말씀 위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공관복음에는 예수님의 탄생하심, 세례 받으신 것,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신 것 등 예수님의 행적이 주로 기록되어 있는데, 요한복음에는 행적에 대한 기록이 없으며, 마리아에 대한 기록이나, 광야에서 시험 받으신 일도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다. 대신에 요한복음에서는 예수님께서 친히 하신 말씀을 아주 자세히 기록하고 있습니다.

둘째, 공관복음은 주로 갈릴리에서 일어난 사건들을 기록하고 있는데 반하여 요한복음은 예루살렘에서 일어난 사건들을 기록한 것이 많습니다.  요한이 이렇게 기록한 것은 전설에 의하면 사람들이 예수님을 메시야로 믿는데   ‘예수님은 주로 갈리리 촌에서만 일하다가 예루살렘에서 돌아가신 것뿐인데 어떻게 메시야였겠느냐?’ 라고 반론에 대한 것을 반증하기 위해서 예수님이 예루살렘에서 행하신 일들을 추려서 의도적으로 기록했다고 합니다. 

셋째, 공관복음에서 빠진 것을 보충해서 기록했습니다.
요한복음은 가장 마지막에 기록한 책이기 때문에 그 이전에 나온 마태,    마가, 누가 복음은 요한이 다 읽어보았을 것입니다. 그 후에 공관복음에서 취급하지 않고 있는 부분을 보충해서 기록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신성을 강조하는 요한복음은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로 시작합니다. 여기서 생각할 것은 [말씀]이라는 말입니다. 요한복음에서는 예수님을 말씀으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말씀’이라고 번역한 헬라어 원어는 ‘로고스’입니다. 그런데 공관복음에서는 이 로고스 라는 단어로 예수님을 지칭해서 사용한 적은 없습니다.  사도 바울도 예수님을 ‘로고스’라는 단어를 사용하지는 않았습니다.   요한만이 예수님을 ‘로고스’로 비유해서 설명을 합니다.   요한이 기록한 요한계시록 19:13에 보면 ‘또 그가 피 뿌린 옷을 입었는데 그 이름은 하나님의 말씀이라 칭하더라’ (계19:13)이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다른 성경에서 사용하지 않은 ‘로고스’라는 단어를 요한이 사용한 이유가 무엇일까요? 
  
1) 첫째는 전도를 위해서입니다. 당시의 헬라 문화권에 속해 있는 많은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선교를 목적으로 그들에게 복음을 설명하고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저들이 잘 알고 있는 단어인 ‘로고스’를 사용했다는 것입니다.
  
2) 둘째로는, 요한복음이 나오기 전에 다른 성경책은 다 기록되어 있었습니다.  그래서 요한복음은 4복음서만이 아니라 신약성경 중에서도 가장 나중에 기록되었는데,  이미 기독교 교리에 대한 이단 세력들이 많이 생겨났습니다.  

헬라 철학의 영향을 받은 영지주의, 그노시스주의라고 하는 이단사상이 이미 있었습니다. 이 이단들이 ‘로고스’ 라는 단어를 사용했는데 이들이 말하는 로고스는 하나님과 인간의 중간에 존재하는 피조물이며, 피조물 중에서는 가장 으뜸 되는 높은 존재라고 했습니다.  즉 예수님을 피조물중에 가장 높은 분으로, 결국은 하나의 피조물에 지나지 않는 분으로 말했습니다.   

요한은 이단들의 잘못된 사상을 반격하면서  ‘참 로고스는 예수님이신데 너희들이 생각하는 그런 로고스가 아니다.’ 하면서 예수님이 누구신가? 를 증거 하기 위해서 헬라 철학의 로고스란 단어를 빌려서 설명하게 되었다 하는 것입니다.  그때나 지금이나 가장 중요한 것을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바르게 이해하는 것입니다.  이단들의 특징이 ‘열심’입니다. 집도 학교도 가족도 다 버리고 믿는 것이 이단입니다.  성도여러분, 이렇게 열심히 믿어도 예수님을 오해하면 이단이 되고, 아무리 열심히 믿어도 그 끝이 잘못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성경을 통해 바른 예수님을 알아야 하겠습니다. 

이제 본문으로 들어가 봅니다.  본문을 통하여 보면 사도요한은 로고스, 즉 예수님을 세 가지로 증거하고 있습니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요1:1)
첫째, 창조전부터 이미 계셨던 분 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창조에 포함된 피조물이 아니고 창조이전부터 이미 계셨던 즉 하나님과 함께 계시는 예수님이라는 것입니다.

둘째, 하나님이신 분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성부 성자 성령을 다 포함하는 하나님이신 예수님 이입니다.

셋째. 만물을 창조하신 창조주로 말하고 있습니다.
(요1:3)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로고스로 비유되고 있는 예수님은 그야말로 전지전능하신 분이요 능력이 있으신 분입니다. 창세기 1장에서 “하나님이 빛이 있어라 말씀하시니 빛이 있었다” 라고 하였습니다. 말씀으로 천지가 창조되는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이 말씀이 예수님입니다.  하늘과 땅과 온갖 만물을 창조하신 예수님께서 앉은뱅이를 보고 ‘일어나라’ 하시니 일어났고, 또 벙어리를 보고 ‘에바다’라고 하시니 입이 열려 말하게 되었으며, 죽은지 나흘 된 나사로를 향하여 ‘나사로야 나오라’  말씀하시니 그 즉시 썩어 냄새나던 시체가 벌떡 일어나 나왔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시오 전능하신분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이십니다.
  
빌2:6-8에 보면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7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8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고 하였습니다.  예수님은 사람의 몸으로 오신 하나님이십니다. 

특히 우리는 ‘태초’에 대해서 생각을 하면 큰 은혜를 받습니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태초가 무슨 뜻입니까?  시간과 공간의 시작입니다. 

시간은 언제 시작했습니까?  인간은 시간 속에서 태어나 시간 속에서 삽니다.  또 인간은 동시에 2개의 공간에 있을 수 없는 한계적인 존재입니다.  같은 시간에 여기 있으면서 동시에 저기 있을 수는 없습니다.  이 시간과 공간을 뒤집는 ‘타임머신’ 이야기가 동화처럼 나오지만 시간과 공간은 인간의 운명입니다.   

그런데 이 시간과 공간이 언제 시작되었을까요?  ‘태초’에는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셔서 ‘빛이 있으라’ 고 하시자 빛이 있은 다음에 계속해서 엿새동안 천지를 창조 하십니다. 즉 우리가 말하는 오늘날 ‘시간과 공간’은 결국 해와 달이 생긴 다음에 거기에 따른 것입니다.  우리 예수님은 시간과 공간을 창조하신 분입니다.
  
예수님은 시공(時空)의 일부가 아닙니다.  시간과 공간의 차원 안에 속한 분이 아니라 영원히 계신 분입니다.  영원(永遠)이란 끝없는 시간이 아니라 시간을 초월한다는 의미입니다.  2011년 전에 이 세상에 오시기 전부터 존재하신 예수님은 시간과 공간을 만드신 창조주 하나님입니다.  불교의 교리도 옳고 좋은 내용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불교에는 창조주 하나님이 없습니다. 모든 것이 저절로 존재하고, 착하고 선하게 살면 다음 생에 조금 나은 존재로 태어나고 그 생활이 점점 나빠지면 하등동물로, 파리 모기로까지 떨어진다고 합니다.     

그러나 기독교는 창조주 하나님을 믿는 종교입니다.  이세상이 우리 하나님께서 만드신 것을 믿게 되면, 다른 모든 문제는 자연히 해결됩니다. 하나님이 창조주이신 것을 믿으면 기적(奇蹟)이 왜 어렵겠습니까?  무에서 유를 창조하시는 하나님이 못 하실 것이 뭐가 있겠습니까?  이 창조신앙(創造信仰)이 기독교의 핵심입니다. 

이제 본문 3절을 보면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하십니다. 법정 스님의 글 중에 ‘말은 존재의 집’이란 내용이 있습니다. “말은 생각을 담는 그릇이다./생각이 맑고 고요하면 말도 맑고 고요하게 나온다./생각이 야비하거나 거칠면 말도 또한 야비하고 거칠게 마련이다./그러므로 그가 하는 말로서 그의 인품을 엿볼 수 있다./그래서 말은 존재의 집이라고 한다.” 

그런데 본래 “말은 존재의 집”이란 이 표현은 널리 알려진 실존주의 철학자 마르틴 하이덱거가 한 말입니다. 그러나 훨씬 오래전, 1세기에 살던 예수님의 제자 요한은  “태초에 말씀이 있었고, 이 말씀이 온 우주 만물을 만들었으며 그리고 이 말씀이 바로 우리의 존재 그 자체를 만든 것이라”고 선언한 것입니다. 말씀이 존재의 원인이라고 그때 이미 말씀하였습니다. 우리 존재의 원인이 말씀이신 예수님이십니다.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이 말씀 안에 생명이 있는데 그 생명이 사람들의 빛입니다.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  말씀이 하나님이시고, 천지 만물을 창조하셨고, 그 안에 생명이 있고, 이 생명이 사람들의 빛 입니다.  

그러면 성도여러분, 저는 지금 말을 하고 있습니다. 제가 말을 하는 가장 중요한 이유는 무엇일까요? ① 말할 것도 없이 저는 말을 통해 제 자신의 생각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말(언어)의 가장 중요한 기능이 ‘표현’(manifestation)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말씀이신 예수 그리스도는  무엇을 표현하고자 이 땅에 오신 것입니까?   사도 요한은 그가 하나님을 표현하기 위해 오셨다고 말합니다. 우리가 보지 못하고 알지 못하는 하나님, 그 하나님을 볼 수 있도록 그리고 알 수 있도록 하나님을 표현하고자 이 천년 전 이 땅에 오셨다는 것입니다.  
 
제가 지금 말을 하고 있는 또 하나의 중요한 이유는 ② 말을 통해 여러분과 소통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렇습니다. 언어의 가장 중요한 역할이 바로 ‘소통’(커뮤니케이tus)입니다.  말씀이신 예수께서 이 땅에 오신 중요한 이유가 바로 하나님과 인간의 소통을 위해서 입니다. 제가 지금 말을 함으로 여러분과 제가 소통하듯이  말씀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과 인간의 소통이 가능하게 된 것입니다. 인간 타락의 가장 큰 비극은 하나님과 인간의 소통이 단절된 것입니다. 죽음의 성경적 의미는 본래 단절(separation)이고, 죄는 바로 하나님과 인간의 단절을 가져 온 것입니다.

문제가 있습니다. 5절을 보면, ‘빛이(=말씀이) 어둠에 비치되 어둠이 깨닫지 못하더라’ 는 것입니다.  말씀이 빛으로 우리에게 비취셨는데 어둠이 도무지 깨닫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성도여러분, 빛이 없는 것이 아닙니다. 어둠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어둠에 빛이 오셨습니다. 빛이 어둠에 비쳤습니다.  그런데도 어둠이 깨닫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그가 세상에 계셨으며 세상은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되 세상이 그를 알지 못하였고 11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하지 아니하였으나’ 하는 것이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이 문제는 작은 문제가 아닙니다.  많은 사람들이 깜깜한 어둠속에서 빛을 간절히 구합니다. 빛이 희망이고, 빛이 생명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그 빛이 이미 비취었다고 합니다. 빛이 왔는데 사람들은 빛을 빛으로 모르는 것입니다. 여전히 어둠속에서 죽어가는 것입니다. 지금 여러분들은 빛 속에 있습니까? 어둠속에 있습니까? 이미 여러분에게 비친 빛을 잘 깨닫고 있습니까? 
 
그러면, 어둠이 무엇을 깨닫지 못한다는 말인가요?  빛을 빛으로, 어둠을 어둠으로 깨닫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왜 어둠이 빛을 빛으로, 어둠을 어둠으로 깨닫지를 못할 까요?   또 어떻게 하면 어둠이 빛을 깨달을 수 있을까요?   이 심각한 문제를 해결하시기 위한 하나님의 방법은 무엇일까요?  

이 문제를 해결하시기 위한 하나님의 방법은 ‘사람’입니다. 
하나님은 사람을 보내십니다. 그 사람이 세례요한입니다.  ‘하나님께로부터 보내심을 받은 사람이 있으니 그의 이름은 요한이라 7그가 증언하러 왔으니 곧 빛에 대하여 증언하고 모든 사람이 자기로 말미암아 믿게 하려 함이라’ 사람을 통해서 말씀하시는 하나님, 사람을 통해서 문제를 해결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가 증언하러 왔으니’ 합니다.  요한은 자기를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라고 소개합니다.  예수님은 말씀이시고, 요한은 소리입니다.    “또 말하되 누구냐 우리를 보낸 이들에게 대답하게 하라 너는 네게 대하여 무엇이라 하느냐 23이르되 나는 선지자 이사야의 말과 같이 주의 길을 곧게 하라고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로라 하니라”(요1;22-23) 실제로 세례요한은 예수님을 증거합니다.   

(29절) “이튿날 요한이 예수께서 자기에게 나아오심을 보고 이르되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   
(32절) “요한이 또 증언하여 이르되 내가 보매 성령이 비둘기 같이 하늘로부터 내려와서 그의 위에 머물렀더라”    
(36절) “예수께서 거니심을 보고 말하되 보라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

저는 이 말씀을 보면서 ‘나도 하나님의 방법이면 좋겠다’ 라고 생각을 하였습니다. 사람을 통해서 말씀하시는 하나님, 사람을 통해서 문제를 해결하시는 하나님이 ‘나를 통해서 말씀하시고, 나를 통해서 문제를 해결하셨으면... 내가 그런 사람이 되었으면 ...’ 하는 생각을 하였습니다.   또한 지금 예배드리는 여러분이 하나님의 방법이시기를 원합니다.   예배드리는 여러분이 제2, 제3의 세례 요한 이시기를 원합니다. 여러분을 통해서 문제가 해결되기를 원합니다.   여러분들이 문제해결의 주인공(主人公)이시기를, 저와 여러분이 하나님의 방법이시기를 축원합니다.

‘빛이(=말씀이) 어둠에 비치되 어둠이 깨닫지 못하더라’ 는 또 하나의 문제해결방법을 성경이 말씀하십니다. 12절입니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예수님을 나의 구주, 나의 하나님으로 영접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말씀을 보면서 우리는 이상한 생각이 듭니다.  ‘깨닫지 못했는데 어떻게 영접할 수가 있지’ 하는 것입니다.  즉 빛에 대한 지식이 있어야 믿음을 가질 수 있지 않는가 하는 것입니다.  지식이 믿음을 부른다는 생각이 우리들의 생각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그 반대입니다. 어둠에 속한 우리가 빛을 깨닫는 것은 영접해야 합니다. 영접하면(=믿으면) 깨닫습니다. 믿으면 지식이 생긴다는 것입니다.  이 말씀이 정말 옳은 말씀입니다. 결혼(結婚)을 생각해 보십시오. 알고 결혼합니까?  믿음으로 결혼하고, 살면서 알아갑니까?   

자녀(子女)를 기르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자녀에 대해서 다 알고 기르는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사랑으로 기르면서 자녀를 알아갑니다.  친구(親舊)와 사귀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먼저 믿음이 있고 뒤에 지식이 따라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영접함으로서 빛을 깨닫는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들이 영접함으로 빛이신 예수님을 깨달아가는 주인공들입니다.    

성도여러분, 아무나 믿는 것이 아닙니다.  아무나 믿음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이니라’ 하십니다.   믿음은 하나님이 주시는 것입니다. 믿음을 주셔야 영접을 하는 것입니다.  

오늘이 A.D. 2011년 4월 3일입니다. 예수님은 이미 2011년 전에 우리나라도 아닌 이스라엘에 계셨던 분입니다.  그런데 여기에 계신 여러분 모두가 그 예수님을 나의 주 나의 하나님으로 영접을 하였고, 믿고 있습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합니까? 여러분들이 모두 하나님께로서 난 하나님의 자녀들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영접함으로 구원을 받은 성경의 주인공들입니다. 

이제 말씀을 마칩니다.  

무에서 유를 만드신 창조주이신 예수님을 믿는 ‘창조신앙’이 저와 여러분들의 신앙이 되기를 원합니다. 예수님과 충분히 소통하고 대화하는 여러분들이시기를 원합니다.  여러분은 모두다 하나님께로서 난 하나님의 자녀들입니다.  영접함으로 구원을 받은 구원의 주인공들입니다.  이 사실을 영원히 감사하시면서 은혜받은 주인공답게 사시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또 저와 여러분들이 문제해결의 주인공(主人公)이기를, 이 세상에서 어둠을 걷어버리는 하나님의 방법이시기를 축원합니다. 또 다른 요한으로 사시기를 축원합니다.   아멘.    아멘.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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