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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기적시리즈(7) : 교제의 기적 (히 10:23-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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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적시리즈(7) : 교제의 기적 (히 10:23-25)


봄빛이 완연한 계절이 찾아왔습니다. 봄의 경이로움은 생명의 되살림을 경험하는 것입니다. 봄은 부활의 기적을 연출하는 시즌입니다. 종교 개혁자 말틴 루터는 “봄에 돋아나는 나뭇 잎사귀마다 하나님은 부활의 약속을 새겨 놓으셨다”고 했습니다. 봄의 시즌, 이 계절에 다시 피어나는 꽃잎들을 바라보며 우리는 또하나 인간 소통을 통한 삶의 부활의 기적을 기대하게 됩니다. 이를 가르켜 성경은 <교제의 기적> 혹은 <코이노니아의 기적>이라고 부릅니다. 

우리 교회가 위치한 분당 지역에서 인생의 마지막 시간을 살다가 간 꽃의 시인 김춘수의 <꽃>은 바로 이런 인간 사귐이 가져오는 기적의 아름다움을 예찬한 대표적 시라고 할 수 있습니다. 

“네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불과했다/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에는/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준 것처럼/나의 이 빛깔과 향기에 알맞은/누가 나의 이름을 불러다오/그에게로 가서 나도 그의 꽃이 되고 싶다/우리들은 모두 무엇이 되고 싶다/너는 나에게 나는 너에게/잊혀지지 않는 하나의 눈짓이 되고 싶다” 

시인은 우리들 그리스도인들이 사모하고 성경이 가르치는 교제의 기적을 절묘한 꽃의 언어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사는 시대를 me-generation의 세대라고 말합니다. 자기 밖에 모르는 이기적인 세대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우리 시대의 인간의 만남은 피상적이고 감각적입니다. 그러나 이런 사람들이 초대 교회 때처럼 예수를 만나고 성령을 체험하면 갑자기 내 앞에 선 사람의 삶의 깊은 내면을 바라보고 서로를 위해 기도를 시작합니다. 그리고 서로 더불어 만나 함께 구원의 하나님을 찬양하고 예배합니다. 그리고 사랑으로 서로를 향한 돌봄의 눈짓을 보내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그들은 인생의 봄의 기적을 경험하게 됩니다. 

제 트윗에 한 목사님이 진정한 봄을 맞이하려면 “하나님을 바라<봄>과 이웃을 돌<봄>”이 있어야 한다는 글을 남겼습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히브리서 본문은 1세기 그리스도인들에 대한 박해가 진행되는 상황에서 예배와 교제를 위한 모임을 폐하지 말고 서로 만나 교제를 지속하라고 권면하고 있는 말씀입니다. 이런 교제가 바로 기적을 낳는 삶의 마당이었기 때문입니다. 자, 그러면 이런 진지한 성도의 교제가 가져다 줄 기적, 무엇일까요?

1. 진지한 교제는 사랑의 기적을 연출합니다.

우리는 통상 사랑하는 사람들과만 진정한 교제를 가질 수 있다는 생각을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사실이 아닙니다. 오히려 진지한 교제를 추구하는 길에서 우리는 참된 사랑에 눈을 뜨고 사랑의 기적을 경험하게 됩니다. 그래서 오늘의 본문은 우리에게 “서로 돌아보아 사랑을 격려하라”고 가르칩니다. 진실은 서로를 돌아보는 진지한 교제 안에서만 참된 사랑이 태어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침된 사랑은 자신을 넘어서서 이웃의 유익을 구하는 것입니다. 

여기 본문에 사용된 사랑의 단어가 희랍어에서 ‘아가페(agape)’입니다. 이것은 이기심을 깨트리고 자신을 이웃 앞에 열어 이웃에게 손을 내미는 희생적인 사랑입니다. 그것은 값싼 감상이 아닌 자신의 이기심을 넘어서려는 교제의 노력을 통해서만 일어날 수 있는 사랑의 기적입니다. 본질적으로 이기적인 인간이 어느 한 순간 자신이 아닌 이웃을 돌보는 모습은 그 자체가 기적이 아닐 수 없습니다. 진지한 교제의 노력만이 이런 사랑의 기적을 연출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예일대와 하바드대에서 신학과 심리학을 강의하다가 어느 날 홀연히 모든 것을 접고 카나다의 장애인 공동체 데이 브레이크에 들어가 중증 장애인을 돌보는 일에 자기 인생의 마지막 10년을 헌신한 사제 헨리 나우웬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그를 아끼던 많은 사람들은 헨리 나우웬이 자신의 재능을 사용하여 이 장래가 촉망되는 세계적인 천재 학생들을 가르치는 기회를 포기하고 이런 소수의 장애인을 돌보는 일에 시간을 허비하고자 하는 그를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특히 아담 아네트(Adam Arnett)라는 한 청년을 돌보는 일에 막대한 시간을 보내는 그를 보면서 심지어 화를 내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과연 그 일이 그렇게도 가치있는 일인가?고 사람들은 묻고 있었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아담을 부담스런 한 사람의 정신 장애자로만 보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헨리 나우웬은 아담안에서 아담을 통하여 살아계신 그리스도를 만날 수 있었다고 말합니다. 그는 이 땅에 오실 때 권세와 힘을 가진자가 아니라, 연약함의 옷을 입고 오신 예수님을 바로 이 아담이라는 한 정신장애자를 통해 만날 수 있었다고 말입니다. 마음의 산란함도 집착도 야망도 없는 이 순결한 청년은 헨리가 돌보아야 할 사람이 아니라, 점진적으로 자기의 친구, 그리고 자기의 스승, 그리고 작은 예수가 되어가고 있었다고 고백합니다. 

마침내 그가 서른 넷의 나이로 죽어갔을 때 헨리 나웬은 그의 시신을 바라보면서 바로 영원전부터 하나님의 특별한 사랑을 받았던 이 아담이 다른 사람이 아닌 바로 헨리 나우웬 사제였던 그러나 여전히 숨겨진 어두운 상처를 가진 자기 자신을 치유하고 온전하게 위한 치유의 사명을 띠고 이 세상에 보냄을 받은 특별한 하나님의 선물로서 그가 자기에게 다가온 것이라는 발견, 그리고 이 거룩한 죽음의 순간, 이 순간은 바로 그가 그 사명을 완수하고 영원으로 돌아간 신비로운 순간이었음을 감사로 고백하고 있습니다. 

나웬의 책 <아담-하나님이 사랑하시는자>의 마지막 페이지 130p의 고백을 직접 읽도록 하겠습니다. “나는 예수님의 삶에 대해 듣고 읽었지만 그분에게 손을 대거나 그 분을 볼 수 없었다. 하지만 나는 아담에게는 손을 댈 수 있었고 그를 보았으며 그의 삶에 다가갔다. 그를 목욕시키고 면도시키고 이를 닦아줄 때 육체적으로 그를 만졌다. 다른 사람들은 그에게 안마를 해주고 체조를 시키고 수영장과 목욕탕에서 곁에 앉아 있으면서 그를 만졌다. 그의 부모도 그를 만졌다. 머레이, 케시, 부르노도 그를 만졌다. 그것이 우리가 한 일이었다. 그를 만진 것! 그리고 예수님에 대한 이야기는 곧 아담에 대한 이야기가 되었다. <손을 대는 자는 다 성함을 얻으리라> 아담에게 손을 댄 모든 사람은 각각 어딘가가 온전해졌다.” 이것이 바로 교제의 기적인 것입니다. 교제가 가져온 사랑의 기적, 교제를 통해 참 사랑에 눈뜨는 기적인 것입니다.


2. 진지한 교제는 선행의 기적을 연출합니다.

오늘의 본문에서 히브리서 기자는 “서로 돌아보아 사랑과 선행을 격려하라”고 가르칩니다. 사랑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구체적인 선행을 강조합니다. 성경은 아무도 자신의 선행으로 구원받을 수 있는 사람은 없다고 가르칩니다. 우리는 오직 십자가에서 우리의 죄를 대신 짊어지고 그 죄 값을 지불하고자 죽으시고 다시 사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서만 구원을 받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다시 우리가 구원받은 증거는 선행의 열매로 나타나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오늘의 한국 기독교가 세상에서 빛이 되지 못하고 손가락질을 받는 가장 중요한 원인이 그 구원의 증거로서의 선행이 우리에게 보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불신자들보다 더 자신의 이익만을 챙기고 더 자신의 탐욕을 추구하는 모습으로 인해 복음의 빛을 가리고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의 증언 앞에 다시 서 보십시오. 엡2:10입니다. “우리는 그의 만드신 바라 그리스도 예수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 이 일은 하나님이 전에 예비하사 우리로 그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라” 

딛2:14을 보십시오. “그가 우리를 대신하여 자신을 주심은 모든 불법에서 우리를 속량하시고 우리를 깨끗하게 하사 선한 일을 열심히 하는 자기 백성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 

초대 교회가 자기 시대에 복음의 거대한 영향력을 행사한 가장 큰 비밀이 바로 이런 교제의 기적을 드러내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사도행전 2장의 마지막 대목에 보면 처음 그리스도인들은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 서로 교제하며 떡을 떼며 오로지 기도하기를 힘썼다고 기록합니다.(행2:42) 

그러나 이런 모임을 위해 기도하고 떡을 나누는 수준에서 그들의 교제가 끝났습니까? 아니지요. 계속되는 증언을 보면 초대 교인들은 도움이 필요한 이웃들을 섬기는 선행을 위해 자신의 재산과 소유를 자발적으로 팔아 이웃들의 필요를 적극적으로 채워주는 진지한 교제의 삶, 코이노니아의 삶을 살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 결과가 무엇이었습니까? 

행2:47입니다. “하나님을 찬미하며 또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으니 주께서 구원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시니라” 이것이 바로 교제의 기적, 곧 교제가 초래한 선행의 기적이었던 것입니다. 진지한 교제는 아주 자연스럽게 이런 선행의 기적을 연출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선행의 카테고리를 이런 외적인 물질적 도움의 차원에만 국한시켜서는 안됩니다. 진정한 성경적 선행의 목표는 이미 아담의 케이스를 통해서 본 것처럼 우리의 교제의 결과로 서로가 서로를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성숙한 인격으로 세워감에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함께 예배하고 우리가 함께 교제한 결과로 어느 날 하나님 앞에서 우리가 더욱 온전해 지고 더 아름다운 모습으로 변화되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런 아름다운 교제의 모습을 시편기자는 절묘하게 찬미하고 있습니다. 

시133:1입니다. “보라 형제들이 연합하여 동거함이 어찌 그리 선하고 아름다운고”

최근 극장가에서 개봉되어 화제가 되고 있는 아카데미 최우수 작품상 킹스스피치(왕의 연설)는 한 인간이 또 다른 인간을 만나 교제하는 가운데 치유와 성숙을 경험하는 교제의 기적을 연출하는 아름다운 명화라고 할만 합니다. 2차대전 직전 영국 왕실의 왕이 된 조지 6세, 그러나 말더듬이로 국민과의 소통과 연설이 불가능했던 그가 괴짜 언어 치료사를 만나 삶의 장애와 아픔을 극복하는 줄거리입니다. 

그의 본명은 알버트, 그는 어린 시절 유모의 학대, 그리고 왼손잡이라고 아버지에게 심한 질책을 받은 것이 원인이 되어 말을 더듬는 장애를 안고 살게 됩니다. 영화의 시작은 대영제국 박람회 개막식에서 그가 리디오 연설을 시도하지만 비참한 실패를 하는 것으로 시작됩니다. 그의 아내 엘리자베스가 여러 가지 노력을 기울여 좋은 의사를 만나 치료를 시도하지만 어떤 시도도 성공하지 못합니다. 이 때 만나게 된 호주에서 온 실패한 연극배우로 독특한 치료법을 사용하는 치료사 라이어넬(로그)은 상대가 왕자인 것을 알고도 서로가 이름을 부르는 평등한 친구의 입장에서 만나야 한다는 것, 그리고 자기와 마음을 열고 함께 시간을 보내야 한다는 것 등의 조건을 내겁니다. 

여러 가지 기복을 겪지만 마침내 그에게 알버트 왕자는 마음을 열고 자기 내면을 드러내 보이기 시작합니다. 라이어넬은 욕하고 싶으면 참지 말고 욕을 하라고(욕하는 동안은 그는 말을 더듬지 않습니다) 노래하고 싶으면 노래하라고 춤을 추고 싶으면 춤을 추라고 치료자는 왕자의 친구가 되어 함께 뒹글며 노래하고 소리를 지르고 춤을 추고 아픔의 과거를 끄집어내며 눈물을 흘립니다. 

그리고 마침내 왕이 되어 히틀러가 통치하던 독일에 맞서 선전포고를 통해 국민을 설득하는 라디오 연설을 성공적으로 마치게 됩니다. 로그는 연설을 시작하는 왕에게 내가 당신 앞에 있을 것이라고~내게 이야기 하듯 하라고~~그는 마치 오케스트라를 지휘하듯 지휘를 하며 그를 격려합니다. 그리고 그는 마침내 해낸 것입니다.

나는 이 영화를 감상하는 내내 내 인생의 치료사가 되어주신 예수님과 예수안에 만난 많은 얼굴들이 생각났습니다. 그들과 울고 웃고 함께 걷고 함께 내 속에 가득했던 고통과 아픔을 나누면서 저는 20대초 꿈을 꺽이고 주저 앉았던 절망의 자리에서 치유받고 일어나 주의 복음을 전하는 사람으로 지난 40년간 쓰임을 받을 수 있었던 그 은혜의 세월이 생각나 많이 울었습니다. 

그 치료사가 우리의 치료를 위해 오셔서 내 인생의 고난의 길을 함께 걸으시던 이 사순절, 이 사순절의 끝에서 내 인생의 부활을 경험하는 기적이 일어나시기를 바랍니다. 예수와 함께함, 그리고 예수의 사람들과 함께 함의 교제의 기적을 경험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이동원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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