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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이 여자의 행한 일도 말하여 저를 기념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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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장 6절-10절: 예수께서 가라사대 가만 두어라 너희가 어찌하여 저를 괴롭게 하느냐 저가 내게 좋은 일을 하였느니라 가난한 자들은 항상 너희와 함께 있으니 아무 때라도 원하는 대로 도울 수 있거니와 나는 너희와 항상 함께 있지 아니하리라 저가 힘을 다하여 내 몸에 향유를 부어 내 장사를 미리 준비하였느니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온 천하에 어디서든지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는 이 여자의 행한 일도 말하여 저를 기념하리라 하시니라 열둘 중에 하나인 가룟유다가 예수를 넘겨주려고 대제사장들에게 가매.


비유적인 이 사건 속에 예수를 믿는 이치가 들어있다. 그런데 이걸 표면만 보면 아무 교회에서나 열심히 충성봉사 하라고 붙일 수가 있다. 열심 충성봉사는 무슨 뜻을 안 후에 나오는 건데 그 안에 들어있는 뜻은 모르고 물질 충성봉사로만 붙이면 그 안의 것은 까막눈이 된다. 사람을 아는 것도 사람의 속 중심을 정신을 소원 목적을 알아야지 어떻게 껍데기만 보고 알 수가 있느냐? 사람을 그렇게 사귀었다가는 큰일 난다. 그렇게 사귀었다가는 평생을 사기당할 수 있다.


‘어디든지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는 이 여자의 행한 일도 말하여 저를 기념하리라.’ 그러니까 주님이 가시는 곳에는 이 여자의 행한 일도 계속 따른다. 이걸 그대로 갖다가 그 정신을 자기에게 붙여서 ‘아, 그 성도 참 본받을 만하다’ 이렇게 나가는 소문을 무시하면 안 된다. 예수 믿는 사람이 ‘아, 그 성도 냄새 나서 안 된다’ 이런 소문이 나서는 안 된다. 예수 믿는 사람이 인격적 도덕성적 언행심사적 모든 면에서 ‘에이, 그 사람 못 쓴다. 교회 안에 물 다 들여 놓는다’ 하게 되면 그런 재앙이 어디 있느냐?


‘복음이 전파되는 곳은.’ 다른 말로 하면 ‘교회가 세워지는 곳에서는’으로 볼 수도 있다. 그리고 말씀의 이치가 전해지는 곳에서는 자기는 잘 모를지라도 하나님께서 보실 때는 아무개 성도의 신앙정신도 거기에 들어가는 거다. 이게 인격의 세계라. 인간창조의 목적에서는 그냥 자기 욕심대로 생각대로 기분대로 사는 게 아니다.


이 여자가 예수를 믿고 복음으로 인해서 예수님께 나왔다면 그 후에 이 여자가 깡패 같은 자를 잡고 시집갈까? 복음 안에서 보는 눈이 있어야 한다. 밤에는 몸 팔고 낮에는 물 팔고 하던 기생 라합이 누구의 아내가 되었느냐? 복음을 받아들일 때 비상수단을 써서 자기의 생명을 걸었다. 그 결과로 이 여자는 주님의 족보, 하나님의 족보, 하늘의 족보에 올려져 있다.


그래서 예수 믿는 것에는 자기 할 탓에 있다.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하나님 앞으로 적중으로 돌리는 거다. 세상에서 아무리 이름이 나도 하나님이 알아줘야 한다. 인간 자기를 만드신 이가 누구냐? 바로 하나님이다. 그러면 하나님의 눈에 잘 보여야 한다. 인간 눈에 잘 보이려면 외모 모양 껍데기를 잘 꾸미면 된다. 하나님의 눈에 잘 보이려면 내적인 심령, 영모의 미모성을 잘 닦아야 한다. 사람 보는 눈을 바로 열어야 한다.


자기 멋대로 기준을 삼아 살면 이건 선악과를 따먹은 거고, 안 믿어도 다 그렇게 사는, 거고 영이 죽은 자가 하는 거다. 우리는 영이 살았다. 영이 산 우리는 이룰구원 차원에서 애굽성의 성질, 애굽성의 취미, 애굽성의 지식 모든 걸 예수화로 바꾸는 게 기독자 네가 살아야 할 창조의 목적의 길이다.


자기의 존재목적의 가치성, 자기 삶의 가치성을 딴 데서 찾지 말아라. 예수 잘 믿으면 세상 자기의 생계활동을 지혜롭게 하고 적극적으로 하고 돌격적으로 하고 전진적으로 하고 개척적으로 하게 된다. 안 그러면 사람이 젊어도 늙었다. 이런 사람은 하나님의 집에서 쓸모가 없다.


복음이 전파되는 곳은 성경이 있는 곳이다. 성경을 볼 때 ‘아, 다윗이 어쩌면 내 마음과 같을까’ 그렇게 보이는 건지, 아니면 아간을 볼 때 ‘어떻게 내 마음과 같은가’ 그렇게 보이는 건지, 아니면 가룟유다를 볼 때 ‘어떻게 내 마음과 같은가’ 그렇게 보이는 건지? 성경을 보면서 자기가 보이는 거다. 안 보인다는 건 남만 보는 것이기 때문에 이건 큰 실수다.


하나님의 성품으로 온전케 되는 것은, 하나님의 성품의 사람으로 인격의 사람으로 고차원적으로 만들어지는 것은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요, 예수는 구원,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진리본질 본성 본분을 내가 갖는 것이다. 누가 그렇게 살았느냐? 예수님이 그렇게 사셨다. 그게 하나님의 사람이요, 그게 진리의 사람이요, 그게 구원의 사람이다. 그런 교회, 그런 교훈이 있는 곳에 이룰구원이 있다.


구약에 ‘어디로 갔던지 예배를 드리려면 예루살렘 성전으로 와라’ 하는 것은 ‘그 구원이 있는 곳으로 와라. 구원설계가 있는 곳으로 와서 올려라’ 하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 입장에서는 교회를 찾아도 분명한 이치가 있는 곳으로 가야 하는 것이다. 없다면 아무 데나 못 간다.


예수 믿는 사람이 자기 주관적 타락성적 기준적 지식을 버리지 못하면 살기도 힘들고, 바로 믿는 것도 힘들고, 사람을 사귀는 것도 힘들다. 문제가 크다. 믿는 사람은 소위 말하면 일반적 도덕성은 올라서야 한다. 예수 믿는 사람이 일반 도덕성도 안 되고 공중도덕도 못 지키고 하면 안 된다. 어디를 가든 창조성을 가진 사람이 돼야 한다. 일상생활에서도 창조성을 가진 사람이 돼야 한다.


이룰구원이 있는 교회는 어디에서 건 예수님께 향유를 부은 아름다운 이 여자를 말하게 된다. 복음에 자기 혼신을 다한 여자. 이걸 아무 교회나 가서 집문서 내놓고 결혼도 안 하고 충성봉사 하는 그걸 말하는 게 아니다.


자기의 혼신을 다한 여자, 자기의 전 인격을 다한 여자, 지극히 값진 나드 향유를 예수님께 부어드린 여자, 생명운동 진리운동 천국복음 운동에 쓰임이 된 이 여자의 아름다운 신행. 일반사람들은 이걸 아름답다고 못 본다. 돈을 움쳐가는 가룟유다도 이걸 아름답다고 보지 못한다. 가룟유다는 그의 속에 든 정신과 마음 돌아가는 것이 ‘세상의 가난한 자들에게 그걸 팔아서 주지’ 한다. 그런데 예수님은 돈을 훔쳐가려고 그 말을 한다고 했다.


가룟유다의 말인즉 천국복음 진리운동에 혼신을 바치고 있는 사람에게 ‘그것을 팔아라’ 하는 것이다. 어디에? 세상에다. 그 말의 사상이 그렇게 들어가는 거다. 그러니까 복음사상은 없고 세상에 다 팔아라. 그러면 내가 그런 정신으로 살면 누가 가져가느냐? 가룟유다라는 도둑에게 걸린다. 진리이치의 복음이 없는 교회에서 충성봉사는 누가 가져가느냐? 성전 안에서 장사하는 짐승을 파는 제사장이 다 가져간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이 강도들아’ 한 거다.


외부에서는 이걸 모른다. 뭐가 강도의 정신이고 뭐가 강도의 사상인지를 모른다. 왜? 성전 안에서 벌어지는 일이기 때문에 그렇다. 그리고 일반 불신세상은 교훈의 이치를 모르기 때문에 도둑을 못 잡는 거다. 왜? 자기들도 도둑이니까. 질이 그렇다. 이들은 영은 죽어있고 소원 목적은 세상 물질성으로 들어가 있으니 남을 밟고서라도 어찌하던 올라가고자 하는 게 타락된 세상이다. 이게 도둑이고 강도다. 하나님 앞에서 볼 때 질이 그렇다는 것이다. 선악과를 먹고 다 죽어서이다. 그러니 세상에 사는 것이, 먹고 마시고 쓰는 게 전부가 세상 소비성으로 들어있다.


우리가 이걸 나쁘다고만 보지 말고 이치로 보면 젊은 애들이 부모형제를 죽이고 그 돈을 뺏어다 유흥적으로 쓰는 걸 보는데, 유흥적으로 사는 사람은 그 어떤 사람의 노력봉사를 죽이고 들어간다는 이치가 들어있는 것이다. 자기의 언행심사와 노력과 물질을 살리는 데로 써야지 왜 죽이는 데로 쓰느냐? 먼저 자기가 살아나야 한다.


돈을 많이 들여서 자식을 공부시켰더니 그 자식이 믿는 정신은 안 들고 세상정신이 들면 누가 부모의 모든 노력 봉사 건강 시간 부모의 투자성을 다 사망으로 빨아먹은 것이냐?


성경에서 말하는 창조의 목적은 선악과 따먹은 세상에서 되어지는 그런 식이 아니다. 주 안에서 다 살리는 거다. 모든 면이 다 살아나야 한다. 죽어서는 안 된다. 말 한 마디라도 살아나는 것. 하나님의 복음의 정신에서 다 살아나는 것. 책망을 해도 살아나는 것, 매를 들어서 때려도 살아나는 것. 어디서 이걸 보느냐? 성경이 아니면 못 보는 거다.


이 여자의 아름다운 신행(信行)은 지구 구석구석 성경이 있는 곳이면 말을 하게 된다. 그런데 이 여자를 곧 따라서 가룟유다가 나온다. 말하자면 자기가 그 여자라고 한다면 곧 따라서 자기 속에서 가룟유다가 튀어나올 수도 있다는 것이다. 이걸 개체적으로 말하자면 지금까지 하나님을 위해서 했는데 곧 따라서 나오는 게 ‘아이, 그래도’ 하는 게 있는 거다. 한 쪽에서는 ‘하나님의 뜻을 위해서’ 라는 마음이 있었는데 또 한 쪽에서는 세상 이해타산이 붙는다. 그 질을 잘 알아야 한다. 교회 안에서 물질사상의 개념으로 보지 말고 자기 속에서 이런 마음이 있었는데 또 다른 마음이 튀어나오는 것이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어떤 마음이 툭툭 튀어 나오느냐?


자기의 노력봉사가 죽어가는 건지, 아니면 자꾸 사는 쪽으로 들어가 있는 건지? 혈루병 든 여자가 온갖 수단 방법을 다 썼는데도 계속 피가 빠진다는 건 ‘그냥 피가 빠져 나간다’가 아니고 생명이 빠진다는 것이다. 생명이 빠지는 것을 피가 흐르는 혈루증으로 표현을 하는 거다. 그러니까 현재 자기가 육신적으로 혈루병이 안 걸렸다고 해도 자기의 영적 생명이 어디로 빠지는지를 생각을 하라는 것이다.


가룟유다는 ‘어떻게 하면 예수님을 감쪽같이 팔아먹을까?’ 하고 있다. 여자와 가룟유다는 완전히 대조적이다. 우리는 진리이치로, 영적 이룰구원 면으로 적중성으로 들어가는 신앙이지만 주위 교회가 소원 목적이 세상과 세상 것을 구하는 것이라면 우리의 신앙과는 너무나 대조적이다. 천국의 성질로, 천국의 지혜지식으로, 신적 도덕성으로 살고자 하는 주님의 가르침을 따르는 교회와, 세상 인본주의 교회, 세상을 가르치는 교회와는 질적으로 완전히 대조적이다. 그냥 일반개념으로 말하는 ‘옳다. 그르다’ 그게 아니라 질적으로 보는 거다. 먼저 하나님의 본질을 모르면 그만큼 모르는 거다. 그러니 알아야 한다.


여자를 말하게 되면 또한 자동적으로 가룟유다를 말하게 된다. 그러니까 대조를 해 보라는 것이다. 오늘날 예수 믿는 나는 수십 년 또는 수년의 세월이 흐르는 동안 예수님께 기념될만한 게 뭐가 있느냐? 외국에 신혼여행을 가면 사진을 찍어 와서 그 사진을 기념으로 생각한다. 그런 기념은 있느냐? 사도바울은 하나님 앞에 기념될만한 게 많다.


‘아, 그 때 내가 하나님을 위해 목숨을 내대고 참 잘 했다’ 하는 게 있다면 살아갈수록 그게 하나님 앞에서 새록새록 생각이 난다. 그런데 우리는 살아갈수록 ‘아이고, 그 때 내가 참 잘못했구나. 죄로구나. 바로 된 게 하나도 없구나’ 이런 게 느껴지느냐? 이게 많이 느껴질수록 신앙이 좋은 사람이다. 살아 있으니까 아픈 줄 아는 거다. 새 살이 돋으니 아픈 줄을 아는 거다.


신앙 믿음이 바로 들어가면 남을 견주어 자기를 남과 비교해서 생각하는 게 아니라 하나님 앞에 자기를 세워놓고 마음 아파라 하는 거다. 그래야 그게 회개가 바로 되는 거다. 충성봉사 한 그런 기준을 가지고는 회개를 못하는 거다. 안 되는 거다. 회개에는 물질성적인 것이 안 들어있다. ‘자기의 사고방식이 바로 됐나’ 하는 그 본질을 가지고 생각하는 거다. 그걸 바로 잡으면 그 다음 것은 바로 돼 들어간다. 무슨 문제든지 원리를 모르면 안 풀린다.


세월은 흘렀어도 ‘아, 그 때 내가 그랬으면 안 되는 건데’ 하며 돌아올 수 없는 세월을 앉고 가슴에 눈물을 흘리며 회개를 했으면 회개한 그 증거는 다른 사람에게 바로 돼 나와야 하는데 안 그렇다면 회개를 한 증거가 없는 거다. 회개를 했으면 앞으로 나가야 한다. 모든 인생은 가만 서 있지를 않다. 사망이던 생명이던 앞으로 나가고 있다.


나는 성도들의 가슴 속에 아름답게 심어놓은 게 있느냐? 어느 교회에 가던 ‘아, 그 사람 말도 말라. 우리 교회에서도 문제를 일으키고, 어느 교회에서도 문제를 일으키고, 가는 곳마다 문제를 일으키고’ 이러면 안 된다. 본문의 여자와 가룟유다를 비교를 해서 두 사람의 정신을 아는 내 입장에서 ‘나는 어떤 사람일까’ 하고 생각해야 한다.


늘 인상을 쓰고, 얼음 장사처럼 차갑고 웃지도 않는 사람, 눈 흘기고 아무나 잡고 싸우려고 하는 사람, 먹을 것만 보면 눈치도 없이 엄청나게 먹는 사람, 남에게 주지도 않고 인색하고 남의 흉을 잘 보는 사람, 여자들과 히히닥거리면서 문란한 행동을 하다가 쫓겨난 사람, 남의 돈을 떼먹고 전도 문을 막은 사람. 교회 안에 별의 별 사람이 다 있다.


어느 교회로 옮겨가도 싸우는 통에 정착이 안 되고, 이 교회 저 교회 흉만 보고, 그런데 자기는 못 고치고, 힘을 합쳐서 교회 일을 하자고 하면 변명을 붙여서 쏙 빠지는 사람, 예배시간은 다 됐는데 나무늘보 같은 사람도 있다. 예배시간에 무엇을 하는지 부스럭 거리고. 뒤를 처다 보며 예배 못 드리게 마귀 짓을 하는 사람, 교회에서 무슨 문제를 일으켜서 쫓겨 나와서 다른 교회에 가서는 자기가 사도바울인 것처럼 말을 한다. 그렇게 여러 교회에 돌아다녀서 들은 건 많아서 말은 많다. 교회 안에 별이 별 사람이 다 있다.


나는 교회에 얼마나 나쁜 선례를 남기며 교회에 다니는지? 자기가 알던 모르던, 좋은 일이던 나쁜 일이던 자기 뒤로 그 징표가 계속 따라다닌다. 남은 몰라도 아는 자기 입장에서 계속 따라붙는다. 일부러 알려고 안 해도 떠도는 소문이 있는지라 이런 사람이 자기 교회에 오면 경계를 해야 하고, 그 사람이 회개하고 낮아지기 전에는 추켜세우지 말고 하나님 앞에서 공의로 대해야 한다. 영의 눈을 가지고 보면 이런 사람은 지식적으로 망한다. 인격적으로 망한다.


다윗이 죽기 전에 아들 솔로몬에게 자기가 죽은 후에 처치하라는 인물들이 있었는데 이건 우리의 이룰구원의 도리를 말하는 것이요,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서 그렇게 한 것이다. 그런 면을 알아야 한다.


우리 모두는 선행이던 의행이던 악행이던 하나님 앞에 그대로 따라 붙는다. 그러니 우리가 진리이치의 사람이 되는 면으로 늘 생각을 바로 가져야 한다. 인간적으로 말하면 사람의 마음이 좁아서는 안 된다. 또 넓기는 넓은데 지혜가 없으면 이건 이용물이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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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도가 인격자이신 하나님의 가장 깊은 심원인 하나님의 의지세계에서부터 발로된 인간구원의 의사를 좇아서 신앙을 해야만이 기독교 본질에서 이탈하지 않고 가장 효율적 적중적으로 하나님의 온전한 성품을 덧입을 수 있고, 성도 각자가 이 땅에서 이렇게 덧입은 하나님의 성품의 양에 따라 장차 천국에서의 누림에 차등이 생기게 됨을 성경을 통해 알 수가 있습니다.


김경형목사님께서 교역자 및 신학생을 대상으로 20여년 동안 매 주 정례적으로 진행하는 신학 및 성경연구 모임을 통해 하나님의 의지세계에서 인간구원을 설정하게 된 원인과 동기와 목적을 깨닫고 하나님의 본질의 신앙으로 나가는 주의 종들이 누룩처럼 퍼져나가고 있습니다.

참석하실 분은 031-207-5159, 또는 010-8886-5159로 문의해 주세요.(평신도도 참석 가능합니다)

http://cafe.daum.net/909k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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