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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혹 그는 공경하리라 (눅 19:45-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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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 그는 공경하리라 (눅 19:45-20:18)


'슈퍼스타 예수 그리스도'(Jesus Christ Superstar)라는 뮤지컬은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라 그저 '슈퍼스타' 즉 당대에 사람들의 인기를 한 몸에 모은 '유명인사' 정도로 취급하면서 그 생애를 록음악(rock music)으로 엮어 놓은 것인데, 신앙적으로 볼 때에는 매우 불경한 작품입니다.
이 뮤지컬에서는 가룟 유다가 전체의 줄거리를 이어가는 데 있어서 주요한 역할을 합니다.
  
즉 가룟 유다는 예수님의 언행을 곁에서 가까이 관찰하면서 자기의 판단과 어긋나는 예수님의 말씀이나 자기가 보기에는 이해가 되지 않는 예수님의 행동에 대하여 부단히 의문을 제기하면서 과감하게 도전하는 인물로 나오는 것입니다.
'슈퍼스타 예수 그리스도'에서 가룟 유다를 통하여 제기되는 가장 근본적인 질문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 당신은 과연 누구인가?'라는 것입니다.
  
그 뮤지컬의 제일 마지막에 피날레로 나오는 유명한 곡 역시 "Jesus Christ, superstar, who are you, what have you sacrificed? Oh, tell me."(슈퍼스타 예수여, 당신은 누구인가, 당신은 무엇을 희생했는가? 좀 대답해 주시오.)라는 가사의 반복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가룟 유다는 예수님을 따르기 시작하던 시절부터 예수님께서 끝내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는 순간까지 바로 이 질문을 계속 던지면서 스스로 고개를 흔들고 고민하고 갈등하는 존재로 묘사됩니다.
  
그리고 그 뮤지컬 속에서의 예수님은 이 질문에 대하여 갸룟 유다뿐 아니라 다른 제자들과 헤롯 왕과 빌라도 총독에 이르기까지 아무에게도 명백한 대답을 끝까지 해 주지 않으시는 것처럼 얼버무려지고 있는 것입니다.

뮤지컬 '슈퍼스타 예수 그리스도'는 사실상 오늘날 대부분의 사람들이 예수님에 대하여 가지고 있는 자세를 그대로 반영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예수님, 당신이라는 사람은 누구요? 도대체 어떤 사람이오?"라고 계속 질문하면서, 마치 예수님께로부터는 아무 대답도 듣지 못하고 있는 양 여기고 있습니다.
인류 역사의 중심에 등장하셨던 예수님을 대하면서 그저 '매우 비범한 위인이면서도 자신이 누구인지 묻는 질문에 대해서는 어물쩍 넘김으로써 자신을 아무도 확실히 이해할 수 없는 신비로운 존재로 남겨 놓은 인물' 정도로 생각하는 것이 오늘날의 소위 지식인들의 반응인 것입니다.

예수님 당시에도 그와 똑같은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바로 유대의 '제사장, 서기관, 장로'들이 예수님의 면전에서 "당신은 도대체 누구요?"라고 따지듯이 질문했던 것이었습니다. 
그에 대한 예수님의 대답은 좀 특이했습니다.
이제 예수님의 수난과 부활의 계절을 맞이하게 된 오늘 주일에 저와 여러분은 '예수님은 누구신가?'라는 질문이 우리 각자에게 과연 어떤 중대한 의미를 가지고 있으며 어떤 결정적인 영향력을 끼치게 되는지를 함께 상고해 보고자 합니다.

1. 각 사람은 '예수님이 누구신가?'라고 묻기만 할 것이 아니라 이제 그 질문에 대하여 '자신의 대답을 양심으로 고백해야' 합니다. 

19장 45절로부터 20장 8절까지에 기록하기를 "45성전에 들어가사 장사하는 자들을 내어 쫓으시며 46저희에게 이르시되 기록된바 내 집은 기도하는 집이 되리라 하였거늘 너희는 강도의 굴혈을 만들었도다 하시니라 47예수께서 날마다 성전에서 가르치시니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과 백성의 두목들이 그를 죽이려고 꾀하되 48백성이 다 그에게 귀를 기울여 들으므로 어찌할 방침을 찾지 못하였더라 1하루는 예수께서 성전에서 백성을 가르치시며 복음을 전하실새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장로들과 함께 가까이 와서 2말하여 가로되 당신이 무슨 권세로 이런 일을 하는지 이 권세를 준 이가 누구인지 우리에게 말하라 3대답하여 가라사대 나도 한 말을 너희에게 물으리니 내게 말하라 

4요한의 세례가 하늘로서냐 사람에게로서냐 5저희가 서로 의논하여 가로되 만일 하늘로서라 하면 어찌하여 저를 믿지 아니하였느냐 할 것이요 6만일 사람에게로서라 하면 백성이 요한을 선지자로 인정하니 저희가 다 우리를 돌로 칠 것이라 하고 7대답하되 어디로서인지 알지 못하노라 하니 8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도 무슨 권세로 이런 일을 하는지 너희에게 이르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고 했습니다.

수난주간이 시작되던 첫날 즉 오늘날의 종려주일에 '나귀 새끼를 타신 겸손한 왕'의 모습으로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예수님께서는 제일 먼저 성전을 찾아가셨습니다.
하지만 당시 예배보다는 장삿속만 판을 치고 있던 예루살렘 성전은 예수님께서 보시기에는 더 이상 "기도하는 집"이 아니라 "강도의 굴혈"이나 다름없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즉시 그 장사꾼들을 내쫓으시고 '아버지의 집' 즉 성부 하나님의 성전을 정화시키셨습니다.
그리고는 "날마다 성전에서 가르치시는" 일과를 그 마지막 주간 내내 반복하셨던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이와 같은 행동에 대하여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 즉 유대의 종교지도자들과 "백성의 두목들" 즉 정치지도자들이 제일 먼저 민감하게 반응하면서 신경의 촉각을 곤두세웠습니다.

어찌하든지 예수님을 "죽이려고 꾀하면서" 무슨 책잡을 것이 없나 하고 눈에 불을 켜고 있던 그들이 "하루는" 아예 일종의 진상조사위원을 구성해서 직접 예수님을 찾아왔습니다.
그리고는 "당신이 무슨 권세로 이런 일을 하는지, 이 권세를 준 이가 누구인지 우리에게 말하라"고 기세도 당당하게 예수님께 질문해 왔습니다.
  
이것은 앞서 예수님께서 성전에서 장사꾼들을 내쫓았던 것과 또한 매일 성전에서 백성들을 가르치시는 것을 두고 과연 무슨 자격이나 권위로 그런 일을 했느냐고 따진 말이었습니다.
바꾸어 말하자면 "예수 당신은 도대체 누구이기에 이런 일들을 제멋대로 하고 있는 거요?"라는 추궁이었던 것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질문에 직접 대답하시는 대신에 "나도 너희에게 한 가지 질문을 해 보겠으니 먼저 대답해 보라."고 하시면서, "요한의 세례가 하늘로서냐 사람에게로서냐"라고 질문을 던지셨습니다.
이 말씀은 "요한이 사람들에게 세례를 줄 때에 신적인 권위를 가지고 행한 것이냐, 아니면 인간적인 권위 즉 자기 혼자서 마음대로 행한 것이냐?"라는 질문이었습니다.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과 장로들은 예수님의 그 질문에 선뜻 대답하지 않고 "서로 의논했다"고 했습니다.
간단한 한마디로 대답할 수 있는 문제에 대해서도 각자의 마음에 있는 대로 솔직히 말하지 못하고 함께 입을 맞추기 위해서 사전토의를 하는 그들의 모습에서 치밀한 정치꾼의 면모를 다시 한 번 볼 수 있습니다.
하여튼 그들이 서로 의논해 보니 그 질문에 대한 대답이 진퇴양난임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요한이 세례 줄 권위를 하늘로서 부여받았다.'라고 대답하면 '그러면 왜 너희들은 세례 요한을 믿지 않았느냐?'라는 질문을 받을 때 대답할 말이 없을 것이고, 그렇다고 '그것은 사람에게서 난 것이다.'라고 대답하면 세례요한을 선지자로 인정하고 있는 백성들로부터 돌에 맞아 죽을 것이기 때문이었습니다.
물론 그들의 진심은 요한의 세례가 신적 권위가 있는 것으로 믿지 않았던 것이 틀림없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솔직하게 양심적인 대답을 하는 대신에 '어떻게 대답하는 것이 내 입장과 신변에 유리할까?'라고 계산만 했고, 그 결과 그 질문에 대하여 어느 쪽으로도 대답할 수 없게 되었던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별수 없이 그저 "어디로서인지 알지 못하노라"고 대답을 회피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비록 성경에 기록되어 있지는 않지만, 예수님께서는 그 말을 들으시고 아마 쓴웃음을 지으셨을 것입니다.
그리고는 "그렇다면 나도 무슨 권세로 이런 일을 하는지 너희에게 이르지 아니하리라"고 선언하셨습니다.
왜 예수님께서는 '나는 성부 하나님께로부터 이런 일을 할 수 있는 권위를 받았다.'라고 간단히 대답해 주지 않으시고 그들 앞에서 '노코멘트'의 입장을 취하셨던 것이었습니까?
왜냐하면 자기 양심에 따라 쉽게 대답할 수 있는 질문에 대해서도 솔직하게 말하지 못하는 그런 사람들에게는, 예수님 역시 자신에 대하여 일일이 설명해 줄 가치조차 느끼지 않으셨기 때문이었습니다.

사실상 예수님께서는 평소에 가르치신 말씀과 또한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는 행동을 통하여 당신의 '성자 하나님' 되심과 '메시야의 자격'으로 이 땅에 오셨음을 이미 만천하에 공포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요한의 세례가 하늘로서냐 사람에게로서냐?'라는 질문과 마찬가지로 '예수님이 무슨 권세로 성전을 정화하고 성전에서 가르치시는가?'라는 문제 역시 유대인들이 예수님께 '물을 질문'이 아니라 그들 자신이 '대답해야만 할 질문'이었습니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께서 정말 '성자 하나님의 신적(神的) 권위'로써 그런 일을 하신 것인지 아니면 그저 '사람 가운데 좀 뛰어난 위인(偉人)'으로서 행하신 것인지에 대하여 모든 사람은 더 이상 '따지는 질문'을 던질 위치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이제 각자 스스로의 양심에 따라 대답을 해야만 할 처지에 서게 된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역시 대부분의 사람들은 여전히 옛날 유대 종교지도자들과 같은 자세만 취하고들 있습니다.
'예수님이 누구신가?'라는 질문을 자신의 양심 속에서 직접 대답해 보려 하지 않고 항상 간접적으로 둘러가려고만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신가?'라는 질문은 그저 신학자들끼리 머리를 맞대고 토론해야 할 주제라고 생각합니다.
  
'예수님께서 정말 죄인의 구세주로 오신 분이신가?'라는 질문은 오직 설교 시간에 목사가 알아서 교인들에게 더 잘 설명해 주어야 할 문제인줄로만 알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과연 신이신가 아니면 사람인가?'라는 질문은 예수님을 역사적으로 고찰하는 학자들이나 예술적으로 묘사하는 작가들이 이 모양 저 모양으로 연구하고 사색할 때나 쓰이는 질문으로만 여기고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예수님이 누구신가?'라는 질문이야말로 우리 각자가 평생에 꼭 한 번은 스스로 정확하게 대답해야만 하는 절대적이고도 필연적인 질문입니다.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은 그저 교회에 다니는 신자로서의 입장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나오는 것이 되어서는 아니 됩니다.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은 명색이 목사요 장로요 집사라는 체면을 세우기 위한 계산에서 나오는 것이 되어서는 아니 됩니다.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은 그저 '물세례'를 받기 위해서 잠시 입으로만 한 번 '아멘'하고 끝나는 것이 되어서는 결코 아니 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 질문은 이제 예수님께서 우리 각자에게 '반문(反問)'하시는 질문이기 때문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예수님을 가리켜 '더러는 선지자, 더러는 엘리야'라고 하면서 여전히 설왕설래하고 있는 이 시대에도 예수님께서는 친히 저와 여러분을 향하여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라고 단도직입적으로 묻고 계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누구신가? 이 분이 정말 하나님의 권위를 가지고 이 땅에 오신 구세주이신가?'라는 질문은, 더 이상 '남에게 물어볼 질문'이 아니라 오로지 각자의 양심을 따라서 자신의 인격을 통하여 '스스로 대답해야만 할 인생 최대의 질문'임을 깨닫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2. 각 사람은 '예수님이 누구신가?'라는 질문에 대하여 어떻게 대답하느냐에 따라서 장차 '구원과 심판으로 나누어지게' 됩니다. 

20장 9절 이하 18절까지에 기록하기를 "9이 비유로 백성에게 말씀하시되 한 사람이 포도원을 만들어 농부들에게 세로 주고 타국에 가서 오래 있다가 10때가 이르매 포도원 소출 얼마를 바치게 하려고 한 종을 농부들에게 보내니 농부들이 종을 심히 때리고 거저 보내었거늘 11다시 다른 종을 보내니 그도 심히 때리고 능욕하고 거저 보내었거늘 

12다시 세 번째 종을 보내니 이도 상하게 하고 내어 쫓은지라 13포도원 주인이 가로되 어찌할꼬 내 사랑하는 아들을 보내리니 저희가 혹 그는 공경하리라 하였더니 14농부들이 그를 보고 서로 의논하여 가로되 이는 상속자니 죽이고 그 유업을 우리의 것으로 만들자 하고 15포도원 밖에 내어쫓아 죽였느니라 그런즉 포도원 주인이 이 사람들을 어떻게 하겠느뇨 16와서 그 농부들을 진멸하고 포도원을 다른 사람들에게 주리라 하시니 사람들이 듣고 가로되 그렇게 되지 말아지이다 하거늘 17저희를 보시며 가라사대 그러면 기록된바 건축자들의 버린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느니라 함이 어찜이뇨 18무릇 이 돌 위에 떨어지는 자는 깨어지겠고 이 돌이 사람 위에 떨어지면 저를 가루로 만들어 흩으리라 하시니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의 비유는 어떤 주인이 "포도원을 만들어 농부들에게 세로 주고 타국에 가서 오래 있다가 때가 이르매 포도원 소출 얼마를 바치게 하려고 한 종을 농부들에게 보내었다"고 시작되고 있습니다. 보통 포도원은 새로 만들고 나서 몇 년이 지나야 수확을 할 수 있었는데, 그래서 여기서도 "때가 이르매" 즉 충분히 수확을 할 수 있을 만한 때가 되었을 때에 그 세를 받기 위하여 한 종을 보내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그 농부들은 세를 주기는커녕 그 종을 때리고 빈손으로 돌려보냈습니다.
주인이 둘째, 셋째 종을 계속 파견했지만 오히려 갈수록 그 농부들의 횡포는 더욱 심해질 따름이었습니다.
농부들의 그런 행위는 도저히 일말의 변명의 여지도 없는 악행이었고 그야말로 천인공노할 일이었던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이 주인은 보통 사람으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인내심과 자비심을 발휘했습니다.
그 포도원 주인은 세 번째 종까지 그런 지경을 당하고 돌아오자 "어찌할꼬"하고 고민에 빠졌던 것입니다.
보통 주인 같으면 고민이고 뭐고 할 것이 있었겠습니까? 
  
아예 첫 번째 종이 그처럼 당하고 돌아왔을 때 이미 더 이상 볼 것도 없이 그 농부들을 결딴내었을 것임에 틀림없습니다.
하지만 이 주인은 그처럼 악하고 반역적인 농부들을 대하면서도 '어찌하면 이 농부들을 바로 잡아서 자기네들의 마땅한 본분을 지키게 할 수 있을까?'하고 고민을 했으니, 정말 보통 자비로운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그리고 그 주인은 그야말로 기상천외한 생각을 해냈습니다.
"내 사랑하는 아들을 보내리니 저희가 혹 그는 공경하리라"라고, 즉 '저 악한 농부들도 설마 내 아들은 함부로 대하지 않겠지.'라고 생각하고는 실제로 자기 아들을 보냈던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예상외로 그 농부들의 악함은 끝이 없었습니다.
그들은 주인의 아들을 보자 "이 사람은 주인의 상속자이니 죽이고 이 포도원을 아예 우리 것으로 만들자."하고는 그를 포도원 밖에 끌어내어 죽였던 것이었습니다.
당시 유대 사회에는 토지소유권을 증명하는 땅문서가 오늘날처럼 명백하지 않았던 까닭에, 임자가 불분명한 땅에서 누구든지 3년 이상 농사를 짓고 살면 바로 그 사람이 그 땅의 소유주로 인정되었었습니다.
  
그래서 그 농부들은 주인의 아들을 보게 되자 주인이 포도원의 소유권을 그에게 상속해 준 것으로 생각하고 이제 그 아들만 죽여 버리면 그 포도원 자체를 완전히 자기네 것으로 만들 수 있다고 계산했던 것이었습니다.
그 아들을 죽일 때에 일부러 "포도원 밖"에서 죽인 이유도, 만약 포도원 안에서 살해할 경우 그 피로 인하여 포도원이 '부정'하게 되면 거기서 생산될 포도의 상품 가치와 포도원의 부동산 가치가 떨어지게 될 것을 염두에 두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이 비유에 나타나는 "포도원"은 실제로 구약에서 '이스라엘'을 가리킬 때 자주 쓰였던 것이므로 그 포도원의 "농부들"은 바로 유대의 종교지도자들을 가리키고 있다는 사실은 누구의 눈에도 너무나 명백합니다.
그들은 이미 하나님께서 '과거에 파송하셨던 종들' 즉 '구약의 선지자'들을 핍박했습니다.
그뿐 아니라 이제는 '주인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마저 예루살렘 성 밖에서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고 말 것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비유로 말씀하신 후에 "그런즉 포도원 주인이 이 사람들을 어떻게 하겠느뇨"라고 설의법적으로 물으셨습니다.
그 대답은 너무나 당연했습니다.
"와서 그 농부들을 진멸하고 포도원을 다른 사람에게 주리라"는 말씀대로, 그 유대의 악한 종교지도자들을 징벌하고 포도원은 '다른 사람' 즉 이방인들에게 줄 것이라는 이 주인의 작정과 행위는 누구의 눈에도 너무나도 당연한 처사가 아니었겠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의 악한 마음은 여기서도 또 한 번 고개를 쳐들게 됩니다.
예수님의 그런 말씀을 듣고 있던 사람들이 무어라고 했습니까?
"그렇게 되지 말아지이다"라고 했습니다.
그 유대인들은 자신이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지 않는 것이 얼마나 큰 죄인지, 얼마나 심판받아 마땅한 악인지는 생각지도 않고, 그저 선민으로 자부하던 자기네 유대인들은 망하고 오히려 이방인에게 구원의 길이 열리게 된다는 소리만 듣기 싫어했던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건축자들의 버린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는" 일이 반드시 성취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즉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거부하고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지만, 그 예수님이 인류 구원 역사의 '머릿돌'이 되는 일은 꼭 성취되고야 말 것이라는 뜻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머릿돌'은 바로 각 사람을 '구원'과 '멸망'으로 갈라놓는 기준이 될 것이라고 천명하셨던 것이었습니다.

"무릇 이 돌 위에 떨어지는 자는 깨어지겠고"라는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의 '신적 권위'에 대항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성자 하나님 되심'을 거부하고 맞서서 덤비려 하는 자들은 한 명도 예외가 없이 완전한 멸망에 이르게 될 것이라는 뜻입니다.
그것은 마치 바위에 계란이 덤벼 부딪치면 오로지 계란만 박살이 날 수밖에 없는 것과 꼭 마찬가지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뿐 아니라 예수님께서는 한걸음 더 나아가서 "이 돌이 사람 위에 떨어지면 저를 가루로 만들어 흩으리라"고 하셨습니다.
마지막 날 머릿돌 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친히 심판하실 때에 불신자들은 그야말로 '가루'가 되는 철저한 멸망을 당하게 될 것이라고 단언하신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이런 말씀은 정말 '칼 같이' 분명하지 않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죄인을 향한 당신의 사랑을 더 이상 보여 주실 길이 없을 만큼 이미 다 보여 주셨습니다.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옛적에 여러 부분과 여러 모양으로' 파송해 주셨던 선지자들을 거부하고 박해하며 죽였습니다. 
그런데도 하나님께서는 진노하시는 대신에 오히려 '어찌할꼬'라고 안타까워하시면서 죄인 구원을 위한 당신의 실로 무한한 인애와 자비를 베풀어 주셨습니다.
  
그 결과 결국 하나님께서는 '이 모든 날 마지막에' 와서는 '아들로 우리에게 말씀해' 주시면서 '저희가 혹 그는 공경하리라'고 하셨습니다.
선지자들에게는 그랬다 하더라도 '성자 하나님이심에도 불구하고 사람의 몸을 입으시고 친히 이 땅에까지 내려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보게 되면 아무리 '악한 농부'들이라도 자신의 죄를 회개하고 당신께로 돌아오리라고 여전히 기다려 주시는 것입니다.

문자 그대로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신" 것입니다.
도대체 하나님께서 저와 여러분 같은 죄인을 더 이상 어떻게 사랑하실 수가 있겠습니까?
그런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예수님까지 거부하는 '악한 자'들을 하나님께서는 과연 '어떻게' 하셔야 하겠습니까?
  
당신의 외아들까지 보내셔서 어찌하든지 죄인들을 용서하시고 구원해 주고자 하시는 하늘 아버지의 이 무한한 사랑을 끝까지 거부하는 자들은 정말 더 이상 '대책이 없는 인생'일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의 구세주로 화육강세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지 아니하고 오히려 능욕하는 자들이 이제는 진짜로 그 하나님의 진노의 저주를 받게 되는 것은 아무도 불공평하다고 항의할 수 없는, 지극히 공의로운 심판인 것입니다.
  
'예수님이 누구신가?'라는 질문에 대하여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라고 대답할 줄 모르는 사람은 그 '머릿돌' 되신 예수님께서 재림하실 때에 '가루가 되어 흩어지는' 무서운 멸망의 심판을 받게 될 수밖에 없음을 기억하면서, 아직은 성부 하나님께서 참고 기다려 주시는 이 '은혜의 기회'에 분명한 신앙고백을 하고 구원의 길에 확고부동하게 서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는 지금 더 이상 예수님 앞에서 '당신은 누구십니까?'라고 물어볼 처지에 있지 않습니다.
예수님 당신이 정말 그리스도냐고, 하나님의 아들이시냐고 'Oh, tell me.' 어쩌고 하면서 노래를 부르는 것은 정말 건방지기 짝이 없는 태도일 뿐입니다.
아직도 그렇게 질문하고 있다는 자체가 벌써 '두 마음'을 품은 것이며 '불신앙'의 선입견에 빠져 있는 증거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누구이신지에 대하여 사람에게서 더 이상 질문을 받으실 필요조차 없을 정도로 이미 충분하게 밝혀 주지 않으셨습니까?
'나는 세상의 빛이다', '나는 양의 목자다', '나는 하늘 아버지께서 악한 죄인들을 아직도 지극히 사랑해 주셔서 친히 보내신 독생자다.'라고, 소위 '나는 ...이다'(ego eimi)라는 반복강조형의 1인칭으로써 명백하고도 강력하게 선포해 주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당신은 누구요?'라고 버릇없이 따져 든다는 것이 말이나 되겠습니까?
그러니 예수님께서는 그처럼 '당신이 누구이며 무슨 권세로 이런 일을 하는지 우리에게 말하라.'는 사람들을 향하여 '나는 내가 누구인지를 이미 완전히 증거해 주었다. 그런데 너희는 과연 나를 누구라고 믿느냐?'라고 오히려 반문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이제 질문을 받고 대답해야 할 순서는 바로 우리들 자신 쪽에 있습니다.
'예수님이 누구신가?' - 이 질문은 더 이상 예수님께서 대답해 주실 질문이 아니라 바로 우리 각자에게 던져진 질문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이 질문에 대하여 자신의 양심으로써 대답을 해야만 합니다.
왜냐하면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이 각 사람을 바로 '구원의 길'과 '멸망의 길'로 영원히 나누게 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누구신가?' - 이 질문에 대하여 '예수님은 하나님께서 나 같은 죄인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이 땅에 보내신 성자 하나님이시며 그리스도이십니다.'라고 진심으로 고백하는 것만이 곧 하늘 아버지께서 우리에게 베풀어 주신 고마운 구원의 길인 것입니다.
'저희가 혹 그는 공경하리라'라고 하나님께서 실로 한량없는 사랑을 당신의 독생자의 화육강세를 통하여 보여 주시며 기다려 주실 때에 이 예수님을 믿고 구원에 이르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아멘. (석기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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