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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십자가와 구원 (요 3:16-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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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와 구원 (요 3:16-18) 


성공적인 목회를 하던 몇몇 목회자들이 하루 아침에 목회 일선에서 물러나 몰락하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그런 경우 다시 회복한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모릅니다. 그런 일을 당하는 이유는 여러분들이 다 잘 알고 있는 바와 같이 드러난 죄 때문입니다. 대표적인 일들은 대개 돈의 문제와 스캔들의 문제입니다. 

그런 일들을 보면서 우리가 배워야 하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죄는 치명적이라는 사실입니다. 성경은 그것을 우리들에게 ‘죄의 삯은 사망이다.’라고 말씀하여 주고 있습니다. 세상에서 제일 무서운 것이 있다면 그것은 죄입니다. 죄는 정말 치명적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우리들에게 우리 모두가 다 죄인이라고 말씀하여 주고 있습니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고(롬 3:23),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롬3:10)는 것이 성경의 말씀입니다. 세상에 죄 없는 사람은 없습니다. 우리 모두에게는 폭탄 같은 죄가 다 있습니다. 터지기만 하면 누구도 살아남을 수 없는 그런 죄들이 다 있습니다.

사망이 없는 구원의 삶을 살려면 죄의 문제를 해결해야만 합니다. 죄 문제의 해결이 없이 구원은 없습니다. 해결되지 않은 죄는 언제든 터지면 사망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삶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문제는 죄 사함이 문제입니다. 속죄의 문제입니다. 

죄 사함의 권세는 죄 지은 당사자에게는 없습니다. 죄 사함의 권세가 죄 지은 당사자에게 없다는 것은 모든 죄인은 구원에 관한 한 전적으로 무능력한 존재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장로교를 세운 요한 칼빈의 사상을 정리하여 만든 칼빈주의 5대 강령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그 강령 중에 첫 번째가 바로 ‘전적인 무능력의 교리’입니다. 인간은 모두가 다 죄인입니다. 그러므로 인간은 모두가 다 구원에 관한한 전적으로 무능력한 존재들입니다. 인간은 스스로의 힘으로 자신을 구원할 수 없습니다. 인간은 모두가 다 죄인이기 때문에 자신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 누구도 구원해 줄 수 없습니다. 죄 사함의 권세 즉 구원의 권세는 죄 없는 몸으로 이 땅에 오셔서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하여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예수님 밖에 없습니다.

사함 즉 용서는 사랑과 관련이 있습니다. 사랑하면 용서가 되고 사랑하지 않으면 용서가 되지 않습니다. 사랑하면 용서가 되고 사랑만큼 용서가 됩니다. 사랑이 크면 큰 죄가 용서가 되고 사랑이 작으면 큰 죄는 용서가 되지 않습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에게 형제의 죄를 7번까지라도 용서할 수 있겠다고 하였을 때 예수님은 일흔 번 씩 일곱 번 이라도 용서하라 하셨습니다. 일흔 번 씩 일곱 번 즉 490번의 용서는 과연 우리 인간에게 가능한 일일까요? 가능합니다. 단 한 경우에만 가능합니다. 그것은 부모가 자식의 죄를 용서하는 것입니다.

우리 아이들이 자기 엄마에게 다른 아이들 모르게 각자 물어 본 말이 있습니다. ‘엄만 누굴 제일 사랑해?’ 그때 마다 우리 아내는 ‘엄마는 아빠를 제일 사랑하고 그 다음에 너희들은 모두 똑같이 사랑해’라고 대답해 주었습니다. 기분은 좋았지만 사실은 아니라는 것을 저는 잘 알고 있습니다. 제 아내는 자기 아이들의 죄는 490번이라도 용서해 주겠지만 제 죄는 그렇게까지 용서하지 못할 겁니다. 아마.

얼마큼 사랑하는가가 얼마큼까지 용서할 수 있는가를 결정합니다. 여기에 십자가의 비밀이 있습니다. 십자가는 사랑입니다. 그보다 더 큰 사랑은 있을 수 없는 세상에서 제일 크고 완벽한 사랑입니다. 그것을 우리가 잘 아는 오늘 본문은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예수님의 십자가를 바라보면 십자가가 우리에게 해 주는 말이 있습니다. 그 말은 십자가를 통한 하나님의 의지와 확고한 뜻입니다. 그것은 ‘나는 무슨 수를 써서도 너희들을 구원하고 말꺼야.’, ‘난 너희들이 죽고 망하는 꼴을 두고 볼 수 없어.’입니다.

저도 저의 아이들에게 그런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런 말을 해 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제게는 그런 뜻만 있지 그런 능력은 없습니다. 제가 아이들에게 그런 말을 하면 아이들은 제 마음만 받지 제가 정말 자신들을 모든 문제에서 구원해 줄 수 있을 것이라고 신뢰하지는 못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저는 자식을 사랑만 할 뿐 저들의 구원자가 되어 줄 능력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다릅니다. 하나님은 마음뿐만 아니라 능력도 있으신 분입니다. 그런 분이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하여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으셨습니다. 이것으로 말미암아 사탄의 권세가 못 박히게 되었습니다. 사망의 권세가 십자가에 못 박히게 되었습니다. 우리의 모든 죄는 그 십자가의 사랑으로 말미암아 다 용서 받게 되었고 사탄은 감히 어떻게 그럴 수 있느냐고 하나님께 송사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렇게까지 사랑하시는 분에게 용서할 수 없는 죄는 없기 때문입니다.

일본의 미우라 아야꼬라고 하는 여류 소설가가 쓴 ‘양치는 언덕’이라는 유명한 소설이 있습니다. 나오미라고 하는 목사 딸이 주인공으로 나옵니다. 그 나오미가 료오이찌라고 하는 바람둥이 유혹에 빠져 부모를 버리고 도망가서 함께 삽니다. 한 일 이년 정도를 함께 살다가 도저히 견딜 수 없어 친정으로 다시 돌아옵니다.

얼마 후 료오이찌가 폐병에 걸려 나오미를 찾아 옵니다. 나오미는 받아 주기 싫었지만 아버지 목사님의 권유로 받아 들입니다. 료오이찌는 처가 집에서 요양을 하게 되는데 처가 집에서 요양을 하다가 처가 집 식구들의 믿음의 감동을 받아 예수를 영접하고 새 사람이 됩니다.

료오이찌는 요양생활을 하는 동안 다락방에서 그림을 그립니다. 그런데 그 그림을 아무에게도 보여주지를 않습니다. 그림을 하얀 천으로 덮어 놓곤 하였습니다. 나오미가 무슨 그림이냐고 물었을 때 크리스마스 때 당신에게 주려고 그리는 그림이라고만 이야기 해 주었습니다.

크리스마스 이브날 그림은 완성되었습니다. 그런데 그날 전에 사귀던 여자에게서 연락이 와 료오이찌가 밖에서 그 여자를 만났습니다. 술을 권하지만 마시지 않았습니다. 하루 밤 자고 가라는 유혹을 받았지만 넘어가지 않았습니다. 여자가 몰래 술에 수면제를 탄 후 이 한 잔만 마시고 가라는 말에 속아 수면제가 들어있는 술을 마십니다. 잠이 오지만 그곳에서 잠들지 않으려고 길을 나섰다가 길에서 잠이 들어 동사합니다.

그 소설의 클라이막스는 나오미가 남편의 그림을 벗겨 보는 것입니다. 그곳에는 십자가에 달려 피 흘리시는 예수님의 그림이 그려져 있었습니다. 그 십자가의 발아래 청년 하나가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인 채 예수님을 피 흘리시는 발을 붙잡고 있었습니다. 그 청년의 손등 위로 예수님의 피가 떨어져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청년이 바로 료오이찌 자신이었습니다.

양치는 언덕을 통하여 그 장면을 읽다가 표현할 수 없는 은혜를 받았습니다. 감동을 받았습니다. 제 마음 속에서 큰 소리로 외쳐지는 소리가 있었습니다. ‘료오이찌는 깨끗하다. 료오이찌는 아름답다. 료오이찌는 구원얻었다. 주의 보혈은 능력있다.’ 저는 십자가 발 아래 무릎을 꿇고 예수님의 피 흘리시는 발을 붙잡은 그 그림 속에 나타난 료오이찌의 모습을 보면서 십자가의 능력을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 저는 그 모습을 보면서 나의 죄도 료오이찌와 같은 마음으로 사함 받을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저는 바로 그와 같은 기전을 통하여 구원을 얻었습니다.

80년도에 목사 안수를 받았습니다. 그 때 사탄이 저를 마음 속으로 공격하였습니다. 사탄은 제 죄를 떠 올리게 하면서 너 같은 놈이 어떻게 목사가 될 수 있느냐고 송사하였습니다. 할 말이 없었습니다. 그 말이 옳았기 때문이었습니다. 심각하게 고민을 하였습니다. 한 사흘 쯤 심각하게 고민하며 기도하다가 중요한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내가 하나님께 사함을 받은 죄라는 사실이었습니다. 사탄은 그 십자가의 속죄를 잊게 하려 하였던 것입니다.

제 죄를 제가 알고 사탄이 알고 하나님이 알고 계셨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죄를 가지고 저를 송사하지 않으셨습니다. 십자가의 보혈로 용서해 주셨기 때문이셨습니다. 예수님은 제가 목사가 되는 것을 기뻐하셨습니다. 저는 십자가의 보람이었습니다. 저는 예수님의 보람이었습니다. 십자가의 증거였습니다.

사탄의 송사를 물리치고 안수를 받았습니다. 그 과정을 통하여 저는 사도바울의 고백을 이해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나의 나 된 것은 다 하나님의 은혜’라는 고린도전서 15장 10절의 말씀과 ‘십자가 외에는 자랑할 것이 없다.’는 갈라디아서 6장 14절의 말씀이었습니다. 그리고 그와 같은 과정을 통하여 저는 다윗의 고백도 이해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허물의 사함을 받고 자신의 죄가 가려진 자는 복이 있도다.’라는 시편 32편 1절의 말씀입니다.

예수를 믿음으로 받은 복이 저는 참 많습니다. 그런데 그 복 중 최고의 복은 누가 뭐래도 죄 사함의 복입니다. ‘허물의 사하심을 받고 죄의 가리 움을 받은 자는 복이 있도다.’라고 고백한 다윗의 고백이 저의 고백입니다.

이 죄 사함의 축복은 말씀드린 바와 같이 십자가에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으로 말미암아 이루어졌습니다. 용서는 사랑을 통해서만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제가 사랑했던 여자들도 있었고 저를 사랑했던 여자들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저는 제 아내와만 결혼을 하였습니다. 제 아내가 제 사랑을 받아 주었기 때문입니다. 내가 사랑해도 상대방이 내 사랑을 받아주지 않으면 사랑은 성립이 되지 않고, 상대방이 아무리 나를 사랑한다고 하여도 내가 그 사랑을 받아주지 않으면 그 사랑도 역시 성립이 되지 않습니다. 내 사랑을 상대방이 받아주고 상대방의 사랑을 내가 받아 줄 때에만 사랑은 완성이 되는 것입니다.

그것은 십자가의 사랑도 마찬가지입니다. 오늘 본문에 있어서 중요한 표현들이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라는 표현과 ‘누구든지 저를 믿으면’이라는 표현입니다. 누구든지 하나님의 사랑을 믿고 받아들이면 구원을 얻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다고 하여도 우리가 그 사랑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아무리 십자가의 사랑이 크고 위대하다고 하여도 그 사랑은 우리에게 이루어지지 않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이제 나만 사랑하면 됩니다. 그러므로 구원은 이제 나에게 달려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구원의 능력이 나에게 있다는 뜻이 아닙니다. 받아 들이지 않으면 사망에 이르게 됩니다. 우리가 멸망케 된다면 그 책임은 우리에게 있습니다. 우리가 받아 들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받아 들였다고해서 구원의 능력이 우리에게 있는 것은 아닙니다. 구원의 능력은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께만 있습니다. 앞에서 말씀드린 바와 같습니다. 그러나 그 능력은 우리가 받아들일 때에만 작동이 됩니다.

사랑은 사랑으로만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사랑 없이는 절대로 사랑을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나는 사랑했지만 상대방이 나를 사랑하지 못함으로 내 사랑이 받아들여지지 않았습니다. 상대방이 나를 사랑했지만 나에게 그를 사랑하는 마음이 생기지 않았음으로 그 사랑을 받아들일 수 없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받으려면 하나님을 사랑해야만 합니다. 사랑이 믿음입니다.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살수록 하나님을 사랑함이 내게 복이라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것이 아직도 그렇게 쉽지가 않습니다. 손녀 딸 민희와 세희와 국희를 사랑하는 것은 너무너무 쉬운데 하나님은 아직도 조금 어렵습니다.

작년 10월에 민희와 세희를 보러 미국엘 갔었습니다. 아내도 같이 갔었습니다. 아내는 그때 아이들 선물을 이민 가방으로 두 개나 사가지고 갔었습니다. 그때가 마침 민희와 세희의 생일이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다음 주에도 민희 세희를 보러 갑니다. 미국 서부에서 집회가 있는데 미국 갔던 김에 동부에 사는 아이들을 보고 오려고 비행기표를 그렇게 끊었습니다. 아내는 미국 동부로 직접 가려고 준비하고 있습니다. 어제도 문간방에 들어가 보니 빈방에 하나 가득 아이들 줄 선물들이 채워져 있었습니다.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한다면 하나님에게도 그런 마음이 들어야만 합니다. 저는 민희와 세희와 국희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하나님을 사랑하기를 진심으로 원합니다. 큰 아이가 이번에 미국에 오면 자동차 한 대를 사주실 수 있느냐고 물어왔습니다. 아이가 둘씩이나 있는데 미국에서 차 없이 사는 일이 많이 힘들었나 봅니다. 벌써 미국에서 산지가 4년이 되었는데 더 버티기가 좀 힘들었는지 조심스럽게 부탁을 해 왔습니다. 사 줄 작정입니다.

아내에게 차 사줄 돈 있느냐고 물었더니 없다고 대답하였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느냐고 물었습니다. ‘만들어야지요’라고 대답했습니다. 돈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 돈을 마련하려면 만들어야만 합니다. 그것은 다른 목적을 위하여 모으고 있던 것을 포기하여야 한다는 이야기였습니다. 아들이 아니면 그렇게 안할 겁니다. 그러나 아들이니까 그럴 수 있습니다. 사랑은 그런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한다면 하나님에게도 그런 마음이어야만 한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그리고 실제로 그것을 기준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려고 부족하지만 노력하고 있습니다.

아이들이 결혼하기 전 우리 식구가 여섯이었을 때 저는 제가 가지고 있는 모든 재산과 돈을 여섯으로 나누어 모든 식구의 몫을 나누었습니다. 그리고 내 재산과 돈은 1/6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어느 날 새벽에 기도하는데 하나님이 느닷없이 제 마음에 말을 해 오셨습니다. 

‘난?’
‘예?’
‘아버지라며?’
‘아- 예!....’

저는 그날부터 모든 재산과 돈을 1/7로 계산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날부터 하나님은 제 진심속의 아버지가 되셨습니다. 그날 저는 결심했습니다. ‘하나님께 드릴 수 있는 것 이상을 가지지 않겠다. 하나님께 드릴 수 있는 이상을 아이들에게 주지 않겠다.’ 지금까지는 제법 지키고 있는 것 같습니다. 아마 큰 무리가 없는 한 그 마음을 지킬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지금 마음 같아서는 하나님의 몫이 우리 집에서 제일 클 것 같습니다. 저는 내가 정말 하나님을 사랑하는가를 그런 식으로 확인합니다. 입으로만이 아니라 정말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싶어서 그럽니다.

말씀을 마치려고 합니다.

저는 죄인입니다. 저는 제가 죄인이라는 사실을 압니다. 그리고 그 죄가 얼마나 치명적이고 절망적인가를 압니다. 때문에 예수님께서 나의 죄를 용서해 주시기 위하여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다는 것이 얼마나 큰 은혜가 되는지 모릅니다. 저는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신다는 것을 믿습니다. 

그래서 부족하지만 저도 하나님을 사랑하고 싶습니다. 사랑은 늘 함께 있고 싶어하는 마음이고 사랑은 귀하고 소중한 것을 함께 나누려고 하는 마음입니다. 저는 구체적으로 그 마음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려고 합니다. 조금씩, 조금씩 하나님과의 사랑이 깊어짐을 느낍니다. 

아내를 사랑하는 마음이 깊어질 때, 아이들을 사랑하는 마음이 절절할 때, 가족을 사랑하며, 함께 만나는 사람들을 사랑하며, 특히 요즘 아직 많이 부족하지만 마음을 주고 있는 탈북자들을 사랑하는 마음이 점점 커질 때 행복을 느낍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새록새록 커질 때 저는 정말 행복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시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 사랑으로 십자가에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을 이해하고 깨닫고 받아드리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하여 그 십자가의 사랑에 나타난 하나님의 모든 은혜와 축복을 누리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것을 통하여 이 땅에서도 천국의 삶을 누리시는 저와 여러분들이 다 되실 수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아멘. (김동호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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