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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사도적 사역을 이어가는 교회의 사명을 감당 합시다 (갈 1: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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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적 사역을 이어가는 교회의 사명을 감당 합시다 (갈 1:7-9)


(갈1:7-9)다른 복음은 없나니 다만 어떤 사람들이 너희를 교란하여 그리스도의 복음을 변하게 하려 함이라 그러나 우리나 혹은 하늘로부터 온 천사라도 우리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 우리가 전에 말하였거니와 내가 지금 다시 말하노니 만일 누구든지 너희가 받은 것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

바울은 갈라디아 교회에 편지하면서 자신의 사도됨이 인간으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고 오직 그리스도와 죽은 자 가운데서 그리스도를 살리신 하나님 아버지로 말미암아 된 것임을 밝힘니다.
이는 바울의 사도권에 대해 회의를 품는 자들이 갈라디아 교회에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바울이 편지 초두에서 자신의 사도권을 강조한 것은 서신 내용의 권위를 세우기 위함이었습니다.

서신의 내용이 중요한 교리에 관한 내용이었기에 바울은 자신의 진술할 것이 하나님께로부터 말미암음임을 증거한 것입니다.
또한 바울은 교회에 대한 서신에서 항상 그러하듯이 하나님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 좇아 은혜와 평강이 성도들에게 임하기를 기원하였습니다.
그리고 사도 바울은 하나님의 뜻을 따라 죄인들을 구속하기 위해서 자기 몸을 드린 그리스도를 찬양하며 영광을 돌렸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십자가를 지심은 죄악 속에 있는 자들을 구원하시기 위함이었고, 그로 말미암아 성도들이 악한 세대에서 구원을 받았기에 그리스도의 구속의 은혜는 성도에게 영원한 찬송 제목이 되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내용으로 갈라디아 교우들에게 문안 인사를 마치자마자 사도 바울은 심하게 책망을 합니다.

(갈 1:6-8) 그리스도의 은혜로 너희를 부르신 이를 이같이 속히 떠나 다른 복음을 따르는 것을 내가 이상하게 여기노라 다른 복음은 없나니 다만 어떤 사람들이 너희를 교란하여 그리스도의 복음을 변하게 하려 함이라  그러나 우리나 혹은 하늘로부터 온 천사라도 우리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

갈라디아 교회의 성도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버리고 다른 복음을 따르는 것을 이상히 여긴다고 진술하면서 자신이 증거한 그리스도의 복음 외에는 다른 복음이 없음을 강조했습니다.
갈라디아 교우들이 자신의 가르침에서 떠나 거짓 교사들의 가르침을 따랐기 때문에 사도 바울은 그들을 책망함으로써 돌이키고자 합니다.

다른 복음은 없나니란 문자적으로는 그것은 다른 것 이 아니다로 다른 복음은 다른 것이 아니다란 뜻이며 정확한 의미는 그것 즉 다른 복음은 결코 또 하나의 복음이 아니다라는 뜻입니다.
  
바울은 다른 복음을 전하는 자들은 그리스도의 복음을 왜곡시켜 교회를 어지럽히고 교란하는 자들이라고 말씀했습니다.

교란(타랏손테스-원형 타랏소)이란 말은 어떤 사물을 이리저리 뒤흔들어 중심을 잃게 하는 것이나 내적 평정을 깨뜨려 심히 불안하게 하는 것을 나타내는 단어입니다.
베데스다 연못의 물이 요동치는 장면을 나타낼 때 이 동사가 쓰였고(요5:7), 유대 왕 그리스도가 탄생했다는 놀라운 소식을 듣고 헤롯왕과 온 예루살렘이 동요되고 소동했다는 것을 나타낼 때에도 이 동사가 쓰였습니다(마2:3).

유대 율법주의자들은 오직 믿음으로만 구원을 얻는다는 복음을 듣고 믿음으로 신앙 생활하고 있던 갈라디아 교인들에게 접근하여 구원을 얻는 데에는 그 믿음만이 아닌 율법 준수와 할례 시행이라는 조건이 더 있어야 한다고 가르쳐 그들을 혼란 가운데 빠뜨렸던 것입니다.  

율법주의는 반 복음주의 입니다. 겉으로는 복음의 부족을 메우는 것 같고, 사람의 구원에 매우 유용한 것으로 보이나 실상은 복음 진리를 파괴하는 것이요 십자가의 공로를 헛된 것으로 돌리는 것입니다. 따라서 바울은 이 율법주의에 대해 매우 단호했습니다. 그들이 복음을 따르느냐 율법주의자들을 따르느냐는 그에게 매우 중대한 관심사였습니다.

그것은 갈라디아 교우들의 영혼이 죽고 사는 문제에 관련된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그는 일단의 율법주의자들에 대해 단호히 대처합니다. 그들을 심하게 저주합니다. 악은 싹이 나기 전에 뿌리부터 근절시켜야 하기 때문입니다.

비진리와 불의에 대한 이러한 명백한 태도 없이는 그 누구도 신실한 신앙인이 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면으로 부정하지는 않지만 결국엔 그리스도의 복음의 구원에 있어서의 충족성을 부인하는 것으로서 복음을 부정하는 결과를 가져오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들은 '가만히 들어온 거짓 형제'들의 유혹에 너무 쉽게 넘어갔습니다.

(갈 2:4)이는 가만히 들어온 거짓 형제들 때문이라 그들이 가만히 들어온 것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가 가진 자유를 엿보고 우리를 종으로 삼고자 함이로되

이 거짓 형제들은 예루살렘 교회의 유대주의자들은 오직 믿음으로만 구원을 얻는다는 복음을 듣고 믿음으로 신앙생활 하고 있던 갈라디아 교인들에게 접근하여 다른 복음을 전하자 바울이 전해 준 복음을 버리고 그들의 가르침에 현혹되었습니다.

복음에 뿌리를 내리지 못함으로써 유대주의자들의 감언이설에 넘어간 것입니다. 이러한 신앙적 변절은 모든 인간들의 병폐적 습관입니다. 광야에서의 이스라엘 백성들의 반복적인 불신앙이나 가나안에서의 끈질긴 우상 숭배는 신앙적 변절이 뿌리 깊은 습관적인 것임을 보여줍니다.
죄의 습성에 깊이 물들어 있고 또 죄의 유혹에 쉽게 넘어지는 것이 연약한 인간의 모습입니다.
  
이러한 갈라디아 교우들을 사도 바울이 볼 때는 복음에서 막 돌아서는 찰나에 있다고 판단하고 복음에 대해 바르게 재인식시켜 주면 다시 되돌아 설 가능성이 그들에게는 충분히 있다고 확신하고 포기하지 아니하고 그들을 돌이키려 하며 다른 복음은 없다고 합니다.
사도 바울이 말하는 요지는 복음이라고 불리우는 것은 많이 있을지 모르지만 진정한 복음은 단 하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사도 바울이 갈라디아 교인들에게 전한 복음인 것입니다.
지금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의 은혜와는 다른 거짓 복음은 결코 구원에 이를 수 있는 복음이 아님을 말하고 있습니다.
곧 예수 그리스도 외에는 하나님께로 갈 수 있는 길이 없음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는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 14:6)는 주님의 말씀의 의미를 다시 한 번 돌아보게 하는 말씀입니다.
따라서 오늘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기독교 외의 타종교들에도 구원이 있을 수 있다고 하는데 대해 다시 한 번 일침을 가하는 말입니다.
  
그리스도의 복음은 하나님의 복음과 동일한 의미로 사용 되었습니다.

(롬 1:1-3)예수 그리스도의 종 바울은 사도로 부르심을 받아 하나님의 복음을 위하여 택정함을 입었으니 이 복음은 하나님이 선지자들을 통하여 그의 아들에 관하여 성경에 미리 약속하신 것이라 그의 아들에 관하여 말하면 육신으로는 다윗의 혈통에서 나셨고

(롬 15:16)이 은혜는 곧 나로 이방인을 위하여 그리스도 예수의 일꾼이 되어 하나님의 복음의 제사장 직분을 하게 하사 이방인을 제물로 드리는 것이 성령 안에서 거룩하게 되어 받으실 만하게 하려 하심이라

(살전 2:2)너희가 아는 바와 같이 우리가 먼저 빌립보에서 고난과 능욕을 당하였으나 우리 하나님을 힘입어 많은 싸움 중에 하나님의 복음을 너희에게 전하였노라

(딤전 1:11)이 교훈은 내게 맡기신 바 복되신 하나님의 영광의 복음을 따름이니라
이는 그리스도가 곧 참 하나님이시며 성부 하나님과 성자 하나님은 동일 본질 이라는 기독론이 바울 신학의 바탕에 깔려 있음을 전적으로 보여주는 증거입니다.

(빌 2:6)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그리스도의(투 크리스투)란 표현은 복음의 내용이 곧 그리스도를 언급하고 있음은 물론 복음의 근원이 곧 그리스도이심을 나타내는 표현입니다.
즉 바울이 전한 복음은 단순히 그리스도에 관한 복음이 아니라 그리스도 자체이며 그리스도가 그 복음을 가능케 하는 근원이라는 사실을 말합니다.

사도 바울이 강조하는 가장 중요한 개념은 복음이며 밝히려고 하는 것도 그리스도의 복음입니다.
왜냐하면 당시 복음은 이미 전해졌고 그 복음이 전파되고 있으며 복음으로 인하여 교회도 세워졌고 또 교회가 부흥되고도 있지만 그들 가운데 있는 복음이 변질된 복음이 있었을 뿐 아니라, 더러는 복음이 아닌 다른 복음이 그들에게 영향을 미쳐서 신앙생활을 바르게 하지 못하게 하고 있는 것을 보았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리스도의 복음은 구원의 복음입니다. 

(갈 1:4)그리스도께서 하나님 곧 우리 아버지의 뜻을 따라 이 악한 세대에서 우리를 건지시려고 우리 죄를 대속하기 위하여 자기 몸을 주셨으니

악한 세대는 보다 정확하게는 ‘존재하고 있는 이악한 세대’로서 이는 타락한 인간들이 하나님을 대적하여 말할 수 없이 사악한 일들을 끝없이 행하는 이 세상의 패역한 상태를 구체적으로 표현한 말입니다.
실로 이 세상은 사악한 일들이 끊임없이 벌어지는 패역한 곳입니다. 그래서 결국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멸망하게 될 수밖에 없는 곳입니다. 따라서 누구든지 이 세상과 더불어 멸망하지 않으려면 반드시 이 패역한 세상에서 ‘탈출’해야만 합니다.

복음을 믿고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의 공로를 힘입어서 이 세상에 속한 멸망의 백성이 아닌 하나님께 속한 천국 백성이 되어야만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악한 세대에서 우리를 건지시려고 우리 죄를 대속하기 위하여 그리스도께서 자기 몸을 주셨다고 합니다,
건지시려고(엑셀레타이 원형 ‘엑사이레오)는 ‘뽑아내다’‘빼내다’(마5:29)란 뜻을 지닌 말에서 ‘골라내다’‘선택하다’‘구원하다’(행7:10.34)란 의미를 지닌 말로 쓰였습니다.

자기 스스로는 헤어날 수 없는 무서운 위험에 빠져 있는 상태를 전제로 합니다.
요셉이 그 모든 환난에서(행7:10),이스라엘이 애굽의 속박으로부터(행7:34),베드로가 헤롯의 손으로부터(행12:11)건져냄을 받았음을 묘사할 때 이 단어가 사용되었습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바울 역시 유대인과 이방인의 손으로부터 구조를 받았던 적이 있었는데 그에 대한 기록에서도 이 단어가 사용되었습니다(행23:27 ;26:17).

사도 바울은 이처럼 전적 무능력 상태에서의 구원이라는 의미가 있는 이 단어를 사용하여 성도가 자신의 힘으로는 도저히 어쩔 수 없는 이 악한 세대로부터 하나님 아버지의 은혜로운 뜻에 따라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으로 건져냄을 받았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의 복음이며 그리스도적 복음입니다. 

복음의 핵심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이 말은 예수님이 곧 그리스도란 말이며 예수님이 곧 구주라는 말인데 그렇게 그리스도가 구주가 되신 것이 기쁜 소식이며 그 일을 이루기 위하여 자기 몸을 드리신 것 곧 십자가에 자기 몸을 드리신 것이 곧 복음이라는 것입니다.

차디찬 지난 며칠 간 영하의 날씨에 있었던 일이라 합니다. 아파트에 사는 한 가정에서 새 한 쌍을 선물로 받아 매일 아침 신선한 공기와 햇빛을 받으라고 초롱을 베란다에 걸었다가 저녁이면 들여오곤 하였습니다. 그동안 새는 자라서 어미 새가 되었고 어미 새는 어느덧 알을 품더니 두 마리의 예쁜 아기 새를 갖게 되었으며. 그 아기 새들은 초롱 속에 만들어준 둥지에서 자라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베란다에 둔 것을 깜박 잊어버리고 영하의 날씨에 밤을 그냥 보내버렸습니다. 아침에야 새 초롱을 생각하고 허둥지둥 나가보니 아뿔싸 어미 새는 둥지에 몸을 덮은 채로 얼어죽어 있었습니다. 인간의 실수로 인해 생명을 잃게 한 것을 생각하고 가슴을 치며 죽은 어미 새를 집었더니 아, 거기 얼어죽은 어미 새 밑에 한 마리의 큰 새와 두 마리의 아기 새는 그대로 살아 있었다는 것이었습니다. 어미 새의 지극한 헌신은 육체로 둥지를 덮어 얼어 죽으면서 까지 남은 생명들을 사랑한 기막힌 얘기였습니다.

여기 세상의 한파, 죄악의 한파가 몰아닥쳐 모두가 죽음에 직면하였을 때 차디찬 십자가에 몸을 던져 스스로 차가워지면서 세상이라는 둥지를 덮음으로 그 한파 속에서 뜨거운 혈액으로 소생케 한 사랑, 지극히 인간을 사랑하셨던 하나님의 사랑을 생각하게 합니다. 

페이튼은 남태평양 뉴헤브리디즈 섬의 영웅적인 선교사였다합니다. 그곳 원주민들은 거의 옷을 입지 않은 채 생활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차에 페이튼 선교사는 처음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그들에게 전할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되었습니다. 그 섬의 가장 커다란 문제는 비가 내리지 않아 일어나는 물 부족 사태였는데, 희한한 일은 그 원주민들은 우물이란 것을 도무지 알지도 못한다는 사실이었습니다. 페이튼 선교사는 먼저 우물을 하나 파기로 마음먹고는 우물을 계기로 복음 전파를 시작하기로 했습니다. 

우물을 파기에 앞서 페이튼 선교사는 추장에게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위해 땅의 구멍에서 비를 내리게 하실 것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선교사의 이 말에 놀란 원주민들은 웅성거리기 시작했습니다. 왜냐하면 여태껏 원주민들이 얻을 수 있었던 맑은 물은 하늘에서 내린 빗물을 모아두었던 것 뿐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여하튼 선교사의 이러한 말은 사람들에게 자극이 되었고, 추장을 비롯한 다른 사람들은 "만일 선교사가 땅 위의 구멍에서 비를 가져올 수 있다면 그 하나님이 참 하나님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이윽고 선교사는 땅을 파기 시작했고, 웬만큼 파 들어가자 생수가 솟아 시작하였습니다. 우물이 가져온 결과는 놀라운 것이었습니다. 나이 많은 추장은 주일예배 때 우물 앞에서 설교할 수 있는 특권을 허락하였습니다. 이것이 바로 그가 해낸 업적이었습니다. 그는 자신이 지닌 무기로 최선을 다해 원주민들에게 호소하였던 것입니다. 

설교 도중에 페이튼 선교사는 이렇게 호소했습니다. "아니와 주민 여러분, 여호와의 말씀이 이 땅에 선포되자 세계는 완전히 거꾸로 뒤집혀졌습니다. 그 어느 누가 감히 땅에서 비가 내릴 줄을 상상이나 했겠습니까? 오늘부터 우리는 우리를 위해 이 우물을 열어 주시고, 아래로부터 비로 이 우물을 가득 채우신 그 분께 예배하여야 할 것입니다." 

이 놀랄 만한 설교가 있은 다음 한 주간 동안 여기저기서 끄집어낸 우상들이 산더미처럼 쌓였고, 그것들은 페이튼 선교사의 집 앞에서 불태워졌습니다. 그 이후로 기독교의 복음은 급속히 펴져 나갔고 얼마 안 가서 그 섬에는 단 한 사람의 이교도도 남지 않았습니다.
범죄한 인생이 죽어야 하는데 거꾸로 죄 없으신 예수님이 십자가에 희생하심으로 우리를 구원해 주셨습니다. 이것이 복음입니다.
    
그리스도의 복음은 은혜의 복음입니다. 

(갈 1:6)그리스도의 은혜로 너희를 부르신 이를 이같이 속히 떠나 다른 복음을 따르는 것을 내가 이상하게 여기노라

참으로 대단한 말씀입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구주로 오셨습니다. 그리고 모든 사람들을 위하여 십자가 위에서 대속의 제물로 죽으셨습니다. 그래서 모든 사람들의 구주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이 사건을 믿는 사람들에게 유효한 것이고 그들의 구주가 되는 것이지 믿지 아니하는 자에게는 아무런 효력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참으로 감사하게도 이전엔 그리스도 밖에 있는 우리를 그리스도를 의도적으로 멀리하던 우리를 아니 과거에 예수 믿는 사람들을 조롱하고 핍박하던 우리를 이제 와서 부르시고  믿게 하시고 십자가의 은혜 속에 있게 하신 이것이 복음이며 이 복음이 곧 그리스도의 복음입니다. 
과거를 돌이켜 생각해 보니 은혜 아닌 것이 하나도 없다는 것입니다. 그때는 몰랐는데 이제 와서 보니 다 하나님의 은혜라는 것입니다.

믿는 사람들을 핍박하러 쫓아다녔으며 저 멀리 다메섹까지도 좇아가서 괴롭히고 심지어 죽이려고 까지 했던 그러한 자를 이제 와서 믿는 자가 되게 하시고 뿐만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위한 일꾼으로 까지 삼으신 것을 보면 참으로 하나님의 은혜란 참으로 대단한 것이로구나 하고 자기의 행적을 회상하면서 하나님의 크신 섭리와 경륜, 은혜 앞에서 감격해 하고 있습니다.

(갈 1:13-17)내가 이전에 유대교에 있을 때에 행한 일을 너희가 들었거니와 하나님의 교회를 심히 박해하여 멸하고 내가 내 동족 중 여러 연갑자보다 유대교를 지나치게 믿어 내 조상의 전통에 대하여 더욱 열심이 있었으나 그러나 내 어머니의 태로부터 나를 택정하시고 그의 은혜로 나를 부르신 이가 그의 아들을 이방에 전하기 위하여 그를 내 속에 나타내시기를 기뻐하셨을 때에 내가 곧 혈육과 의논하지 아니하고 또 나보다 먼저 사도 된 자들을 만나려고 예루살렘으로 가지 아니하고 아라비아로 갔다가 다시 다메섹으로 돌아갔노라

연세대학교에 가면 '용제 백낙준 박사'의 동상이 있다합니다. 이 백낙준 박사는 한국이 낳은 세계적 인물로서 일찌기 33세에 목사로 안수 받아 사역한 목사님이시라 합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그가 그렇게 훌륭한 교육가요 목회자였던 것을 기억하지만 그의 아버님이 무당이었다는 것을 알고 있는 사람은 많지 않다는 것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무당의 자녀들은 예수를 믿기 어려울 것으로 생각하고 또 무당의 자녀들이 예수를 믿어도 잘 믿을 수 있을까 회의적으로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백낙준 박사님 같은 분도 나온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이 바로 이것이 복음의 능력입니다. 
  
대설교가 무디 목사의 집회에 참석한 신사 숙녀들은 특이한 장면에 놀라고 있었습니다. 열 두어 살쯤 되어 보이는 한 흑인 소년이 더러운 옷을 걸친 채 강대 위, 그것도 무디가 앉아야 할 제일 큰 의자에 앉아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더군다나 이 날 집회는 자리가 부족하여 아이들은 입장이 금지되어 있었습니다. 

무디는 구원에 대한 설교를 하다가 이 소년과 대화를 시작했습니다. "너같은 아이가 감히 이 장소에 어떻게 입장했으며, 그런 높은 자리에 앉았느냐?" 소년이 어리둥절해서 대답했습니다. "여기에 들어오고 싶어서 입구에서 서성거리고 있을 때, 무디 목사님께서 '내 외투 속에 들어오라'고 말씀하지 않으셨어요? 그래서 목사님 외투 속에 들어갔더니 입구를 지키던 아저씨들이 나를 보고도 집어내지 못하던데요. 그리고 이 의자에 앉은 것도 목사님께서 '거기 앉아서 내 설교를 잘 들어'하고 말씀하시지 않으셨어요?"  마찬가지로 우리의 구원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에 의한 것입니다.
  
어떤 비행기 승객이 오클랜드에서 남부 캘리포니아행 비행기를 타던 중 아주 언짢았던 일이 하나 있었다합니다. 그 이유는 비행기의 가운데 좌석이 지정되었기 때문이었다합니다. 그는 가운데 좌석을 아주 싫어했다합니다. 다른 사람들이 통로로 들어오고 있을 때, 옛 친구를 만나게 되어 인사를 나누고는 빈 통로 좌석에 앉아서 잡담을 하고 있었다합니다. 

얼마 후 기내 인터폰에서 다음과 같은 방송이 흘러나왔다합니다. "해리 써머 씨께서 탑승하셨다면, 누구 신지 가르쳐 주십시오." 내 친구는 손을 들었고, 비행기 승무원들은 그에게 다가와서 말했다합니다. "써머 씨, 오늘 선생님의 티켓은 1등석이니 앞 객실에 있는 선생님의 좌석으로 가시죠." 그러자 내 친구는 "아닙니다. 저는 제 1등 친구와 여기에 있는 것이 좋겠군요."  그는 그의 찬사에 미소를 지었고 승객들도 박수갈채를 보냈다합니다. 그러나 잠시 후 승무원은 다시 돌아와서 말하기를 "써머 씨, 일반객실은 다 찼지만 1등실은 아직 남았습니다. 선생님의 일등 친구분과 함께 그 자리로 가시죠." 그래서 그는 그 날 2등실에 있는 그의 가운데 좌석을 취소하고 친구와 1등실에 탈 수 있었다합니다.
  
그 후 그 사건에 대해 생각을 하면서 "예수님이 자신을 위해 하신 것도 바로 그 때문이구나!"라고 느겼다합니다. '별로 유쾌하지 않은' 2등실로 다가 오셨고 앞 칸의 가장 좋은 자리로 데리고 가셨는데 그것도 특히 알지도 못하던 곳을 자신을 위해 예비해 놓으셨다는 것입니다. 그는 그 날에 대해 감사할 때마다 흐뭇해지며 하나님의 은혜가운데 감사하게 된다합니다.
  
그리스도의 복음을 왜곡시켜 율법을 지켜야 한다고 주장하는 거짓 교사들에게 자신의 사도직이 하나님께로 말미암았음을 강조하며 자신이 증거한 그리스도의 복음만이 유일한 구원의 복음임을 강조하여 갈라디아 교우들을 진리의 복음으로 이끌고자 하는 사도 바울의 모습을 통해 하나님 중심 성경중심 교회 중심의 사도적 사명을 감당함에 대한 교훈 받게 합니다.

교육하고 선교하고 봉사하는 교회로서 몸된 교회의 사명을 감당하되 사도적 사역을 이어가는 교회의 사명을 감당하는 모두가 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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