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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셋 중에 하나를 택하라 (삼하 24:1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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셋 중에 하나를 택하라 (사무엘하 24:10-17) 

사울 왕조의 패망과 다윗 왕조의 번영을 기록한 사무엘하는 마지막 장에 다윗의 인구조사 사건이 나옵니다. 본문 말씀에 의하면 다윗이 인구조사를 하게 된 동기가 무엇입니까? 이스라엘 범죄함 때문에 진노하신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징계하시기 위하여 다윗의 마음을 움직이셨기 때문이라 하였습니다.  다윗은 군대장관 요압에게 북쪽 단에서부터 남쪽 브엘세바에 이르기까지 모든 지파를 다니며 인구를 조사하여 보고하라는 명령을 내렸습니다.  

그런데 군대장관 요압이 다윗의 명령에 즉각 이의를 신청하였습니다.  ‘이 백성은 얼마든지 왕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백 배나 더하게 하사 내 주 왕의 눈으로 보게 하시기를 원하나이다 그런데 어찌하여 이런 일을 기뻐하시나이까” 하며 왕이 명령을 거두어 주길 요청하였습니다. 군대장관 요압은 다윗의 누이 스루야의 아들이며 평생을 다윗과 함께 전쟁터에서 동고동락한 전우입니다. 충성스런 신하였고 가장 강력한 후원자였지만 동시에 다윗 다음으로 정치적인 세력을 가지고 은근한 압력을 가했던 사람으로 다윗이 마음에 경계하던 사람이다.  다윗이 강성할 때 감히 아무도 다윗을 거역할 수 없었지만 요압은 의견 차이로 몇 차례 다윗의 마음을 아프게 했던 사람이었습니다.

사울의 군장이었던 아브넬이 다윗에게 투항하였을 때 다윗은 아브넬을 용서하고 무조건 받아주었습니다.  그러나 자기 동생 아사헬을 죽인 것에 대한 원한을 품고 있던 요압은 다윗을 만나고 돌아가는 아브넬을 조용히 불러 살해하였습니다.  결정적으로는 반란을 일으킨 다윗의 아들 압살롬을 직접 창으로 찔러 살해하여 다윗의 마음을 아프게 했습니다. 그리고 반군 압살롬의 군대장관이었던 아마사가 다윗에게 돌아왔을 때 다윗은 요압을 대신하여 군대장관을 삼았습니다. 아무래도 다윗이 아들을 죽인 요압 장군에 대한 섭섭함을 그렇게 표현한 듯 합니다.이에 반감을 품었던 요압은 이종 사촌 형이었던 아마사를 살해하여 경쟁자를 처리하는 비정함을 보이기도 하였습니다. 

다윗은 요압에 대한 몇 가지 섭섭하고 괘씸한 일들이 있지만 그의 세력이 만만치 않아  대놓고 책망할 수 없어 항상 마음에 스트레스로 남아있었습니다. 다윗이 나이 많아 기운이 없을 때 요압은 마지막으로 한 번 더 다윗의 심기를 건드렸습니다. 다윗의 아들 아도니야가 솔로몬을 제치고 스스로 왕이 되려고 할 때 요압이 아도니야를 지지하며 다윗의 뜻을 거역하였습니다. 아도니야의 계획은 수포로 돌아갔고 요압은 다윗의 눈에 완전히 벗어난 사람이 되고 말았습니다. 다윗이 죽기 전에 아들 솔로몬에게 요압을 어떻게 처리할 것인지 유언을 남깁니다.  요압으로 하여금 그의 백발로 평안히 죽지 못하게 하라고 당부합니다. 생전에 자기 손으로는 하지 못한 일을 아들 솔로몬이 처리하게 하였습니다. 외삼촌 다윗과 조카 요압은 평생 이런 관계였습니다.

요압이 이처럼 다윗의 심기를 불편하게 하던 사람이었지만 인구조사 명령에 이의를 제기한 것은 정당한 제안이었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요압 장군의 말이 귀에 들어올리 없었습니다. 그동안 쌓인 감정과 함께 신하들 앞에서 명령을 내린 왕의 자존심도 발동하였을 겁니다.  다윗은 요압과 군대장관들을 재촉하여 기어코 인구조사를 실시하게 합니다. 사단은 사람들의 관계를 이런 식으로 묘하게 이용합니다. 관계가 서로 불편하면 아무리 정당한 충고나 조언을 해도 그 사람의 말은 절대로 듣지 않도록 마음을 닫아버립니다.  자존심, 섭섭함과 억울함, 미움 등 나쁜 감정이 사람의 마음을 굳어지게 하여 진실을 거부합니다. 결국 올바른 판단을 내리지 못하여 망하는 길로 들어가게 합니다.  사단은 언제나 이런 방식으로 이간질하여 갈라놓고 싸우게 하며 서로 상처를 주고받게 합니다.  다윗이 갑자기 인구조사를 명령한 것이나 요압의 충고를 강하게 물리치고 고집한 것도 사실은 사단의 꾀에 넘어간 일이었습니다.

사무엘하 본문에서는 하나님이 다윗을 감동시켜 인구조사를 한 것으로 되었지만 똑같은 사건을 다른 관점에서 설명한 역대상 21장을 보면 다윗이 인구조사를 명령한 동기를 자세하게 알 수 있습니다. ‘사단이 일어나 이스라엘을 대적하고 다윗을 격동하여 이스라엘을 계수하게 하니라’(대상21:1)  그리고 요압이 이 명령에 이의를 제기하였으나 왕이 재촉하여 인구조사가 시작되었습니다. 그런데 요압은 다윗의 명령을 끝까지 밉게 여겨 레위와 베냐민 지파 사람은 숫자에 넣지 않았습니다. 인구조사를 완전하게 끝내지 않은 상태에서 왕에게 보고하였으니 요압의 불편한 심기가 잘 드러나 있습니다.

하나님은 다윗의 인구조사를 괘씸히 여겨 이스라엘을 치셨습니다. 잘못은 다윗이 한 것 같은데 벌은 이스라엘이 받았다면 불공평한 처사가 아닐까요?  역대상과 사무엘하를 비교하여 보면 하나님이 이렇게 하신 이유가 무엇인지 금방 이해됩니다. 이스라엘 전체가 무엇인가 하나님께 범죄한 것이 있었고 그 죄를 벌하시려고 다윗의 마음을 움직여 인구조사를 하게 하셨습니다.  

다윗의 마음을 움직인 것은 사실 하나님이 아니라 사단이었습니다. 사단이 의로운 사람 욥을 시험하여 하나님을 배반하게 만들려 할 때 하나님이 그 시험을 허락하신 것처럼 다윗을 미혹하는 사단의 계략을 허용하여 다윗으로 하여금 하나님이 싫어하시는 일을 하도록 묵인하셨습니다. 욥은 사단의 시험에도 불구하고 결코 하나님을 떠나지 않았지만 다윗은 명예욕에 사로잡혀 사단에게 미혹당하고 말았습니다.하나님이 다윗이 망하도록 미혹하여 곤란에 빠뜨리신 것이 아니라 다윗이 하나님의 보호막이 없는 상태에서 사단으로부터 미혹을 당하였습니다.  

사람이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면 죄를 짓도록 내버려 두십니다.인구조사를 하는 다윗을 보면서 깨닫는 것이 있습니다. 사람은 결코 스스로 의로운 존재가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날마다 순간마다 나를 지켜주시고 보호하시며 막아주시고 끌어내어 주시지 않는다면 내 힘으로는 도저히 사단의 계략을 이겨낼 능력이 없는 존재입니다. 다윗도 우리와 똑같은 사람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은 징계 받을 일을 하였고 하나님은 참고 기다리셨다가 따끔한 벌을 내리십니다. 이스라엘을 벌하시려는 하나님의 명분은 이렇게 분명합니다.다시 이스라엘을 향하여 진노하셨다고 하였으니 다윗 한 사람을 향한 진노가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을 향한 진노였습니다. 물론 다윗 왕도 이 상황에서는 하나님의 백성 중의 한 사람일 뿐입니다.  

왜 인구조사가 하나님을 진노하게 만들었을까요? 다윗이 내린 명령은 단순한 인구조사가 아니라 전쟁에 나가 싸울 수 있는 병력을 확인하고픈 욕심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이스라엘 역사상 가장 강력한 국가로 키워낸 다윗은 인생 말년에 이르러 자신이 이루어 놓은 업적을 평가하고 싶었고 자랑하고 싶었습니다.그런 명예욕에 사로잡힌 순간 다윗은 하나님보다 사람의 숫자를 의지하겠다는 마음이 앞섰습니다.

다윗이 다스리는 이스라엘은 인간 왕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친히 다스리는 신정국가라는 사실을 잠시 잊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언약으로 맺어진 이스라엘은 하나님과의 약속을 순종하면 번영과 복이 보장되지만 그 약속을 어기고 다른 신을 섬기거나 하나님을 배반하면 저주와 벌이 임한다는 사실을 다윗이 잠시 망각하였습니다.하나님을 잊는 것, 하나님의 약속보다 사람의 욕심을 앞세우는 것, 이것이 바로 사단이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갈라놓는 미혹의 방식이며 다윗은 그 먹이감이 되었습니다.

이스라엘이 가나안 땅에 처음 들어올 때와 비교하여 400여 년이 지난 후 다윗 시대에 얼마나 놀랄만한 번영을 이루었습니까? 가나안 땅에 들어갈 때 약 60만이었는데 다윗 시대에 와서 이스라엘에 80만, 유다 지파 중에 50만 명이 전쟁에 나갈 수 있는 막강한 군사력을 보유하였습니다. 그러나 전쟁이 사람에게 달렸습니까? 사람의 숫자가 많으면 전쟁에서 이깁니까? 이스라엘은 그런 방식으로 승리를 이끌어 온 나라가 아니었습니다. 요압이 ‘이 백성은 얼마든지 왕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백 배나 더하게 하사 내 주 왕의 눈으로 보게 하시기를 원하나이다’ 충고했던 것처럼 하나님께서 이보다 더 많게도 하실 수 있는 나라와 백성이었습니다. 다윗은 잠시 이 진리를 망각하고 인간적인 욕심에서 자기 왕국의 군사력을 계산해보고 싶었습니다.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요 거만한 마음은 넘어짐의 앞잡이니라’(잠16:18) 하였습니다. 다윗은 교만함으로 넘어지고 있는 중이었습니다. 그의 거만한 마음과 인간적인 야망이 다윗을 궁지로 몰아넣었습니다.

다윗은 인구조사를 한 후에 비로소 정신이 들었습니다. 자신이 저지른 일이 무엇인지 깊이 깨닫고 회개하며 하나님께 용서를 구하였습니다.  ‘내가 이 일을 행함으로 큰 죄를 범하였습니다. 여호와여 이제 간구하오니 종의 죄를 용서하여 주십시오.  내가 심히 미련하게 행동하였습니다’(삼하24:10).  다윗이 이렇게 회개하고 용서를 빌었으니 하나님께서도 없었던 일로 여기고 그냥 넘어가셨습니까?  

하나님께서 선지자 갓을 다윗에게 보내어 ‘내가 너에게 세 가지를 보이노니 그 중에 하나를 택하라 내가 그것을 너에게 행하겠다’고 하십니다. 그 세 가지가 무엇입니까? 첫째는 왕의 땅에 7년 기근이 있을 것, 둘째로 왕이 대적에게 쫓겨 3개월을 도망할 것인가, 셋째로 왕의 땅에 3일 동안 온역이 있을 것인가 이 세 가지 중에 하나를 생각하고 대답하라 하십니다. 역대상에는 3년 기근, 3개월 도망생활, 3일 온역이라고 했습니다.  3년이든, 3개월이든 그리고 3일이든 하나님이 정하신 징계는 가혹하고 피할 수 없는 벌이었습니다.

기근과 칼, 질병은 하나님께서 범죄한 백성을 징계하시는 재앙의 상징적 목록들입니다. 어느 한 가지 가볍고 쉬운 벌이 없었습니다. 다윗은 자기 시대에 이스라엘 땅에 내린3년 기근을 경험한 적이 있습니다.하나님께서 사울과 그의 가족들이 하나님과의 언약을 파기하고 기브온 사람들의 억울한 피를 흘린 죄의 댓가로 이스라엘 나라에 3년간 연속으로 흉년이 들게 하였습니다. 다윗이 그 원인을 찾아내고 기브온 사람들의 억울함을 풀어주었을 때 하나님은 비로소 그 땅의 기도를 들어주셨습니다(삼하 21장).

사울 왕의 칼을 피하여 도망다녔던 지긋지긋한 과거의 경험이 있습니다.  그리고 아들 압살롬의 반역으로 왕궁을 도망쳐 나왔던 슬픈 기억도 있습니다. 어느 하나를 선택해야만 했던 다윗의 머리에 쥐가 났을 겁니다.다윗은 ‘내가 곤경에 있도다 여호와께서는 긍휼이 크시니 우리가 여호와의 손에 빠지고 내가 사람의 손에 빠지지 않기를 원하노라’ 하며 하나님의 긍휼과 처분에 맡기고 세번째 벌을 선택하였습니다.

하나님의 벌이 이스라엘 땅에 내리자 백성들이 전염병으로 죽어가는데 다윗이 인구조사를 하였던 단에서부터 브엘세바까지 백성의 죽은 수가 7만 명이었습니다. 얼마나 두려운 벌입니까? 이제 천사가 마지막으로 예루살렘을 향하여 손을 들어 치려고 할 때 하나님께서 재앙을 멈추게 하셨고 천사는 여부스 사람 아라우나의 타작마당 곁에 있었습니다. 다윗이 백성들을 치는 천사들을 보고 하나님께 기도하기를 ‘나는 범죄하였고 악을 행하였지만 이 양 무리는 무슨 잘못을 하였습니까?청하오니 주의 손으로 나와 내 아비의 집을 치고 백성에게 재앙을 내리지 마옵소서’ 합니다.

하나님은 긍휼이 크신 분이라 회개하고 돌아오는 사람을 용서하십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용서는 댓가를 지불하는 용서입니다. 잘못을 뼈저리게 깨닫고 회개하면 거저 용서해야 사랑인 듯 하지만 하나님은 죄에 대한 책임을 물으심으로 사랑과 용서의 의미를 확실하게 가르쳐 주십니다.  그래야 죄인들이 죄의 악함과 형벌의 두려움을 깨닫고 다시는 죄의 길로 들어가지 않겠다는 교훈을 받습니다. 의인이라도 범죄하면 벌을 받고 악인이라도 회개하고 돌아오면 용서를 받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공평하심입니다(겔18장). 

잘못한 자식을 무조건 귀여워하며 모르는 척 눈감아주고 엉덩이 두들기며 내 귀여운 새끼하고 받아주면 그 자식은 절대로 사람이 되지 못합니다.무조건 용서는 결코 사랑이 아닙니다.사람이 잘못을 저질렀는데 아무 일 아닌 것으로 여기고 덮어주면 하나님의 공의에도 어긋납니다.  죄에는 형벌이 따릅니다.  대신 회개하는 자녀에게 내리는 형벌은 사랑으로 허락하시는 징계입니다. 그 징계가 받을 당시에는 괴롭고 슬프지만 사랑하는 자녀를 아주 망하게 하지 않습니다. 죄에 대한 책망을 받고 옳은 길로 돌아서야 그 영혼이 살기 때문입니다. 

‘주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하시고 그의 받으시는 아들마다 채찍질 하심이니라’(히12:6) 하신 말씀을 기억하십니까? ‘징계는 다 받는 것이어늘 너희에게 (징계가)없으면 사생자요 참아들이 아니니라’(히12:8), ‘징계가 당시에는 즐거워 보이지 않고 슬퍼 보이나 후에 그로 말미암아 연달한 자에게는 의의 평강한 열매를 맺나니 그러므로 피곤한 손과 연약한 무릎을 일으켜 세우고 너희 발을 위하여 곧은 길을 만들어 저는 다리로 하여금 어그러지지 않고 고침을 받게 하라’(히12:11-13) 하십니다.

다윗은 아라우나의 타작마당을 값주고 하나님께 제사를 드렸습니다. 땅 주인 아라우나가 왕에게 거저 드리겠다고 하였지만 다윗은 ‘내가 값을 주고 네게서 사리라 값 없이는 내 하나님 여호와께 번제를 드리지 아니하리라’ 하며 값을 치르고 거기서 번제와 화목제를 드렸습니다. 하나님께서 그 기도를 들으시고 이스라엘에게 내리는 재앙을 그치셨습니다. 다윗이 값주고 산 타작마당은 훗날 솔로몬 성전의 터가 됩니다.  비록 징계의 아픔은 있지만 죄를 깨닫고 하나님을 더 가까이 하게 된 다윗은 아들이 맡아 세우게 될 성전 건축을 본격적으로 준비합니다. 하나님은 죄인이 하나님께 찾아와 엎드리며 회개하는 그곳을 은혜의 자리가 되게 하십니다.  징계의 아픔이 있지만 더 큰 은혜를 체험한 다윗입니다. 고통의 자리였지만 거기서 하나님을 만나고 그곳을 하나님의 복을 받는 은혜의 자리가 되게 하시는 것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시는 은혜의 방법입니다.

사순절 네째 주일에 이 말씀을 통하여 하나님의 공의로우신 심판과 용서를 배웁니다.  아담과 하와가 용서를 받고 부끄러움을 가리우지만 그 대신 죄없는 짐승이 대신 죽어 그들의 허물을 덮었습니다.  죄인들이 어린 양을 희생제물로 드릴 때 하나님은 그 피를 보고 죄를 용서하셨습니다.  그 피가 대신 죄인을 위해 값을 치른 것입니다. 예수께서 우리를 위해 대신 죽으셔야만 했습니다.  사랑하는 아들을 우리 대신 십자가에 죽게 하심으로 우리를 용서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값없이 용서하신 것이 아니라 독생자의 피값으로 우리를 사셨습니다. 그리스도의 죽으심에 비하여 내가 세상에 사는 날 동안 받는 징계는 지극히 가벼운 것입니다. 내가 받은 징계가 나의 죄를 완전하게 씻을 수 없지만 하나님은 긍휼이 크신 분이시라 그만한 징계로 우리를 용서하시고 그리스도의 보혈로 완전히 덮어주셨습니다. 오늘 성찬식을 행하며 주님이 우리에게 말씀하신 약속과 새계명을 또 기억합시다. 우리를 위하여 흘리신 피와 찢기신 몸입니다.  우리를 아버지와 하나 되게 하시려고 자신의 몸을 화목제물로 하나님께 드리셨습니다. 나 같은 죄인 살리신 사랑과 은혜가 놀랍습니다. 주님의 고난과 죽음을 기억하며 이 한 주간도 감사와 찬송 가운데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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