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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예수의 가르치심(1) : 하나님 아버지 (눅 2:41-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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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의 가르치심① : 하나님 아버지 (눅 2:41-51)
  

예수님은 우리에게 하나님을 가르쳐 주셨다. 하나님이 과연 계신가 하는 것은 언급하지 않았다. 예수님은 언제나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증거하셨다. 하나님이 아버지시다. 이것은 복음서에서만 150번이나 나오고 있다. 하나님이 아버지라면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선언이다. 왜 아들인가? 이것에 대해서 예수님은 어떤 입장의 논증은 하지 않는다. 아버지와 아들이라는 것은 믿고 사는 것이기 때문이다. 

오늘 본문을 보면 예수님에게는 육신의 부모가 계셨다. 해마다 유월절이 되면 예루살렘으로 갔는데 예수께서 12살이 되었을 때 사건이 발생되었다. 예수님은 예루살렘에 머물러 계셨고 부모는 이를 알지 못한 체 갈릴리로 되돌아가고 있었다. 결국 하룻길을 간 후 친족 중에 찾고 아는 자 중에 찾았으나 만나지 못하고 예수를 찾으러 예루살렘으로 되돌아간다. 사흘이 지나 성전에서 예수를 찾았는데 예수님이 선생들 중에 앉으사 듣고 묻고 대답을 하고 있었다. 예수를 찾게 된 육신의 부모는 이렇게 물었다. “아이야 어찌하여 우리에게 이렇게 하였느냐 보라 네 아버지와 내가 근심하여 너를 찾았노라.” 

이때 예수님은 눅2:49에서 이렇게 대답한다. “어찌하여 나를 찾으셨나이까 내가 내 아버지 집에 있어야 될 줄을 알지 못하셨나이까” 이 말씀 앞에서 눅2:50을 보면 “그 부모가 그가 하신 말씀을 깨닫지 못하더라.”고 기록한다.

예수님의 아버지는 요셉이고, 그 어머니는 마리아다. 그리고 예수님의 집은 갈릴리 나사렛 동네다. 그런데 예수님은 하나님의 집, 예루살렘 성전이 내 아버지 집이라 선언하고 또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르며 선언한 것이다. 이것이 깨달아지지 않았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여기 있는데 성전이 내 아버지의 집이라니... 

그렇다면 하나님이 아버지라고 선언하시는 것이 아닌가? 예수님의 가르치심의 독창성은 바로 이것이다. 하나님이 아버지시다. 여기서 예수님의 자의식을 보게 해준다. 즉 나는 하나님의 아들이다. 아들로서 나는 이 세상에 보내어졌고 하나님과 아들로서 하나되어 걷는다. 나는 하나님과 친밀한 관계로 살아가고 있다는 선포이다.

예수님은 눅3:21에서 세례를 받는다. 세례를 받으시고 기도하실 때 하늘이 열렸다. 눅3:22에 “성령이 비둘기 같은 형체로 그의 위에 강림하시더니 하늘로부터 소리가” 들려왔다.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 

예수님의 자의식 속에 아들이라는 신분이 각인된 것이다. 소년 시절이나 30세가 되었을 때나 주님은 하나님의 아들로서 살고 하나님의 아들로서 공생애를 시작하는 것이다. 그리고 공생애의 마지막으로 십자가를 짊어지셨을 때도 예수님은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외치셨다. 

눅23:34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눅23:46 “아버지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

오직 주님은 아들로서 아버지를 구하고 있고 아버지는 아들로서 영광을 얻고 있다.

그러면, 하나님을 아버지로, 그리고 그 아버지의 성전을 내 아버지의 집으로 고백하는 말씀 속에는 무슨 의미가 담겨 있는가?  

1. 신앙 생활은 형식주의를 뛰어넘는 것이다.

성전은 다양한 제사를 드리는 곳이다. 여러 가지 규례가 지켜져야 하고 정해진 예물과 의복, 절차가 뒤따라야 하고 그러다 보면 형식주의로 고착화되고 오랜 시간과 함께 허례 허식에 매달리게 된다. 그러나 하나님이 아버지이시고 성전이 하나님 아버지의 집이라면 신앙 생활은 형식주의가 될 수 없다. 아버지 집에서는 사랑과 돌봄, 존경과 신뢰로 가득하다. 자유로움과 친밀함이 넘쳐야 한다. 

다시 말해 예수님은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함으로써 신앙의 형식주의와 결별하고 있는 것이다. 아버지와 아들이 만나는 집에서 무슨 형식과 절차가 중요한가? 아버지 집에 있는 평안과 감사, 아들을 보고 있는 아버지의 기쁨과 만족함, 그것이 교류되는 것이 예배이고 그것이 느껴지는 것이 신앙 생활이다. 

신앙 생활은 형식주의를 뛰어넘는 것이다. 신앙이란 어떤 때는 형식도 중요하지만 형식을 뛰어넘는 자유로움 또한 중요한 것이다. 아니 더 중요한 것이다.
  

2. 신앙 생활은 모든 것을 구하고 얻는 것이다.

교회에 나오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도움을 필요로 한다. 그래서 기도를 통해 우리는 하나님께 모든 것을 구한다. 이 구할 수 있는 것과 얻을 수 있는 근거가 무엇인가? 하나님이 아버지가 되어주셔서 나에게 관심을 가지고 계시고 주시기를 원하시기 때문이다. 

마7:7에서 구하라, 찾으라, 두드리라고 말씀하신 주님은 마7:11 “너희가 악한 자라도 좋은 것으로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주시지 않겠느냐?”라고 하셨다. 그렇다. 아버지는 떡을 달라할 때 돌을 주실리 없고 생선을 달라고 하는 아들에게 뱀을 주실 리가 없다. 악한 아버지도 자식에게는 좋은 것을 주신다. 어찌 좋으신 하늘 아버지, 아들에게 관심이 있고 아들에게 귀를 기울이시는 하늘 아버지가 구하는 자에게 응답하지 않겠는가?

오늘 성전에 머물러 계시면서 성전을 내 아버지 집이라 하신 주님! 그 성전을 또 내 집은 기도하는 집(마21:13)이라고 하셨다. 아버지 집에 있는 아들이기에 아버지께 구하는 일은 마땅한 일이다. 기도할 자격이 있어서 기도하고 기도할 자격이 없어서 기도를 못하는 것이 아니다. 내 아버지 집이라는 그 말 속에는 누구든지 모든 것을 구하고 얻을 수 있는 아들이 그 특권을 맘대로 쓰는 곳임을 드러내준다. 보잘 것 없어 보이는 작은 것까지라도 구하라. 남의 나라, 이웃 집의 어려움까지도 구하라. 내 아버지 집에서 우리는 원하는대로 구하므로 다 받게 될 것이다. 내 아버지 집은 모자라서 주지 못하는 부도난 집이 아니다. 내 아버지 집은 하나님의 명패가 붙어있는 집이다. 아들된 우리들이 구하지 못할 이유가 없다.
  

3. 신앙 생활은 내가 가장 사랑 받는 존재임을 경험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아버지시다. 아버지이기에 한 아들의 사정을 잘 알고 계신다. 아버지는 아들이 많이 있어도 도매급으로 사랑하지 않는다. 개인 개인, 구체적으로 사랑하고 가장 귀하게 여겨 주신다. 요셉과 마리아가 아들을 찾아 사흘 길을 헤매었다면 하늘 아버지는 평생을 찾으시고 관심을 갖고 계신다. 

성경을 보라. 참새 두 마리가 한 앗사리온에 팔린다고 하였다. 그러나 마10:29에 “너희 아버지께서 허락하지 아니하시면 그 하나도 땅에 떨어지지 아니하리라.”고 하였다. 하물며 우리는 누구인가? 우리는 아들이다. 마10:30 “머리털까지 다 세신 바 되었나니...너희는 참새보다 귀하니라.” 우리의 인생은 아무 것도 아닌 인생이 아니다. 아버지가 머리털까지라도 헤아리는 귀중하고 세심한 사랑을 받는 존재다. 

우리는 아버지 집인 교회에서 이 구체적인 이 사랑을 경험해야 한다. 성전이 아버지 집이라면 교회는 역시 하나님 아버지 집이다. 주님이 머리되신 집이다. 이 집에서 사랑대신 미움이 있고 아버지가 가출해서 텅빈 집안처럼 냉랭한 기운이 돌아서는 안된다. 아들로서의 나는 아버지의 헤아리고 돌보시는 사랑을 믿고 지금도, 앞으로도 하나님께 가장 사랑받는 존재임을 매일 느껴야 한다. 하나님이 나를 보배롭고 존귀하게 여겨 주신다는 것으로 인해 두려움이 물러가야 한다. 인생의 슬픔과 비탄이 물러가야 한다. 외로움과 눈물이 씻겨져야 한다. 

어거스틴은 말했다. 하나님은 마치 우리 밖에는 사랑할 사람이 없는 것처럼 우리 각자를 그렇게 사랑하신다. 아버지 집에서 우리는 이 아버지의 사랑을 경험하고 이 사랑을 노래하자. 사랑을 받으라고 예수님이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가르친 것이 아닌가? 
  

4. 신앙 생활은 서로 돕고 하나가 되는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른다면 하나의 가족이다. 꼭 혈통으로 태어나야 가족이 되는 것이 아니다. 예수님은 “누가 가족인가? 누가 내 어머니이며, 내 동생이냐?” 하시고 마12:50 “누구든지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하는 자가 내 형제요 자매요 어머니이니라.”라고 하셨다. 

내 아버지 집에 거하는 우리들은 가족이다. 아버지의 뜻대로 하는 이상 모두가 식구이다. 성전에서의 신앙 생활은 서로의 차이 때문에 갈라지는 것이 아니다. 아버지 집이라면 성도는 성도 간에 서로 도와야 한다. 한 식구들끼리인데 같은 아버지를 모시고 사는 자녀들인데 무엇이 문제가 되는가? 갈등, 분쟁, 반목이 나타나는 것은 아버지 집을 도둑의 집으로 알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아버지시고 교회가 내 아버지 집이라면 아들된 우리 모두는 형제요, 자매요, 오빠요, 동생이다. 우리는 내 아버지 집에 머문다면 교파, 학연, 지연, 혈연 등에 걸려서도 안된다. 

영적 일치를 가로막는 불협 화음이 들어오지 못하고 사람들을 장악하려는 세속적 음모가 설 수가 없다. 내 아버지 집에서 한 권속의 끈끈한 정을 누려야 한다. 돕고 도와주고 섬기며 하나되어 가는 자들이 되어야 한다. 하나님 아버지 앞에 우리는 한 식구다. 

나는 어릴 적 쌍둥이 네와 논에서 싸움을 한 적이 있다. 혼자서 덤벼들면 감당하겠는데 둘이서 함께 달려드는데 어찌해 볼 도리가 없다. 하나의 짝패가 되어 얼마나 달려드는지 식구가 되어 덤비는 것에 싸워볼 수가 없다. 결국 이길 수가 없어 도망갔다. 우리는 내 아버지 집에 머무는 아들로서 먼저 공동체가 되어야 한다. 세상을 이기고 헛된 우상을 이기고 사탄을 이기는 것은 성도가 내 아버지 집에서 하나가 되는 끈끈함으로 일치될 때이다.   

여기 승리의 길이 있다. 하나님은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시다. 아버지라고 가르쳐 주신 예수님을 따라 나도 아들로서 이 세상을 당당하게 살아가자. 어깨를 펴고 주눅 들지 말고 살자. 상담 사례에 보면 육신의 아버지에게 버림 받거나 학대를 받은 아이는 하나님이 아버지시라고 한다면 “나는 교회가 싫다. 교회가 내 아버지 집이라는 것이 이해할 수 없다.”고 한다. 그리고 비관하고 주눅 들고 살아간다. 불평하고 산다. 

그러나 하나님 아버지는 육신의 아버지와 다르다. 그는 영원토록 우리를 버리지 않고 떠나지 않으신다. 나에게 많은 계획과 미래를 계획하시고 계신 하나님이시다. 이 하나님을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아버지라 믿고 부르며 살아가자. 우리가 내 아버지 집인 교회에 머무는 뜻을 알고 살아가자. 신앙 생활이 즐거운 것임을 알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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