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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내게도 오셨습니다 (막 5:21-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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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게도 오셨습니다 (막 5:21-34)


저는 명함이 없습니다. 몇 해 전에 명함을 만든 적이 있었는데, 휴대폰 번호가 바뀌고 난 후 일일이 고쳐 가지고 다니기도 귀찮고 해서 사용하지 않게 되었고, 지금은 다시 명함 없는 목사가 되었습니다. 

<명함이 없다>는 것은 두 가지 면이 있는 것 같습니다. 하나는 명함 만들어 가지고 다니는 게 귀찮아서 없는 경우이고, 다른 하나는 명함에 적을 직함이 마땅치 않기 때문인 경우도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세상 사람들은 명함이 없는 사람을 볼 때 <내세울 게 없는 사람> 정도로 여기는 경향이 있는 것 같습니다. <넌 명함도 못 내밀어.>라고 말한다면 그건 상대방을 깔보는 말일 것입니다. 아닌 게 아니라 이 세상에서는 <명함도 못 내미는 인생>은 참 서글프고 고단합니다. 여러분, 혹시 <난 명함도 못 내미는 사람이야!>라고 생각하신 적은 없으셨습니까? 

그러나 저는 우리가 이런 마음에서 벗어나길 원합니다. 따지고 보면 예수님도 명함도 못 내미는 분으로 사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서 대제사장이나 서기관, 백성의 장로들 같은 대단한 사람들과 맞섰을 때, 상대방은 예수님이 갈릴리 나사렛 출신에다 목수라고 비웃었습니다. 그들은 요즘 같으면 <대제사장 가야바>, <총독 빌라도>, 뭐 이런 거창한 명함을 가지고 다닐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명함도 못 내밀 사람 정도로 초라해 보이셨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정확히 말하면 예수님은 명함도 못 내밀 정도로 초라한 분이 아니라, 명함을 내밀 필요가 없는 분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어느 모임에서 잘 모르는 그저 그런 사람끼리 처음 만나면 명함을 주면서 자신을 소개합니다. 그러나 그 모임에 대통령이 참석한다면 명함이 필요할까요? 대통령이 명함을 주면서 <저 이명박이라고 합니다. 지금 대한민국 대통령으로 일하고 있는데, 잘 부탁합니다.> 이렇게 말할 필요가 있습니까? 명함을 주고받는 사람보다 위대한 인물은 명함을 줄 필요가 없는 사람입니다. 

예수님은 명함 따위로 자신을 소개해야 할 분이 아닙니다. 온 세상 만물이 그 분을 소개하는 명함입니다. 거대한 우주, 정교한 자연, 뒷동산의 짝은 꽃망울 하나 하나까지도 예수님의 영광을 드러냅니다. 그 분은 온 세상의 주인이십니다. 그 분은 명함이 필요 없는 분입니다. 성도 여러분, 기뻐하고 감사하십시오. 그 분이 우리 구주이십니다. 우리의 하나님이십니다. 

그 예수님이 우리에게 당신의 영광을 나눠주려고 오셨습니다. 우리도 더 이상 명함이 필요 없는 영광을 얻게 될 것입니다. 대통령 영부인은 대통령은 아니지만 대통령의 아내이기 때문에 명함이 필요 없습니다. 우리도 그렇습니다. 우리도 예수 그리스도의 사람이 되면 더 이상 명함이 필요 없는 영광을 얻게 될 것입니다. 이런 자부심을 가지시길 기원합니다. 우리 안에 이미 <난 예수님의 사람이다>라는 자기 확신을 가지길 원합니다. 

오늘 읽은 본문을 보면 명함을 내 밀 수 있는 사람과 명함도 못 내밀 사람이 등장하고 있습니다. 당당히 명함을 내 밀 수 있는 사람은 <야이로>라는 인물입니다. 만약 그 때도 명함이 있었다면 그의 명함에는 <가버나움의 회당장 야이로>라고 찍혀 있을 것입니다. 당시 회당장은 회당을 운영하고, 예배를 사회하고, 기도자 및 성경봉독자, 설교자를 결정하고, 회당의 여러 일을 결정하는 권한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어떤 때는 한 회당에 회당장이 세 명 정도 있기도 했습니다. 가버나움은 상당히 큰 곳이었고, 야이로 외에도 다른 회당장이 있었습니다. 어쨌든 그는 가버나움의 유력 인사였고, 힘이 막강했습니다. 그 누구도 야이로의 뜻을 거역하기 어려웠을 것입니다. 

이제 본문을 살펴봅시다. 어느 날 가버나움 바닷가에 많은 사람들이 모였습니다. 본문 21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배를 타시고 다시 맞은편으로 건너가시니 큰 무리가 그에게로 모이거늘 이에 바닷가에 계시더니>라고 되어 있지요. 그 때까지 예수님은 <거라사>에 계셨습니다. 거기서 귀신들린 사람을 온전하게 하셨습니다. 그 예수님께서 가버나움으로 돌아오신 것입니다. 

가버나움 사람들은 예수님을 기다렸습니다. 예수님이 오시면 부탁할 게 많았습니다. 말씀도 들어야겠고, 아픈 사람도 데리고 와야했습니다. 그러나 그 날 그들은 자신의 사정을 말씀드릴 기회를 얻을 수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회당장 야이로가 예수님을 독차지했기 때문입니다. 

22-23절을 보십시오. <회당장 중의 하나인 야이로라 하는 이가 와서 예수를 보고 발아래 엎드리어 간곡히 구하여 이르되 내 어린 딸이 죽게 되었사오니 오셔서 그 위에 손을 얹으사 그로 구원을 받아 살게 하소서 하거늘>이라고 했습니다. 이건 정말 놀라운 장면입니다. 가버나움의 유력한 회당장이 예수님 앞에 엎드려서 간청하는 모습이 얼마나 대단합니까? 어쨌든 그 날 다른 사람들은 구경꾼이 되어야 했습니다. 24절을 보면 <이에 그와 함께 가실새>라고 되어 있습니다. 사람들은 야이로와 예수님을 따라 함께 가게 되었습니다. 

이 때 가버나움 사람들의 마음은 어떠했을까요? 그 중에 어떤 사람은 마음이 바싹바싹 타 들어가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 중엔 야이로보다  사정이 더 급한 사람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어쩔 수 없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야이로의 집으로 가는 것을 바라만 보고 있어야 했을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우선 회당장 야이로의 권위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앞에서도 말씀드린 것처럼 회당장은 유지였습니다. 힘이 있었습니다. 회당장 눈밖에 나는 것은 두려운 일이었습니다. 예수님도 회당장의 요청에 응하여 그의 집으로 가고 계신 마당에 감히 예수님께 자기 사정을 아뢸 수는 없었습니다. 우선 기다려야 한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야이로가 볼 일을 다 보면 그 후에 예수님께 달려가리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또 보고만 있는 또 다른 이유는 야이로의 딸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 때문이기도 했을 것입니다. 그 아이가 평소부터 몸이 허약해서 가버나움 사람들이 모두 안타깝게 여기고 있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더구나 회당장이 예수님께 엎드려 간청하는 것을 보면서 무슨 생각을 했겠습니까? <그 애, 정말 안 됐어, 늘 햇빛도 못 보고 집에 누워 있으니, 한창 뛰어 놀 나이에....얼마 전에 한 번 보니 병색이 완연하더라구, 금방 쓰러질 것 같았어. 회당장님도 요즘 마음이 말이 아닐 거야. 얼마나 지금 급하면 저럴까? 안 됐어....> 이런 마음이었을 것입니다. 

사람들은 모두 야이로와 예수님을 따라 가고 있었습니다. 그 모습을 24절에서 보면 <이에 그와 함께 가실새 큰 무리가 따라가며 에워싸 밀더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큰 무리가 이리 밀고, 저리 밀면서, 흙 길을 밟고 가니 먼지가 뽀얗게 일어나고, 대단히 혼란스러웠을 것입니다. 

야이로가 예수님을 독차지하고 가고 있는 바로 그 때, 한 여인이 등장했습니다. 그녀는 아무 것도 눈에 보이지 않는 것 같았습니다. 예수님께서 야이로의 집에 가고 계시다는 것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습니다. 야이로가 예수님을 독차지하고 있다는 것도 그녀에겐 아무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녀는 사람들 틈을 비집고 예수님께로 가까이 접근했습니다. 그녀는 예절도 없어 보이고, 상황 파악도 안 되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사람들은 속으로 <이 여자가 왜 이래?> 이렇게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녀는 무조건 예수님 가까이로 다가섰습니다. 

여러분, 왜 그녀가 안하무인처럼 사람들 틈을 비집고 예수님께로 가까이 나아갔을까요? 그것은 그녀가 너무 급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녀의 사정은 정말 딱했습니다. 그녀의 사정을 본문 25절 이하에서 보십시오. <열두 해를 혈루증으로 앓아 온 한 여자가 있어 많은 의사에게 많은 괴로움을 받았고 가진 것도 다 허비하였으되 아무 효험이 없고 도리어 더 중하여졌던 차에>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녀는 열두 해를 혈루증으로 앓고 있는 중이었습니다. 열두 해는 결코 짧은 세월이 아닙니다. 한 사람의 생애의 적어도 1/5, 1/6이나 되는 긴 시간입니다.  또 그녀는 지금 병이 점점 깊어가고 있었습니다. 날마다 악화되고 있었습니다. 그녀의 얼굴을 창백했고,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처럼 보였을 것입니다. 게다가 그 동안 많은 의사를 찾아가 보았지만, 고생만 했고, 돈만 탕진했습니다. 이제 그녀에게는 남은 돈도 없었습니다. 

그녀는 막무가내로 예수님께로 가까이 다가섰습니다. 그녀가 필사적으로 예수님께 나아가는 모습이 27절에 나옵니다. <무리 가운데 끼어 뒤로 와서>라고 했습니다. <무리 가운데 끼어>, 그녀가 예수님께로 가까이 가기 위해 얼마나 필사적인가를 보여줍니다. 그녀는 품위를 유지하면서 치맛자락이나 감싸 쥐고 있는 귀부인과는 거리가 멀었습니다. 멀찍이 서서 날아오는 먼지를 피하려고 얼굴을 가리는 여인도 아니었습니다. 어쩌면 예수님께 가까이 가는 동안에 신발이 벗겨졌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넘어질 뻔했을지도 모릅니다. 어쨌든 예수님께로 가까이 가는 것이 그녀의 소원이었습니다. 

그 때 그녀의 마음이 어땠을까요? <제발, 좀 비켜 주세요. 전 지금 너무 급합니다. 죽을 지경이에요. 저를 욕해도 좋아요. 전 지금 예수님께 가야 합니다. 야이로 회당장님, 당신만 급한 게 아니랍니다. 당신보다 제가 더 급합니다. 당신 딸은 이제 겨우 열 두 살이지만, 난 당신 딸이 태어나던 해부터 이미 열 두 해나 앓고 있는 중이랍니다. 그러니 저부터 예수님의 은혜를 받아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전 예수님이 당신 집에 가는 것을 막을 생각이 전혀 없습니다. 그냥 그 분의 옷에 손만 살짝 대려고 합니다. 그러니 당신에게는 조금도 해가 되지 않을 겁니다. 예수님의 능력이 제게 흘러나온다고 해서, 당신 딸에게 불리한 일은 없을 겁니다. 그 분은 능력은 바다 보다 깊고 하늘 보다 높고 위대하니까요. 난 그 분의 옷만 만져도 나을 줄 믿습니다. 그러니 당신이 독차지한 예수님을 1초만 제게 빌려주십시오.> 이런 마음이었을 것입니다. 

드디어 그녀는 예수님 가까이 접근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그녀는 떨리는 손으로 예수님의 옷에 손을 대었습니다. 어떻게 되었을까요? 이 대목을 27절 -29절에서 다같이 읽어보겠습니다. <예수의 소문을 듣고 무리 가운데 끼어 뒤로 와서 그의 옷에 손을 대니, 이는 내가 그의 옷에만 손을 대어도 구원을 받으리라 생각함일러라. 이에 그의 혈루 근원이 곧 마르매 병이 나은 줄을 몸에 깨달으니라> 할렐루야!  

성도 여러분, 오늘 저는 우리가 이 여인에게서 배우길 원합니다. 그녀처럼 하길 원합니다. 우리는 그녀에게서 <예수님을 양보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배우길 원합니다. <은혜 받는 일에는 양보가 없다>는 것을 배우길 원합니다. 

아마도 그 무리들 중 어떤 사람들은 때가 오길 기다리고 있었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야이로의 딸을 고치신 후, 그 다음에 내 소원을 말씀드리리라>고 생각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건 옳은 태도가 아닙니다. 그건 단지 <아직 급하지 않다>는 증거일 뿐입니다. 정말 급한 사람은 다음을 기다릴 수 없습니다. 당장 은혜가 급하면 이것저것 고려하고 있을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야이로의 집에 가시는 중이라는 것, 사람들이 너무 많아 예수님께 가기 어렵다는 것 등은 문제가 아닙니다. 은혜를 갈망하는 사람은 아무리 어려워도 예수님께로 나아가게 됩니다. 

저는 우리에게 이 여인과 같은 간절함이 있길 원합니다. 아직 급하지 않다는 듯이 가만히 있지 않기를 원합니다. 은혜 받는 일을 남에게 양보하는 것은 바보 같은 일입니다. 은혜를 사모하십시오. 예수님께로 나아가십시오. 은혜를 받으시길 기원합니다. 

어떤 분들은 너무 점잖아서 야이로의 딸을 배려하는 마음으로 참고 있는 분도 있을지 모릅니다. <나보다 더 급한 사람이 있지 않는가!> 좋은 마음입니다. 그러나 은혜를 받는데는 이런 마음은 필요 없습니다. 

또 어떤 사람은 <내가 중간에서 예수님의 은혜를 받으면, 예수님께서 야이로의 딸을 못 고치면 어떻게 하나> 이런 걱정도 할 필요 없습니다. 예수님의 능력은 무한합니다. 우리를 고쳐도, 다른 사람도 얼마든지 은혜를 얻을 수 있습니다. 

은혜는 사모하는 자가 먼저 받습니다. 열망하는 사람이 많이 받습니다. 천국은 침노하는 자가 얻습니다. 예수님이 우리 인생 앞을 지나가시도록 가만히 계시지 마십시오. 

성경에는 길거리에서 은혜를 받은 사람들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여리고 성문 앞의 맹인도 그렇습니다. 그는 예수님께서 지나가신다는 말을 듣고 있는 힘을 다해 외쳤습니다.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사람들이 조용히 하라고 꾸짖었지만, 그는 더 높이 외쳤습니다.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예수님은 여리고 성문을 지나가고 계셨지만, 그가 예수님을 불렀을 때, 예수님은 마치 그를 위해 거기 오신 것처럼 그에게 은혜를 베푸셨습니다. 

다 양보해도 좋지만, 예수님을 양보하지는 마십시오. 예수님 뒤를 따라가서 예수님께서 야이로의 딸을 고치는 것이나 구경하고 집에 돌아간다면 그는 가장 어리석은 사람일 것입니다. 다른 사람이 은혜 받는 것을 구경만 하면 안 됩니다. 다른 사람이 복을 받은 것을 간증으로 듣기만 하면 안 됩니다. 다른 교회가 부흥하는 것을 부러워하기만 해서는 안 됩니다. 구경만 하는 것처럼 어리석은 일은 없습니다. 은혜 받는 일에 들러리가 되지 마십시오. 모두 주인공이 되시길 기원합니다. 

혈루증을 앓던 바로 그 여인, 우리가 본받아야 할 뜨거운 열정을 가진 그 믿음의 선배를 이 자리에 초대해서 간증을 듣는다면 뭐라고 말할까요? 아마 이렇게 말할 것 같습니다. 

<성도여러분, 예수님은 제게도 오셨습니다. 전 그 날 제가 그 분께 다가서기 전에 오히려 제가 그 분께 다가오길 기다리고 계셨다고 생각합니다. 그 분은 모르시는 것이 없으신 분이시지요. 그 분은 당신과 같이 그 길을 걷는 사람들 중에 많은 사람들이 당신의 위로가 필요하다는 것을 알고 계셨을 것입니다. 그리고 당신이 밟고 지나시는 바로 그 같은 길을 걷는 이들 중에 당장 은혜를 얻지 못하면 죽고 말 한 불쌍한 여자가 있음을 아셨을 것입니다. 제가 그 분의 옷에 손을 대는 순간, 저는 제 병이 당장 나은 것을 직감할 수 있었습니다. 그 순간의 느낌과 감동을 뭐라고 말로 표현할 수 있겠습니까? 

바로 그 순간 그 분은 몸을 돌리시며 말씀했습니다. “누가 내 옷에 손을 대었느냐?” 저는 가만히 있을 수 없었습니다. 이미 제가 한 일을 알고 계셨습니다. 저는 모든 사실을 말씀드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더구나 제가 모든 것을 고백할 수 있었던 것은 그 분이 물으시는 이유가 저를 꾸짖기 위해서가 아니라, 오히려 칭찬하기 위해서라는 확신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제가 알고 있었던 예수님은 당신께 나오는 사람을 꾸짖는 분이 아니었습니다. 그 분은 오히려 당신께 오지 않는 사람들, 은혜를 사모하지 않는 사람들, 예수님 없이도 잘 살 수 있을 것처럼 거들먹거리는 사람들을 꾸짖는 분이었습니다. “이 분은 결코 나를 꾸짖지 않을 것이다.“ 전 그 분 앞에 나아가 모든 사정을 말씀드렸습니다. 

그리고 제 생각이 맞았습니다. 그 분은 저를 꾸짖기는커녕 제가 상상도 못할 놀라운 말씀을 하셨습니다.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 네 병에서 놓여 건강할지어다“  그 순간 저는 하늘로 날아오를 것만 같았습니다. 그 길거리의 많은 사람들이 저를 부러워했습니다. 

저는 그 분의 말씀이 이렇게 들렸습니다. ”딸아, 난 네가 이미 이 무리 속에서 날 따라오고 있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단다. 네가 얼마나 절실한지 알고 있었단다. 네가 내게 다가오길 기다리고 있었지. 난 더 이상 네가 숨어서, 몰래 은총을 기다리지 않길 원한다. 이제 떳떳하게 나서라! 이제부터 언제든지, 어디서나 내게로 오너라. 내 은혜를 받아라“ 이런 말씀으로 들렸습니다.  교우 여러분, 여러분도 그분께 나아가십시오. 은혜를 받으시길 바랍니다. 

그리고 중간에 예수님을 나꿔 채는 것 같아 미안해 할 필요도 없습니다. 은혜만 받고 나면 혹시 문제 생겨도 예수님께서 알아서 해결하실 것입니다. 아닌 게 아니라, 실제로 문제가 생겼습니다. 제가 예수님과 말씀하는 동안에 회당장의 집에서 사람이 와서 딸이 죽었다 하면서 더 이상 예수님을 모셔 올 필요가 없게 되었다고 했습니다. 그 순간 회당장은 땅에 주저앉았습니다. 그가 얼마나 제게 화가 났을까요? 저 때문에 지체하지 않았다면 예수님이 회당장의 집에 도착했을 게 아니겠습니까? 저는 미안해서 고개를 들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건 쓸데없는 걱정이었습니다. 어떻게 되었냐구요? 예수님은 그 딸아이를 죽은 가운데서 살려내셨습니다. 

저는 깨달았습니다. 은혜 받는 데 미안해하지 말자. 은혜 받는 일을 남에게 양보하지 말자. 예수님을 남의 인생에만 오시도록 하지말고, 내 인생에도 오시도록 하자. 그 동안 저는 병 때문에 성전에도 못 가서 하나님도 없는 여자처럼 살았고,  남편에게도 버림받았으나, 그 날 이후 예수님은 제게 하나님이 되시고, 남편보다 더 큰 사랑의 주님이 되어 주셨습니다.> 그녀의 간증은 <명함도 못 내밀 여인의 간증>이입니다. 

오늘 이 예배에 오신 모든 분들이 이런 간증을 가지시길 기원합니다. 예순님께서는 <제 인생에도 오셨습니다>라고 간증할 수 있길 원합니다. 세상에서는 명함도 못 내밀 형편이라고 하더라도, 예수님께 명함 대신 <믿음의 손>을 내미시길 기원합니다. 예수님은 명함을 보고 우리를 기억하는 분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믿음의 손을 보고 우리를 받아주시는 분입니다. 우리의 두 손으로 예수님의 옷자락을 붙잡게 되길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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