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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회복시켜 주시는 주님 (요 2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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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복시켜 주시는 주님 (요 21:1-6)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한 남자가 대학을 다니다 입대했는데 멀리 전방으로 배치를 받았답니다. 사귀던 여자 친구가 있었는데 한 달쯤 지나자 여자친구에게서 다음과 같은 편지가 왔답니다. “우리 이제 헤어져요. 그러니 내 사진은 돌려보내줬으면 좋겠어요.” 남자는 화가 났지만 군대에 있는 몸이라 어떻게 할 수가 없었답니다. 그래서 부대 내에 있는 군인들의 여자 사진을 최대한 모은 뒤 편지와 함께 보냈답니다. 
“어떤 게 네 사진인지 기억이 안 난다. 네 것만 빼고, 다른 사진은 돌려보내줘!” 

배신당해 본 경험이 있는 분들은 실감할 것입니다. 배신당하면 "네가 나한테 어떻게 이럴 수 있어? "라는 말을 하게 됩니다. 배신감으로 고통을 받습니다. 고통이 분노가 되어 폭발하면 복수를 하게 됩니다. 복수의 방법은 다양합니다. 여인들이 배신당하면 프랑스 사람들은 배신한 남자의 연적을 죽이려 한다고 합니다. 이탈리아 사람들은 배신한 남자를 죽이려 한다고 합니다. 영국 사람들은 다른 남자를 찾는다고 합니다. 한국 사람들은 연놈을 죽이려 한다고 합니다. 

강원도에서 이런 일이 있었습니다. 서울 하월곡동에서는 71세 할아버지가 44세 먹은 애인이 변심하였다고 하여 그 여인이 경영하는 다방에 불을 질러 그 여인을 타 죽게 만드는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배신하면 삼사 대까지 저주합니다. 

우리나라 역사를 보면 왕을 배신하면 능지처참을 하였습니다. 팔다리와 어깨, 가슴 등을 잘라내고 마지막에 심장을 찌르고 목을 베어 죽였습니다. 많은 사람이 모인 가운데 죄인을 기둥에 묶어 놓고 포를 뜨듯 살점을 베어내되, 한꺼번에 많이 베어내서 출혈과다로 죽지 않도록 조금씩 베어 참을 수 없는 고통 속에서 죽음에 이르도록 했습니다. 그것도 모자라 죽은 사람은 부관참시 [剖棺斬屍]를 하였습니다. 무덤을 파고 관을 꺼내어 시체를 베거나 목을 잘라 거리에 내걸었습니다. 

[배신, 21세기를 사는 지혜/김용철 외]라는 책을 보면 21세기 대한민국에는 배신이 창궐하다고 합니다. 널리고 널려 있는 게 배신이고 수시로 겪는 것이 배신감이라고 합니다. 배신을 터부시하면서 배신자에게 혜택을 줌으로 '배신'을 권하는 사회를 장려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치열한 생존 경쟁 사회에서 성공과 출세를 위해 배신은 필연적인 필수품이라고 합니다. 

단테는 '신곡(神曲)'에서 배신자를 지옥 맨 밑바닥에 두었습니다. 배신자로 자기의 스승인 예수를 판 가룟 유다와 로마황제 줄리어스 시저를 암살한 그의 친구이던 브루투스와 카시우스를 넣어 놓았습니다. 단테는 배신은 인간이 범할 수 있는 죄악 중에서 가장 밉고, 더럽고, 비열한 최대의 죄악으로 본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배신자에게 어떻게 대했을까요? 사랑했던 수제자입니다. 그런데 십자가에 달리니까 배신하고 저주까지 하고 도망갔습니다. 

오늘 성경 보십시오. 예수님은 저주하거나 복수하시지 않습니다. 배신한 베드로 찾아가셨습니다. 도망간 베드로 찾아가셨습니다. 자신을 저주한 베드로를 찾아가셨습니다. 끝까지 따르겠다고 약속해 놓고도 지키지 못한 베드로 찾아가셨습니다. 실패한 베드로 찾아 가셨습니다. 모든 것을 포기하고 옛 직업으로 돌아가 버린 베드로 찾아가셨습니다. 밤새도록 고기를 잡았지만 한 마리도 잡지 못한 베드로를 찾아가셨습니다. 우리 주님은 오늘날도 우리가 실패했을지라도, 배신했을 지라도, 도망갔을 지라도, 약속을 지키지 못했을지라도, 포기했을지라도 끝까지 버리지 않고 찾아오십니다. 

성경은 말씀합니다. 
“여인이 어찌 그 젖 먹는 자식을 잊겠으며 자기 태에서 난 아들을 긍휼히 여기지 않겠느냐 그들은 혹시 잊을지라도 나는 너를 잊지 아니할 것이라 (사 49:15)”

“너희는 강하고 담대하라 두려워하지 말라 그들 앞에서 떨지 말라 이는 네 하나님 여호와 그가 너와 함께 가시며 결코 너를 떠나지 아니하시며 버리지 아니하실 것임이라 하고 (신 31:6)” 

“하나님 한 번도 나를 실망시킨 적 없으시고 언제나 공평과 은혜로 나를 지키셨네 오 신실하신 주 오 신실하신주내 너를 떠나지도 않으리라 내 너를 버리지도 않으리라 약속하셨던 주님 그 약속을 지키사 이후로도 영원토록 나를 지키시리라 확신하네.” 예배드리는 이 시간 우리가 어떤 처지 어떤 형편에 처해있을지라도 우리를 찾아 오셔서 회복시켜 주십니다. 무엇을 회복시켜 주십니까? 

1. 우리는 찾아오신 예수님을 만나 잃어버린 사랑을 회복받아야 합니다. /동기

예수님은 배신한 베드로를 찾아와 개인적으로 첫 번째 하신 말씀이 무엇입니까? 15절 말씀입니다. "요안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 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왜 부인했어 나쁜 놈” 하지 않습니다. “왜 도망갔어.” “왜 그때 그런 말을 했어.” “왜 저주까지 했어.” “나를 떠나 다시 고기잡으니까 잘 되데 그 봐 나 떠나만 아무것도 안 돼. 십리도 못가서 발병 나” 그런 말씀하시지 않았습니다. 지치고 상하고 배고프고 패배의식 속에 사로잡혀 있는 제자들을 위해 예수님은 친히 조반을 준비하시고 제자들을 초청하시고(9-13절) 베드로에게 진정 나를 사랑하느냐 물어 보십니다.

사랑의 동기를 회복시켜 주십니다. 
주님을 배신하고 저주할 때 숯불 앞에서 불을 쬐고 있다 그랬는데 주님은 그 때를 상기할 수 있도록 숯불을 펴 놓고 베드로에게 물어 보시는 것입니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과거 베드로는 자신 있게 장담했습니다. “다 버릴지라도 나는 그리하지 않겠나이다 (막 14:29)” 이 사람들 다 배신한다 할지라도 저만큼은 배신하지 않겠습니다. 장담한 사람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그래 너 그렇게 말했는데 정말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베드로는 말합니다. “주님 그러하나이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 예수님은 다시 물어 보십니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주님 그러하나이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 세 번째 다시 물어 보십니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주님 그러하나이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 세 번이나 부인하고 저주까지 한 베드로에게 세 번 다시 물어 보십니다. 

베드로가 지금 회복해야 할 것을 주님에 대한 순수하고 뜨거운 사랑이었습니다. 베드로에게 닥친 위기는 실패보다 주님을 사랑하는 사랑의 동기가 식어진 것입니다. 내가 하는 일, 고깃배, 고기, 그물 등, 내가 기대하는 것 그 무엇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는 말입니다. 너는 최후의 만찬 석상에서 "다 주를 버릴지라도 나는 언제든지 버리지 않겠나이다"고(마26:33) 나에 대한 남다른 사랑을 고백했는데 정말 나를 사랑하느냐는 것입니다. 참으로 주를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아낌없이 드릴 수 있는 십자가의 사랑으로 사랑할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주님은 일보다 관계를 더 중요시 하십니다. 자식을 사랑하는 것 아내를 사랑하는 것 남편을 사랑하는 것이 우리의 일보다 더 중요합니다. 우리는 실패와 좌절의 현장에서 사랑의 동기를 회복하여 다시 사역을 감당해야 합니다. 인간에게 이 사랑의 동기만 살아 있다면 삶은 다시 회복 할 수 있습니다. 주님의 사랑을 회복해야 합니다. 

크롬웰 시대, 병사 한 사람이 죄를 지어 사형선고를 받았습니다. 사형은 교회당 옆 광장에서 저녁 종소리와 함께 집행될 예정이었습니다. 마침 그 병사에게는 사랑하는 한 여인이 있었습니다. 여인은 사랑하는 사람을 살리기 위해 크롬웰 장군을 찾아가 목숨만 살려달라고 애원했습니다. 그러나 엄격한 장군은 그 여인의 말을 들어주지 않았습니다. 여인은 곧바로 교회로 달려가 종치기에게 오늘밤은 종을 치지 말아달라고 부탁했습니다. 그런데 그 종치기는 귀머거리였습니다. 종치기는 자신의 의무대로 종을 치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사형장에는 종소리가 들리지 않았습니다. 장군이 이상히 여겨 종탑에 가보니 종 앞에 피투성이의 한 여인이 쓰러져 있었습니다. 여인은 종소리를 막기 위해 온몸으로 종에 맞선 것입니다. 장군은 감동했고 사형수는 새 생명을 얻었습니다. 

예수님의 사랑이 바로 이런 것입니다. 죄인인 우리를 살리기 위해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것입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롬5:8)" 이 사랑을 우리가 회복해야 합니다. 그 사랑을 가지고 인생을 살아가길 원합니다. 그러면 인생은 지루하지 않습니다. 힘겹지 않습니다. 인간적인 사랑도 얼마나 신이 납니까? 야곱이 그 어려운 인생살이를 하면서도 사랑이 있었기 때문에 견딜 수 있었습니다. “(창 29:20) 야곱이 라헬을 위하여 칠 년 동안 라반을 봉사하였으나 그를 연애하는 까닭에 칠 년을 수일같이 여겼더라”

바울은 그 험난한 세월을 예수님의 사랑 때문에 이겨낼 수 있었습니다. “(고후 5:14)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시는도다 우리가 생각건대 한 사람이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었은즉 모든 사람이 죽은 것이라” 

행복해지려면 사랑의 동기기 식지 않아야 합니다. 하버드대생 268명을 72년간 인생 추적을 하였답니다. 1937년 당시 미국 하버드대 2학년인 남학생 268명이 인생사례 연구를 위해 선발된 것입니다. 연구는 "잘 사는 삶에 일정한 공식이 있을까"라는 기본적인 의문에서 출발했답니다. 그들의 추적한 대상에는 연방상원의원에 도전한 사람이 4명이었고 제35대 미국 대통령이 된 존 F 케네디(Kennedy), 워싱턴포스트 편집인으로서 닉슨의 워터게이트사건 보도를 총괄 지휘했던 벤 브래들리(Bradlee)도, 유명한 소설가도 있었답니다. 그러나 연구 시작 후 10년이 지난 1948년 즈음부터 20명이 심각한 정신 질환을 호소했고, 50세 무렵엔 약 3분의 1이 한때 정신질환을 앓았답니다.

우수한 두뇌가 행복을 보장하지는 못했답니다. 1967년부터 이 연구를 주도해온 하버드 의대 정신과의 조지 베일런트(Vaillant) 교수는 행복하게 늙어가는 데 필요한 요소를 7가지로 말했습니다. 고통에 적응하는 '성숙한 자세'가 첫째였고, 교육· 안정적 결혼· 금연· 금주· 운동· 적당한 체중이라고 합니다. 그는 결론적으로 말합니다. "삶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인간관계이며, 행복은 결국 사랑"이라고 결론지었습니다. 


2. 우리는 찾아오신 예수님을 만나 잃어버린 사명을 회복받아야 합니다. /사명

사랑의 고백을 들은 예수님께서 베드로에 무엇이라고 말씀하십니까? 사랑을 확인한 주님은 다시 베드로에게 무엇을 말씀합니까? “내 어린양을 먹이라” “내양을 치라” “내양을 먹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실패하고, 결점과 약점 많은 베드로이지만 다시 사람 낚는 어부로 사명을 맡기십니다. 약하지만 너를 통해 일하겠다는 것입니다. 내 힘으로 무엇이든 지 할 수 있다고 큰 소리 친 베드로이지만, 위기를 당하니까 결국 도망간 베드로, 배신한 베드로이지만 예수님을 그에게 다시 사명을 맡기십니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라고 부르십니다. 

예수님이 이름 지어준 베드로라고 부르시지 않습니다. “너 내가 잘 알아 어떤 사람인지. 그러나 시몬아 낙심하지 말아 다시 출발해, 실패 했어 다시 일어나”라는 예수님의 의도가 숨어 있습니다. 갈릴리 해변에서 고기 잡았던 그를 처음 부르실 때를 상기시키는 것입니다. 그 때 예수님은 “(마 4:19) 말씀하시되 나를 따라오너라 내가 너희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라고 했습니다. 실패에도 불구하고 다시 기회를 주시고 사명을 주시는 것입니다. 

실패하였습니까? 신앙생활, 진학, 인간관계, 사업, 연초 계획 실패했습니까? 사람들은 배신하면 다시는 상종을 하지 않습니다. 무능한 사람, 실패한 사람 다시 쓸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은 실패한 우리를 찾아오십니다. 무능한 우리를 찾아오십니다. 배신한 우리를 찾아오십니다. 그리고 다시 사명을 회복시켜 주십니다. 

아담이 범죄하고 실패했습니다. 하나님은 다시 찾아가셨습니다. 아브라함이 자신의 아내를 누이라고 속이고 실패했지만 다시 찾아 가 기회를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실패한 모세에게 다시 사명을 주어 민족 지도자로 만들었습니다. 하나님은 아내를 누이라고 속인 아브라함을 찾아가 회복시켜 믿음의 조상이 되게 하셨습니다. 형을 속이고 도망간 야곱은 찾아가 회복시켜 12지파의 조상이 되게 했습니다. 부하의 아내를 간음한 다윗을 찾아가 회개하게 하고 성군이 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거스르고 도망간 요나를 찾아가 다시 기회를 주시고 니느웨를 변화시킬 사명을 주셨습니다. 절망한 엘리야를 찾아가 회복시기시고 다시 사명을 주셨습니다. 연약하여 사역지를 피한 마가를 찾아가 회복시켰습니다. 믿는 사람들을 괴롭히고 핍박한 바울을 찾아가 회복시키시고 세계 복음화의 사명을 감당시켰습니다. 

주님은 우리의 연약함을 아시고 이 시간도 찾아와 사명을 회복시켜 주시고 있습니다. 한 번 실패했다고 낙심하고 포기하지 말아야 합니다. 어느 집 가훈은 “ 포기란 배추를 셀 때나 하는 말이고, 실패란 바느질할 때나 쓰는 말이다.”라는 것을 삼았다는 글을 보았습니다. 지금 어떤 처지, 어떤 상황에 있던지 부활하여 찾아오신 우리 주님 만나 다시 사명을 회복하고 일어나야 하겠습니다. 

헬렌켈러는 보지 못하고 말하지 못하고 듣지 못했지만 주님 만나 사명 붙들고 정신적 유산을 남겼습니다. 링컨은 초등학교도 졸업하지 못했습니다. 수많은 실패를 했습니다. 빚에 쪼들려 고난을 당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주님 만나 사명 붙들고 일어섰습니다. 운전면허 필기시험을 950번 만에 합격한 69세 할머니의 기사를 보았지 않습니까? 

「뿌리」를 쓴 알렉스 헤일리는 8년 동안 1백 번이 넘는 불합격 통지서를 받았지만 일어나 55세가 되던 해에 세계 최고의 작가 중 한 명이 되었습니다. 갑자기 루스벨트 대통령의 서거로 미국의 대통령이 된 헨리 트루먼은 평범한 농부로 살다가 천신만고 끝에 서른아홉 살에 처음으로 공직을 얻었고, 뒤늦은 50세에 정치무대에 입성한 후 61세에 대통령이 되었습니다. 

폭풍 앞에 쉽게 포기해서는 안 됩니다. 좋은 일은 쉽게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사람은 1만 번 이상 넘어진 후에야 겨우 걸음마를 배운다고 합니다. 바람이 있어 연을 날릴 수 있는 것이며, 강렬한 햇빛이 있기 때문에 곡식은 여무는 것입니다. 강풍을 두려워하면 물은 파도를 만들지 못합니다. 서핑을 즐기는 사람은 높은 파도를 기다립니다. 

영웅은 평상시에 나오지 않고 위기에서 나옵니다. 다윗이 영웅으로 떠오른 것은 골리앗 때문입니다. 골리앗이 없었다면 다윗은 목동에 불과했을 것입니다. 다윗은 10년 동안 사울이라는 강풍을 만났습니다. 그러나 그 강풍은 다윗을 성군으로 만들었습니다. 그는 고백합니다. "의인이 나를 칠지라도 은혜로 여기며 책망할지라도 머리의 기름 같이 여겨서 내 머리가 이를 거절하지 아니할지라 그들의 재난 중에도 내가 항상 기도하리로다 (시141:5)" 강한 풀은 강한 바람으로 만들어 집니다. 한나를 기도의 어머니가 되게 한 것은 그녀를 괴롭히는 브닌나 때문입니다.

1914년 위대한 발명가 에디슨 66세 미국 뉴저지주의 웨스트 오래곤에 있는 그의 실험실이 몽땅 불에 타 버렸다고 합니다. 그 당시 약 2백만 달러가 하루아침에 날아가 버린 것입니다. 그 때 그는 아들에게 "잿더미 속에도 위대한 가치가 있다. 나의 모든 실수는 다 불타버렸고 새롭게 출발하게 되었으니 하나님께 감사한다."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욥은 모든 것을 잃어버린 인생의 늪에서 “(욥23:10) 나의 가는 길을 오직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 내가 정금같이 나아오리라.”라고 고백했습니다. 지금 잃어 버린 사명이 무엇입니까? 이 시간 다시 회복하고 붙드시기 바랍니다. 우리 예수님이 나 홀로 놓아 두지 않고 우리와 함께 하셔서 그 일을 이루도록 하실 것입니다.


3. 우리는 찾아오신 예수님을 만나 잃어버린 비전을 회복받아야 합니다. /비전

예수님은 도망간 베르도를 찾아 사랑의 동기를 회복시키시고, 양치는 사명을 회복시켜 주었습니다. 그리고 베드로에게 말씀하십니다. 18절을 보십시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네가 젊어서는 스스로 띠 띠고 원하는 곳으로 다녔거니와 늙어서는 네 팔을 벌리리니 남이 네게 띠 띠우고 원하지 아니하는 곳으로 데려가리라 (요 21:18)” 무슨 말씀입니까? 주님께서 주신 사명 감당하다가 순교하겠다는 말입니다. 순교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네가 세상에 출세할 것으로 기대하다 너의 기대대로 되지 않으니까 도망갔는데 네 인생의 마지막이 세상 출세의 길이 아니라 나를 위해 순교당하는 길이라는 것을 알려 주시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참 어처구니가 없었을 것입니다. 잘 먹고 잘 살려고 주님 따라 다녔는데 마지막이 순교의 길이라니 말도 안 되는 소리일 것입니다. 일을 맡기면서 출세하고 돈 벌고 명예를 얻고 잘 먹고 잘산다는 희망을 주시는 것이 아니라 결국 순교한다는 것입니다. 그것 싫어 도망갔는데 자신도 예수님처럼 손을 벌리고 결박되고 원치 않는 곳에서 순교를 당하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늙어서 영화를 보고 호화호식하는 삶이 아니라 십자가를 지어야 하는 사역입니다. 

19절을 보십시오. 이 말씀이 무슨 뜻인지 설명해 놓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부활하신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무엇입니까? “나를 따르라”는 것입니다. 결과가 너의 기대와는 다르다고 할지라도 너는 나를 따르라는 것입니다. 인생의 목적을 분명히 하라는 것입니다. 출세나 명예나 부자가 아니라 나를 따르는 길이 앞으로 네 인생의 비전이 되게 하라는 것입니다. 비전이 바로 나를 따르는 것이 비전이 되게 하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여러 차례 나를 따르라고 했습니다. 

주님을 따르는 것은 평안한 길도 있지만 때로는 십자가의 길도 있습니다. 제자들은 주님을 따를 때 주님의 가신 길보다는 주님을 통해 얻을 혜택을 보고 따랐습니다. 그래서 서로 좋은 자리 차지하려고 다투었습니다. 그러다 예수님이 로마 병사에게 고문당하고 처형을 당하니까 예수님을 따르는 길을 포기했습니다. 고난이 다가 오니까 포기한 것입니다. 신앙 생활하면서도 예수님 자신을 따르는 것보다 예수님이 주시는 혜택만 보고 따르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혜택이 아니라 예수님을 따름으로 십자가가 다가 오면 피해버리고 도망하고 배신해 버립니다.

베드로가 그랬습니다. 그래서 부활한 주님을 다시 찾아 오셔서 두 번이나 나를 따라 오라고 강조하시는 것입니다. 인생의 비전을 분명히 하라는 것입니다. 이 말씀을 듣고 베드로가 뭐라고 말합니까? 요한이 옆에 있는 것입니다. 좌의정 우의정 하게 해 달라고 어머니와 함께 요청한 제자입니다. 라이벌입니다. 그러면 요한은 어떻게 되겠습니까? 요즈음 말하면 왜 나만 이 모양 이 꼴입니까? 요한은 잘 나가고 나는 그 험한 십자가를 지고 순교해야 합니까? 나는 왜 이런 집에 와서 이런 헌한 꼴을 당해야 합니까? 왜 나만 회사에서 이런 수고와 수모를 당해야 합니까? 왜 나만 홀로 고민하고 고통을 받아야 합니까? 왜 우리 형 오빠는 잘 사는데 마음 착한 나는 왜 이렇게 어렵게 살아야 합니까? 나보다 공부도 못한 동창 잘 나가는데 왜 나는 이렇게 고난의 길을 걸어 가야 합니까?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22절을 보십시오. 그 인생 너 상관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순교 당하지 않게 할지라도 너는 상관하지 말고 너는 나를 따르라는 것입니다. 다 제 갈길이 있다는 것입니다. 다 자신의 십자가가 있다는 것입니다. 요한이 오래 살았어도 자신의 십자가를 지고 산 것입니다. “왜 나만 겪는 고난이냐고 슬퍼하지 말아요” 다른 사람은 어떻게 되든 너는 나를 따르라고 인생의 목표를 회복시켜 주시는 말씀입니다. 처음 부르실 때 비전을 회복시켜 주시는 것입니다. 

처음 부를 때 나를 따르라고 말씀하신 예수님께서 부활하여 다시 사명을 맡겨 주실 때도 나를 따르라고 두 번이나 거듭하여 강조하고 있습니다. 인생 성공의 길을 끝까지 주님을 따르는 길입니다. 주님을 따르는 사역은 고난의 사역일지라도 끝까지 따르는 것입니다. 리더의 가장 중요하 자질은 분명한 목표를 세우는 것입니다. 위대한 조각가는 손이 흙으로 더러워지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 (마 16:24)" 

"누구든지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지 않는 자도 능히 나의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 (눅 14:27)"
폴리갑이 화형을 당하기 전 로마의 권위자가 그에게 물었답니다. "어떠냐? 이제라도 네가 섬기는 예수를 모른다고 한 번만 부인하는 것이. 그러면 너는 살아 나갈 수 있다." 천천히 그 로마인을 바라보던 폴리갑이 고개를 흔들었답니다. 그리고 조용히 그러나 강인하게 말했답니다. "아니오. 나를 저 불 속에 던지시오. 어떻게 내가 그 분을 부인할 수 있겠소. 오늘까지 그 분은 나를 한 번도 외면한 적이 없는데!" 

미국 기독교계의 탁월한 지도자 John Maxwell 은 성공하는 사람과 실패하는 사람의 차이점을 이렇게 간단하게 대비시켜 정의합니다. 성공하는 사람들은 "삶의 목적이 있고 비전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공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현재만 보고 지금만 보는"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미국 하버드 대학에서 비전이 사람의 인생에 미치는 영향에 대해 조사했답니다. 지능지수, 학력, 성장배경 등이 비슷한 사람들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27%는 목표가 없고, 60%는 목표가 희미하며, 10%는 단기 목표를 갖고 있고, 3%의 사람만이 명확한 장기 목표를 갖고 있었다고 합니다. 장기목표를 갖고 있던 3%는 25년 후 사회 각계의 최고 인사가 되었고, 단기 목표를 갖고 있던 10%는 사회의 중상위 층이 되었답니다. 목표가 희미했던 60%는 중하위 층이 되고, 목표가 없었던 27%는 모두 최하위 생활을 하고 있었답니다. 비전을 가지느냐 가지지 않느냐는 이 정도로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어떤 처지 어떤 환경에서도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예수님 말씀해 주십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와 복음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어머니나 아버지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는 현세에 있어 집과 형제와 자매와 어머니와 자식과 전토를 백 배나 받되 박해를 겸하여 받고 내세에 영생을 받지 못할 자가 없느니라 (막 10:29-30)”

이 시간 부활하여 찾아오신 예수님께서 “00아 너 모든 것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라고 물으신다면 어떻게 대답하겠습니까?
이 시간 부활하여 찾아오신 예수님께서 “00아 내 양을 먹이라. 내 양을 치라”고 말씀하시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이 시간 부활하여 찾아오신 예수님께서 “00아 나를 따르라. 나를 따르라”고 말씀하시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베드로는 찾아 오셔서 회복시켜 주시는 주님을 만나 위대한 하나님의 사람으로 한 시대 쓰임받았습니다. (김필곤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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