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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위로부터 난 지혜 (약 3:13-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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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로부터 난 지혜 (약 3:13-18) 
 
 
오늘은 참된 지혜와 관련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나누겠습니다.

3장 1절에서 언급되었던 선생은 ‘말’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사람인 동시에 ‘지혜’를 가진 인물이기도 합니다. 실제로 후기 유대교는 선생을 지혜로운 자와 거의 동일하게 취급했다고 합니다. 사람의 지혜는 주로 그의 말을 통해서 드러납니다. 그러므로 야고보는 이제 말의 문제에 이어서 그것의 근원인 지혜의 문제를 다룹니다.

사도 시대부터 교회에는 거짓 교사 즉, 거짓 지혜자가 섞여서 활동했습니다. 사도 베드로는 “그러나 민간에 또한 거짓 선지자들이 일어났었나니 이와 같이 너희 중에도 거짓 선생들이 있으리라 저희는 멸망케 할 이단을 가만히 끌어들여 자기들을 사신 주를 부인하고 임박한 멸망을 스스로 취하는 자들이라”(벧후 2:1)고 했습니다. 사도 요한도 “그러나 네게 책망할 일이 있노라 자칭 선지자라 하는 여자 이세벨을 네가 용납함이니 그가 내 종들을 가르쳐 꾀어 행음하게 하고 우상의 제물을 먹게 하는도다”(계 2:20)고 했습니다. 

거짓 교사는 그 후로 우리 주님께서 재림하실 때까지 계속해서 교회에 나타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거짓 그리스도들과 거짓 선지자들이 일어나 큰 표적과 기사를 보이어 할 수만 있으면 택하신 자들도 미혹하게 하리라”(마 24:24)고 하셨지요. 탁월한 능력을 가진 거짓 교사들이 미혹할 것이므로, 교회는 자칭 선생의 말을 무조건 받아들여서는 안될 것입니다. 참된 지혜를 분별하는 일은 교회가 교회답게 존재하려면 필수적인 일입니다.

한때 학위나 출신 신학교와 교단으로 대충 참된 교사를 짐작할 수 있었던 때가 있었습니다. 하지만 오늘날 한국 기독교는 예수교 장로회만 200개가량의 교단이 있습니다. 이단이 예수교 장로회의 이름으로 활동해도 알 수 없게 된 것이지요. 더구나 요즘 이단들은 과거처럼 교회를 이탈하여 은밀히 활동하지 않고, 대담하게 조직적으로 교회에 파고듭니다. 심지어 정통 교단 신학 과정을 이수한 후에 학위를 확보해서 활동하기도 한다더군요. 이단 사상이 아닐지라도 정보화시대인 오늘날 넘쳐나는 설교의 홍수 중에 참된 지혜를 분별하는 일은 대단히 중요하게 되었습니다.

13절에서 야고보는 먼저 지혜를 가진 사람은 그 지혜를 보이는 방법도 성경적이어야 함을 말합니다. 올바른 방법은 먼저 “선행으로 말미암아”야 합니다. 지혜가 선한 생활방식에서부터, 선한 처신에서부터 나와야 한다는 뜻입니다. 다음으로 “지혜의 온유함으로”인데 지혜가 온유함과 함께 행해져야 한다는 뜻입니다. 이 단어(프라우테티)는 ‘친절’과 ‘겸손’의 의미도 있습니다. 이러한 “행함”이 구체적으로 어떤 모습인지는 이어지는 구절들에서 보다 자세하게 밝히는데, 이 구절에서는 총괄적으로 지혜가 단지 말로 시작해서 말로 끝나는 것이 아님을 보여줍니다.

지혜는 바른 말만으로 평가되지 않습니다. 바른 말이 바른 방법으로 표현되었을 때라야 지혜로 인정됩니다. 토론이나 회의 때면 저마다 자기 지혜를 나타냅니다. 그런데 만일 어떤 견해나 의견이 참으로 지혜로운 것으로 채택되려면 그 말을 표현하는 방법까지도 성경의 가르침과 일치해야 합니다. 그 의견이 악한 생활방식 혹은 악한 처신으로부터 나왔다면, 그리고 만일 분노나 불친절함이나 교만함과 함께 표현되었다면, 성경이 인정하는 지혜가 아니라고 판정해야 하지요. 그런 사람은 자신의 지식을 뽐내려는 자랑꾼, 헛똑똑이, 말쟁이에 불과합니다.

거짓 지혜의 특성은 대표적으로 두 가지가 있습니다. “그러나 너희 마음속에 독한 시기와 다툼이 있으면 자랑하지 말라 진리를 거스려 거짓하지 말라”(14). 지혜를 말의 차원이 아닌 “마음”의 차원에서 다루고 있지요. “시기”(젤론)라는 말은 ‘열정’이라는 뜻인데 그 앞에 “독한”(피크론)이라는 형용사 때문에 부정적인 의미를 가지게 되었습니다. 독하다는 것은 화살처럼 ‘뾰족하고 예리한’ 것을 의미했다가 ‘아픈’(감정)과 ‘쓴’(맛)의 의미로 확대되었습니다. 독한 시기는 상대방에게 상처와 아픔을 주고 쓴맛을 느끼게 할지라도 이기고야 말겠다는 경쟁심이라 할 수 있습니다.

세상 지혜는 ‘경쟁의 원리’에 기초합니다. 경쟁이라는 말이 가진 부정적인 느낌을 없애고 ‘선의의 경쟁’이라 표현하기도 하지요. 이러한 경쟁심이 없으면 발전도 없고 나태해진다고 생각하며, 이 경쟁심을 잘 활용하는 것이 지혜라고 봅니다. 경쟁에서 이긴 사람은 뿌듯해하며 “자랑”하고 진 사람은 쓴맛을 곱씹으며 좀 더 독한 마음을 가다듬습니다. 이 경쟁의 원리가 교회에도 쓰며들어 요즘은 기독교 세미나 광고에서조차 ‘당신의 교회도 경쟁력 있는 교회가 될 수 있습니다’라는 문구들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교회가 한 몸이요 성도들은 몸의 지체임을 생각하면 경쟁의 원리가 교회에 치명적임을 파악할 수 있습니다. 세포와 세포가 서로 경쟁하고 있다면, 그 몸은 무너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성도들에게 각양 은사를 주신 것은 서로 경쟁하도록 하려함이 아니라 협력하여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려 하심”(엡 4:12)입니다. 구역별 간에 혹은 성도들 간에 경쟁을 부추기는 것은 비록 선한 의도라 할지라도 참된 지혜가 아닙니다. 단기간 좋은 결과를 맛보았을지라도 그 원리가 교회에 허용된다면 사소한 전투에서 이기고 전체 전쟁에서는 패배하는 일이 될 것입니다.

“다툼”(에리데이안)이라는 단어는 ‘파벌주의’를 뜻합니다. 세상의 지혜는 뜻이 맞는 사람끼리 파당을 형성한 후에 그 영향력을 점차 확대해나가는 방식으로 나타납니다. 자기를 지지하는 동지를 모아서 힘이 커지면 자기 파벌이 원하는 대로 처리해나가지요. 파벌의 유익을 위해 때로는 “진리를 거스려 거짓”을 행하기도 합니다. 이처럼 자기 파벌이라는 이유로 지지하거나, 친인척이라는 이유만으로 직분자 투표에서 밀어주는 행위들은 진리를 따르는 방식이 아니라 이기주의가 고상하게 포장되고 확대된 방식입니다. 교회는 한 아버지를 모시는 형제자매요 한 가족입니다. 가족이 아빠당 엄마당으로 나뉘어 서로 자기를 지지해 줄 아들딸을 포섭해서 힘으로 가정을 이끌고 자기 파벌이 큰 것을 자랑삼는다면 끔찍한 집구석이지요.

야고보는 “이러한 지혜는 위로부터 내려온 것이 아니요 세상적이요 정욕적이요 마귀적”(15)이라고 강하게 정죄합니다. 세상적이라는 것은 땅에 속했다는 말로 하나님 나라의 반대개념입니다. 정욕적이라는 것은 하나님의 뜻보다 육신적 본능을 따른다는 말로 “하나님의 일을 생각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마 16:23) 태도에 해당할 것입니다. 예수님을 시기했던 바리새인들은 중상모략을 지혜로 여겼습니다. 근본 마귀적인 지혜는 경쟁심과 파당심에 도움이 되는 적당한 거짓을 지혜로운 모략으로 곧잘 포장하곤 합니다. 이러한 지혜는 근본 마귀적이어서 처음에는 좋은 것 같으나 결국에는 “요란과 모든 악한 일”(16)을 나타냅니다.

"위로부터 난 지혜"는 거짓 지혜와 대조되는 일곱 가지 특성을 가졌습니다. 첫째는 “성결”입니다. 이 단어는 언제나 구별이라는 의미가 우선하는데, 서신의 앞부분에 언급되었던 두 마음을 품은 자들과 구별하면 세속적인 것이 섞이지 않은 한 마음이라는 의미입니다(1:8). 성도의 마음이 하나님에 대해 한 마음이 아니라면 비록 지혜가 없는 것이지요. 주님에 대한 인간적인 충성심에 있어서는 베드로의 마음이 진실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뜻 대신에 자기의 유익을 생각하는 마음이 섞여 있었기 때문에 ‘사단’이라는 책망을 받을 수밖에 없었지요(마 16:23).

“화평”은 무질서와 혼란과 소요를 뜻하는 16절의 ‘요란’과 반대되는 개념입니다. “관용”은 적당히 타협한다는 의미가 아니라, 반대 견해조차 오랫동안 참고 친절하게 대하는 태도를 뜻합니다. 경쟁심을 뜻했던 14절의 ‘독한 시기’의 반대편에 있는 태도지요. “양순”은 순종을 잘한다는 뜻인데, 하나님의 말씀이 옳다고 인정하면서도 순종하지 않고 자기 생각대로 행하는 것을 지혜로 여기는 세상적이고 정욕적인 지혜와 대조됩니다. “긍휼과 선한 열매가 가득”한 것은 16절의 ‘모든 악한 일’과 대조되지요. “편벽”이 없다는 것은 치우치지 않는다는 뜻으로 파벌주의를 의미했던 14절의 ‘다툼’과 대조됩니다. “거짓”이 없다는 것은 위선적이지 않고 진실하다는 뜻으로 15절의 마귀적인 지혜와 대조됩니다.

대표적인 일곱 가지 특성들 중에서 “화평”은 18절에서 두 번 더 강조됩니다. 원어를 직역하면 “의의 열매는 화평 중에서 화평을 만드는 자들에게 심겨진다”가 되는데, 성도를 화평을 만드는 자들로 표현합니다. 세상이 주는 화평을 세력 균형에 의한 휴전에 비유한다면, 성도의 화평은 전쟁이 완전히 사라진 상태의 화평에 비교될 수 있을 것입니다(요 14:27). 성도의 화평은 인생의 본질적인 것이 무엇인지 아는데서 생기는 근본적인 평안입니다. 비록 아픔이 있고 슬픔이 있을지라도, 비록 손해가 있고 해결되지 않았을지라도, 하나님과 그분의 영원한 나라를 생각하면 본질적인 것이 아님을 알기에 깨뜨려지지 않고 요동하지 않는 평안이지요. 

성도에게 이 땅의 삶은 무가치하지 않습니다. 이 땅도 하나님의 백성답게 살아갈 터전이며, 하나님의 어떠하심을 드러내야 할 중요한 순간순간의 연속입니다. 성도는 염세적인 태도로 세상을 외면하지 않고 매순간 하나님의 백성답게 최선을 다해 살아야 합니다. 일곱 가지 지혜의 모습도 드러내야 하지요. 하지만 결과는 하나님께 맡기고 집착하지 않기 때문에 성공여부와 상관없이, 부족하든 풍부하든 늘 평안할 수 있습니다. 표면적으로는 성도 역시 일렁이는 파도처럼 이리저리 요동치지만 깊은 곳에는 일정한 방향으로 잔잔히 흐르는 해류 같은 평안함이 있습니다.

교회에서 스스로 부족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문제를 일으키지 않습니다. 오히려 스스로 지혜롭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독한 열정과 다툼으로 요란과 모든 악한 일을 만들어내지요. 교회 안에 이러한 지혜가 많아진다면 교회는 세속화될 것이 분명합니다. 참된 지혜대로 살다가는 손해만 볼 것 같지만 위로부터 난 지혜는 “의의 열매”를 맺습니다.

위로부터 난 지혜는 우리에게 늘 부족합니다. 그래서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는 하나님께 구해야 하지요(1:5). 참된 지혜가 풍성한 교회가 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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