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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지금도 하나님의 권능은 볼 수 있는가? (시 18: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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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도 하나님의 권능은 볼 수 있는가? (시 18:1-19)


주님 대신 신뢰하는 것들의 유혹에서 벗어나 오직 하나님만이 주실 수 있는 능력에 전폭적으로 의지하며 전심으로 살 수 있는 것입니다.

현대인들이 빠져 있는 이상은 자신을 믿고 의지해서 무언가를 이루어 간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매우 긍정적이고 매력적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체험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복음은 그렇지 않습니다. 자아를 죽이고 하나님만을 믿으며 그 분의 권능에 의지하라고 촉구합니다.

목회자로서 마음에 걸리는 것은 교회 일도 이렇게 해 왔다는 것입니다. 대부분의 교회 일이 교인들이 모여서 회의하고 예산을 짜고 일을 분석과 설득하면서 진행되어 왔습니다. 교인들의 노력 열심 헌신을 강조합니다.
안타깝게도 하나님의 권능을 기대하고 기다림이 없습니다, 
어려운 일이 생기면 오직 사람들의 머리로 계산하고 또 계산합니다.
사람들이 많이 모이면 하나님의 역사가 나타난 것으로 여깁니다. 그러나 지나고 나면 공허합니다. 

은혜받은 것 같고 은혜받았다고 하지만 삶의 변화가 없습니다!
진정한 부흥이 아닌 것입니다.

실제로 많은 교인들에게 하나님의 역사, 하나님의 지혜는 구름잡는 이야기 같습니다. 하나님을 믿고 무엇을 하자 하면 큰 일 날 사람처럼 여깁니다. 철없다고 여깁니다. 
다윗을 보는 사울 왕과 같습니다. 
 
그러나 초대교회는 전략을 짜지도 않았고, 큰 건물도 없었고, 좋은 프로그램도 없었지만, 오직 마음을 같이하여 오로지 기도에 힘썼을 따름입니다. 그런데 성령이 임하여 하루에 3천명 5천명이 전도되었습니다.
이유는 정말 하나님을 기대했기 때문입니다. 

사도행전을 보면 의도적으로 하나님을 높이고 있습니다. 
사도행전 2장에서 오순절 베드로의 설교가 엄청난 파장을 일으켰음을 봅니다. 
행 2:41 그 말을 받은 사람들은 세례를 받으매 이 날에 신도의 수가 삼천이나 더하더라

여기서 표현을 주목하십시오. “더하더라" 자연히 “누가 더하게 했을까?" 라는 질문이 나올 수 밖에 없는 구조입니다. 이제 47절로 내려가 보십시다. 

행 2:47 하나님을 찬미하며 또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으니 주께서 구원 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시니라

이런 흐름이 시종일관 계속됩니다.
행 5:14 믿고 주께로 나아오는 자가 더 많으니 남녀의 큰 무리더라

바나바가 안디옥에서 복음을 전하자 행 11:24 ...이에 큰 무리가 주께 더하여지더라 이어서 비시디아 안디옥에서도 행 13:48 이방인들이 듣고 기뻐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찬송하며 영생을 주시기로 작정된 자는 다 믿더라

하나님은 거룩한 백성들 가운데서 이런 역사가 일어나도록 설계하셨습니다. 보잘 것없어 보이는 인물에게 권능을 주셔서 놀라운 일들이 벌어졌을 때 누가 그 영광을 받기에 합당한 분인지 뚜렷이 알 수 있게 하신 것이다 

6 내가 환난 중에서 여호와께 아뢰며 나의 하나님께 부르짖었더니 그가 그의 성전에서 내 소리를 들으심이여 그의 앞에서 나의 부르짖음이 그의 귀에 들렸도다 
기도의 역사가 성도에게 주어진 큰 복입니다.
그러나 바른 믿음과 삶 속에서 기도해야 하는 것입니다.

아무렇게나 기도해도 응답해 주시는 것이 아닙니다. 
41 그들이 부르짖으나 구원할 자가 없었고 여호와께 부르짖어도 그들에게 대답하지 아니하셨나이다 

눅 11:13 너희가 악할지라도 좋은 것을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 하시니라

왜 예수님은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신다고 하였을까요? 급하고 절실한 것들이 너무 많은데 말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삶 가운데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영이 우리에게 얼마나 절실하게 필요하며 얼마나 위대한지 생각해 보면 됩니다. 

삶의 가파른 고비를 만나서 힘겨운 씨름을 벌이고 있는 자가 하나님께 기도하며 위로를 구할 때, 주님은 단순히 위로를 베풀지 않으십니다. 대신 위로하시는 성령님을 보내신다는 것입니다. 문자 그대로 내 안에 들어와 머무시면서 아픔이 다 가실 때까지 그리스도의 위로를 쏟아부어 주시는 것입니다. 

일생 일대의 중대한 결정을 앞에 두고 도움이 필요하여 기도할 때, 주님은 이래라 저래라 말씀하시지 않으시고, 대신 인도자가 되시는 성령님을 보내십니다.
분별이 필요할 때는 지혜의 성령님을 보내 주십니다. 힘이 필요하면 능력의 성령을 부어 주십니다. 사랑, 희락, 회평, 오래참음, 자비, 양선, 충성, 온유, 절제를 간구할 때도 성령님을 보내셔서 그 모든 열매가 생생하게 나타나게 하십니다

잠시 머물다 사라지는 위로는 달갑지 않습니다. 잠시 도움을 주다 사라지는 인도하심도 원치 않습니다. 
하나님이 친히 오셔서 제 안에 살면서 저와 통행해 주시지 않겠습니까? 우주를 만드신 하나님께서 직접 오셔서 인간 내면에 자리하시라고 부탁하다니, 너무 심한 게 아닐까? 그러나 예수님의 말씀에 따르면 하늘 아버지는 그런 우리의 기도를 반가워하시며 자신을 주시길 기뻐하십니다. 

가장 놀라운 기적은 진정 삶이 변화되는 것입니다.
병든 자가 일어나도 죽은 자가 살아나도 여전히 미워하고 우울하고 분노하고 거짓된 사람이라면, 그 기적이 하나님께 영광이 되겠습니까?

다윗은 기도만 하고 하나님의 기적으로 사울 왕을 꺽었습니까? 그렇다면 통일 이스라엘의 왕이 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사울 왕의 지파인 베냐민 지파와 평생 원수였을 것입니다. 우리가 다윗이 어떻게 왕이 되었는지 잘 압니다. 다윗은 자기를 죽이려 왔던 사울 왕을 두 번이나 죽일 수 있었지만 살려 주었습니다. 다윗이 힘이 강하고 유리한 상황이 아니었습니다. 사울은 왕으로 군사를 이끌고 광야에서 숨어지내는 다윗을 죽으려고 왔을 때입니다. 절대절명의 순간이었습니다. 그런 순간에 두 번이나 사울 왕을 자기 손으로 죽이지 않고 살려 주었습니다.
다윗은 어떻게 그렇게 할 수 있었을까요? 약속하신 것을 지키시는 하나님을 정말 믿었기 때문입니다.
 
고난을 당하더라도 죄 안 짓고 살 수 있다. 진짜 기적이 아닙니까?
사랑만 하며 살고 싶다. 이런 기적이 어디 있습니까?

1207년 봄 어느 날 성 프란시스는 홀로 말을 타고 아름다운 시골길을 지나가다가 하나님으로부터 이런 말씀을 듣게 됩니다. 

"프란시스, 네가 나의 뜻을 알고 싶다면 먼저 네가 육신적으로 사랑하고 원했던 모든 것을 경멸하고 미워하는 것이 네 의무다. 그리고 그것을 시작하면 지금 네게 달콤하고 사랑스러워 보이는 모든 것이 견딜 수 없이 쓴 것이 될 것이다. 반면에 과거에 혐오하던 모든 것이 굉장히 달콤하고 더없는 기쁨으로 변할 것이다." 

이 말씀을 곰곰히 생각하고 있는 중 타고 있던 말이 깜짝 놀라는 바람에 눈을 떠보니 몇 발짝 앞에 심한 나환자 한 사람이 서 있었습니다. 그는 말에서 내려 그에게 가서 그의 문드러진 손에 돈을 쥐어 준 다음 악취가 나는 손가락에 입을 맞추었습니다. 그리고는 말에 올라타고 감정에 북받쳐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이 날 프란시스는 "인간이 거둘 수 있는 최고의 승리 곧 자신에 대한 승리를 얻었습니다." 그는 더 이상 사랑을 노래하는 서정시인이나 순례자가 아니었습니다. 그는 자신이 사랑했던 것을 경멸하고 자기가 멸시했던 것을 사랑하는 법을 배우면서 거듭난 사람, 예수님의 사람이 되었습니다. 

프란시스는 "이런 방식으로 주님은 나의 회심이 시작되도록 승낙하셨다."고 썼습니다. 거기에서부터 프란시스의 새로운 소명은 시작되었습니다. 무너진 교회의 재건이었습니다.  

성경은 가장 놀라운 은사 가장 놀라운 기적은 사랑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고전 12:29-31 다 사도이겠느냐 다 선지자이겠느냐 다 교사이겠느냐 다 능력을 행하는 자이겠느냐 다 병 고치는 은사를 가진 자이겠느냐 다 방언을 말하는 자이겠느냐 다 통역하는 자이겠느냐 
너희는 더욱 큰 은사를 사모하라 내가 또한 가장 좋은 길을 너희에게 보이리라
고전 13:1-3 내가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소리 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가 되고 내가 예언하는 능력이 있어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알고 또 산을 옮길 만한 모든 믿음이 있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 것도 아니요 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

삶의 변화 운동을 시작하기를 제안합니다. 

데이비드 플랫 목사는 [래디컬]이란 책에서 눈에 보이는 성공을 향하여 달려가는 성도들에게 도전합니다. 진정한 성공은 십자가에 있다고!
성공은 철저히 하나님을 믿고 순종하고 헌신할 때만 가능하다. 
궁극적인 만족은 자신이 아닌 하나님을 중시하는데서 얻을 수 있다. 
삶의 의미는 개인이 아니라 공동체 안에서 발견되며, 참 기쁨은 물질주의가 아니라 너그러이 베푸는 마음가짐에서 얻을 수 있다. 
그리고 진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발견된다. 

그러면서 1년 동안 만이라도 하나님의 권능 안에서 살 수 있는지를 실험해 보라고 도전합니다. 검증되지 않은 주장은 가설에 불과하다. 그래서 실험이 필요한 것이다. 진실이라는 것이 밝혀지면 그 진리에 맞추어 삶을 조정하기가 훨씬 쉬워질 것이다 그것은 당신의 삶을 뒤엎을 것이다. 
여태껏 한번도 시도하지 않았던 방식으로 복음에 담긴 주징들을 검증해 보자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명령에 전폭적으로 순종히는 것이 세상적인 성공을 쫓는 것보다 과연 더 의미가 있으며 기쁜지 확인해 보자. 
딱 1년이다 실험은 우리의 인생에서 365일을 떼어내 
1 전 세계를 위하여 기도하라 2. 말씀 전체를 샅샅이 읽으라 3. 의미있는 곳에 재정을 흘려 보내라 4. 당신을 필요로 하는 낯선 곳에 가서 섬기라 5. 복음적인 교회에 헌신하라  

죠지 뮬러 목사님도 진리를 실험해 본 사람입니다.
영성일기를 쓰는 것도 진리를 실험해 보는 것입니다.
새 삶 살기 프로젝트입니다.
오직 하나님의 말씀에 철저히 순종하는 삶을 도전해 보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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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기성 목사님께서 24시간 주님 바라보기의 기쁨은 오래 전서부터 강조해왔고 작년 말부터는 그것을 '영성일기'로 점검하라는 권면을 지속적으로 하고 계십니다.
시작부터 썼으면 100일이 다가오는 시점. 정말 쓰고 있는 성도에게는 '아 이래서 쓰라고 하시는 거구나.'할 것이고, 쓰지 않는 성도에게는 '아 부담스럽다. 이젠 그만 들었으면..'으로 서로 다른 반응으로 다가올 것입니다.
작년 말부터 계속해서 영성일기를 써온 성도로서 진심으로 권면하고 싶어 주책없이 글을 남깁니다.
(저 또한 초등학교 때부터 일기 숙제는 방학 마지막 날 몰아 쓸 정도로 쓰는 걸 싫어했습니다.)

첫째, 그토록 원하는 변화가 ‘반드시’ 일어납니다.

영성일기를 쓰기 전에는 저는 주님을 믿으면서도 여전히 세상적으로 살기 바빴습니다. 
회사에서도 인정을 받으려 애썼고, 가정에 대한 사랑하는 마음도 부족했었습니다.
그런데 영성일기라는 것이 주님에게 올리는 보고서와 같은 것이다 보니, 제 부족한 것을 계속해서 말씀드리게 되었고, 기도 중에 주님께서는 더 이상 세상에 얽매이지 않고 살 수 있도록 가르침을 멈추지 않으셨고, 저는 그저 감동으로 주변에 벌어지는 상황들을 통해 순종으로 변하기만 하면 되었습니다.

둘째, 삶의 우선순위가 바뀝니다.

영성일기를 쓰기 전에는 예배나 집회가 있는 시간을 제외하고는 주님 바라보기가 어려웠는데, 영성일기를 쓰면서 잘 안되는 것을 계속해서 적다 보니 결국 무의식중에도 '내가 놓치고 있구나' 하는 것이 생각나면서, 세상으로 돌아가려는 제 마음이 다시 주님께로 맞추게 되었습니다. 삶의 우선순위가 주님이 되신 것입니다.
처음에 제 자신이 너무 적나라하게 드러나서 힘들던 시기만 넘기면 그때부턴 부어짐이 시작됩니다.

셋째, 거짓말을 못하게 됩니다.

말이나 생각으로 주님을 바라볼 때는 제대로 주님 바라보기를 하지 않았으면서도 마음으로 '이 정도면 됐지 뭐' 하고 스스로 위안하는 습관이 있었는데, 일기라는 글을 남기면서는 하지 않았던 것을 남기는 것은 의지를 가지고 하는 것이기 때문에 결국 양심의 울림으로 '대충대충 24시간'에서 '철저한 24시간'으로 바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일기에 '내일은 ~~ 하겠습니다.' 라고 적으면 안할 수가 없게 됩니다.

넷째, 성경이 삶이 됩니다.

처음에는 메모 남기는 정도로 일기를 쓰다가, 일기도 쓰다보면 느는 것이 더 많은 것을
적고 싶고, 그러기 위해서 성경도 읽게 되고, 묵상도 하게 되고, 기도도 하게 되고, 전도도 하게 되었습니다. 처음에는 일기 쓰는 시간이 많이 걸렸지만, 지금은 많은 내용도 짧은 시간에 정리하게 되었습니다. 주님에 대한 집중력이 높아졌다고 할까요?

다섯째, 확신이 생깁니다.

조금만 어려움이 있으면 영적 레벨이 금세 낮아지곤 했습니다. 그런데 영성일기를 써가면서 저에게 주신 수많은 변화들을 쉽게 체계적으로 기억해 내게 되었고, '역시 주님은 저와 함께 하신다!' 라는 확신을 다잡을 수 있습니다.

유기성 목사님께서 금년 초에 '영성일기' 캠페인을 통해 2011년에 우리 교회에 놀라운 변화가 있을 것이라는 말씀이 잊혀지지 않습니다. 만약 우리 교회 전 성도가 쓴다면? 정말 그 놀라운 기적은 현실이 될 수 밖엔 없을 것이라 확신합니다.

영성일기가 너무 좋아 직장에 있는 믿음의 동역자들에게 권면해도 그것이 무엇인지 감을 잡지 못해 '뭐 좋은 건가 보다...' 정도의 반응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얼마나 복받은 성도들입니까? 주님 사랑에 대한 실체를 확신할 수 있는 가장 현실적이고 구체적인 방법을 성령님께서 목사님을 통해 말씀을 해주셨으니까요! 목사님~ 영성일기는 아무리 강조되어도 부족함이 없습니다. 계속 강조해 주세요~~

영성일기의 영향력에서 벗어나니, 아무도 보지 않는, 죄를 짓기 쉬운 은밀한 환경이 형성, 강력한 마귀의 유혹이 찾아왔다.
마귀는 이브에게 유혹했듯이 그럴 듯한 논리로 나를 설득했다.
그래서 그저께 음란 동영상을 보는 죄를 졌다.
스스로의 뇌를 파괴하며 배우들을 더더욱 죄된 환경으로 몰아 넣었으며 내 쾌락을 위해 그들의 몸을 유린하며 이용했다.
그들의 몸은 그들의 남편과 아내만이 주장하며 즐거워해야 했다.
즉 그들의 성전은 하나님과 남편과 아내만이 볼 수 있는 몸이다.
영성일기는 계속돼야 함을 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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