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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보라 … 가만히 있을지니라 (출 14:1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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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라 … 가만히 있을지니라 (출 14:10-14)
  

바로가 가까이 올 때에 이스라엘 자손이 눈을 들어 본즉 
애굽 사람들이 자기들 뒤에 이른지라 
이스라엘 자손이 심히 두려워하여 여호와께 부르짖고 (10)
그들이 또 모세에게 이르되 애굽에 매장지가 없어서 
당신이 우리를 이끌어 내어 이 광야에서 죽게 하느냐 
어찌하여 당신이 우리를 애굽에서 이끌어 내어 우리에게 이같이 하느냐 (11)

우리가 애굽에서 당신에게 이른 말이 이것이 아니냐 
이르기를 우리를 내버려 두라 우리가 애굽 사람을 섬길 것이라 하지 아니하더냐 
애굽 사람을 섬기는 것이 광야에서 죽는 것보다 낫겠노라 (12)
모세가 백성에게 이르되 너희는 두려워하지 말고 가만히 서서 
여호와께서 오늘 너희를 위하여 행하시는 구원을 보라 
너희가 오늘 본 애굽 사람을 영원히 다시 보지 아니하리라 (13)
여호와께서 너희를 위하여 싸우시리니 너희는 가만히 있을지니라 (14)
<출애굽기 14장 10~14절>

할렐루야! 
하나님의 은혜와 평강이 충만하시기를 축원합니다.
지난 겨울, 참으로 추웠고 눈도 많이 왔습니다.
이제 봄이 되었습니다.
여기저기서 새싹들이 돋아나고 있고 꽃도 피고 있습니다.
겨울동안 죽은 것처럼 보였지만
그 안에 생명이 있기 때문에 이제는 살았음을 보여줍니다.
우리들의 삶에 / 심령에 말씀의 새 순이 돋아 자라나기 원합니다.
그래서 30배, 60배, 100배의 열매를 거두는 삶이 되시기 바랍니다. 

옆의 분과 “참 잘오셨습니다.”라고 인사합니다.

성경을 높이 들고 우리의 믿음을 표현합니다.

저는 예수 믿어 구원받았습니다(요3:16).
저는 예수 믿어 하나님 자녀 되었습니다(요1:12).
저는 예수 믿어 천국 백성 되었습니다(빌3:20).
하나님께서 선물로 주신 오늘(시118:24),
하나님 말씀으로 가르침을 받습니다(딤후3:14~17).
눈을 열어 주의 법 안에 있는 
놀라운 진리를 보고 깨닫게 하소서(시119:18).
"아멘"으로 순종하여(고후1:20)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삶 되게 하소서(마5:16).
아멘.

그런 삶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인생, 고통의 연속

고통을 좋아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누구나 고통을 싫어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길든/짧든 모든 인생은 고통의 문제로 가득 차 있습니다. 
세상에는 기쁜 일 즐거운 일들이 많지만, 
슬픈 일, 기억하고 싶지 않은 복잡한 일들도 많이 있습니다. 
이런 삶의 문제들은 우리를 
두려움, 초조, 절망, 분노 속으로 던져놓기도 합니다. 

보통 사람들에게는 살면서 아무에게도 말하지 못하고 
눈물을 참거나 남몰래 눈물 흘려야 했던 일이 많습니다.
사랑하는 가족을 먼저 하늘나라로 보내는 슬픔을 겪어야 하고
공들였던 일이/사업이 실패로 끝난다든지, 화목하던 가정에 금이 가든지,
원하는 학교나 직장에 들어가지 못하는 안타까움을 겪는 … 등
여러 가지 일들이 일어납니다.
하나님께서 사랑이시라면 / 사랑의 하나님이시라면
왜 우리가 이런 고통을 겪어야 하느냐고 묻고 싶은 일들이 많습니다.

문제는 우리가 그런 사실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느냐 하는 것입니다. 
인생살이가 쉽습니까? 쉽지 않습니다. 어려운 일이 많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인생살이가 어렵다는 사실을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인정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어려운 문제를 만나게 되면 왜 이런 일이 생기며,
왜 내가 이런 일을 겪어야 하느냐며 불평합니다. 

김병년 목사님이 지으신 <난 당신이 좋아>라는 책에 보면
고통 속에서 하나님을 만난 간증이 담겨 있습니다.
2005년, 사모님은 셋째 아이를 건강하게 출산하고
3일 후에 갑자기 쓰러져 뇌사판정을 받게 되었고, 
지금까지 일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사모님이 쓰러지신 후 목사님은 
금식기도, 작정기도, 기도원 생활 등 안 해본 것 없이
사력을 다해 하나님께 매달렸습니다. 
그러나 목사님이 몸부림치며 기도하는데도 사모님이 좋아지기는커녕, 
뜻하지 않은 사고로 한쪽 다리마저 절단하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6년이 흘렀습니다. 
책의 중간 중간에 
고통 속에서 하나님을 향해 절규하는 구절들이 있습니다. 

“정금같이 나올 것이라고요? 
하나님, 제가 언제 정금된다고 했습니까? 
저 금덩이에 관심 없어요. 
그냥 순탄하게, 평탄하게 좀 살게 해주세요.”

“하나님, 뭐가 그리 바쁘세요? 
우리 집에 오실 형편이 안되십니까? 
제가 언제 일 년 내내 우리 집에 머물러 계시라고 합니까, 
한 달을 머물라고 합니까, 

하루 종일 우리 집에만 계시라고 합니까?
그냥 한 순간이면 됩니다. 한 순간만 다녀가시면 
제 아내는 일어납니다. 그게 그렇게도 어려우세요?”

김병년, <난 당신이 좋아>, IVP, 2010, p.129, 151.

폴 투르니에(Paul Tournier)라는 
스위스의 내과의사며 기독교 심리학자가 있습니다. 
그가 쓴 <고통보다 깊은>이라는 책의 앞부분에서 
‘고아가 세계를 주도한다’는 논문에 대해 소개하고 있습니다. 
세계사의 흐름에 막대한 영향력을 끼친 사람들 중 
많은 사람들이 고아였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알렉산더 대왕, 조지 워싱턴, 나폴레옹, 
빅토리아 여왕 등 300여명에 이르는 역사적 거물들이 고아로 자랐다는 것입니다. 
어떤 이들은 유년기나 청소년기에 아버지를 잃었고, 
어떤 이들은 어머니를, 또 어떤 이들은 양친을 모두 잃었습니다. 

혹은 부모의 이혼으로 아버지나 어머니와 떨어져 지낸 이들도 있었습니다. 
아버지 없이 자라거나 아버지에 관해 
전혀 모르고 자란 사생아도 있었습니다. 
어떤 이들은 부모에게 거부당하고 버림받았습니다. 
흥미롭게도 이 책을 쓴 저자 폴 투르니에도 
태어난 지 두 달 만에 아버지를 잃고 다섯 살 때 어머니를 잃었습니다. 
폴 투르니에 또한 세계적인 학자가 되었습니다. 

어린 시절 상실과 결핍, 좌절과 고통을 겪은 이들이 
어떻게 역사적인 인물이 될 수 있었겠습니까? 
책에서는 어린 시절 받은 고통이 
권력의지와 창조성으로 이어진다고 이야기 합니다. 
고아라는 사실이 그 사람을 옭아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창조성과 권력의지로 나타나 
훌륭한 일을 해내는 힘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많은 예술가, 과학자들도 이와 비슷한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어린 시절의 아픔이 큰 인물이 되게 하는 밑거름이 된 것입니다. 
폴 투르니에는 그 책에서 이렇게 결론내리고 있습니다. 
‘인간의 가치는 그가 거둔 성공보다는 그가 어떤 방식으로 
실패를 받아들이느냐에 따라 측정되어야 한다.’ 
한 사람이 얼마나 위대한 사람인가를 알려면 
그가 얼마나 많은 일에 공로를 세우고, 업적을 남겼나보다는 
실패를 어떻게 받아들이고 다시 일어났는가에 따라야 한다는 것입니다. 

누구나 고통을 안고 살아갑니다. 
인정하기 싫겠지만 때로는 고통도 하나님의 뜻이 됩니다. 
중요한 것은 고통에 대해 어떻게 반응하느냐입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반응하시겠습니까?

모닥불에서 한 걸음 멀어지기

사막을 통과하다 보면 여러 가지 문제들을 만나게 됩니다. 
야자나무 그늘 아래 같은 곳에서 편안하게 쉴 때가 있지만, 
뜨거운 태양아래 같은 곳을 걸어야 할 때도 있습니다. 
안락한 곳에서 편안히 잠들 때가 있지만, 
차가운 밤에 오들오들 떨며 잠 못 이룰 때도 있습니다.

일교차가 큰 사막에서는 저녁이 되면 기온이 내려가 굉장히 춥습니다. 
그래서 사막을 통과하는 사람들은 저녁이 되면 모닥불을 지핍니다. 
모닥불은 따뜻함, 안정감을 주며, 안락함을 느끼게 합니다. 
그러나 불에 가까이 있기만 하면
사막에서 보는 아름다운 밤하늘을 보지 못하게 됩니다. 
하지만 불에서 한걸음 멀어지면 쏟아져 내릴 것 같은 달과 별을 만나게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막 같은 세상에 사는 우리가 
따뜻함과 안락함을 느끼는 모닥불 같은 곳에서 
한 걸음 물러나기를 원하실 때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더 크고 놀라운 인도하심을 
경험하게 하려는 뜻이 있어서입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따뜻함과 안락함을 주는 모닥불 같은 곳에서
물러나려고 하지 않습니다. 
사람들은 모닥불 같은 곳에서 멀어지면 
모든 게 끝이라고까지 생각합니다.
하지만 그런 따뜻함에서 멀어져 믿음의 눈을 들어 하나님을 바라보고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순종하는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인도하심이라면, 하나님의 뜻을 따르기 위해서라면
내가 따뜻함을 느끼고/안락함, 평안함을 느끼는 자리에서도
물러설 수 있는 용기가 필요합니다.
그런 용기를 가지는 신앙인이 되시기 바랍니다. 
모닥불 같은 곳이 좋다고, 따뜻하고 편안하다고 
거기에 머물면 목표를 향해 갈 수 없습니다.
사막을 벗어날 수 없습니다. 새 땅을 향해 갈 수 없다는 뜻입니다.

홍해 앞의 이스라엘

애굽에서 노예생활을 하던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따라 애굽을 탈출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이스라엘 자손에게 명령하여 돌이켜 바다와 
믹돌 사이의 비하히롯 앞 곧 바알스본 맞은편
바닷가에 장막을 치게 하라”(출 14:2) 고 하셨습니다.

여기서 언급된 믹돌, 비하히롯, 바알스본과 같은 지명들은 
현재 어디쯤인지 정확한 위치를 알기가 어렵습니다. 
눈여겨 볼 것은 이스라엘 백성이 
“돌이켜 … 바닷가에 장막”을 쳤다는 사실입니다. 
‘돌이켰다’(~to turn back)는 것은 방향을 틀었다는 것입니다. 
그때 추격하는 애굽 사람들의 눈에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갈팡질팡하는 것으로 보였을 것이고
“광야에 갇힌” 것처럼 생각되었을 것입니다.(출14:3)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인도하셨습니다.

<목회와 신학 편집부, 『출애굽기 어떻게 설교할 것인가』
(서울; 두란노, 2009), p.268. 참조>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바닷가에 장막을 치게 했습니다. 
전쟁의 측면에서 바닷가는 참으로 불리한 곳입니다. 
적군이 포위하고 들어온다면 다른 곳으로 도망가지도 못한 채 
꼼짝없이 당할 수밖에 없는 곳이 바닷가입니다.

제가 군대에 갔을 때 훈련소에서‘상륙전가’ 라는 것을 가르쳐주었습니다. 
해병대는 주로 큰 배를 타고 작은 보트로 옮겨 타
적진을 향해 갑니다. 보트가 바닷가에 군인들을 내려놓고 갑니다.
그러면 앞을 향해 가서 전진하여 목적지를 탈환하든지
아니면 죽는 것입니다. 뒤로 가면 물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상륙전가 내용 중에
‘모함을 떠나면 배수진이다’라는 가사가 있었습니다.
저는 그때 배수진이라는 말이 무슨 뜻인지 모르고 시키는 대로 불렀습니다. 
지금 가만히 생각해 보니 돌격해서 적진을 탈환하든지 
아니면 뒤돌아갈 곳이 없다는 무서운 내용이었습니다. 
그런 것을 배수진(背水陣) 이라고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위험한 바닷가에 장막을 치라고 명하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만 의지할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인도하시고 보호하신다는 것을 
보여주시려 했던 것이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바닷가에 장막을 쳤을 때,
바로왕은 애굽의 모든 병거를 이끌고(7절),
이스라엘 백성이 있는 장막까지 쫓아(9절) 
그들의 뒤까지(10절) 따라왔습니다. 

그러자 이스라엘 사람들이 심히 두려워하여 이렇게 말합니다. 

“애굽에 매장지가 없어서 당신이 우리를 이끌어 내어 
이 광야에서 죽게 하느냐 어찌하여 당신이 우리를 애굽에서 
이끌어 내어 우리에게 이같이 하느냐 … 우리가 … 
애굽 사람을 섬기는 것이 광야에서 죽는 것보다 낫겠노라” 
(출 14:11~12) 

그들은 예전에 자신들이 살던 곳, 즉, 애굽으로 돌아가길 원했습니다. 
나온 것이 실수였다고 말했습니다.
다시 말하면, 자신들이 편안했고 따뜻함을 느꼈던 
모닥불 같은 곳에 돌아가 머물기를 원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애굽은 모닥불 같은 곳이었습니다.
그들은 새로운 길을 인도하시는 하나님을 따르는 두려움보다는
익숙했던 삶의 자리를 그리워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놀라운 기적을 보여주시고자 
이스라엘 백성들을 홍해 앞으로 이끄셨습니다. 

“애굽 사람들이 나를 여호와인줄 알게 하리라”(출14:4) 는 말씀을 
하나님께서 이루고자 하셨던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자신들과 동행하시는 분이
“여호와 하나님”이심을 보게 하기 위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바닷가에 진치게 하셨던 것입니다.

그 때 모세가 백성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너희는 두려워하지 말고 가만히 서서 여호와께서 
오늘 너희를 위하여 행하시는 구원을 보라 …
여호와께서 너희를 위하여 싸우시리니 
너희는 가만히 있을지니라” (출 14:13~14) 

이스라엘 백성들은 눈을 들어 애굽 군대가 뒤따라오는 것을 보았습니다.(10절)
하지만, 하나님은 “두려워하지 말고 가만히 서서 …
너희를 위하여 행하시는 구원을 보라”(13절)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모세에게 
“지팡이를 들고 손을 바다 위로 내밀어 
그것이 갈라지게 하라”(출 14:16)고 하셨습니다. 
그러자 
“모세가 바다 위로 손을 내밀매 여호와께서 큰 동풍이 
밤새도록 바닷물을 물러가게 하시니 물이 갈라져 
바다가 마른 땅이 된지라” (출 14:21) 했습니다.

성경(출 14:21)을 자세히 읽어보면
영화처럼 순식간에 홍해가 갈라진 것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영화를 만든 사람들이 성경을 잘 읽지 않았나 봅니다.
성겨엥 보면 ‘밤새도록’큰 동풍이 불었고 물이 갈라졌고, 땅이 말랐습니다. 
뒤에는 애굽의 군사가 쫓아오고, 앞에는 바다입니다.
얼마나 급했겠습니까? 얼마나 두려웠겠습니까?

하지만 그 때, 이스라엘 백성이 해야 할 행동은 
“가만히 서서 … 여호와께서 행하시는 구원을”보는 것이었습니다.(13절)
마술처럼 영화처럼 모든 일이 순식간에 해결된 것이 아닙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밤새도록 홍해가 갈라지는 것을 기다려야 했습니다. 
그들이 할 수 있는 것은 가만히 서서 그것을 지켜보는 것뿐이었습니다. 

우리의 세상 삶도 마찬가지입니다. 
고통이 / 어려움이 올 때가 많습니다.
그럴 때 우리들의 마음은 급해집니다. 
왜 나에게 이런 일이 닥치냐고 불평하기도 합니다. 
그럴 때 우리는 기다려야 합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고통을 허락하신 것은 
모닥불에서 한 발짝 물러나서 
하나님의 크고 놀라운 능력을 보게 하려는 뜻이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두려움이 변하여 기도가 되고, 
전 날의 한 숨이 변하여 노래가 될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밤새도록 하나님의 일하심을 보았던 
이스라엘 백성의 마음을 생각하며 
하나님의 구원을 … 하나님의 능력을 … 
우리를 위해서 싸우시는 
하나님의 손을 보는 영안이 열리시기를 축원합니다.

신 광야의 이스라엘

누구도 생각하지 못한 방법으로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 모두가 홍해를 건너게 하셨습니다. 
그러자
“이스라엘이 여호와께서 애굽 사람들에게 행하신
그 큰 능력을 보았으므로 백성이 여호와를 경외하며 
여호와와 그의 종 모세를 믿었더라”(출 14:31) 했습니다.
당연하지요. 그렇게 놀라운 일이 생겼으니 …
바다가 갈라지며 거기를 건너왔으니 얼마나 신기했겠습니까.
그러자 사람들이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을 경외했으며 모세까지 믿었습니다.

그렇다면 홍해까지 가르시는 하나님을 봤으니까
불평 없이, 원망 없이 가나안까지 갔습니까? 아닙니다. 
그렇게 신기한 광경을 보고도, 
그들은 금새 그 사실을 잊어버렸습니다.
출애굽기 16장 2절에 보면 애굽에서 나온 지 얼마 안되어
신 광야에서 모세와 아론을 원망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 우리가 애굽 땅에서 고기 가마 곁에 앉아 있던 때와 
떡을 배불리 먹던 때에 여호와의 손에 죽었더라면 
좋았을 것을 너희가 이 광야로 우리를 인도해 내어 
이 온 회중이 주려 죽게 하는도다” (출 16:3) 
홍해를 건너고 난 후에는 하나님을 경외하며 
모세를 믿는다고 했는데 금새 어려움이 닥치니 원망했습니다. 

죄송합니다만, 꼭 우리들의 모습 아닙니까.
우리 교회 교인들도 보면 은혜 받고, 병고침 받고 
좋은 일이 있을 때는 천사처럼 … 
어떤 일이 있어도 흔들리지 않겠다고 말하고는
무슨 일만 생기면 삐죽거리고 교회를 나오네 안나오네 … 
불평하고 원망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출애굽기 14장에서 
하나님을 믿는다고, 모세까지 믿는다고 감사하다가
16장에 보니 노예의 삶을 그리워하며 원망했습니다.
애굽에서 노예로 살던 사람들이 
고기와 떡을 배불리 먹을 수 있었겠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과거의 삶, 노예의 삶을 그리워했습니다. 

홍해를 가르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경험했지만, 
그들은 또 다른 문제 앞에서 믿음을 잃어버렸습니다. 
애굽을 그리워했다는 것은 과거에 안주하고 싶어하는 생각입니다.
사막의 밤에 모닥불 곁에만 있으려 하는 것과 같습니다.

민수기 11장 5절에도 이와 비슷한 모습이 나옵니다. 

“우리가 애굽에 있을 때에는 값없이 생선과 오이와 
참외와 부추와 파와 마늘들을 먹은 것이 생각나거늘”(민 11:5) 

과거의 삶에 대한 지나친 동경은 
미래를 향한 여정에 걸림돌이 됩니다. 

여러분은 지금 어떤 상황에 처해 있으십니까?
문제만 바라보고 불평과 원망을 품고 말하십니까?
아니면 꿋꿋하게 하나님을 의지하며 동행하고 계십니까?

여러분, 하나님은 때때로 우리가 
따뜻하고 / 편안하고 / 안락한 곳에 머물고 싶은 곳에 
머물러 있기를 원하지 않으십니다.

그곳에서 벗어나 힘들고 어려운 사막을 향해 나가기 원하십니다.
왜냐하면 모닥불 곁에 앉아 있으면 좋은 것 같지만
거기에 머물러 끝나는 것입니다. 사막을 통과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바라보고 기다릴 줄 아는
여유를 가진 신앙생활 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믿고 
사막을 향해 다시 나갈 수 있는/ 
모닥불을 버려두고 나갈 수 있는 용기도 가지시기 바랍니다.

항구에 있는 배는 안전하지만 그것이 배를 만든 이유는 아닙니다. 
배가 항상 항구에만 있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배는 실은 바다를 항해할 때보다 
항구에 정박해 있을 때가 더 안전합니다. 
그렇지만 항구를 떠나지 않는 배는 배가 아닙니다. 
아무리 작은 조각배일지라도 거친 파도를 헤쳐나갈 수 있어야 배이며, 
아무리 큰 배라 할지라도 항구에 정박해 있기만 한다면 배가 아닙니다. 

우리도 인생이라는 항해를 시작한 이상 항구에 정박해 있어서는 안됩니다. 
힘들더라도 세상 바다를 향해 나아가야 합니다. 
물론 거기에 파도가 있고, 바람이 있고, 위험이 있습니다.
그렇다고 항구에 머물러서는 안됩니다.
익숙한 것이 편하다고 해서 마냥 그것에 머물러 있다면, 
그 익숙한 것들이 독이 되고 
우리를 사로잡아 매는 쇠사슬이 될 수 있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내 인생에 힘이 되어준 한 마디 / 정호승 지음. 참조>

하나님께서는 사막 같은 세상에 사는 우리들이 
따뜻하고 / 편안하고 / 안락한 곳에 계속 머물면서
그것을 누리고 살라고 내버려 두시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그 모닥불을 버리고 / 모닥불을 꺼버리고 
거기에서 벗어나 사막을 통과하기를 원하십니다.

새로운 세계를 향해 가기를 원하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일하심을 / 하나님의 돌보심을 / 
하나님의 뜻하심을 깨닫기 위해 기도해야 하고 
기다리며 기대하고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힘들고 어려우면 마지막이라고 생각하는 지점에 도착하면
낙심하고 실망합니다. 그러나 아닙니다.

언젠가 소개해 드렸던 빌리 그래함(Billy Graham) 목사님의 
작은 책(Unto The Hills)의 한 문장을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When we come to the end of ourselves, 
we come to the beginning of God.”
------------------------------------------------
“우리가 끝이라고 생각하는 지점에 이르렀을 때, 
그때가 하나님이 시작하는 지점에 도착한 것이다.” 

‘끝이다, 마지막이다, 난 할 수 없어. 끝이야’라고 생각하는 
그 지점이 하나님이 시작하시는 지점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살다보면 열심히 노력함에도 불구하고 
끝지점에 도달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끝지점이라고 생각하는 그 지점이
하나님이 시작하시는 지점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여러분 개인의 삶에, 가정에, 일터에, 여러분의 신앙에
‘여기가 끝인가보다’라고 생각하는 그 시점이
하나님이 시작하시는 지점임을 믿고 기도하며 
하나님의 일하심을 보는 복된 성도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
전능하신 하나님!
우리가 끝이라고 생각하는 지점에 이르렀을 때
더 이상 어찌할 수 없는 상황이라고 생각할 때
그때가 하나님이 시작하시는 시간이라는 것을
하나님이 시작하시는 지점이라는 것을 깨닫고 사는 저희들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모닥불 같은 곳에 머물려고 하는 인생이 아니라
힘들고 어려워도 하나님 마음에 합한 삶을 살기 위하여
광야를 향하여, 사막을 향하여 
또 발걸음을 옮기는 믿음의 성도들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 거룩하신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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