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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이기는 교회 (요 2:8-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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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는 교회 (요 2:8-11)


2차대전 중 벨기에의 작은 마을이지만 교통의 요지였던 바스통이라는 곳을 지키고 있던 미군의 101공수사단이 압도적 전력을 갖춘 독일군에게 완전포위를 당한 적이 있었습니다. 
설상가상으로 기상마저 악화되어 공수(空輸)를 통한 보급마저 끊기게 됨으로써 미군 공수부대원들은 완전히 고립되고 말았습니다.
  
공방의 전투가 4일 째 되던 날에 독일군 사령관은 미군에게 더 이상 무모한 저항을 그만 두고 항복하라고 요구해 왔습니다.
그러자 101공수사단의 사단장이었던 매컬리프 준장은 딱 한마디가 적힌 답장을 독일군 사령관에게 보내었는데, 거기에는 'Nuts!'라고 적혀 있었습니다.
  
이것은 '경멸, 혐오, 거부, 실망' 등을 나타내는 속어로서 이 경우에서는 '쳇!' 혹은 '웃기네!' 정도로 번역할 수 있을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독일군의 항복 요구는 일고의 가치조차 없다는 뜻이었습니다.
매컬리프 준장이 독일군 사령관에게 'Nuts!'라는 한마디로 '한방' 먹여 주었다는 소식이 101공수부대원들 사이에도 쫙 퍼지게 되자 그들은 순식간에 사기충천하게 되었습니다.
  
탄약도, 식량도 부족한 가운데 눈밭에 참호를 파고 밤을 지새우면서 쉴 새 없이 쏟아지는 독일군의 포격 앞에 그야말로 '독 안에 든 쥐'나 마찬가지의 신세였지만, 자기네 사령관의 그 자신감 넘치는 말 한마디가 분위기를 싹 바꾸었던 것이었습니다.
결국 101공수사단은 그 악조건 중에서도 끝까지 바스통을 사수해 내었고 그 혁혁한 공적으로 전 부대원들이 미 대통령의 표창까지 받게 되었습니다.
  
'교회의 대장' 되신 예수님 역시 당신의 군사들을 그렇게 격려해 주시는데, 바로 서머나교회가 그 대표적인 예입니다.
밧모 섬에 유배를 당하고 있던 사도 요한에게 어느 주일에 환상 중에 나타나신 예수님께서는 그로 하여금 당시 소아시아 지방에 세워져 있던 '일곱 교회'에 각각 편지를 써서 보내게 하셨습니다. 
그 중에서도 오늘 본문의 서머나교회는 그들을 완전포위하고 있던 온갖 박해와 환난 중에도 결코 굴하지 않고 나중에는 순교자들을 내면서까지 끝내 승리함으로써 초대교회사에 실로 찬란한 승리의 금자탑을 세웠던 것이었습니다.

이제 우리 경향교회 설립 제38주년을 맞이하는 오늘 주일에 저와 여러분은 주님께서 지금도 '전투하는 지상교회'에 속한 '그리스도의 군사'들에게 내려주시는 격려의 말씀이 과연 무엇인지를 함께 상고해 보고자 합니다.

1. 예수님께서는 '교회가 불신사회로부터 당하는 핍박'을 "내가 안다"고 위로해 주십니다.

8절과 9절에 "8서머나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기를 처음이요 나중이요 죽었다가 살아나신 이가 가라사대 9내가 네 환난과 궁핍을 아노니 실상은 네가 부요한 자니라 자칭 유대인이라 하는 자들의 훼방도 아노니 실상은 유대인이 아니요 사단의 회라"고 기록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서머나교회 앞으로 편지를 보내시면서 "내가 네 환난과 궁핍을 아노니"라고, 또한 "자칭 유대인이라 하는 자들의 훼방도 아노니"라고 하셨습니다.
당시 서머나교회가 현실적으로 어떤 핍박과 박해를 당하고 있는지를 우리 주님께서는 너무나 잘 '알고' 계셨던 것이었습니다. 

서머나는 당시 스스로 '아시아의 긍지'라고 자찬할 만큼 돋보이게 번창하고 있던 항구도시로서, 소아시아 중에서도 지리적으로 로마에 가장 가까이 위치했기 때문에 전통적으로 로마황제에 대한 충성심이 강한, 다시 말하자면 '애국적인' 도시였습니다.
한 가지 예를 들자면, 주후 25년경에 당시 로마의 황제였던 디베료 가이사가 자신을 위한 신전 건축을 계획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때 소아시아의 여러 도시들은 황제의 신전을 자기네 도시에 건립하는 명예를 얻기 위해 치열한 경쟁을 벌였는데 결국 그 특권은 서머나시로 돌아가게 되었습니다.
그 결과 서머나시에는 즉시 디베료 황제를 위한 신전이 건립되었고 그 사실은 서머나 시민들의 자부심을 한층 더 높여 주었던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바로 이것이 서머나교회의 성도들에게는 '환난'의 계기가 되었습니다.
일반 시민들은 뿌듯한 긍지를 느끼며 그 신전에 찾아가서 황제의 흉상 앞에서 분향을 했지만, 서머나교회의 성도들은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사람의 형상 앞에서 분향하는 행위'란 단순한 국민의례의 차원을 벗어난 종교적 행위, 즉 우상숭배와 똑같은 죄일 뿐이었습니다.
또한 다른 시민들은 황제를 '주(Lord)'라는 호칭으로 불렀지만, 서머나교회의 성도들에게 있어서 이 말은 오직 유일한 주님이신 예수님께만 붙일 수 있는 존칭이었던 것이었습니다.

서머나교회 성도들의 태도는 일반 시민들로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이 애국심 하나는 자타가 공인하고 있는 자기네 도시에 그처럼 '돼먹지 못한 부류'가 있다는 것은 심히 불명예스러운 일이라고 여기면서 그런 기독교인들을 비애국자들 아니 '반역적인 도당'이라고 낙인을 찍은 것은 아주 당연한 반응이었습니다.
바로 그러한 사회적인 멸시와 적대감, 이것이 곧 서머나교회가 당하고 있던 "환난"이었습니다.

그런 '사회적 환난'은 서머나교회 교인들에게 '경제적인 타격' 또한 가져다주었습니다.
본문에서 말하고 있는 "궁핍"이란 서머나교회 성도들이 전체적으로 '저소득층'이었다는 뜻이 아닙니다.
일반 시민들의 이러한 적대감으로 인하여 자연히 기독교 신자의 상점에는 고객이 줄어들고 거래처와의 관계도 단절되었으며 또한 기독교 신자들이 취직하기도 점점 더 어렵게 되어 갔습니다.
그 결과 서머나교회 교인들은 문자 그대로 '궁핍'을 당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었습니다.

기독교인들에 대한 이런 박해에 가장 앞장서서 충동하던 무리들이 바로 "자칭 유대인이라 하는 자들"이었습니다.
기독교가 전파되는 곳곳마다 발벗고 나서서 방해하던 유대인들은 서머나시에서 이러한 일련의 사태들이 발생하자 기회를 놓칠세라 정부의 관리들을 찾아다니며 기독교인에 대한 온갖 비방을 늘어놓았습니다.
  
9절의 "훼방"이란 단어는 사실 '중상모략'이라고 번역하는 것이 더 적절합니다.
즉 기독교인들이 황제를 '주'라고 부르지 않고 황제의 신전에서 분향하기를 거부하는 행위는 사실은 '종교적 이유' 때문이었지만 이것이 마치 '정치적 반역'인 것처럼 모함을 했던 것이었습니다.
그 결과 기독교인들은 '사회적 멸시'에서 한 단계 더 올라가서 '국가적 박해'를 받게 되었던 것이며, 이 모든 것이 바로 '자칭 유대인'이지만 실제적으로는 '사단의 사주를 받은 자'들의 '훼방' 때문이었습니다.

참 되게 '별난 교회'라고 생각되십니까?
교회에 모여서 예배를 드리지 말라고 한 것도 아니고 그저 '국가 원수에 대한 예의 표시'로 행하는 '국민의례'로서 신사참배를 하라는 것인데, 그것을 끝까지 거부하고 고생을 사서 할 필요가 뭐가 있었느냐고요?
  
돌아가신 조상님의 사진 앞에 제사상을 차려 놓고 절하는 것은 예로부터 동방예의지국으로 자처하는 우리나라의 '자랑스러운 미풍양속'인데, 그 좋은 전통을 왜 무슨 후레자식처럼 못하겠다고 고집을 부리느냐고요?
남들은 다 돌아가면서 일직 근무를 서는데 자기 혼자 주일에는 교회에 가야 하기 때문에 절대로 안 된다면서 빠지려 하는 것은 너무 몰지각한 태도가 아니냐고요? 

불신사회야 그런 교회와 성도를 당연히 '반역자요 불효자요 염치없는 사람'이라고 여기겠지만 우리 예수님은 절대로 그렇게 생각하지 않으십니다.
주님께서는 '너희들이 바로 나 때문에 그런 환난과 궁핍과 훼방을 당하고 있는 것을 내가 잘 안다.'라고 우리를 위로해 주십니다.
  
우리가 '오직 하나님 한 분께만 경배하는 신앙' 때문에 세상으로부터 비난을 받고,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만을 나의 주님이라고 부르는 고백'을 지키다가 인간사회에서 왕따를 당하고,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의 증거를 인하여' 불신사장들로부터는 욕을 먹을 때에, 바로 이런 '신앙의 고집쟁이'들을 우리 예수님만은 끝까지 인정해 주시는 것입니다.
아무리 교회와 성도가 이 땅에서는 정치적, 사회적, 경제적으로 사면초가와 같은 상태에 빠져 환난을 당한다 할지라도 우리의 속마음과 속사정을 그처럼 예수님 한 분만 확실히 '알아주신다면' 저와 여러분 역시 서머나교회의 성도들처럼 그야말로 "실상은 부요한 자"들이 아니겠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예수님께서 알아주시는 교회'가 되기보다는 그저 '세상이 알아주는 교회'가 되려는 교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불교나 천주교로부터 '기독교도 우리와 다 같은 목표를 가지고 있는 종교가 아니냐?'라고 '인정받는 것'을 좋아하는, 아주 희한한 기독교인들이 수두룩합니다.
'교회가 해외선교 따위에 아까운 돈을 쓰지 말고 당장 우리 이웃의 가난한 사람들부터 도와야 마땅하지 않느냐?'라는 한마디에 끽소리 하지 못하고 교회예산의 50퍼센트를 구제사업에 쓴다고 생색내는 교회들도 있습니다.
  
심지어는 공산독재자가 '좋아하고 환영하고 끌어안아 주는' 목사들마저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처럼 우상숭배자나 무신론자가 '알아주는' 교회란 사실은 '적과의 동침' 정도가 아니라 이미 '사단에게 지고 들어가는' 실로 비참하기 짝이 없는 교회인 것을 알아야 합니다. 

참된 교회는 반드시 세상이 미워하게 되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머리가 되신' 교회는 예수님께서 당하셨던 것과 똑같이 불신세상으로부터는 핍박을 받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알아주시는' 교회는 반드시 사람들로부터는 욕을 먹게 되어 있습니다.
왜냐하면 진정한 '교회의 지체'들은 하나님께서 명하시는 말씀과 인간사회가 요구하는 것 사이에서 단 한치도 물러설 줄 모르는 '고지식한 고집쟁이'일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여러분께서 세상과 타협하지 않고 바른 신앙생활 하려고 하다가 직장에서나 가정에서 '핍박'을 당하게 될 때에 '내가 이런다고 누가 알아주기나 하나?'라고 절대로 연약에 빠지지 마시기 바랍니다.
아예 '원수 앞에 백기를 들고 투항'하는 배교의 조류가 판을 치는 이 종말시대에 경향교회가 끝까지 '성경중심'의 교회운동을 하다가 '사면초가'의 수적 열세에 몰리게 된다고 해서 '우리만 괜히 별나게 이러는 것이 아닐까?'하고 절대로 낙심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왜냐하면 저와 여러분이 어찌하든지 신앙의 지조를 지키고 말씀에만 순종하기 위하여 세상과 결코 타협하지 않고 살겠다고 발버둥치는 것을 다른 사람은 몰라도 우리 예수님께서는 하나도 빠뜨리지 않고 똑똑히 알아주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소수의 참되고 신실한 교회가 압도적인 불신사회에 둘러싸여 핍박을 당할 때에 그 고통스러운 형편을 알아주시고 그 진실한 신앙을 인정해 주시는 주님의 위로를 받음으로써 그 어떤 환난에도 넉넉히 이기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2. 예수님께서는 '교회가 마귀를 대적하는 싸움'에서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고 격려해 주십니다.

10절과 11절에 "10네가 장차 받을 고난을 두려워 말라 볼지어다 마귀가 장차 너희 가운데서 몇 사람을 옥에 던져 시험을 받게 하리니 너희가 십일 동안 환난을 받으리라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면류관을 네게 주리라 11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이기는 자는 둘째 사망의 해를 받지 아니하리라"고 기록했습니다.

앞서 9절에서 '내가 안다'는 말씀으로 서머나교회 성도들이 현재에 당하고 있던 환난을 위로해 주신 예수님께서는 이제 여기서 그들의 미래에 대하여 격려를 해 주셨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보통의 격려와는 아주 색다른, 정말 특이한 격려였습니다.
그 첫마디는 바로 "네가 장차 받을 고난을 두려워 말라"는 말씀이었습니다.

이게 도대체 무슨 말씀입니까? 
사실 이 시점에 와서는 "너희 서머나교회 교인들이 그 사면초가의 환난 중에도 신앙을 지키느라고 이토록 고생을 했으니 정말 수고 많았다. 이제부터는 너희에게 평화시대와 물질축복으로 보답해 주겠다."라는 말씀이 나와야 할 것 같지 않습니까?
  
그런데도 예수님께서는 무슨 상급은 고사하고 오히려 '네가 장차 받을 고난이 있다'고 하시니, 우리가 서머나교회 교인들이었다면 정말 '야속하게' 들리지 않았겠습니까?
지금 온 서머나 시민들로부터 왕따와 멸시와 핍박을 당하고 있는 것만 해도 서럽기 한이 없는데, 예수님께서는 "마귀가 장차 너희 가운데서 몇 사람을 옥에 던져 시험을 받게 하리니"라고 하시니, 그야말로 설상가상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거기서도 한술 더 뜨셨습니다.
그저 옥에 갇히기만 하는 정도가 아니라 "죽도록 충성하라"고 아예 마지막 코너에까지 밀어붙이신 것이었습니다. 
이 말씀은 '충성하기 위해서는 너희들 모두가 다 죽어야 한다.'는 뜻은 아닙니다.
이것은 영어로 하자면 'even unto death' 즉 '죽을 때까지라도', '죽는 한이 있더라도'라는 뜻입니다.
다시 말해서 '죽을 각오까지 단단히 하고 충성하라.'는 단호한 명령이었던 것입니다.

'환난과 궁핍'의 시험들을 자랑스럽게 이겨 내온 서머나교회 성도들 앞에 기다리고 있던 것은 '투옥'이라는 육체적 고통이었고, 지금까지 '원수의 훼방'에 시달리면서도 꿋꿋하게 믿음을 지켜왔던 그들에게는 이제 '순교'까지 당하게 될 날이 남아 있었습니다. 
세상 사람들의 눈에는 9절에서 10절로 넘어가는 과정이란 영락없이 서머나교회가 '망하는' 길로만 보일 것이 틀림없습니다.
하지만 사실은 결코 그렇지 않았습니다.
그것이야말로 서머나교회가 '완전한 최후승리'를 거두는 길이었으며 서머나교회인 까닭에 누릴 수 있었던 특권이기도 했습니다.

작은 시험부터 제대로 잘 이겨내는 교회라야만 진짜 큰 싸움에 출전할 기회를 얻게 됩니다.
주일성수와 같은 지극히 기본적인 문제를 두고서도 세상과 타협하고 신자의 색깔을 지킬 줄 모르는 교회라면 어떻게 예수님께서 투옥이나 순교와 같이 진짜로 치열한 전투에 내보내실 수가 있겠습니까?
하지만 사회적, 경제적 시험 속에서도 '영적 부요함'을 누릴 줄 아는 서머나교회이니만큼 그런 교회의 성도들은 비록 죽음의 시험을 당하더라도 '끝까지 충성하고 끝내 승리할 수 있을' 것이라고 예수님께서는 기대하시면서 격려해 주셨던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말이 쉬워서 순교이지 실제로 '죽도록 충성'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예수님께로부터 이 편지를 받아 보았던 서머나교회 성도들은 도대체 어떻게 그런 용기를 얻을 수 있었겠습니까?
그 이유는 지금 "서머나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고" 계시는 발신자 예수님은 바로 "처음이요 나중이요 죽었다가 살아나신 이"(8절)셨기 때문이었습니다. 

서머나교회를 향하여 '죽도록 충성하라'고 격려하고 계시는 예수님은 '전에 한 번 죽으셨던' 분이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저 하늘 보좌에 편안히 앉아 서머나교회 성도들을 내려다보시면서 '너희들은 죽도록 내게 충성해야 한다.'고 명령만 내리시는 분이 아니셨습니다.
그들이 예수님 때문에 이런 저런 환난을 당하기 훨씬 전에 당신께서 먼저 세상의 온갖 시험과 핍박을 몸소 다 당해 보셨을 뿐만 아니라 십자가에 달리시는 최악의 고통까지 이미 체험해 보셨던 것이었습니다.

그 예수님은 비단 죽음의 고통만 체험하신 분이 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분이기도 했습니다.
서머나교회 성도들을 향하여 "죽도록 충성하면 생명의 면류관을 주겠다."고 약속하신 주님께서는 그 약속도 당신 스스로 먼저 '부활의 첫 열매'가 되심을 통하여 확실하게 보장해 주셨던 것이었습니다.
그 '부활과 영생'에 대한 약속은 이어지는 11절에서 "이기는 자는 둘째 사망의 해를 받지 아니하리라"고 성령님께서도 재차 확증해 주는 사실이기도 했습니다.

이처럼 우리 예수님은 몸소 '죽었다가 살아나신' 분, 당신 스스로 먼저 최악의 고난까지 체휼하시면서도 끝내 최고의 승리를 거두신 후에 이제 당신의 교회와 성도를 향하여 '내가 이겼으니 너희도 이겨야 한다.'라고 격려하시는 실로 놀라운 분이십니다.
그리고 세상 사람들은 볼 줄 모르는, 그러나 세세토록 살아 계시는 이 대장 예수님만을 똑똑히 바라보면서 따라가면 우리 역시 '죽도록 충성'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시선이 이 주님에게만 고정이 되어 있으면 우리의 발걸음을 막아서는 환난 따위는 눈에 보이지도 않을 것이며, 우리의 마음이 이 주님을 향한 충성의 일사각오로 뜨겁게 달아올라 있으면 우리의 가슴을 겨냥하는 총부리까지도 신경 쓰이지 않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참된 교회는 이처럼 마귀를 대항하여 싸우는 '전투교회'가 되어야 하며, 참된 기독신자는 그 교회를 중심으로 함께 승리를 거두는 '그리스도의 군사'가 되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 기독신자들을 향하여 '각자 예수 잘 믿고 골방에서 개인적으로 신앙생활하다가 나중에 천당에서 다 함께 만나자.' 하시면서 '점조직'으로 분산시켜 놓지 않으셨습니다. 
그 대신에 당신이 친히 '머리'가 되시며 우리는 그 '지체'가 되는 '신앙공동체'를 형성하도록 하셨습니다.
  
왜냐하면 그렇게 '모이는 교회'가 되어야만 개인적으로도 신앙에서 탈선하지 않을 수 있으며 원수 마귀를 대적하여 싸우는 영전에서도 승리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혼자 돌아다니는 병사는 적군의 저격을 받거나 포로가 될 수밖에 없지만, 같이 모여서 부대를 조직하면 각개병사의 생존율이 높아질 뿐 아니라 적군에 대한 공격력까지 발휘할 수 있는 것과 똑같은 이치인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처럼 '정사와 권세와 이 어두움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에게' 대항하는 영적 전투 의식이 완전히 결여된 교회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교회는 그저 '성도들끼리 서로 사랑하고 교제하기 위한' 친목단체인 줄로 착각합니다.
교회는 사람들로 하여금 무슨 '덕스러운 인격'과 '선한 행동'을 배우고 실천하게 해 주는, 차원 높은 교육단체 쯤 되는 것으로 여기고 있는 것입니다.
그 결과 오늘날의 많은 지상교회들이 '전투태세'는커녕 아예 '전투의식' 자체부터가 전무한 가운데 오로지 '사랑', '화목', '평안'의 미사여구로만 덕지덕지 싸구려 분칠을 하고서 '세상이 예뻐해 주는 교회'가 되겠다고 '애교'를 부리며 '아양'을 떨고 있는 형편입니다.

정말이지 '꼴불견의 교회'인 줄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 예수님께서 도대체 언제 '너희는 세상과 잘 어울리는 교회'가 되라고 단 한 번이라도 말씀하신 적이 있습니까?
요한계시록에만 해도 그 '일곱 교회'를 향하여 때로는 칭찬, 때로는 꾸중을 하셨지만 제일 마지막에는 항상 '이기는 자, 이기는 교회'가 되라고 하나같이 명령하지 않으셨습니까?
  
불신세상을 대항하고 마귀를 대적할 줄은 모르고 그저 항상 '치사한 미소만 짓고 비겁하게 허리만 굽실거리는' 못난 교회를 향하여 예수님께서는 "좌우에 날선 검을 가진" 대장으로 나타나셔서 '너희들은 사단의 위, 바로 마귀들의 총사령부가 있는 곳에 살고 있으니 끝까지 싸워서 이겨야만 내가 감추었던 만나와 흰돌을 줄 것이다.'라고 추상같이 독려하시는 것입니다. 
우리의 대장되신 예수님께서는 그저 '자기네들끼리만 사랑한다고 속닥거리는 교인'이 아니라 '죽도록 충성하는 군사'를 찾고 계시며 '세상에 빌붙어서 겨우 생존하는 찌질한 교회'가 아니라 '원수 마귀를 대적하며 싸워 이기는 멋진 전투교회'가 되라고 명령하고 계심을 깨닫고, 잘 싸우고 반드시 이겨서 영광스러운 '생명의 면류관'을 함께 받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성도 여러분, 오늘 본문에 기록된 편지를 직접 받아보았던 서머나교회의 성도 가운데서 나중에 실제로 순교한 사람 중의 한 명이 바로 저 유명한 폴리캅 감독입니다.
연대를 대충 계산해 보면, 이 요한계시록 2장 8절부터 10절까지에 기록된 예수님의 편지가 사도 요한에 의하여 제일 처음 서머나교회에 전해졌을 때쯤 폴리캅이 벌써 그 교회의 청년 멤버가 되어 있었을 가능성도 큽니다.
  
그러다 나중에는 그 서머나교회의 감독까지 되었던 폴리캅은 주후 156년경에 관원들에 의하여 체포되었는데, 그 죄명은 바로 오늘 본문에 나오는 것과 똑같은 것으로서 '황제에 대한 제사 거부'였습니다.
전해지는 바에 의하면, 사형 집행관이 폴리캅 감독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저주하라. 그러면 당장 풀어 주겠다."고 최후의 기회를 다시 한 번 주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평생을 '싸우고 이기면서' 살아왔던 노 감독 폴리캅은 "내가 팔십육 년 간 그 분을 섬겨 오는 동안에 주님께서는 단 한번이라도 나에게 잘못한 적이 없으셨다. 그런데 나를 구원하신 나의 왕을 내가 어찌 저주할 수 있겠는가?"라고 꼿꼿하게 대답했습니다.
죽음을 눈앞에 둔 폴리캅 감독의 눈은 그를 죽이려고 준비해 둔 화형대나 맹수가 아니라 바로 '세세토록 살아계신 예수님'만 똑똑히 바라보고 있었고, 그의 마음은 그 왕께서 자기 서머나교회에 친히 편지를 보내 주시면서 '내가 네 환난을 안다. 하지만 죽도록 충성해서 끝까지 이겨라.'고 격려해 주셨던 바로 이 본문의 말씀을 뜨겁게 되새기고 있지 않았겠습니까?

'전투하는 지상교회'는 바른 교회관의 기본 중에 기본입니다.
우리 대장 예수님께서 당신의 구속사 완성을 위한 이 마지막 시대에 더욱 필요로 하시는 교회는 '성도끼리 친목하는 교회'가 아니라 바로 '원수와 싸울 줄 아는 교회'일 뿐입니다.
'처음이요 나중이신' 우리 주님께서 진정 소중히 여기시고 끝까지 지켜 주실 수밖에 없는 교회는 '이웃 사회에 구제하는 교회'가 아니라 오로지 세상으로부터 온갖 핍박과 박해를 당해도 끝까지 '죽도록 충성하는 교회'일 뿐인 것입니다. 

우리 각자는 영적 전투의 전장에서 평생을 복무하는 병사입니다.
그리고 우리 교회는 바로 그 영전을 위한 '산성'이요 '요새'인 것입니다.
승리의 체험보다도 병사의 사기를 더 높여 주는 것은 없습니다.
세상과 타협하지 않는 싸움 중에 당하는 외로움과 고통은 우리 주님께서 '알아주시는' 위로를 받고 이겨내시기 바랍니다.
  
더 큰 시험과 환난이 끝없이 닥쳐오더라도 당신 스스로 '죽었다가 살아나신' 예수님의 약속을 붙들고 칠전팔기하시기 바랍니다.
오늘도 우리 경향교회와 경향의 성도들을 향하여 이토록 뜨겁게 '위로'하시며 강력하게 '격려'하시는 대장 예수님의 뒤를 따라서 우리 교회를 '이기고 또 이기는' 필승교회, 연승교회로 끝까지 영광스럽게 세우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아멘. (석기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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