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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용서의 신학 (눅 17:1-4, 레 19:17-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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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서의 신학 (눅 17:1-4, 레 19:17-18)


어느 날 부부가 매일 싸웠다고 합니다.  부인이 너무 강했고, 강짜가 심했습니다. 그런데 유감스럽게도 그 부인은 교회 집사였습니다. 교회 부흥회가 있던 날 바쁜 일이 있어서 남편에게 당신이나 갔다 오라고 했습니다. 남편이 교회 부흥회에 갔다 오더니 갑자기 아내에게 잘해 주었습니다. 이상해서 부흥강사가 무슨 말씀을 했길래 저렇게 변화 되었는가 해서 목사님께 어제저녁 무슨 말씀을 했는가 하고 물었더니  “어제 설교제목이 원수를 사랑하라” 였다고 합니다. 

오늘 본문은 예수님께서 직접 가르치신 교훈입니다. 이웃과의 관계의 삶에 한 가지 지침을 주셨습니다. 오늘 말씀의 주제는 “용서”입니다.   

오늘은 이 세상은 명암이 뚜렷한 시대입니다.  한 편적으로 보면 오늘 이 세상은 살만 한 세상입니다. 편리하고 풍부하고 신속하고 발달된 시대입니다. 동시에 오늘은 아주 악해진 시대입니다. 세상이 악해지고 사람이 악해지고 심성들이 악해졌습니다. 옛날에 상상도 못한 끔찍한 사건들, 잔인한 사건들이 우리 주변에서 일어나고 있습니다. 세상이 악해지니 교회 다니는 성도들도 마음이 얼마나  악해지는지 모르겠습니다. 한번 갈등이 생기면 풀어지지가 않습니다. 

해결이 안 되고, 회복이 안 되고, 타협이 안 되고, 오늘날 그리스도인들도 관계가 악화되면 화해가 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다투던 사람이 경찰서에 찾아오면 경찰은 당신들은 예수를 믿는가 하고 먼저 묻는다고 합니다.  예수를 믿는 사람들이라고 하면 우리는 중재를 못하니 돌아가서 당신들 끼리 알아서 하라고 내 보낸다고 합니다. 그만큼 사람들의 마음이 악해졌습니다.  너를 인정하고 받아들이고 화해하는 기술이 없어진 것입니다. 오늘 이 시대에 가장 필요한 신학은 화해와 평화와 조화의 신학입니다. 그래서 오늘 “용서의 신학”이라는 제목을 붙였습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예수님이 지금 제자들을 이끌고 예루살렘으로 올라가고 계십니다. 예루살렘으로 가신다는 것은 이제 십자가를 질 시간이 점점 다가오고 있다는 것입니다. 예루살렘으로 가시면서 예수님은 제자들을 훈련하고 무장을 시켰습니다. 누가복음을 보면 원수를 사랑하라,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를 보라, 진정한 제자가 되어라, 그리고 용서의 신학을 차례대로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에서 사람을 실족하게 하지 말라고 가르치고 계십니다. 실족이라는 말은 “스칸달론”이라는 말로 짐승을 잡기 위해서 놓는 덧, 올무, 함정을 말합니다. 누군가를 넘어지게 하고 마음의 상처를 주고 실족하게 하는 일을 하지 말라는 말입니다. 이 용서의 신학에는 두 가지를 당부하고 계십니다. 

실족하게 하는 사람 

누군가를 실족하게 하는 자에게는 화가 있다고 했습니다. 여기서 화는 심판을 받게 된다는 말입니다. 예를 들면 어린 아이 하나를 실족하게 하면 연자 맷돌을 목에 매고 바다에 가서 빠져 죽으라고 했습니다. 아주 충격적인 말씀입니다. 예수께서 이렇게 강하게 말씀하신 적이 별로 없습니다. 살다보면 누군가에게 실족하게 할 수도 있습니다. 그것이 우리의 능력의 한계입니다. 여기 연자 맷돌은 짐승에게 멍에를 씌워 돌리는 큰 맷돌을 말합니다. 그것을 목에 매고 바다에 가서 빠져 죽는 것이 났다고 했습니다. 실제로 고대 로마시대와 그리스에서는 맷돌을 매어 바다에 던져 사형시키는 법이 있었다고 합니다. 누군가를 실족하게 하고 넘어지게 하고 상처를 입히는 것은 그 만큼 큰 죄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큰 일로 상대방을 실족하게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아주 작을 일로 실족하게 할 수도 있습니다. 무의식적으로 내 뱉은 말 한마디가 마음에 상처를 줄 수도 있고, 감정적으로, 관계로 실족하게 할 수도 있습니다. 의도적으로 그리고 무의식적으로 실족하게 할 수도 있습니다. 2절에서 주님은 “작은 자에게라도”라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작은 자는 

어린아이, 가난한 사람, 하찮은 사람들이 모두 작은 자들입니다. 그 시대의 소외된 자들 중 가난 자, 과부들, 고아들일 수도 있습니다. 이들은 자칫하면 무시할 수 있는 대상들 입니다. 

예수님은 3년 공생애 동안 소외된 사람들을 특별히 배려하셨습니다. 소외된 사람들에게 배려가 없으면 무의식중에 상처를 줄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교회 안에서도 무시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교회 안에도 보이지 않는 계급이 있습니다. 먼저 온 사람들은 새신자들에게 자신도 모르게 텃새를 보여줍니다. 새신자들을 향해서 먼저 온 사람들이 기득권을 발휘해서 큰소리치고 고집을 부리는 경우도 있습니다. 건강해야 할 공동체를 깨고 실족하게 만들게 됩니다. 직분이라는 것은 섬김의 직분입니다. 그런데 그 직분이 섬김의 직분이 아니라 굴림의 직분으로 활용하는 분들도 있습니다. 

그래서 때론 어떤 분들은 상처를 받게 되고 믿음의 길에서 떨어져 나가는 분들도 있고, 실족하는 분들도 있고 마음에 큰 상처를 받는 분들도 생기게 되는 것입니다. 가정에도 가족끼리 상처를 주고받는 경우도 많습니다. 원수가 집안에 있는 것입니다. 참 불행한 일입니다. 문제는 마음에 한번 상처를 받게 되면, 이것이 치유되기 어렵고 회복이 힘들다는 것입니다. 마음이 예민하기 때문에 한번 상처를 받으면 상처가 깊어집니다. 마음은 마치 유리병과 같습니다. 

예쁜 유리병은 금 가지 않도록 조심히 잘 관리해야 합니다. 한번 금이 가면 원상으로 회복시키기가 힘듭니다. 사람의 마음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람도 한번 마음에 상처를 입으면 오래갑니다. 삶에 영향을 주고 때론 인생의 앞길에 어둠을 주기도 합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원래 바리새인들을 주의시키는 과정에서 주신 말씀입니다. 

바리새인들은 그 시대에 하나님을 잘 믿는다고 자청했던 사람들이였습니다. 그런데 자기들에게 주어진 직분을 남용하게 되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을 실족하게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화 있을 진저 천국의 문을 가로막고 있는 자들이여 자기도 들어가지 못하고 남들도 들어가지 못하게 하는 자들은 화가 있으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3절에서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라”고 했습니다.  조심하라는 말은 ‘프로세코’라는 말입니다. - “~~에 대하여 몰두하라”는 말입니다. 

즉 자신을 살피는 일에 전념하라는 뜻입니다. 조금 방심하면 상대방을 실족하게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때로 의도적이든 무의식적이든 내 뱉는 말 한마디로 상대방을 실족하게 할 수 있습니다. 무심코 던진 돌이 개구리를 죽일 수 있습니다. 내가 무심코 내 뱉은 말 한마디가 누군가를 실족하게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실족하게 하는 일이 없도록 조심하라고 당부하고 계십니다. 

상처받은 사람 

상처를 받은 사람들은 끝없이 용서하라고 말씀합니다. 용서는 말은 쉬운데 어렵습니다. 우리 주님은 여전히 외치십니다. “용서하라” 또한 주님은 하루에 일곱 번씩 찾아와 용서를 빌면 일곱 번 다 용서하라고 하십니다. 마태복음18장에서는 일흔 번씩 일곱 번 이락도 용서하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유대인들에게 7수는 만수입니다. 즉 무한수입니다. 무한대의 숫자입니다. 보통 유대인들은 3번 용서하는 것이 최고 수준의 용서로 생각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 제한을 철폐하셨습니다. 그리고 무한대로 용서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어려워도 그 요구에 순종해야 합니다. 문제가 있다면 우리가 그것을 할 수 있는 능력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주님은 강조하십니다. 하루에 일곱 번씩 용서해야할 이유가 있습니다. 

주님의 가르침 

순종은 “말씀하시니 하겠습니다” 그것이 순종입니다. 베드로는 “말씀하시니 한 번 더 던지리이다”하고 순종하였습니다. 내 생각으로 지금 던져도 소용없지만, “주님이 말씀하시니 순종 하겠습니다“ 그것이 순종입니다.  사무엘은 순종이 제사보다 낫다고 했습니다. 신앙의 삶은 순종의 삶이 중요합니다. 순종은 기적의 요소이고 신앙의 요소이기도 합니다. 어느 수도사가 제자가 되겠다고 찾아온 젊은이를 데리고 밭에 가서 배추포기를 주면서 이 배추를 거꾸로 심으라고 했습니다. 

그랬더니 이 젊은이가 배추를 똑바로 심었습니다. 거꾸로 심으라고 해도 자기주장대로 계속해서 똑바로 심었습니다. 그 모습을 보고 수도사가 말했습니다. “나는 순종을 요구했지 이론을 요구한 것이 아니다” 신앙의 삶에는 때로 내 이성으로는 내 판단으로는 이해되지 않는 요소들이 많습니다. 신앙생활을 내 이성으로 내 판단으로  이해되는 것만 추구하면 신앙의 삶이 아닙니다. 그래서 순종이라는 것이 필요합니다. 베드로는 내 이성으로는 순종하기 불가능했다고 합니다.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던지라고 하셨습니다. 베드로는 두 가지 이유 때문에 안 된다고 했습니다. 하나는 지금은 날이 밝아오고 있다고 했습니다. 날이 밝은 때는 고기는 잡히지 않습니다. 또 하나는 깊은 곳에는 고기가 별로 없다고 했습니다.  이것은 베드로가 지금까지 바다에서 살면서 얻은 경험 이였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강조하셨습니다. 그때 베드로는 그럼에도 말씀하시니 한 번 더 던지겠다고 순종하였습니다. 내 상식과는 정반대의 이론에 행동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랬더니 그곳에 기적이 일어난 것입니다. “주님이 말씀하시니 순종 하겠습니다” 그것이 순종입니다. 

내가 자유하기 위함 

용서의 신학이 필요한 이유는 나 자신 때문에 필요한 것입니다. 하루에 일곱 번이라도 용서해야 합니다. 나를 위해서입니다. 용서하지 않으면 상대가 불편할 것 같아도 가만히 생각해보면 내가 불편한 것입니다. 내 마음에 불화가 쌓이게 되는 것입니다. 상대방을 용서하지 않으면 내 마음 속에 분노가 서리고 그 분노는 날이 가면 갈수록 더 커집니다. 분노가 커지면 마침내 내 마음속에는 기쁨을 잃게 됩니다. 맛을 잃고, 재미도 잃고, 잠을 잘 수가 없습니다. 

상대는 평안한데 나는 여전히 분노를 느끼고 있습니다. 바로 내 마음속에 분노가 커지는 것입니다. 내 영혼을 짓누르게 되고 속이 상해오며 마침내 질병을 유발하기도 합니다. 이 분노는 마침내  커져서 하나님에 대한 원망으로 발전 하게 됩니다. 그래서 교회생활이 싫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결국 누구의 손해입니까. 나 자신의 손해로 모아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를 위해서 용서하라는 것입니다. 

여자 테니스 스타였던 마르릴 힝기스라는 테니스 신동이 있었습니다. 1999년 윔블턴 대회에서 세계랭킹 1위였던 그가 16세의 무명의 선수에게 52분 만에 0:2로 참패를 당했습니다. 윔불턴 대회사상 최대 이변이었습니다. 전날 어머니와 심하게 다툰 것이 원인이었습니다. 정돈되지 않는 마음을 가지고 경기에 임한 것입니다. 더구나 경기 도중 그의 어머니는 자리를 떠났습니다. 그 모습을 힝기스 선수는 마음의 감정이 엉망이 되었습니다. 이 선수는 무명의 상대방에게 참패한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과의 싸움에서 참패를 당한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이 말씀하시기를 “용서하라” 하루에 일곱 번씩 용서하라고 하셨습니다. 주님은 우리의 능력을 과대평가해서 주문하신 것이 아닙니다. 주님은 나의 나약함을 아십니다. 그럼에도 주님이 우리에게 강하게 주문하시는 것은 우리들이 그 수준에서 머물러 있는 것을 원치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용서하라고 강조하십니다. 그것은 주님을 위해서 이고 또  나 자신을 위해서입니다. 사도바울은 에베소서 4장30절에서 “성령을 슬프게 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용서하지 못해서 고민하고 침울해 하고 잠을 못 이루고 마음에 분노가 가득한 나의 모습에서 성령은 슬퍼하신다는 말입니다. 나는 너를 용서하였는데 너는 왜 용서하지 못하느냐 하는 물음입니다. 

우리 부모들이 가끔 그런 모습을 자식들에게 보게 됩니다. 자식들이 밖에 나가서 마음의 상처를 받고 집에 와서 우울해합니다. 이야기를 들어보면 큰 문제는 아닌 것 같은데, 아이는 심각해서 잠도 못자고 먹지도 못하고 분노하게 됩니다. 그 모습 보면 부모는 속이 상하게 되고, 아이에게 툭툭 털어버리고 잊으라고 말은 하는데 아이의 입장에서는 쉽게 털어 버릴 수가 없어서 우울해 하는 것입니다. 그런 모습을 보는 부모의 마음이 성령의 마음일 것입니다.  그래서 “성령을 근심하게 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주님의 사역을 본받음 

또 하나 용서해야할 이유가 주님의 사역을 본받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3년 동안 치유 사역을 하셨습니다. 각종 병자들이 몰려올 때 그들을 마다하지 않고 다 치료해 주셨습니다. 피곤해도 다 치유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을 밝게 웃게 해서 보내셨습니다. 왜냐하면 그때 그 시대의 사람들은 상처를 받은 사람들이기 때문이었습니다. 특별히 나병환자들은 가족들에게 외면당하고, 사회로부터 격리되어 외딴곳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어쩌다 시내로 들어오면 사람들은 침을 뱉었고 돌을 던졌습니다. 상처가 얼마나 컸겠습니까. 그 당시 세리는 로마의 앞잡이로 도적으로 몰아 붙였습니다. 그래서 삭개오는 도적이 아닌 사람도 있다고 항변하며 내가 도적질 한 것이 있으면 4배를 갚겠다고 외쳤습니다. 그 말은 나는 도적질 한 것이 없다는 고백입니다. 세리가운데서도 양심적인 세리도 있다고 삭개오는 말 한 것입니다. 사마리아 사람들은 유대인들로부터 무시당하며 살았던 사람들입니다. 

유대인들은 사마리아 사람들을 부정한 사람으로, 짐승처럼 대했습니다. 모두 상처가 있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을 따뜻하게 맞아 주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사마리아로, 세 리 집으로, 나병환자 곁으로 가셨던 것입니다. 우리에게 말씀하시기를 예수님께서는 “누구든지 어린아이 하나라도 실족하게 하는 사람은 화가 있으리라”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화는 심판이 있으리라는 말입니다. 용서하고 받아주는 일은 주님의 사역에 동참하는 일입니다. 

화평과 치유와 섬김의 삶은 주님의 사역에 동참하는 삶입니다. 

오늘은 남을 판단하고 정죄하고 자기 잘못을 따지는 일에 사람들이 익숙해져 있습니다. 조금만 잘못해도 사람들이 집요하게 따집니다. 이 시대에는 따지지 않고 그냥 받아주는 일이 중요합니다. 어떤 부인은 택시를 타고 전설의 고향으로 가자고 했습니다. 그랬더니 운전기사가 아무 소리 하지 않고 예술의 전당 앞에 내려 주었습니다. 잘못 말한 것 인 줄 알았지만 굳이 따지지 않았던 것입니다.  

로봇 휴만이라는 분은 프랑스에서 법률가로 외무장관과 재무장관을 지내고 1970년에 수상까지 한 분입니다. 그런데 그 분은 결혼을 하지 않았습니다. 어느 날 지하철을 탔는데 급정거하는 바람에 옆에 있는 어느 부인의 발을 밟았습니다. 그랬더니 이 부인이 개가 짖듯이 이 병신아, 눈 뒀다 뭐하느냐, 눈에 이 발이 보이지 않더냐 하고 욕을 했습니다. 미쳐 사과할 틈도 없이 당황하고 있는데  이 여인이 얼굴을 들더니 순간 얼굴이 빨개지면서 선생님 실례했습니다, 나는 남편인줄 알고 그만” 그러더라고 그래서 그 분은 평생 결혼을 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오늘 사람들의 마음에 못을 박는 분들이 있습니다. 말만하면 상대방에게 대 못을 박는 분들이 있습니다. 감정을 상하게 하고 실족하게 하고 그런 사람들이 가정에서도, 교회 안에서도, 이웃에서도 있습니다. 상대방의 약점을 파내고 부족한 부분을 파내고 아픔을 찌르며 상처를 입히는 사람이 누구인가를 오늘 성경에서 말하고 있습니다. 그가 누구인가를 생각해 봅시다. 그가 바로 나 자신 인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오늘 본문에서 용서의 신학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이끌고 예루살렘에 올라가고 있는 도중에 제자들을 훈련하는 내용이 오늘 용서의 신학입니다. 너희는 네 형제가 회개하거든 용서하라 하루에 일곱 번이라도 네게 용서를 빌거든 너는 그를 용서하라” 오늘 이 시대에는 용서의 신학이 필요한 시대입니다. 우리는 그렇게 할 수가 없다는 것에 문제가 있습니다.  그런데 말씀하시기를 “하라” 하면 그 동시에 주님의 역사와 섭리가 함께하는 시간이 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시니 순종 하겠습니다” 하면 주님께서 도우시는 것입니다. 

“하루에 일곱 번이라도 너희는 용서하라” 하나님은 우리에게 그런 자질을 주셨습니다. “순종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 그때 비로소 우리는  잃어버렸던 노래를 되찾을 수 있고 상했던 감정을 치유할 수 있고 그리고 불가능했던 것이 가능으로 나타나는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은혜가 여러분들을 통해서 실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이정익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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