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기적의 일관성 (왕하 4:1-7)

첨부 1


‘기적의 일관성’. com
 

“선지자의 제자들의 아내 중의 한 여인이 엘리사에게 부르짖어 이르되 당신의 종 나의 남편이 이미 죽었는데 당신의 종이 여호와를 경외한 줄은 당신이 아시는 바니이다 이제 빚 준 사람이 와서 나의 두 아이를 데려가 그의 종을 삼고자 하나이다 하니 2엘리사가 그에게 이르되 내가 너를 위하여 어떻게 하랴 네 집에 무엇이 있는지 내게 말하라 그가 이르되 계집종의 집에 기름 한 그릇 외에는 아무것도 없나이다 하니 3이르되 너는 밖에 나가서 모든 이웃에게 그릇을 빌리라 빈 그릇을 빌리되 조금 빌리지 말고 4너는 네 두 아들과 함께 들어가서 문을 닫고 그 모든 그릇에 기름을 부어서 차는 대로 옮겨 놓으라 하니라 5여인이 물러가서 그의 두 아들과 함께 문을 닫은 후에 그들은 그릇을 그에게로 가져오고 그는 부었더니 6그릇에 다 찬지라 여인이 아들에게 이르되 또 그릇을 내게로 가져오라 하니 아들이 이르되 다른 그릇이 없나이다 하니 기름이 곧 그쳤더라 7그 여인이 하나님의 사람에게 나아가서 말하니 그가 이르되 너는 가서 기름을 팔아 빚을 갚고 남은 것으로 너와 네 두 아들이 생활하라 하였더라”(왕하 4:1-7) 

성경은 참으로 소중한 책입니다. 우리에게 주시는 살아 계신 하나님의 불변의 진리가 담긴 책입니다.  그런데 이 성경은 그냥 읽어도 은혜가 되지만, 꼼꼼히 묵상하면서 읽으면 더 은혜가 되고, 종이와 볼펜을 준비하고 참고자료를 옆에 두고 연구를 하면 더 깊은 은혜를 받습니다. 성경은 산(山)과 같습니다. 그냥 등산을 해도 너무 좋지만 도구를 들고 땅을 깊이 파면 금도 나오고, 은도 나오고, 각종 보석도 캘 수가 있습니다. 그러면 성경을 연구하는 것이 어려운 일이냐?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들을 위해 이미 은혜 받으라고 주어진 책입니다. 절대 어렵지 않습니다.  조금만 더 꼼꼼하면, 조금만 더 정성을 들이면 우리는 각종 보석을 캐낼 수 있습니다. 대학교 들어가기 위해서 하는 공부의 1/10만 성경에 정성을 들이면... 우리의 마음은 각종 진리의 보석들로 가득할 것입니다. 기독교 서점에 가시면 성경연구를 도와주는 좋은 책들을 많이 볼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부터 6장까지 하나님께서 베푸신 ‘기적의 사건 여섯 가지’가 계속 연달아 등장을 합니다. 저는 4장에서 6장에 있는 이 여섯 개의 사건들을 연달아 살펴보려고 합니다. 그래서 이 여섯 개의 사건들에서 어떤 공통점을 찾아내려고 합니다. 그래서 같은 일이 우리의 현실에서도 일어나기를 원합니다. 
 성경 연구 방법은 크게 2가지가 있습니다. 연역적(演繹的)인 방법과 귀납적(歸納的)인 방법입니다. **연역적(演繹的)인 방법은 일반적으로 삼단논법을 말하는데, 큰 결론에서 출발하여 작은 결론으로 도착을 합니다.  예를 들면 ‘모든 사람은 죽는다.  소크라테스는 사람이다.  그러므로 소크라테스는 죽는다’ 이것이 연역법입니다. 

귀납적(歸納的)인 방법은 반대로 작은 사실에서 시작해서 큰 결론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까마귀1은 검다. 까마귀2는 검다. 까마귀3는 검다. 까마귀4는 검다... 까마귀99999는 검다. 그러므로 모든 까마귀는 검을 것이다.’ 

 저는 오늘 본문 성경을 귀납적으로 살펴보려고 합니다. 
성도여러분, 어떤 사람이 늘 즐겨 입는 옷들을 종합해 보면 어떤 공통점이 있는 것을 알게 됩니다. 만약 우리가 어떤 공통점을 알았다면, 그 사람에게 옷을 선물을 할 때에 그 사람이 좋아하는 취향에 맞는 옷을 선물할 수 있습니다.  사람은 늘 어느 정도 일관성이 있게 마련입니다.  그런데 우리 하나님께서도 일관성이 있으십니다.  이 여섯 개의 여러 사건들에서 어떤 일관성이나 공통점을 찾게 된다면, 우리는 어떠한 경우에 하나님은 항상 그러한 능력을 베풀어주시는가 하는 하나님의 진리, 하나님의 일관성(一貫性)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뿐만 아니라 이것은 하나님께서 과연 어떤 경우에 엘리사를 통해서 기적적인 은혜와 도움을 허락하시는가, 바로 하나님이 도와주시는 경우가 어떤 경우인가 하는 것을 우리에게 보여주는 좋은 예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도우심에는 일관성이 있습니다.  그냥 되는대로, 기분 내키는 대로 도와주시는 것이 아니라 어떤 뚜렷한 이유가 있을 때에는 반드시, 항상 하나님께서는 도와주십니다. 우리는 이런 기적의 사건들이 반드시 어떤 하나님의 정하신 기준에 도달되었기에 하나님께서 도우신 것이라는 전제하에서 이제 그 기준 점을 찾고자 시도를 합니다. 이런 면에서는 오늘 설교는 귀납적(歸納的)인 탐구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먼저 본문의 사건 6가지를 살펴보십시다. 
 
첫 번째로 어떤 여인이 등장을 하는데 그의 남편은 선지학교의 생도라고 했습니다. 요즘 말하면 신학교에 입학을 하여 공부 중인 전도사 또는 목사 후보생입니다. 이 사람이 죽었습니다.  그의 아내는 이제 두 아들을 데리고 홀로 살아가야 합니다. 그런데 남편의 생전에 돈을 빌렸던 것이 있었는지 이제 그 채주가 와서는 빚 독촉을 합니다. 그리고 빚을 갚지 못할 경우 그 당시의 관습법대로 아들 둘을 노예로 잡아가겠다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기가 막히는 상황입니다.  그 여인이 엘리사에게로 와서 호소를 할 때에 엘리사는 빈 그릇을 최대한 모아서 준비하라고 하였고 그 준비된 빈 그릇마다 기름이 가득가득 채워지는 기적적인 은혜를 주어서 그것을 팔아서 빚을 갚고 또 앞으로의 생활비까지 충당하게 되는 아름답고 놀라운 기적의 사건이 일어나게 되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그 당시에 어려움을 당한 가정이 이 한 가정뿐 이었겠습니까?   자식을 노예로 팔아야만 하는 경우가 이집만의 특별한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이 가정만은 은혜를 입었습니다. 왜 특별하게도 이 가정에 이러한 은혜를 주었을까요? 

두 번째 사건은 수넴 여인의 가정이야기 입니다. 성경은 이 여인을 귀한 여인이라고 했습니다. 엘리사가 자기 집 근처로 지날 때마다 강권하여서 음식을 대접하는 그러한 가정이었습니다. 9절에 "여인이 그 남편에게 이르되 항상 우리에게로 지나는 이 사람은 하나님의 거룩한 사람인 줄을 내가 아나이다. 우리가 저를 위하여 작은 방을 담 위에 짓고 침상과 책상과 의자와 촛대를 진설하사이다. 저가 우리에게 이르면 거기 유하리이다." 지나가는 엘리사에게 음식 대접 뿐 아니라 방도 만들어서 또한 책상과 촛대와 의자도 들여다 놓아서 하나님의 사람에게 최대의 대접을 하는 가정이었습니다.  그러자 엘리사는 자식이 없던 이 가정에 앞으로 아들이 있게 될 것이다 하면서 이 가정에 출산의 기적을 베풀어주게 됩니다. 그리고 그 아들이 죽자 엘리사는 그 아들을 다시 살려주는 기적을 또 베풀게 됩니다. 두 번씩이나 이런 은혜를 받은 귀한 가정이 되었습니다.   그 당시 아기가 없는 가정이 한둘이었겠습니까?  자식이 먼저 죽은 경우의 가정이 한둘이었겠습니까? 그런데도 오직 이 가정은 하나님의 은혜를 입어서 자식이 생기고, 또 죽었다가 다시 살리심을 받는 이런 기가 막힌 은혜를 받았습니다. 무슨 기준으로 하나님께서 이런 도움을 주셨습니까? 

그 다음 세 번째의 사건은 38절부터 나옵니다. 길갈이라는 곳에 흉년이 들었을 때입니다. 먹을 것이 부족한 때에 선지자의 생도들을 먹이기 위하여 큰솥을 걸어 놓고 국을 끓이게 되었습니다. 그 일을 위하여 한 사람이 먹을 만한 것들을 캐러 들에 나가서 어떤 열매를 따 가지고 국에 썰어 넣었습니다. 그런데 다 끓여서 먹고자 하니까 국에 독이 있어서 먹지를 못하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엘리사가 그 솥에다가 가루를 던져 해독이 된 후에 배고픈 그들이 다행히 그 국을 먹게 되었습니다.   흉년의 때에 배고픈 자가 그 당시에 한둘이었겠습니까? 그런데 왜 하필 이 경우에만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풀어서 그 국을 먹게 해 주셨습니까? 

네 번째 사건은 42절부터 나옵니다. 바알살리사에 사는 어떤 사람이 처음 익은 식물로 만든 보리떡 20개와 채소 한 부대를 하나님의 사람 엘리사에게 드렸습니다. 그랬더니 엘리사가 그것을 받아서 무리들에게 주어 먹게 하는데 놀랍게도 100명이 먹고도 남는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흉년의 때에 음식이 모자라는 경우가 한둘이었겠습니까? 그런데 하필 왜 이 경우에만 그렇게 하나님께서 능력으로 음식을 불려 주셨습니까? 

다섯 번째로 문둥병의 고침을 받은 나아만 장군의 경우입니다. 
"아람 왕의 군대 장관 나아만은 그 주인 앞에서 크고 존귀한 자니 이는 여호와께서 전에 저로 아람을 구원하게 하셨음이라 저는 큰 용사나 문둥병자" 라고 했습니다. 문둥병자인 그가 이스라엘의 선지자인 엘리사 앞에 찾아왔을 때에 엘리사는 내다보지도 않고 대문 앞에서 자기 종을 통해서 요단강에 가서 몸을 일곱 번 씻으라고 그 말만 전달케 했습니다. 크고 존귀한 자인 나아만으로서는 너무 뜻밖의 대접이었습니다. 그러나 나아만은 결국 이러한 모욕과 수치에도 불구하고 선지자 엘리사의 말에 겸손히 순종을 했더니 결국은 고침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당시 어디 문둥병자가 나아만 혼자 뿐 이었겠습니까? 누가복음 4장 27절에 예수님의 말씀에 보면 "또 선지자 엘리사 때에 이스라엘에 많은 문둥이가 있었으되 그 중에 한 사람도 깨끗함을 얻지 못하고 오직 수리아 사람 나아만 뿐이니라"고 했습니다. 이로 보건대 그 당시에 많은 문둥병자가 있었으되 나아만 한 사람만이 은혜를 입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여섯 번째의 사건은 6장 1절에 나옵니다. 
엘리사와 그 생도들을 위하여 집을 짓겠다고 나선 한 생도가, 나무를 벨 때에 빌어 온 도끼를 물에 빠뜨렸습니다. 안타까운 모습을 보고 엘리사가 나뭇가지를 베어 물에 던졌더니 쇠로 만든 도끼가 떠오르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다행히도 도끼를 건진 사건이 나옵니다.  무슨 일을 하다가 이처럼 낭패를 당해 안타까운 경우가 어디 한둘이었겠습니까?  그런데 어찌하여 여기 도끼가 물에 빠졌을 때에 하나님이 기적적 방법으로 떠오르게 해 주셨을까요? 무슨 기준으로 하나님께서 이런 은혜를 베푸셨을까? 
  이 여섯 가지 계속 이어지는 기적적인 사건들을 살펴보면 말 그대로 기적적인 사건들입니다.  질서의 하나님께서는 자신이 만든 이 세상의 자연법칙을 깨뜨리시면서 까지 기적을 베푸셔서 이들에게 은혜를 베푸십니다.  하나님이 보시기에 그럴 수 밖에 없는 어떤 타당한 기준 점이 있지 않겠습니까? 어떤 타당한 공통점이 있었기에 이들에게 은혜를 베푸신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자 그럼 무엇이 공통점이겠습니까? 무엇이 하나님이 은혜를 베푸시는 기준 점이 되었습니까?  

# 첫 번 째 공통점은 절박함입니다. 
  
오늘의 여섯 가지 기적이 일어난 이 경우를 보면 그 하나하나가 너무나 간절하고, 절박한 현실문제였습니다.    

선지 학교 생도였던 남편은 죽었고, 아들 둘이 종으로 팔려가는 상황입니다. 가난해도 이처럼 비극적인 가난이 없습니다.    

수넴 여인은 남편은 늙었고 자녀가 없었습니다. 그리고 늦게 본 그 아들이 덜컥 죽어버렸습니다. 모든 소망이 죽어버린 것입니다.    

흉년에도 불구하고 말씀을 들으러 모인 선지학교 생도들에게 교장선생님인 엘리사가 밥 한끼라도 먹이려고 야외로 나가 솥을 걸어놓고 산으로 들로 다니며 먹을 만한 것을 넣어 풀죽이라고 끓여먹는 상황에서 음식에 독이 들어있어서 그 음식마저도 못 먹고 버려야 하는 상황입니다.     

바알살리사라는 우상의 도시에서도 믿음을 지키는 성도가 가져온 너무나 귀한 음식 ‘보리떡 이십 개와 또 자루에 담은 채소’를 가져 왔는데 먹어야 할 선지 생도는 100명입니다. 참 애매한 양입니다.     

또 구국의 영웅이요, 일인지하 만인지상의 나아만이지만 문둥병자입니다. 그는 건강이 없었습니다. 차라리 건강이 있고 다른 것이 없는 사람이 부러운 그런 현실입니다.   

선지 학교 생도들이 거주하는 공간이 너무 비좁아서, 거주할 처소를 새로 세우는 일에... 집을 다 뒤져도 도끼 하나 없는 가난한 생도라,  빌려와서 나무를 하는 데 그만 그 도끼가 물에 빠졌습니다. 나무도 못하게 되었고 도끼를 변상해 주어야 하는 참 막막한 일입니다.          

6가지경우 모두 너무 안타깝고, 절박한 상황의 현실문제입니다. 있으면 좋고, 없으면 아쉬운 정도의 문제들이 아닙니다.  해도 해도 이럴 수가 있는가? 라는 말이 나오는 궁지에 몰린 현실문제입니다.  여러분들도 이런 경우를 당해보셨는지요? 

# 두 번 째 공통점은 섬김, 드림입니다. 각 경우마다 섬김, 드림이 있습니다.
 
선지학교 생도의 가정입니다.  “당신의 종 나의 남편이 이미 죽었는데 당신의 종이 여호와를 경외한 줄은 당신이 아시는 바니이다”(4;1) 라고 합니다. 부인이 엘리사에게 부르짖는 기준이 남편이 여호와를 경외하였다는 사실입니다. 만일 주의 일은 전혀 안하고 세상일에만 열심하다가 죽어 가족을 남기게 되었는데도 하나님께서 그렇게까지 그릇을 채워 주는 은혜를 베풀어 주셨겠습니까? 우상이 가득한 나라에서 가난한 선지학교의 생도였습니다. 여호와를 경외하다가 부인과 자녀를 남기고 먼저 간 사람입니다. 자기 목숨을 드린 사람입니다
  
수넴여인의 가정도 드림이 있었습니다. 엘리사가 아들을 주고 또한 그 아들이 죽자 다시 살려주는 그러한 은혜는 바로 엘리사를 그렇게 극진히 대접하며 모시려는 가정이었기 때문에 베풀어주신 것이 아니겠습니까?  “여인이 그의 남편에게 이르되 항상 우리를 지나가는 이 사람은 하나님의 거룩한 사람인 줄을 내가 아노니”(4;9) 하였습니다. 이 여인의 대접은 하나님에 대한 대접이었습니다. 
  
솥의 독을 해독하는 경우도 성경은 먼저 이렇게 말씀합니다.  “ 엘리사가 다시 길갈에 이르니 그 땅에 흉년이 들었는데 선지자의 제자들이 엘리사의 앞에 앉은지라 엘리사가 자기 사환에게 이르되 큰 솥을 걸고 선지자의 제자들을 위하여 국을 끓이라 하매”(4;38) 흉년에 못 먹어서 배고픈 중에도 선지자의 제자들이 엘리사 앞에 앉았습니다. 밥 달라고 앉았겠습니까?  말씀을 듣겠다고 주린 배를 잡고 엘리사 앞에 앉은 그 사람들을 위해서 교장인 엘리사가 국을 끊이는 것입니다. 엘리사가 생도들을 위해 밥을 먹이려는 것입니다. 육신의 베고픔에도 불구하고 우상에 빠진 나라를 위해 먼저 말씀을 사모하는 마음을 가진 생도들이었습니다. 자기를 드린 생도들입니다.
  
처음 익은 실과로 떡을 만들어서 가져온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한 사람이 바알 살리사에서부터 와서 처음 만든 떡 곧 보리떡 이십 개와 또 자루에 담은 채소를 하나님의 사람에게 드린지라 그가 이르되 무리에게 주어 먹게 하라” (4;42)  이 사람은 무명의 한 성도인데 그가 사는 곳이 ‘바알 살리사’입니다.  원래 이름은 ‘살리사’였는데 이세벨의 악정으로, 우상인 ‘바알’의 이름이 붙여서 '바알살리사'라고 불렀습니다.  우상의 도시인 ‘바알살리사’로부터 와서 하나님의 사람에게 헌물을 드렸습니다. 그는 엘리사의 선지학교, 즉 그가 알기로는 진짜 선지자들을 양성하고 있는 학교로 확신하는 곳으로 예물을 가져왔던 것이었습니다.  그 예물에 100명이 먹고도 남는 은혜를 베풀어주신 것입니다.  

크고 존귀한 사람인 나아만도 드림이 있습니다. “전에 아람 사람이 떼를 지어 나가서 이스라엘 땅에서 어린 소녀 하나를 사로잡으매 그가 나아만의 아내에게 수종들더니 3그의 여주인에게 이르되 우리 주인이 사마리아에 계신 선지자 앞에 계셨으면 좋겠나이다 그가 그 나병을 고치리이다 하는지라”(6;2-3) 그는 부모형제를 아람사람에게 다 잃어버리고 노예로 사로잡혀온 어린 소녀가 먼저 엘리사 선지자를 소개하도록 합니다. 얼마나 잘해주었으면 아이가 부모형제와 생 이별한 원한을 잊고 이렇게 하겠습니까?  또 자기의 종들을 자식처럼 대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의 종들이 나아와서 말하여 이르되 내 아버지여 선지자가 당신에게 큰 일을 행하라 말하였더면 행하지 아니하였으리이까 하물며 당신에게 이르기를 씻어 깨끗하게 하라 함이리이까 하니 14나아만이 이에 내려가서...”(6;13-14)  그는 이방인이요, 문둥병자이지만 자기 주위의 사람에게 참 된 자비를 베풀 줄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자기가 문둥병자이기 때문에 원망하고 분노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처럼 어려운 사람을 진정으로 돌보는 마음을 가진 사람입니다.
 
나뭇가지를 던져 쇠도끼를 떠오르게 하는 기적도 그렇습니다.  무엇을 하다가 일어난 일입니까?  “선지자의 제자들이 엘리사에게 이르되 보소서 우리가 당신과 함께 거주하는 이곳이 우리에게는 좁으니”(6;1) 합니다. 선지학교 학생들의 기숙사를 짓는 일이었습니다. 그것도 본인들이 직접 나무를 잘라서 짓는 중에 일어난 일입니다.  만일 자기 혼자 살집을 짓다가 도끼가 물에 빠졌을 경우에도 하나님이 능력으로 도와주었겠습니까? 
 
성도여러분, 이 모든 사건들의 두 번 째 공통점은 하나님과 사람을 향한 섬김, 드림입니다.  우리가 섬김과 드림이 있어야 하겠습니다. 성도여러분, 내가 절박한 상황이면 원망과 증오가 있기 쉽습니다. 그러나 원망과 증오에서는 기적이 일어나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위한 드림, 하나님의 사람들을 위한 섬김, 낮고 비천한 사람들을 위한 사랑이 우리에게 있어야 하겠습니다. 

# 세 번 째 공통점은 엘리사입니다. 
  
이 모든 기적의 중심에는 엘리사가 있습니다. 저는 이 말씀을 준비하면서 여기서 고민을 하였습니다. ‘엘리사는 누구인가? 신약시대인 지금 각 교회 목사님인가?’ 엘리사를 목사로 보면 저와 여러분은 큰 고민에 빠집니다. 이 모든 기적이 아주 특별한 일이 되기 때문입니다. 엘리사처럼 능력을 팍팍 쓰는 그런 특별한 목사님이 대한민국에 몇 명이나 있을까요? 모든 성도들이 그 능력의 종들 뒤만 따라다녀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너무나 절박한 현실 문제들을 다 포기하고 체념하고 살아야 합니다.  남편이 선지생도로 헌신하다가 죽고, 남은 자식들은 종으로 팔리는 삶이나, 수넴여인처럼 하나님의 일에 열심이어도 자식 하나 없이 평생 외롭게 사는 것,  또 흉년에도 말씀을 듣기를 원하는 열심히 있어도 먹던 풀죽조차도 도로 뱉어야 합니다.  헌물로 드려진 음식을 엘리사 혼자 다 먹든지... 누가 조금 더 먹지 않는가? 눈치 보면서 겨우 입에 맛만 보아야 합니다.    나아만은 결국 문둥병자로 저주아래서 죽어야 하고, 선지학교를 짓는 것은 중도에 그만두고 오히려 도끼 빌린 사람에게 용서를 구하고, 따로 빚을 내어서 도끼 값을 갚아야 합니다.  엘리사가 없으면 모든 경우에 사는 것이 너무 비참하게 됩니다.  저는 이 말씀을 준비하다가 ‘여러분, 이렇게 비참하게 살든지, 아니면 엘리사처럼 능력있는 종을 찾아서 이사 가십시오’ 이라고 설교를 할 수가 없었습니다. 
  
성도여러분,  엘리사는 주(主)님을 예표합니다. 엘리사는 하나님이요 예수님의 상징입니다.  구약의 사람들은 그냥 하나님 앞에 나가지 못했습니다.  하나님 앞에 나가려 하면 반드시 제사장을 통해서 나아가야 합니다. 죄 용서를 받는 것도 반드시 제사장을 통한 예배가 있어야 죄 용서를 받습니다.   그래서 엘리야는 하나님을 상징합니다. 엘리야에게 나오는 사람은 하나님 앞에 나오는 것입니다. 엘리야의 능력이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 아닙니까?        

하지만 신약시대를 사는 우리는 다릅니다.  “그러나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벧전2;9) 우리는 직접 하나님 앞에 나갑니다.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는 담이 없습니다. 

예수님이 다 허무셨습니다.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원수 된 것 곧 중간에 막힌 담을 자기 육체로 허시고”(엡2;14) 성도여러분, 우리가 엘리야고, 우리가 제사장입니다. 우리에게서 기적이 일어납니다. 우리는 엘리야같은 능력있는 제사장을 찾아서 돌아다닐 이유가 없습니다. 우리가 능력있는 제사장이 되면 그만입니다. 우리가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입니다.  아멘입니까? 

# 마지막 공통점은 믿음(信)입니다. 

각 경우마다 엘리사의 말씀에, 즉 주어진 하나님의 말씀에 믿음으로 순종 합니다.    

선지생도의 부인은 “그릇을 빌리고 그 그릇에 기름을 채우라”는 말도 안 되는 행동을 그대로 합니다. 그런데 믿고 빌린 그릇만큼, 믿음의 크기만큼 기름이 계속해서 흘러나옵니다.  

수넴여인도 죽은 아이를 엘리사에게 데리고 가서 맡겨버립니다. 맡기는 것은 부활에 대한 믿음이 없이는 불가능합니다.  ‘죽은 아이를 다시 살릴 수 있습니다.’ 는 믿음이 이 엄마에게 있었습니다.   

음식에 독이 있다는 것을 알았을 때 생도들은 ‘다 틀렸다. 이 음식은 버려야 한다’ 하지 않고 이렇게 말합니다. “그들이 외쳐 이르되 하나님의 사람이여 솥에 죽음의 독이 있나이다”(4;40) 하나님의 사람이 죽음의 독을 해결한다는 믿음이 이렇게 외치게 하는 것입니다.    

보리떡 20개와 자루에 담은 채소와 100명이나 되는 사람을 보고서 엘리사는 “무리에게 주어 먹게 하라 여호와의 말씀이 그들이 먹고 남으리라 하셨느니라”(4;43) 할 때에 사환은 상식적으로 말이 안 되는 줄 알면서도 믿고 말씀대로 하였습니다.  “그가 그들 앞에 주었더니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대로 먹고 남았더라”(4;44)  

나아만은 이방인 아람사람이지만 진정한 믿음의 사람입니다. 국방부장관이 사로잡혀온 계집아이의 말을 믿습니다.  또 엘리사의 말도 안 되는 처방에 기가차고 자존심도 너무 상했지만...그는 다른 사람이 아닌 종들의 말을 듣습니다. 그리고 종들의 말을 들어서 그는 문둥병을 고칩니다. 

여러분, “이와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 네가 보거니와 믿음이 그의 행함과 함께 일하고 행함으로 믿음이 온전하게 되었느니라”(약2;17, 22) 그는 행동으로 그의 믿음을 보인 사람입니다.   *쇠도끼를 떠오르게 한 사람은 엘리사이지만 그 도끼를 취한 사람은 본인입니다.  “...엘리사가 나뭇가지를 베어 물에 던져 쇠도끼를 떠오르게 하고 7이르되 너는 그것을 집으라 하니 그 사람이 손을 내밀어 그것을 집으니라”(왕하6;6-7) 믿음은 행동으로 나타납니다. 

성도여러분, 이제 말씀을 마칩니다.

① 우리의 삶속에서 정말 간절히 하나님의 손길이 필요할 때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능력이 없이는 너무 비참해지고, 너무 슬프게 됩니다. 이때 우리는 하나님에게 나아가 구해야 합니다.    

② 그리고 기적에는 씨앗이 있습니다. 응답에 공짜는 없습니다. 반드시 누군가의 사랑이 있고,  드림이 있습니다. 그것이 씨가 되어서,  그것 때문에 기적이라는 열매가 열립니다.   

③ 기적의 주인공은 나 자신입니다. 나에게서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습니다. 내게 있는 문제는 나에게서 해결이 됩니다. 다른 어떤 사람을 찾아다니지 마십시오.   

④ 믿음이 있을 때 일이 마무리 됩니다. 믿음이 없이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성도여러분, 하나님은 전능하신 분입니까? 그러면 하나님이 오늘도 여기서 능히 이 일을 하실 수 있음을 믿으십니까?  “예수께서 백부장에게 이르시되 가라 네 믿은 대로 될지어다 하시니 그 즉시 하인이 나으니라”(마8;13) 여러분이 믿은 대로 됩니다. 

설교를 들으면서, 성경을 읽으면서 마음에 주시는 깨달음이 있습니다. 그때 ‘아멘’하시면 됩니다.  ‘아멘’하면 내 말씀이 되고, 나의 체험이 되고 간증이 됩니다.  성경은 살아계신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지금도 살아계신 하나님은 성경을 통해 우리 한 사람 한 사람과 지금도 대화(對話)를 하십니다. 말씀의 주인공, 믿음의 주인공, 기적의 주인공이 되시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아멘.    아멘.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