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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참 낯선 사람들 (고후 6: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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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 낯선 사람들 (고후 6:1-10)


[우리는 하나님과 함께 일하는 사람으로서 여러분에게 권면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헛되이 받지 않도록 하십시오.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은혜의 때에, 나는 네 말을 들어주었다. 구원의 날에, 나는 너를 도와주었다” 하셨습니다. 보십시오, 지금이야말로 은혜의 때요, 지금이야말로 구원의 날입니다. 아무도 우리가 섬기는 이 일에 흠을 잡지 못하게 하려고, 우리는 무슨 일에서나 아무에게도 거리낌거리를 주지 않습니다. 우리는 무슨 일에서나 하나님의 일꾼답게 처신합니다. 우리는 많이 참으면서, 환난과 궁핍과 곤경과 매 맞음과 옥에 갇힘과 난동과 수고와 잠을 자지 못함과 굶주림을 겪습니다. 

또 우리는 순결과 지식과 인내와 친절과 성령의 감화와 거짓 없는 사랑과 진리의 말씀과 하나님의 능력으로 이 일을 합니다. 우리는 오른손과 왼손에 의의 무기를 들고, 영광을 받거나, 수치를 당하거나, 비난을 받거나, 칭찬을 받거나, 그렇게 합니다. 우리는 속이는 사람 같으나 진실하고, 이름 없는 사람 같으나 유명하고, 죽는 사람 같으나, 보십시오, 살아 있습니다. 징벌을 받는 사람 같으나 죽임을 당하는 데까지는 이르지 않고, 근심하는 사람 같으나 항상 기뻐하고, 가난한 사람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고, 아무것도 가지지 않은 사람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사람입니다.] 

• 삶의 전선

주님의 은총이 우리 모두에게 넘치시기를 빕니다. 방사능 비가 내리더니, 황사까지 날아오는 우울한 봄날입니다. 카이스트(한국과학기술원) 대학생이 또 목숨을 끊었다는 소식도 들려옵니다. 올해 들어 벌써 네 번째입니다. 성적에 따른 등록금 차등 납부를 시행하는 대학이 젊은이들을 벼랑 끝으로 내몬 형국입니다. 참 슬픈 현실이고, 슬픈 나라입니다. 사람을 능력에 따라 가르고 차별하는 사회, 사람을 있는 그대로 존중할 줄 모르는 사회는 죽음을 권하는 사회입니다. 때가 되어 꽃들은 무심코 피어나는 데, 사람살이의 풍경은 을씨년스럽기 이를 데 없습니다. 이럴 때일수록 정신을 차린 사람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함께 손을 잡을 사람들이 필요합니다. 교회가 바로 서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성도는 전사(warrior)가 되어야 합니다. 성도의 싸움은 두 가지 전선에서 벌어집니다. 첫째는 자기 자신과의 싸움이고, 둘째는 세상의 주관자들인 악한 영 혹은 악한 시대정신과의 싸움입니다. 예수님은 공생애를 시작하시기 전에 광야에 들어가 사탄의 유혹과 맞서셨습니다. 물질의 유혹, 인기의 유혹, 권세의 유혹이 그것입니다. 유혹이 유혹인 것은 매력적이기 때문입니다. 물질, 인기, 권세는 현대인들이 사력을 다해 추구하는 가치들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궁극적 관심이 되는 순간 우리는 삶에 대한 통제권을 잃고 인간다움을 잃어버리게 마련입니다. ‘나’의 나됨을 버리고, 만나는 사람들을 이용하는 일도 서슴지 않게 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나 자신과 다른 이들을 수단으로 삼는 순간 사탄의 얼굴에는 미소가 떠오릅니다. 

이런 유혹을 물리치기 위해서는 그것과 맞서 싸우면 안 됩니다. 맞서 싸우면 백전백패입니다. 욕망은 억누르는 순간 더 강화됩니다. ‘하지 말라’고 하면 더 하고 싶어집니다. 시험 때가 되면 읽고 싶은 책도 많아지고 보고 싶은 영화도 많아지지 않던가요?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더 좋은 일에 눈을 돌려야 합니다. 예수님의 경우 ‘더 좋은 것’은 하나님의 뜻을 수행하는 것이었습니다. 사람은 참 신비한 존재입니다. 1988년에 하버드 대학의 연구자들이 한 실험이 있습니다. 

그들은 근심이나 긴장상태가 지속되면 침이 마르면서 면역항체가 줄어든다는 사실에 착안하여 정반대의 경우를 상정해 보았습니다. 그들이 환자들에게 마더 테레사의 일대기를 그린 영화를 보여주자 그들의 침에 있는 면역항체가 뚜렷이 증가했습니다. 남을 위한 봉사활동을 할 때는 물론이고, 남의 선행을 보기만 해도 결과는 마찬가지였습니다. 연구자들은 그 현상을 ‘마더 테레사 효과’라고 명명했습니다. 

다른 삶이 가능하고, 또 이전에 알지 못했던 기쁨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된 사람은 돈과 인기와 권세가 절대적인 것이 아님을 알아차립니다. 사람은 누군가의 ‘설 땅’ 혹은 ‘비빌 언덕’이 되어줄 때 보람과 기쁨을 느낍니다. 예수님은 바로 그런 삶의 길로 우리를 초대하고 계십니다. 하지만 세상은 그 길로 가려는 우리의 앞을 가로막습니다. 그런 가로막힘 때문에 우리는 자주 주저앉곤 합니다. 하지만 그 길은 기어코 가야만 할 길입니다. 40년의 광야살이를 하면서도 끝없이 가나안을 향해 행군했던 출애굽 공동체처럼 우리도 자꾸만 그 길을 지향해야 합니다. 

• 고난을 각오하면

저는 제 책에 사인을 부탁하는 이들에게 ‘진리를 향한 순례자 아무개님’이라고 적어줄 때가 있습니다. 그것은 그렇게 살자는 저 자신의 다짐이자 초대입니다. 순례자는 삶의 모든 순간을 하나님의 은혜의 때로 인식하고, 하나님이라는 중심에 자신을 비끌어매는 사람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바울은 ‘하나님의 은혜를 헛되이 받지 않도록 하라’면서 ‘지금이야말로 은혜의 때요, 지금이야말로 구원의 날’이라고 말합니다. 바울은 ‘지금’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새로운 삶을 누려야 할 때는 바로 지금입니다. ‘지금’이야말로 하나님의 뜻을 온 몸으로 수행해야 할 유일한 시간입니다. 과거는 지나갔고 미래는 아직 오지 않았으니 말입니다. 

요 며칠 신광학교 교문 옆에 소담하게 피어나는 목련에 눈길을 주었더니, 교사 앞에 진작부터 피었던 목련꽃은 어느새 다 지고 말았습니다. 피어남과 스러짐 사이가 그렇게 짧을 수가 없습니다. 지난 금요일 오전 교회 화단에는 제비꽃이 수줍게 피어났습니다. 반가운 손님을 만난 듯 흥감한 생각이 들어 목회실 식구들을 불러내 그 꽃과 만나게 했습니다. 보는 이마다 탄성을 발했습니다. 지금 누리지 않으면 누릴 수 없는 즐거움입니다. 삶도 그러합니다. 하나님은 각자의 때에 맞는 아름다움을 창조하셨습니다. 어떤 시간도 무의미한 시간은 없습니다. 대충, 헛되이 살아도 좋은 시간은 없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일꾼으로 살려는 사람은 어려움을 각오해야 합니다. 세상은 길들여지기를 거부하는 사람들을 미워합니다. 애굽에서의 종살이를 팔자려니 여기고 살고 있던 사람들에게 모세는 자유의 꿈을 불어넣었습니다. 히브리인들에게 모세는 해방운동의 지도자이지만, 바로의 입장에서는 반역자입니다. 예언자들은 모두 체제에 길들여질 수 없던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모두가 당연하게 받아들이고 있는 질서와 가치에 대해 물음표를 붙이곤 했습니다. 세례자 요한도 그랬고 예수님도 그랬습니다. 길들여지기를 거부하는 사람들은 스스로 어려움을 택한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인생이 어렵다고 하여 낙심하지 않았습니다. 낙심하고 투덜거리는 것은 약자의 버릇입니다. 

<전능자의 그늘>이라는 책으로 유명한 짐 엘리엇(Jim Elliot)의 일화가 떠오릅니다. 그는 남미의 키치와 인디언 전도를 위해서 선교센터를 짓고 있었습니다. 이 센터에는 병원과 학교 등 선교를 위해 필수적인 여러 시설을 포함하고 있었습니다. 엘리엇은 이를 위해 일 년 이상 일했고 거의 완성단계에 이르렀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큰 홍수가 나서 이 모든 시설이 순식간에 모두 떠내려가 버리고 말았습니다. 허탈감이 밀려왔습니다. 며칠 후 엘리엇은 약혼 엘리자베스에게 편지를 보냈습니다. 

“나는 그 날 아침 나의 모든 수고와 땀과 기도가 들어있는 선교센터를 휩쓸어가는 홍수 속에서 우리 하나님의 세미한 음성을 들었습니다. ‘나는 아직도 너의 하나님이다. 지금도 너는 나를 신뢰할 수 있느냐?’ 이제 나의 수고는 물거품이 되어 끝났습니다. 그렇지만 하나님께서 다시 시작하실 것입니다.” 

다시 시작할 수 있는 용기가 있었기에 그는 실패자가 아닙니다. “자기의 몸을 신에게 바친 사람은 사람을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마하트마 간디의 말이 참 적실하게 다가옵니다. 

• 꿈은 죽지 않는다

바울 사도는 주님의 일꾼으로 사는 동안 겪었던 어려움들을 열거하고 있습니다. 환난, 궁핍, 곤경, 매 맞음, 옥에 갇힘, 난동, 수고, 잠 부족, 굶주림…. 눈을 감고 바울이 겪어내야 했던 어려움들을 떠올려봤습니다. 어느 것 하나 가벼운 게 없었습니다. 조금만 잠을 못자도 신경이 날카로워지고, 누군가의 비난에도 예민하게 반응하는 우리들입니다. 말을 함부로 하는 사람을 보면 불쑥불쑥 똑같은 말로 되갚아주고 싶을 때도 있습니다. 바울도 그런 혼란을 겪지 않았을까요? 하지만 그는 이내 몸과 마음을 곧추 세우곤 했을 겁니다. 하나님의 일꾼으로 산다는 것은 꽃방석 위에 앉는 것이 아닙니다. 때로는 가시방석 위에 앉아야 합니다. 그 가시방석을 마다하지 않을 때 우리 영혼은 맑아지고 진정한 자유가 우리 속에 유입됩니다.

바울이 그런 시련 속에서도 굳게 붙들고 놓지 않은 것이 있었습니다. 순결, 지식, 인내, 친절, 성령의 감화, 거짓 없는 사랑, 진리의 말씀,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한꺼번에 죽 열거 했지만 그 하나하나에 기가 막힌 삶의 무게가 실려 있습니다. 이 모든 것들을 관통하고 있는 것은 예수의 마음입니다. 그 마음을 잃지 않았기에 바울은 시련 속에서도 거칠어지거나 낙심하지 않을 수 있었습니다. 바울은 로마 교회에 보내는 편지에서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십시오”(롬12:21)라고 권고합니다. 

아마도 이것은 그의 좌우명이었을 겁니다. 요 임금이 순에게 왕위를 물려주면서 통치의 지침으로 준 네 글자가 있습니다. ‘윤집궐중允執厥中’, 즉 오로지 그 중심을 굳게 잡으라는 뜻입니다. 마땅히 잡아야 할 것은 잡지 않고 잡지 말아야 할 것을 잡을 때 인생은 엉망이 됩니다. ‘本’을 버리고 ‘末’을 붙들 때 삶은 바빠지고 진짜 기쁨은 줄어듭니다. 

하지만 현실은 우리를 자꾸만 회의의 늪으로 밀어 넣습니다. 빛의 자식들보다는 어둠의 자식들이 더 지혜로워 보입니다. 착한 이들은 늘 악한 이들에게 이용만 당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래서 하나님 나라를 향한 우리의 꿈은 자꾸만 흐릿해집니다. 뜻은 좋지만 현실은 그렇게 호락호락하지 않다는 말도 심심치 않게 들려옵니다. 믿음이 필요한 것은 바로 이 순간입니다. 바울 사도는 갈라디아 교회에 보내는 편지에서 이렇게 권고하고 있습니다.

“선한 일을 하다가, 낙심하지 맙시다. 지쳐서 넘어지지 아니하면, 때가 이를 때에 거두게 될 것입니다.”(갈6:9)

꿈쟁이 요셉의 경우를 생각해 보십시오. 그는 형들에게 자기 꿈 이야기를 들려주었습니다. 밭에서 곡식단을 묶고 있는데, 갑자기 자기가 묶은 단이 우뚝 일어서자 형들의 단이 자기 단을 둘러서서 절을 하더라는 것입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는 다른 꿈 이야기도 들려줍니다. 해와 달과 별 열한 개가 자기에게 절을 했다는 것입니다. 형들은 무척 마음이 상했습니다. 나중에 요셉이 아버지의 지시를 받아 양을 돌보고 있던 형들이 잘 있는지 보러 광야로 나왔을 때 기어코 사단이 벌어지고 맙니다. 멀리서 그를 알아본 형들은 요셉을 죽이려고 음모를 꾸밉니다.

“야, 저기 꿈꾸는 녀석이 온다. 자, 저 녀석을 죽여서, 아무 구덩이에나 던져 넣고, 사나운 들짐승이 잡아먹었다고 하자. 그리고 그 녀석의 꿈이 어떻게 되나 보자.”(창37:20)

요셉의 ‘꿈’은 기존 질서에 대한 위협이었습니다. 그래서 기존 질서를 상징하는 형들은 자기들을 지키기 위해 요셉을 없애려 했던 것입니다. ‘그 녀석의 꿈이 어떻게 되나 보자’. 이 말이 참 절묘합니다. 그런데 여러분, 어떻습니까? 그들은 요셉을 종으로 팔아버림으로 그의 꿈을 무산시켰다고 생각했지만, 결국 그 꿈은 실현되고 말았습니다. 요셉은 애굽의 총리가 되어 자기 가족과 나라를 살렸으니 말입니다. 꿈은 언제나 무기력해 보입니다. 하지만 꿈을 죽일 수는 없습니다. 그 꿈이 하나님이 주신 꿈이라면 말입니다. 

• 역설적 삶

하나님의 꿈을 가슴에 품은 자의 삶은 어떠합니까? 바울 사도는 기독교인의 역설적인 삶을 몇 가지의 대구를 통해 인상 깊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속이는 사람 같으나 진실하고, 이름 없는 사람 같으나 유명하고, 죽는 사람 같으나, 보십시오. 살아 있습니다. 징벌을 받는 사람 같으나 죽음을 당하는 데까지는 이르지 않고, 근심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하고, 가난한 사람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고, 아무것도 가지지 않은 사람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사람입니다.”(8b-10)

하나하나 성찰해 보면 다 깊은 맛이 우러나는 구절들이지만, 저는 뒷부분에 나오는 몇 가지만을 사색의 전거로 삼아보고 싶습니다. 바울은 성도들이 근심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하는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그런 기쁨은 그의 마음이 하나님에 조율되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습니다. 바울은 7장에서 하나님의 뜻에 맞게 마음 아파하는 것은, 회개를 하게 하여 구원에 이르게 하므로 후회할 것이 없다고 말합니다. 느헤미야는 백성들에게 “주님 앞에서 기뻐하면 힘이 생기는 법”(느8:10)이라고 말합니다. 

성도는 또 “가난한 사람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는” 사람입니다. 예수님이 바로 그 예입니다. 주님은 머리 둘 곳조차 없는 분이셨습니다. 하지만 그와 만나는 사람들은 누구나 영적인 고양감을 느꼈습니다. 주님은 가진 것이 없었기에 당신 자신을 선물로 주셨습니다. 누구를 대하든 골육지친을 대하듯 하셨고, 하나님의 사랑받는 사람들로 대하셨습니다. 

그런 받아들임이, 그런 사랑이 사람들 속에 깃들어 있던 생명의 기운을 불러일으켰습니다. 성전 미문 앞에 앉아 있던 나면서부터 못 걷는 사람에게 베드로는 “은과 금은 내게 없으나, 내게 있는 것을 그대에게 주니,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시오”(행3:6) 하고 말을 건넸습니다. 예수가 그의 속에 들어가자 그는 일어섰고, 하나님을 찬양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성도는 가진 것이 아니라 자기 마음에 모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다른 이들의 삶을 부요하게 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성도는 “아무 것도 가지지 않은 사람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사람입니다.” 값진 진주를 발견한 상인은 자기가 가진 모든 것을 팔아 그 진주를 삽니다. 그 진주 하나가 다른 모든 것들을 다 당하고도 남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예수를 알고 난 후에 이전에 자기에게 이로웠던 것은 무엇이든지 해로운 것으로 여기게 되었다고 말합니다. 예수 한 분만으로 만족할 수 있다면 우리는 이미 모든 것을 가진 사람입니다. 그 한 분을 잃는다면 모든 것을 잃는 셈입니다. 

예수를 꼭 붙든 사람은 세상에 길들여지지 않는 사람입니다. 그들은 세상 사람들이 보기에 참 낯선 존재들입니다. 하지만 바로 그들을 통해 하나님은 역사의 꿈을 꾸고 계십니다. 그 꿈을 좌절시키려는 세력이 많지만, 하나님의 꿈은 스러지는 법이 없습니다. 지금 여러분은 하나님의 꿈으로 살고 있습니까? 세상에 길들여진 신앙인, 물질과 명예와 권세를 얻기 위해 동분서주하는 종교인들이 너무 많습니다. 지금 주님은 당신의 일을 함께 할 사람들을 찾고 계십니다. 느른한 일상의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주님의 꿈을 이루는 일에 동참하는 우리가 되기를 기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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