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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사순절] 고난 앞에 당당히 서라 (요 18: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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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난 앞에 당당히 서라 (요 18:1-11)


2차 세계 대전이 끝나갈 무렵에 일본군이 마지막으로 발악한 가마가제 특공대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 보셨을 것입니다. 가미가제란 ‘신풍 (神風)’ 즉 ‘신이 내려준 바람’이라는 뜻입니다. ‘신이 내려준 바람’ 즉 가미가제에 대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1274년, 1281년에 몽골군이 배를 타고 일본을 침공했습니다. 그 때에 하카다만에서 불어온 강한 바람에 의해 몽골군의 배가 모두 침몰했습니다. 그 후부터 일본 사람들은 가미가제 즉 ‘신이 내려준 바람’이 일본을 구했다고 믿었습니다. 

일본은 2차 세계대전에서 패전의 위기에 몰리자 비행 특공대를 조직해 그 이름을 가미가제 특공대라 했습니다. 가미가제 즉 일본을 위기에서 구하는 ‘신의 바람’이 되기를 원했던 것입니다. 전투기에 조종사 한 명만 타고 폭탄을 실었습니다. 연료는 목적지까지만 갈 수 있을 만큼만 주입했습니다. 살아서 돌아올 수 없는 죽음의 출격이었습니다. 조종사들은 ‘천황 만세’를 외치면 연합군 군함을 향해 돌진해 자신의 죽음과 함께 연합군의 군함을 공격했습니다. 

특공대원들은 출격하기 전에 반드시 흰 천을 덮은 탁자에 조종사들이 받을 마지막 잔이 준비되어 있었습니다. 천황이 내려준 잔입니다. 그들은 그 잔을 받아 마시며 ‘천황 만세’를 외친 후에 출격해 자신의 죽음으로 임무를 수행했습니다. 가미가제 특공대원들이 출격 전에 마시는 마지막 잔은 ‘나도 죽고 너도 죽는 잔인한 잔’이었습니다. 나와 너를 모두 공멸시키는 저주의 잔, 악한 잔입니다. 

오늘 본문을 자세히 읽어보면 예수님께서 마셔야 할 잔에 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 잔도 죽음의 잔입니다. 그러나 예수님 앞에 놓인 잔은 나도 죽고, 너도 죽는 그런 잔이 아니라, 나는 죽고 너는 살리는 잔입니다. 사순절 다섯째 주일을 맞아 예수님께서 우리를 살리기 위해 마신 고난의 잔의 의미를 되새겨 보며 우리 삶의 자리에서 우리들이 겪는 고난을 되돌아보는 은혜가 있기를 바랍니다. 

예수님은 눈앞에 다가온 십자가 죽음의 잔이 얼마나 고통스러운 것인지를 알고 계셨습니다. 예수님은 로마 군사들에게 잡혀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기 전날 밤에 제자들과 함께 감람산에 올라가셔서 밤새도록 기도하셨습니다. 마태복음 26장에 기록되어 있는 그 장면을 읽어보면 예수님께서 십자가의 죽음의 잔을 앞두고 얼마나 고통스러워 하셨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마태복음 26장 36-39절의 말씀을 한 번 읽어보겠습니다.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과 함께 겟세마네라 하는 곳에 이르러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저기 가서 기도할 동안에 너희는 여기 앉아 있으라 하시고 베드로와 세베대의 두 아들을 데리고 가실새 고민하고 슬퍼하사 이에 말씀하시되 내 마음이 매우 고민하여 죽게 되었으니 너희는 여기 머물러 나와 함께 깨어 있으라 하시고 조금 나아가사 얼굴을 땅에 대시고 엎드려 기도하여 이르시되 내 아버지여 만일 할 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하시고’ 

‘고민하고 슬퍼하사’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또 ‘내 마음이 매우 고민하여 죽게 되었으니’ ‘얼굴을 땅에 대시고 엎드려 기도하여 이르시되 내 아버지여 만일 할 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을 통해 예수님은 당신이 마셔야 할 잔의 고통이 얼마나 혹독한 것인지를 알고 계셨고 그로 인해 많은 고통과 두려움을 느끼셨습니다. 

십자가의 죽음의 고통을 얼마나 두려워 하셨는지를 누가복음 22장 44절에서 ‘예수께서 힘쓰고 애써 더욱 간절히 기도하시니 땀이 땅에 떨어지는 핏방울 같이 되더라’ 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땀이 땅에 떨어지는 핏방울 같이 되더라’는 말은 땀에 피가 섞여 나왔다는 것입니다. 얼마나 몸부림치며 애간장이 타는 기도를 하셨으면, 죽음의 두려움에 얼마나 몸부림쳤으면 흐르는 땀에 피가 섞여 핏방울같이 되었겠습니까? 

이 세상에 죽고 싶은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것도 서른 살의 꽃과 같은 나이에 말입니다. 그 고난을 피해 쉽게 갈 수 있는 길이 많음에도 불구하고 십자가의 죽음의 길을 선택한다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이겠습니까?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것도 좋지만 굳이 죽음의 고통을 감수하면서까지 할 필요가 있을까? 조금 비겁하더라도 살아남아 더 오래 봉사하며 살아가는 것이 더 낫지 않을까? 예수님의 마음에는 죽지 않아도 될만한 이유, 죽음을 피하면 더 좋을 수 있는 많은 이유들을 댈 수 있었을 것입니다. 

죽음의 잔을 앞에 놓고 예수님을 유혹하는 최후의 유혹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몸부림치는 기도를 통해 눈앞에 놓인 십자가의 죽음의 잔을 피하지 않기로 결심합니다. 십자가의 잔의 의미와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고 수용하는 순간부터 예수님께서 고난을 대하는 모습이 달라집니다. 예수님이 고난을 대하는 모습이 달라지니 상황이 달라집니다. 

가룟 유다가 예수님을 배반하고 대제사장과 로마 군대를 이끌고 예수님을 잡으러 겟세마네 동산에 올라왔습니다. 3절에 ‘유다가 군대와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에게서 얻은 아랫사람들을 데리고’ 라는 말씀에서 ‘군대’ 라는 말에 ‘스페이라’는 단어를 쓰고 있습니다. 이는 600명의 중대 병력을 말합니다. 로마 군대 600명을 거느리고 예수님을 잡으러 온 것입니다. 무장한 군사 600명을 거느리고 왔다는 것은 뭔가 큰일이 일어난 것에 대비한 모습입니다. 긴장감이 맴돌고 위압감을 느끼게 합니다.

예수님은 무장한 600명의 군사가 왜 왔는지를 아십니다. 4절에 보면 ‘예수께서 그 당할 일을 다 아시고’ 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군사들에게 잡혀가 고난의 십자가 죽임을 당한다는 것을 다 알고 계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위압적이고 공포스런 모습으로 다가오는 군사들을 향해 ‘너희는 누구를 찾느냐?’라고 물으십니다. 그들이 ‘나사렛 사람 예수요’라고 대답합니다. 예수님은 그 군사들을 향해 ‘내가 바로 그 예수이다’라고 말씀하시면서 앞으로 나아갑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그렇게 기세등등하게 올라온 로마 군사들이 ‘내가 바로 그 예수다’라고 말씀하시며 앞으로 당당하게 걸어 나오시는 예수님을 보고 놀라 도리어 뒷걸음질 치다가 넘어집니다. 예수님은 당황해 하며 어쩔 줄 몰라 하는 로마 군사들을 향해 ‘너희는 누구를 찾느냐’라고 다시 물으십니다. 그들이 ‘나사렛 사람이 예수요’라고 답하자 예수님은 다시 ‘내가 그 사람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군사들이 선뜻 예수님을 포박하지 못합니다. 

이 때 제자 베드로가 칼을 빼어 가까이 있는 대제사장의 종인 말고의 귀를 잘랐습니다. 그 모습을 보신 예수님께서 베드로를 향해 ‘칼을 칼집에 꽂으라 아버지께서 주신 잔을 내가 마시지 아니하겠느냐’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에서 우리들이 주목해야 하는 것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의 죽음을 앞두고 고민하고 슬퍼하던 모습과 고뇌하며 기도할 때 땀이 핏방울이 되는 초조하고 불안해 하는 모습이 전혀 없어졌다는 것입니다. 아니 도리어 당신을 잡아가기 위해 온 600명의 로마 군사들을 향해 ‘내가 바로 너희들이 찾는 예수다’라고 당당하게 나가는 모습을 보이고 계십니다. 얼마나 당당하고 위엄이 있었는지 예수님의 그 기세에 눌려 로마 병사들이 뒷걸음치다가 넘어지기까지 했습니다. 

무엇이 이렇게 상황을 반전시켰습니까? 우리는 11절에서 그 답을 찾을 수가 있습니다. 한 번 다같이 읽어봅시다. ‘예수께서 베드로더러 이르시되 칼을 칼집에 꽂으라 아버지께서 주신 잔을 내가 마시지 아니하겠느냐’ 고난의 잔에 담긴 하나님의 뜻을 알고 그 고난의 잔을 받아 마시기로 결심하는 순간부터 전세는 역전되었습니다. 이것은 고난 앞에 당당하게 서는 순간부터 고난은 더 이상 고난의 힘을 가지지 못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고난은 그 고난을 두려워하는 사람에게는 공포감으로 더 크게 다가와 억눌러 일상생활을 할 수 없을 정도로 불안하고 초조하게 만듭니다. 자신감을 잃게 만들고 열등감에 쌓여 무기력하게 합니다. 그러나 그 고난의 의미를 깨닫고 고난 앞에 당당하게 서는 순간부터 고난은 더 이상의 영향력을 가지지를 못합니다. 그 고난 앞에 정면으로 서는 순간부터 나를 괴롭히던 고난은 새로운 변화를 갖게 됩니다. 그 고난으로 인해 억울해하고 원망하며, 불안해 하며 살았는데 도리어 그 고난 속에서 보람과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새로운 축복을 깨닫게 되는 기쁨을 느끼게 됩니다. 그래서 시편 저자는 119편 71절에서 ‘고난 당한 것이 내게는 유익이라 이로 말미암아 내가 주의 율례를 배우게 되었나이다’ 라고 고백합니다. 

고난이 찾아오는 원인은 여러 가지입니다. 우리의 허물과 죄로 인해 고난이 찾아올 수 있습니다. 내가 지은 죄와 성실하지 못한 삶의 결과로 찾아오는 고난입니다. 그 고난은 회개를 통해서 극복할 수가 있습니다. 회개는 단순한 입으로의 고백만이 아니라 그 죄의 자리에서부터 벗어나 새롭게 되는 것입니다. 다윗은 자신이 우리아의 아내 밧세바를 범한 죄로 인해 고난이 닥쳤을 때 그는 시편 51편에서 ‘주의 얼굴을 내 죄에서 돌이키시고 내 모든 죄악을 지워 주소서 하나님이여 내 속에 정한 마음을 창조하시고 내 안에 정직한 영을 새롭게 하소서’ 라고 자신의 죄를 통회 자복합니다. 죄로 인한 고난은 회개를 통해 하나님 앞에 새롭게 서며 하나님의 거룩함을 다시 깨닫게 됩니다. 

사단이 우리를 시험해 넘어뜨리기 위해 주는 고난이 있습니다. 예수님도 광야에서 40일간 금식기도하실 때에 사단으로부터 세 가지의 시험을 통해 고난을 겪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사단이 주는 고난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물리치며 이기셨습니다. 사단이 주는 시험은 나를 위한 것처럼 접근을 하지만 결국은 나를 넘어지게 합니다. 

사단이 우리를 넘어뜨리기 위해 주는 고난을 이길 수 있는 힘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예수님도, 요셉도, 다니엘도 그들이 어려운 고난에서 이길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믿는 믿음이었습니다. 히브리서 4:12에 보면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감찰하나니’ 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우리를 고난으로부터 이기게 하시는 힘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믿음을 정금 같게 하기 위해 주시는 고난이 있습니다. 아브라함에게 아들 이삭을 모리아 산에 데리고 가서 번제물로 드리라고 하셨습니다. 아들을 제물로 드린다는 것은 아브라함에게 고난 중의 고난입니다. 그러나 그 고난은 순종함으로 이길 수가 있고 순종함으로 이기는 고난 뒤에는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영광이 있습니다. 

봄이 오는 길목이 되면 어김없이 꽃이 피는 것을 시샘하여 다가오는 추위가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 추위를 꽃샘추위라고 합니다. ‘꽃샘추위에 중늙은이 얼어 죽는다’는 속담이 있듯이 피부로 느끼는 추위는 바늘처럼 살갗을 파고듭니다. 따뜻한 기온으로 기지개를 펴든 꽃들은 꽃샘추위로 인해 다시금 움츠러듭니다. 그러나 꽃샘추위는 꽃들에게 해로운 것만은 아닙니다. 꽃이 피기 시작할 때의 꽃샘추위는 피는 시기를 늦추고 활짝 핀 후에는 꽃의 수명을 더 오래가게 합니다. 꽃샘추위는 아무리 추워도 오래 가지 않습니다. 불어오는 따뜻한 남풍으로 인해 꽃샘추위는 사라지고 봄의 꽃들은 만발합니다. 

인생의 꽃샘추위라고 말할 수 있는 고난은 누구에게나 있습니다. 그 고난 앞에 움추려 들면 고난은 우리를 주관하여 불안하고 무기력한 모습으로 만듭니다. 그러나 그 고난 앞에 당당하게 서서 고난을 있는 그대로 수용하며 고난을 통한 새로운 뜻을 바라보는 순간부터 고난은 뒷걸음질 치며 물러갑니다. 사순절 다섯째 주간을 보내면서 예수님께서 600명의 로마 군사 앞에서 ‘내가 그 예수이다’라고 외치시는 당당함으로 그들을 뒷걸음질 쳐 넘어지게 하신 것처럼 고난 앞에 당당하게 섬으로서 고난을 극복하고 그 속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보는 은혜가 충만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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