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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행실을 선하게 (벧전 2:1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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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실을 선하게 (벧전 2:11-12)


옛날 한 나그네가 길을 가다가 날이 저물어 주막에 들었습니다. 이 나그네는 몹시 기억력이 나쁜 사람이었습니다. 나그네는 주막 주인에게 들고 왔던 돈자루를 맡기면서 말했습니다. 
“주인장, 이 엽전 전대를 좀 맡아두었다가 내일 아침 내가 떠날 때 혹시 잊고 가거든 일깨워서 갖고 가도록 해 주시오. 나는 건망증이 심하여 무엇이나 잘 잊어먹는답니다.”
“그러지요.”

주인은 돈 전대를 받고 기뻐하였습니다. 주인은 욕심이 많고 남의 것을 욕심내는 못된 사람이었습니다. 주인은 나그네에게 호박씨를 먹이기로 하고 동네에서 구해다가 나그네 방으로 갖고 가서 말했습니다.
“다른 것은 대접할 것이 없고 이것이나 까 잡수세요.”
영문을 모른 나그네는 호박씨를 받고 감사하다고 인사를 했습니다. 그리고 호박씨를 다 까먹었습니다. 주인은 문구멍으로 나그네가 호박씨 까먹는 것을 보고 좋아하였습니다.

다음날 아침 나그네는 아침밥을 먹곤 행장을 차리고 밖으로 나가더니 
“주인장, 여러 가지로 감사합니다. 어젯밤 맡겨둔 전대자루를 주십시오.” 하는 것이아닙니까? 주인은 돈 자루를 내어 주면서 혼자 중얼거렸습니다.
“호박씨를 먹어도 기억은 말짱하군.”
나그네가 떠난 후 몇 시간이 지나서 주인이 갑자기 소리를 칩니다.
“아니지, 호박씨를 먹였더니 기억력이 없어지는 게 사실이군, 숙박비를 안 주고 갔잖아.”

우리가 먼저 생각할 것은 우리들의 정체성입니다.
지금은 어린이들이 다양한 놀이 기구가 있어서 여러 가지 놀이를 하고 놉니다만 옛날 시골에서는 별로 놀이 기구가 없으므로 땅뺏기 놀이를 많이 하였습니다.
넓은 마당에서 금을 그어 놓고 돌을 튕겨서 튕겨지는 만큼 금을 그어서 네 땅 내 땅 하며 서로 많을 땅을 차지하려고 애를 쓰며 많이 차지하는 쪽은 기분이 좋고 그렇지 못한 쪽은 섭섭했습니다.
해가 지도록 땅뺏기를 하다가 어머니가 부르면 손을 털고 일어나서 그 동안 따먹었던 땅을 다 버리고 집으로 돌아갑니다. 많이 땄던 아이나 적게 땄던 아이나 아무 미련 없이 집으로 손을 잡고 돌아갑니다.
이스라엘 민족을 히브리 민족이라고도 합니다. 히브리라는 말은 본래 “건너온, 지나가는” 등 행인 또는 나그네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는 말입니다. 

“너는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 줄 땅으로 가라.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하게 하리니 너는 복이 될지라.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이라”고 하신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 아브람이 갈대아 우르에서부터 하나님이 약속하신 땅 가나안까지 오게 됩니다. 하지만 아직은 한 곳에 정착하여 살아가지 못 합니다. 

그가 택한 새로운 생업이 목자였기에 더욱 그렇습니다. 아브람에게 하나님은 아브라함이라는 새로운 이름을 주십니다. 그리고 약속하신 대로 그에게 많은 복을 주어 창대케 하십니다. 하지만 그 땅에 자기 소유라고 할 수 있는 땅을 얻게 된 때는 자기 아내 사라가 죽고 난 다음 무덤으로 쓰기 위한 땅이 필요해서입니다. 그때까지도 아브라함은 가나안 땅에서 철저히 나그네였을 뿐이었습니다.  

종종 여행을 할 기회가 있습니다. 집을 떠나 여행을 한다는 것은 새로운 설레임이 있습니다. 가족과 함께 하는 여행이든 아니면 혼자 하는 여행이든 여행을 하기 위해서는 준비할 것들이 있습니다. 갈아입을 옷가지로부터 시작해서 이것저것을 준비하다보면 여행 가방으로 하나 가득합니다. 특히 해외로 간다고 할 때는 음식이 입에 맞지 않을 때를 대비해서 고추장이라든가 김, 김치와 같은 부식류들을 준비하기도 하고 라면을 준비하기도 합니다. 

그러면 여행 가방은 점점 더 무거워지죠. 그런데 막상 여행을 하는 도중에 보면 그 짐들이 말 그대로 짐스럽습니다. 호텔에 들어가면 짐을 풀었다 다음 날 아침 다시 꾸려서 끌고 나갑니다. 가는 곳마다 그걸 끌고 다닌다는 것이 보통 수고가 아닙니다. 그래도 먹을 것은 조금씩 먹어서 없어진다고 해도 그곳에는 새로운 물건들이 자리잡기를 시작합니다. 소위 여행을 하면서 사게 된 기념품이라든가 선물과 같은 것들입니다. 

그래 그때마다 생각하기를 다음번에는 미련스럽게 짐을 많이 챙겨오지 않으리라고 합니다. 결국에는 짐을 싸느라 고생 그 짐을 일일이 끌고 다니느라 고생 그렇다고 버릴 수 있는 것도 아니잖습니까? 그래서 몇 번 여행을 통해서 이를 깨닫게 된 사람은 가능하면 짐은 작게 꾸리려고 합니다. 여행 중에도 꼭 필요한 것 아니면 짐이 될 만한 것은 사지 않으려고 합니다. 그게 여행하는 지혜입니다.
우리는 다 나그네요 행인입니다. 이 세상에 영원히 사는 것이 아니라 잠시 다녀가는 행인이요 나그네입니다. 땅을 뺏으며 놀던 어린이들이 저녁이 되면 다 손을 털고 집으로 돌아가듯이 우리는 때가 되면 반드시 누구를 막론하고 우리의 고향인 천국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나그네는 여행객이요 여행은 반드시 목적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 목적을 이룬 후에는 반드시 고향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고향으로 돌아가기 위해서는 그 목적을 다 이루어야 하며 또한 돌아가는 길을 벗어나거나 잃어서는 안 됩니다. 그렇다고 해서 반드시 목적을 다 이룰 수 있다는 것은 아닙니다. 정해진 시간과 일정을 따라서 움직여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다음을 기약하기도 합니다. 너무 멋진 풍경을 볼 때는 야 이런 곳에서 살고 싶다고 하지만 그런다고 해서 거기에 머물러 있지는 않습니다. 왜냐하면 돌아가야 할 집이 있기 때문입니다. 

또 하나 아무리 즐거워도 시간이 흐를수록 더욱 집이 그리워진다는 것입니다. 그래 빨리 집으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으로 가득합니다. 이윽고 집으로 돌아와 두 다리 쭉 뻗고 쉴 때 역시 내 집만큼 좋은 곳은 없다는 생각을 합니다. 여행은 이렇듯 집을 떠나 다시 집으로 돌아옴으로 마무리 됩니다. 그리고 필요하면 가본 곳이라 해도 다시 가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한번 흘러간 인생은 다시 살 수도 되돌릴 수도 없습니다. 방송을 보게 되면 생방송이 있고 녹화 방송이 있습니다. 녹화해서 하는 방송은 잘못된 것은 바로 될 때까지 다시 찍고 또 다시 찍고 합니다. 

그렇게 해서 완벽한 작품을 우리 앞에 선보입니다. 하지만 생방송은 그렇지 않습니다. 그래서 종종 실수를 합니다. 아무리 완벽하게 준비를 한다고 해도 마찬가지입니다. 인생은 그런 의미에서 녹화방송이 아닌 생방송과도 같습니다. 그것도 연극처럼 여러 번 공연할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단 한 번입니다. 더 큰 문제는 그 시간이 엄청 빠르게 흘러간다는 것입니다. 잠시의 쉼도 없습니다. 일은 하다가 힘들면 잠시 쉴 수 있지만 인생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날까지 결코 쉼이 있을 수 없습니다. 내가 힘들다고 해서 잠시 멈춰서 있는 그 순간에도 인생은 흘러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흘러가는 생활 속에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바로 "내가 누구인가?"라는 것입니다. 나의 정체성을 알아야 합니다. 또한 어디로 우리가 가고 있는지 알아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는 지혜있고 가치있는 삶을 살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거류민과 나그네 같은 너희를 권하노니 영혼을 거슬러 싸우는 육체의 정욕을 제어하라”고 말씀합니다. 옛날 성경에는 ‘나그네와 행인 같은 너희를 권하노니’라고 말했습니다. ‘우리의 인생이 나그네와 행인 같다’는 것입니다. 나그네는 타향살이를 하는 사람입니다. 낯선 사람인 것입니다. 시민권이 따로 있고 이민을 와서 사는 사람입니다. 행인이란 지나가는 길손입니다. 한 곳에 계속 있지 않고 잠시 머물다가 떠나가는 사람인 것입니다. 이와 같이 사람은 이 세상에서 영원히 사는 것이 아니라 잠시 머물다가 가는 존재인 것입니다.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집도 여관과 같은 곳입니다. 

그러나 이 세상에는 자기가 나그네인 줄도 모르고 사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지금 사는 집에서 천년만년 살 것처럼 많은 돈을 들여서 사치스럽게 꾸며 놓고 삽니다. 잠시 후에는 모든 것을 두고 떠나야 하는데, 그것도 모르고 많은 보화를 쌓아놓고 사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인생이 나그네와 행인임을 모르거나 잊어버리고 사는 사람들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자신이 나그네라는 것을 알지만, 목적지를 모르기 때문에 이 세상을 떠나면 모든 것이 끝난다고 생각하여, 그저 하루하루를 먹고 마시며 허랑방탕하게 삽니다. 이런 사람들 때문에 세상이 어두워지고 죄악으로 가득 차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나그네이든 아니면 행인이든 간에 그에게도 돌아갈 집이 있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집이 있으되 돌아갈 수 없는 노숙자와 같은 사람도 있습니다. 아니 집이 있으되 집에서 나와 떠도는 사람이 있습니다. 참으로 불쌍한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그런 사람들의 형편이 어떤가요? 말이 아니죠. 사는 게 사는 것이 아닌 사람들 더 큰 문제는 살아갈 희망조차 저버린 사람들도 있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들은 다릅니다. 

비록 우리가 세상에서 나그네로 살아가고 있지만 그래서 때로는 서러움도 당하고 어려움 가운데 마치 길을 잃은 사람처럼 방황하기도 하지만 그래도 우리들에게는 돌아갈 집 하나님 나라가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불러 자녀로 삼아 주셨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아버지의 집 하나님 나라가 바로 우리가 돌아갈 우리의 고향이요 우리들의 집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이 땅에서 살지만, 우리가 돌아갈 고향 하늘나라를 생각하며 사는 사람들입니다. 그러기에 이 땅이 아무리 좋아보여도 세상에 미련을 갖지 않습니다. 

세상에 아무리 좋은 것이 있다 하여도 그것에 목을 매지 않습니다. 그 모든 것들이 잠시 후면 다 사라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결코 세상에 귀를 기울이지 않습니다. 오직 날마다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며 삽니다. 이 세상 사람들이 귀하게 여기는 것을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하며 삽니다. 세상 사람들이 그렇게 좋다고 하고 재미있다고 하는데도 그냥 데면데면합니다. 오히려 어찌보면 세상 사람들을 더 이상하게 볼 뿐입니다. 

그게 그렇게 재미있을까 그게 그렇게도 목을 맬 일일까? 왜 그렇습니까? 진정한 그리스도인들은 이 세상의 향락을 부정하며 살기 때문입니다. 결코 이 세상을 사랑하지 않습니다. 세상의 향락을 즐기지도 않습니다. 이 세상에서 살아가지만 날마나 저 하늘나라를 사모하면서 살아갑니다. 그러므로 세상 사람들이 우리 그리스도인을 볼 때, 이상한 사람들로 보일 수도 있을 것입니다.

마태복음 24장 40~41절을 보면 장차 예수님이 재림하시는 날에는 이런 일이 일어난다고 했습니다. “그 때에 두 사람이 밭에 있으매 한 사람은 데려가고 한 사람은 버려둠을 당할 것이요, 두 여자가 맷돌질을 하고 있으매 한 사람은 데려가고 한 사람은 버려둠을 당할 것이니라.” 지금은 같이 일하고, 같이 먹고, 한 가족으로 같이 사는지 모르지만, 우리가 어떤 신앙을 가지고 어떻게 사느냐에 따라서 이렇게 달라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세상 사람들이 우리를 이상한 사람으로 보더라도 굳건하게 우리의 신앙을 지키며 사는 사람 되어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이 세상 사람들과는 달라야 합니다. 목적이 다르고, 가치관이 다르고, 취미와 행복관이 달라야 합니다. 이 세상에 살기는 하지만 이 세상을 영원한 곳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항상 마음을 하늘나라에 두고 사는 것입니다.
따라서 세상에 매이는 자가 아니라 오히려 주님만 바라보고 당순한 나그네요 행인이 아닌 목적을 가지고 여행하는 사람처럼 그래서 가이드를 따라 충실한 여행을 하는 여행객처럼 우리 삶의 안내자가 되시는 주님만을 따라 이 나그네 인생을 복된 인생이요 복된 나그네 길로 만들어 살아가는 하나님의 사람들 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다음으로 생각할 것은 나그네와 행인 같은 우리가 살아가는 방법은 어떠해야 하는가입니다.  
먼저는 영혼을 거슬러 싸우는 육체의 정욕을 제어하라고 했습니다.
우리의 영혼은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았기 때문에 하나님을 닮았고, 그래서 하나님을 생각합니다. 사람의 육신은 늙고 병들어 죽지만, 영혼은 죽는 것이 아닙니다. 영혼은 영원한 생명을 가지고 있습니다. 영혼은 이 땅에 매이지 않습니다. 현실에 얽매이지 않습니다. 항상 하나님을 바라보며 살려고 합니다.

그러나 육체의 정욕은 영혼을 거스릅니다. 영혼과 반대로 살려고 합니다. 영은 신령한 것을 기뻐하고 좋아합니다. 하나님을 찬양하고, 하나님 말씀을 듣고, 깨어서 기도하는 것을 좋아합니다. 하나님을 향하여 나아가기를 기뻐하고 좋아합니다. 그러나 육체는 먹는 것, 자는 것, 노는 것, 세상 향락을 좋아합니다. 그래서 영혼을 거스르고, 영혼과 싸우는 것입니다. 육체의 정욕을 따라 살게 되면, 영혼이 피곤해지고 병들게 됩니다. 결국에는 멸망을 당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육체의 정욕을 제어하라는 것입니다. 

영에 속한 사람은 항상 말씀을 사모하고 말씀대로 살려고 합니다. 말씀대로 살면 기쁨이 있고, 평강이 있고, 행복함이 있습니다.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살게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을 즐기고, 깨어 기도하기를 힘쓰고, 하나님의 일을 즐거워합니다. 그러나 육에 속한 사람은 먹고, 마시고, 노는 것을 좋아합니다. 육체의 쾌락을 좋아합니다. 세상의 쾌락을 좋아합니다. 

영혼을 거스르면서 육체의 정욕을 따라 산다면, 병든 인생이 되고 맙니다. 건강한 영혼이 이성을 지배해야 건강한 이성을 갖게 되고, 건강한 이성이 육체를 지배해야 건강한 삶을 살게 됩니다. 그런데 그 반대로 육체가 이성을 지배하게 되면, 병든 이성이 되고, 병든 이성이 영혼을 지배하게 되면 그 사람은 완전히 병이 들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도 베드로는 육체의 정욕을 제어하라고 우리에게 말합니다.
계속해서 나그네와 행인 같은 우리는 행실을 선하게 가져야 한다고 말씀합니다.

“너희가 이방인 중에서 행실을 선하게 가져 너희를 악행한다고 비방하는 자들로 하여금 너희 선한 일을 보고 오시는 날에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려 함이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선’은 아름다운 마음으로 착한 일을 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마음을 가지고 베풀면서 사는 것입니다. 매우 아름답고 매력적이고, 사랑스러운 것입니다. 철저히 하나님의 말씀대로 순종하여 사랑을 실천하는 것입니다. 섬기기를 기뻐합니다. 베풀고 나누며 붙들어주고 세워줍니다. 함께 하며 격려합니다. 자존감을 세워주며 살려줍니다. 그도 그럴 것이 하나님이 자녀 삼으신 보배로운 존재들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소유된 백성 하나님의 보배로운 백성을 누가 감히 무시할 수가 있고 멸시할 수가 있고 외면할 수 있단 말입니까? 더욱 자녀들의 마음속에 함께 계신 성령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 사랑의 열매가 가득하도록 만들어 가시는데 어찌 사랑하지 않을 수가 있단 말입니까? 주님이 기뻐하는 선은 죽은 자를 살리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는 마음이 죽은 자들이 많이 있습니다. 아니 죽지 못해 몸부림을 치는 사람들도 많이 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이미 그 마음이 죽었습니다. 아니 그 영이 죽어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부르실 때 “병든 자를 고치며 죽은 자를 살리며 나병환자를 깨끗하게 하며 귀신을 쫓아내되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라”고 하셨습니다. 그게 바로 우리들이 해야 할 선한 일입니다. 세상 사람들에게는 미련한 것으로 보일지 몰라도 그러나 생명을 건져 구원하는 일이야말로 가장 선하고 아름다운 일입니다. 왜냐하면 세상 모든 것을 다 가지고도 살 수 없는 것이 영원한 생명이기 때문입니다. 당연히 돌아갈 고향 하나님 나라를 사모하며 살아가는 ‘나그네와 행인 같은 믿음의 사람들’은 아름답고 사랑스런 나그네로 살아야 합니다. 나그네의 삶을 사는 동안 선을 행하면서 아름답게 살아야 합니다. 잠깐 머물다가 떠날 인생이기에 더욱 진실하게 살고, 선하게 살고, 바르게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남은 시간이 얼마나 되는지 모릅니다. 

미국의 J. C. 페니라고 하는 사람은 미국에 체인점을 이천 개나 갖고 있는 부자로, 58세에 파산하였지만 신앙으로 시련을 극복한 사람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가 역경을 딛고 일어서서 새 출발을 할 때, ‘너희가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남을 대접하라’는 황금률을 자신의 사업과 생활의 표어로 정하였습니다. 서서히 사업이 일어나면서 그는 교회와 사회사업에 많은 돈을 바쳤습니다. 은퇴 목자를 위해 플로리다에 백 가구의 주택을 지었습니다. 그는 말년에 이런 고백을 하였습니다. “전에는 내가 피땀 흘려 번 돈이니 마음대로 할 권리가 있다는 생각에 젖어 있었습니다. 그러나 신앙을 가진 다음부터는 주는 기쁨이 움켜지는 기쁨보다 훨씬 큰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 페니의 고백이 저와 여러분의 고백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시편 90편 10~12절에 보면, “우리의 연수가 칠십이요 강건하면 팔십이라도 그 연수의 자랑은 수고와 슬픔뿐이요 신속히 가니 우리가 날아가나이다. 누가 주의 노여움의 능력을 알며 누가 주의 진노의 두려움을 알리이까 우리에게 우리 날 계수함을 가르치사 지혜로운 마음을 얻게 하소서”라고 했습니다. 
인생은 짧습니다. 사랑하면서 살아도 모자라는 소중한 이 시간에, 사람들과 싸우고 미워하며 살아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잠시 머물다 가는 이 세상에서 선한 행실을 가짐으로 아름답고 매력 있는 그리스도인으로 살아야 합니다. 오히려 머물렀던 그 자리도 아름답게 가꿀 필요가 있습니다. 

하지만 아무리 우리가 아름답게 산다고 해도 ‘그리스도인들이 악행한다’고 비방하는 자들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렇기에 오늘 본문에서 “너희가 이방인 중에서 행실을 선하게 가져 너희를 악행한다고 비방하는 자들로 하여금 너희 선한 일을 보고 오시는 날에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려 함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따라서 아무리 누가 우리를 비방하고 욕한다고 해서 더 나아가 심하게 모욕하고 못살게 군다고 해도 그러기에 더욱 항상 선하게 살아야 합니다. 

이 세상에는 그리스도인들에 대해서 싫어하고 비방하고, 예수 믿으면 무조건 미워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물론 그리스도인들 중에 비방받을 짓을 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교회는 많은 사람들이 모이는 곳이기 때문에 그 중에는 거듭나지 못한 사람들도 있고, 아직 옛 사람의 습관을 버리지 못한 사람도 있어서 세상 사람들에게 비방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은혜받은 성도들은 그 삶이 참으로 아름답습니다. 알게 모르게 선을 베풀면서 살아갑니다. 이 어두운 세상을 밝은 세상으로 만들기 위해 희생 봉사하며 사는 사람들이 많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애써 그런 섬김을 드러내려고 하지를 않습니다. 오른 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고 주님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그러기에 욕을 먹어도 당당합니다. 

우리는 모두는 머지않은 장래에 이 세상을 떠날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가야 합니다. 그래서 주님 앞에 서야 합니다. 저와 여러분은 주님 앞에 설 때, 어떤 모습으로 서길 원하십니까? 우리의 나그네 생활은 많이 남아 있지 않습니다. 우리의 남은 시간을 썩어질 육체를 위하여 살지 않길 바랍니다. 이제는 곧 떠나게 될 세상을 너무 사랑하지 마십시오.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것이 모두 내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것이요, 하나님이 우리에게 맡기신 것입니다. 그것조차 결국은 다 두고 떠나게 될 것입니다. 아무쪼록 저와 여러분은 남은 시간을 착하고 아름답게, 선한 일을 많이 하면서 살다가 주님을 만나는 성도들이 되시길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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